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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
신동준 지음 / 인간사랑 / 2012년 5월
평점 :
20세기를 대변하던 서구의 가치들이 종언을 고하고 있다. 한국의 대표적 사상사 도올 선생은 “사랑”이라는 단어로 총화되던 서구의 가치·이념·비젼·철학을 이제는 벗어날 때라 피력하면서 신작 「사랑하지 말자」를 표현했다.
20세기 초 헤르만 헤세가 「싯다르타」발표한 이후 서구는 오히려 동양으로 눈을 돌렸다. 두 번의 참혹했던 전쟁을 치렀던 것 또한 이러한 경향에 일조했다.
이책 신동준씨의 「장자」를 읽으며 가장 크게 와 닿았던 것은 아주 오래전부터 서양과 동양은 달랐다는 것이다. 고대 중국과 고대 그리스·로마는 정치에서부터 문화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들이 판이하게 달랐다. 우리가 학창시절 배웠던 것이나 책을 읽거나 매체를 통해 알게 된 지식과 정보 이상으로 완전하게 다르게 탄생했고 다른 방법으로 전해졌으며 다른 차원으로 계승되기도 하고 없어지기도 했다.
수천 년에 걸쳐 완전히 다른 양극을 이뤄왔던 서양과 동양의 조우가 철학적 암흑기이던 중세시대 제국주의 팽창으로 인해 이루어졌다는 것이 얼핏 모순적 상황이라 생각된다. 힘의 균형이라는 것은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고 우연을 핑계로 하는 어떠한 만남도 허락되지 않을 때에야 가능하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힘을 내재하고 있고 그 힘은 어떤 형태로든 발산되어야 하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서양과 동양의 조우는 긍정적 결과뿐만 아니라 부정적 결과로도 반드시 귀결되어야 했다.
흔히 알고 있는 것처럼 중세를 대변하던 제국주의는 자신들은 제외한 모든 것들은 미개한 것으로 치부했다. 사람이든 생물이든 사상이든 언어든 철학이든 가리지 않고.
서양은 그들의 체제가 무너지고 나서야 제국주의의 망령을 벗어던질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미개하다고 치부하던 동양의 사상에 매료됐다.
그렇다면 동양은 어땠을까?
여기서 동양이라 함은 고대 중국과 현재 한국 정도를 함축한 의미다.
서양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태동하고 발전되고 계승되었지만 대부분 통치이념으로 사용되었다. 한국 사람들이 가장 많이 오해하고 잘못 활용된 유교사상 같은 경우에도 도덕 시간과 윤리 시간에 배웠던 것은 고작 ‘삼강오륜’에 불과했다. ‘효’와 ‘충’을 통해 가정과 국가가 필요로 하는 부속품에 충실해야 함을 세뇌되어 왔다. 하지만 동양사상에 대한 책을 읽어보면 가장 핵심은 ‘인간에 대한 문제’이다.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 어떤 인간이 되어야 하는 것인지? 단순히 피통치자가 교육 받아야 하고 체화시켜야 하는 것이 아니라 군주 자신이 어떤 군주가 되어야 하는 것인지가 핵심이다.
이것은 서양의 그것과는 완전히 다른 개념이다.
하지만 피통치자인 백성의 입장에서는 늘 나를 가두고 옭아매고 다스리는 수단으로만 교육받고 강요되다 보니 지난 20세기 초 이후부터는 동양사상을 오히려 부끄러워하고 터부시했다. ‘낡은 것’, ‘구린 것’으로 표현되었다. 그래서 오히려 서양의 그것에 빠져들었다. ‘신은 죽었다.’라는 충격적이고 혁명적인 레토릭에 열광했다. 이것은 단순히 사상사적인 부분에서만 국한되지 않았다. 서양이 이룬 찬란한 문명에 탐닉하고 희구했다. 힘의 균형이 완전히 저쪽으로 기울어졌다.
100여 년 시간이 흘렀다. 이제는 서양이다 동양이다 선을 확연하게 그을 수 없을 만큼 미디어와 기술이 발전하였기 때문에 힘의 균형 차원에서는 논의를 확장할 수 없다. 다만 서구가 대변하던 많은 가치와 이념, 철학과 사조, 기술과 과학 등이 결코 인류의 행복한 미래를 약속하지 않는 다는 것은 확인하고 있다.
글로벌 금융위기와 유럽 일부 국가들의 무기력한 경제 붕괴, 인종주의·극우주의로의 회귀 등은 우리가 이상향으로 생각하는 서양의 속살이다.
근래 국내에서 일어나는 불특정 다수를 향한 범죄와 잔인한 소아성폭력 등은 어떠한 조향장치 하나 없이 깜깜한 산길을 달리는 자동차와 같은 현대 한국인의 상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결과라 생각한다.
무언가 붙잡을 수 있는 것 하나 조차 없는 것이다. 기댈 수 있는 것 하나 조차 없는 것이다. 그것이 종교이든 가족이든 사회보장정책이든지 간에 그 어떤 것도 도움이 되지 못했고 결론적으로 해결책이 되지 못했다.
날로 심각해져가는 현대인들의 [의미상실]은 개인적으로는 가장 심각한 위기의 동인이 되리라 생각한다. 경제위기·정치위기는 이겨낼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사람이 [살아가는 의미를 상실해 버리면] 바람에 떨어지는 낙엽보다 더 처절하고 을씨년스러운 결과가 이어질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동양의 고전들은 많은 사람들이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어려운 내용을 나와 같은 일반인들도 쉽게 이해하고 읽을 수 있을 정도의 번역서가 적었던 것도 있다. 하지만 이전까지 핏줄의 피와 같이 이어지고 체화되어 있었지만 사용하지 않아 퇴화되었던 동양적인 것의 총화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사실 동양 고전을 읽으면 내용은 어렵고 분량은 방대하지만 읽는 순간에는 다 아는 내용 같다. ‘아~ 이 말이 이 말이지~’, ‘음~ 맞아~~ 이렇게 해야지~’ 고개가 끄덕여진다. 1세기 전 서양이 동양의 고전을 보고 열광했던 이유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그들은 완전히 다른 것에 매료된 것이고 내가 이 책 「장자」를 읽으며 공감하고 고개를 끄덕인 건 내가 동양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논리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 문제이다.
이 책은 크게 2부로 나뉘어 있다. 1부 장주론에는 장자사상의 특징과 구성에 대해 쉽게 설명하고 있고 2부에서는 본격적으로 장자의 내편과 외편 잡편 총 33장의 내용을 소개한다. ‘장자’라고 하면 흔히 노장사상으로만 인식되어 왔었다. 하지만 노자의 사상과는 많이 다른 것이 장자의 사상이고 일부 교집합에 포함되는 부분도 있지만 완전히 다르고 상충되기 까지 하는 부분도 많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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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는 비록 노자처럼 무위를 전면에 내세우기는 했으나 아예 무와 유의 구분조차 거부한 점에서 노자보다는 오히려 색과 공의 경계를 허문 불교에 가깝다.” (p.36, 제1편 사상론)
“장자가 볼 때 천당과 극락 등의 사후세계는 속세의 욕망을 재현해 놓은 것에 지나지 않았다. 삶과 죽음을 ‘무’에서 ‘무’로 돌아가는 자연의 순환과정으로 파악한 결과다.” (p.61, 자연주의)
무위자연만 머릿속에 맴돌고 있었는데 장자사상은 많이 다르고 매력적이었다. 한국과 중국의 대승불교가 장자의 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점도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었다. 하지만 기복적 형태로 발전된 불교의 극락·사바의 개념과는 차별성을 두고 있다.
“10여 만 자에 달하는 저서는 거의 대부분 우화로 채워져 있다.” (p.15, 제1편 생장론)
동양고전의 특징을 하나만 얘기해 보라고 하면 나는 ‘이야기꾼’이라고 대답 하겠다.
아리스토텔레스와 소크라테스, 헤겔과 칸트의 책을 읽을 때마다 무너졌던 나의 자아상과 한탄과 한숨을 기억한다. 어려워도 너~무 어려우니 진도가 나갈 수 없었다. 하지만 동양의 고전은 대부분 우화로 채워져 있다. 장자 또한 마찬가지다.
굳이 어렵고 현학적으로 표현할 수도 있었겠지만 굉장히 쉽게 표현했다. 어차피 장자가 일반 백성이나 천민에게 읽혀졌을 리는 만무하고 문자를 이해하고 일정 수준의 지적수준에 도달한 사람들만이 읽을 수 있었을 텐데 왜 굳이 우화의 형식을 사용한 것일까? 고담준론을 해도 괜찮았을 텐데 말이다.
궁금했다.
“세인들의 어리석은 모습을 목격할 때마다 특유의 비꼬는 말투로 사정없이 조롱하고 비웃었다. 조롱 자체가 목적은 아니었다. 여기에는 도저히 구제할 수 없는 인간세상을 안타깝게 생각하는 연민이 짙게 깔려 있다.” (p.30, 제1편 생장론)
장자를 포함한 동양의 사상가들은 책을 읽는 대상이 중요하지 않았던 것 같다. 전달하는 방식과 방법 또한 중요하지 않았던 것 같다. 아침에 눈을 떠 보는 산과 안개, 들리는 새소리와 물소리에서부터 밤에 잠들기 전 들리는 풀벌레소리, 달과 별 등 일상과 분리되지 않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 같다. 군자, 군주 얘기를 한다고 해서 꼭 어려운 말을 하고 어려운 단어를 사용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임금~ 당신 이렇게 저렇게 잘못했으니 좀 똑바로 하시오.’ 직접적으로 말하면 잡혀가서 죽임 당하는 것은 일도 아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 직접적으로 말하는 것보다 ‘개가 어떻고 두꺼비가 어떻고 물고기가 어떻고’ 아닌 척 하며 빙 둘러 조롱하고 풍자하면 더 재미있고 고소하기도 하니까.
1. 장자가 보는 인간
“무릇 사람의 마음은 산천보다 험하고, 하늘을 알기보다 어렵다. 하늘은 오히려 춘하추동과 아침저녁의 주기라도 있지만 사람은 표정을 두텁게 꾸미고 속셈을 깊이 감춘다.” (p.1012, 잡편 제10장 열어구)
“명예의 주인도, 모략의 창고도, 일의 책임자도, 지혜의 주인도 되지 말라. 그보다는 무궁한 도를 완전치 체득해 흔적이 없는 무위자연의 세계에서 노닐도록 하라. 하늘에서 받은 육신과 정신을 극진히 하면서 삶을 인위적으로 연장하는 등 이익을 탐하지 않으니 오직 마음을 비울 따름이다.” (p.396, 내편 제7장 응제왕)
인간에 대한 장자의 시선은 곱지 않다.
‘제발 그만 좀 해라.’
로 표현하면 딱 맞을 것 같다. 이치와 자연에 어긋나려 하지 말고 마음을 비우라고 말한다. 마음을 비우고 싶지 않은 이가 누가 있겠냐마는 마음을 비우지 못해 좋지 않은 결과를 빚어 낸 일들이 허다한 역사적 교훈을 생각하면 가슴에 담을 가르침이다.
2. 장자가 보는 군주
“군주가 앞서면 신하가 뒤따르고, 아비가 앞서면 자식이 뒤따르고, 형이 앞서면 아우가 뒤따르고, 어른이 앞서면 젊은이가 뒤따르고,” (p.533, 외편 제6장 천도)
“하소연할 곳이 없는 백성들을 함부로 대하지 않고, 궁색한 백성을 버리지 않고, 죽은 사람을 애도하고, 부모 없는 어린아이들을 사랑하고, 과부를 애처롭게 여긴다. 이것이 내가 천하를 다스리면서 마음을 쓰는 일이다.” (p.540, 외편 제6장 천도)
지금 시대에는 참으로 맞는 말이고 당연한 말이지만 고대 중국 춘추전국시대에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목숨을 내어놓는 일이었을 것이다. 자고 일어나면 군주가 바뀌고 온통 피비린내로 진동하던 때에 군주에게 모범을 보이고 과부와 궁핍한 백성을 돌보라고 얘기하는 것은 대단한 용기를 필요로 했을 것이다. 각국에서 장자를 영입하려 애쓴 것을 보면 장자의 가르침과 지적이 꽤나 먹혀들었던 것 같다.
3, 장자의 도(道)
“장자가 임종할 즈음 제자들이 후하게 장례를 치르고자 했다. 장자가 말했다.
‘나는 천지를 관곽으로 사고, 일월을 한 쌍의 구슬로 삼고, 하늘의 별들로 둥근 옥이나 모난 옥으로 삼고, 만물을 저승길의 선물로 삼을 것이다. 이 정도면 내 장례에 필요한 도구가 어찌 다 갖춰진 게 아니겠는가? 무엇을 더하려 하는 것인가!’ (p.1018, 잡편 제10장 열어구)
장자의 사상은 어디에, 무언가에 얽매이는 것을 경멸한다. 잡편 열어구에 등장하는 장자 자신의 이야기는 집약적으로 그의 사상을 압축하고 있다.
[있는 그대로]둘 것을 내내 강조한다. 자연도, 인간도, 도(道)도 [있는 그대로]둬야 한다고 했다. 애써서 뭘 하려고 하고 만들려고 하며 가르치려 하는 것 모두를 경계한다. 힘의 균형의 대척점에서 세상을 인식하지 않는다.
“제11편 「재유」는 사물을 인위적인 작위를 가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두어 본성을 보존케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을 담고 있다. 라살이 말한 ‘자유방임주의’ 차원을 넘어 크로포트킨 등이 역설한 ‘무정부주의’를 방불케 하는 대목이다. 후쿠나가는 ‘정치 없는 정치’로 표현했다. 이는 무치(無治)의 또 다른 표현에 해당한다.” (p.163)
이러한 장자의 사상은 불필요한 오해를 받기도 했지만 제도와 구조에 갇힌 채 수십 세기를 살아온 동양과 서양의 그것에 지치고 이골이 난 사람들에게는 청량제와 같은 북돋움이 될 것도 같다.
장자는 그냥 ‘다 벗어던져라.’라고만 말하지 않고 방법 또한 제시한다.
“자연의 ‘도’에 몸을 의탁하고, 이를 구체화하기 위해서는 천지변환의 흐름에 자연스럽게 순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투쟁’ 및 ‘발전’ 개념 대신 ‘조화’와 ‘순환’ 개념.” (p.150, 장자사상의 전개)
“외발 짐승인 기(蘷)는 발이 많은 노래기를 부러워하고, 노래기는 발이 없는 뱀을 부러워하고, 뱀은 모습이 없는 바람을 부러워하고, 바람은 움직이지 않고도 작용하는 눈을 부러워하고, 눈은 사물을 보지 않고도 모든 것을 다 아는 마음을 부러워했다.” (p.636, 외편 제10장 추수)
천지변환의 흐름. 다시 말해 자연적인 것으로의 회귀다. 그것으로의 복귀다. 자연스럽게 순응하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고 구체적 제시가 없는 개념이기 때문에 황당하기도 하지만 외발짐승이 노래기를 부러워하고 노래기가 뱀을, 뱀이 바람을, 바람이 눈을, 눈이 마음을 부러워하는 것처럼 흔들리는 마음이 아니라 뱀은 뱀대로 노래기는 노래기대로 자연으로부터 부여된 천기(天機)를 그저 움직이며 살 뿐이라는 것이다.
욕심내지 않고 비교하지 않으면 조바심 낼 이유가 없을 것이다. 다른 집의 아이들이 가기 때문에 내 아이도 학원에 보낼 수밖에 없다는 어불성설은 장자형님이 들으시면 싸대기를 올릴 말이다.
얼마나 바쁘고 각박한 현재인가. 일상의 모든 순간과 찰나에 자유로울 수없다. 아주 어려서부터 비교되고 경쟁의 부추김을 받아왔다. 니가 아니면 내가 되어야 하고 내가 아니더라도 너는 아니어야 하는 분위기 속에 천착해 살아왔다.
도(道)는 배부른 소리에 지나지 않았다.
먹고 사는 일에 모든 역량을 투입해도 될까 말까한 세상에 무슨 도?? 개 풀 뜯어먹는 소리다.
하지만 리뷰의 앞부분에서도 말했지만 개 풀 뜯어 먹는 소리에 워낙 관심이 없고 등한하다 보니 이제는 개 풀 뜯어 먹는 소리가 무엇인지 조차 가늠할 길이 없다. 떠다니는 봉지처럼 표류하고 있다. 가정을 가지고 아이를 낳고 직장생활을 하고 있지만 여전히 표류하는 것이다. 학교에 가서 공부를 하고 학원·과외에 둘러싸여 있지만 표류하는 것이다.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음악을 하고 예술을 하지만 표류하는 것이다.
가치는 투영하는 대상에 따라 정도가 달라진다. 특히 당장 돈이 되거나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되거나 취직이 되는 추상적 가치는 아주 낮은 수준의 정도에 머물러 있다. 대학에서 순수학문을 공부하는 전공들이 없어지거나 축소되는 것은 이것의 한 결과다.
대중을 자석처럼 끌어당길 극이 필요한데 동양사상, 특히 장자의 사상은 그것을 가능케 할 매력과 힘이 있다고 생각한다. 추상적이기는 하지만 현학적이지 않다. 레토릭이 아니라 다층의 세대를 아우를 수 있는 우화로 채워져 있다.
장자사상을 담은 동화책이나 청소년을 대상으로 조금 쉽게 번역한 책이 나온다면 장자를 읽는 어린아이와 청소년들이 지금의 아이들과 청소년들보다는 마음을 잘 지킬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더불어 나이가 많은 분들에게도 충분한 매력이 있을 것이다. 젊은 시절 치열한 삶과의 투쟁을 겪어 온 그들에게 ‘조화와 순환’을 설명하는 장자의 사상은 그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대변할 수 있을 만하리라 여겨진다.
이러한 것들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동양사상을 공부하는 이들이 많아져야 하고 그들이 조금씩 다르지만 많은 번역서를 낸다면 될 텐데 가능할지 모르겠다.
제 나라 역사조차 제대로 가르치지 않는 곳에서 장자가 가당키나 할지 말이다.
“도는 땅강아지나 개미에게 있소.”
“어찌 더욱 낮아지는 것이오?”
장자가 말했다.
“도는 기왓장이나 벽돌에 있소.”
“어찌 더욱 심해지는 것이오?”
장자가 말했다.
“도는 똥과 오줌 속에 있소.”
장자가 말했다.
“그대는 반드시 어떤 것이라고 고집하는 마음이 없어야 하오. 그래야만 도가 어떤 물건에서든 떠나지 않고 두루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게 되오. 지극한 도는 바로 이와 같소.” (p.760, 외편 제15장 지북유)
장자가 말하는 도(道)에 이르는 길이 쉽지 만은 않으리라 생각된다. 하지만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장자를 읽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도에 이르러 군자가 되지 않더라도 장자를 통해 정신수양을 할 수 있다면 최소한 지금보다는 더 낫고 더 안정된 사회가 될 것이라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저자인 신동준씨의 노고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일본과 중국에 비해 장자 연구가 너무나도 부족한 국내 현실에서 일본과 중국의 장자학 권위자들의 많은 책들을 쉽게 인용하고 풀어낸 것은 단기간에 할 수 있는 작업이 아니었을 것이다. 한자를 한글로 풀어 해석해 한국인의 의식구조에 적합한 형태의 단어와 문장을 담아내는 작업도 굉장히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참고 서적만 봐도 알 수 있다. 분량은 말할 것도 없고.
이런 책들이 많이 출간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