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호 기자 X파일 - 진실은 스스로 말하지 않는다
이상호 지음 / 동아시아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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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전두환 전 대통령을 찾아가 고 김근태 고문에 대한 사과를 요구한 유일한 기자. MBC김재철 사장에게 “명백한 언론탄압 아니냐고요!!.”라며 울부짖으며 소리친 기자. KBS슈퍼탈랜트 출신 기자.

입법·사법·행정부 위에 군림하는 제왕적 권력 삼성에 대한 X파일 취재와 폭로로 삼성이 가장 싫어하는 기자.

 

그가 바로 이상호다.

 

시사인 주진우 기자와 쌍벽을 이루는 국내 탐사보도의 전문가다.

부끄럽지만 이상호 기자를 몰랐다. 이상호 기자가 MBC에서 쫓겨나고 나서 손바닥 뉴스라고 이상한 미디어를 만들어 탐사·취재·보도를 하는 것을 보면서 ‘저 사람은 쫓겨났는데 무슨 깡으로 저러는 거지?’ 싶었다. 손바닥 뉴스마저 하지 못하게 되자 발뉴스라는 것을 만들었다. 그래서 고 김근태 고문 서거 후 전두환 사저에 찾아가 사과할 것을 요구했다. 아는 사람들은 다 아는 이상호라는 이름을 나는 몰랐다. 대학 때 언론을 전공했다는 것이 내 부끄러움을 배가 되게 했다.

이 책을 읽으며 계속 생각났던 또 다른 책은 김용철씨의 「삼성을 생각한다」였다. 김용철씨가 삼성의 비자금의 용처를 낱낱이 내부 고발하고 세상에 내던졌을 때 나는 무척 놀랐다. 이제껏 그런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국정원보다 더 강력한 정보력을 가지고 있다는 삼성인데 내부 고발자가 나오다니……. 삼성의 돈을 받아 나중에 옷을 벗게 되더라도 더 좋은 삼성의 자리로 들어가는 것이 가능한 그 집단에서 내부 고발자라니…….

 

나는 적어도 이건희가 대국민 사과쯤은 할 줄 알았다.

그런데 유야무야. 계란으로는 절대 바위를 쪼개지 못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밖에 없었다.

삼성의 X파일을 언론인 중에서는 거의 최초로 보도했고 끝까지 보도했으며 지금도 싸우고 있는 기자일 것이다.

 

한국의 현대사에서 정치권력이 주도가 되어 독재를 하던 경제 개발을 하든지 해왔는데 사실 한국을 움직이는 것은 경제 권력이다. 이 책을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그것이다.

‘한국의 주인은 경제권력’ 즉 재벌. 삼성.

 

 

김용철씨의 「삼성을 생각한다」에서도 그렇게 얘기했다. 삼성가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국가 위에 있다고 생각하지 국가가 자신들 위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중세 유럽의 절대 왕정과 똑같은 심리구조를 지닌 사람들이라고 했다. 어처구니가 없는 말이지만 실제로 그런 일이 한국의 현대사를 통해 중첩 경험·유지 되어 왔기 때문에 무서울 것이 없다는 것이다. 수백억, 수천억, 몇 조를 뒷구멍으로 챙기고 회사의 계열사를 떡 주무르듯 주물러 아들에게 불법으로 상속하고 사건이 터져 쉽게 덮을 수 없으면 휠체어 타고 언론플레이 좀 해주고 대한민국에서 가장 크고 가장 잘 되어 있다는 병원 병실에서 좀 쉬다가 예정에도 없던 단독 대통령 특별 사면으로 다시금 기어 나올 수 있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사람들은 무서워하는 것이 없다고 한다. 그리고 ‘우리가 한국을 먹여 살린다.’라는 일정 부분 메시아 의식 또한 자리 잡고 있다고 하니 이상호 기자가 이 책 「이상호 기자의 X파일 : 진실은 스스로 말하지 않는다」에서 목이 터져라 이야기하는 삼성에 관한 일들이 근거가 있는 탐사이고 주장인 것이다.

삼성이 아우르는 힘의 손아귀에는 이 나라의 입법·사법·행정부가 모두 들어가 있다. 특히 검찰 집단. 삼성의 큰 일이 터지고 나서 수사를 맡은 일선 검사가 제대로 할 수 있는 게 있을까? 대충 마무리 짓고 옷 벗으면 삼성의 중요한 자리로 들어간다. 수배나 많은 연봉을 받으며 호의호식 한다. 그래서 법이나 정의 따위는 안중에도 없게 된다. 자기도 삼성 돈 받고 들어와 있는데 자기가 관여하던 후배 검사들에게는 무슨 말을 하겠나? 안 봐도 뻔하다.

 

더 얘기해봐야 나 혼자 열 받을 것이고. 나 혼자 열 받아 봐야 해결되는 것 없으니 그만 해야겠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이상호 기자 같은 기자가 아직은 있다는 것이다. 물론, 같은 언론인들의 온갖 행패와 악행. 온갖 협박과 공격. 일상을 무너뜨리는 치졸한 목조임이 계속되었지만 이상호. 이 사람은 어떻게 된 게 더 발악을 한다. 하지 마라 하지 마라 하면 더 하는 사람이다. 이상한 뉴스를 만들고 조그마한 골방 같은 곳에서 직접 마이크를 들고 보도를 한다.

말릴 수 없다.

 

그래서 이상호 기자 같은 사람은 국민들이 시민들이 지켜줘야 한다. 정확한 데이터는 알 수 없지만 이 책도 그렇게 흥행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이런 책을 좀 많이 읽어야 할 텐데 매번 베스트셀러 1위하는 책들을 보면…….

 

아무도 하지 않은 일을 하고,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가고, 아무도 관심가지지 않은 사안을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진짜 기자. 제대로 된 기자. 이상호 기자를 열렬히 응원한다. 지금은 MBC로부터 해고를 당한 것도 아니고 안 당한 것도 아닌 정체성이 모호한 가운데서도 저 정도로 맹렬한 미디어 행위를 하고 있는 사람이 제대로 된 언론 환경에서는 얼마나 더 대단한 미디어 행위를 쏟아내고 그것이 이 사회를 얼마나 더 정의롭게 상식적인 사회가 되는 데 도움이 될지 상상해보니 씩 웃음이 난다.

그때까지 몸 다치지 않고 잘 계셨으면 하는 바람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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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브 잡스의 이메일박스 - 소통형 리더가 되는 잡스의 이메일 커뮤니케이션
마크 밀리안 지음, 권오열 옮김 / 서울문화사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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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브 잡스는 여러 가지 면에서 복합적인 인간유형을 가진 인물이었던 것 같다. 이 책 「스티브 잡스의 이메일박스」는 한 시대를 풍미한 혁신의 정형, 스티브 잡스의 이메일을 들여다본다는 재미가 있었다.

 

누구보다 슬로우 어답터이고 기계 쪽엔 관심이 없는 내게 스티브 잡스는 별 관심이 없는 인물이었다. 후줄근한 터틀넥 티셔츠와 청바지, 뉴발란스 운동화, 그리고 너무나도 앙상하게 말라버린 그의 얼굴을 제대로 보게 된 건 아이패드 발표회였다. 투병으로 인해 지친 몸은 나 같은 사람에게는 ‘고독한 천재’, ‘죽음을 앞둔 시대의 혁명가’, ‘신의 질투를 야기한 창조자’의 이미지로 각인되었다. 아무리 IT쪽 CEO라지만 한국의 어떤 CEO가 그런 티셔츠와 청바지를 입고 나올 수 있을까 싶었다.

뭐 물론 이후에도 아이폰이나 아이패드를 바로 구입하거나 잡스와 관련된 책을 읽어보지는 않았다. 이런저런 책이나 정보로부터 스티브 잡스가 성격유형으로 따지자면 독불장군 유형이었고 특히 직원들과의 소통의 부재가 가장 아쉬운 부분이었다는 점 정도만 알고 있었다.

 

그런 차에 스티브 잡스의 이메일을 들여다 볼 수 있다는 것은 꽤나 흥미로운 일이었다. 이제는 인터넷 게시판과 이메일의 사용 빈도가 급격하게 줄어든 추세이지만 중요한 정보 전달이나 의사소통을 필요로 할 때에는 다소 열린 공간인 SNS보다 이메일이 아직은 효과적으로 이용되고 있다.

 

 

 

 

나는 스티브 잡스가 애플의 모든 제품에 관련된 소비자, 구매자의 요구·불만·불평 등에 답했다는 것에 일단 놀랐다. 물론, 전체 받은 메일 중 몇%정도 답신을 했는지 알 수는 없지만 특정 메일에 대해서 아주 간단하게나마 답을 했다는 것 자체가 놀라웠다.

 

“고객 서비스와 관련된 비난까지 기꺼이 감수하고자 하는 CEO는 거의 없으며, 이것은 스티브가 상당한 주의를 기울이고 인내심을 발휘한 애플의 비즈니스의 일부였다.” (p.159)

 

회사의 고객 서비스 부서에서 답해도 충분할 정도의 사안임에도 선별하여 소비자와 소통하려 했다. 또한 자신의 고객에 대한 응대를 회사의 전체 이미지로 굳혀 나가는 데 탁월한 감각을 가지고 있는 경영자였다.

 

실제로 내가 한글과컴퓨터나 예전 안랩에 문의사항이나 불만사항을 남겼는데 어느 날 갑자기 이찬진씨와 안철수씨로부터 이메일 답신을 받는다면 머리끝까지 치솟았던 불만사항은 절반쯤은 상쇄될 것이 뻔하다.

하지만 스티브 잡스는 100% 서비스 차원에서만 고객의 이메일에 응대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특유의 냉소와 조롱 섞인 말투가 이메일 문장과 단어에서도 그대로 들어날 때가 많았다고 한다. 이를테면 시중에 나와 있는 안드로이드폰의 성능과 비교해서 아이폰의 성능도 업그레이드 해 줄 것을 요구하면 “그냥 안드로이드 쓰세요~~”로 답했다.

 

“실제의 잡스는 인간적인 면이 가득한 완벽하지 않기에 매력은 더 돋보이는 존재였다.” (p.8)

“많은 직원들이 스티브를 싫어했고 그가 피도 눈물도 없는 독재가 같은 보스라고 불평했다. 이사들은 스티브가 성숙한 기업을 이끌기에는 함량미달이라고 판단했다.” (p.23)

 

또한 언론이나 경쟁사, 국가기관에서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메일의 내용이 날아 왔을 때는 가차 없이 맞받아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사실, 애플 창립 초기와 쫓겨나고 난 뒤 다시 복귀했을 초기에는 굉장히 다혈질적이고 고집이 센 사람이었다고 한다.

많은 부하 직원들이 그를 싫어하고 때로는 무서워했던 것도 어느 정도 사실인 것 같다. 하지만 내 사회생활을 돌이켜 볼 때 아무리 인간적인 성품이 훌륭하고 부하직원들에게 잘 해주는 상사일지라도 업무 능력이 떨어진다면 결국 부서 전체 혹은 부하직원들에게 피해가 올 수 밖에 없었다. 다소 인격적인 면은 부족하고 매일매일 부하직원들의 뒷담화 대상이 되는 상사이지만 업무 능력이 탁월하다면 뭐 참고 직장 생활을 하는 것이 사실이다.

스티브 잡스의 탁월함이 그가 가진 인격적·관계적 부족함을 채우고도 남았다고 보는 것이 솔직한 해석일 것 같다.

 

“정치적 우파는 진보적인 성향의 기업인 애플을 비판할 만한 이유가 있고, 좌파는 제품의 모든 측면을 통제하고 제품을 값싸게 제조하는 중국 근로자들을 착취하며 특정 경쟁자와 언론매체를 차단하려는 애플의 시도에 날을 세울 만한 자체의 정당한 이유를 갖고 있다.” (p.128)

“모든 자살은 비극적이지만, 폭스콘의 자살률은 중국 평균에 비하면 훨씬 낮습니다. 우리는 이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습니다.” (p.152)

 

업계를 주도하고 창조적 동력으로 움직인 애플이기에 수많은 비판과 지적에 시달렸음은 자명한 사실이다. 어떻게든 따라잡으려 혈안이 되어 덤벼드는 경쟁사와 언론의 술수에 스티브 잡스가 많은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책에서는 소개한다.

그럼에도 중국 공장에서 일어난 연쇄적인 자살사건에 대해 처신한 그의 모습은 분명 잘못된 것이라 생각된다. 그의 말마따나 어떤 글로벌 기업이나 자본들도 제3세계 공장에서는 노동력을 착취하고 개선되지 않은 작업환경일 수밖에 없다. 굵직한 재벌 기업들의 횡포는 더욱 심하다. 맞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애플을 사랑하고 스티브 잡스를 좋아하든지 싫어하든지 그에게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기대하는 바가 있다. 여느 심술궂고 못된 기업들과는 다르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제3세계 공장에서 자살 사건이 일어났을 때, 애플과 잡스가 제품을 출시하며 보여 준 혁신적이고 창조적인 해결책이 나왔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그렇지 못했다.

기존 기업들이 하는 행태. 그대로 답습했다.

안타까운 부분이다.

 

“스콧은 스티브에게 컴퓨터 수리를 도대체 언제까지 기다려야 할지 모르겠다는 내용의 이메일을 보낸 후 전화를 받았다.”

“안녕 스콧, 나 스티브예요.”

“스티브 잡스라고요?” (p.163)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스티브 잡스가 노력했다는 데 있다.

온갖 공격과 비난의 화살이 자신에게 집중되었을 때 피하거나 숨지 않고 되받아치고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소비자·구매자의 소소한 문의나 불만에 일일이 답하지는 못했지만 선별하여 소통하려는 노력 또한 분명히 했다. 그리고 해당 회사의 CEO가 불만에 가득 찬 소비자에게 직접 전화하는 파격까지 선보이기도 했다.

이것은 분명 쉽지 않은 일이다.

 

한국의 어떤 CEO가 그렇게 할 수 있나.

솔직히 나는 이 책을 읽고도 책을 읽기 전 잡스에 대해 가졌던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그를 더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는다는 말이다.

 

하지만 시대를 움직이고 트렌드를 창조해 낸 그의 업적만큼은 변함이 없을 것이다. 사람들은 여전히 스티브 잡스의 이미지에 소비한다. 혁신적이고 미래지향적인 기능과 디자인으로 중무장한 아이폰과 아이패드에 우선하는 것이다. 스티브 잡스가 보여 준 자유롭고 창조적인 이미지는 단지 그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다는 사실 만으로 무너지지 않는다.

사람들은 그의 이미지를 희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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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으름은 왜 죄가 되었나 - 부지런함이 숨긴 게으름의 역사
이옥순 지음 / 서해문집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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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시간개념이 철저한 편이다. 약속시간이나 출근시간, 예배시간, 모임시간을 철저하게 지킨다. 정해진 시간이 2시라면 머릿속으로 씻고 옷 입고 어떤 길로 가야하는지 그려본다. 중·고등학교 때도 단 한 번도 지각을 한 적이 없었다. 어머니께서 “일어나라”고 하시면 강시가 벌떡 일어나듯이 일어났었다. 그래서 고등학교 2학년 어느 가을날에는 시계를 잘못 보신 어머니로 인해 새벽 3시에 스쿨버스를 타러 나간 적도 있었다. 낮잠, 늦잠과는 거리가 먼 생활을 했다.

그렇다고 엄청나게 부지런하거나 완벽주의를 표방한 삶을 살지는 않았던 것 같다. 소소한 일상의 약속을 지키려 노력했을 뿐이다.

아버지의 성격을 닮아 그런 것도 있고 성격이 급한 탓도 있는 것 같다.

중요한 것은 나는 내 나름대로 기준을 가지고 그렇게 살아온 것인데 내 기준이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고 비판하는 잣대로 종종 사용될 때가 많다는 것이다.

‘누군 안 바쁜 줄 아나!!, 도대체 왜 저렇게 시간개념이 없는 거야!!’ 라며 혼자 우쭐대고는 했다.

이런 내 시간개념과 약속개념은 아내와의 연애기간과 결혼기간을 통해 많이 바뀌었다. 그렇게 나대지 않아도 다들 불편하지 않게 잘 돌아가는 것이었다.

5분 10분 늦는 아내를 기다리며 정신수양이 된 탓도 있지만 아내에게는 적어도 내가 타인들에게 했던 비난과 조롱을 하지 않으리라 다짐한 이후부터 조금씩 바뀐 것 같다.

 

“게으름은 절대적인 개념이 아니라 상대적입니다.” (p.159)

 

이 책 「게으름은 왜 죄가 되었나」는 게으름에 대한 동·서양의 인식차이와 식민지배와 피지배 관계속에서 ‘게으름’을 정의하고 비교하고 있다.

게으름은 결코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이라는 부분에 적극적으로 동의한다.

내가 가지고 있는 시간과 약속에 대한 개념이 100%가 아니라면 상대방의 그것 또한 존중해야 한다. 물론, 시간을 제때 지키지 못하거나 약속을 지키지 못해 큰 피해를 입거나 어이없는 결과를 낳는 일은 지탄받아 마땅하지만 나의 기준이 오로지 ‘참’이라고 하는 것은 일종의 폭력일 수 있다

.

“오늘날 게으르면 안 된다고 가르치는 사람들은 광고주입니다. 한때 힘을 가졌던 귀족들이 아랫사람에게 일을 시켰고, 근대의 산업자본가들이 노동자에게 게으르지 말라고 강조했다면 이제 매혹적인 상품을 파는 글로벌 기업들이 근면을 강조하고 강제합니다.” (p.198)

 

중세유럽의 귀족이나 동양의 귀족, 고려·조선의 양반들은 게을렀다. 하인이나 노예나 노비가 그들의 일을 대신해 주었기 때문이다. 농사일, 밭일, 집안일에 이르는 모든 것을 남의 손을 빌려 했다. 그래서 멋진 연미복을 차려 입고 파티를 하거나 곰방대를 피우며 술이나 마시고 시를 쓰는 행위를 할 수 있었다. 할 일이 산더미 같이 쌓인 사람들에게 풍류는 개 풀 뜯어 먹는 소리에 불과하다.

오늘날에는 급변하는 세상이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시대에 뒤쳐진다고 한다. 언론, 광고에서부터 교육에 이르기까지 “좀 쉬엄쉬엄 해~.”라고 조금 게을러질 것을 권하지 않는다. 발 빠르게 움직이고 적응하고 최소한 남들이 하는 것은 모두 따라하게 만든다. 그래서 피곤하다. 게으름은 고사하고 일각의 쉼 없이 움직이며 사는데도 고단하다. 한국 사람들이 산을 그렇게 좋아하고 요즘 들어 캠핑이 각광을 받는 것도 일상에서 떠나지 않으면 도저히 게을러질 수 없기 때문이다.

하루가 멀다 하고 새로운 것들이 쏟아지고 그것에 발맞추지 않으면 도태된 사람으로 치부되는 현실에서 촌각을 다투는 직장 생활과 사회생활로 켜켜이 쌓인 스트레스를 풀길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떠나는 것이다. 물리적 공간이나마 저 먼데로 나가서 쌓인 여독을 풀고 게으름의 갈증을 푸는 것이다.

 

“게으름은 누가 보고 판단하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p.31)

 

게으름이라는 개념은 상대적인 것이고 주관적인 것이기에 더 스트레스를 준다. 직장에서 잠시 인터넷 검색을 하다가도(이를테면 예스 블로그 같은^^;;)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르거나 상사가 등장할 경우 재빠르게 alt+tab을 눌러 업무와 관련된 화면을 띄운다.

적어도 내게는 업무를 하다가도 내가 좋아하고 가치를 두는 것에서 재미를 얻고 에너지를 충전하여 더욱 업무에 매진할 때가 있다.(아~ 조금 손발이 오그라든다^^) 그런데, 떳떳하게 “아~! 제가 이러저러 해서 예스24보고 있습니다. 괘념치 마세요.” 라고 얘기하지 못한다.

그(그녀)에게는 나의 딴 짓이 업무를 내팽개친 게으름으로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그녀)가 볼 때는 게으름일 수 있지만 내게는 절절한 일상이다.

책에서 저자가 여러 번 지적하듯이 ‘당신은 게으르다. 더 부지런해야 한다. 국가를 위해 조직을 위해 더 열심히 하라.’ 라는 말들을 너무 많이 들어 왔다

.

“너무 게으르지 않도록 가르치는 교육은 필요하지만, 어려서부터 게으름에 대한 과도한 죄책감과 강박관념을 갖게 하는 건 지나치다는 생각이 듭니다. 단단한 나무가 부러지듯 강한 규율이 부드러운 인간을 만들긴 어렵거든요.” (p.21)

 

초등학교 시절을 가만히 돌아보면 늘 부지런한 철수와 영희가 나오고 학교 선생 말을 잘 듣고 부모님 말씀 잘 듣는 철수와 영희뿐이었다. 책 속에 등장하는 여러 설화와 민담, 우화들은 모조리 부지런하고 조직과 사회에 기여하는 인물로 자라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 어디에서도 여유를 가지고 때론 게으르게 살라고 하는 것이 없다.

사실 맞는 말이다. 열심히 노력하고 자신의 꿈을 위해 정진하는 사람들이 잘못된 것은 아니니까. 공교육을 받고 대학에 진학 해 전공을 열심히 이수하고 직장에 들어가 산업역군으로 살아가는 일은 당연하고 자명한 일이다. 그렇게 하지 않고 싶은 사람은 없다.

하지만 아무리 용을 쓰고 생 쑈를 해도 잘 되지 않는다.

 

이것은 구조적인 문제다.

 

실제로 가까운 지인 중 한명의 아버지는 폐차장 사업을 크게 하고 계신다. IMF, 글로벌 경제 위기 등 난관이 많았지만 동남아, 남아메리카, 몽골, 중국 등지의 수출 활로를 개척해 탄탄한 사업 기반을 다지셨다. 내 지인은 누구보다 놀기를 좋아하고 대학 시절 단돈 몇 천원 버느라 알바로 전전긍긍할 때 그 녀석은 세계여행을 다녔다. 나보다 키도 훨씬 크고 운동도 잘 하고 몸도 좋았음에도 이상하게 상근예비역으로 동사무소에서 편하게 군 생활을 하더니 전역하고 또 세계여행을 다녔다. 직장에서 받는 온갖 스트레스로 쩔쩔매던 내게 늘 밥을 사 주고 술을 사 주고 그러더니 아버지 사업체의 부사장이 되어 있다. 나는 국산 준중형 승용차를 타고 다니는데 그 지인은 내 차를 팔아도 사이드 미러 정도 교체할 수 있을 만한 독일산 외제차를 타고 다닌다.

적어도 그 친구 보다는 치열하고 부지런하게 산 것 같은데 그 친구는 이번 추석 연휴 때 프랑스를 다녀왔다.

물론, 그 친구가 나쁘다고 얘기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최소한 그 친구보다는 내가 더 부지런하게 살았지만 조금의 게으름도 용납지 않는 내 인생을 탓할 뿐이다.

그 친구가 부사장에서 사장이 되고 사업체를 운영하게 되면 지금보다는 더 힘들고 치열한 현실과 일상을 부딪칠 것이다.

하지만 그의 현실과 나의 현실은 천양지차다.

이것은 구조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게으름이 야만과 후진성으로 상징되면서 근면하고 역동적인 서구 제국주의자들은 게으른 동양에 대한 침투와 정복을 정당화했습니다.” (p.23)

 

“게으름이란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지배 계급의 편협한 테두리 안에서 인정받지 못할 뿐이지 오히려 더 많은 일을 한다.” (p.61)

 

더 많은 일을 하고 더 갖은 애를 쓰며 살지만 그들의 눈에는 ‘게으름’이다. 그래서 더 부지런하고 빠릿빠릿하게 움직이기를 바란다.

옛날 중세시대 이야기, 서구 제국주의 열강의 이야기까지 굳이 가지 않아도 현실에서 충분히 이해하고 찾아볼 수 있다.

 

“19세기 유럽의 지배자들은 학자와 성직자들과 손잡고 노동을 사랑하고 일에 대한 열정을 가지라고 하층민을 부추겼습니다. 끊임없이 근로와 근면의 아름다움을 칭송했고 열심히 일하는 것을 애국과 연결했습니다.” (p.70)

 

서구 자본주의가 종교 개혁에 이은 프르테스탄트의 태동으로 촉발되었다면 사실 그것은 서구의 문제다. 책에서처럼 서구 열강이 인도와 중국, 일본과 조선에 물밀 듯 들어와 목도한 것은 한량 같은 원주민들이었다.

기후적·문화적 특성은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혁명을 통해 점진적인 사회 발전을 이룬 그들의 눈에 동양은 미개하고 게으르고 교육·계도할 대상에 지나지 않았다.

절정에 이른 것은 그들의 식민 지배였다. 식민 지배를 공고히 하는데 원주민 들 중 지배계급 내지는 지배자였던 이들을 포섭하는 것은 또한 당연한 이치다.

식민 지배를 떠받친 원주민 지배자들은 여전히 게으른 통치자였다. 일하고 애쓰고 죽을 동 살 동 몸부림치는 자들은 그들이 ‘게으른 자들’이라 명명한 피지배자들이었다.

민족, 자유, 해방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제대로 된 나라의 발전을 위해 한 몸으로 헌신해 부지런히 일하기만을 원했다.

 

“새 나라의 어린이는 일찍 일어납니다. 잠꾸러기 없는 나라, 우리나라 좋은 나라” (p.75)

 

잠꾸러기 없는 나라가 좋은 나라일까?

뭐 어차피 나는 잠을 많이 자는 편이 아니니 가타부타 덧붙일 말은 없다.

새 나라의 어린이는 도대체 뭘까?

새 나라의 어린이라는 말이 성립되려면 헌 나라의 어린이가 있어야 하는데 헌 나라의 어린이는 또 뭘까?

 

나는 헌 한국인인가? 새 한국인인가?

다만, 이 게으름에 대한 혐오와 부지런해야 함에 대한 정서가 서구에서 온 것이라면 적어도 서구처럼 일 년에 2∼3주 정도는 합법적으로 게으를 수 있는 휴가를 줬으면 좋겠다.

대선 주자들 모두 이런 것에는 관심이 없으니 언제나 그런 휴가를 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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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우스트 러시아 고전산책 5
이반 세르게예비치 뚜르게녜프 지음, 김영란 옮김 / 작가정신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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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보코프의 러시아 문학 강의」를 통해 이반 투르게네프를 알게 되었다. 러시아의 대(大)문호라 하면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만을 떠올리게 마련이다. 나도 그랬다. 하지만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 이전 러시아 문학의 꽃을 만개하기 위한 토대를 만든 이가 이반 투르게네프 였다고 한다.

이 책 「파우스트」에서도 당시 러시아 문학이 가지던 자연에 대한 찬미와 서정미, 인간에 대한 사랑과 실존에 대한 고민이 그대로 담겨져 있다.

책의 제목이 된 파우스트와 함께 두 편의 중·단편을 엮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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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의 만남]

[세 번의 만남]의 주인공은 이탈리아 소렌토와 러시아의 한적한 영지, 그리고 페테르부르크에서 한 여인과 우연히 세 번을 만나게 되는 이야기다.

 

“홀로 오라, 오는 내내 나를 생각하라.” (p.14)

 

전형적인 러시아의 아름다운 시골마을에서 한적한 나날을 보내고 있던 주인공은 어느 날 언덕 위 정원이 딸린 저택에서 나오는 노래 소리에 귀신에 홀린 것처럼 취하게 된다.

언젠가 들어본 듯 한 노래 소리다. 언젠가 들어본 듯 한 목소리다.

소렌토에서 들었었던 그 목소리와 노래였다. 그때도 그 목소리와 노래에 끌려 창문으로 들여다봤지만 애인과 함께 있는 그녀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 곳 러시아의 시골에서도 그녀의 목소리와 노래가 들려 온 것이다.

그녀 옆에 소렌토에서 함께 있었던 남자가 여전히 있는지 어떤 연유로 이곳까지 오게 되었는지, 그녀에 대한 것이라면 무엇이라도 알고 싶었던 주인공은 그녀가 있는 저택으로 무작정 찾아간다.

몇 년 뒤 주인공은 페테르부르크의 가면무도회에서 그녀를 만난다. 우연인지 운명인지 모를 세 번의 만남이다. 그리고 그녀의 입에서 변심한 애인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 너무도 절망에 빠진 그녀의 상실에 주인공은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마치 한바탕 꿈을 꾼 것처럼.

 

“소렌토와 러시아에서 그녀를 보았던 일, 미하일롭스코예 마을에서 쓸데없이 그녀에 대해 꼬치꼬치 물어보고 다녔던 일, 모스크바에서 쉴리코바 부인 자매를 만났던 일까지 모두 말이다.” (p.58)

 

이탈리아에서부터 그녀를 좋아했고 그녀를 마음에 품어왔고 그녀를 잊지 않았다고 고백하지만 결국 그녀의 사랑에는 닿지 못한다.

누군가를 짝사랑해보지 않은 사람은 아마 없으리라. 그 짝사랑이 주는 애달픔과 마음 졸임과 숨이 막히는 그리움과 소망은 누구나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작품의 주인공도 똑같은 것 같다. 투르게네프가 그림을 그리듯 표현한 아름다운 자연과 풍경보다 더 간지럽고 상큼하다. 몇 년을 기다리고 고대한 그녀와의 만남이 결국에는 자신의 마음을 접는 것으로 끝나는 허망함 또한 그대로 이해가 된다.

 

 

 

 

#

[파우스트]

[파우스트]는 투르게네프의 자전적 소설이라 분류해도 무방한 작품이다.

 

1843년 스페인 출신 가수였던 폴리나 가르시아 비아르도와 사랑에 빠졌는데, 그녀와의 관계는 그의 일생에 큰 영향을 미쳤다. 투르게네프는 비아르도의 유럽 순회공연을 쫓아다녔고, 꽤 오랫동안 파리에서 지내면서 그녀는 물론 그녀의 남편과 ‘가족의 친구’로 함께 지냈다.

 

[파우스트]는 9편의 편지글로 구성되어 있다. 결혼한 아름다운 여인에 대한 사랑과 그것의 결말이 결국 비극으로 끝나는 내용이다. 투르게네프 자신이 유부녀 비아르도와 이룰 수 없었던 사랑을 작품에 그대로 투영한 것 같았다.

 

주인공 파벨은 자신의 영지로 돌아와 대학 시절 동창인 프리임코프를 만난다. 그런데 그의 부인이 젊은 시절 첫 사랑이었던 베라인 것이었다. 이미 나이도 스물여덟이 되었고 세 아이의 엄마가 되어 있었지만 여전히 첫 사랑의 모습 그대로 아름다웠다.

베라와 첫사랑에 빠지던 그 때 베를린으로의 유학까지 포기하겠다는 다짐을 하면서까지 베라의 어머니에게 결혼 승낙을 받으려 했다. 하지만 결국 베라의 어머니의 반대로 단념하게 된다.

어머니의 이상한 교육 방식으로 어려서부터 단 한권도 소설과 시를 읽지 못한 베라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괴테의 「파우스트」를 읽어주게 된다.

문학작품을 읽으면 격정적인 심경의 변화가 온다는 것이다. 사랑·정열과 같은 감정은 꼭꼭 숨겨둔 채 살아온 베라는 어린 시절 첫 사랑이던 파벨에게서 「파우스트」를 소개 받는다. 그러면서 빗장이 풀리 듯 파우스트와 같은 욕망이 분출하게 된다.

 

있잖아..

사람은 말이야..

상상력이 있어서 비겁해지는거래~

그러니까...

상상을 하지 말아봐..

존~나 용감해질수있어..

영화 [올드보이 중]

 

상상을 할 수 있게 되자 주체할 수 없는 격정에 빠진 베라는 남편을 둔 채 파벨에게 완전히 빠져버린다. 이제껏 꽁꽁 싸매어 두었던 감정이 화산처럼 폭발해 버린 것이다.

정말이지, 왜 날 이렇게 만들었냐고요!”

 

“당신을 사랑해요. 당신이 날 이렇게 만들었어요.”

“난 당신을 사랑해요, 사랑에 빠져버렸어요!” (p.139)

 

파우스트적 욕망은 비극적 결론으로 도출된다. 투르게네프가 결국 유부녀인 비아르도를 가질 수 없었던 것처럼 남편인 프리임코프를 두고 베라는 파벨과 이어질 수 없었다. 모든 살아있는 것을 녹여버릴 듯 내리쬐는 여름 한 낮 볕을 검은 그늘막이 한 번에 차양(遮陽)하듯이 어머니의 유령은 계속해서 베라를 괴롭힌다. 그 후 베라는 이유 없이 시름시름 앓다가 죽게 된다.

결국 이루지 못하는 사랑이 되었다.

 

 

 

#

「이상한 이야기」

「이상한 이야기」도 앞의 두 작품과 마찬가지로 15년 전 과거로부터 시작된다. 우연히 만난 소피라는 소녀에게 완전히 빠져버린 주인공은 우연한 기회로 과거에 소피를 다시 만나게 되고 ‘바슬리’라는 청년에게 심취한 그녀를 발견하게 된다.

 

“제 눈앞에 있는 이 소녀는 단순히 수줍음 많은 시골 아가씨가 아니라 제가 이해할 수 없는 특징을 지는 독특한 존재였습니다. 전 모든 것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이보다 더 진실한 영혼을 지금껏 만난 적이 없다는 사실만은 확실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p.160)

 

15년 전 어느 도시에서 만나 사랑에 빠졌던 소피의 그 때 모습과는 달라졌지만 자신의 신념과 가치에 따라 바슬리에게 스승의 모습 내지는 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헌신적으로 따르는 소피에게서 오히려 감명을 받는다. 그래서 바슬리를 따른다.

앞의 두 작품이 다소 소극적인 여성상을 담아낸 것에 반해 소피는 다르다. 당시만 해도 종교에 대한 권위와 암묵적 동조가 사회 전체적인 분위기를 지배하고 있었을 무렵이었음을 감안하면 기성 종교에서 말하는 신도 아닌 ‘바슬리’라는 사람을 따르는 다소 어리석고 황당해 보이는 행동을 소피 주체적으로 결정한다. 자신의 말과 행동을 일치하는 것이다. 당시 여성상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이미지다.

 

주인공은 소피를 설득해보려 하지만 소피의 숭고한 가치에 대한 헌신적 삶에 동조하게 된다. 자신의 사랑 따위는 구차해지는 것이다.

하지만 결국 소피는 가족에 의해 집으로 끌려가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죽게 된다.

투르게네프는 이 세 작품을 통해 사랑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인간 존재의 유한함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해체주의인가?

세 작품의 결말 모두 비극적이라는 것은 똑같다. 사랑도 이루어지지 못했고 허무하게 끝이 나거나 죽었다.

 

자칫 허무나 해체로 치달을 수 있는 내용은 투르게네프의 탁월한 심리 묘사와 풍경 묘사로 희석된다. 그래서 독자로 하여금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일이지~.’라는 다소의 안도를 준다. 탁월한 작가의 능력이 아닐까 싶다.

분명한 것은 내가 지금까지 읽었었던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들과는 확실히 차별성이 있다는 것이었다.

 

다음번엔 장편을 읽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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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파는 상점 - 제1회 자음과모음 청소년문학상 수상작 자음과모음 청소년문학 15
김선영 지음 / 자음과모음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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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 상 학생들을 많이 만난다. 일요일에는 교회 학생부서에서도 많이 만난다. 내가 아이들에게 가장 많이 하는 말은 “힘 좀 내라.”이다. “힘내라.”도 아니고 “힘 내라.”이다. 하나같이 생기 없고 축 처져있다. 아이들을 보면 마음이 아프다.

“나도 너희들과 똑같은 시간을 보냈다. 지나고 나면 별 거 아니다.”라고 쉽게 단정 지어 말할 수 없다. 그 아이들이 받는 스트레스와 압박과 옥죔은 나의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것 같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겠다. 학교폭력, 자살, 왕따 청소년 집단이 골칫덩어리가 되어 버렸다. 교육당국도 정부도 가정도 어떻게 손 쓸 수 없는 괴물이 되어 버렸다. 그러니 교육청이라는 곳에서 학교에서만은 자살하지 말라고 “창문은 20cm만 열라”는 황당무계하고 어이없고 천박한 지시를 하기도 했다.

 

아이들을 한명씩 만나보면 여전히 밝고 맑고 어리다. 그리고 너무 여리다.

이 책은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다. 작가가 얘기한 것처럼 섣부른 어른들의 판단과 염려 내지는 대책 따위는 없다. 어설픈 위로와 작위적인 공감도 없다. 다만 아이들의 눈높이에서 아이들의 언어와 아이들의 심정을 최대한 단어와 문장에 그대로 녹아내려 했다고 생각된다.

주체는 어른이나 어른의 눈높이가 아니고 철저하게 등장하는 아이들이다.

 

 

 

#

부모

책에서 부모는 다양한 형태로 등장한다. 온조의 아버지는 소방관이었고, 어머니는 환경관련 시민단체에서 일한다. 아버지는 불의의 사고로 돌아가시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다. 어린 시절 아버지와의 잊을 수 없는 소중한 추억들이 있지만 부재(不在)한 아버지를 대신해 주지 못한다. 언제나 자신 곁에만 머물러 있을 줄 알았던 어머니도 온조가 다니는 학교의 생물 선생님과 로맨스를 펼치기 직전이다. 온조는 소외감으로 괴로워한다.

 

온조와 가장 친한 친구인 난주는 이미 부모의 이혼을 경험했다. 새롭게 생긴 아버지가 너무 잘해주고 새롭게 생긴 어린 남동생 둘도 너무 귀엽지만 원체 낙천적이고 긍정적인 난주의 성격 상 그렇게 드러나는 것일 뿐 행복해 보이지는 않는다.

온조의 [시간을 파는 상점]의 의뢰인 강토는 더욱 심각하다. 할머니 임종조차 핑계를 대며 지키지 않은 아버지를 보고 자랐고 할아버지는 강토 아버지를 고소하기에 이르는 집구석이다. 물론 책의 마지막에는 강토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자연스레 화해하는 모습이 나오기는 하지만 그간 괴로웠을 강토의 마음에 대한 보상은 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가네샤라는 가명을 쓴 괴짜우등생 혜지는 자신이 정말 하고 싶은 동화작가의 꿈을 접은 채 부모의 기대에 파묻혀 스스로 자신을 가두며 외톨이가 된다. 혜지의 유일한 탈출구는 심장을 울릴 듯 쿵쾅대는 헤비메틀 뿐이다.

난주의 짝사랑 정이현의 반에서 일어난 PMP 도난 사건의 범인인 아이는 가장 불행하다. 남부러울 것 없는 집안 형편이지만 도무지 부모의 기대와 요구에 닿을 수 없다. 사촌들은 모두 다 공부를 잘한다. 아이는 파국으로 향한다.

 

“그런 부모를 욕보일 수 있는 방법은 딱 한 가지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더래. 남의 물건에 손댔을 때 엄마가 병적으로 반응했던 것을 떠올린 거지.” (p.193)

 

부모의 기대에 따라오지 못하는 자식에게 가차 없는 몰인정과 무관심이 쏟아 부어진다. 아이는 물건을 훔치는 행위로 부모와의 마지막 끈을 잇는다. 불행의 절정이다.

책에 등장하는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현실을 몇% 반영하고 있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현실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 한다. 부모의 과한 애정과 관심 혹은 너무 부족한 애정과 관심 모두 아이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아이들이 가장 많이 하는 말은 이것이다.

 

“우리 엄마, 아빠하고는 진짜 말이 안 통해요!!”

 

그대로 좀 놔뒀으면 좋겠다.

 

 

#

선생

책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선생은 불곰이다. 생물 선생인 불곰은 여학생들에게 인기가 많다. 후줄근하고 머리도 멋있게 세팅하지 않았지만 흥분하면 더듬는 말투와 부스스한 외모, 무엇보다 아이들의 말을 들으려 하는 그의 마음이 어필이 된 것일 테다.

친구 중 공무원이 있는데 가장 싫어하는 직종이 교사라고 했다. 이유를 물어봤더니 교사들은 허구한 날 가르치기만 하니까 남의 말을 들을 줄 모른다는 거다. 자기가 동사무소에 문의하러 전화했으면서 오히려 선생입네 하면서 담당자를 가르치려는 태도. 학교의 여러 가지 문제를 두고 말이 많지만 나는 교사들 또한 변화의 대상이라 생각한다. 나의 학창시절을 떠올려 보면 지금 당장 그만 두어야 할 교사들이 한둘이 아니다. 자질이 되지 않는데 사립학교에 들어오는 교사가 많았다.

물론, 모든 교사를 두고 하는 말은 아니다.

오히려 책에서 등장하는 교사들은 중립적인 위치에 있다. 사건에 직접 관여하지 않는다. 3자의 스탠스를 취한다. 작가의 의도인지는 모르겠지만 오히려 나는 이것이 더 답답했다. 수십 명의 아이들 하나하나 인성교육까지 책임져 달라는 건 아니지만 학교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수수방관하고 어떻게든 무마하려는 직무 유기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아이들이 왜 더 이상 학교를 신뢰하지 않고 학교에서 학원·과외 숙제를 하는 지 교육 당국자들은 깊게 깊게 생각해야 한다.

 

“온조는 화가 났다. 알아보지도 않고 무조건 걱정부터 앞세워 미리 차단하는 어른들의 섣부름이 싫었다.” (p.168)

 

학교에서 매일 만나는 교사가 매일 집에서 만나는 부모가 하는 소리와 똑같은 소리를 할 뿐이라면 아이들은 이렇게 말 할 것이다.

 

“우리 담탱이, 완전 꼰대야 꼰대!!”

 

 

 

#

아이들

“평범한 하루의 시작이었습니다. 우리 생활이 알다시피 어제와 다를 바 없는 일상의 연속이지 않습니까.” (p.12)

고등학교를 졸업 하고 대학을 졸업 하고 취업을 하고 결혼을 하는 인생의 과정을 밟아가도 여전한 일상의 연속이라는 것을 아이들은 모를까? 아니, 알고 있다. ‘힘들다, 힘들다.’하는 얘기는 부모로부터 수도 없이 들어봤을 테고, 맨날 나오는 뉴스라는 것이 어렵고, 잔인하고, 폭력적이고, 선정적인 것들뿐이니 아이들도 알 건 다 알고 있다고 봐야 한다.

하지만 그 때는 가장 어렵다.

그걸 인정해 줘야 한다.

“임마~! 나 때는 너희들 보다 더 힘 들었어~~.”

이러는 순간 아웃!! 이다.

아이들은 지금이 가장 힘들다. 숨 막히고 가슴이 답답하다. 누구하나 제 마음 털어놓을 사람 없다.

아이들의 일상에 주목해야 한다. 다들 살아가는 일상이 그 아이에게는 유일한 일상이니까.

 

“어느 순간, 시간은 돈이 될 수 있으니 시간을 팔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p.39)

 

유약하고 사고만 치고 싸가지 없는 아이들이 자기들끼리 쿵짝쿵짝 일을 벌이고 일을 해결한다.

온조가 만든 [시간을 파는 상점]은 ‘당신의 특별한 부탁을 들어드립니다.’라고 홍보한다. 누가 그런 곳에 의뢰를 하겠나 싶지만 ‘시간’이라는 것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고 ‘시간’의 흐름에 자신의 꿈과 삶을 반추하는 ‘10대’ 아이들의 의뢰가 계속 된다.

재밌는 것은 인터넷 상 블로그나 게시판 같은 곳에 가장 먼저 벌떼 같이 달려드는 음란성 광고가 이곳에도 손길을 뻗쳤다는 것이다. 철들지 못한 어른들의 이상야릇한 의뢰가 들어오기도 했다.

상점 주인 온조는 어린 10대 지만 자신이 세운 철칙과 기준에 벗어나는 의뢰에 대해서는 절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PMP사건과 정이현, 가네샤라는 아이디를 쓰는 혜미, 강토와 할아버지 등 사건이 겹치고 중첩되면서 소설은 긴장을 유지한다. 자극적인 소재와 표현이 없음에도 소설 끝까지 유지되는 것은 전적으로 작가의 뛰어난 구성력이다.

 

어린 시절 할리우드 영화를 보면서 가장 궁금했던 것은 미국의 고등학생들은 아무 거리낌 없이 운전을 하고 학교 등하교 때도 차를 사용하는 것이었다. 자유로운 옷차림은 물론 머리 스타일, 화끈한(?) 졸업파티 같은 것들이 신기하고 동시에 부러웠다.

입시가 워낙 힘들고 고등학생은 힘든 때니까……. 아직 어리니까……. 보호해 줘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전적으로 어른들의 선입견이 아닐까 싶다.

물론, 고등학생 자녀를 둔 부모였다면 내가 이런 말을 할 수 있을까 싶기도 하지만 고등학교 때까지 아니, 대학에 가서도 여전히 부모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우리의 환경은 성인아이만 양산하는 꼴이라 생각한다.

 

“가네샤 : 네가 처음이라고 했잖아. 난 이제껏 외톨이였어. 외로운 섬이었다고. 아무에게도 다리를 놓을 줄 모르는 외떨어진 섬 말이야. 처음으로 다리를 놓고 싶은 맘이 생겼어. 낯간지러운 일이긴 하지만, 그것을 넘어설 수 있는 용기가 난 건 처음이야.” (p.136)

 

반에서 공부를 가장 잘 하지만 늘 혼자 있고 아이들과 대화도 안 하고 자기가 왕따를 당하는 것이 아니라 혼자서 반 아이들 전체를 왕따 시키는 혜지와 같은 아이도 온조의 상점을 통해 회복된다. 부모도, 선생도, 교육당국도, 정부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이들은 자기들끼리 있을 때 가장 재미있다. 가장 편안하다. 자기들의 문제는 자기들끼리 풀어야 한다.

 

어른의 입장에서는 못 마땅할 수도 있다. 정해진 틀 안에서 내가 컨트롤 할 수 있어야 자신의 마음이 안정되기 때문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면 한 번 제대로 맡겨보는 건 어떨까?

그들이 만들 시간의 상점, 미래의 상점, 불안의 상점, 관계의 상점, 불평의 상점을 든든히 지지하고 지켜봐주는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말이다.

 

“우리를 그냥 내버려 둬요!!”

“알아서 할게요.”

 

라는 말에 바로 욱!! 하는 것이 치밀어 오른다면 아직 마음의 준비가 덜 된 상태인 것을 명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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