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신과의 산책
이지민 외 지음 / 레디셋고 / 2012년 6월
평점 :
절판


나는 판타지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모두들 열광하는 무협지가 그렇게 재미없을 줄 몰랐다. [반지의 제왕]도 그저 그랬다. 판타지 소설은 더욱 그렇다. 발 붙여 사는 곳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이렇게 버라이어티 한데 그것 너머에 있는 환상의 세계를 가늠하고 그곳을 향유하기에는 내가 너무 속된 것 같다.

 

이 책 「여신과의 산책」의 소개 글이 섬뜩했다. “당신을 환상의 세계로 안내할 8편의 이야기”

 

‘허거걱! 어쩌지 나는 환상의 세계 따위 좋아하지 않는데’

8명의 작가가 쓴 중·단편 소설을 엮은 책이다. 소개 글이야 워낙 독자의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단어를 선별해 쓰기 마련이므로 크게 걱정하지 않고 책을 열었다.

먼저, 8편의 소설 중 개인적으로 가장 좋았던 작품은 이지민씨의 [여신과의 산책]이고 가장 별로였던 작품은 한유주씨의 [나무 사이 그녀 눈동자 신비한 빛을 발하고 있네] (제목만 별나게 길다;;)이다.

 

 

이지민 [여신과의 산책]

[여신과의 산책]은 책을 읽기 전 여자 ‘신(God)’과의 산책으로 생각했다. 이 사고의 편협함이란^^;; 여자 주인공의 이름이 ‘여신’이었다. 자기가 사귀는 남자와 함께 있을 때 남자의 부모 중 한 분이 죽는, 그래서 그 남자들 모두 부모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던 징크스를 가진 여자였다.

마지막 세 번째 애인이었던 남자의 친구가 찾아와 ‘여신’의 징크스를 되묻고 확인하는 것으로 이야기가 시작되는데, 사람이름 ‘여신’을 ‘여자 신(God)'으로 착각하고 있던 내게 시원한 뒤통수 한 대 후려갈긴 작가의 기발함에 박수를 보내며 나도 시작했다.

[여신과의 산책]은 42페이지 밖에 되지 않는 짧은 소설임에도 문장과 단어에 함축된 이미지는 420페이지를 채우고도 남는 것 같았다.

 

“먼지만이 권태롭게 떠다니는”

“에어컨은 무시무시한 신음 소리를 내며 냉기를 게워내고 있었다.”

 

내가 굉장히 좋아하는 문장의 형태이다. 결코 어렵지 않지만 사물의 양태와 다중적 의미를 전달하는데 효과적인 수식어를 쓴다. 그래서 문장을 읽는 즉시 퍼뜩 이미지를 머릿속으로 그려낼 수 있다. 나는 이런 문장을 좋아한다. 온갖 치장을 하거나 잘난 체하거나 목디스크로 목깁스를 한 것 마냥 뻣뻣하게 위세 떠는 문장을 싫어한다.

 

뭐, 어디까지나 개인적 취향이니 다른 사람은 어떨지 모르겠다.

작가는 본래 작가가 아닌 사람들은 잘 발견하지 못하는 미세한 감각과 양태의 이미지를 포착하는 사람들이라 생각한다. 또한 그것을 단어의 조합과 배열로 가장 적절하게 독자에게 전달하는 것이 작가의 능력이다. 그래서 그 작가의 책을 읽으며 ‘아!! 맞아,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아~~ 왜 나는 똑같은 걸 보면서도 이 생각을 못했지~~!’ 라는 생각을 하게 만들어야 한다.

이런 내 개인적인 기준에서 이지민 작가는 훌륭한 작가적 자질을 지녔다고 생각한다.

 

“전 그 불행이 필요해서 왔습니다.”

“지금 아버지가 위독하십니다. 그리고 저는 아버지의 임종을 보지 않을 생각이고요.”

 

요즘 가뭄 때문에 난리인데 가뭄으로 논이 수백, 수천 개의 비대칭 육각형으로 갈라진 걸 본 적이 있는가? 물기라고는 개미 눈물만큼도 찾을 수 없는 건조함. 나는 그런 건조한 글을 좋아한다. 군더더기가 없고 하고자 하는 말을, 또는 메시지를 150km직구를 던지는 투수처럼 독자의 가슴에 내다 꽂는 문장을 좋아 한다. 그래서 김훈의 글을 잃고 정신적 환각에 빠졌었다. 물론, 김훈만큼은 아니지만 이지민의 글도 건조하다. 말랐다. 하지만 거북하지 않고 바짝 마르지 않아 양 입술 끄트머리에 침이 엉기지 않는다. 재능이자 능력이다.

 

 

한유주 [나무 사이 그녀 눈동자 신비한 빛을 발하고 있네]

앞서 [여신과의 산책]에 대한 내 감상평의 모든 면과 정반대였다. 처음부터 끝까지 무슨 말을 하려 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8편 중 유일하게 두 번 읽었으나 알다가도 모를 긴 제목만큼이나 알다가도 모를 내용이었다.

34페이지 분량 전체가 1인칭 주인공의 시점에서 하는 독백으로 채워져 있다. 대화도 하나도 없고 문체도 바뀌지 않는다. 주인공의 심리부터 상황묘사, 다른 인물들의 모습까지 주인공 혼자의 독백이다.

 

문장의 길이는 8편 중 가장 짧지만 호흡의 구분이 되지 않아 머리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소설의 처음부터 끝이 마치 하나의 문장인 것처럼 보이게 한 것이 작가의 의도였는지는 모르겠으나 만약 의도였다면 그건 성공한 것 같다. 하지만 도무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지 잘 모르겠고 유치원 아이가 새로 산 스케치북에 그 아이를 가장 잘 아는 엄마조차도 이해할 수 없는 그림을 첫 장부터 끝장까지 그린 것 같았다.

 

‘따라올 테면 따라와 봐~~!!’

예전에 지금의 이승기, 김수현을 합친 것보다 더 인기가 많던 유승준이 하던 통신사 CF의 멘트다. XX패스. 우리가 쟤들꺼보다 훨씬 빠르니까 우리꺼 사라. 뭐 이런 식?

당시 유승준은 국내 댄스가수들 보다 몇 비트는 빠른 댄스곡을 라이브로 소화하고 ‘가위춤’ 이런 것들로 대히트를 치고 있었다.

 

‘이해할 테면 이해해 봐~!!’

8편 중 가장 긴 제목과 가장 특이한 문체와 가장 특이한 소설의 형태다. 이해할 테면 이해해 봐라! 라고 하는 것 같았다.

일단 호흡을 할 수 없는 문장에 숨이 막힐 것 같았고, 내용이 지루하다. 긴장감이 없고 술 취한 아저씨 주정 같이 알아들을 수 없었다.

 

 

김이설 [화석]

[여신과의 산책]다음으로 좋았던 작품이다. 기가 막힌 세태를 향한 일정 정도의 블랙코미디도 담겨 있고 누구나 가슴에 품고 있을 첫사랑에 대한 알싸한 기억을 더듬게 하는 작품이다.

“해마다 만 삼천 원짜리 생크림 케이크가 남편의 생일 선물이었다. 올해는 날짜도 틀렸다.

취한 남편이 현관문 턱에 걸려 넘어져 케이크 상자를 떨어뜨렸다. 케이크 한 귀퉁이가 찌그러졌다. 속이 느글거렸다.” (p.86)

 

십삼만 원짜리 구두도 방긋 웃으며 사주던 남편들은 만 삼천 원짜리 케이크에 불안한 심리를 씻는다. 날짜가 틀리고 취기에 넘어져 케이크가 찌그러져도 상관없다. 매일 펼쳐지는 죽음의 전장에서 온갖 상처를 겨우 응급처치 한 채 후방으로 돌아오는 것만으로 스스로 대견하다. 나름 죽어라 사는데, 마누라는 한 동네 살다 신시가지로 이사 간 친구와 자신을 비교하며 화장실 욕조만 한 바가지를 긁어댄다. 마누라는 모를 거라 생각 하겠지만 대학 때 만난 첫사랑 놈과 무슨 짓을 벌이는 지도 알고 있다.

 

한데 그깟 케이크? 뭐 속이 느글거려??

나는 마누라 얼굴을 보면 발바닥 저 밑에서부터 가득 차 있던 무저갱의 토사물이 미사일 발사체의 가공할 만한, 중력을 거스르는... 그 엄청난 힘으로 솟구쳐 올라옴을 경험 한다.

누가 누구 보고 느글거린다고??

 

그래도... 나는 오늘도 마누라에게 먼저 사과 하고 다짐을 한다.

나는 가족관계에 대한 증명을 할 수 있는 모든 공공기관의 서류 상 저 마누라의 남편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화석처럼 지워지지 않는 그 것. 현재까지는.

 

김이설 작가의 [화석]은 자꾸 영화 [바람난 가족]을 생각나게 했다. 있는 그대로를 까발리면서도 난잡하지 않아 좋았다.

나머지 다섯 편은 뜨겁지도 차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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