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징, 내 유년의 빛
베이다오 지음, 김태성 옮김 / 한길사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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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에게 최초의 동력은 바로 유년의 기억이 머물렀던 곳이다!

그때 그 시절, 추억을 좇아 베이징을 재건하다!

 

 

  한 사람의 성장과정에서 기억이라는 저장소는 뜻밖에도 바로 이전의 과거가 아니라 유년기와 청소년기에 더 많은 공간을 할애하는 듯하다. 나의 최초의 동력을 이끌었던 곳, 이른바 유년시절의 고향 말이다. 태어나 스무 해가 넘도록 살았던 나의 고향은 2군 사령부를 마주보고 있는 2층 양옥집이었다. 군복을 입은 군인들이 항상 보초를 서고 있는 군부대라는 위압감 앞에서 개발은 더뎠고, 그래서 조용했던 동네였다. 당시만 하더라도 학교 수업을 마치고 동네 친구들과 밖이나 이집 저집을 전전하며 어울려서 노는 것이 당연했던 때라 아이들의 왁자지껄한 소음이 그나마 동네를 훈훈하게 해주었다. 그러나 이제는 동네를 벗어나 살아서 이따금 그곳을 찾아갈 때면, 이렇게 사람 한 명 보이지 않을 만큼 한산했었나 싶을 정도로 낯설고 적막하게 느껴진다. ‘내게는 완전히 낯선 도시였다. 자신의 고향에서 이방인이 된 셈이었다’는 표현을 서두에 쓴 <베이징, 내 유년의 빛>의 저자 베이다오 역시 오랜 이국 생활에서 돌아온 베이징을 보는 순간 아마도 나와 비슷한 느낌을 가졌으리라 생각된다. 고목이 봄을 맞고 사라진 냄새와 소리 그리고 빛이 돌아오게 하여 나의 베이징을 재건하고 싶었다던 그의 선언이 나의 옛 추억과 풍경을 함께 떠올리게 한다.

 

 

시대 속에 담긴 유년의 일상   

 

 

   1992년 노벨문학상 후보에 올랐던 중국의 대표 시인 베이다오의 <베이징, 내 유년의 빛>은 유년과 청소년 시절의 추억이 담긴 베이징을 글로써 재건한 자전에세이다. 이 책과 하나의 짝을 이룬다고 할 수 있는 <상하이, 여자의 향기>가 상하이를 한 편의 풍경화처럼 묘사한다면, <베이징, 내 유년의 빛>은 저자의 삶을 동력으로 하여 격변의 시대를 누빈 중국의 수도 베이징의 민낯에 보다 더 밀착한 글이라고 할 수 있겠다. 마오쩌둥이 3년 동안 미국을 제압한다는 명목으로 농업을 희생하여 공업을 발전시키려던 정책이 실패하면서 전국적으로 식량부족과 기아현상을 일으킨 3년 곤란시기, 광기어린 축제와도 같았던 문화대혁명, 사회주의 교육 운동과 무력을 이용한 교화가 빈번하게 일어나는 때를 살아야 했던 당시 중국인들의 곤란한 삶이 피로처럼 덕지덕지 붙어있다. 그 속에서 유년과 청소년기를 보낸 저자의 일상은 마치 일기를 들춰보듯 생생하게 펼쳐진다. 특히, 굶주림에 시달리던 시절에도 낭만을 잃지 않는 아버지 덕분에 책과 음악이 어우러진 추억들이나 ‘세 검객’이라 불릴 정도로 그림자처럼 붙어 다닌 친구들과의 일화며, 가난해도 노천 농산물 시장에서 사달라고 졸라 기르게 된 토끼의 먹이를 구하기 위해 여기저기를 전전했던 사연들은 깊은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더군다나 책에 간간이 실려 있는 흑백사진은 당시의 풍경을 더욱 사실적으로 전달한다. 비록 순수했던 유년의 기억에 시대와 사상의 온상이 겹쳐져 서글프고 처연한 광경을 자주 목격할 수 있지만, 그런 와중에서도 따스한 빛과 정서를 잃지 않는다.

 

 

나는 또 남자아이들이 특별히 좋아하는 놀이들을 발견했다. 예컨대 ‘팽이치기’다. 이는 ‘매국노 때리기’라 부르기도 하는데, 아마도 이것이 일본과 전쟁을 하던 시기에 생겨난 놀이라서 그런 것 같다. 팽이는 대부분 아이들이 직접 만들었다. 곡괭이 손잡이를 톱으로 자른 다음, 칼로 원추형으로 깎아 뾰족한 부분에 자전거 베어링을 박아 넣고 넓적한 부분에는 다양한 색깔로 원을 여러 개 그려 넣었다. 그런 다음 빨랫줄을 대나무 막대에 묶어 채찍을 만들었다. 팽이는 정말로 매국노나 소인배처럼 고약했다. 채찍으로 세게 후려칠수록 더 말을 잘 들었고, 후려치지 않으면 이리저리 비틀거려 꼴이 말이 아니었다. 베이징 남자들이 “이 멍청이, 매를 버는 거야?”라고 말하는 것도 바로 여기서 유래한 것인지도 모른다. / 62p

 

 

내 기억 속의 두 번째 레코드판은 차이콥스키 「이탈리아 기상곡」으로, 컬럼비아사에서 제작된 78회전 검은색 에보나이트 레코드판이었다. 70년대 초반, 나와 차오이판, 캉청 등이 자주 우리 집에 모이곤 했다. 모닥불을 둘러싸고 앉아 등으로 찬바람에 저항하는 듯한 분위기의 모임이었다. 책과 음악이 어우러진 이 살롱에는 남몰래 금단의 열매를 맛보는 희열이 있었고, 여인들이 가져다주는 낭만적인 사건들이 있었다. 그것이 우리 글쓰기의 시작이었다. 모두가 작가인 동시에 독자이자 평론가였다. 당시 우리가 썼던 초기 작품들에는 두말할 것도 없이 수백 번 수천 번 반복된 음악이 스며들어 있었다. / 82p

 

 

 

 

 

비틀린 축제와 광기, 문화대혁명

 

 

폭력은 찌는 듯한 더위를 따라 더욱 고조되었다. 도처에서 끊임없이 비판투쟁과 조리돌림, 가택수색, 재산 몰수, 구타가 벌어졌다. 베이징 시내 전체에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모든 사람을 전율케 하는 그 악명 높은 ‘붉은 8월’이었다. / 237p

 

 

   1960년대를 살아온 중국인들에게 있어 ‘문화대혁명’은 자신들의 일상을 뿌리 채 빨아들이는 블랙홀과 다름이 없었다. 우리에게도 박정희 군사정권 시절 이후부터 민주화 운동에 이르는 격변의 시기가 있었듯 중국인들에게도 문화대혁명은 개인과 집단을 송두리째 쥐고 흔든 광란의 시기였던 게 분명한 듯하다. 당시 혁명의 소용돌이에 있었던 베이징 제4중학에 입학하게 된 저자 역시 시류에 휘말리거나 혹은 앞장 설 수밖에 없었다. 문화대혁명이 터지자 수업은 줄줄이 폐지되고, 학교 내에서도 출신 문제 때문에 각종 파벌에 따른 분화가 심해진 관계로 학생들 사이에서도 감당할 수 있는 신음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던 시대였다. 이후 40년간 ‘평민’과 ‘귀족’의 경계가 역사의 상흔이 되어 아물지 않고 있다 하니, 중국인들에게 이 격변의 시기가 남긴 상처가 얼마나 클지 충분히 가늠된다.

 

 

교장과 교사들의 권위와 위엄, 지위가 하룻밤 사이에 땅에 덜어지리라고는 감히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문화대혁명’이 터지자 먼저 대자보가 천지를 뒤덮었고 비판투쟁대회가 쉴새 없이 이어졌다. 절정은 1966년 8월 4일 일요일이었다. 스무 명 남짓 되는 학교 임원과 교사들이 고깔모자를 쓰고 죄명이 적힌 팻말을 목에 건 채 조리돌림을 당한 다음 운동장으로 끌려나왔다. 그들은 학생들의 왁자지껄한 욕지거리와 주먹질, 발길질 사이로 치욕스럽게 비틀거리면서도 지나가야 했다. / 242p

 

 

 

 

 

 

   비록 나라도 다르고 같은 시절을 공유한 적도 없지만, 책은 진하고도 애잔한 유년과 청소년 시절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놀라운 힘을 지녔다. 아마도 어려운 시절에 함께 배곯아가며 상처를 보듬었던 가족애와 친구로부터의 우정이 시절을 막론하고 모두로 하여금 비틀거리지 않고 앞으로 계속 나아가게 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당신께서 저를 불러 아들이 되게 하셨기에 저는 당신을 따라 아버지가 되었습니다”는 글귀는 그래서 더 사무친다. 또한 상큼한 민트색 표지 아래에 천진난만 하게 뛰노는 소년은 나로 하여금 조금 더 오랫동안 책의 여운을 남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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