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의미를 알았을 리 없다. 그들에게 만리이국에서의 전사는 그야말로 자기 삶의 끝이며 개죽음 외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그러나 빨치산은 달랐다. 그들은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죽음은미 제국주의에 짓밟힌 조국의 해방이며 억압당하는 삼천만 인민의 해방을 약속하는 징표였다. 어쨌든 미군과 몇 번 싸워보고 미군 포로를 겪어본 이현상부대는 그 뒤로 미군만 보면 지던 싸움도 승리로 이끌 정도였다. ‘저 몰랑한 노란개도 못 잡아서야 백전불굴의 빨치산이라는 이름이아깝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나 포로가 되면 무릎을 꿇고 앉아 타는냄새가 나도록 손을 비비며 살려달라고 애원하던 미군 뒤에는 고도로 발전된 기술과 엄청난 무력, 그리고 군수품을 팔아 부를 축적하는 군수재벌을 가진 자본주의의 종주국 미국이 있었다. 이현상부대는 그걸 몰랐다.
백 명의 이현상부대가 만 명의 미군 부대를 이길 수는 있지만 ‘미국‘은이길 수 없다는 것을 말이다.
낙동강을 사이에 둔 치열한 전선은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인민군은끊임없이 낙동강을 도하하려고 시도했지만 번번이 실패로 끝났다. 미군에게 낙동강은 도저히 포기할 수 없는 마지막 보루였다. 간혹 낙동강 도하에 성공한 인민군 소부대들은 전멸을 당했다. 시체는 손을 대면 탄가루처럼 바스러졌다. 원자탄의 일종인 네이팜탄에 희생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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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후퇴 중이긴 했지만 낙동강에서 대단한 전과를 기록한 이현상부대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기세였다. 평양으로 간다는 사실에 그들은 가슴이 부풀었다. 삼팔선을 넘기만 하면, 평양에만 가면, 유대인들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찾아가듯 그들은 자신들의 꿈과 휴식이 이루어질그곳으로 간다고 생각했다. 이현상부대는 그때까지도 소식이 없는 이영회부대를 위해 백묵으로 갈림길의 큰 바위마다 표지를 남겨놓았다.
지리산 빨치산 후속부대는 본대를 따르라!"
본대의 애타는 기다림은 빗물에도 쉽게 지워지지 않고 오랫동안 바위위에 남아있었지만 끝내 후속부대는 본대를 따르지 못했다. 그들이 젖과꿀이 흐르는 가나안에 결국 도착할 수 없었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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