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남자
베른하르트 슐링크 지음, 김재혁 옮김 / 이레 / 2009년 3월
평점 :
절판


 처음 [다른 남자]라는 책을 받았을 때 내가 이 책에 대해 아는 거라곤 [더 리더]를 쓴 작가의 또 다른 작품이란 것뿐이었다. 얇지 않은 책의 두께에 살짝 부담감을 느끼며 책을 읽기 시작한 나는 첫 이야기 "소녀와 도마뱀"이 끝났을 때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럴 수가. 단편 소설 모음집이었잖아. 아! 그랬다. 생각해보니 이건 단편소설 모음집이란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났다. 그리고 책의 띠지에도 분명 여섯 가지 빛과 그림자라고 쓰여 있지 않은가. 휴. 나의 무신경함을 탓하며 지루하도록 더디게 진행되던 책 읽는 속도가 빨라짐을 느꼈다. 두껍게만 느껴졌던 책의 두께가 머릿속에서 여섯 개의 조각으로 나눠지며 부담감을 순식간에 줄여준 덕분일 것이다.

 가장 기억에 남는 두 작품을 고르라면 그것은 표제인 "다른 남자"와 "청완두"이다. "다른 남자"는 부인이 암으로 세상을 떠난 뒤 부인의 정부가 보내온 편지로 그녀의 외도사실을 알게 된 남편의 이야기이다. 미리 내용에 대해 살짝 들었던 터라 나는 상황이 얼마나 긴박하게 돌아갈지 그리고 혹시나 피비린내 나는 복수극이 이어지진 않을지 내심 기대했었다. 헉. 그런데 나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가고 말았다. 얼마 전 종영한 드라마 "아내의 유혹"에서처럼 처절하고 막장이라 부를 정도의 치졸한 복수가 이어질 거라 생각했는데 내가 그런 드라마들을 너무 많이 봐왔나보다. 적어도 이 글을 썼던 작가는 그런 드라마를 보지도 그리고 보더라도 영향을 받지 않는 정신적 건강의 소유자였을 것이다. 분하고 미칠 듯 한 분노가 고스란히 전해질 거라는 기대와는 달리 생각보다 덤덤하게 그리고 아내의 입장과 아내의 정부에 대한 약간의 이해로 자신의 입장을 합리화시켜가는 주인공의 모습을 만나게 되었다. 그래. 세상엔 여러 사람들이 있으니 어쩌면 이런 경우도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두 번째로 기억에 남는 작품은 바로 "청완두"이다. 주인공인 톰은 평생 세 명의 여자와 관계를 가지며 스스로의 잘못을 두둔하고 세 명의 여자들에게 상처와 동시에 사랑을 주며 살아간다. 세 개의 살림을 차려 이곳저곳을 왔다 갔다 하던 톰의 모습은 신기하리만큼 안정적이고 용의주도해 보였다. 때때로 생기는 여성들과의 불화는 그의 생활에 그리 큰 장애물로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다. 자신이 살고 있는 인생에 흥미를 잃어가고 세 여자 모두를 떠나 수도승 노릇을 하던 그가 불의의 사고로 불구가 된 것과 그가 없는 빈자리에서 서로 똘똘 뭉쳐 그의 이름과 명성을 등에 업고 이뤄낸 세 여자의 성공은 어쩌면 하늘이 정해놓은 운명과도 같은 것이었다. 잘 나가던 건축가이자 예술가인 톰이 뒷방 늙은이 신세가 될지는 이야기를 읽는 동안 단 한 번도 상상할 수 없는 결말이었기 때문이다. 그를 통해 인생의 무상함을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서평을 올리긴 전에 다른 분들이 올리신 서평을 좀 읽어봤는데 공통된 느낌을 "쓸쓸함"이라는 한 단어로 일축할 수 있었다. 그렇다. [다른 남자]란 책 속에 나온 여섯 가지의 사랑이야기들은 어느 하나 따스하고 설레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찬란한 양지를 비추는 것 같으면서도 동시에 침울한 음지의 늪을 보여주는 참으로 사실적이며 참신한 글들이었다. 내 비록 책을 읽으며 행복하다는 느낌은 받지는 못했지만 "그래. 이게 바로 사람 사는 이야기지."라고 느낀 적은 수도 없이 여러 번이었던 것 같다. 예쁘고 아기자기한 이야기들도 좋지만 때로는 현실에서 도피된 상상이 아닌 세세하고 지극히 현실적인 이야기들이 주는 긴장감도 무시하지 못할 매력인 것 같다. [다른 남자]는 내가 오래도록 잊고 있던 긴장감과 쓸쓸함을 기억나게 해준 고마운 작품이다. 조금은 급하게 읽어갔던 독서의 기억이 나를 아쉽게 한다. 다음엔 좀 더 시간을 두고 여유롭게 문장을 즐기며 음미하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