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 때, 무협지를 읽다가 중간고사에 엄청나게 지각한 전적이 있다. 학교 앞 오락실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갤러그나 제비우스, 트윈코브라를 했고, 잡지사 다닐 때 밤새 포커를 하다가 마감에 늦어 무지막지 혼난 전적이 있다. 아이 낳고 살면서도 스타 보느라 아이를 학교에 지각시킨 전적이 있다. 어떤 성향의 아줌마인지가 훤히 보이는 스토리. 철 들지 않는다. 사람은 그저 생리적으로 늙어갈 뿐이다.(변명) 

이 책, 젊은 시절에 끝내 완결을 보지 못했다. 한 권 한 권이 어찌 그리 더디게 나오던지. 신일숙 작가를 찾아가 빚독촉하듯이 드러누워 버릴까도 생각했지만, 작가는 오죽 힘들었으랴...이제야 그런 생각이 든다. 하여간 이 책의 끝을 보지 못하고 뭣 누다 만 것 같은 기분으로 참 오래 시간이 지났는데, 우연히 딸이 만화방에 갔다오더니 10권짜리로 완결이 나와 있더라 하기에 다 빌려서 하루 종일 봤다. 

몸이 말을 듣지 않는 피로감에 누워 보내려던 하루라서, 그리 아깝지 않게 만화 보며 흘려보냈다. 역시 재미있는 만화다. 나날이 비싸지며 장정이 바뀌는 게 조금 그렇기는 하지만 내가 본 순정만화의 최고봉이다. 

착하고 아름다운 남자들과 여자들이 가공할 능력을 지닌 채 그걸 깨닫기도 하고 모르기도 하면서 저마다의 운명의 길을 분투하며 처절하게 걸어간다. 요즘으로 치면 나쁜 남자의 매력의 극한을 보여주는 파멸의 신 에일레스가 가장 인상적인 캐릭터다.  

저녁에 남편이 한 마디했다. "기어이 보는군." 남편과 사귈 때 툭하면 만화방으로 끌고다녔기에, 그와 한 잡지사에 있었기에 그는 나를 잘 안다. 얼마나 유치한지를. 그래서 남편이지 뭐. 하긴 남편도 야구 만화 광이다. 이래저래 유치한 집안. 온 가족이 만화에 빠져, 빠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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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09-02-07 1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뭐~ 만화 본다고 유치해지는 건 아니죠.
온 가족이 만화에 빠져, 빠져~~ 좋은데요!^^

파란흙 2009-02-07 12:05   좋아요 0 | URL
사실 제가 학습만화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습니다. 만화라는 장르의 순수성에 대해 나름대로 애정이 있거든요. 어릴 적에 울엄마는 제가 없어지면 부지깽이 들고 만화방으로 찾아오셨더랬어요. 유치하다는 건, 만화를 보는 행위보다는 무언가에 너무 몰입하느라 주변을 잊어버리는 막무가내식 생활에 대한 이야긴데, 글이 좀 꼬였어요.ㅎㅎ

아영엄마 2009-02-07 2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남편이랑 만나면 주로 만화방에서 몇 시간씩 죽치고 있었다죠. ^^*
아르미안의 네 딸들 정말 좋아했는데 기다리다 지쳐 포기했었죠. 완결되었다는 건 알았는데 전 아직 끝까지 못 봤어요.

파란흙 2009-02-09 00:09   좋아요 0 | URL
돌이켜보면 우리 땐 만화방이 데이트코스였던 것 같기도 합니다. 종각에 있던 만화방이 생각나네요. 완결 꼭 보세요. 젊은 시절의 그 맛만큼은 아니지만, 이제 우린 추억이 더 새로워지는 나이니까요.(아영엄마님 언뜻 봬서 연배를 잘 모르지만 몇 년 정도 차이리라 짐작하며)

파란 2009-02-08 02: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르미안의 네딸들이라니. 고3이었어요. 일요일 자율학습시간에 책상걸상 2학년 교실에 빼 놓고 하루종일 만화방에서 살게 했던 만화. 저 졸업할때까지 안 나왔어요. 2년즘 후에 나온거 같은데..실망할까봐 못 보고 있었어요. 에일레스...나쁜 남자의 표본이었지여. 진짜..포스가 죽음이었는데..순간순간의 네모난 페이지의 그림들이 사진처럼 박혀있어요. 땡땡이 치고 도망나올수 있는 용기가 아르미안의 네 딸 덕분이라 생각하네여.^^

파란흙 2009-02-09 00:11   좋아요 0 | URL
파란님도 그러셨군요.^^ 네, 그렇게 젊은 시절 한 때를 장식했던 책이었어요. 시간 내셔서 집에 아무도 없는 날 한 번 달리세요. 색다른 감흥입니다. 이거, 왠지 친근한 느낌인 걸요. 아르미안을 잊지 못하시는 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