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의 작업실 - 물질과 연장 그리고 작가의 영혼이 뒹구는 창조의 방
박영택 지음 / 휴먼아트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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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대학시절 동양화를 전공하는 친구를 만나러 학교에 있는 작업실을 찾아간 적이 있었다. 치기어린 청춘남학생들에게 미대란 청순하고 가련한 생머리에다 여리고 새하얀 손가락에 살짝 들려진 붓, 자태마저 영롱하게 의자에 앉아 캔버스를 응시하고 있는 맑고 커다란 눈. 같은 것이었다.

 

(책에 소개된 작가 홍명희의 작업실보다 수십 배는 더욱 더러웠다)

 

그러나, 처음 찾아간 미술 작업실은 한마디로 난장판이었다. 친구의 전공이 동양화라 온통 검은 색일 거라 생각했는데 온갖 색깔의 물감과 덕지덕지 뒹굴어져 정말 더러웠다. 청순하고 가련한 생머리 여자 미대생은 모두 어디가버렸는지 꾀죄죄한 외모에 기름에 폭 빠진 듯 한 머리와 지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혐오스러운 색깔로 뒤덮인 작업용 앞치마를 두른 모습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 이후로 그 친구의 작업실에는 단 한 번도 찾아가지 않았다.

 

물론 이 책 「예술가의 작업실」은 자신의 분야에서 어느 정도 경지에 오른 작가들의 작업실을 찾아간 것이 때문에 대학 전공학생들이 열댓명 모여 함께 작업하는 작업실과는 차원이 다르다.

하지만 어찌 되었건 그때의 큰 실망이 내가 더욱 미술 분야의 문외한이 되는데 한몫 했다고 본다.

 

“그 가운데서 작업실 풍경이 인상적이었고, 엄청난 작업량, 뛰어난 작품성을 지녔다고 생각되는 작가로 한정했다.” (p.293)

“안창홍은 최근 몇 년 동안 쉼 없이 엄습하는 현실에 대한 절망감과 어찌 할 수 없는 무기력함에 대해 자신을 책망하고 괴롭혔다고 한다. 그래서 최악의 컨디션을 견디며 오직 작업에만 매달렸다고 한다. 그것만이 바깥세상을 잊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던 것이다.” (p.58)

 

예술가에게 작업실은 가장 큰 노력을 담고 마음을 쏟아내는 장소일 것이다. 작가 안창홍이 현실에 대한 절망과 무기력을 쉼 없는 작업으로 견딘 것처럼 그들만의 피난처이자 비밀통로인 것이다.

그곳을 들여다본다는 것이 재미있었다.

 

 

 

 

미술 분야에 관해 문외한이던 내게 미술평론가이자 전시기획자인 박영택씨의 친절한 소개는 예술가의 사적 공간을 들여다본다는 관음증 비슷한 시시껄렁한 호기심을 자극했다. 또한 수많은 작가들 중 엄선한 12명의 작가와 그들의 작품 일부를 만날 수 있다는 것도 내겐 큰 호사다.

12명의 작가들 중 나는 대구에 작업실을 둔 작가 최병소씨가 가장 인상 깊었다.

 

 

 

 

신문지에 모나미 검정색 볼펜으로 사선으로 긋고 그 위에 4B연필로 덧칠하고 또 그 위에 볼펜으로 긋고 연필로 덧칠하는 과정을 하는 작업이다.

단번에 ‘이게 뭐야~!’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캔버스에 점하나를 찍던지 선 하나를 긋던지 아니면 아무것도 그리거나 하지 않고 제목만 ‘무제’로 써 놓은 작품을 보면 평소에도 육두문자를 날려대던 나이기에 최병소씨의 작품 또한 그런 것이 아닌가 싶었다.

그런데 그는 좀 달랐다. 출발점이 달랐다는 것이다.

 

“당시 언론은 억압된 침묵으로 일관했고 미술계 역시 현실을 외면하고 있었다. 이때 그는 흡사 난폭한 검열을 흉내 내듯 거세게 신문을 지워 나갔다.” (p..119)

 

“아무것도 그리지 않고 표현한 것도 아닌, 그래서 작가의 조형 의지란 것을 도저히 찾아볼 수 없는 그런 기이한 화면이었지만, 오히려 그 침묵이 더 큰 울림을 주었다.” (p.118)

 

70년대 독재정권하의 어두움을 몸으로 견디며 체득한 행위인 것이었다. 작가는 자신의 몸으로 살아낸 행위를 작품에 그대로 투영할 때 비로소 진정성을 담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화려하지도 뭔가 많은 말을 하지도 않지만 주고자 하는 메시지는 강렬하다.

더군다나 내가 살고 있는 대구에서 이런 작가가 있다는 것도 새삼 반갑다

 

 

 

침묵으로 더 큰 울림을 줄 수 있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에 작가가 수많은 모나미 볼펜과 수많은 4B연필과 수많은 신문지를 몸으로 눌러내며 담아냈을 작업의 고됨이 그대로 느껴진다.

 

‘작가’, ‘예술가’ 라 하면 뭔가 우리들 일반인과는 동떨어진 별나고 특이한 사람으로 인식 된다. 하지만 그들 또한 작업실 대여료나 창작활동을 하기 위한 수단으로 밥벌이 직업을 가져야 하는 현실의 문제를 공감하고 있다는 사실이 반가웠다. 저자가 줄곧 얘기하는 것처럼 그들의 예술 활동 또한 노동활동에 다름 아니다. 밥벌이가 시원찮으면 예술 활동 또한 시원찮다. 동전의 양면처럼 떨어질 수 없는 현실적 한계이다.

그래서 책에 소개된 작가들의 작업실과 삶이 조금은 애틋하고 살갑게 다가온 듯하다.

 

 

“회화란 일정한 평면에 환영을 주는 행위이다. 외부 세계의 사실적 재현 내지는 눈속임을 불러일으키는 장치이다. 그것은 불가피하게 표면 위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다.” (p.278)

 

회화에 대한 저자의 인식이 깊다. 다행히 독자들이 이해하기 쉬울 만큼 평이하게 글을 써내는 능력이 있다. 표면이 주는 2차원과 입체가 주는 3차원의 촉각적 상이함을 글로 표현해 내는 재주가 있다.

 

“우리는 살기 위해 소모하고 표현하기 위해 억압하고 희생한다. 페인팅은 결국 주어진 캔버스 표면을 잠식해 들어가는 일이다. 조각은 물질을 제거하고 변질시키고 상실시킨다. 사진은 대상을 납작한 인화지 안으로 불러들여 부동의 것으로 응결시킴으로써 본래의 상황을 희생시킨다.” (p.288)

 

살기 위해 갖은 애를 쓰지만 생각대로 되지는 않는다. 그래서 지치고 고되지만 꾸역꾸역 견뎌 몸으로 살아내는 것이 인생이다. 캔버스의 표면을 잠식하는 페인팅처럼 내 삶을 갉아먹는 시간을 오롯이 몸으로 받아내는 것이다. 때론 아프고 견디기 힘들만큼 슬프지만 예술가의 창조적인 작업처럼 하루하루를 만들어내야 한다. 그래야 그나마 살아갈 가치 한 줌이라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무거워진 머리로 예술가의 작업실 문을 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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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실격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3
다자이 오사무 지음, 김춘미 옮김 / 민음사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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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삶은 아름다운가? 결코 그렇지 않다. 인간의 삶은 영속성을 구가할 만큼 가치가 있는가? 그것도 잘 모르겠다. 역사로서의 인간의 삶은 가변하지만 소멸하지 않는다. 끈질기게 맥을 잇고 고꾸라지면서도 바통을 넘긴다.

 

“서로가 서로를 속이고 있다는 사실조차 알아차리지 못하는 듯, 정말이지 산뜻하고 깨끗하고 밝고 명랑한 불신이 인간의 삶에는 충만한 것으로 느껴집니다.” (p.27)

 

“너는 너 자신의 끔찍함, 기괴함, 악랄함, 능청맞음, 요괴성을 알아라!” (p.93)

 

명확하고 필수불가결한 담보가 보장되지 않는 한 구차한 존재 증명에 다름 아니다.

‘실격’을 당하고도 여전히 필드(경기장) 위에서 플레이를 할 수 있는 것이 ‘인간’이다. ‘인간’에게 ‘실격’을 줄 수 있는 존재는 없다. 신마저도 그럴 수 없다. 그것은 신의 영역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 실격」을 드디어 읽었다. 너무 읽고 싶었던 책이라 진작에 사두었는데 어찌된 일인지 손에 잡히지 않았다.

책은 기대 이상이다. 다자이 오사무의 요설체 또한 처음 접했지만 스피디하고 구성을 더욱 옹골지게 한다. 문장이 시원시원하고 멋이 있다. 한국의 작가 중에서는 김훈의 글과 문장이 가장 멋있다고 생각하는데 내가 읽어본 일본 작가 중에서는 다자이 오사무가 최고다.

 

 

작품 전체가 자조적 고백이고 차갑고 습하며 어둡지만 웃음이 나고 소설 속 주인공 요조를 만나는 모든 여인들이 그에게 빠져들었던 것처럼 다자이의 글에 빠져든다.

 

완전한 인격이 완전히 실격되는 과정을 그만의 방식으로 풀어낸다. 현실과 이상의 괴리에서 오는 극지대의 크레바스처럼 끝을 알 수 없는 절망이 인격을 완전히 사로잡는다. 그래서 아무리 빠져나오려 해도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는 완전한 무력을 맛본다. 세계대전의 패배 후 겪었던 일본지성의 속살이다. 부당한 방법으로 대지주가 된 부모의 자식으로 태어나 남들이 누리지 못한 삶을 산 것에 대한 자책과 마르크스주의의 대표 선수였지만 사상전향을 한 것에 대한 부끄러움이 작품에 가득하다.

 

현실의 괴로움과 나 자신에 대한 절망을 못내 감추고자 소설 속 요조는 ‘익살’이라는 무기를 쓴다. 상대방보다 먼저 내가 무장해제를 하는 것이다. 다가오기 전 먼저 엎드려 뒤꽁무니를 살살 흔드는 것이다. 그러면 상대는 나에게 웃음을 던진다. 그것이 비웃음인지 쓴웃음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늘 이러한 ‘익살’로 위기를 탈출하고 갈등상황을 만들지 않지만 학교의 어리바리한 친구 ‘다케우치’와 자살방조죄로 심문하던 ‘검사’ 이 두명에게 들키고 만다.

 

“일부러 그런 거지!!”

내가 다 발가벗겨지는 것 같았다. 누구나 숨기고 싶고 감추고 싶은 속내가 있다. 속살이 있다. 그래서 먼저 내가 담을 쌓는다. 꽁꽁 동여맨다. 나만의 세계에 빠진다. 그것을 지켜내려 안간힘을 쓴다. 하지만 어느 순간 갑자기 기별도 없이 들켰을 때 오는 그 황당함과 부끄러움과 수치스러움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다.

인간은 누구나 ‘실격’당하기를 원치 않는다.

 

“저는 소위 장난꾸러기로 보이는 데 성공했습니다. 존경받는 걸 피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p.25)

 

요조의 주위를 뱅뱅 돌며 끝까지 요조와 함께 한 호리키는 친구라기보다는 차라리 ‘내 양심’이다. 때로는 준엄하게 때로는 약 올리며 간섭한다. 때로는 통제하려 한다. 아무리 ‘실격된 인간’이지만 최소한의 가치를 지키게끔 하는 도구다. 그래서 불편하고 짜증나지만 인간은 호리키에서 벗어날 수 없다.

 

“요 색마” (p.107)

“색마! 있나?” (p.91)

부지불식간에 찾아와 뒤통수를 후려친다.

 

“인간 실격. 이제 저는 더 이상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p.131)

 

 

 

참을 수 없는 존재의 황망함. 견딜 수 없는 사유의 무례. 느릿느릿 두꺼비처럼 밑바닥에 달라붙은 실격된 자아.

사실 소설 속 주인공인 요조도 그렇고 다자이 오사무도 왜 그렇게 자살을 하려 했는지 완전히 이해되지 않았다. 책의 해설을 읽어보고 이런저런 자료를 찾아봐도 잘 모르겠다. 한국전쟁을 겪고 절대적 궁핍에서 벗어난 세대의 심리를 판단하고 재단할 수 없듯이 세계대전 패배의 충격을 겪은 일본의 세대또한 그러하다. 다자이가 겪었을 무게와 절망을 짐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차라리 나에게 ‘실격’을 선고하는 것으로 영위되던 비루한 삶에 마침표를 선명하게 찍고자 했던 것은 아닐까.

 

함께 수록된 짧은 작품 직소(直訴) 또한 놀라웠다.

가룟유다의 관점에서 예수와 그의 제자들을 바라보는 것이 신선했다. 다자이 자신이 정신병동에 입원해 있으며 신약성서를 깊이 읽었다고 하는데 기독교에 대한 다자이의 인식을 분명히 살필 수 있다.

예수를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팔아버리는 가룟유다와 실격된 인간을 회복하는 유일한 해결책으로 자살을 택한 선택의 단면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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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도라의 상자를 아무리 열어젖혀도 꿈쩍도 하지 않는다.

 

아무리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는다.

 

시대의 침묵은 미래를 암담하게 만들 뿐이다.

 

 

 

10.26 디도스 공격의 실체적 진실에 대한 최종 입장 정리를 밝혔다.

 

나는 어제 밤 늦게까지 봉주6회를 들으며

 

'이 정도면 내일은 보도하겠지!'

 

했다.

 

하지만 아무런 매체도 보도하지 않았다.

 

심지어 진보매체라 자칭하는 곳에서까지 아무런 보도를 하지 않았다.

 

무관심은 가장 무서운 것인데 그렇게 되어 가고 있다.

 

 

 

디도스 공격으로 얼렁뚱땅 넘어가려했던 프레임이 먹혀들지 않고 나꼼수에서는 계속해서 증거와 추가 추정을 계속해나가다 보니 사실 지금 선관위와 딴나라당(새머리당으로 바뀌었지 아마...)은 엉거주춤한 상태다.

 

이럴때 제대로 치고 나가 이슈로 다시 떠올려야 하는데

 

관심이 없다.

 

진보매체들이 더욱 문제다.

 

나꼼수 듣고 따라했다고 누가 놀리기라도 하나? 누가 한심하다고 생각하나? 쪽팔리나?

 

왜 가만히들 있는지 모르겠다.

 

답답하다.

 

언론인이고 기자라 이름하는 자들이 한심하다.

 

 

 

이렇게 대충 넘어가면 쟤네들은 또 다시 한다.

 

그러고도 남는 자들이다.

 

그렇게 당하고도 또 븅신같이 멍때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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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int236 2012-02-23 18: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민주통합당 삽질은 어떻고요? 이런건 확시히 물고 늘어져야 하는데 정작 관심은 공천이라는 잿밥에 가 있습니다. 화력이 약하면 선택과 집중을 해야하는데 그도 못하고 여기저기 넓고 얕게 파상공세만 합니다. 자기들도 수습이 불가능할 정도로 말입니다.

lmicah 2012-02-28 17:25   좋아요 0 | URL
동감합니다.
 
독수리 오남매, 법률가를 만나다! - 법률가 편 열두 살 직업체험 시리즈
홍경의 지음, 송선범 그림 / 한겨레아이들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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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고등학생 중 한 명의 장래희망을 물어본 적이 있다.

“저는 검사요”

당연히 자초지종을 물어보고 들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평소 내가 검사와 검찰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지론을 쏟아 부었다. 내 말을 어안이 벙벙해져 듣고 있던 학생이 물었다.

“검사가 나쁜 거예요?”

나쁜 것만은 아니라고 말을 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한국의 검사와 검찰 집단이 가진 무소불위의 권력에 대한 쉼 없는 비판을 해댔다.

그 학생은 거의 울상이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마음이 편치 않아 다음에 만났을 때는 최대한 객관적으로 설명해 주었다. 그래도 마음이 불편해 택배로 온 이 책을 뜯지도 않고 먼저 보라고 권했다. 이 책 「독수리 오남매, 법률가를 만나다!」는 초등학교 고학년이 보면 딱 좋은 정도의 수준이라 고등학생인 그 아이에게는 조금 쉬운 내용이었다고 했다. 그래도 중간 중간 삽입된 현직 변호사, 검사, 판사의 인터뷰가 가장 재미있었다고 했다.

 

나 또한 그랬다. 시골로 전학 간 의란이와 친구들이 겪는 불법 다운로드 문제와 학교 폭력, 마을의 환경오염 문제 등을 소재로 하고 있다는 점이 재미있었다. 소, 원고, 저작권법, 법률가, 위증죄 등 쉽게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개념들에 대한 분명한 정의를 소개하고 있고 책 중간 중간에 삽입된 법학자, 변호사, 검사, 판사의 인터뷰가 인상 깊었다.

각자의 어린 시절 꿈과 검사나 변호사가 되기로 결심하게 된 계기, 어떤 자질이 필요하고 조언을 얘기한다.

 

“이송기”, “빅빵”, “언니시대” (p.41)

 

이송기 오빠의 노래를 불법으로 다운로드 받아 검찰에 소환되는 내용이 소개되는 데 저작권법을 설명하기 위해서인지 이송기, 빅빵, 언니시대라는 차용어가 귀엽다.

아무렇지도 않게 다운로드 하는 음원과 영상이 저작권법에 저촉되는 행위임을 분명히 인지할 필요가 있다.

 

마을의 냇가에 폐수를 버려온 잉크공장 사장과의 단체소송은 결국 잉크공장 사장이 사과하고 직접 피해를 입은 오리 주인 할머니의 너그러운 용서와 소취하로 아름답게 마무리 되었지만 사실 이렇게 해결되는 일은 거의 없다고 생각한다.

소송이나 고발, 고소나 정치적으로 악용되는 사례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평소 의란이의 짝 주성이를 괴롭히던 동네 중학생 형 대칠이에 대한 판결은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서울 도심에서 친구들과 함께 오토바이 등을 훔쳐 달아난 혐의로 피고석에 앉게 된 여학생과 서울가정법원 아무개 부장판사 사이에 일어났던 일이다.

언론에도 소개된 미담을 재구성한 것도 재미있었다.

 

“‘백 명의 범인보다 한 명의 억울한 사람이 없도록 해야 한다는 거야’ 죄를 지은 것으로 의

심되어 소송이 진행된다 해도 유죄로 확정되기 전까지는 무죄로 추정 돼.” (p.139)

 

책의 다른 모든 내용보다 위의 ‘무죄추정의 원칙’만이라도 제대로 아이들에게 가르쳐줄 수 있다면 책의 가치는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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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디자인 산책 디자인 산책 시리즈 2
김지원 지음 / 나무수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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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책 제목이 「런던 디자인 산책」이라 디자인 쪽 전문용어가 많이 나올까봐 걱정을 했지만 전혀 어렵지 않고 재미있게 책을 읽었다.

저자가 런던에 체류하던 때 찍었던 사진과 경험했던 일들을 바탕으로 쓴 이 책은 런던과 디자인쪽 보다 산책 쪽에 더 무게가 실린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그래서 산책하듯이 읽기에 참 좋은 책이다.

 

물론, 나를 비롯한 많은 한국 사람들에게 ‘유럽’은 동경의 대상이고 그 중에서도 런던은 많은 이들이 꼭 가고 싶어 하는 곳 중 하나이다.

 

평소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축구경기를 애청하는 나로서는 정말 멋있고 간지나는 프리미어리그의 축구 경기장을 꼭 가보고 싶다.

 

 

 

아내는 셜록 홈즈의 광팬이라 런던의 베이커가에 위치한 셜록홈즈 박물관을 꼭 가보고 싶어 한다.

재작년 여행 시에는 체코와 독일의 일부 도시만 다녀왔던 터라 더욱 영국과 런던에 대한 갈증이 크다.

이 책은 우리 부부의 그러한 갈증을 다소나마 해소해주기에 충분했다.

 

“기계 문명으로 흉내 낼 수 없는, 오랫동안 축적된 시간의 흔적이다.” (p.67)

“눈만 뜨면 새로운 것이 등장하고 옛것은 한순간에 소멸되는 우리 사회와 달리 런던은 오래된 사물과 옛 사람들의 철학에 대한 경의를 표하면서 동시에 새로운 실험에도 열려 있다.” (p.342)

 

 

산업문명의 발상지이기도 한 영국의 런던이지만 여전히 옛 것에 대한 경의를 잃지 않고 그것을 온전히 보존하고 발전시켜 문화의 역량을 키워낸 그들의 노력을 책의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한국 또한 산업화의 격랑을 겪었다. 하지만 런던처럼 옛 것에 대한 경의를 표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허물고 부숴 신작로를 닦고 보기 흉한 초가집과 기와집을 헐어 반듯한 양옥집을 바둑판처럼 만들었다.

 

수많은 외침을 겪으며 문화재에 대한 파괴가 심했던 것도 사실이지만 이후 그것을 조금이라도 더 잘 보존하고 살려내기 위한 노력은 미미했다. 잘 사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 ‘잘 살아 보세~’라는 노래를 부르며 몸통만 키울 뿐이었다.

뒤늦게 옛 것에 대한 가치와 소중함을 되찾으려 노력한들 이미 놓쳐버린 시간과 기회는 되돌릴 수 없다.

 

지난 주 몽골의 지인들과 함께 경주 여행을 다녀왔다. 어릴 때 갔던 불국사를 정말 오랜만에 갔는데 다보탑의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여러 번 보수를 거친 탓인지 자연미가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최근에 있었던 보수가 도대체 어땠기에 저 정도인지 깜짝 놀랐다.

 

 

 

 

 

“박물관은 간다고? 그냥 길거리로 내보내. 그 자체가 런던의 디자인 역사야. 봐, 지금 밟고 서 있는 이 건물! 건립시기가 언제인지 아니? 런던이 한 해에 문화유산을 복원하고 보존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예산을 쓰고 있는지 아냐고. 거리만 걸으면 몇 백 년 된 집들과 건축물들은 흔히 볼 수 있어. 런던의 디자인을 이러쿵저러쿵 설명하는 게 다 무슨 소용이야?”

(p.129)

 

 

그에 비해 런던은 길거리에 나뒹구는 것들이 모두 문화유산이라 큰소리치는 런던시민이 있을 정도다. 용도 폐기된 화력발전소를 박물관으로 꾸미고 수백 년 된 우체통을 소중히 유지하며 특정집단만이 향유하는 사치스런 디자인이 아닌 대중이 공감하고 공유하는 효용성의 측면에 집중한 여러 시설물과 디자이너들의 제품과 상품들이 즐비하다.

참 부러웠다.

한국에서도 사용 중인 지하철 노선도의 도식의 최초가 런던이라는 사실 또한 새롭게 알게 되었다

 

 

 

 

“세세한 거리나 지형을 표현한 기존의 지도가 지하철이라는 공간에 적합하지 않다고 느낀 해리 벡은 직선과 사선의 기하학적인 형태로 단순하게 표현한 노선도를 만들었다.” (p.155)

 

100년이나 지난 런던지하철 표준체계가 전 세계의 표준이 되었고 지금도 여행자들은 낯선 외국의 도시를 방문하여 이 체계의 지하철 노선도를 보며 자신들의 여행지를 쉽고 편리하게 찾아다닐 수 있다.

 

 

“지속 가능한 디자인...” (p.43)

 

“자본주의 경제 원리에 따른 과잉생산과 디자인의 지나친 물질화로 제품 수명이 단축되는 현상은 장난감 산업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p.49)

 

지속 가능한 디자인, 자본주의 경제에서도 영속할 수 있는 대중적인 디자인에 대한 고민이 런던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계속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아직도 수많은 곳의 산과 들이 파헤쳐져 도로가 만들어지고 멀쩡한 강에 보를 만들어 생태계를 파괴하는 한국의 현실이 답답하다.

디자인이라는 것이 대중과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 대중과 밀착한 현실의 효용을 중시하는 런던의 디자이너들처럼 한국에도 그런 추세가 도입되었으면 좋겠다.

‘와~’하며 책의 사진들을 보고 나면 배가 아팠다. 한국에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현실의 내용들이 즐비하기 때문이었다.

 

책을 쓴 김지원씨의 필력이 런던의 디자인을 더욱 도드라지게 했다고 생각한다. 디자인을 전공하신 분이지만 인문학적인 소양도 굉장한 수준으로 가지고 계신 듯하다. 쉬운 단어와 문장이지만 생각을 요했다. 세대를 아우르기에도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김지원씨의 다른 책도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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