꿀벌의 집
가토 유키코 지음, 박재현 옮김 / 아우름(Aurum) / 2009년 4월
평점 :
절판


 어린 시절 가장 무서운 곤충을 뽑으라면 망설임 없이 거미와 벌이라고 말했던 기억이 난다. 거미는 별 이유 없이 그냥 징그럽기 때문에 싫었고, 벌은 윙윙 소리를 내며 위협적으로 달려들어 뾰족한 침으로 날 쏘고 갈 것만 같아 언제나 무서웠던 것 같다. 하지만 나빠진 환경 탓인지 거미와 벌을 만날 수 있는 횟수는 예전보다 훨씬 줄어들었고 자연스레 내 기억 속에서도 사라지게 되었다. 자기들이 잊혀지는 것이 서러워서였을까? 아니면 단지 우연이었을까? 바람을 쐬러 간 호수공원에서 샛노란 꿀벌을 만난 어느 날 [꿀벌의 집]이라는 책은 나에게로 왔다.

 책의 겉표지를 빼내고 읽는 버릇이 있는 나는 때때로 책 위로 음료를 쏟거나, 책을 읽으며 걷다 넘어지곤 해서 책의 속표지를 더럽히기 일쑤였다. '안 좋은 습관이야. 고쳐야겠어.'라며 책의 보호막인 겉표지를 씌어두려고 했지만 거치적거리는 느낌 때문에 결국 벗겨 버렸다. 헉. 그런데 이거 정말이지 너무 예쁘다. 샛노란 꿀벌의 보들보들한 털이 연상되는 속표지. 정말이지 예쁜 밝은 노랑이었다. 역시 책 곳곳에 꿀벌을 상징하는 것들을 배치하고 싶었던 건가? 하하. 기분 좋은 마음으로 첫 장을 넘길 수 있었다. 마치 한 마리 꿀벌이 된 것처럼 조금은 가볍게 그리고 사뿐히 꿀벌의 집으로 가는 첫 발을 내딛어 보았다.

 주인공인 리에는 22살. 아버지는 중학교 때 자살하셨고 언제나 자신의 방식에 딸이 따라주기를 바라는 엄마와는 사이가 좋지 않다. 얼마 전까지 동거하던 남자친구는 떠나버리고 지금하고 있는 일마저 하고 싶지 않아 회사를 그만두게 된다. 이런 상황 속에서 리에는 자신이 평생 살아온 도쿄에서의 일탈을 꿈꾸게 된다. 그러던 중 보게 된 구인정보가 바로 꿀벌의 집. 그녀가 살고 있는 곳에서 참으로 멀기도 멀다. 양봉의 현장을 직접 둘러보고 도쿄로 돌아온 그녀는 꿀벌의 집의 일원이 되기로 다짐한다.

 허점투성이의 리에가 꿀벌의 집에 적응해가는 과정은 참으로 재미있다. 마치 막노동판을 떠올리게 하는 굳은 중노동도 해야 하고 꿀벌들이 꿀을 만들어내게 연기도 피워야하며 때때로 더 좋은 꿀을 얻기 위해 벌통을 옮겨주기도 해야 한다.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은 하나같이 어둡고 무뚝뚝해서 혹은 너무나 밝아서 좀처럼 적응하기 어려운 이들. 리에의 앞길은 막막하기만 하다. 하지만 오래 지나지 않아 리에는 꿀벌의 집 가족들의 따스한 진심을 느끼게 되고 자신의 몸속에 고슴도치처럼 가득 차 있던 가시들을 마치 털갈이라도 하듯이 하나씩 뽑아내기 시작한다.

 꿀벌을 보면 인간이 사는 세상이 보인다고 하더니, 정말이지 신기했다. 인생에게 단 한 번의 찬란한 비행을 할 수 있는 여왕벌은 우리 인생 중 가장 빛나는 시기와 같고 평생 일을 하며 살아가는 일벌들은 우리 직장인들이 느끼는 일상의 고통과 같다. 그리고 여왕벌과의 교미 후 아무 쓸모없이 놀고먹다가 버려지는 수벌들은 우리가 흔히 인간 말종이라 불리는 이들 혹은 가진 것 없는 외로운 노후의 인간들과 많이 닮았다. 작은 벌집 속에 하루 종일 꿀을 모으고 여왕벌은 쉴 새 없이 알을 낳고 때로는 육식벌인 말벌들의 공격을 막아내며 살아가는 꿀벌들의 삶은 인간과 참으로 흡사해 리에뿐 아니라 그녀의 눈을 통해 꿀벌들의 한 가운데 서있던 나조차도 그들에게 많은 것을 배우게 되었다. 꿀벌들이 점점 나의 친형제 혹은 자식같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환경의 변화 속에서 잘 적응한 리에는 한 번의 겨울을 보내며 엄마와의 돈독한 관계, 가족이라 느껴지는 따스한 꿀벌의 집 가족들, 자신의 일에 대한 열정, 그리고 가슴 떨리는 아련한 사랑, 이 모든 것은 다 가질 수 있었다. 폭풍과도 같은 감정의 기류가 하루에도 열두 번씩 변하는 도심의 생활과는 달리 노여워할 일도 어떤 자극적인 일도 없는 자연 속에서의 삶은 리에를 그리고 내 자신을 편안하고 행복한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게 해주었다. 사람의 마음이란 참 얕고 우습다. 그리도 무섭던 벌이 이제는 귀엽게 느껴지다니. 평생 한 번의 침을 쏘고 탈장된 내장으로 괴롭게 죽어가는 벌처럼 나는 내 인생을 다 걸만큼 정열적일 수 있을까? 언제나 겁이 앞서고 생각이 많은 나로서는 어쩌면 단순한 벌의 삶은 사는 것이 가장 어려운 일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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