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연주 시전집 - 1953-1992
이연주 지음 / 최측의농간 / 2016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세상이 변하고 있다고?

 

 

 

빗날이 좀 들고 있나?

그래,

빗날이 좀 드는군.

 

 

 

이제 땅에 대가리를 박고

고해해야 되겠나?

복고적 혁신의 사제 앞에?

 

 

아, 제발

떠벌리지 마.

일급 광고엔 비밀이

너무 많잖나.

아닌가?

 

-39페이지

 

 

 

 

 

잡초

 

 

 

향기를 모른다, 나는

붉은 열매를 품어주러 다가가는

한나절 빛살들의 꿈을 모른다

 

 

월셋집 문간 담벼락 아래

당신 구두 발길질 아래

나는 살아간다

일생 내 영역의 터가

길바닥 보도블록 금간 데

뿐이라 해도

 

 

모질게 질긴 목숨이다

쓸지 마라

내 허리 동강 들어 쓸어버린단들

그래도

또 살아간다

 

 

땅이 양질의 단백질이다.

 

-72페이지

 

 

 

 

 

 

마지막 페이지

 

 

 

더 이상은 넘길 것이 없네.

지나온 문장 속을 허덕허덕 뛰어왔으니

빌딩의 플로어처럼 가슴팍은 왁스로 반들거리네.

살충제와도 같은 이 몇구절을 덮고 나면

여보게, 이제 더는 페이지가 없다는 걸

그러니 이젠 첫 번째 가출이 남은 셈이지.

더 나쁜 일만 없다면야

화해하지 못할 건 또 뭔가, 허지만 배워온 것들을

너무 쉽게 입어버리는 게 항상 탈이란 말일세.

그들은 마지막 장의 문장, 음절과 음절들 사이에서

느리게 기지개를 켜고 있다.

되넘기려다,

덮으려다,

맨들맨들한 서로의 가슴팍을 들여다보다,

책상을 치다,

 

-87페이지

 

 

 

 

 

폐물놀이

 

 

 

우리는 버려진 시계나 고장난 라디오

헌 의자카바나 살대가 부러진 우산이다

 

 

못쓰는 주방용품 오래된 석유난로 팔아요

낡은 신발짝이나 몸에 안 맞는 옷가지들

짐이 되는 물건들 삽니다

 

 

우리는 구겨진 지폐와 몇 개의 백동전

우리는 끊어진 전선줄이다

 

 

수신도 송신도 없다

 

 

-97페이지

 

 

 

 

 

따뜻한 공간이동

 

 

나밖에 없는데

누가 달고 깊은 잠을 아주 곤하게

잠꼬대도 해가며 자고 있는지 모르겠다

함박눈?

 

 

비에 관한 유리창의 기억을 불러 그 눈 속

진혼가를 불러주는 겨울밤

나는 놀란다, 당신이에요?

 

나밖에 없는데, 분명

아무도 없는데

 

 

추워 웅크린 공기들은 곤한 숨소리로 덥혀주는

당신이야?

잠꼬대도 해가면서

 

-139페이지

 

 

 

 

 

 

우렁달팽이의 꿈

 

 

 

나는 외투

나는 외투를 입는 사람이다

외투 한쪽 깃을 들락거리는

혼미한 바람

 

 

추위가 더는 견디기 여러워질 때

사람들은 이상한 짓을 경험한다

절구통에 웅크린 자신을 빻는다

고독한 행위다

환생에 쓰인다면 좋은 일이지만

블랙홀은 크고 물갈이는 어렵다

 

 

나는 외투

나는 외투를 입은 우렁달팽이

관계가 무너질 것 같다

그러나 외투를 덥혀 진흙길을 가게 하는 힘이 있다

제 몸의 체온이다

 

 

누가 와서 내 집 문을 두드린다

내 몸의 체온으로 뜨거운 차를 한 잔 끓일 수 있을 게다.

 

-173페이지


댓글(3) 먼댓글(0) 좋아요(3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후애(厚愛) 2016-11-16 16: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시집은 무겁고 어렵다..

매너나린 2016-11-16 2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요 많이 무거운 시들이네요^^;;

후애(厚愛) 2016-11-18 10:08   좋아요 0 | URL
네.. 이 시집 전체가 무거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