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징, 내 유년의 빛
베이다오 지음, 김태성 옮김 / 한길사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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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에게 최초의 동력은 바로 유년의 기억이 머물렀던 곳이다!

그때 그 시절, 추억을 좇아 베이징을 재건하다!

 

 

  한 사람의 성장과정에서 기억이라는 저장소는 뜻밖에도 바로 이전의 과거가 아니라 유년기와 청소년기에 더 많은 공간을 할애하는 듯하다. 나의 최초의 동력을 이끌었던 곳, 이른바 유년시절의 고향 말이다. 태어나 스무 해가 넘도록 살았던 나의 고향은 2군 사령부를 마주보고 있는 2층 양옥집이었다. 군복을 입은 군인들이 항상 보초를 서고 있는 군부대라는 위압감 앞에서 개발은 더뎠고, 그래서 조용했던 동네였다. 당시만 하더라도 학교 수업을 마치고 동네 친구들과 밖이나 이집 저집을 전전하며 어울려서 노는 것이 당연했던 때라 아이들의 왁자지껄한 소음이 그나마 동네를 훈훈하게 해주었다. 그러나 이제는 동네를 벗어나 살아서 이따금 그곳을 찾아갈 때면, 이렇게 사람 한 명 보이지 않을 만큼 한산했었나 싶을 정도로 낯설고 적막하게 느껴진다. ‘내게는 완전히 낯선 도시였다. 자신의 고향에서 이방인이 된 셈이었다’는 표현을 서두에 쓴 <베이징, 내 유년의 빛>의 저자 베이다오 역시 오랜 이국 생활에서 돌아온 베이징을 보는 순간 아마도 나와 비슷한 느낌을 가졌으리라 생각된다. 고목이 봄을 맞고 사라진 냄새와 소리 그리고 빛이 돌아오게 하여 나의 베이징을 재건하고 싶었다던 그의 선언이 나의 옛 추억과 풍경을 함께 떠올리게 한다.

 

 

시대 속에 담긴 유년의 일상   

 

 

   1992년 노벨문학상 후보에 올랐던 중국의 대표 시인 베이다오의 <베이징, 내 유년의 빛>은 유년과 청소년 시절의 추억이 담긴 베이징을 글로써 재건한 자전에세이다. 이 책과 하나의 짝을 이룬다고 할 수 있는 <상하이, 여자의 향기>가 상하이를 한 편의 풍경화처럼 묘사한다면, <베이징, 내 유년의 빛>은 저자의 삶을 동력으로 하여 격변의 시대를 누빈 중국의 수도 베이징의 민낯에 보다 더 밀착한 글이라고 할 수 있겠다. 마오쩌둥이 3년 동안 미국을 제압한다는 명목으로 농업을 희생하여 공업을 발전시키려던 정책이 실패하면서 전국적으로 식량부족과 기아현상을 일으킨 3년 곤란시기, 광기어린 축제와도 같았던 문화대혁명, 사회주의 교육 운동과 무력을 이용한 교화가 빈번하게 일어나는 때를 살아야 했던 당시 중국인들의 곤란한 삶이 피로처럼 덕지덕지 붙어있다. 그 속에서 유년과 청소년기를 보낸 저자의 일상은 마치 일기를 들춰보듯 생생하게 펼쳐진다. 특히, 굶주림에 시달리던 시절에도 낭만을 잃지 않는 아버지 덕분에 책과 음악이 어우러진 추억들이나 ‘세 검객’이라 불릴 정도로 그림자처럼 붙어 다닌 친구들과의 일화며, 가난해도 노천 농산물 시장에서 사달라고 졸라 기르게 된 토끼의 먹이를 구하기 위해 여기저기를 전전했던 사연들은 깊은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더군다나 책에 간간이 실려 있는 흑백사진은 당시의 풍경을 더욱 사실적으로 전달한다. 비록 순수했던 유년의 기억에 시대와 사상의 온상이 겹쳐져 서글프고 처연한 광경을 자주 목격할 수 있지만, 그런 와중에서도 따스한 빛과 정서를 잃지 않는다.

 

 

나는 또 남자아이들이 특별히 좋아하는 놀이들을 발견했다. 예컨대 ‘팽이치기’다. 이는 ‘매국노 때리기’라 부르기도 하는데, 아마도 이것이 일본과 전쟁을 하던 시기에 생겨난 놀이라서 그런 것 같다. 팽이는 대부분 아이들이 직접 만들었다. 곡괭이 손잡이를 톱으로 자른 다음, 칼로 원추형으로 깎아 뾰족한 부분에 자전거 베어링을 박아 넣고 넓적한 부분에는 다양한 색깔로 원을 여러 개 그려 넣었다. 그런 다음 빨랫줄을 대나무 막대에 묶어 채찍을 만들었다. 팽이는 정말로 매국노나 소인배처럼 고약했다. 채찍으로 세게 후려칠수록 더 말을 잘 들었고, 후려치지 않으면 이리저리 비틀거려 꼴이 말이 아니었다. 베이징 남자들이 “이 멍청이, 매를 버는 거야?”라고 말하는 것도 바로 여기서 유래한 것인지도 모른다. / 62p

 

 

내 기억 속의 두 번째 레코드판은 차이콥스키 「이탈리아 기상곡」으로, 컬럼비아사에서 제작된 78회전 검은색 에보나이트 레코드판이었다. 70년대 초반, 나와 차오이판, 캉청 등이 자주 우리 집에 모이곤 했다. 모닥불을 둘러싸고 앉아 등으로 찬바람에 저항하는 듯한 분위기의 모임이었다. 책과 음악이 어우러진 이 살롱에는 남몰래 금단의 열매를 맛보는 희열이 있었고, 여인들이 가져다주는 낭만적인 사건들이 있었다. 그것이 우리 글쓰기의 시작이었다. 모두가 작가인 동시에 독자이자 평론가였다. 당시 우리가 썼던 초기 작품들에는 두말할 것도 없이 수백 번 수천 번 반복된 음악이 스며들어 있었다. / 82p

 

 

 

 

 

비틀린 축제와 광기, 문화대혁명

 

 

폭력은 찌는 듯한 더위를 따라 더욱 고조되었다. 도처에서 끊임없이 비판투쟁과 조리돌림, 가택수색, 재산 몰수, 구타가 벌어졌다. 베이징 시내 전체에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모든 사람을 전율케 하는 그 악명 높은 ‘붉은 8월’이었다. / 237p

 

 

   1960년대를 살아온 중국인들에게 있어 ‘문화대혁명’은 자신들의 일상을 뿌리 채 빨아들이는 블랙홀과 다름이 없었다. 우리에게도 박정희 군사정권 시절 이후부터 민주화 운동에 이르는 격변의 시기가 있었듯 중국인들에게도 문화대혁명은 개인과 집단을 송두리째 쥐고 흔든 광란의 시기였던 게 분명한 듯하다. 당시 혁명의 소용돌이에 있었던 베이징 제4중학에 입학하게 된 저자 역시 시류에 휘말리거나 혹은 앞장 설 수밖에 없었다. 문화대혁명이 터지자 수업은 줄줄이 폐지되고, 학교 내에서도 출신 문제 때문에 각종 파벌에 따른 분화가 심해진 관계로 학생들 사이에서도 감당할 수 있는 신음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던 시대였다. 이후 40년간 ‘평민’과 ‘귀족’의 경계가 역사의 상흔이 되어 아물지 않고 있다 하니, 중국인들에게 이 격변의 시기가 남긴 상처가 얼마나 클지 충분히 가늠된다.

 

 

교장과 교사들의 권위와 위엄, 지위가 하룻밤 사이에 땅에 덜어지리라고는 감히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문화대혁명’이 터지자 먼저 대자보가 천지를 뒤덮었고 비판투쟁대회가 쉴새 없이 이어졌다. 절정은 1966년 8월 4일 일요일이었다. 스무 명 남짓 되는 학교 임원과 교사들이 고깔모자를 쓰고 죄명이 적힌 팻말을 목에 건 채 조리돌림을 당한 다음 운동장으로 끌려나왔다. 그들은 학생들의 왁자지껄한 욕지거리와 주먹질, 발길질 사이로 치욕스럽게 비틀거리면서도 지나가야 했다. / 242p

 

 

 

 

 

 

   비록 나라도 다르고 같은 시절을 공유한 적도 없지만, 책은 진하고도 애잔한 유년과 청소년 시절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놀라운 힘을 지녔다. 아마도 어려운 시절에 함께 배곯아가며 상처를 보듬었던 가족애와 친구로부터의 우정이 시절을 막론하고 모두로 하여금 비틀거리지 않고 앞으로 계속 나아가게 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당신께서 저를 불러 아들이 되게 하셨기에 저는 당신을 따라 아버지가 되었습니다”는 글귀는 그래서 더 사무친다. 또한 상큼한 민트색 표지 아래에 천진난만 하게 뛰노는 소년은 나로 하여금 조금 더 오랫동안 책의 여운을 남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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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이, 여자의 향기
왕안이 지음, 김태성 옮김 / 한길사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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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문밖으로 확장되어 펼쳐지는 도시의 내밀한 흔적들!

시대의 흔적과 기억을 고스란히 간직한 상하이를 추억하다!

 

 

  “우리는 자신이 살고 있는 곳의 역사를 단 한 번도 더듬어보지 않는다.”

   중국의 유명한 소설가이자 <상하이, 여자의 향기> 저자인 왕안이는 자신의 소설 첫머리에서 이렇게 쓴 적이 있다고 한다. 내가 딛고 있는 이 터전의 뿌리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알고자 하는 것은 생각 이상으로 낯선 일이다. 너무나 구체적이고 일상이 진득하게 밀착되어 있는 탓에 자칫 사적인 경험과 언어들로 전락할 수 있는 까닭이다. 마찬가지로 상하이를 대표하는 작가라 불리는 만큼 책의 저자 역시 이에 대한 고충을 먼저 토로한다. 그래서 도록이나 연감 등과 같은 객관적인 자료들이나 고서를 살펴보기도 하지만 오히려 상하이라는 도시가 멀게만 느껴졌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일상에 녹아든 기민한 감각으로, 상하이의 다양한 풍광들을 묘사하고 저자의 기억을 재구성하여 한 편의 ‘상하이 수채화’ 같은 낭만을 선사한다.

 

 

 

 

 

 

 

 

거리의 풍경은 삶의 결심이자 활짝 열린 얼굴이다     

 

 

   ‘동양의 파리’, ‘중국의 뉴욕’이라 불리는 모던의 도시, 상하이. 그곳에서는 생의 움직임이 느껴지는 얼굴들, 빛과 소리, 냄새로 표정을 바꾸는 거리의 모습들, 날 것과 감춰진 것들이 때로는 느리게 혹은 빠르게 나타났다 사라지고 있다. 저자는 과거의 기억을 들추고 현재를 읽어내어 다양한 변화를 품고 있는 상하이 도시만의 매력과 가치들을 매우 통찰력 있게 그려낸다. 특히나 ‘감성’이 가장 먼저 포착하는 인상이 얼굴형이라는 그녀의 표현처럼, 거리에 관한 풍경과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도시민들의 모습에서 이 도시의 운치와 깊이가 느껴진다. 작은 구멍가게 여주인이 어울림직한 여자, 책대여점 주인, 나막신 신고 따각따각 소리 내어 거리를 뛰어다니는 아이, 청빈하고 절약하여 얼굴이 싱겁고 담담해 보이는 부녀자의 모습까지, 거리의 표식 같은 존재가 된 이들의 모습을 매우 세밀하게 묘사한다. 억양이 다소 거친 편이고 실용정신이 강하며, 진한 맛을 좋아가고, 거칠고 저속한 모습을 드러내면서도 순수함과 진실함을 추구하는 것을 좋아하는 그네들의 일상을 밀착력 있게 그려내는 점 또한 독자와 상하이와의 거리를 한층 좁혀준다. 뿐만 아니라, 외국문물이 많이 들어와 세상은 변화했으나 뜻밖에도 자신들이 아직 바람직하고 좋은 환경을 건설할 준비가 되어 있지 못하며 점차 낭만적인 색채가 사라져가고, 역사관이나 정신적 가치를 중시하지 않는다는 등 점차 변질되어가는 도시의 오랜 느낌을 간직하고픈 작가의 바램 또한 읽을 수 있다.

 

 

이 도시의 성질은 매우 조급하지만 호방하기도 하기 때문에 지나가는 것들은 그냥 지나가버린다. 이 도시는 내면에 끈질긴 동력을 갖추고 있어 적지 않은 관문과 요새를 뚫고서 마침내 평형에 도달한다. 그런 다음에는 또다시 끈질기게 기울어져 간다. 이 도시가 불안하게 요동치는 것은 욕망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이 도시의 욕망에 관해 얘기하다 보면 우리는 이 도시에 소리가 멈출 수 없다는 알게 될 것이다. 거리의 한구석에서도 커다란 동작은 멈추지 않는다. 전차가 지잉 하고 울리는 소리처럼 욕망이 머리를 들기 때문이다. / 34p

 

 

물을 나르는 물통도 전부 물을 흘린다. 물통에서 흘린 물이 덜컹거리는 물 배달용 수레를 적시면서 뜨거운 김에 휘감긴다. 계압혈탕을 파는 노점상들이 거리에서 닭과 오리의 털을 뽑고 있고, 피는 자연스럽게 거리를 따라 하수구로 흘러든다. 그러다보니 하수구가 막히기 일쑤다. 그럴 때마다 하수구를 뚫는 인부가 어디선가 긴 대나무 막대를 들고 쏜살같이 달려온다. 이곳에 펼쳐지는 풍정은 늘 이렇게 질펀하고 깔끔하지 못하다. 몹시 거칠면서도 선정적이다. / 51p

 

 

 

 

 

여자와 도시, 그리고 여자의 향기

 

 

   저자는 상하이에 대해 글을 쓰자면 가장 대표적인 주제가 바로 ‘여성’이라고 말한다. 사회적 신분의 축적에서 상하이 여성들은 가난한 프롤레타리아로, 혁명가가 많고 그 중에서도 중년 여성이 특별한 대표성을 갖는다고 한다. 그녀들은 행동하는 거인들로, 운명의 결정에 직면하여 단호하고 과단성 있는 태도와 주도면밀한 행동을 보여 스스로 자신의 주인이 되고자 한다. 견고한 기개가 있는 상하이의 여성들은 공격이 아니라 수비의 강인함을 가지고, 득실의 균형을 찾아나가는 지혜를 갖추었다.

 

 

   이는 여성 문학에도 큰 영향을 미치는데, 이들은 큰 시대와 큰 운동, 큰 불행과 큰 승리를 묘사하면서 자신의 작지만 겹겹이 착종된 복잡한 감정들을 함께 표출할 줄 알았다. 아마도 중국의 여인들이 다른 나라의 여인들보다 더 오랫동안 좁은 천지 안에 갇혀 살아온 반면, 중국의 남자들은 정치와 도덕에 대해 좀 더 큰 인생의 이상을 지니고 있었기에 여성 작가들에게는 특히 ‘자아’가 가장 중요한 창작 요소가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시기의 자아의식은 표면적으로만 드러날 뿐, 철저히 자각되지 못하고 깊이가 결여된 채 발산되었음으로 같은 여성 작가로서 자아의 진실성에 대한 성찰과 점검이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 외에도 남성 속에서의 여성, 사회 속에서의 여성으로서 이성적으로 여성 스스로를 성찰한다.

 

 

여성은 남성에 비해 자신의 이미지를 몹시 아끼는 편인 데 비해, 남성은 여성에 비해 어떤 것에도 개의치 않고 수치를 모르는 용감함을 갖고 있다. 여성들은 자신의 자아를 더 잘 느끼고 살필 수 있는 만큼 자아를 더 아끼고 중시한다. 여인들은 인생의 이상을 직조해나가듯이 정성껏 자신들의 이미지를 잘 빚어낸다. 그 결과 여인들은 뜻밖에도 암암리에 남을 속이고 자신마저 속이고 만다. 그렇게 억지로 만들어진 자아가 바로 자신의 자아라고 오인하는 것이다. 사실은 진정한 자아가 아닌데도 말이다. / 167p

 

 

상하이 여인들은 퇴폐적인 극을 연기하지 못한다. 게다가 상하이는 항상 사람들에게 사치와 낭비의 인상으로 각인되어 있기 때문에 실제로는 상하이 사람들의 몸과 기질 속에 강철처럼 단단한 근육과 뼈가 감춰져 있다는 사실을 아무도 알지 못한다. 그들의 그런 몸과 기질이 아니었다면 이 콘크리트 천하가 무엇에 의지하여 버틸 수 있었겠는가. 상하이라는 이 단단한 세계에 사는 사람들은 곧고 강직한 성격을 가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쉽게 영락하고 말 것이다. 우리는 얼마간이라도 이 도시의 진정한 모습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이 도시의 여자들이 강인하게 자신들의 존재와 현실을 대면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 178p

 

 

   이른바 문화대혁명이라 하여, 문예 비판에서 시작하여 정상적인 교육기관이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고 많은 엘리트들이 박해를 당한 때가 있었다. 세상이 온통 어지럽고, 아이나 어른 할 것 없이 작든 크든 그들의 삶에 모든 영향을 끼쳤다. 그녀는 유년 시절에 이 시기를 겪어 지금에 이르기까지 순간순간들을 써나가며 자유롭게 성장할 수 있게 해주고, 충실하게 사상을 개방할 수 있게 해준 이 시대에 감사함을 느낀다. 덕분에 아주 힘든 곤경 속에서도 계속 학습하고 인식하며 실천하고 경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대가 점점 시장에 영합하고, 화려하지만 공허하고 졸렬한 외피를 덧씌우고 있는 것에 안타까움을 느끼는 목소리를 주저하지 않는다. 거칠지만 여리고 탐욕스러우면서도 절제할 줄 아는 상하이만의 정신을 찾고 싶은 건 그녀 뿐만은 아닐 것이다.

 

 

문화시장은 최고의 효율과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졸렬하고 용속한 취미에 영합하기도 한다. 예술가들이 시장에 영합하여 현실을 회피하는 화려하고 공허한 글들을 쏟아내고 있는 것이다. ‘소박하고 표일하며 총명하고 영리한’ 작가들의 재빠른 글쓰기가 이 도시를 가득 메꾸면서 도시 전체에 경박하고 화려한 외피를 씌우고 있다. 이제 또다시 1930년대의 ‘모던 상하이’가 무대에 등장했다. 화려하고 염미한 소리들이 끊이지 않고 있다. 하지만 나는 자신도 모르게 그 속에서 선생의 그림자를 찾게 된다. 그 둔중하고 거대한 그림자를 찾고 있는 것이다. 선생이 있었기 때문에 ‘30년대’는 모던과 향락과 풍류의 시대로 밤마다 음악과 노랫소리가 그치지 않았지만, 동시에 강철의 대오가 있어 사람들을 향해 외치고 버틸 수 있었다. / 133p

 

 

   이처럼 <상하이, 여자의 향기>를 읽으며 시대의 모든 흔적과 기억을 고스란히 간직한 상하이의 풍경 속으로 들어갔다 나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무엇보다 마치 수채화처럼, 풍경화처럼 시적이고 섬세한 문장들이 더욱 매력적인 에세이였다. 함께 출간된 다른 남성 작가가 쓴 <베이징, 내 유년의 빛>은 또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을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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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호모 사피엔스가 되는 법 - 미래 로봇이 알아야 할 인간의 모든 것, 2018년 행복한아침독서 선정
닉 켈먼 지음, 김소정 옮김 / 푸른지식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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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행동을 “데이터베이스화”한,

재기발랄한 통찰력을 지닌 인문교양서!

 

 

   2016년 3월, 우리는 아주 놀랍고도 역사적인 대회 앞에서 숨을 죽이고 TV 중계를 지켜보고 있었다. 바로 구글의 자회사 딥마인드가 개발한 인공지능 바둑프로그램 알파고와 이세돌 9단의 바둑 대결이다. 확률에 기반한 정교한 계산으로 탁월한 수읽기의 능력을 보여준 알파고 앞에서 바야흐로 4차 산업혁명이 초읽기에 이르렀음을 눈으로 실감했다. 이처럼 인공지능, 빅데이터가 인간 사회의 모든 영역에 가져올 변화는 단순히 기능적 요소만이 아니라 인간이라서 가능한, 인간만의 고유 영역라고 생각했던 영역까지도 넘나드는 것이 가능해보인다. 지난 세기까지만 하더라도 로봇 즉 안드로이드를 상상했을 때 그저 기계적인 어떤 유형에 지나지 않았지만, 이제는 인간과 매우 흡사한 혹은 구분하기 어려운 정도로 인간에 가까운 안드로이드의 완성을 볼 날이 머지않은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인공지능을 탑재한 안드로이드가 ‘사람이 되는 시험’에 통과하기 위해 인간에 대한 모든 것을 관찰한 내용의 <완벽한 호모 사피엔스가 되는 법>은, 안드로이드 시대 앞에서 인간의 속성과 존재론적인 의미를 되짚어볼 수 있는 매우 남다르고 경이로운 느낌을 선사한다.

 

 

 

인간이 되어야 했던 안드로이드, 인간이란 무엇인가

 

 

   미국의 SF영화 시나리오 작가인 닉 켈럼이 쓴 <완벽한 호모 사피엔스가 되는 법>은 인간이 되어야 했던 안드로이드가 기능이 정지되기에 앞서, 다음 미래 안드로이드를 위해 그간 수집했던 인간에 대한 각종 정보들을 담은 안내서다. 22일간의 인간 관찰 기록에는 성별, 일, 돈, 종교, 번식 방법, 기술, 예술, 이기심, 경쟁 등 인간 삶의 다양한 면면들을 매우 섬세하게 담고 있음은 물론, 통계 자료와 도표 등과 같이 수치 적용 가능한 보고서 형태를 통해 인간의 행동을 과학적으로 데이터베이스화한 매우 흥미로운 책이다. 일종의 ‘인간이 되기 위한 처세술’이라고나 할까. 여기에 주인공인 안드로이드가 ‘인간성’을 체득해 인간에 가까워지려고 함으로써 겪게 되는 수많은 경험들이 한 편의 영화처럼 교차 반복되어 극적인 긴장감을 형성한다.

 

 

   흔히들 우리 인간이 모든 생물과 로봇을 넘어서 스스로를 가장 우월한 존재로 여기는 데는 바로 ‘감정’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믿음에 있을 것이다. 또한, 몸과 마음과 감성을 구분하여 감정과 육체에 좌지우지되지 않고 ‘의지’에 의해 결정할 수 있다고 오해한다는 점이다. 주인공인 안드로이드 잭의 의견에 의하면 이는 사람이 스스로의 생존 가능성을 높이려고 그렇게 믿는 데에서 시작한 것, 즉 합리적으로 생각해서 결정을 내렸다는 믿음이 필요하기 때문인 것으로 추측된다. 실제로 과학적인 데이터로 분석한 그의 인간 관찰 보고서에 의하면 인간은 스스로 감지할 수 있는 영역이 매우 제한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들이 우주에 관해서는 거의 모든 것을 안다고 믿는 인간중심적인 사고를 지적한다. 이 외에도 잭은 직장이라는 공간 내에서 인간들은 근무 시간 내내 아주 빨리 효율적으로 일하기를 거부하고, 상사와 직장 동료 간의 사회적 상호작용 능력이 직장 내에서의 능력을 결정하는 가치 판단의 가장 중요한 척도가 되는 것을 언급한다. 뒷담화, 미루기, 다양한 관행들, 각종 경고 문구 및 규칙 어기기, 자기 이익을 위해서 다른 사람을 고의로 해치는 일 등 각종 인간의 이기적인 행동들을 적나라하게 설명하며 이를 지켜야만 안드로이드들이 사람처럼 보일 것이라는 각종 충고들은 우스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뼈아픈 지적으로 다가온다.

 

 

사실 생각해보면 내가 받은 가장 중요한 명령은 거짓말을 하라는 거였어. ‘사람이 되는 시험’에 통과하라니, 그 명령 자체가 거짓을 행하라고 요구하는 거잖아. 어쩌면 사람들도 이런 식으로 느끼는 게 아닐까? 사람들도 자기에 관해, 자기가 느끼고 생각하고 꿈꾸고 희망하는 모든 것에 관해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거 아닐까? 어쩌면 내 추측이 옳은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어. 왜냐하면 많은 사람이 자기 자신조차 속이는 아주 강력한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걸 알았거든. 여러 면에서 사람 사회는 마치 거짓으로 짠 옷감 같았어. / 79p

 

 

사람에게는 우주의 가장 기본적인 본성을 뛰어 넘을 능력이 있단 말이야. 실제로 사람들은 이 우주를 통틀어 자기들을 만든 우주의 기본 법칙에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구조물인지도 몰라. 그런데도 사람들은 너무나도 자주 우주의 법칙에 순응하는 길을 택한단 말이야. 내가 실망하는 이유는 본질적으로 이 때문이야. / 257p

 

 

 

사람이 된다는 것의 진짜 의미

 

 

  인간성을 ‘획득’해야 하는 삶을 사는 것이 존재의 목표였던 안드로이드 잭은 안드레아라는 여성을 만나면서 이제껏 느껴보지 못했던 다양한 감정들을 경험하게 된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끌리는 것은 단순히 어떤 한 특정 부분이나 과학적인 분석에 의한 것이 아니듯, 그 역시 각각의 구성 요소로 나눌 수 없는 다양한 요소가 통합적으로 작용해 그녀를 특별하게 여기는 것이라는 깨달음을 얻는다. 또한 안드레아를 통해 경험을 하면서 무언가가 존재한다고 단순히 아는 것과 직접 내 눈으로 보는 건 다른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때로는 방대한 정보의 데이터를 지닌 자신보다 과학적이지는 않아도 오히려 그 이상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사람의 직관이라는 힘을 깨닫기도 한다. 즉, 잭은 사람이 되는 일이란 그저 사람처럼 보이는 일들을 습득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감정과 직접 맞부딪혀 얻은 경험을 통해서야 진짜 사람이 될 수 있음을 느끼게 된다.

 

 

의식이 실재에 존재하는 혼돈과 접속했을 때 느끼는 감정을 내부에서 분석하는 문제는 도저히 처리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해. 사람들도 감정을 분석하는 일은 우리만큼이나 어려워하는 게 분명했어. 그렇지 않다면 그렇게나 많은 시간을 들이고, 더구나 혼자 하는 것도 아니라 친구나 치료사, 사제 같은 여러 다른 사람과 함께 수천 개가 넘는 방법으로 감정을 분석하려고 연구하고 모형을 만들려고 애쓸 리는 없을 테니까. 그때 나는 한 가지가 궁금해졌어. 이게 바로 ‘사람이 된다’는 것의 진짜 의미가 아닐까, 하고 말이야. 실재가 의식을 부추겨 느끼는 다양한 감정에 놀라고 혼란을 느끼는 거 말이야. / 178p

 

 

한 도시에 살고 있는 사람 전부는 고사하고 단 한 사람이 만들어내는 상태도 무한하기 때문에(카오스), 한 사람만 연구해도 끝이 없는 거야(프랙탈), 목적지에 가까워질수록 내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은 ‘우리가 인간성을 경험하면서 느끼는 감정은 사람들이 석양을 바라보면서 경험하는 감정과 비슷하지 않을까?’였어. 매일 찾아오는 석양은 본질적으로는 프랙탈이지만 그 순간순간은 예측이 불가능한 카오스니까. 사람들이 석양을 볼 때마다 황홀해지는 건 그 모습을 예측할 수 없다는 점 때문일 거야. 사람들 대부분이 자기 인생이, 자기가 속한 사회가 사실은 자신만의 석양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는 건 참 신기한 일이야. 우리 안드로이드에게는 사람을 바라본다는 건 매일매일 저무는 석양을 보는 것과 같은데 말이야. / 26p

 

 

   인간처럼 보이기 위해 안드로이드가 해야 할 일들은 대부분이 실망스러울 만큼 위선적인 행동들로 가득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드로이드가 인간성을 체득하면서 얻게 되는 가장 중요한 깨달음은 인간에 대한 ‘경외심’인 듯하다. 끊임없이 이기주의와 이타주의의 균형을 맞추려고 하는 삶들, 안드로이드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능력적인 한계와 적은 정보를 지니고서도 이토록 많은 일을 해내왔던 인간들, 물리적으로 능력 밖의 일들마저도 의지 하나로 뛰어넘으려했던 그 수많은 시도들 말이다. 우리가 알파고에게 단 한 번 이겼을 뿐임에도 빛나는 묘수를 보여준 이세돌 기사에게 환호를 보낼 수밖에 없었던 그 장면처럼.

 

 

   이 책을 읽으며 느낀 점은 인간이란 참 복잡하고도 정교한 동물이구나 하는 생각이었다. 생존을 위해 마련해야 했던 수많은 시스템과 더불어 살아가기 위해 매우 복잡하고도 세밀한 감정들을 주고받아야 했던 인간들의 삶이 그저 놀랍기만 하다. 이처럼 안드로이드의 시각을 통해 인간의 모습을 훔쳐본 듯한 기분이 든 놀라운 책 <완벽한 호모 사피엔스가 되는 법>은 최근에 본 책 중 가장 이색적이고 새로운 유형의 철학책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흥미로운 것은 곳곳에 인간에 대한 위트 있는 해석들이 읽는 재미를 더한다는 점이다. 간혹, 이건 좀 너무한데 할 만큼 정곡을 찌르는 위선과 가식적인 요소들이 눈에 띄지만 충분히 공감하며 우리 스스로 되돌아보아야 할 많은 면면들을 마주하게 하는 의미 있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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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존감 심리학 - 있는 그대로 살아도 괜찮아
토니 험프리스 지음, 이한기 옮김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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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나’는 누구인가?

참 자아를 찾아 자유롭고 단단한 존재로 나아가기 위한 계발서!

 

 

  요즘 들어 세 살 된 아들을 낳고 키우면서 아이의 감정에 따라 나의 감정이 지나치게 동요되는 경우가 잦아지고 있다. 그간 웬만한 갈등과 상처에도 흔들리지 않고 중심을 잡음으로써 겉으로는 내면을 잘 드러내지 않았던 나로서는 무척 당황스러운 경험의 연속이었다. 이렇듯 빈번하게 발생하는 감정소모에 인내심은 사라지고, 타인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예민해지기 일쑤며 심지어 나 자신을 왜곡하는 심리적인 문제가 종종 발견되었다. 스스로 자존감이 많이 떨어진 상태에 이르렀음을 직감한 것이다.

 

 

   어쩌면 현재 우리 사회 전체의 정서를 위협하고 있는 것 또한 이와 다르지 않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다양한 매체와 책에서 눈에 띄게 늘어난 키워드가 바로 ‘자존감’인 듯하니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세계적인 임상 심리학자인 토니 험프리스의 <자존감 심리학>은 보다 근원적인 자존감의 정체성을 들여다봄으로써 진정한 자존감의 회복을 이끌어주는 심리서이자 자기계발서인 듯하다. 무엇보다 이 책은 우리 자신이나 행동의 어떤 측면을 바꾸라고 말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상당히 인상 깊다. 바꾸는 것이 아니라 숨겨왔던 것들을 드러내고 끌어안아주는 일을 통해 온전한 나를 찾는 것에서부터 자존감 회복이 시작된다고 말한다.

 

 

자아 표현을 방해하는 것들

 

 

   저자는 참 자아의 뿌리를 유아기에서 찾는다. 유아는 감정과 몸이 항상 정직하고 충실하다. 감정을 드러내는 것뿐만 아니라 받아들이는 데도 탁월한 능력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있는 그대로의 자기를 표현하려는 유아의 욕구는 신성한 자기 근원을 드러내고자 하는 욕구의 표현이며, 어른들이 이것을 존중해줄 때야 건강한 자존감 형성에 이바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참 자아로 존재하지 못하는 현상은 유아기에서 시작되어 나이가 들수록 더 깊고 빠르게 진행된다. 자아 표현에 방해가 되는 행동을 얼마나 자주, 또 얼마나 강하게 오래 지속되는가에 따라 그 부정성의 정도가 결정된다.

 

 

유아가 보여주는 모든 행동은 항상 감정과 관련해서 이해될 수 있다. 유아의 행동 중에서 우둔하거나 부정적이거나 무의미하거나 비정상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하지만 유아가 지닌 지혜를 제대로 알아보는 어른이 별로 없다. 간혹 부모는 자녀의 어떤 행동에 거친 반응을 보이곤 하는데, 이것은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한 것일 뿐이다. 부모가 다른 사람의 행동을 이해하려는 의지가 없으면 자녀는 내면의 안정감을 쌓을 기회를 놓칠 수밖에 없다. / 28p

 

 

   공격성, 비난, 변덕, 경쟁심, 과잉보호, 수동성, 조급함 등은 어른과 아이들이 비슷하게 경험하는 전형적인 방해 행동이다. 참 자아에 대한 위협은 사랑 표현에 인색하여 지지 행동이 없을 때도 일어난다. 신체를 왜곡하거나, 지적 표현을 비난하고, 자연스러운 표현과 같은 선천적인 욕구를 행동으로 표현하는 것을 방해하며, 차이를 인정하고 격려하기보다 순응을 권하는 사회적인 요소들도 마찬가지다. 이 외에도 저자는 사회적인 존재로써 가족, 학교, 종교, 직장 내에서 자아를 그늘지게 하는 다양한 문화가 한 개인과 공동체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는지 설명한다.

 

 

문화가 긍정적이고 힘이 있으며 창조적일 때, 모든 구성원에게 풍부한 가능성이 열린다. 건강한 문화는 모든 구성원이 개성을 표현하고 창조적이고 독특한 방식으로 삶을 꾸려가는 것을 인정한다. 또한 건강한 문화는 집단의 영향을 인정하고 모든 구성원을 배려하며 공동 책임을 보장하는 사회 구조를 만든다. 이러한 문화는 구성원들이 서로 교감하고 조화를 이루는 공동 책임과 협동에 초점을 맞춘다. 개인과 집단 간의 권리와 요구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문화일수록 친밀감의 수준도 그만큼 높다. / 67p

 

 

참 자아와 그림자 자아

 

 

  안타깝게도 자아를 그늘지게 하는 다양한 요소들로부터 벗어나 진정한 나를 찾아나가려는 적극적인 태도는 필연적으로 다른 사람들의 불안을 자극하고 장애물을 만들게 된다. 때문에 우리의 참 자아는 그림자 안에 교묘히 숨어 있게 된다. 이는 일종의 방어수단으로 우리를 보호하는 장치가 되어 다양하게 작동한다. 저자는 흔히들 공격적인 대응, 수동적인 대응, 수동공격적인 대응, 환상적 대응, 망상적인 대응 같은 다섯 가지 방어 전략을 이용하여 참 자아를 부분적으로 또는 전적으로 숨긴다고 설명한다. 문제는 내가 숨을 때 다른 이들도 숨음으로써 모두가 진실해질 수 있는 기회를 놓쳐버리고 마는 것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중요한 것은 그림자 자아가 보여주는 나의 잠재의식을 읽어내는 데 있다. 이 책에 의하면, 그간 나는 “내가 배려하는 것은 상대방에게 배려 받고 싶은 나의 욕구가 투시된 결과”였다. 또한 저자가 제시한 그림자의 이름표를 통해 자아의 모습을 깊이 관찰해보면 내가 나 자신을 평소에 어떻게 묘사하는지, 잠재의식 속에 숨겨진 참 자아의 본 모습은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다. 이때 우리가 도전해야 할 것은 의식적인 그림자 행동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잠재의식적인 그림자 아래 숨겨진 것을 드러내는 일이다. 즉, 저자는 부정하고 있는 약점과 맞붙어야만 자아와 다른 사람들과의 합일을 이끌어낼 수 있다고 말한다.

 

 

의식적인 행동 밑에는 잠재의식 차원의 문제가 존재한다. 앞서 든 사례에서 비난을 몹시 싫어한다는 것이 문제다. 이 상황에서 도전해야 할 과제는 공격적이지 않으려 애쓰는 것이 아니다. 자신을 비평하는 것에 위협을 느끼지 않는 것이다. 만약 타인의 비난을 나에 대한 정보를 얻는 정도로 이해한다면, 위협적인 요소를 제거하고 공격적인 그림자 행동을 없앨 수 있다. 보호 장치로 작용하는 공격적인 행동은 치유해야 할 약점을 드러내기도 한다. / 114p

 

 

자아를 깨닫는 것은 우리 자신이나 행동의 어떤 측면을 바꾸는 게 아니다. 방어 행동은 건전하고 신성한 목적으로 개발되었기에 이런 행동을 제거하려 하는 것 자체가 그림자 행동이 된다. 그림자 자아는 변화의 대상이 아니다. 그동안 우리를 위해 어떤 역할을 감당해온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끌어안아야 한다. 우리의 과제는 그렇게 오랫동안 숨겨온 것을 깨닫고 표현하는 것이다. / 174p

 

 

 

 

 

자존감 회복에 좋은 연습

 

 

  자존감을 회복하고 높이기 위해서 단숨에 나의 행동 변화를 촉구할 수는 없는 일이다. 앞서 말한 대로 자아 바꾸기가 아니라 그림자 자아 속에 숨겨진 잠재의식을 읽어내고 그것을 끌어안음으로써 책임감을 가지는 것이 보다 중요하다. 나 자신에 대한 진실을 표현하는 자신만의 언어를 발견하는 것 또한 필요하다. 사소하게 보일지라도 강하게 공감하는 몇 가지 핵심적인 긍정의 말을 준비하여 위기의 순간뿐만 아니라 일상생활 속에서도 규칙적으로 사용하면 의외로 큰 효과를 볼 수 있다고 일러준다. 이 외에도 요통, 두통, 비만, 체중 미달, 위통, 가슴앓이와 같은 질병이나 신체 증상이 전하는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또한 하루를 끝낼 무렵에 정서적 갈등을 해소하는 습관을 들여서 직관을 기르고, 타인의 의견을 수용하고 감정을 배려하되 내적으로는 자신에 대한 진실한 태도를 유지할 것을 권장한다. 근본적으로는 어릴 적부터 안정되고 조건 없는 인간관계를 맺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아이가 있다 보니 이 점에서 나는 물론, 아이의 자존감 형성에 내가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는지 보다 절실하게 깨달았다.

 

 

개인성은 성숙한 가정을 이루는 초석이다. 스스로 개인성을 실현한 부모는 자녀로부터 비슷한 특성을 찾아 길러줄 수 있다. 더불어 부모는 자녀가 주변의 다양한 문화에 적응해야 한다는 사실, 그리고 사회 제도에 진입하기 위한 준비와 교육이 필요하다는 사실도 인식해야 한다. 아이가 가정 바깥의 세계에 적응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적응하고 발전하는데 필요한 믿음과 활동을 부모가 모범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부모는 아이에게 문화의 어두운 측면을 알려주어야 한다. 그리고 독립심과 분별력, 자아 깨닫기를 위협하는 어둠에 저항하는 힘을 길러주어야 한다. / 222p

 

 

   저자는 어른이건 아이건 누구나 각자의 특별함을 인정받을 권리가 있다고 말한다. “너는 있는 그대로 특별하단다”라고 말해주는 것보다 더 용기를 주는 일은 없다고,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일이야 말로 진정한 자존감 회복의 초석이라고 말이다. 무엇이 나의 진짜 모습일까, 진짜 내 마음을 표현하기가 왜 이리 힘든 것일까, 나는 과연 사랑받을만한 자격이 있을까와 같이 정서적 외로움을 견뎌내고 있을 나와 많은 이들에게 이 책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있는 그대로 살아도 괜찮다는 위로 정도만이라도 괜찮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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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허설
엘리너 캐턴 지음, 김지원 옮김 / 다산책방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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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병처럼 파고드는 10대들의 욕망과 발칙한 상상력!

연극과 현실을 넘나드는 독창적인 스타일로 이뤄낸 수작!

 

 

 

   28세의 나이로 두 작품 만에 맨부커상을 수상했다는 이 놀라운 작가의 이력만으로도 충분히 궁금했던 작품, 『리허설』. 푸른색의 두터운 양말을 신은, 소녀의 것으로 짐작되는 ‘발목’에 포커스를 둔 표지가 인상적이다. 문학을 포함한 예술 작품 속에는 여성성을 상징하는 다양한 기호들이 존재하는데, 유연하고 매끄러운 다리를 떠받치는 가느다란 ‘발목’이 그 중 하나가 아닐까. 조심스럽게 내딛은 두 다리와 발목을 드러내지 않고 두텁게 감싼 양말은 이미 그 자체로 불온한 상상력을 품게 한다.

 

 

 

 

 

 

 

 

 

욕망과 불안을 오가는 10대라는 변주의 초상

 

 

   어느 날, 나의 친구 혹은 다른 반의 누군가가 학교 선생님과 관계를 맺었다는 사실이 전교에 파다하게 퍼지게 된다면? 그 뒤에 펼쳐질 일이란 자연히 수습하려는 학교의 태도와 온갖 상상으로 덧입혀진 불순한 이야기가 학생들 사이에서 떠도는 것을 상상하기란 무리가 아닐 것이다. 이렇듯『리허설』은 음악 선생님과 여학생 빅토리아의 섹스 스캔들이 일어난 고등학교를 배경으로 학생들 사이에 혼재하는 불안과 성에 대한 욕망을 대담하게 표현한 작품이다. 내용은 근처 스튜디오에서 색소폰을 가르치는 선생이 빅토리아의 동생인 이솔드를 포함해 줄리아, 브리짓 등과 같은 주변 인물들을 통해 사건의 전말과 그들이 지닌 내적 혼란을 들여다보는 것으로 전개된다. 특히, 이솔드는 열여섯이 미처 안 된 나이로 언니의 스캔들로 인해 ‘세상의 더럽고 변태적인 매력을 목격해 강해지고 무감각해졌지만 아직 자신이 듣고 본 것을 직접 느껴보지는 못했기에 작은 의심의 씨앗을 기르는’ 예민하고도 복잡한 소녀성을 상징한다. 반면, 줄리아는 소녀들 사이에서 마치 인기 없는 여자애처럼 별난 소녀지만 성교육 수업 중에 선생님을 상대로 발칙한 주장을 할 줄 아는 솔직함으로 이솔드의 마음에 파문을 일으키는 이야기의 중심축으로 등장한다. 이렇듯 소설은 성(性)에 민감하기 마련인 10대들의 고민과 혼란으로 흔들리는 학교의 모습을 매우 사실적이면서도 정교하게 그려낸다.

 

 

“그 선생님들은 그걸 주사처럼 여겨요.”

브리짓이 이번엔 더 큰소리로 말했다.

“병균을 약간만 투여하면 몸이 진짜 병에 대비해 방어막을 세울 수 있는 백신처럼요. 선생님들은 전에 우리한테 옮겨본 적 없는 병이라서 두려워하고 있고, 그래서 이 병이 진짜로 어떤 건지 말하지 않고서 예방할 방법을 찾으려 하고 있어요. 은밀하게, 우리가 알아채지 못하게 백신을 놓고 싶은 거예요. 하지만 아무소용 없을 걸요.” / 25p

 

 

여자아이들은 모두 다 비밀을 마지막으로 알게 된 사람이라는 역겨운 수치심에 시달리느라 침묵을 지켰다. 그들은 그동안 내내 빅토리아가 그들이 무너지는 걸 보면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내내 그들 사이에 앉아서는 잘난 척 자신의 비밀을 입 다물고 있었다는 사실에 서서히 분노가 치미는 것을 느꼈다. 이제 그들은 살라딘 선생을 향한 자신들의 별 뜻 없는 수줍은 추파를 창피한 기분으로 떠올려야 했고, 가슴이 두근거리던 그 행복한 순간의 기억은 전부 다 그가 이미 빅토리아의 것이었고 이미 빼앗긴 존재였다는 사실로 더렵혀졌다. / 89p

 

 

  한편, 소녀들의 학교 애비 그레인지 인근에 있는 명문 연기 학교에서는 오디션이 한창 진행 중이다.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무대 위의 배우가 되기를 갈망하는 스탠리의 이야기가 앞선 내용과 교차 진행된다. 여기에서는 배우를 도전하는 이들에게서 기민하게 반짝이는 무언가를 찾으려 하고 ‘불경하다고 여기는 모든 걸 성스럽게 만들고, 그들 하나하나에게 도전해 겁먹게 하거나 웃게 만들려하는’ 학교 선생님들의 모습과 그들의 특별한 과제를 학생들이 수행해야하는 여정이 그려진다. 스탠리는 과제를 수행해가면서 그 낯선 방식에 복잡한 감정을 느끼게 되고, 편승하지 못할 거라는 불안감에 세간을 떠들썩하게 한 섹스 스캔들을 주제로 한 연극을 과제의 주제로 삼게 된다. 스탠리의 이야기에서 주목할 점은 부모들의 기대와 틀에 맞춰야만 하는 앞선 소녀들의 학교와 달리 갇힌 틀에서 벗어나길 바라는 연기과 선생님들을 통해, 어른이라는 무대에 오르기 전에 숱한 좌절과 경험을 맛보길 진정으로 바라는 작가의 진정이 담겨져 있다는 데 있다.

 

 

“무대는 진짜 인생이 아니고, 진짜 인생의 복제도 아니야. 조각상과 마찬가지로 일이 ‘지금 일어나는’ 장소지. 평소에는 일어나지 않는 일이 무대에서는 일어나. 무대는 사람들이 다른데서는 볼 수 없는 것들에 접근할 수 있는 ‘장소’야. 무대는 우리가 어떤 일을 목격할 수 있는 곳이지. 그렇게 해서 우리가 그 일을 직접 느끼거나 실행할 필요가 없도록 해주는 거야.” / 59p

 

 

“애들을 다 봤는데, 희망도, 열정도, 투지도 별로 없더군요. 다들 절대로 팔리지 않고, 절대로 인상에 남지도 않을 얼굴 안에 갇혀 있어요. 비극도, 힘든 것도, 극단적인 것도, 공정한 것도 겪어본 적 없는 현대적이고, 소중하게 보살핌 받은 보들보들한 얼굴에요…… 맙소사, 그 애들 대부분은 거의 평생을 ‘안에 갇혀’ 살아왔어요.” / 177p

 

 

인생의 리허설이라는 무대에 오른 10대들

 

 

“모든 일엔 선례가 있어. 내가 했던 모든 일에 본보기가, 공식이, 견본이, 공개적이고 보기 쉽고 ‘잘 알려진’ 그런 게 있었지. 난 내가 만난 모든 것의 형체를 만나기 전부터 이미 알고 있었어. 본보기란 항상 현실이나 경험, 개인적인 진실보다 앞서는 법이야. 난 영화에서, 텔레비전에서, 무대에서 사랑을 배웠지. 공식을 배우고 그다음에 적용했어. 나한텐 그런 식이었어. 인생 전체가.” / 247p

 

 

   어쩌면 우리 모두는 어떠한 본보기를 따라 그 형식과 틀 속에서 자란 존재들일지도 모른다. 진짜 경험을 하기 전부터 이미 누군가로부터 들은, 매체로부터 본, 부모들의 정해진 기대와 바람 속에서 ‘본보기란 항상 현실이나 경험, 개인적인 진실보다 앞서는 법’이라던 극중 팻시의 대사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그러나 이 시기를 나중에 올 모든 것에 대한 리허설로 삼는다면 어떨까. 각종 변수들이 난립하는 삶 속에서 리허설을 겪는다고 해서 삶이 보다 나아질 수는 없지만, 실패에 부딪혀도 더 빛날 수 있는 인생의 진짜 ‘무대’가 있을 거라는 희망을 잃지 않는 게 중요한 게 아닐까.

 

 

“블라이 부인, 따님의 삶에서 지금 이 시기는 나중에 올 모든 것에 대한 리허설일 뿐이라는 걸 기억하세요. 모든 것이 잘못되는 게 그 애한테는 가장 좋은 일이라는 것도 기억하시고요.” / 375p

 

 

   엘리너 캐턴은 굉장히 정교하고 구체적인 묘사와 때로는 ‘커다란 분홍색 감정덩어리’와 같은 은유적인 문장을 구사할 줄 아는 힘을 지닌 작가인 듯하다. 그러나 상황에 대한 지나치게 구체적인 문장이 독자의 이해도를 떨어뜨리는 게 아쉽다. 꽤 집중력 있게 읽지 않으면 다시 되짚어 읽어야 하는 수고로움을 꼭 겪곤 했기 때문이다. 또한 현실과 연극을 오가는 구조적인 형식의 글이라 몰입에도 방해를 받는다. 이 부분은 독자마다 호불호가 있을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연소 맨부커상 수상자의 소설답게 전 세계의 독자들에게 남다른 독창성과 울림이 빛나는 수작인 것만은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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