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허설
엘리너 캐턴 지음, 김지원 옮김 / 다산책방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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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병처럼 파고드는 10대들의 욕망과 발칙한 상상력!

연극과 현실을 넘나드는 독창적인 스타일로 이뤄낸 수작!

 

 

 

   28세의 나이로 두 작품 만에 맨부커상을 수상했다는 이 놀라운 작가의 이력만으로도 충분히 궁금했던 작품, 『리허설』. 푸른색의 두터운 양말을 신은, 소녀의 것으로 짐작되는 ‘발목’에 포커스를 둔 표지가 인상적이다. 문학을 포함한 예술 작품 속에는 여성성을 상징하는 다양한 기호들이 존재하는데, 유연하고 매끄러운 다리를 떠받치는 가느다란 ‘발목’이 그 중 하나가 아닐까. 조심스럽게 내딛은 두 다리와 발목을 드러내지 않고 두텁게 감싼 양말은 이미 그 자체로 불온한 상상력을 품게 한다.

 

 

 

 

 

 

 

 

 

욕망과 불안을 오가는 10대라는 변주의 초상

 

 

   어느 날, 나의 친구 혹은 다른 반의 누군가가 학교 선생님과 관계를 맺었다는 사실이 전교에 파다하게 퍼지게 된다면? 그 뒤에 펼쳐질 일이란 자연히 수습하려는 학교의 태도와 온갖 상상으로 덧입혀진 불순한 이야기가 학생들 사이에서 떠도는 것을 상상하기란 무리가 아닐 것이다. 이렇듯『리허설』은 음악 선생님과 여학생 빅토리아의 섹스 스캔들이 일어난 고등학교를 배경으로 학생들 사이에 혼재하는 불안과 성에 대한 욕망을 대담하게 표현한 작품이다. 내용은 근처 스튜디오에서 색소폰을 가르치는 선생이 빅토리아의 동생인 이솔드를 포함해 줄리아, 브리짓 등과 같은 주변 인물들을 통해 사건의 전말과 그들이 지닌 내적 혼란을 들여다보는 것으로 전개된다. 특히, 이솔드는 열여섯이 미처 안 된 나이로 언니의 스캔들로 인해 ‘세상의 더럽고 변태적인 매력을 목격해 강해지고 무감각해졌지만 아직 자신이 듣고 본 것을 직접 느껴보지는 못했기에 작은 의심의 씨앗을 기르는’ 예민하고도 복잡한 소녀성을 상징한다. 반면, 줄리아는 소녀들 사이에서 마치 인기 없는 여자애처럼 별난 소녀지만 성교육 수업 중에 선생님을 상대로 발칙한 주장을 할 줄 아는 솔직함으로 이솔드의 마음에 파문을 일으키는 이야기의 중심축으로 등장한다. 이렇듯 소설은 성(性)에 민감하기 마련인 10대들의 고민과 혼란으로 흔들리는 학교의 모습을 매우 사실적이면서도 정교하게 그려낸다.

 

 

“그 선생님들은 그걸 주사처럼 여겨요.”

브리짓이 이번엔 더 큰소리로 말했다.

“병균을 약간만 투여하면 몸이 진짜 병에 대비해 방어막을 세울 수 있는 백신처럼요. 선생님들은 전에 우리한테 옮겨본 적 없는 병이라서 두려워하고 있고, 그래서 이 병이 진짜로 어떤 건지 말하지 않고서 예방할 방법을 찾으려 하고 있어요. 은밀하게, 우리가 알아채지 못하게 백신을 놓고 싶은 거예요. 하지만 아무소용 없을 걸요.” / 25p

 

 

여자아이들은 모두 다 비밀을 마지막으로 알게 된 사람이라는 역겨운 수치심에 시달리느라 침묵을 지켰다. 그들은 그동안 내내 빅토리아가 그들이 무너지는 걸 보면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내내 그들 사이에 앉아서는 잘난 척 자신의 비밀을 입 다물고 있었다는 사실에 서서히 분노가 치미는 것을 느꼈다. 이제 그들은 살라딘 선생을 향한 자신들의 별 뜻 없는 수줍은 추파를 창피한 기분으로 떠올려야 했고, 가슴이 두근거리던 그 행복한 순간의 기억은 전부 다 그가 이미 빅토리아의 것이었고 이미 빼앗긴 존재였다는 사실로 더렵혀졌다. / 89p

 

 

  한편, 소녀들의 학교 애비 그레인지 인근에 있는 명문 연기 학교에서는 오디션이 한창 진행 중이다.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무대 위의 배우가 되기를 갈망하는 스탠리의 이야기가 앞선 내용과 교차 진행된다. 여기에서는 배우를 도전하는 이들에게서 기민하게 반짝이는 무언가를 찾으려 하고 ‘불경하다고 여기는 모든 걸 성스럽게 만들고, 그들 하나하나에게 도전해 겁먹게 하거나 웃게 만들려하는’ 학교 선생님들의 모습과 그들의 특별한 과제를 학생들이 수행해야하는 여정이 그려진다. 스탠리는 과제를 수행해가면서 그 낯선 방식에 복잡한 감정을 느끼게 되고, 편승하지 못할 거라는 불안감에 세간을 떠들썩하게 한 섹스 스캔들을 주제로 한 연극을 과제의 주제로 삼게 된다. 스탠리의 이야기에서 주목할 점은 부모들의 기대와 틀에 맞춰야만 하는 앞선 소녀들의 학교와 달리 갇힌 틀에서 벗어나길 바라는 연기과 선생님들을 통해, 어른이라는 무대에 오르기 전에 숱한 좌절과 경험을 맛보길 진정으로 바라는 작가의 진정이 담겨져 있다는 데 있다.

 

 

“무대는 진짜 인생이 아니고, 진짜 인생의 복제도 아니야. 조각상과 마찬가지로 일이 ‘지금 일어나는’ 장소지. 평소에는 일어나지 않는 일이 무대에서는 일어나. 무대는 사람들이 다른데서는 볼 수 없는 것들에 접근할 수 있는 ‘장소’야. 무대는 우리가 어떤 일을 목격할 수 있는 곳이지. 그렇게 해서 우리가 그 일을 직접 느끼거나 실행할 필요가 없도록 해주는 거야.” / 59p

 

 

“애들을 다 봤는데, 희망도, 열정도, 투지도 별로 없더군요. 다들 절대로 팔리지 않고, 절대로 인상에 남지도 않을 얼굴 안에 갇혀 있어요. 비극도, 힘든 것도, 극단적인 것도, 공정한 것도 겪어본 적 없는 현대적이고, 소중하게 보살핌 받은 보들보들한 얼굴에요…… 맙소사, 그 애들 대부분은 거의 평생을 ‘안에 갇혀’ 살아왔어요.” / 177p

 

 

인생의 리허설이라는 무대에 오른 10대들

 

 

“모든 일엔 선례가 있어. 내가 했던 모든 일에 본보기가, 공식이, 견본이, 공개적이고 보기 쉽고 ‘잘 알려진’ 그런 게 있었지. 난 내가 만난 모든 것의 형체를 만나기 전부터 이미 알고 있었어. 본보기란 항상 현실이나 경험, 개인적인 진실보다 앞서는 법이야. 난 영화에서, 텔레비전에서, 무대에서 사랑을 배웠지. 공식을 배우고 그다음에 적용했어. 나한텐 그런 식이었어. 인생 전체가.” / 247p

 

 

   어쩌면 우리 모두는 어떠한 본보기를 따라 그 형식과 틀 속에서 자란 존재들일지도 모른다. 진짜 경험을 하기 전부터 이미 누군가로부터 들은, 매체로부터 본, 부모들의 정해진 기대와 바람 속에서 ‘본보기란 항상 현실이나 경험, 개인적인 진실보다 앞서는 법’이라던 극중 팻시의 대사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그러나 이 시기를 나중에 올 모든 것에 대한 리허설로 삼는다면 어떨까. 각종 변수들이 난립하는 삶 속에서 리허설을 겪는다고 해서 삶이 보다 나아질 수는 없지만, 실패에 부딪혀도 더 빛날 수 있는 인생의 진짜 ‘무대’가 있을 거라는 희망을 잃지 않는 게 중요한 게 아닐까.

 

 

“블라이 부인, 따님의 삶에서 지금 이 시기는 나중에 올 모든 것에 대한 리허설일 뿐이라는 걸 기억하세요. 모든 것이 잘못되는 게 그 애한테는 가장 좋은 일이라는 것도 기억하시고요.” / 375p

 

 

   엘리너 캐턴은 굉장히 정교하고 구체적인 묘사와 때로는 ‘커다란 분홍색 감정덩어리’와 같은 은유적인 문장을 구사할 줄 아는 힘을 지닌 작가인 듯하다. 그러나 상황에 대한 지나치게 구체적인 문장이 독자의 이해도를 떨어뜨리는 게 아쉽다. 꽤 집중력 있게 읽지 않으면 다시 되짚어 읽어야 하는 수고로움을 꼭 겪곤 했기 때문이다. 또한 현실과 연극을 오가는 구조적인 형식의 글이라 몰입에도 방해를 받는다. 이 부분은 독자마다 호불호가 있을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연소 맨부커상 수상자의 소설답게 전 세계의 독자들에게 남다른 독창성과 울림이 빛나는 수작인 것만은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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