시대를 잘못 예측한 부분도 있고, 요즘의 시각으로 보면 혁명적 감상주의에 빠진 부분도 있었지만 대개는 손을 대지 않았다. 《빨치산의 딸》은 내 소설이라기 보다 소설 형식을 띈 역사서다. 격동의 삶을 살아 온 빨치산이나 90년 당시 변혁 세력의 현실 인식이 잘못된 측면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것 역시 충실하게 기록되야 하고, (....) 이제 와 생각하니 우리에게 ‘사회주의‘는 ‘지금보다 더 나은 무엇‘을 가리키는 추상 명사였다. (...) 역사를 위해 목숨을 걸었고, 독재 정권 하에서 죽음보다 더한 모멸과 시련을 견뎌 온 그 분들이 역사에 바라는 것은 따스한 시선 정도일 것이다. 이 책이 그분들의 쓸쓸한 노년을 비추는 몇 줌의 따스한 시선이라도 만들 수 있으면 좋겠다. (2005년 복간하면서 쓴 작가 서문)

《빨치산의 딸》은 1990년 엄혹한 시기에 발간과 동시에 작가는 불구속 기소되고 출판사 대표는 구속, 당연히 책도 모두 회수되어 읽을 수 없는 책이 되었다. 2005년 필맥에서 복간했다.

프롤로그에 정지아 작가의 성장 과정과 부모님이 빨치산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 사실을 삶 속에서 받아들이기까지의 간략한 과정이 나온다. 《아버지의 해방일지》에서 아버지를 추억하는 부분과 겹치는 부분들이 있다.

밝혀지지 않은 자료들도 있겠지만 통상적으로 1945년 일제로부터의 해방부터 한국 전쟁의 개전과 휴전까지의 과정들에 대해 많은 것들이 알려졌다. 《빨치산의 딸》을 읽으면서 이 무렵이면 대략 이랬고, 이런 정세였고, 하는 것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를테면 6.25가 터졌을 때 드디어 해방이라고 만세를 부르는 빨치산의 모습 바깥에서 그 전쟁이 가져 온 풍경들이 함께 떠 오르는 거 같은. 사회주의와 김일성이 동의어였던 당시의 인식이 얼마나 잘못 된 것인지도 우리는 안다. 북쪽이 밀리는 전쟁 말미의 급박한 와중에도 박헌영과 그와 가까운 이들을 미제의 간첩이라고 숙청했을 때, 김일성은 기왕에 가졌던 삼팔선 이북이라도 잃어버리지 말아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을 것이다. 이후, 남한 정권도 오랫동안 사상의 자유를 억압하며 많은 억울한 죽음을 만들어냈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빨치산이 되는 이유는 다양하지만 그들 모두는 민중들이 배 곯지 않고 억울하게 맞아죽지 않고 자유롭고 평등한 세상을 만들고 싶어했다. 시대에 따라 구체적인 요구가 조금씩 달라진다 한들 좋은 세상을 만들고 싶은 그 마음은 지금이라고 다르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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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2-11-12 21: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분들이 원한건 그저 모두가 배곯지 않는 평등한 세상이었을 뿐인데 그 댓가가 지나치게 가혹했죠. 저는 빨치산의 딸은 안 읽었는데 이번에 읽은 아버지의 해방일지가 너무 슬프더라구요. 그저 살아있는 것이 너무 힘든 삶도 있겠구나. 그걸 일상속에 웃음으로 견뎌내야 하는 삶이란 어떤 것이었을까 뭐 그런 여러가지 생각이 많이 들어서 리뷰도 못쓰겠더라구요. 제가 안써도 베스트셀러가 돼서 다행이란 생각도 들고요.

호우 2022-11-12 23:08   좋아요 1 | URL
혹독했죠. 정지아 작가 글 읽어보니 지역에서 조금만 멀리 가도 경찰에 일일이 알려야 했대요. 평생을 감시받고 사셨더군요. 참 안타까운 일이죠. 그래도 그 분들은 누구 탓도 안 하고 두루 베풀고 사셨고. 안타깝죠.
 
빨치산의 딸 2
정지아 지음 / 필맥 / 2005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생리문제는 여자들에게 가장 골치 아픈 문제였다. 배가 아픈 것은 둘째 치고천이 넉넉한가.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있는가. 그 몸으로 눈구덩이 위에쓰러져 자고 며칠 밤을 새우며 꼬박 행군을 하고 비옷도 없이 장맛비를고스란히 맞아야 했다. 장거리 행군 때는 물론이고 낙동강 전선에서는 밤낮도 없이 매일매일 계속되는 전투에 쫓기느라 용변도 제대로 못 볼 때였으니 그 고통은 차마 말로 옮길 수 없을 지경이었다. 오죽했으면 아래가다 헐어 여자들의 걸음걸이가 모두 오리걸음이 됐는데 미얄스러운 박종하가 계속 여자들의 걸음걸이를 흉내 내며 따라다니는 통에 웃음판이 벌어지기도 했다. 양봉순 같은 사람은 52년 여름 무렵엔 아예 생리가 끊겼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가장 커다란 고통이었다. 여성과 예술인을 특별히 우대하는 남부군이라 일선 지휘자들이 나름대로는 신경을 써주었지만 특별대우를 해준다고 해도 거부하는 여성들이 많았다. 남자들보다 몇 배나 더 열악한 신체조건을 가지고도 남부군의 여성들은 남성과동등하게 조국해방을 위해 싸웠던 것이다.  - P350

기다리던 소식 대신 휴전협정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정전은 그들이 바라던 바였다. 51년 6월 23일 소련 외상 말리크가 유엔에서휴전을 제의한 다음부터 남한의 전 빨치산들도 정전을 요구하며 싸워왔다. 그러나 휴전협정에서 빨치산들의 거취문제는 다뤄지지 않았다. 죽음과 함께 생활했던 지난날이지만 이제 정말로 남은 것은 혁명가다운 장렬한 최후뿐이었다. 전쟁은 끝났다. 빨치산들에게는 바늘 하나 꽂을 만한해방구도 없었다. 자기들이 피를 흘리며 싸웠던 그 땅에서 최후까지 싸울수밖에.

남한 전체를 통틀어 그 무렵 얼마쯤의 빨치산이 남아 있었을까. 경남도당에는 이영회의 57사단까지 포함해서 쉰 명도 되지 않았고 남부군 역시 비슷한 숫자였다. 전남만 백여 명 이상 남아있을 뿐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휴전협정에서 빨치산들의 거취문제가 거론될 것으로 기대했다가낙담하기도 했다. 휴전회담이 빨치산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건 이제 몇 가지 선택이 그들 앞에 기다리고 있었다. 첫째는 혁명투쟁을 포기하고 살기위해 자수하는 방법이었고, 둘째는 언젠가 다시 올지도 모르는 해방을 위해 지하로 숨어들어 유격투쟁을 지하조직 사업으로 바꾸는 것, 셋째는 사라진 꿈과 더불어 최후까지 싸우다 전멸하는 것이었다. 두 번째 방법은수차례 연구하고 실시했으나 성공의 가능성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그때까지 살아 있던 대다수의 빨치산들은 몇 사람을 제외하고 세 번째를 선택했다. 이전까지는 해방의 그날이 목전에 있음을 믿고 싸웠다. 이제는 멀어진 해방을 위해 목숨을 걸어야 했다. - P3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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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 그렇게 두려운 것일까? 그녀도, 이현상부대의 누구도 그렇게죽음을 두려워해본 적이 없었다. 빨치산에 죽음이란 살아있다는 것만큼친숙한 것이기도 했다. 사람은 누구나 죽음의 의미를 모를 때 엄청난 공포를 느낀다. 그러나 죽음의 의미를 아는 순간 죽음은 곧 또 다른 삶인 것이다. 월급을 받고 돈 때문에 남의 나라 전쟁터에 팔려온 미군들이 자기 - P237

죽음의 의미를 알았을 리 없다. 그들에게 만리이국에서의 전사는 그야말로 자기 삶의 끝이며 개죽음 외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그러나 빨치산은 달랐다. 그들은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죽음은미 제국주의에 짓밟힌 조국의 해방이며 억압당하는 삼천만 인민의 해방을 약속하는 징표였다. 어쨌든 미군과 몇 번 싸워보고 미군 포로를 겪어본 이현상부대는 그 뒤로 미군만 보면 지던 싸움도 승리로 이끌 정도였다. ‘저 몰랑한 노란개도 못 잡아서야 백전불굴의 빨치산이라는 이름이아깝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나 포로가 되면 무릎을 꿇고 앉아 타는냄새가 나도록 손을 비비며 살려달라고 애원하던 미군 뒤에는 고도로 발전된 기술과 엄청난 무력, 그리고 군수품을 팔아 부를 축적하는 군수재벌을 가진 자본주의의 종주국 미국이 있었다. 이현상부대는 그걸 몰랐다.
백 명의 이현상부대가 만 명의 미군 부대를 이길 수는 있지만 ‘미국‘은이길 수 없다는 것을 말이다.
낙동강을 사이에 둔 치열한 전선은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인민군은끊임없이 낙동강을 도하하려고 시도했지만 번번이 실패로 끝났다. 미군에게 낙동강은 도저히 포기할 수 없는 마지막 보루였다. 간혹 낙동강 도하에 성공한 인민군 소부대들은 전멸을 당했다. 시체는 손을 대면 탄가루처럼 바스러졌다. 원자탄의 일종인 네이팜탄에 희생된 것이었다.
- P238


비록 후퇴 중이긴 했지만 낙동강에서 대단한 전과를 기록한 이현상부대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기세였다. 평양으로 간다는 사실에 그들은 가슴이 부풀었다. 삼팔선을 넘기만 하면, 평양에만 가면, 유대인들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찾아가듯 그들은 자신들의 꿈과 휴식이 이루어질그곳으로 간다고 생각했다. 이현상부대는 그때까지도 소식이 없는 이영회부대를 위해 백묵으로 갈림길의 큰 바위마다 표지를 남겨놓았다.
지리산 빨치산 후속부대는 본대를 따르라!"
본대의 애타는 기다림은 빗물에도 쉽게 지워지지 않고 오랫동안 바위위에 남아있었지만 끝내 후속부대는 본대를 따르지 못했다. 그들이 젖과꿀이 흐르는 가나안에 결국 도착할 수 없었듯이.
- P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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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2-11-11 20: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작품이 <아버지의 해방일지>
의 원류가 된 작품일까요.

문득 한 번 만나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목부터 짠~합니다.

호우 2022-11-12 10:20   좋아요 0 | URL
그렇다고 볼 수도 있겠네요.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빨치산의 딸, 그 후‘ 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어요.

서니데이 2022-11-11 20: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최근에 나온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읽어서인지, 이 책이 연장선에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잘 모르는 책이었는데, 책 앞부분의 작가 소개에서 보았거든요.
호우님, 오늘은 따뜻했지만 내일 비가 오면 추워진다고 해요.
따뜻한 주말 보내시고, 좋은 금요일 되세요.^^

호우 2022-11-12 10:24   좋아요 1 | URL
댓글 쓰는 지금은 토요일입니다. 지금 저희 동네는 맑습니다. 저녁에 비 소식이 있군요. 오후에는 나가봐야 하는데. 서니데이님, 포근한 주말 보내세요^^
 

여성들은 그 어느 때보다 감시를 받는 집단을 이뤘다. 그녀들의 행동, 취향, 욕망은 이야기의 단골 주제가 됐고, 불안해 하면서도 의기양양해 하는 이들의 관심의 대상이 됐다. (...) 페미니즘은 유머 없는 보복의 낡은 이념이었으며, 젊은 여성들에게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았고,그녀들은 페미니즘을 거만한 시선으로 바라보면서 그녀들이 가진 힘과 그녀들이 평등하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들은 자신들의 인생에 상상의 형체를 부여할필요가 있다는 듯이, 여전히 남자들보다 더 많은 소설을 읽었다.) ≪남자들이여, 여성들을 사랑해 줘서 고맙습니다≫는 한 여성 신문의 제목이었다. 여성들의 투쟁은 잊혔고, 공식적으로 되살릴 수 없는 기억만이 남았다.여자들은 피임약으로 인생의 주인이 되었으나, 그것을누설하지는 않았다.

주방에서 낙태를 했고 이혼을 한 우리들, 여성 해방을 위한 우리의 노력이 다른 이들에게 쓰임이 있을 것이라고 믿었던 우리들은 피로감에 빠졌다. 여성의 혁명이 일어나기는했었는지 이제는 알 수 없었다. 50세가 넘어서도 계속 생리를 했지만 이전과는 색깔도 냄새도 다른, 헛된 피었다. 그러나 죽음까지 유지할 수 있었던 이 규칙적인 시간의 리듬이우리를 안심시켰다.  - P217

그녀의 퇴직, 그보다 더 일찍 찾아온 폐경기처럼 오랫동안그것은 미래에 대한 상상의 한계의 극한을 의미했다. 수업내용 요약과 수업 준비를 위한 독서 노트가 어느 날 갑자기아무 필요 없어졌고, 텍스트를 설명하기 위해 깨우친 박식한 언어는 더는 쓰지 않게 되면서 그녀 안에서 지워졌다-그녀가 어느 문체의 명칭을 생각해내지 못하고 찾을 때, 그녀의 어머니가 이름을 잊어버린 꽃을 두고 ≪이름을 알았었는데≫라고 말했던 것처럼 받아들여야만 했다. - P294

그녀 나이대의 모든 여성들의 가슴에서 깨어난 듯한 암. 알에 걸린 것이 거의 당연한 일처럼 느껴졌다. 가장 두려운 일은 일어나기 마련이니까. 그녀는 항암치료로 머리카락을 모두 잃었고, 같읁시기에 첫째 아이의 배우자의 뱃 속에 아이가 생겼다는 소식을 듣게 됐다. ㅡ초음파로 여자 아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이 에상에서 자신이 빠르게, 지체없이 대체된다는 사실이 그녀를 매우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 P294

옛날 학창 시절, 자신의 방에서 글쓰기를 꿈꿨을 때, 그녀는 점술가들처럼 신비로운 것들을 밝히는 낯선 언어를 찾아내기를 희망했었다. 책을 완성하는 것을 깊은 곳에 있는 자신의 존재를 타인들에게 알리는 것으로, 높은 업적으로, 영광으로 상상하기도 했다 - 어릴 적 그녀가 자고 일어나면스칼렛 오하라가 되어 있기를 바랐던 것처럼 ≪작가≫가 되기 위해서 무엇을 내놓지 않을 수 있었을까. 그 후로, 40여명의 학생들이 있는 시끄러운 학급에서, 슈퍼마켓의 카트 뒤에서, 공원의 벤치 유모차 옆에서 이 꿈들은 그녀를 떠났다.

영감을 받은 단어들이 마법을 부려 등장하는, 형언할 수 없는 세상은 없으며 그녀는 자신을 분노하게 만드는 것들에대항할 수 있다고 믿고 있던 유일한 도구, 오직 자신의 언어안에서만, 모두의 언어 안에서만 쓸 것이다. 그러므로 써야할 그 책이 투쟁의 수단인 것이다. 그녀는 이 야망을 버리지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 어느 때보다 지금이 가장 절실하며, 이제는 보이지 않는 얼굴들, 사라진 음식들이 가득 놓인 식탁보를 감싸는 빛을 포착하기를 원한다. 어린 시절 일요일의 이야기 속에 이미 존재했던 경험한 것들 위에 금세 쌓이기를 멈추지 않았던 그 빛, 지나간 시간의 빛을 구원하기를 - P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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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이 시기에, 그녀는 이혼 후 두 아들과 함께 살펴
‘애인을 만난다. 9년 전에 샀던 집과 가구들을 팔아야 했지만, 스스로 놀랄 정도로 초연했다. 그녀는 물질의 상실과 자유 속에서 산다. 마치 결혼은 그저 막간극이었던 것처럼, 두고 온 사춘기 시절을 되찾은 듯한 느낌이다.

 그때와 같은 기대, 하이힐을 신고 약속장소로 달려가며 숨을 헐떡이는 그방식, 사랑 노래에 민감한 그때와 같은 태도를 되찾는다. 같은 욕망들, 그러나 이제 그녀는 그 욕망들을 더 완벽하게 충족하고 싶어 하는 마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섹스를 하고싶다고 스스로 말할 수 있다. 이제 자신의 육체의 절대적인동의 안에서 ≪성적 혁명≫을 이루고, 이미 오래돼 버린 68년 이전의 가치를 뒤집으며, 그녀의 나이가 갖고 있는 연약한 찬란함을 너무도 분명히 자각한다. 

그녀는 늙는 것이, 피의 냄새를 그리워하게 되는 것이 두렵다. 최근에는 행정부로부터 2000년까지 현 학교 교사로 임명한다는 편지를 받고몸이 굳어버렸다. 여태껏 그 날짜에는 현실성이 없었다. - P196

되찾은 고독 속에서 부부 생활이 몽롱하게 만들었던 생각과 감정들을 발견했기 때문에, 1940년과 1985년 사이‘여자의 운명 같은 것에 대한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그녀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역사 속에서 그녀의 내면과 그녀의 외부에 흐르는 시간을 느끼게 해주는 모파상의 인생같은 어떤 것, 존재와 사물들의 상실, 부모, 남편, 집을 떠나는자식들, 팔아 버린 가구들 속에서 끝이 날 <완전한 소설>을 그녀는 손에 쥐어야 할 다수의 물건들과 현실 속에서 자신을 잃어가는 게 두려웠다. 그녀는 어떻게 중요한 사건들과 잡다한 사건 그녀를 오늘날까지 이끌어 온 수천 번의 나날들이 쌓인 이 기억들을 정리할 수 있을까. - P198

우파는 돌아왔다. 그들은 과감히 해체했고 민영화했으며, 해고에 필요한 행정적 절차와 재벌세를 없앴다. 그것은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드는 데 충분하지 않았고, 우리는 다시 미테랑을 좋아하게 됐다. - P201

미테랑의 재선이 우리를 안심시켰다. 우파 정권 아래에서 항상 분노하며 사는 것보다 좌파 정권 아래에서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는 편이 나았다. 세월의 불가역성 속에 이 대통령 선거가 큰 변화의 좌표가 되지는 않을 것이나, 다만 피에르 데프로주가 암으로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었던 일부러미테랑을 뽑게 하려고 만든 것 같은 영화 속 그로제이유, 뒤케스노이와 함께 그토록 오랫동안 웃은 적이 없었던, 어느‘봄날의 배경은 될 수 있었다. 우리는 때마침 뜻밖에 일어난사건들 - 레바논 인질들의 석방, 끝이 없는 이야기, 우베아동굴에서의 카낙 학살 - 그리고 시락이 미테랑에게 자신의눈을 똑바로 보며, 분명 거짓인 것을 진실이라고 표명하라고 명령하는 장면을 조마조마하며 지켜보다가, 미테랑이 평소 습관대로 눈을 깜빡이지 않았음에 안심했던 티브이 토론만을 겨우 기억할 것이다.
실질적으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최저통합수단으로 가난을 정비하는 것과 빈민촌 주택단지 계단에 페인트를새로 칠한다는 약속-소외계층이라고 불릴 만큼 충분히다수인 주민들의 생활 정비 - 만이 있었을 뿐이다. 자비는제도화됐다.  - P209

상상 그 이상의 일들이 일어났고 ㅡ우리는 불멸의 공산주의를 믿었다ㅡ우리의 감정은 현실을 따라잡지 못 했다. 커다란 사건들을 감당하지 못 하는 느낌이었으며, 그런 순간을 살고 있는 동독인들을 부러워했다. 그 후, 우리는 서독의 상점안에서 그들이 서두르는 모습을 보았고 그들의 비참한 옷과 복대 가방을 불쌍히 여겼다. 소비의 경험이 없는 그들은 측은한 마음을 불러일으켰으며,
물질적인 재산에 대한 자제도 분별도 없는 이 집단적인 굶주림의 광경은 우리를 언짢게 했다. 그들은 우리가 그들을떠올리며 꾸며낸, 순수하고 추상적인 자유에 걸맞은 태도를보이지 않았다. ≪공산주의의 멍에를 쓴> 민족에 대해 습관처럼 느꼈던 비탄은, 그들이 자유를 쓰는 사용법에 대한비난 섞인 관찰로 바뀌었다. 우리는 행복과 ≪자유로운 세상을 가졌다는 우월감을 만끽하기 위해 소시지와 책을 위해 줄을 섰던, 모든 것을 박탈당했던 그들을 더 좋아했다. - P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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