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파란여우 > 신념으로 거듭 태어나는 서평 공책
‘리뷰노트’, 서평공책을 다 썼다. 서너 장 남았으니 묵직한 책은 두 권, 얇은 책은 세 권 정도 읽으면 공책이 꽉 찬다. 연필로 얌전히 써내려가다가 중간부턴 휙휙 날리는 글씨체가 되었다. 동그라미 표시와 별표, 가로 두 줄로 삭제한 것, 그 옆에 쪼그만 글씨로 화살표 방향 따라 쓴 것까지 별의 암호는 다양하다. 오늘 책상에 앉아 공책을 한 장 한 장 넘기면서 그동안 읽은 책을 회상했다. 책을 회상하는 일이 내게 생기다니. 그러니까 나도 이 공책 한 권만 있으면 천 페이지가 넘는『젠틀 매드니스』나,『미국 민중사』같은 큰 책을 비롯해서 알랭 드 보통의『동물원에 가기』,『이건희 시대』, 『야스쿠니 신사』까지 추억하는 셈이 된다. 길거나 짧은 리뷰, 무겁거나 가벼운 책, 사회과학과 동화까지 공책 한 권에 알록달록 무늬가 새겨져있다. 시간의 조각도로 새겨 넣은 독서의 흔적 따라 공책도 나이를 먹고, 책상처럼 모서리가 닳았다. 닮은 것 끼리 다정해서 스스로 흐뭇하다. 30대에 나를 키운 8할이 ‘융융한 외로움’이었다면 40대에는 책이 나를 키워주는 유모가 되었다. 한 권의 책을 다 읽고 나면 세상의 닫힌 문들이 하나씩 열렸고, 한 권의 공책을 다 썼으니 눈 안쪽의 어둠이 서서히 걷힌다. 지금 소망은 나이 들어서도 계속 책을 읽는 일이다. 많은 세상을 만나고 경외로 가득 찬 공부를 하는 즐거움을 놓지 않는 일, 가난한 영혼에게 스스로 소망한다. 한 수레의 책을 읽어야 대장부가 된다고 하지만 다 읽고나면 문을 열고 뚜벅뚜벅 나가야 한다. 저 많은 글씨는 신념의 도구로 거듭 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