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특별한 여행책을 만났다. 유명한 관광지나 맛집이 아닌 '내셔널 트러스트'라는 문화유산을 중심으로 둘러 본 영국 여행 이야기 『영국, 느리게 걷다』. 역사와 문화를 사랑하는 나는 이 책 덕분에 반드시 알고 지켜야 할 인류의 소중한 보물을 알게 되었다. 나도 마찬가지였지만, '내셔널 트러스트가 뭐지?'라고 생각하는 분이 많을 것 같으니 일단 정확히 알아보고 가자.
『내셔널 트러스트』 :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성금을 모아보전가치가 큰 자연자산이나 문화유산을 매입해 영구히 보전ㆍ관리하는 운동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자발적으로 힘을 모아 길이 보존하고 보전해야 할 문화유산을 보수하고 지키는 운동. 이 얼마나 멋진 일인가! 이 책을 쓴 오윤석 작가는 우연 같은 필연으로 내셔널 트러스트에 관해 알게 된 뒤, 이 소중한 보물을 직접 보고 카메라에 담고자 여행길에 올랐다. 영국에 있는 500여 곳의 내셔널 트러스트 중에 40여 곳의 여정과 사진을 담아 펴낸 책이 바로 『영국, 느리게 걷다』이다.
호수로 가득한 국립공원, 예쁜 수선화밭, 왕이 되고 싶었던 귀족들의 궁궐 같은 성, 피터 래빗이 깡충 뛰어 수풀로 숨어들 것 같은 피터 래빗 마을, 세상의 끝을 알리는 아름다운 절벽, 지구가 아닌 외계를 연상시키는 벌판 등등 영국에 있는 내셔널 트러스트는 정해진 특정한 기준만 갖춘다면 보물로 선정되어 개발되지 않고 지금 모습 그대로 대대손손 전해질 수 있다. 영국에 가본 적이 없기에 낯선 지명과 이름 때문에 좀 헤매긴 했지만, 작가가 직접 찍은 아름다운 사진에 취해 패키지 여행객처럼 이리저리 열심히 둘러보았다. [영국 전체 지도→지역 지도→문화재 위치] 순서로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You're Here"을 함께 실어 주었다면 여행이 더 즐거웠을 텐데 지도의 부재가 살짝 아쉽다. GPS 도표 등의 정보가 첨부되긴 했지만, 뭔가 눈으로 대략 여기쯤이구나 알고 싶었던 마음이랄까? 그래도 이 귀한 인류의 보물을 알리고자 했던 작가의 진심은 충분히 느낄 수 있어 책을 읽는 내내 즐겁고 행복했다.
하나하나 정말 예쁘고 아름다워 어디가 가장 좋았는지 꼽기 힘들지만, 책을 사랑하는 나는 피터 래빗 마을, 시인 워즈워스의 집과 『폭풍의 언덕』의 모티브가 된 브론테 자매가 살던 곳이 기억에 남았다. 과연 영국에 갈 수 있을지 장담할 순 없지만, 피터 래빗 마을은 꼭 가보고 싶다. 마을의 주택과 토지를 사들이는 데 거의 모든 재산을 쏟아붓고 '개발하지 않는다'는 단 하나의 조건으로 내셔널 트러스트에 마을 전체를 기부했다는 베아트릭스 포터. 타샤 할머니만큼이나 내가 좋아하는 작가이기에 직접 방문하여 그 소중한 곳을 눈과 마음에 담아오고 싶다. 아름답게 꾸며진 정원과 태곳적 모습의 숲, 흐드러지게 핀 예쁜 꽃밭도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이러다가 책에서 만난 모든 곳이 좋았다고 말할 기세! 사실, 정말 하나도 빼놓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답고 가슴 설레는 곳이었다. 한국에도 내셔널 트러스트 단체가 있다고 하니 어떤 문화유산을 보전하고 알리고 있는지 알아봐야지! 『영국, 느리게 걷다』 덕분에 이제는 영국이라고 하면 짙은 안개나 셜록 홈스가 아닌 내셔널 트러스트가 제일 먼저 떠오를 것 같다. 소중한 경험과 추억을 남겨주신 작가께 감사드리며, 내 인생 버킷 리스트 마지막 칸에 '영국 내셔널 트러스트 가보기'라고 살포시 적어두었다. 간절히 바라면 언젠가는 꼭 이룰 수 있겠지? 부디 그날이 빨리 오기를! 특별한 영국 여행을 바라거나 눈부신 문화유산을 경험하고 싶은 분들께 이 책을 추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