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족의 영웅 아스테릭스 아스테릭스 1
르네 고시니 글, 알베르 우데르조 그림 / 문학과지성사 / 2001년 8월
평점 :
절판


지극히 사적인 이야기. 남편은 꼽꼽쟁이다. 그는 중학교 때 쓰던 수첩까지 버리지 않는 사람이다. 중간고사 기간을 삐뚤빼뚤한 글씨로 적어 놓은 그의 옛 수첩을 훔쳐보며 청소하다 말고 뿌연 먼지 속에 앉아 킬킬 웃었던 기억이 난다. <태양을 향해 달려라>라는 만화들도 그의 보물로, 그야말로 고색창연하다. 그는 그것들을 건드리면 불같이 화를 낸다. 그런 그가 역시 보물처럼 아끼던 오래된, 그러면서 얇은 만화책이 두어 권 있었다. 색이 바래 '새 것'을 좋아하는 내 취향은 아니었고, 슬쩍 훑어본 바로는 내용도 좀 황당했다. 무슨 어린이 잡지의 부록으로 날아왔던 걸 남편이 애지중지했던 그 만화가 바로 <아스테릭스>였다. 지금의 33권 중 몇 권에 해당하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생각나는 건 재활용 종이에 넣어 함께 버린 뒤 대판 집안싸움이 벌어졌다는 것뿐. 

  "아스테릭스가 완간됐대." 슬쩍 던진 내 말에 리모콘을 이리저리 조작하던 남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결국 이번 <아스테릭스> 구매 및 리뷰는 순전히 남편의 옛날 보물을 버렸던 죄책감에서 시작됐다. 

  1, 2, 3권이 왔다. 우선 '이런 내용이었구나.'싶은 느낌이 강했다. 골족이 켈트족의 한 갈래로서 '갈리아인'이라고도 한다는 걸 이제야 알았다. 그들이 프랑스인들의 조상이라는 것도. 이제껏 나는 켈트와 갈리아, 그리고 좀 더 낯선 골족이라는 말을 모두 따로 알고 있었다. 그러니 잘못 알고 있었던 셈이다. 프랑스인들은 골족의 기상을 앞장세우는 이 만화를 민족적 자긍심으로까지 여긴다고 했다. 1959년부터 선보인 만화니까 그야말로 출판사 측에서 '세계만화사'를 거론할 만하다. 프랑스의 역사적인 민족 만화. 그러면서 세계적인 만화. 

  주 내용은 로마에 정복당한 골족의 몇몇 마을이 우정, 용기, 유머를 잃지 않으며 끝까지 저항하는 이야기다. 그 과정에서 주인공들은 온갖 모험을 겪으며, 세상을 경험한다. 그리고 그건 곧 문화에 대한 경험이 된다. 2권에서 우리의 아스테릭스가 클레오파트라를 만나는 과정은 이집트의 건축과 사회와의 조우이며, 3권에서 글래디에이터가 되는 이야기는 동시에 로마문화에의 경험담이 된다. 그러니 이들을 따라다니는 독자들은 자연히 세계와 역사에 대한 자연스러운 안내 속으로 걸어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게다가 읽을수록 유머는 감칠맛이 난다. 음유시인 아쉬랑스투릭스의 노래가 시작되면 등장인물들의 몸과 머리와 눈과 다리는 저마다 먼저 멀리 달아나겠다고 경쟁을 한다. 그렇게 보인다. 어찌나 실감나고 웃기는지 한번 노래를 들어보고 싶을 정도다. 그가 로마에 붙들려 가자 구하러간 아스테릭스와 오베릭스는 감옥을 잘못 찾아간다. 노래가 너무 지독하여 더 아래 감옥으로 옮겨진 뒤였기 때문이다. 이처럼 <아스테릭스>의 유머는 표피적이거나 말초적이기보다, 소박하면서 은근하고 깊다. 큰 웃음이 터지지는 않지만 "쿡."하는 식으로 연이어 웃게 된다. 그게 매력이다. 

  한 번 크게 웃기는 했다. 1권의 첫 페이지에서 등장인물을 확인하고서였다. 나는 거의 십 년 동안 오베릭스가 아스테릭스인 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몸집이 크고 좀 둔하며 늘 돌을 지고 다니는 파란 줄무늬 바지의 오베릭스가 가장 인상적인 캐릭터였던지, 나는 아스테릭스라는 이름에 오베릭스를 연결해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몸집이 조그맣고 재치있는 아스테릭스가 알면 섭섭해 했으려나. 

  골족 용사들은 급한 일도 없고, 당황하지도 않으며, 겁도 없다. 그건 어쩌면 파노라믹스 사제가 조제하는 마법의 물약, 조금만 먹어도 힘이 천하장사가 되는 비밀을 믿는 것이기도 하겠지만, 그보다는 민족적 자긍심이 뿌리 깊어서라고 보는 편이 맞을 것이다. 그들은 너무 자긍심에 차 있어서 세상 무서울 것도, 주눅들 것도 없고 매일이 즐겁다. 절대로 달아나지 않는다. 세상 모든 길이 통한다는 로마에 대해 그저, "길을 따로 알아놓지 않아도 갈 수 있겠군. 모든 길이 그리로 간다니."하는 정도로만 여긴다. 이들의 삶의 방식이 부러워졌다.
 

  개개의 캐릭터에도 호감이 갔다. 아스테릭스는 말할 것도 없지만, 일찌기 내 눈을 사로잡았던 오베릭스는 한 번 만나보고 싶은 인물이다. 그처럼 거칠 것 없는 느긋함이라니. 멧돼지 한 마리 요리해 들고 가면 누구라도 환영해 줄 것이 분명한 사람. 
 

  이처럼 독특하고 생명력이 긴 캐릭터의 창조자인 르네 고시니가 1977년에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 아쉬워지는 순간이다. 그러나 사람은 떠나도, 작품은 남아 숨쉰다. 남편의 어린 날을 흥분으로 가득 채워주었고, 내 팍팍한 일상에 '쿡'하는 웃음으로 동반자가 되어 주는 <아스테릭스>, 가능하면 다 사 모아서 남편에게 어린 시절을 선물하고, 나 스스로에게는 웃음과 여유를 선물하고 싶은 마음이다. 어쩌면 내 아이들에게는 바랜 색깔의 만화책으로 남아 엄마, 아빠를 추억할 수 있는 선물이 될 수 있으려나. 아마 그럴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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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08-04-25 1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하~ 꼬마 니콜라의 '르네 고시니'라면 님의 리뷰만 보고 당장 찜할래요~~ㅎㅎ

파란흙 2008-04-25 10:40   좋아요 0 | URL
네^^ 꼬마 니콜라의 르네 고시니 맞습니다. 날이 춥네요. 변덕스러운 날씨.

파란 2008-11-04 2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갑자기 깜짝 놀랬어요 르네 고시니가 죽은지 이리 오래되었다니..니콜라 시리즈가 너무 좋아 다 가지고 있는데.. 그리고 저도 비슷하게 사적인 이야기. 제 남편의 수첩도 그야말로 먼지 푹푹하니 쌓여있는데 그 안에 만화책 '아스테릭스'있어요. 조금 여러권있는데 과거 어느때에 저도 그 만화를 본 기억이 나거 버리진 않고 다른 만화책들을 버렸죠. 몰래. 여러권. 그에 대한 댓가를 '신의물방울'로 타협했습니다. 근데 이상한건 비닐포장지도 안 뜯고 대왕마마처럼 모셔만 두고 있는 것을 이해할수 없습니다. 남편들은^^. (아 '파란'이 비슷해서 구경왔다가..)

파란흙 2008-11-05 09:50   좋아요 0 | URL
이런 이런.^^ 여러 가지가 비슷하군요. 파란님. 요즘 남편은 식객을 전권 사달라, 초한지를 구비해 달라, 뭐 이런 떼를 씁니다. 만화 아니면 보지 않는 남자거든요. 신의 물방울도 끌리는데요. 워낙 유명해 놔서.^^

파란 2008-11-05 0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식객을 신문에서 일일히 잘라서 모아놓았어요.이 사람이 식객을 사겠구나 했는데 말을 안하고 그걸 스크랩을 할 생각을 하시고 계셔요. 빨리 하면 좋을텐데 그걸 모으기만 하고 안하는게 더 지저분^^ 한데 말이죠.

파란흙 2008-11-05 09:53   좋아요 0 | URL
하하. 남편분의 모습이 슬쩍 짐작되는... 스크랩 완료하시면 한번 구경시켜 주세요.ㅎㅎ 전 요즘 모종의 음모를 꾸미고 있습니다. 남편이 결혼 전부터 모아 온 열쇠고리 박스를 버려버릴까, 하는. 진열해 놓을 곳 없는 소잡한 집에 수집이 너무 많아요.ㅠㅠ

파란 2008-11-05 16: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열쇠고리박스..같은 피가 흐르는 구석이 있나 봐요. 조상 어디에선가 같은 디엔에이가 끼어든거 같은데요. 신랑이 모은다기 보다 도대체 무엇을 버리는 법이 없어요. 저도 한때는 그랬기에 부부긴 한데. 찻집성냥갑을 쌀푸대로 모은적이 있긴 해요.

파란흙 2008-11-06 10:11   좋아요 0 | URL
같은 피^^ 맞을 거예요. 도무지 버리는 법이 없는 것도 같네요. 저도 버리는 스타일이 아닌데, 남편은 가히 극이거든요. 그나저나 쌀푸대라니...만만치 않으십니다.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