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의 목소리 - 그림이 들려주는 슬프고 에로틱한 이야기
사이드 지음, 이동준 옮김 / 아트북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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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그림을 좋아한다. 좀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보는 것을 좋아한다. 그림에 대한 지식은 거의 갓난쟁이 수준이고 심미안을 가진 것도 아니어서 그림을 볼 때면 언제나 "우와. 대단하다"란 말만 연달아 늘어놓곤 한다. 하지만 책 읽는 것을 좋아해서인지 상상력만은 풍부해서 그림 속 인물의 손가락 끝, 혹은 얼굴에서 느껴지는 미세한 떨림을 보며 많은 이야기들을 지어내곤 했었다. "저 둘은 사랑하는 사이임에 틀림없어.", "얼굴 표정으로 볼 때 뭔가 꿍꿍이가 있는 것 같은데..."등의 소소하고 시시콜콜한 이야기들 말이다. [그림의 목소리]라는 책은 그림을 보며 사이드란 저자가 이런저런 생각들을 풀어 낸 책이었다. 과연 누구의 상상력이 더 뛰어날까란 시도해 볼 필요가 없었던 승부욕에 불타올라 의기양양하게 첫 장을 넘겨들었다.

 표지에서 진실을 갈구하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던 한 청년, 조심스레 그의 입을 덮고 있던 띠지를 벗겨보니 진한 와인 색 아래로 그의 꾹 다문 입술이 보인다. 그간 그토록 목소리를 내고 싶어도 계속 거부되어 왔던 것처럼 그의 입술은 꾹 다물어져 있었지만 왠지 그 안타까움만은 고스란히 나에게로 전해지는 느낌이었다. 이렇게 시작된 그림들과의 만남. 그것은 상당히 조심스럽고 예민한 일이었다. 혹여 내가 그들의 꿀맛 같은 단잠을 깨울까봐, 눈물 나도록 부러운 그 조용한 평화를 범하게 될까 두려웠던 것이다.

책을 읽는 동안 내가 종전에 알던 그림들이 거의 없다는 사실에 한 번 놀라고 또 그 글의 추상함에 놀랐다. 에드워드 호퍼의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은 밝고 선명한 색채 속에서 그 시대의 사람들이 느꼈을 공허함과 혼란이 함께 묻어나는 신비로운 작품이었다. 그 글에 대한 감상 역시 그리 어렵지 않게 쓰여 있어서 조금은 가벼운 마음으로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점점 더 헤어 나올 수 없는 미로에 빠진 기분이었다. 그림의 목소리들은 갈수록 너무나 추상적이고 어려우며 철학적이고 몽환적인 분위기로 흘러갔던 것이다. 나의 지적능력 수준이 의심될 정도로 때로는 이해하기가 힘들었고 저자 사이드의 뇌 구조가 어떤지 보고 싶을 만큼 흥분하기도 했었다. 그러다 이내 포기하곤 책을 끝까지 읽긴 했지만 어쩐지 나의 일부로 전혀 흡수가 되지 않은 듯 한 느낌이다.

서평을 작성하기에 앞서 다른 분들이 정성스레 올려주신 서평들을 읽어보았는데 거의 대부분 만족하셨다고 말씀하신 터라 더욱 혼란스러웠다.  책에 있던 모든 글들은 분명 꼼꼼하고 세밀하게 작성된 완성도 높은 글들임에는 틀림없었으나 나와는 잘 맞지 않았던 것 같다. 글 중 일부는 내가 상상했던 모습과 같아 반갑기도 했지만 대다수가 너무 추상적이어서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림을 잘 모르는 나를 탓해야할지 아님 지적능력이 너무나 심각하게 높으신 저자를 탓해야할지 조금은 답답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도 몇 백 년의 시대를 아우르며 떠났던 그림여행은 먼  훗날까지도 기억 속에서 지워질 것 같지 않다. 그림을 보는 게 좋았고 어려운 글들의 충격이 상당했던 덕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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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플랄라
안니 M.G. 슈미트 지음, 아카보시 료에이 그림, 위정훈 옮김 / 파피에(딱정벌레)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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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젠가 동화를 써보겠다고 몇 글자 끼적거린 적이 있었다. 책을 열면 마지막 장을 읽는 순간까지도 쉼 없이 그리고 재미나게 읽을 수 있는 동화의 매력에 빠져 동심의 세계 속에서 홀로 허우적거린 적도 여러 번 이었다. 헌데, 너무 겁 없이 덤볐던지 금세 좌절하고 말았던 기억이 난다. 모든 이에게 읽기 쉽고 아름답게 남을 수 있는 이야기를 만드는 것은 어쩌면 대학 논물을 제출하는 것보다도 어려운 일일지 모른다. 인정하기 싫지만 스스로의 한계를 너무나 절실히 깨달았던 그 순간 이후부터 동화에 대한 사랑과 집착이 더 커졌던 것 같다. 그런데 힘겨운 일상과 타협해버린 것일까? 아름다운 이야기도 가슴 설레는 모험도 사치라고 느껴진 어느 순간부터 나는 하루하루를 살기에 급급했던 것 같다. 그러던 중 나에게 날아 들어온 [위플랄라]라는 동화는 잊고 있던 나의 소중한 마음과 열정 그리고 순수한 동심을 지그시 자극해주었다.

 위플랄라라는 종족은 마술(그들은 이것을 '재미있는 일'이라 부른다.)을 부릴 수 있는 작은 난쟁이들이다. 그들은 이름도 하나같이 같아서 그냥 모두 '위플랄라'라 불린다. 평범했던 브롬 씨의 집에 마술실력이 서툰 위플랄라가 찾아 온 것은 비단 우연만은 아닐 것이다. 조금은 무료한 일상을 보내고 있던 브롬 씨와 그의 아이들 넬라 델라와 요하네스는 위플랄라와 함께 상상도 못한 모험의 세계로 뛰어들고 작아진 몸으로 인간이었을 때는 느끼지 못했던 온갖 고생과 두려움을 경험해야만 했다. 조금은 시시하게 문제가 해결되고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가지만 이것 또한 동화를 읽는 재미가 아닐까 생각하며 빙그레 웃어보았다.

 언제나 일에만 바빴던 브롬 씨와 아이들은 어딘가로 놀러가거나 재미난 일은 좀처럼 경험하기 힘든 이들이었다. 아빠인 브롬 씨는 몸이 작아져 아무 일도 할 수 없게 됨으로써 아이들과 더 오랜 시간을 함께 할 수 있었고 가족에 대한 굳건한 애정을 확인 할 수 있었다. 나약한 어린이들에 불과했던 넬라 델라와 요하네스는 처음으로 인간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를 느끼며 그들 앞에 놓인 각가지 난관들 속에서 지혜와 용기를 키워간다. (그래! 지혜와 용기, 사랑은 언제나 동화에서 빠지지 않는 감초다!!) 그들이 헤쳐나간 모험들이 너무 나이 들어버린 내가 읽기에 흥미진진하고 스릴이 넘치지는 않았지만 책에서 눈을 뗄 수 없었던 것만은 사실인 것 같다. 만일 내가 새끼손가락만큼 작아져서 브롬 씨 가족을 따라다녔더라면, 큰 재킷 주머니 속에 들어가 눈을 빠끔히 내밀고 바깥세상을 바라보았더라면 어땠을까? 즐거운 상상의 나래 속에서 어느새 나는 순수하고 아름답던 어린 시절의 나로 돌아간 것 같았다.

 어느 날 문득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이 너무 낯설게 느껴져 깜작 놀랄 때도 있고 머릿속으로 계산하며 행동하는 내 모습에 스스로 실망한 적도 많았다. 물론 앞으로도 그런 날이 아주 많은 테지만 그럴 땐 나를 모질게 질책하기 보다는 동화를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위플랄라]를 읽으며 얻은 기분 좋은 기운을 오래도록 가슴 속에 남겨두어야지. 그리고 어떤 사소한 이유나 스트레스로 인해 이 소중한 행복을 잊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해본다.

 

 "위플랄라~ 너는 브롬 씨 가족 뿐 아니라 내 마음 속에도 마법을 걸어 두었구나. 귀여운 나의 꼬마친구!! 언제나 네가 보고 싶을 것 같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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꿀벌의 집
가토 유키코 지음, 박재현 옮김 / 아우름(Aurum)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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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린 시절 가장 무서운 곤충을 뽑으라면 망설임 없이 거미와 벌이라고 말했던 기억이 난다. 거미는 별 이유 없이 그냥 징그럽기 때문에 싫었고, 벌은 윙윙 소리를 내며 위협적으로 달려들어 뾰족한 침으로 날 쏘고 갈 것만 같아 언제나 무서웠던 것 같다. 하지만 나빠진 환경 탓인지 거미와 벌을 만날 수 있는 횟수는 예전보다 훨씬 줄어들었고 자연스레 내 기억 속에서도 사라지게 되었다. 자기들이 잊혀지는 것이 서러워서였을까? 아니면 단지 우연이었을까? 바람을 쐬러 간 호수공원에서 샛노란 꿀벌을 만난 어느 날 [꿀벌의 집]이라는 책은 나에게로 왔다.

 책의 겉표지를 빼내고 읽는 버릇이 있는 나는 때때로 책 위로 음료를 쏟거나, 책을 읽으며 걷다 넘어지곤 해서 책의 속표지를 더럽히기 일쑤였다. '안 좋은 습관이야. 고쳐야겠어.'라며 책의 보호막인 겉표지를 씌어두려고 했지만 거치적거리는 느낌 때문에 결국 벗겨 버렸다. 헉. 그런데 이거 정말이지 너무 예쁘다. 샛노란 꿀벌의 보들보들한 털이 연상되는 속표지. 정말이지 예쁜 밝은 노랑이었다. 역시 책 곳곳에 꿀벌을 상징하는 것들을 배치하고 싶었던 건가? 하하. 기분 좋은 마음으로 첫 장을 넘길 수 있었다. 마치 한 마리 꿀벌이 된 것처럼 조금은 가볍게 그리고 사뿐히 꿀벌의 집으로 가는 첫 발을 내딛어 보았다.

 주인공인 리에는 22살. 아버지는 중학교 때 자살하셨고 언제나 자신의 방식에 딸이 따라주기를 바라는 엄마와는 사이가 좋지 않다. 얼마 전까지 동거하던 남자친구는 떠나버리고 지금하고 있는 일마저 하고 싶지 않아 회사를 그만두게 된다. 이런 상황 속에서 리에는 자신이 평생 살아온 도쿄에서의 일탈을 꿈꾸게 된다. 그러던 중 보게 된 구인정보가 바로 꿀벌의 집. 그녀가 살고 있는 곳에서 참으로 멀기도 멀다. 양봉의 현장을 직접 둘러보고 도쿄로 돌아온 그녀는 꿀벌의 집의 일원이 되기로 다짐한다.

 허점투성이의 리에가 꿀벌의 집에 적응해가는 과정은 참으로 재미있다. 마치 막노동판을 떠올리게 하는 굳은 중노동도 해야 하고 꿀벌들이 꿀을 만들어내게 연기도 피워야하며 때때로 더 좋은 꿀을 얻기 위해 벌통을 옮겨주기도 해야 한다.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은 하나같이 어둡고 무뚝뚝해서 혹은 너무나 밝아서 좀처럼 적응하기 어려운 이들. 리에의 앞길은 막막하기만 하다. 하지만 오래 지나지 않아 리에는 꿀벌의 집 가족들의 따스한 진심을 느끼게 되고 자신의 몸속에 고슴도치처럼 가득 차 있던 가시들을 마치 털갈이라도 하듯이 하나씩 뽑아내기 시작한다.

 꿀벌을 보면 인간이 사는 세상이 보인다고 하더니, 정말이지 신기했다. 인생에게 단 한 번의 찬란한 비행을 할 수 있는 여왕벌은 우리 인생 중 가장 빛나는 시기와 같고 평생 일을 하며 살아가는 일벌들은 우리 직장인들이 느끼는 일상의 고통과 같다. 그리고 여왕벌과의 교미 후 아무 쓸모없이 놀고먹다가 버려지는 수벌들은 우리가 흔히 인간 말종이라 불리는 이들 혹은 가진 것 없는 외로운 노후의 인간들과 많이 닮았다. 작은 벌집 속에 하루 종일 꿀을 모으고 여왕벌은 쉴 새 없이 알을 낳고 때로는 육식벌인 말벌들의 공격을 막아내며 살아가는 꿀벌들의 삶은 인간과 참으로 흡사해 리에뿐 아니라 그녀의 눈을 통해 꿀벌들의 한 가운데 서있던 나조차도 그들에게 많은 것을 배우게 되었다. 꿀벌들이 점점 나의 친형제 혹은 자식같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환경의 변화 속에서 잘 적응한 리에는 한 번의 겨울을 보내며 엄마와의 돈독한 관계, 가족이라 느껴지는 따스한 꿀벌의 집 가족들, 자신의 일에 대한 열정, 그리고 가슴 떨리는 아련한 사랑, 이 모든 것은 다 가질 수 있었다. 폭풍과도 같은 감정의 기류가 하루에도 열두 번씩 변하는 도심의 생활과는 달리 노여워할 일도 어떤 자극적인 일도 없는 자연 속에서의 삶은 리에를 그리고 내 자신을 편안하고 행복한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게 해주었다. 사람의 마음이란 참 얕고 우습다. 그리도 무섭던 벌이 이제는 귀엽게 느껴지다니. 평생 한 번의 침을 쏘고 탈장된 내장으로 괴롭게 죽어가는 벌처럼 나는 내 인생을 다 걸만큼 정열적일 수 있을까? 언제나 겁이 앞서고 생각이 많은 나로서는 어쩌면 단순한 벌의 삶은 사는 것이 가장 어려운 일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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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남자
베른하르트 슐링크 지음, 김재혁 옮김 / 이레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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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 [다른 남자]라는 책을 받았을 때 내가 이 책에 대해 아는 거라곤 [더 리더]를 쓴 작가의 또 다른 작품이란 것뿐이었다. 얇지 않은 책의 두께에 살짝 부담감을 느끼며 책을 읽기 시작한 나는 첫 이야기 "소녀와 도마뱀"이 끝났을 때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럴 수가. 단편 소설 모음집이었잖아. 아! 그랬다. 생각해보니 이건 단편소설 모음집이란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났다. 그리고 책의 띠지에도 분명 여섯 가지 빛과 그림자라고 쓰여 있지 않은가. 휴. 나의 무신경함을 탓하며 지루하도록 더디게 진행되던 책 읽는 속도가 빨라짐을 느꼈다. 두껍게만 느껴졌던 책의 두께가 머릿속에서 여섯 개의 조각으로 나눠지며 부담감을 순식간에 줄여준 덕분일 것이다.

 가장 기억에 남는 두 작품을 고르라면 그것은 표제인 "다른 남자"와 "청완두"이다. "다른 남자"는 부인이 암으로 세상을 떠난 뒤 부인의 정부가 보내온 편지로 그녀의 외도사실을 알게 된 남편의 이야기이다. 미리 내용에 대해 살짝 들었던 터라 나는 상황이 얼마나 긴박하게 돌아갈지 그리고 혹시나 피비린내 나는 복수극이 이어지진 않을지 내심 기대했었다. 헉. 그런데 나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가고 말았다. 얼마 전 종영한 드라마 "아내의 유혹"에서처럼 처절하고 막장이라 부를 정도의 치졸한 복수가 이어질 거라 생각했는데 내가 그런 드라마들을 너무 많이 봐왔나보다. 적어도 이 글을 썼던 작가는 그런 드라마를 보지도 그리고 보더라도 영향을 받지 않는 정신적 건강의 소유자였을 것이다. 분하고 미칠 듯 한 분노가 고스란히 전해질 거라는 기대와는 달리 생각보다 덤덤하게 그리고 아내의 입장과 아내의 정부에 대한 약간의 이해로 자신의 입장을 합리화시켜가는 주인공의 모습을 만나게 되었다. 그래. 세상엔 여러 사람들이 있으니 어쩌면 이런 경우도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두 번째로 기억에 남는 작품은 바로 "청완두"이다. 주인공인 톰은 평생 세 명의 여자와 관계를 가지며 스스로의 잘못을 두둔하고 세 명의 여자들에게 상처와 동시에 사랑을 주며 살아간다. 세 개의 살림을 차려 이곳저곳을 왔다 갔다 하던 톰의 모습은 신기하리만큼 안정적이고 용의주도해 보였다. 때때로 생기는 여성들과의 불화는 그의 생활에 그리 큰 장애물로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다. 자신이 살고 있는 인생에 흥미를 잃어가고 세 여자 모두를 떠나 수도승 노릇을 하던 그가 불의의 사고로 불구가 된 것과 그가 없는 빈자리에서 서로 똘똘 뭉쳐 그의 이름과 명성을 등에 업고 이뤄낸 세 여자의 성공은 어쩌면 하늘이 정해놓은 운명과도 같은 것이었다. 잘 나가던 건축가이자 예술가인 톰이 뒷방 늙은이 신세가 될지는 이야기를 읽는 동안 단 한 번도 상상할 수 없는 결말이었기 때문이다. 그를 통해 인생의 무상함을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서평을 올리긴 전에 다른 분들이 올리신 서평을 좀 읽어봤는데 공통된 느낌을 "쓸쓸함"이라는 한 단어로 일축할 수 있었다. 그렇다. [다른 남자]란 책 속에 나온 여섯 가지의 사랑이야기들은 어느 하나 따스하고 설레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찬란한 양지를 비추는 것 같으면서도 동시에 침울한 음지의 늪을 보여주는 참으로 사실적이며 참신한 글들이었다. 내 비록 책을 읽으며 행복하다는 느낌은 받지는 못했지만 "그래. 이게 바로 사람 사는 이야기지."라고 느낀 적은 수도 없이 여러 번이었던 것 같다. 예쁘고 아기자기한 이야기들도 좋지만 때로는 현실에서 도피된 상상이 아닌 세세하고 지극히 현실적인 이야기들이 주는 긴장감도 무시하지 못할 매력인 것 같다. [다른 남자]는 내가 오래도록 잊고 있던 긴장감과 쓸쓸함을 기억나게 해준 고마운 작품이다. 조금은 급하게 읽어갔던 독서의 기억이 나를 아쉽게 한다. 다음엔 좀 더 시간을 두고 여유롭게 문장을 즐기며 음미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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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코의 지름길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13
나가시마 유 지음, 이기웅 옮김 / 비채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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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티비를 보다보면 누구나 자신을 뽐내기에 바쁘다는 것을 쉽사리 알아차릴 수 있다. 신인이던 아니던 혹은 연예인이던 일반인이던 모두가 자신을 알리고자 노력하고 그 과정에서 다른 이들에 대한 배려는 조금도 찾아보기 힘들 때가 많다. 가끔 과도한 자신감과 지나친 행동들로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거나  자신의 모습을 겹겹이 포장하여 가식적으로 미소를 짓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가 걱정아닌 걱정을 하며 한숨을 쉰 적도 여러 번이다. 이러한 마음 어느 누가 알아주겠는가. 무시하면 그만이라고 말하고들 말겠지. 그러던 중 우연히 마음을 달랠 기회가 생겼다. 푸른 대나무 밭 사이에 난 예쁜 길에 빨간 자전거와 함께 서 있는 소녀. [유코의 지름길]이라는 책은 그렇게 나의 마음속으로 천천히 스며들었다. 마치 원래부터 나의 일부였던 것 처럼. 
 

 주인공의 이름은 책의 중반부가 지날 때가지도 알 수 없었다. 어쩌다 알게 된 그의 이름도 그저 기에 남지 않고 단지 "나"라는 1인칭 관찰자 시점의 주인공만이 내 기 속에 남아있을 뿐이다. 표지를 보고 저 소녀가, 그러니까 정확히 말해 유코가 주인공일거라 굳게 믿고 있는 나는 책을 열 장 넘게 읽고 나서야 "나"라는 사람이 여자가 아닌 남자라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 순간 어찌나 당황했는지 혼자 "!"하고 소리를 질러버렸다. 잠시 씁쓸한 미소를 지은 후 읽어 간 책 속에선 참으로 소박하고 순수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세상을 살며 다른 사람에게 나쁜 짓이라곤 전혀 못했을 것 같은 순수한 사람들. 넘치는 인정과 무신경 속에서 피어난 그들의 우정을 나는 숨죽이고 지켜보았다. 마치 소설 속의 "나"가 바로 내 자신이 되어버린 듯.

 하고싶은 일도, 그렇다고 목표도 없는 조용한 인생을 살고 있는 "나"는 조그만 골동품 앤틱 전문점에서 일하게 된다. 옆구리를 파고드는 차가운 바람에도 외로움을 느끼지 않는 건조한 "나"란 사람은 가게에서 일하며 좋은 이웃들을 알게 되고 차츰 서로에게 소중한 사람이 되어간다. 별다른 목표가 없는 것은 여전하지만 뭔가 인생이 더 재미있었진 걸 느낀다. 감정이 메마른 사람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풍부하지도 않은 "나"는 그저 담담하고 조심스럽게 자신과 이웃들에 대한 이야기들을 풀어간다.

 책은 작게 7개의 소제목들을 달고 있다. 많은 분들이 이것을 7개의 단편이라 표현하셨지만 나는 어쩐지 이 이야기들이 단편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각각의 소제목에 맞게 이야기의 중심이 특정한 사람에게 옮겨가긴 했지만 그 흐름이 너무도 자연스럽고 온 이웃들이 다 나와 단편이라고 잘라버리기엔 뭔가 아쉬웠다. 책을 반 넘게 읽어가는 동안 별다른 재미를 느낄 수 없었지만 그렇지만 책을 덮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그저 건조하고 담담하지만 웬지 정이가고 따스함이 느껴지는 그들의 일부가 되고 싶었던 것 같다. 큰 목소리로 자신을 뽐내고 알리려고 노력하는 여느 주인공들보다 조용하지만 섬세하게 이웃들에 대한 배려를 하던 책 속의 "내"가 호감으로 다가온 것은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일인 것 같다. 오랜만에 느낀 편안함과 따스함 오래도록 가슴 속에 담아주고 누군가가 싫어질 때마다 세상때문에 지쳐갈 때마다 조심스럽게 꺼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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