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가요 엄마
김주영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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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후 유독 관심이 많이 가는 TV프로그램들이 있다. ‘~~달라졌어요’와 ‘그 남자 그 여자’ 등 ‘가족 내 갈등’의 내용이 담긴 프로그램들을 유심히 본다. 부부간, 부모간, 고부간 갈등 모두 본질적인 원인을 들여다보면 결국 ‘해결되지 않고 중첩되어 온 상처’의 문제이다. 결혼 생활 내내 아내와 아이들에게 폭언과 폭력, 위압적 행동을 일삼던 남편이 최면치료를 통해 어린 시절 어머니로부터 받았던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일생을 살아왔다는 것을 발견한다. 아내와 아이들은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남편은 사이코드라마를 통해 ‘해결되지 않고 중첩되어’ 온 어린 시절의 그 상처와 대면하고 그것에서 분리된다. 그러고 난 후 놀랍게도 남편의 일상이 바뀐다. ‘해결된 상처의 문제’는 더 이상 그 가족을 괴롭히지 못한다.

김주영의 장편 「잘가요 엄마」는 여러 가지 면에서 영화 [똥파리]를 연상케 했다

 

 

“세상은 엿 같고, 핏줄은 더럽게 아프다.”라는 영화 포스터의 카피에 눈이 멈춘다.

영화 [똥파리]의 주인공 상훈과 소설 「잘가요 엄마」의 주인공 경원은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점철된 상처로 비틀어져버린 자아를 형성하게 되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진다.

‘상훈’과 ‘경원’은 둘 다 ‘해결되지 않고 중첩되어 온 상처’의 문제를 직시하지 못한다. 어린 시절 울타리가 되어주어야 할 가정에서 내쳐져 황량하고 가차 없는 세상에 나뒹굴었다. 가만히 앉아 ‘내 어린 시절 상처가 무엇이지?’, ‘나는 어떤 사람이지?’ 따위의 배부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세상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을 테니까.

 

 

 

1. 어머니 - 상처에 짓눌려 버렸다.

중요한 것은 ‘나’만 상처를 가진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 책에서 ‘경원’이 아우와 가진 마지막 술자리에서 어머니의 지난날에 대한 소상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처절한 가난에 찌든 외조부는 장남의 징용을 피하기 위해 딸을 줘버린다. 돈이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팔려 간 어머니는 평생을 서슬처럼 또렷하게 상처를 부둥켜안은 채 살았다. 가난의 대물림, 상처의 대물림을 피하고자 남의 집 밥숟가락 개수까지 훤히 아는 좁은 시골동네에서 이웃의 손가락질과 비아냥거림을 감수하고서라도 혼인신고도 없는 재가를 한다

 

. 하지만 결국 그것 또한 어머니가 바라는 대로 되지 않았다. 장녀인 ‘애숙’을 자기 손으로 거두지 못하고 남동생네 집에 살게 하고 장남인 ‘경원’이 새아버지와 새동생의 출현으로 집을 뛰쳐나갔을 때에도 어머니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오랜 기간 그랬던 것처럼 권씨댁에 품을 팔러 갈 뿐이었다. 애비가 다른 이복형제의 사이가 좋지 않고 그 며느리들, 손주들에게서도 살가운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자신처럼 원치 않는 시집을 가 평생을 고생하며 살게 될 것이 두려워 야반도주시킨 장녀에 대한 소식도 끊겨버린 노년의 삶은 여전한 ‘상처로 점철된 삶’이었다.

 

“어머니는, 두 번이나 사내를 갈아치운 여자를 감당해야 할 이웃의 조소와 경멸을, 모질고 벅찬 노동으로 자신을 학대함으로써 극복하려는 것 같았다.” (p.195)

 

 

 

2. 경원 - 상처는 대물림 된다.

가난까지는 참을 수 있었다. 야속하기만 한 선생님의 차별과 아이들의 못된 장난도 참을 수 있었다. 하지만 어머니에게서 내쳐지는 신세는 참을 수 없었다.

권씨댁 식모살이로 자신은 물론 외삼촌댁까지 먹여 살리는 어머니의 구차함을 굳이 이해하려 들지 않았다. 섭섭해 하지도 않았다. 새아버지라는 사람이 생기고 그 사람을 닮은 갓난아기가 어머니의 품을 완전히 빼앗아 버렸다. 궁벽진 집에서 뛰쳐나와 권씨댁 모자란 외아들 정태와 산으로 들로 냇가로 뛰어다녔다. 정태만은 경원의 마음대로, 뜻대로 요리할 수 있었으니까.

 

“어떻게 하면 어머니에게 가슴을 도려내는 듯한 통렬한 후회와 고통을 안겨줄 수 있을까. 어머니의 가슴속에 평생 씻을 수 없는 오욕의 못을 박아줄 수 있다면, 학교 따위, 미련 없이 그만둘 수 있었다.” (p.205)

“아마도 어머니에게서 나를 떼어 내던져버릴 음모를 꾸미고 있었겠지……. 나를 보면 언제나, ‘나는 많이 먹었으니까, 너나 많이 먹어라’ 했었던 어머니를 이제는 바랄 수 없게 되었다는 절망감에 치가 떨렸다.” (p.135)

 

15살 되던 해 집을 뛰쳐나와 수십 년을 연락도 두절한 채 살았다. 나름 성공한 위치에 이르게 된 것 같다. 하지만 사회적으로 거둔 성공만큼 가정 내의 성공이 보장된 것은 아닌 듯하다. 30년 전 어머니께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서울에 있는 자신의 집에 다녀가셨을 때, 고부간 갈등이 오랜 기간 지속되어 오던 터라 큰며느리인 아내는 어머니와 대화 한 마디 나누지 않았고 손주 녀석들은 냄새난다며 할머니 곁에조차 가지 않았다.

 

경원이 꾸린 가족 또한 ‘상처 입은 자들의 집합’일 뿐이었다. 어머니께서 당신의 처절한 삶을 물려주지 않으려 재가했지만 그것이 오히려 경원에게 상처가 되었던 것처럼 15살 때 집을 나와 자수성가한 경원이지만 자신이 어머니에게서 받은 상처와는 다른 형태로 자신의 가정 내에서도 ‘상처가 만연해’있었던 것이다. 관계가 단절되고 파편화되어 이미 주워 담을 수 없었음은 물론이다.

 

소설의 마지막 장면에서 어머니가 돌아가신 소식을 모르는, 아니 관심도 없을 아내는 며칠만의 통화에서 경원의 안부조차 묻지 않는다. 경원과의 연락이 닿지 않아 자신에게 전화가 재차 오도록 만든 책임을 따지고 힐난하기 바빴다. 수십 년을 그렇게 살아온 경원과 아내의 관계는 쉽사리 해결되지 않는다. 경원은 들고 있던 전화기를 승강장으로 내던지는 밖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3. 아우 - 상처는 또 다른 상처를 낳는다.

경원의 동생과는 아버지가 다르다. 15살 때 집을 뛰쳐나오게 만든 장본인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고향에서 교직생활을 하며 장남 노릇을 했다. 어머니를 가까이 모시며 수발하고 병상을 지킨 것도 아우뿐이다. 경원의 10대, 사춘기를 혼란으로 이끈 이가 아우였다면 이후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 까지 아우를 혼란과 열등감, 상처로 뒤덮어 온 것은 형, 바로 경원이었다.

 

“어머니가 보고 싶었던 것은 서울 경치도, 며느리도, 손자나 손녀도 아닌 바로 평생 당신께 부담만 주었던 당신의 늙은 아들이었다.” (p.23)

“형님 제대할 때까지 겨울이 되면 어머니는 아랫목에다 잠자리 보는 일조차 마음이 불편해 잠결에 헛소리를 할 정도였어요.” (p.152)

 

돌아가시기 직전 까지도 어머니의 관심은 경원에게 쏠려 있었다. 15살 때 집을 뛰쳐나갈 때부터 줄곧 그래왔다. 결국 어머니를 끝까지 모신 건 아우였지만 어머니의 마음에 끝까지 남은 건 형, 경원이었다. 상처는 또 다른 상처를 낳는다. 경원의 상처는 오롯이 아우에게 전가되었다. 물론 이것이 경원의 책임은 아니다. 지구상 존재하는 생물 중 가장 생명력이 좋다는 바퀴벌레보다 더 질기고 강한 생명력을 가진 것이 상처다. 들러붙어 괴롭히고 또 괴롭힌다.

 

“그런데도 정작 나는 관여하지 않고 천연덕스럽게도 구경꾼 노릇을 하고 있었다. 아우가 다시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p.61)

“그런 말을 대중없이 지절거렸다간 당장이라도 아우의 주먹이 날아들 것 같았다.” (p.94)

 

아우가 보기에 경원은 마뜩찮다. 장남 역할을 제대로 하지 않고 관심도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우는 늘 깍듯하게 형을 대우해 왔다. 가족 간에 유지되는 일정한 수준의 긴장의 선이 고착되면서 조금이라도 이 선을 넘게 되면 완전한 난장판이 될 것이 불 보듯 뻔 하기 때문이었다. 꾹꾹 눌러 담아 참아 오다가 어머니를 화장하고 경원을 좀 더 머물게 한 마지막 날 밤 [장춘옥]에서 아우는 경원에게 모든 것을 쏟아 낸다. 상처가 낳은 또 다른 상처를 뱉어낸다. 경원은 놀라지만 제지하거나 거부하지 않는다.

 

어머니의 죽음을 알리던 전화에서부터 소설 내내 아우는 경원에게 빈정거린다. 예를 갖춘 빈정거림이다. ‘왜? 덤벼보시지! 건드려봐~ 다 폭발해버릴테니까!’ 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경원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줄곧 빈정거리고 원망하는 아우에게 단 한마디도 화내지 않는다. 어쩌면 경원은 알고 있었으리라 짐작된다. 자신의 상처가 의도치 않게 아우에게 전가되고 또 다른 상처의 양태로 깊게 생채기 냈음을.

 

결국 상처는 모두에게 대물림되고 전가되며 전염된다. 상처의 쓴뿌리를 도려내어 고름을 짜내고 약을 발라 치료하지 않는 한 이것은 계속해서 이어진다. 또 다른 상처를 낳고 또 다른 상처를 낳을 뿐이다.

 

어머니의 죽음으로 비로소 자신의 상처를 직면하게 된 경원은 서로 부담스럽지 않게 적절한 수준으로 의지하고 관계해 온 가족들에 대한 미련을 버린다. 아이들은 이미 장성했고 아내는 말이 통하지 않는다. 더 늦기 전에 열차가 도착해 서울로 상경하는 레일위에 몸을 싣기 전에 과거와의 화해를 시도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가신 어머니를 위하는 길이고 그 어머니와의 반목과 오해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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