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단결같이 곱고 윤기 흐르는 풍성한 머리카락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여성들의 소망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자신의 머리카락만으로 치장하는 것이 부족할 때에는 어쩔 수 없이 남의 머리카락으로 보충할 수밖에 없으나 그래도 외모를 돋보이게 하기 위해 비용을 들이며 치장하였다. 고대의 고분벽화나 회화자료에서 지체가 높은 여인일수록 뭔가 치장을 많이 하여 머리의 크기가 큰데 크기만 봐도 그 여성의 지위를 가늠할 수 있다.

 

가체 하나에 1000냥!

머리를 치장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가장 간단한 방법으로는 자신의 머리를 땋거나 묶어 올리는 방법이 있으나 아무리 머리를 길게 길러도 풍성하게 보이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그래서 부분적으로 다른 사람의 머리를 붙이거나 얹어서 사용하는 방법이 있는데 이것을 조선시대에는 다리라고 하였다. 다리는 ‘다래’ 또는 ‘다레’라고 하며 한자로는 ‘체(髢)’ 또는 ‘월자(月子)’라고도 하는데 일종의 부분가발이라고 할 수 있다. 다리는 꾸미고자 하는 머리 모양에 따라 머리에 붙이거나 위에 얹어 사용하였는데 조짐머리, 얹은머리, 어여머리, 큰머리 등에는 긴 다리로 모양을 만들어 머리에 얹었고 첩지머리, 쪽머리 등에는 자기 모발과 다리를 함께 빗어내려 한데 땋아서 사용하였다.

 

 

1 1800년대의 가체 <석주선기념박물관 소장>

2 미인도 <해남 녹우당 소장>

 

 

요즘은 사람의 머리카락으로 만든 것 대신 인조머리카락으로 만든 비교적 값이 싼 가발이 많아 누구라도 큰 부담 없이 가발을 사서 꾸밀 수 있다. 그러나 머리카락을 함부로 자르지 않았던 조선시대에는 사람의 머리카락으로 만든 다리의 가격이 만만치 않았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므로 조선 초기부터 가체 금지에 대한 논의가 끊이지 않다가 영조 23년(1747)에 정식으로 발의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를 대체할 머리 모양이 없다 하여 미루어 오다가 영조는 1756년에 가체를 금하고 족두리로 대신하도록 하며 7년 후에 다시 가체를 금하도록 한다. 그러나 시행이 잘 시행되지 않았는지 가체의 값은 계속 올랐다. 정조 7년(1783)에 여선덕이 올린 상소에 의하면 옛날에는 100냥을 넘는 것을 지나치게 사치스럽다고 했었는데 지금은 4, 5백 냥도 부족하여 심지어 1000냥에 가깝다고 하니 당시 얼마나 많은 여성들이 머리를 크게 하기 위해 애썼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정조 12년(1788)에는 가체를 금지할 것을 규정한 가체신금사목(加髢申禁事目)을 제정한다. 정조의 문집인 홍재전서에 의하면 족두리에다 갑자기 바둑돌처럼 생긴 큰 옥 조각이나 금덩이를 붙이기도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어 가체뿐만 아니라 족두리에도 많은 비용이 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가체를 사용하는 큰 머리치장은 영, 정조대에 극심했는데 그 시대의 실학자인 이덕무(1741~1793)가 지은 청장관전서에는 당시 여인들의 머리치장에 관하여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부귀한 집에서 머리치장에 드는 돈이 무려 7~8만냥에 이르며 웅황판, 법랑잠, 진주수로 꾸며 그 무게를 거의 지탱할 수 없다고 한다. 그리고 한 부잣집 며느리가 나이 13세에 다리를 얼마나 높고 무겁게 하였던지, 시아버지가 방에 들어가자 갑자기 일어서다가 다리에 눌려서 목뼈가 부러졌다고 하며 사치가 능히 사람을 죽였으니, 아, 슬프도다! 라며 개탄하고 있다. 큰 머리치장의 폐단이 얼마나 심했는지를 가늠할 수 있는 내용이다.

 

 

1 신윤복의 [계변가화]의 일부 <간송미술관 소장>

2 신윤복의 [추천도] 일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당시의 생활상을 화폭에 남긴 혜원 신윤복(1758~미상)의 풍속도에서도 많은 여인들이 큰 머리를 하고 있다. 그 중 계변가화(溪邊街話)에는 한 여인이 다리를 넣으며 머리를 땋고 있는 모습이 표현되어 있다. 거의 다 땋고 한쪽 끝부분만 남았는데 다리는 3개가 남아있으니 이미 상당수의 다리를 썼을 것이다. 역시 혜원의 그림으로 알려진 추천도(鞦韆圖)에는 머리를 굵게 땋아 자기 키만큼 길게 늘어뜨린 채 그네를 타고 있는 여인이 있다. 저 정도의 머리를 치장하는 데에는 다리가 몇 개나 사용되었을까? 너무 무거워서 풀어놓고 그네를 타는 것일까? 여러 가지 궁금증이 생긴다.

반면에 김홍도가 그린 풍속도에는 서민으로 보이는 여인이 머리를 땋고 있는데 다리는 없고 참빗과 얼레빗으로 보이는 것만 있다. 머리를 돌려서 얹으며 치장하고 있으나 크기가 작은 것으로 보아 본인의 머리로만 꾸미고 있는 것 같다. 머리의 크기가 부와 계급의 척도였다고 할 수 있겠다.

[단원풍속화첩]의 일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극성을 부리던 가체의 사용도 세월이 흐르면서 점차 줄어들게 된다. 그러나 쪽진 머리에 반드시 필요한 비녀, 그리고 머리를 화려하게 장식해 줄 뒤꽂이, 떨잠 등 셀 수 없이 많은 종류의 머리꾸미개들이 조선시대 말기까지 애용되다 개화기에 접어들어 여성의 헤어스타일이 짧게 변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글  박윤미
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 한국복식사를 전공했으며 저서로는 [덕혜옹주 - 그의 애환과 복식], [대가야복식], [한국전통복식조형미], [조선조왕실복식]이 있다.
자료제공
문화재청 헤리티지 채널 (http://www.heritagechannel.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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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희망꿈 2013-01-25 2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고~ 옛날 여인네들은 정말 힘들었겠어요.
지금도 멋쟁이들은 여러모로 힘들지만 말이죠.^^

후애(厚愛) 2013-01-26 13:29   좋아요 0 | URL
맞아요^^
자유도 없었고요..

2013-01-25 20: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1-26 13: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꿈꾸는섬 2013-01-26 0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옛날에 태어나지 않은 게 다행이라고 생각해요.ㅎㅎ

후애(厚愛) 2013-01-26 13:30   좋아요 0 | URL
저도요.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