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가요 엄마
김주영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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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후 유독 관심이 많이 가는 TV프로그램들이 있다. ‘~~달라졌어요’와 ‘그 남자 그 여자’ 등 ‘가족 내 갈등’의 내용이 담긴 프로그램들을 유심히 본다. 부부간, 부모간, 고부간 갈등 모두 본질적인 원인을 들여다보면 결국 ‘해결되지 않고 중첩되어 온 상처’의 문제이다. 결혼 생활 내내 아내와 아이들에게 폭언과 폭력, 위압적 행동을 일삼던 남편이 최면치료를 통해 어린 시절 어머니로부터 받았던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일생을 살아왔다는 것을 발견한다. 아내와 아이들은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남편은 사이코드라마를 통해 ‘해결되지 않고 중첩되어’ 온 어린 시절의 그 상처와 대면하고 그것에서 분리된다. 그러고 난 후 놀랍게도 남편의 일상이 바뀐다. ‘해결된 상처의 문제’는 더 이상 그 가족을 괴롭히지 못한다.

김주영의 장편 「잘가요 엄마」는 여러 가지 면에서 영화 [똥파리]를 연상케 했다

 

 

“세상은 엿 같고, 핏줄은 더럽게 아프다.”라는 영화 포스터의 카피에 눈이 멈춘다.

영화 [똥파리]의 주인공 상훈과 소설 「잘가요 엄마」의 주인공 경원은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점철된 상처로 비틀어져버린 자아를 형성하게 되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진다.

‘상훈’과 ‘경원’은 둘 다 ‘해결되지 않고 중첩되어 온 상처’의 문제를 직시하지 못한다. 어린 시절 울타리가 되어주어야 할 가정에서 내쳐져 황량하고 가차 없는 세상에 나뒹굴었다. 가만히 앉아 ‘내 어린 시절 상처가 무엇이지?’, ‘나는 어떤 사람이지?’ 따위의 배부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세상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을 테니까.

 

 

 

1. 어머니 - 상처에 짓눌려 버렸다.

중요한 것은 ‘나’만 상처를 가진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 책에서 ‘경원’이 아우와 가진 마지막 술자리에서 어머니의 지난날에 대한 소상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처절한 가난에 찌든 외조부는 장남의 징용을 피하기 위해 딸을 줘버린다. 돈이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팔려 간 어머니는 평생을 서슬처럼 또렷하게 상처를 부둥켜안은 채 살았다. 가난의 대물림, 상처의 대물림을 피하고자 남의 집 밥숟가락 개수까지 훤히 아는 좁은 시골동네에서 이웃의 손가락질과 비아냥거림을 감수하고서라도 혼인신고도 없는 재가를 한다

 

. 하지만 결국 그것 또한 어머니가 바라는 대로 되지 않았다. 장녀인 ‘애숙’을 자기 손으로 거두지 못하고 남동생네 집에 살게 하고 장남인 ‘경원’이 새아버지와 새동생의 출현으로 집을 뛰쳐나갔을 때에도 어머니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오랜 기간 그랬던 것처럼 권씨댁에 품을 팔러 갈 뿐이었다. 애비가 다른 이복형제의 사이가 좋지 않고 그 며느리들, 손주들에게서도 살가운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자신처럼 원치 않는 시집을 가 평생을 고생하며 살게 될 것이 두려워 야반도주시킨 장녀에 대한 소식도 끊겨버린 노년의 삶은 여전한 ‘상처로 점철된 삶’이었다.

 

“어머니는, 두 번이나 사내를 갈아치운 여자를 감당해야 할 이웃의 조소와 경멸을, 모질고 벅찬 노동으로 자신을 학대함으로써 극복하려는 것 같았다.” (p.195)

 

 

 

2. 경원 - 상처는 대물림 된다.

가난까지는 참을 수 있었다. 야속하기만 한 선생님의 차별과 아이들의 못된 장난도 참을 수 있었다. 하지만 어머니에게서 내쳐지는 신세는 참을 수 없었다.

권씨댁 식모살이로 자신은 물론 외삼촌댁까지 먹여 살리는 어머니의 구차함을 굳이 이해하려 들지 않았다. 섭섭해 하지도 않았다. 새아버지라는 사람이 생기고 그 사람을 닮은 갓난아기가 어머니의 품을 완전히 빼앗아 버렸다. 궁벽진 집에서 뛰쳐나와 권씨댁 모자란 외아들 정태와 산으로 들로 냇가로 뛰어다녔다. 정태만은 경원의 마음대로, 뜻대로 요리할 수 있었으니까.

 

“어떻게 하면 어머니에게 가슴을 도려내는 듯한 통렬한 후회와 고통을 안겨줄 수 있을까. 어머니의 가슴속에 평생 씻을 수 없는 오욕의 못을 박아줄 수 있다면, 학교 따위, 미련 없이 그만둘 수 있었다.” (p.205)

“아마도 어머니에게서 나를 떼어 내던져버릴 음모를 꾸미고 있었겠지……. 나를 보면 언제나, ‘나는 많이 먹었으니까, 너나 많이 먹어라’ 했었던 어머니를 이제는 바랄 수 없게 되었다는 절망감에 치가 떨렸다.” (p.135)

 

15살 되던 해 집을 뛰쳐나와 수십 년을 연락도 두절한 채 살았다. 나름 성공한 위치에 이르게 된 것 같다. 하지만 사회적으로 거둔 성공만큼 가정 내의 성공이 보장된 것은 아닌 듯하다. 30년 전 어머니께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서울에 있는 자신의 집에 다녀가셨을 때, 고부간 갈등이 오랜 기간 지속되어 오던 터라 큰며느리인 아내는 어머니와 대화 한 마디 나누지 않았고 손주 녀석들은 냄새난다며 할머니 곁에조차 가지 않았다.

 

경원이 꾸린 가족 또한 ‘상처 입은 자들의 집합’일 뿐이었다. 어머니께서 당신의 처절한 삶을 물려주지 않으려 재가했지만 그것이 오히려 경원에게 상처가 되었던 것처럼 15살 때 집을 나와 자수성가한 경원이지만 자신이 어머니에게서 받은 상처와는 다른 형태로 자신의 가정 내에서도 ‘상처가 만연해’있었던 것이다. 관계가 단절되고 파편화되어 이미 주워 담을 수 없었음은 물론이다.

 

소설의 마지막 장면에서 어머니가 돌아가신 소식을 모르는, 아니 관심도 없을 아내는 며칠만의 통화에서 경원의 안부조차 묻지 않는다. 경원과의 연락이 닿지 않아 자신에게 전화가 재차 오도록 만든 책임을 따지고 힐난하기 바빴다. 수십 년을 그렇게 살아온 경원과 아내의 관계는 쉽사리 해결되지 않는다. 경원은 들고 있던 전화기를 승강장으로 내던지는 밖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3. 아우 - 상처는 또 다른 상처를 낳는다.

경원의 동생과는 아버지가 다르다. 15살 때 집을 뛰쳐나오게 만든 장본인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고향에서 교직생활을 하며 장남 노릇을 했다. 어머니를 가까이 모시며 수발하고 병상을 지킨 것도 아우뿐이다. 경원의 10대, 사춘기를 혼란으로 이끈 이가 아우였다면 이후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 까지 아우를 혼란과 열등감, 상처로 뒤덮어 온 것은 형, 바로 경원이었다.

 

“어머니가 보고 싶었던 것은 서울 경치도, 며느리도, 손자나 손녀도 아닌 바로 평생 당신께 부담만 주었던 당신의 늙은 아들이었다.” (p.23)

“형님 제대할 때까지 겨울이 되면 어머니는 아랫목에다 잠자리 보는 일조차 마음이 불편해 잠결에 헛소리를 할 정도였어요.” (p.152)

 

돌아가시기 직전 까지도 어머니의 관심은 경원에게 쏠려 있었다. 15살 때 집을 뛰쳐나갈 때부터 줄곧 그래왔다. 결국 어머니를 끝까지 모신 건 아우였지만 어머니의 마음에 끝까지 남은 건 형, 경원이었다. 상처는 또 다른 상처를 낳는다. 경원의 상처는 오롯이 아우에게 전가되었다. 물론 이것이 경원의 책임은 아니다. 지구상 존재하는 생물 중 가장 생명력이 좋다는 바퀴벌레보다 더 질기고 강한 생명력을 가진 것이 상처다. 들러붙어 괴롭히고 또 괴롭힌다.

 

“그런데도 정작 나는 관여하지 않고 천연덕스럽게도 구경꾼 노릇을 하고 있었다. 아우가 다시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p.61)

“그런 말을 대중없이 지절거렸다간 당장이라도 아우의 주먹이 날아들 것 같았다.” (p.94)

 

아우가 보기에 경원은 마뜩찮다. 장남 역할을 제대로 하지 않고 관심도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우는 늘 깍듯하게 형을 대우해 왔다. 가족 간에 유지되는 일정한 수준의 긴장의 선이 고착되면서 조금이라도 이 선을 넘게 되면 완전한 난장판이 될 것이 불 보듯 뻔 하기 때문이었다. 꾹꾹 눌러 담아 참아 오다가 어머니를 화장하고 경원을 좀 더 머물게 한 마지막 날 밤 [장춘옥]에서 아우는 경원에게 모든 것을 쏟아 낸다. 상처가 낳은 또 다른 상처를 뱉어낸다. 경원은 놀라지만 제지하거나 거부하지 않는다.

 

어머니의 죽음을 알리던 전화에서부터 소설 내내 아우는 경원에게 빈정거린다. 예를 갖춘 빈정거림이다. ‘왜? 덤벼보시지! 건드려봐~ 다 폭발해버릴테니까!’ 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경원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줄곧 빈정거리고 원망하는 아우에게 단 한마디도 화내지 않는다. 어쩌면 경원은 알고 있었으리라 짐작된다. 자신의 상처가 의도치 않게 아우에게 전가되고 또 다른 상처의 양태로 깊게 생채기 냈음을.

 

결국 상처는 모두에게 대물림되고 전가되며 전염된다. 상처의 쓴뿌리를 도려내어 고름을 짜내고 약을 발라 치료하지 않는 한 이것은 계속해서 이어진다. 또 다른 상처를 낳고 또 다른 상처를 낳을 뿐이다.

 

어머니의 죽음으로 비로소 자신의 상처를 직면하게 된 경원은 서로 부담스럽지 않게 적절한 수준으로 의지하고 관계해 온 가족들에 대한 미련을 버린다. 아이들은 이미 장성했고 아내는 말이 통하지 않는다. 더 늦기 전에 열차가 도착해 서울로 상경하는 레일위에 몸을 싣기 전에 과거와의 화해를 시도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가신 어머니를 위하는 길이고 그 어머니와의 반목과 오해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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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는 여인들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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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숙의 작품을 처음 읽었다. 나를 책의 세계로 천착하게 만든 것은 톨스토이의 「부활」이었다. 세로쓰기로 된 두꺼운 양장본의 그 책은 고향집에 내려간 대학1학년 겨울방학을 황홀하게 만들어주었다. ‘이런 게 책이구나, 이래서 고전 문학, 톨스토이, 톨스토이 하는구나’ 뼛속으로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인문·사회서적만 탐독하는 나를 발견했다. 우연히 읽게 된 고(故)리영희 선생님의 책 이후로 계속 그랬던 것 같다.

 

균형을 맞추어야 한다는 생각에 한동안 또 문학만 파고 들었다.

나의 독서 패턴은 늘 이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난 주 책장을 정리하는 데 문학, 특히 내가 읽은 소설 중 대다수가 남성 작가의 작품이 많다는 것을 발견했다. 소스라칠 정도는 아니지만 꽤 놀랐다. 그래서 가만히 생각해 보니 신경숙, 은희경, 심지어 박경리씨의 작품도 제대로 읽어 본 적이 없었다.

부랴부랴 책을 구입 해 읽었다.

 

 

이 책 「모르는 여인들」은 단편소설을 엮은 소설집이다.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읽은 「엄마를 부탁해」는 왠지 읽기 싫어 「모르는 여인들」을 구입했는데, 단편소설집이라는 것도 확인하지 않은 채 구입했다.

 

처음 읽어 본 신경숙의 글은 따뜻했다. 이것이 7편의 단편 모두에서 받은 느낌이다. 문장의 호흡이 짧아 좋았다. 내가 워낙 김훈의 글과 문장을 흠모해서 인 탓이겠지만 호흡이 길고 너무 많은 것을 의도한 문장을 읽으면 숨이 턱턱 막힌다. 그런 면에서 신경숙의 글과 문장은 김훈의 그것과 닮아 있는 듯 보였다. 두루뭉술하게 펼치기만 하는 젊은 작가들이 많은 요즘 신경숙의 글과 문장에서는 베테랑 다운 작가 자신만의 글을 볼 수 있어 오히려 신선했다.

7편의 단편이 모두 따뜻하다. 그리고 또한 처연하다. 애달프고 애처로울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서늘하고 담담하다.

 

여자들의 이야기가 이해될 듯 이해되지 않는 부분도 있었고, 공감이 안 될 듯 공감이 되는 부분도 있었다. 특히, [그가 지금 풀숲에서]에서 등장하는 주인공의 아내와 [모르는 여인들]에 가사도우미 아주머니와의 메모 교환으로 깊은 교감을 나누는 아내는 머리로 이해되지는 않았지만 공감이 되는 캐릭터였다.

 

같은 작품이라도 어린 시절 읽었을 때 받았던 느낌과 장성한 뒤 읽었을 때의 느낌이 다르듯이 여성 작가가 창조해낸 여성 캐릭터에 완전히 몰입할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한 것인지 모르겠다. 독자의 욕심으로 머릿속에 우겨넣으려 하는 것은 말그대로 욕심일 뿐일 것이다. 다만, 7편의 단편소설 모두에서 공통적으로 인지하고 공감한 따스함과 처연함은 분명한 사실이다. 욕심이 아니다.

 

“파를 종종 썰어넣은 무친 생굴에서 참기름 냄새가 맡아졌다. 큼직한 깍두기, 멸치볶음, 깻잎, 계란찜. 언제 만들었는지 숭늉이 담긴 큰 양푼이 밥상 아래 놓여 있다.” (p.147)

“산수유에 복숭아나무에 배나무에 살빛 꽃들이 흐드러지게 핀 그런 봄날이었어.” (p.153)

 

한눈에도 맛있게 차려진 밥상이 그려지고 온갖 꽃들로 만발한 봄의 산이 그려지는 작가의 문장은 그대로 캐릭터의 감정선과 공유되고 평행하게 흘러간다. 7편의 작품 모두에서 동일했다. 이 부분이 나는 가장 좋았다. 무심하게 관망하는 듯한 말투가 작가의 문장에서 그대로 배어난다. 그리고 평행을 유지한 채 공감을 이끌어 낼 뿐 과도하게 캐릭터에 끼어들지 않는다. 단어 하나로 독자의 머릿속에 그대로 그림 그려질 수 있게 하는 것은 작가의 능력이다.

 

 어렵지 않고 흔한 굴이니, 참기름이니, 계란찜이니 하는 단어의 선택 또한 작가의 능력이라 생각한다. 얼마 전 읽었던 젊은 작가들의 소설집의 그 자질구레하고 무슨 말인지 분간할 수 없는 감정의 고저는 읽는 내내 불편하고 짜증스럽게 했다.

처음 접한 작가 신경숙의 글과 문장은 따뜻하지만 처연했다. 호흡이 짧아 좋았고 쉽고 간편해 읽는 독자가 바로 이미지화 시켜 체화시킬 수 있을 정도였다. 작가가 창조한 캐릭터와도 적정한 감정선을 유지하고 관망하는 것이 좋았다.

 

결코 어려운 단어와 문장을 쓰고 온갖 미사여구를 갖다 붙인다 해서 좋은 글과 문장이 아님을 단적으로 보여준 것이라 생각한다.

 

그만큼 신경숙의 글은 좋았다.

 

불쑥불쑥 ‘이게 더 정확하게는 무슨 의미일까? 작가는 이런 문장을 왜 여기에 썼을까?’ 하는 등의 물음이 울컥 치받기도 했지만 큰 의미를 찾지 못해 그만 두었다.

다음번엔 단편소설집이 아닌 장편을 읽어볼 생각이다.

작가 신경숙의 진면목이 그대로 드러나는 작품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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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 자는 멈추지 않는다
전성철 지음 / 아이지엠세계경영연구원(IGMbooks)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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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주 전 이상한 꿈을 꿨다. 큰 서랍을 열었는데 서랍보다 더 큰 종이상자 두 개가 튀어나와 내 품에 안겼던 것이다. 그 종이상자의 어마어마한 크기나 노란 빛이 감돌던 형태의 상서로움이 예사롭지 않았다. 그로부터 며칠 후 아내가 장모님이 태몽 같은 꿈을 꾼 것 같다는 말을 했다. 그래서 나도 번뜩 지난 번 꿈이 생각 나 이야기를 했다. 나는 속으로 “쌍둥이다 쌍둥이!!” 라고 생각했다. 얼마 뒤 테스트를 했는데 아니었다. 헛꿈을 꾼 것이다. 복권이라도 두 장 살 걸 그랬다ㅡㅡ;;

 

 

우리네 인생은 헛꿈헛물켜는 것으로 점철된 인생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왜? 누구나 자기가 생각하고 싶은 대로 생각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왜? 그게 편하니까.

 

이 책 「꿈꾸는 자는 멈추지 않는다」는 헛꿈 꾼다는 비아냥거림을 들었지만 헛물켜지 않았던 사람에 대한 이야기다.

얼마나 어렵게 살았고 얼마나 큰 시련과 난관이 있었으며 그것을 얼마나 보기 좋게 극복해 냈느냐 하는 이야기는 모두가 하는 이야기니 차치하고,

 

나는 저자의 피나는 노력이 가장 눈에 들어 왔다. 자신만의 꿈을 찾아 그것을 개척하기 위해 눈물어린 노력을 한 것이다. 남들 보다 늦은 나이에 MBA과정과 로스쿨 과정, 로펌 어소시에이트 변호사 과정을 하기 위해서는 남들 보다 더 피나는 노력을 해야 했다.

20년이 넘는 그의 인생의 파고를 300페이지의 책에 다 담을 수 없다. 그래서 그냥 별 생각 없이 이 책을 보면 ‘그래서 뭐 결국 잘 됐다는 얘기잖아. 자기 자랑이네 뭐. 되는 놈은 뭘 해도 되는 구만. 그 옛날에 아버지가 의사였는데 뭐.’ 이렇게만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쉽게 넘어갈 수 있는 서술어에 주목했다.

 

“이틀 밤을 꼬박 새운 것이었다.”, “최선을 다했다.”, “파김치가 되었다”, “밤새도록 씨름했다.”, “이를 악물었다.”

 

꿈은 결코 공짜로 주어지지 않는다. 최소한 저자만큼 해봐야 한다. 이것이 정답이다. 그래야 헛꿈현실이 되고 헛물성취가 된다.

여러 번의 입학 실패와 해고, 언어의 장벽과 이방인으로서의 외로움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았다. 공짜를 꿈꾸지 않았다.

 

“꿈이 시작되어 이루어지기까지 무려 11년이란 세월이 걸렸다.” (p.13)

 

11년이란 시간은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이다. 어떻게 생각하고 수용하느냐에 따라 11년이란 시간을 받아들이는 마음의 자세는 달라진다. 마음의 자세가 달라지면 행동 또한 달라진다.

나는 30대 중반을 바라보는 나이다. 오늘도 내 꿈을 위해 전진하고 있다. 내 블로그 소개글처럼 급하게 뛰거나 요행을 바래 날아가지 않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가지만 성실하고 진실하게 하늘을 향해 기어가고 있다. 이것이 나의 꿈을 향한 내 다짐이다.

 

남들은 늦었다고 얘기한다. 한 곳에 집중하라고 한다. 뜬 구름 잡지 말라고 한다.

하지만 나는 이 책의 저자 전성철씨처럼 내 꿈을 향해 멈추지 않으려 한다. 당장 눈에 보이지 않고 귀에 들리지 않고 손에 잡히지 않기에 그것이 꿈이다. 당장 내 마음대로 공놀이 하듯 가지고 놀 수 있는 것은 꿈이 아니다.

 

남들이 얘기하는 헛꿈헛물. 또는 한 번씩 견디기 힘들만큼 고통스럽게 찾아오는 ‘헛꿈이 아닐까? 헛물켜는 건 아닐까?’ 라는 자괴감.

반드시 현실이 되고 성취가 되도록 저자의 피나는 노력이 담긴 서술어처럼 나도 그렇게 살 것이다. 내가 멈추지 않으면 내 꿈은 절대 멈추지 않을 테니까.

 

“너도 열심히 찾아보면 잘하는 일이 있을 것이다.” (p.143)

 

저자가 레스토랑 매니저에게 일을 그만두겠다고 이야기했을 때 그 매니저가 해 준 말이다. 이 말 한마디가 그의 꿈에 불을 지폈고 결코 포기하지 않는 동력이 되어 주었다.

이 책을 안 읽은 사람이라도 이 말은 꼭 기억했으면 한다. 누구나 잘하는 일이 있을 것이다. 열심히 찾아보지 않았을 뿐이니까 포기하지 않았으면 한다.

 

그리고 부단하고 피나는 노력을 동반해야 한다. 환경과 상황을 탓해봐야 시간만 갈 뿐이다. 최소한 이 책의 저자만큼은 해봐야 한다.

나에게도 스스로 하는 다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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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계급 사다리는 안전합니까? - 불평등이 만들어낸 우리 시대의 초상
뉴욕 타임스 지음, 김종목.김재중.손제민 옮김 / 사계절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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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진보 정당 내 종북 세력 문제로 한참 동안 떠들썩했다. 분단국가의 특성 상 이데올로기는 첨예한 갈등을 일으키는 주요 소재로 활용되기 마련이다. 정치적 민주주의가 어느 정도 궤도에 올라 있다고 판단되는 지금에도 여전히 친북·종북의 탈은 토끼사냥을 가장 효과적으로 할 수 있는 도구이다.

 

마찬가지로 한국에는 친미·종미·숭미를 표방하는 집단과 조직, 사람들이 많다. 다들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있을 뿐이지 그렇게 살고 있다. 여전히 아내와 아이들을 머나먼 미국에 보내고 자신은 끼니도 챙기지 못하고 살아가는 기러기 아빠들이 무수하고 영어 하나면 뭐라고 하고 산다는 우스개는 정설이 되었다.

법체계에서부터 행정·사회구조·경제체제 등 거의 모든 면에서 미국식을 표방한다. 어쨌든 미국이 세계 1등이기 때문이다. 힘도 제일 세고 돈도 제일 많으니까.

 

2005년 뉴욕타임스에서 기획 취재한 기사를 번역한 「당신의 계급사다리는 안전합니까?」는 이런 기존의 ‘아메리칸 드림’이 이미 붕괴되기 시작했고 이제는 급속도로 불평등한 구조의 사회가 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책이다.

 

“누구나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상승 이동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이민자들이 몰려드는 미국은 계급과는 거리가 먼 사회로 대중들에게 각인되어 있었다. 이 책에서는 이러한 인식이 환상에 불과하며, 현실은 계급 불평등이 갈수록 심화되고 있는 계급사회라는 것을 대중매체 기자들이 밝히고 있다는 점” (p.349)

전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최고라고 엄지를 치켜세우던 미국의 속살을 그것도 대형 신문사에서 들추어냈다는 것에 일단 놀랐다. 한국의 언론 현실에서는 도무지 일어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분명한 것은 현재 전 세계 어디에도 계급은 존재하지 않는다. 인도의 카스트도 이미 공식적으로는 없는 제도이다. 그러나 ‘1%의 초부유층, 0.001%의 재벌’ 이런 뉴스를 접하면 욕지거리를 내뱉음과 동시에 ‘아~! 부럽다. 도저히 올라갈 수 없는’이라는 탄식을 하게 된다. 눈에 보이지 않는 계급 사다리는 분명히 존재하는 것이다.

 

“릴로는 한창때의 연봉이 최하 10만 달러인 경제적으로 동질한 소집단이다. 그들은 대부분 백인이다.” (p.212)

“무엇보다 그들은 모든 권력을 가진 사람들로 이루어진 거대한 거미줄에 연결되어 있었다. 그녀는 말했다. 여하튼 그들은 모두 서로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p.104)

 

내가 사는 대구에도 강남 같은 곳이 있다. 대구에 살지 않는 사람도 ‘수성구’는 들어 봤으리라 생각한다. 예전에 한창 ‘강남8학군’으로 시끄러웠을 때 ‘강남8학군’을 제외하고 전국에서 가장 학구열이 높은 곳이 대구의 ‘수성구’라고 했었다. 예전의 명성만큼은 아니지만 지금도 여전한 맹위를 떨치고 있다. ‘수성구’의 프리미엄을 맛보기 위해 타 구에 살고 있는 부모들은 고등학생 자녀들을 위장전입 시키면서까지 ‘수성구’에 있는 고등학교로 입학시키거나 전학시킨다. 고등학교 때부터 불법과 탈법을 몸소 가르치는 것이다.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수성구’에는 책에서 소개하나 ‘릴로’처럼 전문직 직업을 가진 고소득 계층이 많이 살고 있다.

내가 다니는 교회에도 이런 아이들이 많다. ‘하나님의 뜻’이라고 포장해서 아이들을 설득하는 것인지, 아니면 처음부터 솔직하게 ‘더 좋은 학교를 위해 이 정도는 괜찮아’ 라고 말하며 설득하는지 알 수는 없지만 그 아이들은 버스를 두 번 갈아타고 지옥 같은 등·하교를 1시간 반 동안 해야 한다.

 

“평등을 크게 촉진하는 것으로 이상화되었던 시스템이 오히려 태어날 때의 기득권을 강화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p.14)

 

 

 

“결국 체제의 문제다.” 슬라보예 지젝

결국은 체제의 문제이다. ‘수성구’에 있는 고등학교에 보내기 위해 위장전입을 불사하는 학부모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까? 나는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본다. ‘수성구’가 아닌 타구에 있는 학교에서 빼어나게 공부를 잘했다면 굳이 불법을 자행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교육을 공공의 영역에서 완전히 포기하다 보니 사적인 시장영역에 맡겨져 버렸다. 한 시간에 수십만 원씩 하는 과외를 받는 아이들은 바보가 아닌 이상 아무리 위장전입을 불사하는 아이들이라 해도 따라가지 못한다. 처음부터 올라갈 수 없는 저 높은 곳의 사다리 위에 있었던 것이다.

 

“더욱 글로벌화한 시장의 탄생, 신기술, 감세로 인해 가속화한 투자 등으로 특징지어진다. 주가는 급등했고 그만큼 가장 높은 순위에 있는 업종들이 이익을 보았다.” (p.265)

“이 책이 다룬 양극화, 중간계급 붕괴, 초부유층의 독식 같은 문제는 진행형이거나 더 악화되었다.” (p.364)

 

신자유주의가 가속화 되면서 모든 것은 시장권력으로 기울어 졌다. ‘있는 놈은 더 부자가 되고 없는 놈은 더 가난해 지는’ 형국이 공고화 된 것이다. ‘중산층 붕괴’라는 말이 나온 지는 어림잡아도 십여 년은 지난 것 같다. ‘중산층 붕괴’는 더 가속화 되고 격렬해 졌을 뿐 다시 일어서지 못했다.

 

모든 권력이 시장에 쏠리다 보니 국가의 모든 힘(공권력을 포함한)도 시장으로 쏠렸다. 수백, 수천억을 개인의 잘못으로 기업에 피해를 줬다 해도 어차피 재벌가 소유의 기업이기에 처벌 받지 않는다. 법·언론·학계를 아우르는 모든 분야가 시장 권력을 적극적으로 서포팅 한다. 도쿄에서 벌어지는 한·일전 축구를 응원하는 붉은 악마의 서포팅, 그것보다 더 적극적이고 현란하게 말이다.

이런 과정을 반복적으로 학습한 0.1%의 재벌이거나, 1%초부유층이 아닌 대부분의 사람들은 욕은 하면서도 속으로는 ‘역시~ 돈이 최고야~ 재벌은 아무도 못 건드리는구먼~ 내 아들놈은 꼭 세 개의 별에 입사시켜야지~!’ 생각한다.

 

“[뉴욕타임스]는 2008년 4월 시급 20달러가 노동계급이 중간계급으로 진입할 수 있느냐를 가르는 기준이라고, 시급 20달러는 연봉 4만 1600달러에 해당한다. 이는 ‘미국적인 삶’ 즉 자동차와 집을 갖고 대학 교육을 시킬 수 있는 최소 연봉이다.” (p.368)

 

연봉 4만 달러면 우리 돈 4천만원대 중반이다. 결코 적지 않은 연봉이다.

며칠 전 뉴스에서 아이 한명을 낳아 기르는데 최소한 필요한 비용이 월300만원이라는 기사를 본적이 있다. 역시 미국의 따라 쟁이다. 모든 것을 따라간다.

 

“2009년 미국과 한국에서 상위 10퍼센트의 임금과 하위 10퍼센트의 임금 비율은 각각 4.86퍼센트와 4.74퍼센트로, OECD 국가 가운데 가장 불평등이 심한 1위와 2위 국가였다.” (p.361)

 

상위 10퍼센트의 임금과 하위 10퍼센트의 임금 비율은 물론 부의 독점 현상도 한국은 미국에 이은 OECD2위 국가이다.

미국의 계층 구조는 계급 사다리 구조로 확고해졌다. 중산층은 붕괴하고 초부유층의 독식은 심화되고 있다. 불과 20∼30년 전만 해도 고등학교만 졸업해도 안정된 삶을 구가하고 보장보험의 혜택을 누렸으나 지금은 흔한 대학 졸업장이 없으면 꿈도 꾸지 못한다고 한다

.

무너져가는 ‘아메리칸 드림’의 끝자락을 아직도 붙잡고 있는 한국의 현실이 서글프다. 전 세계를 공황에 빠뜨렸던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론 사태에도 우리 경제 수장이라는 사람은 ‘다른 나라보다 피해가 적습니다.’ 라는 바보 같은 논평을 내놓기도 했다.

그들에게는 전부였던 미국의 경제체제가 모래위의 성처럼 부실 그 자체였다는 사실을 인정하기가 얼마나 힘들었을지 짐작한다.

 

유럽을 비롯한 많은 국가는 나름대로 경제구조를 개선하고 미국식을 벗어나려 안간힘을 쓰는데 한국의 현실은 그대로다. 숭미를 버릴 수 없는 것이다.

파멸로 갈수도 있는 미국의 초상을 그대로 답습하는 꼴이 될 까 걱정된다.

체제가 양극화를 심화 시키고 중간계급을 붕괴시키고 초부유층의 독식을 지원했다면 체제가 그것을 해결해야 한다.

 

그러면 어떤 체제를?

책에서는 그것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다. 심층 취재까지가 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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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신과의 산책
이지민 외 지음 / 레디셋고 / 2012년 6월
평점 :
절판


나는 판타지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모두들 열광하는 무협지가 그렇게 재미없을 줄 몰랐다. [반지의 제왕]도 그저 그랬다. 판타지 소설은 더욱 그렇다. 발 붙여 사는 곳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이렇게 버라이어티 한데 그것 너머에 있는 환상의 세계를 가늠하고 그곳을 향유하기에는 내가 너무 속된 것 같다.

 

이 책 「여신과의 산책」의 소개 글이 섬뜩했다. “당신을 환상의 세계로 안내할 8편의 이야기”

 

‘허거걱! 어쩌지 나는 환상의 세계 따위 좋아하지 않는데’

8명의 작가가 쓴 중·단편 소설을 엮은 책이다. 소개 글이야 워낙 독자의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단어를 선별해 쓰기 마련이므로 크게 걱정하지 않고 책을 열었다.

먼저, 8편의 소설 중 개인적으로 가장 좋았던 작품은 이지민씨의 [여신과의 산책]이고 가장 별로였던 작품은 한유주씨의 [나무 사이 그녀 눈동자 신비한 빛을 발하고 있네] (제목만 별나게 길다;;)이다.

 

 

이지민 [여신과의 산책]

[여신과의 산책]은 책을 읽기 전 여자 ‘신(God)’과의 산책으로 생각했다. 이 사고의 편협함이란^^;; 여자 주인공의 이름이 ‘여신’이었다. 자기가 사귀는 남자와 함께 있을 때 남자의 부모 중 한 분이 죽는, 그래서 그 남자들 모두 부모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던 징크스를 가진 여자였다.

마지막 세 번째 애인이었던 남자의 친구가 찾아와 ‘여신’의 징크스를 되묻고 확인하는 것으로 이야기가 시작되는데, 사람이름 ‘여신’을 ‘여자 신(God)'으로 착각하고 있던 내게 시원한 뒤통수 한 대 후려갈긴 작가의 기발함에 박수를 보내며 나도 시작했다.

[여신과의 산책]은 42페이지 밖에 되지 않는 짧은 소설임에도 문장과 단어에 함축된 이미지는 420페이지를 채우고도 남는 것 같았다.

 

“먼지만이 권태롭게 떠다니는”

“에어컨은 무시무시한 신음 소리를 내며 냉기를 게워내고 있었다.”

 

내가 굉장히 좋아하는 문장의 형태이다. 결코 어렵지 않지만 사물의 양태와 다중적 의미를 전달하는데 효과적인 수식어를 쓴다. 그래서 문장을 읽는 즉시 퍼뜩 이미지를 머릿속으로 그려낼 수 있다. 나는 이런 문장을 좋아한다. 온갖 치장을 하거나 잘난 체하거나 목디스크로 목깁스를 한 것 마냥 뻣뻣하게 위세 떠는 문장을 싫어한다.

 

뭐, 어디까지나 개인적 취향이니 다른 사람은 어떨지 모르겠다.

작가는 본래 작가가 아닌 사람들은 잘 발견하지 못하는 미세한 감각과 양태의 이미지를 포착하는 사람들이라 생각한다. 또한 그것을 단어의 조합과 배열로 가장 적절하게 독자에게 전달하는 것이 작가의 능력이다. 그래서 그 작가의 책을 읽으며 ‘아!! 맞아,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아~~ 왜 나는 똑같은 걸 보면서도 이 생각을 못했지~~!’ 라는 생각을 하게 만들어야 한다.

이런 내 개인적인 기준에서 이지민 작가는 훌륭한 작가적 자질을 지녔다고 생각한다.

 

“전 그 불행이 필요해서 왔습니다.”

“지금 아버지가 위독하십니다. 그리고 저는 아버지의 임종을 보지 않을 생각이고요.”

 

요즘 가뭄 때문에 난리인데 가뭄으로 논이 수백, 수천 개의 비대칭 육각형으로 갈라진 걸 본 적이 있는가? 물기라고는 개미 눈물만큼도 찾을 수 없는 건조함. 나는 그런 건조한 글을 좋아한다. 군더더기가 없고 하고자 하는 말을, 또는 메시지를 150km직구를 던지는 투수처럼 독자의 가슴에 내다 꽂는 문장을 좋아 한다. 그래서 김훈의 글을 잃고 정신적 환각에 빠졌었다. 물론, 김훈만큼은 아니지만 이지민의 글도 건조하다. 말랐다. 하지만 거북하지 않고 바짝 마르지 않아 양 입술 끄트머리에 침이 엉기지 않는다. 재능이자 능력이다.

 

 

한유주 [나무 사이 그녀 눈동자 신비한 빛을 발하고 있네]

앞서 [여신과의 산책]에 대한 내 감상평의 모든 면과 정반대였다. 처음부터 끝까지 무슨 말을 하려 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8편 중 유일하게 두 번 읽었으나 알다가도 모를 긴 제목만큼이나 알다가도 모를 내용이었다.

34페이지 분량 전체가 1인칭 주인공의 시점에서 하는 독백으로 채워져 있다. 대화도 하나도 없고 문체도 바뀌지 않는다. 주인공의 심리부터 상황묘사, 다른 인물들의 모습까지 주인공 혼자의 독백이다.

 

문장의 길이는 8편 중 가장 짧지만 호흡의 구분이 되지 않아 머리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소설의 처음부터 끝이 마치 하나의 문장인 것처럼 보이게 한 것이 작가의 의도였는지는 모르겠으나 만약 의도였다면 그건 성공한 것 같다. 하지만 도무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지 잘 모르겠고 유치원 아이가 새로 산 스케치북에 그 아이를 가장 잘 아는 엄마조차도 이해할 수 없는 그림을 첫 장부터 끝장까지 그린 것 같았다.

 

‘따라올 테면 따라와 봐~~!!’

예전에 지금의 이승기, 김수현을 합친 것보다 더 인기가 많던 유승준이 하던 통신사 CF의 멘트다. XX패스. 우리가 쟤들꺼보다 훨씬 빠르니까 우리꺼 사라. 뭐 이런 식?

당시 유승준은 국내 댄스가수들 보다 몇 비트는 빠른 댄스곡을 라이브로 소화하고 ‘가위춤’ 이런 것들로 대히트를 치고 있었다.

 

‘이해할 테면 이해해 봐~!!’

8편 중 가장 긴 제목과 가장 특이한 문체와 가장 특이한 소설의 형태다. 이해할 테면 이해해 봐라! 라고 하는 것 같았다.

일단 호흡을 할 수 없는 문장에 숨이 막힐 것 같았고, 내용이 지루하다. 긴장감이 없고 술 취한 아저씨 주정 같이 알아들을 수 없었다.

 

 

김이설 [화석]

[여신과의 산책]다음으로 좋았던 작품이다. 기가 막힌 세태를 향한 일정 정도의 블랙코미디도 담겨 있고 누구나 가슴에 품고 있을 첫사랑에 대한 알싸한 기억을 더듬게 하는 작품이다.

“해마다 만 삼천 원짜리 생크림 케이크가 남편의 생일 선물이었다. 올해는 날짜도 틀렸다.

취한 남편이 현관문 턱에 걸려 넘어져 케이크 상자를 떨어뜨렸다. 케이크 한 귀퉁이가 찌그러졌다. 속이 느글거렸다.” (p.86)

 

십삼만 원짜리 구두도 방긋 웃으며 사주던 남편들은 만 삼천 원짜리 케이크에 불안한 심리를 씻는다. 날짜가 틀리고 취기에 넘어져 케이크가 찌그러져도 상관없다. 매일 펼쳐지는 죽음의 전장에서 온갖 상처를 겨우 응급처치 한 채 후방으로 돌아오는 것만으로 스스로 대견하다. 나름 죽어라 사는데, 마누라는 한 동네 살다 신시가지로 이사 간 친구와 자신을 비교하며 화장실 욕조만 한 바가지를 긁어댄다. 마누라는 모를 거라 생각 하겠지만 대학 때 만난 첫사랑 놈과 무슨 짓을 벌이는 지도 알고 있다.

 

한데 그깟 케이크? 뭐 속이 느글거려??

나는 마누라 얼굴을 보면 발바닥 저 밑에서부터 가득 차 있던 무저갱의 토사물이 미사일 발사체의 가공할 만한, 중력을 거스르는... 그 엄청난 힘으로 솟구쳐 올라옴을 경험 한다.

누가 누구 보고 느글거린다고??

 

그래도... 나는 오늘도 마누라에게 먼저 사과 하고 다짐을 한다.

나는 가족관계에 대한 증명을 할 수 있는 모든 공공기관의 서류 상 저 마누라의 남편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화석처럼 지워지지 않는 그 것. 현재까지는.

 

김이설 작가의 [화석]은 자꾸 영화 [바람난 가족]을 생각나게 했다. 있는 그대로를 까발리면서도 난잡하지 않아 좋았다.

나머지 다섯 편은 뜨겁지도 차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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