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우스트 러시아 고전산책 5
이반 세르게예비치 뚜르게녜프 지음, 김영란 옮김 / 작가정신 / 2012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나보코프의 러시아 문학 강의」를 통해 이반 투르게네프를 알게 되었다. 러시아의 대(大)문호라 하면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만을 떠올리게 마련이다. 나도 그랬다. 하지만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 이전 러시아 문학의 꽃을 만개하기 위한 토대를 만든 이가 이반 투르게네프 였다고 한다.

이 책 「파우스트」에서도 당시 러시아 문학이 가지던 자연에 대한 찬미와 서정미, 인간에 대한 사랑과 실존에 대한 고민이 그대로 담겨져 있다.

책의 제목이 된 파우스트와 함께 두 편의 중·단편을 엮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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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의 만남]

[세 번의 만남]의 주인공은 이탈리아 소렌토와 러시아의 한적한 영지, 그리고 페테르부르크에서 한 여인과 우연히 세 번을 만나게 되는 이야기다.

 

“홀로 오라, 오는 내내 나를 생각하라.” (p.14)

 

전형적인 러시아의 아름다운 시골마을에서 한적한 나날을 보내고 있던 주인공은 어느 날 언덕 위 정원이 딸린 저택에서 나오는 노래 소리에 귀신에 홀린 것처럼 취하게 된다.

언젠가 들어본 듯 한 노래 소리다. 언젠가 들어본 듯 한 목소리다.

소렌토에서 들었었던 그 목소리와 노래였다. 그때도 그 목소리와 노래에 끌려 창문으로 들여다봤지만 애인과 함께 있는 그녀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 곳 러시아의 시골에서도 그녀의 목소리와 노래가 들려 온 것이다.

그녀 옆에 소렌토에서 함께 있었던 남자가 여전히 있는지 어떤 연유로 이곳까지 오게 되었는지, 그녀에 대한 것이라면 무엇이라도 알고 싶었던 주인공은 그녀가 있는 저택으로 무작정 찾아간다.

몇 년 뒤 주인공은 페테르부르크의 가면무도회에서 그녀를 만난다. 우연인지 운명인지 모를 세 번의 만남이다. 그리고 그녀의 입에서 변심한 애인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 너무도 절망에 빠진 그녀의 상실에 주인공은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마치 한바탕 꿈을 꾼 것처럼.

 

“소렌토와 러시아에서 그녀를 보았던 일, 미하일롭스코예 마을에서 쓸데없이 그녀에 대해 꼬치꼬치 물어보고 다녔던 일, 모스크바에서 쉴리코바 부인 자매를 만났던 일까지 모두 말이다.” (p.58)

 

이탈리아에서부터 그녀를 좋아했고 그녀를 마음에 품어왔고 그녀를 잊지 않았다고 고백하지만 결국 그녀의 사랑에는 닿지 못한다.

누군가를 짝사랑해보지 않은 사람은 아마 없으리라. 그 짝사랑이 주는 애달픔과 마음 졸임과 숨이 막히는 그리움과 소망은 누구나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작품의 주인공도 똑같은 것 같다. 투르게네프가 그림을 그리듯 표현한 아름다운 자연과 풍경보다 더 간지럽고 상큼하다. 몇 년을 기다리고 고대한 그녀와의 만남이 결국에는 자신의 마음을 접는 것으로 끝나는 허망함 또한 그대로 이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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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우스트]

[파우스트]는 투르게네프의 자전적 소설이라 분류해도 무방한 작품이다.

 

1843년 스페인 출신 가수였던 폴리나 가르시아 비아르도와 사랑에 빠졌는데, 그녀와의 관계는 그의 일생에 큰 영향을 미쳤다. 투르게네프는 비아르도의 유럽 순회공연을 쫓아다녔고, 꽤 오랫동안 파리에서 지내면서 그녀는 물론 그녀의 남편과 ‘가족의 친구’로 함께 지냈다.

 

[파우스트]는 9편의 편지글로 구성되어 있다. 결혼한 아름다운 여인에 대한 사랑과 그것의 결말이 결국 비극으로 끝나는 내용이다. 투르게네프 자신이 유부녀 비아르도와 이룰 수 없었던 사랑을 작품에 그대로 투영한 것 같았다.

 

주인공 파벨은 자신의 영지로 돌아와 대학 시절 동창인 프리임코프를 만난다. 그런데 그의 부인이 젊은 시절 첫 사랑이었던 베라인 것이었다. 이미 나이도 스물여덟이 되었고 세 아이의 엄마가 되어 있었지만 여전히 첫 사랑의 모습 그대로 아름다웠다.

베라와 첫사랑에 빠지던 그 때 베를린으로의 유학까지 포기하겠다는 다짐을 하면서까지 베라의 어머니에게 결혼 승낙을 받으려 했다. 하지만 결국 베라의 어머니의 반대로 단념하게 된다.

어머니의 이상한 교육 방식으로 어려서부터 단 한권도 소설과 시를 읽지 못한 베라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괴테의 「파우스트」를 읽어주게 된다.

문학작품을 읽으면 격정적인 심경의 변화가 온다는 것이다. 사랑·정열과 같은 감정은 꼭꼭 숨겨둔 채 살아온 베라는 어린 시절 첫 사랑이던 파벨에게서 「파우스트」를 소개 받는다. 그러면서 빗장이 풀리 듯 파우스트와 같은 욕망이 분출하게 된다.

 

있잖아..

사람은 말이야..

상상력이 있어서 비겁해지는거래~

그러니까...

상상을 하지 말아봐..

존~나 용감해질수있어..

영화 [올드보이 중]

 

상상을 할 수 있게 되자 주체할 수 없는 격정에 빠진 베라는 남편을 둔 채 파벨에게 완전히 빠져버린다. 이제껏 꽁꽁 싸매어 두었던 감정이 화산처럼 폭발해 버린 것이다.

정말이지, 왜 날 이렇게 만들었냐고요!”

 

“당신을 사랑해요. 당신이 날 이렇게 만들었어요.”

“난 당신을 사랑해요, 사랑에 빠져버렸어요!” (p.139)

 

파우스트적 욕망은 비극적 결론으로 도출된다. 투르게네프가 결국 유부녀인 비아르도를 가질 수 없었던 것처럼 남편인 프리임코프를 두고 베라는 파벨과 이어질 수 없었다. 모든 살아있는 것을 녹여버릴 듯 내리쬐는 여름 한 낮 볕을 검은 그늘막이 한 번에 차양(遮陽)하듯이 어머니의 유령은 계속해서 베라를 괴롭힌다. 그 후 베라는 이유 없이 시름시름 앓다가 죽게 된다.

결국 이루지 못하는 사랑이 되었다.

 

 

 

#

「이상한 이야기」

「이상한 이야기」도 앞의 두 작품과 마찬가지로 15년 전 과거로부터 시작된다. 우연히 만난 소피라는 소녀에게 완전히 빠져버린 주인공은 우연한 기회로 과거에 소피를 다시 만나게 되고 ‘바슬리’라는 청년에게 심취한 그녀를 발견하게 된다.

 

“제 눈앞에 있는 이 소녀는 단순히 수줍음 많은 시골 아가씨가 아니라 제가 이해할 수 없는 특징을 지는 독특한 존재였습니다. 전 모든 것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이보다 더 진실한 영혼을 지금껏 만난 적이 없다는 사실만은 확실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p.160)

 

15년 전 어느 도시에서 만나 사랑에 빠졌던 소피의 그 때 모습과는 달라졌지만 자신의 신념과 가치에 따라 바슬리에게 스승의 모습 내지는 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헌신적으로 따르는 소피에게서 오히려 감명을 받는다. 그래서 바슬리를 따른다.

앞의 두 작품이 다소 소극적인 여성상을 담아낸 것에 반해 소피는 다르다. 당시만 해도 종교에 대한 권위와 암묵적 동조가 사회 전체적인 분위기를 지배하고 있었을 무렵이었음을 감안하면 기성 종교에서 말하는 신도 아닌 ‘바슬리’라는 사람을 따르는 다소 어리석고 황당해 보이는 행동을 소피 주체적으로 결정한다. 자신의 말과 행동을 일치하는 것이다. 당시 여성상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이미지다.

 

주인공은 소피를 설득해보려 하지만 소피의 숭고한 가치에 대한 헌신적 삶에 동조하게 된다. 자신의 사랑 따위는 구차해지는 것이다.

하지만 결국 소피는 가족에 의해 집으로 끌려가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죽게 된다.

투르게네프는 이 세 작품을 통해 사랑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인간 존재의 유한함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해체주의인가?

세 작품의 결말 모두 비극적이라는 것은 똑같다. 사랑도 이루어지지 못했고 허무하게 끝이 나거나 죽었다.

 

자칫 허무나 해체로 치달을 수 있는 내용은 투르게네프의 탁월한 심리 묘사와 풍경 묘사로 희석된다. 그래서 독자로 하여금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일이지~.’라는 다소의 안도를 준다. 탁월한 작가의 능력이 아닐까 싶다.

분명한 것은 내가 지금까지 읽었었던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들과는 확실히 차별성이 있다는 것이었다.

 

다음번엔 장편을 읽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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