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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코의 지름길 ㅣ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13
나가시마 유 지음, 이기웅 옮김 / 비채 / 2009년 4월
평점 :
절판
요즘 티비를 보다보면 누구나 자신을 뽐내기에 바쁘다는 것을 쉽사리 알아차릴 수 있다. 신인이던 아니던 혹은 연예인이던 일반인이던 모두가 자신을 알리고자 노력하고 그 과정에서 다른 이들에 대한 배려는 조금도 찾아보기 힘들 때가 많다. 가끔 과도한 자신감과 지나친 행동들로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거나 자신의 모습을 겹겹이 포장하여 가식적으로 미소를 짓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가 걱정아닌 걱정을 하며 한숨을 쉰 적도 여러 번이다. 이러한 마음 어느 누가 알아주겠는가. 무시하면 그만이라고 말하고들 말겠지. 그러던 중 우연히 마음을 달랠 기회가 생겼다. 푸른 대나무 밭 사이에 난 예쁜 길에 빨간 자전거와 함께 서 있는 소녀. [유코의 지름길]이라는 책은 그렇게 나의 마음속으로 천천히 스며들었다. 마치 원래부터 나의 일부였던 것 처럼.
주인공의 이름은 책의 중반부가 지날 때가지도 알 수 없었다. 어쩌다 알게 된 그의 이름도 그저 기억에 남지 않고 단지 "나"라는 1인칭 관찰자 시점의 주인공만이 내 기억 속에 남아있을 뿐이다. 표지를 보고 저 소녀가, 그러니까 정확히 말해 유코가 주인공일거라 굳게 믿고 있는 나는 책을 열 장 넘게 읽고 나서야 "나"라는 사람이 여자가 아닌 남자라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 순간 어찌나 당황했는지 혼자 "억!"하고 소리를 질러버렸다. 잠시 씁쓸한 미소를 지은 후 읽어 간 책 속에선 참으로 소박하고 순수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세상을 살며 다른 사람에게 나쁜 짓이라곤 전혀 못했을 것 같은 순수한 사람들. 넘치는 인정과 무신경 속에서 피어난 그들의 우정을 나는 숨죽이고 지켜보았다. 마치 소설 속의 "나"가 바로 내 자신이 되어버린 듯.
하고싶은 일도, 그렇다고 목표도 없는 조용한 인생을 살고 있는 "나"는 조그만 골동품 앤틱 전문점에서 일하게 된다. 옆구리를 파고드는 차가운 바람에도 외로움을 느끼지 않는 건조한 "나"란 사람은 가게에서 일하며 좋은 이웃들을 알게 되고 차츰 서로에게 소중한 사람이 되어간다. 별다른 목표가 없는 것은 여전하지만 뭔가 인생이 더 재미있었진 걸 느낀다. 감정이 메마른 사람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풍부하지도 않은 "나"는 그저 담담하고 조심스럽게 자신과 이웃들에 대한 이야기들을 풀어간다.
책은 작게 7개의 소제목들을 달고 있다. 많은 분들이 이것을 7개의 단편이라 표현하셨지만 나는 어쩐지 이 이야기들이 단편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각각의 소제목에 맞게 이야기의 중심이 특정한 사람에게 옮겨가긴 했지만 그 흐름이 너무도 자연스럽고 온 이웃들이 다 나와 단편이라고 잘라버리기엔 뭔가 아쉬웠다. 책을 반 넘게 읽어가는 동안 별다른 재미를 느낄 수 없었지만 그렇지만 책을 덮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그저 건조하고 담담하지만 웬지 정이가고 따스함이 느껴지는 그들의 일부가 되고 싶었던 것 같다. 큰 목소리로 자신을 뽐내고 알리려고 노력하는 여느 주인공들보다 조용하지만 섬세하게 이웃들에 대한 배려를 하던 책 속의 "내"가 호감으로 다가온 것은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일인 것 같다. 오랜만에 느낀 편안함과 따스함 오래도록 가슴 속에 담아주고 누군가가 싫어질 때마다 세상때문에 지쳐갈 때마다 조심스럽게 꺼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