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하이, 여자의 향기
왕안이 지음, 김태성 옮김 / 한길사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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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문밖으로 확장되어 펼쳐지는 도시의 내밀한 흔적들!

시대의 흔적과 기억을 고스란히 간직한 상하이를 추억하다!

 

 

  “우리는 자신이 살고 있는 곳의 역사를 단 한 번도 더듬어보지 않는다.”

   중국의 유명한 소설가이자 <상하이, 여자의 향기> 저자인 왕안이는 자신의 소설 첫머리에서 이렇게 쓴 적이 있다고 한다. 내가 딛고 있는 이 터전의 뿌리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알고자 하는 것은 생각 이상으로 낯선 일이다. 너무나 구체적이고 일상이 진득하게 밀착되어 있는 탓에 자칫 사적인 경험과 언어들로 전락할 수 있는 까닭이다. 마찬가지로 상하이를 대표하는 작가라 불리는 만큼 책의 저자 역시 이에 대한 고충을 먼저 토로한다. 그래서 도록이나 연감 등과 같은 객관적인 자료들이나 고서를 살펴보기도 하지만 오히려 상하이라는 도시가 멀게만 느껴졌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일상에 녹아든 기민한 감각으로, 상하이의 다양한 풍광들을 묘사하고 저자의 기억을 재구성하여 한 편의 ‘상하이 수채화’ 같은 낭만을 선사한다.

 

 

 

 

 

 

 

 

거리의 풍경은 삶의 결심이자 활짝 열린 얼굴이다     

 

 

   ‘동양의 파리’, ‘중국의 뉴욕’이라 불리는 모던의 도시, 상하이. 그곳에서는 생의 움직임이 느껴지는 얼굴들, 빛과 소리, 냄새로 표정을 바꾸는 거리의 모습들, 날 것과 감춰진 것들이 때로는 느리게 혹은 빠르게 나타났다 사라지고 있다. 저자는 과거의 기억을 들추고 현재를 읽어내어 다양한 변화를 품고 있는 상하이 도시만의 매력과 가치들을 매우 통찰력 있게 그려낸다. 특히나 ‘감성’이 가장 먼저 포착하는 인상이 얼굴형이라는 그녀의 표현처럼, 거리에 관한 풍경과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도시민들의 모습에서 이 도시의 운치와 깊이가 느껴진다. 작은 구멍가게 여주인이 어울림직한 여자, 책대여점 주인, 나막신 신고 따각따각 소리 내어 거리를 뛰어다니는 아이, 청빈하고 절약하여 얼굴이 싱겁고 담담해 보이는 부녀자의 모습까지, 거리의 표식 같은 존재가 된 이들의 모습을 매우 세밀하게 묘사한다. 억양이 다소 거친 편이고 실용정신이 강하며, 진한 맛을 좋아가고, 거칠고 저속한 모습을 드러내면서도 순수함과 진실함을 추구하는 것을 좋아하는 그네들의 일상을 밀착력 있게 그려내는 점 또한 독자와 상하이와의 거리를 한층 좁혀준다. 뿐만 아니라, 외국문물이 많이 들어와 세상은 변화했으나 뜻밖에도 자신들이 아직 바람직하고 좋은 환경을 건설할 준비가 되어 있지 못하며 점차 낭만적인 색채가 사라져가고, 역사관이나 정신적 가치를 중시하지 않는다는 등 점차 변질되어가는 도시의 오랜 느낌을 간직하고픈 작가의 바램 또한 읽을 수 있다.

 

 

이 도시의 성질은 매우 조급하지만 호방하기도 하기 때문에 지나가는 것들은 그냥 지나가버린다. 이 도시는 내면에 끈질긴 동력을 갖추고 있어 적지 않은 관문과 요새를 뚫고서 마침내 평형에 도달한다. 그런 다음에는 또다시 끈질기게 기울어져 간다. 이 도시가 불안하게 요동치는 것은 욕망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이 도시의 욕망에 관해 얘기하다 보면 우리는 이 도시에 소리가 멈출 수 없다는 알게 될 것이다. 거리의 한구석에서도 커다란 동작은 멈추지 않는다. 전차가 지잉 하고 울리는 소리처럼 욕망이 머리를 들기 때문이다. / 34p

 

 

물을 나르는 물통도 전부 물을 흘린다. 물통에서 흘린 물이 덜컹거리는 물 배달용 수레를 적시면서 뜨거운 김에 휘감긴다. 계압혈탕을 파는 노점상들이 거리에서 닭과 오리의 털을 뽑고 있고, 피는 자연스럽게 거리를 따라 하수구로 흘러든다. 그러다보니 하수구가 막히기 일쑤다. 그럴 때마다 하수구를 뚫는 인부가 어디선가 긴 대나무 막대를 들고 쏜살같이 달려온다. 이곳에 펼쳐지는 풍정은 늘 이렇게 질펀하고 깔끔하지 못하다. 몹시 거칠면서도 선정적이다. / 51p

 

 

 

 

 

여자와 도시, 그리고 여자의 향기

 

 

   저자는 상하이에 대해 글을 쓰자면 가장 대표적인 주제가 바로 ‘여성’이라고 말한다. 사회적 신분의 축적에서 상하이 여성들은 가난한 프롤레타리아로, 혁명가가 많고 그 중에서도 중년 여성이 특별한 대표성을 갖는다고 한다. 그녀들은 행동하는 거인들로, 운명의 결정에 직면하여 단호하고 과단성 있는 태도와 주도면밀한 행동을 보여 스스로 자신의 주인이 되고자 한다. 견고한 기개가 있는 상하이의 여성들은 공격이 아니라 수비의 강인함을 가지고, 득실의 균형을 찾아나가는 지혜를 갖추었다.

 

 

   이는 여성 문학에도 큰 영향을 미치는데, 이들은 큰 시대와 큰 운동, 큰 불행과 큰 승리를 묘사하면서 자신의 작지만 겹겹이 착종된 복잡한 감정들을 함께 표출할 줄 알았다. 아마도 중국의 여인들이 다른 나라의 여인들보다 더 오랫동안 좁은 천지 안에 갇혀 살아온 반면, 중국의 남자들은 정치와 도덕에 대해 좀 더 큰 인생의 이상을 지니고 있었기에 여성 작가들에게는 특히 ‘자아’가 가장 중요한 창작 요소가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시기의 자아의식은 표면적으로만 드러날 뿐, 철저히 자각되지 못하고 깊이가 결여된 채 발산되었음으로 같은 여성 작가로서 자아의 진실성에 대한 성찰과 점검이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 외에도 남성 속에서의 여성, 사회 속에서의 여성으로서 이성적으로 여성 스스로를 성찰한다.

 

 

여성은 남성에 비해 자신의 이미지를 몹시 아끼는 편인 데 비해, 남성은 여성에 비해 어떤 것에도 개의치 않고 수치를 모르는 용감함을 갖고 있다. 여성들은 자신의 자아를 더 잘 느끼고 살필 수 있는 만큼 자아를 더 아끼고 중시한다. 여인들은 인생의 이상을 직조해나가듯이 정성껏 자신들의 이미지를 잘 빚어낸다. 그 결과 여인들은 뜻밖에도 암암리에 남을 속이고 자신마저 속이고 만다. 그렇게 억지로 만들어진 자아가 바로 자신의 자아라고 오인하는 것이다. 사실은 진정한 자아가 아닌데도 말이다. / 167p

 

 

상하이 여인들은 퇴폐적인 극을 연기하지 못한다. 게다가 상하이는 항상 사람들에게 사치와 낭비의 인상으로 각인되어 있기 때문에 실제로는 상하이 사람들의 몸과 기질 속에 강철처럼 단단한 근육과 뼈가 감춰져 있다는 사실을 아무도 알지 못한다. 그들의 그런 몸과 기질이 아니었다면 이 콘크리트 천하가 무엇에 의지하여 버틸 수 있었겠는가. 상하이라는 이 단단한 세계에 사는 사람들은 곧고 강직한 성격을 가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쉽게 영락하고 말 것이다. 우리는 얼마간이라도 이 도시의 진정한 모습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이 도시의 여자들이 강인하게 자신들의 존재와 현실을 대면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 178p

 

 

   이른바 문화대혁명이라 하여, 문예 비판에서 시작하여 정상적인 교육기관이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고 많은 엘리트들이 박해를 당한 때가 있었다. 세상이 온통 어지럽고, 아이나 어른 할 것 없이 작든 크든 그들의 삶에 모든 영향을 끼쳤다. 그녀는 유년 시절에 이 시기를 겪어 지금에 이르기까지 순간순간들을 써나가며 자유롭게 성장할 수 있게 해주고, 충실하게 사상을 개방할 수 있게 해준 이 시대에 감사함을 느낀다. 덕분에 아주 힘든 곤경 속에서도 계속 학습하고 인식하며 실천하고 경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대가 점점 시장에 영합하고, 화려하지만 공허하고 졸렬한 외피를 덧씌우고 있는 것에 안타까움을 느끼는 목소리를 주저하지 않는다. 거칠지만 여리고 탐욕스러우면서도 절제할 줄 아는 상하이만의 정신을 찾고 싶은 건 그녀 뿐만은 아닐 것이다.

 

 

문화시장은 최고의 효율과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졸렬하고 용속한 취미에 영합하기도 한다. 예술가들이 시장에 영합하여 현실을 회피하는 화려하고 공허한 글들을 쏟아내고 있는 것이다. ‘소박하고 표일하며 총명하고 영리한’ 작가들의 재빠른 글쓰기가 이 도시를 가득 메꾸면서 도시 전체에 경박하고 화려한 외피를 씌우고 있다. 이제 또다시 1930년대의 ‘모던 상하이’가 무대에 등장했다. 화려하고 염미한 소리들이 끊이지 않고 있다. 하지만 나는 자신도 모르게 그 속에서 선생의 그림자를 찾게 된다. 그 둔중하고 거대한 그림자를 찾고 있는 것이다. 선생이 있었기 때문에 ‘30년대’는 모던과 향락과 풍류의 시대로 밤마다 음악과 노랫소리가 그치지 않았지만, 동시에 강철의 대오가 있어 사람들을 향해 외치고 버틸 수 있었다. / 133p

 

 

   이처럼 <상하이, 여자의 향기>를 읽으며 시대의 모든 흔적과 기억을 고스란히 간직한 상하이의 풍경 속으로 들어갔다 나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무엇보다 마치 수채화처럼, 풍경화처럼 시적이고 섬세한 문장들이 더욱 매력적인 에세이였다. 함께 출간된 다른 남성 작가가 쓴 <베이징, 내 유년의 빛>은 또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을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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