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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으름은 왜 죄가 되었나 - 부지런함이 숨긴 게으름의 역사
이옥순 지음 / 서해문집 / 2012년 9월
평점 :
나는 시간개념이 철저한 편이다. 약속시간이나 출근시간, 예배시간, 모임시간을 철저하게 지킨다. 정해진 시간이 2시라면 머릿속으로 씻고 옷 입고 어떤 길로 가야하는지 그려본다. 중·고등학교 때도 단 한 번도 지각을 한 적이 없었다. 어머니께서 “일어나라”고 하시면 강시가 벌떡 일어나듯이 일어났었다. 그래서 고등학교 2학년 어느 가을날에는 시계를 잘못 보신 어머니로 인해 새벽 3시에 스쿨버스를 타러 나간 적도 있었다. 낮잠, 늦잠과는 거리가 먼 생활을 했다.
그렇다고 엄청나게 부지런하거나 완벽주의를 표방한 삶을 살지는 않았던 것 같다. 소소한 일상의 약속을 지키려 노력했을 뿐이다.
아버지의 성격을 닮아 그런 것도 있고 성격이 급한 탓도 있는 것 같다.
중요한 것은 나는 내 나름대로 기준을 가지고 그렇게 살아온 것인데 내 기준이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고 비판하는 잣대로 종종 사용될 때가 많다는 것이다.
‘누군 안 바쁜 줄 아나!!, 도대체 왜 저렇게 시간개념이 없는 거야!!’ 라며 혼자 우쭐대고는 했다.
이런 내 시간개념과 약속개념은 아내와의 연애기간과 결혼기간을 통해 많이 바뀌었다. 그렇게 나대지 않아도 다들 불편하지 않게 잘 돌아가는 것이었다.
5분 10분 늦는 아내를 기다리며 정신수양이 된 탓도 있지만 아내에게는 적어도 내가 타인들에게 했던 비난과 조롱을 하지 않으리라 다짐한 이후부터 조금씩 바뀐 것 같다.
“게으름은 절대적인 개념이 아니라 상대적입니다.” (p.159)
이 책 「게으름은 왜 죄가 되었나」는 게으름에 대한 동·서양의 인식차이와 식민지배와 피지배 관계속에서 ‘게으름’을 정의하고 비교하고 있다.
게으름은 결코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이라는 부분에 적극적으로 동의한다.
내가 가지고 있는 시간과 약속에 대한 개념이 100%가 아니라면 상대방의 그것 또한 존중해야 한다. 물론, 시간을 제때 지키지 못하거나 약속을 지키지 못해 큰 피해를 입거나 어이없는 결과를 낳는 일은 지탄받아 마땅하지만 나의 기준이 오로지 ‘참’이라고 하는 것은 일종의 폭력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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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게으르면 안 된다고 가르치는 사람들은 광고주입니다. 한때 힘을 가졌던 귀족들이 아랫사람에게 일을 시켰고, 근대의 산업자본가들이 노동자에게 게으르지 말라고 강조했다면 이제 매혹적인 상품을 파는 글로벌 기업들이 근면을 강조하고 강제합니다.” (p.198)
중세유럽의 귀족이나 동양의 귀족, 고려·조선의 양반들은 게을렀다. 하인이나 노예나 노비가 그들의 일을 대신해 주었기 때문이다. 농사일, 밭일, 집안일에 이르는 모든 것을 남의 손을 빌려 했다. 그래서 멋진 연미복을 차려 입고 파티를 하거나 곰방대를 피우며 술이나 마시고 시를 쓰는 행위를 할 수 있었다. 할 일이 산더미 같이 쌓인 사람들에게 풍류는 개 풀 뜯어 먹는 소리에 불과하다.
오늘날에는 급변하는 세상이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시대에 뒤쳐진다고 한다. 언론, 광고에서부터 교육에 이르기까지 “좀 쉬엄쉬엄 해~.”라고 조금 게을러질 것을 권하지 않는다. 발 빠르게 움직이고 적응하고 최소한 남들이 하는 것은 모두 따라하게 만든다. 그래서 피곤하다. 게으름은 고사하고 일각의 쉼 없이 움직이며 사는데도 고단하다. 한국 사람들이 산을 그렇게 좋아하고 요즘 들어 캠핑이 각광을 받는 것도 일상에서 떠나지 않으면 도저히 게을러질 수 없기 때문이다.
하루가 멀다 하고 새로운 것들이 쏟아지고 그것에 발맞추지 않으면 도태된 사람으로 치부되는 현실에서 촌각을 다투는 직장 생활과 사회생활로 켜켜이 쌓인 스트레스를 풀길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떠나는 것이다. 물리적 공간이나마 저 먼데로 나가서 쌓인 여독을 풀고 게으름의 갈증을 푸는 것이다.
“게으름은 누가 보고 판단하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p.31)
게으름이라는 개념은 상대적인 것이고 주관적인 것이기에 더 스트레스를 준다. 직장에서 잠시 인터넷 검색을 하다가도(이를테면 예스 블로그 같은^^;;)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르거나 상사가 등장할 경우 재빠르게 alt+tab을 눌러 업무와 관련된 화면을 띄운다.
적어도 내게는 업무를 하다가도 내가 좋아하고 가치를 두는 것에서 재미를 얻고 에너지를 충전하여 더욱 업무에 매진할 때가 있다.(아~ 조금 손발이 오그라든다^^) 그런데, 떳떳하게 “아~! 제가 이러저러 해서 예스24보고 있습니다. 괘념치 마세요.” 라고 얘기하지 못한다.
그(그녀)에게는 나의 딴 짓이 업무를 내팽개친 게으름으로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그녀)가 볼 때는 게으름일 수 있지만 내게는 절절한 일상이다.
책에서 저자가 여러 번 지적하듯이 ‘당신은 게으르다. 더 부지런해야 한다. 국가를 위해 조직을 위해 더 열심히 하라.’ 라는 말들을 너무 많이 들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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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게으르지 않도록 가르치는 교육은 필요하지만, 어려서부터 게으름에 대한 과도한 죄책감과 강박관념을 갖게 하는 건 지나치다는 생각이 듭니다. 단단한 나무가 부러지듯 강한 규율이 부드러운 인간을 만들긴 어렵거든요.” (p.21)
초등학교 시절을 가만히 돌아보면 늘 부지런한 철수와 영희가 나오고 학교 선생 말을 잘 듣고 부모님 말씀 잘 듣는 철수와 영희뿐이었다. 책 속에 등장하는 여러 설화와 민담, 우화들은 모조리 부지런하고 조직과 사회에 기여하는 인물로 자라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 어디에서도 여유를 가지고 때론 게으르게 살라고 하는 것이 없다.
사실 맞는 말이다. 열심히 노력하고 자신의 꿈을 위해 정진하는 사람들이 잘못된 것은 아니니까. 공교육을 받고 대학에 진학 해 전공을 열심히 이수하고 직장에 들어가 산업역군으로 살아가는 일은 당연하고 자명한 일이다. 그렇게 하지 않고 싶은 사람은 없다.
하지만 아무리 용을 쓰고 생 쑈를 해도 잘 되지 않는다.
이것은 구조적인 문제다.
실제로 가까운 지인 중 한명의 아버지는 폐차장 사업을 크게 하고 계신다. IMF, 글로벌 경제 위기 등 난관이 많았지만 동남아, 남아메리카, 몽골, 중국 등지의 수출 활로를 개척해 탄탄한 사업 기반을 다지셨다. 내 지인은 누구보다 놀기를 좋아하고 대학 시절 단돈 몇 천원 버느라 알바로 전전긍긍할 때 그 녀석은 세계여행을 다녔다. 나보다 키도 훨씬 크고 운동도 잘 하고 몸도 좋았음에도 이상하게 상근예비역으로 동사무소에서 편하게 군 생활을 하더니 전역하고 또 세계여행을 다녔다. 직장에서 받는 온갖 스트레스로 쩔쩔매던 내게 늘 밥을 사 주고 술을 사 주고 그러더니 아버지 사업체의 부사장이 되어 있다. 나는 국산 준중형 승용차를 타고 다니는데 그 지인은 내 차를 팔아도 사이드 미러 정도 교체할 수 있을 만한 독일산 외제차를 타고 다닌다.
적어도 그 친구 보다는 치열하고 부지런하게 산 것 같은데 그 친구는 이번 추석 연휴 때 프랑스를 다녀왔다.
물론, 그 친구가 나쁘다고 얘기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최소한 그 친구보다는 내가 더 부지런하게 살았지만 조금의 게으름도 용납지 않는 내 인생을 탓할 뿐이다.
그 친구가 부사장에서 사장이 되고 사업체를 운영하게 되면 지금보다는 더 힘들고 치열한 현실과 일상을 부딪칠 것이다.
하지만 그의 현실과 나의 현실은 천양지차다.
이것은 구조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게으름이 야만과 후진성으로 상징되면서 근면하고 역동적인 서구 제국주의자들은 게으른 동양에 대한 침투와 정복을 정당화했습니다.” (p.23)
“게으름이란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지배 계급의 편협한 테두리 안에서 인정받지 못할 뿐이지 오히려 더 많은 일을 한다.” (p.61)
더 많은 일을 하고 더 갖은 애를 쓰며 살지만 그들의 눈에는 ‘게으름’이다. 그래서 더 부지런하고 빠릿빠릿하게 움직이기를 바란다.
옛날 중세시대 이야기, 서구 제국주의 열강의 이야기까지 굳이 가지 않아도 현실에서 충분히 이해하고 찾아볼 수 있다.
“19세기 유럽의 지배자들은 학자와 성직자들과 손잡고 노동을 사랑하고 일에 대한 열정을 가지라고 하층민을 부추겼습니다. 끊임없이 근로와 근면의 아름다움을 칭송했고 열심히 일하는 것을 애국과 연결했습니다.” (p.70)
서구 자본주의가 종교 개혁에 이은 프르테스탄트의 태동으로 촉발되었다면 사실 그것은 서구의 문제다. 책에서처럼 서구 열강이 인도와 중국, 일본과 조선에 물밀 듯 들어와 목도한 것은 한량 같은 원주민들이었다.
기후적·문화적 특성은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혁명을 통해 점진적인 사회 발전을 이룬 그들의 눈에 동양은 미개하고 게으르고 교육·계도할 대상에 지나지 않았다.
절정에 이른 것은 그들의 식민 지배였다. 식민 지배를 공고히 하는데 원주민 들 중 지배계급 내지는 지배자였던 이들을 포섭하는 것은 또한 당연한 이치다.
식민 지배를 떠받친 원주민 지배자들은 여전히 게으른 통치자였다. 일하고 애쓰고 죽을 동 살 동 몸부림치는 자들은 그들이 ‘게으른 자들’이라 명명한 피지배자들이었다.
민족, 자유, 해방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제대로 된 나라의 발전을 위해 한 몸으로 헌신해 부지런히 일하기만을 원했다.
“새 나라의 어린이는 일찍 일어납니다. 잠꾸러기 없는 나라, 우리나라 좋은 나라” (p.75)
잠꾸러기 없는 나라가 좋은 나라일까?
뭐 어차피 나는 잠을 많이 자는 편이 아니니 가타부타 덧붙일 말은 없다.
새 나라의 어린이는 도대체 뭘까?
새 나라의 어린이라는 말이 성립되려면 헌 나라의 어린이가 있어야 하는데 헌 나라의 어린이는 또 뭘까?
나는 헌 한국인인가? 새 한국인인가?
다만, 이 게으름에 대한 혐오와 부지런해야 함에 대한 정서가 서구에서 온 것이라면 적어도 서구처럼 일 년에 2∼3주 정도는 합법적으로 게으를 수 있는 휴가를 줬으면 좋겠다.
대선 주자들 모두 이런 것에는 관심이 없으니 언제나 그런 휴가를 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