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 때, 무협지를 읽다가 중간고사에 엄청나게 지각한 전적이 있다. 학교 앞 오락실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갤러그나 제비우스, 트윈코브라를 했고, 잡지사 다닐 때 밤새 포커를 하다가 마감에 늦어 무지막지 혼난 전적이 있다. 아이 낳고 살면서도 스타 보느라 아이를 학교에 지각시킨 전적이 있다. 어떤 성향의 아줌마인지가 훤히 보이는 스토리. 철 들지 않는다. 사람은 그저 생리적으로 늙어갈 뿐이다.(변명)
이 책, 젊은 시절에 끝내 완결을 보지 못했다. 한 권 한 권이 어찌 그리 더디게 나오던지. 신일숙 작가를 찾아가 빚독촉하듯이 드러누워 버릴까도 생각했지만, 작가는 오죽 힘들었으랴...이제야 그런 생각이 든다. 하여간 이 책의 끝을 보지 못하고 뭣 누다 만 것 같은 기분으로 참 오래 시간이 지났는데, 우연히 딸이 만화방에 갔다오더니 10권짜리로 완결이 나와 있더라 하기에 다 빌려서 하루 종일 봤다.
몸이 말을 듣지 않는 피로감에 누워 보내려던 하루라서, 그리 아깝지 않게 만화 보며 흘려보냈다. 역시 재미있는 만화다. 나날이 비싸지며 장정이 바뀌는 게 조금 그렇기는 하지만 내가 본 순정만화의 최고봉이다.
착하고 아름다운 남자들과 여자들이 가공할 능력을 지닌 채 그걸 깨닫기도 하고 모르기도 하면서 저마다의 운명의 길을 분투하며 처절하게 걸어간다. 요즘으로 치면 나쁜 남자의 매력의 극한을 보여주는 파멸의 신 에일레스가 가장 인상적인 캐릭터다.
저녁에 남편이 한 마디했다. "기어이 보는군." 남편과 사귈 때 툭하면 만화방으로 끌고다녔기에, 그와 한 잡지사에 있었기에 그는 나를 잘 안다. 얼마나 유치한지를. 그래서 남편이지 뭐. 하긴 남편도 야구 만화 광이다. 이래저래 유치한 집안. 온 가족이 만화에 빠져, 빠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