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격받는 자유무역 - 명쾌하게 풀어 쓴 자유무역에 대한 오해와 진실
더글러스 어윈 지음, 최낙일.최용재 옮김 / 시그마북스 / 2012년 9월
평점 :
절판


무역(貿易) - 나라와 나라 사이에 서로 물품을 매매하는 일.

 

무역은 인류의 오랜 문화였다. 처음에는 물품과 물품을 교환하던 것이 발전하여 사고파는 것으로 대체되었을 뿐 동일한 맥락으로 이해하면 된다. 양쪽의 물품에 대해 1대1로 맞교환을 하던 때에는 큰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나에게는 풍족한 물품이지만 상대에게는 부족한 물품이고 상대에게는 풍족한 물품이지만 나에게는 부족한 물품이라면 양자가 만족하는 무역이 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단순한 교환경제를 넘어서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나는 최대한 싼 가격에 저쪽의 물품을 사고 싶고 저쪽에게는 최대한 비싼 가격에 나의 물품을 팔려고 하면 갈등이 생기기 마련이다. 너무 기계적으로 단순 정리를 한 것 같기는 하지만 요약해보자면 그럴 것이다.

더군다나 한쪽의 경제력이 한쪽보다 월등할 경우에는 갈등이라기보다 차별이 생긴다. 말이 무역이지 뺏기는 것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역사를 통해 경제에 대한 수많은 담론과 이론과 실례가 있어 왔고 한때 전 세계 경제를 풍미했던 이론이 하루아침에 무너지고 또 수많은 이론들이 쏟아지는 것을 봐왔다. 아직까지 정답은 없는 문제라고 보는 것도 무리한 해석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현대경제에서 무역은 필수불가결한 요소이고 고대사회로 돌아가 ‘자급자족만으로 살아가겠다.’ 라고 하지 않는 이상 국가 간, 지역 간, 도시 간 무역은 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은 지난 수십 년을 무역(수출)에 올인 해왔다. 가격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던 시기에는 활황을 유지할 수 있었지만 세계 경제라는 것 또한 진화하고 다중화하며 블록화 되면서 단지 낮은 생산단가로만 경쟁할 수 없게 되었다.

 

재벌 위주 경제로 이제껏 버텨왔지만 앞으로 어떤 경제 정책이 세워질지는 미지수다.

또한 외환위기를 겪고 신자유주의의 종말의 끄트머리에 있는 지금이 위기의 시기임은 분명하다.

이 책 「공격받는 자유무역」은 자유무역에 대한 변호가 주된 내용이다. 자유무역이라는 것은 국가 간 개입을 최소화한 상태에서 경제주체 간 자유로운 수출입을 하도록 하는 것이 기본이다. 하지만 앞서도 말한바 경제력의 우위가 점해지고 국가들 간 경제체제가 블록화 되면서 자유무역이라 말하지만 결코 자유롭지 않은 무역이 이루어졌다.

 

“세계무역의 성장은 성장 전망을 밝게 하여 빈곤퇴치에 기여할 수 있고, 경쟁 촉진을 통해 기업의 권한을 제한할 수 있고, 새로운 청정기술의 보급을 통해 환경을 개선할 수 있으며, 칠레, 멕시코, 한국, 대만 등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민주주의의 확산을 촉발시킬 수도 있다.” (p.358)

 

무역의 성장이 후진국과 개발도상국의 경제규모와 실질적 경제성장을 가져왔다는 것에 동의한다. 하지만 그 성장이 제대로 된 균형 있는 분배가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별 언급이 없다. 저자가 도입부에서 여러 번 말한 것은 자유무역 자체가 모든 문제의 해결책이 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어느 한 국가가 일방적으로 유리할 수도 불리할 수도 없는. 그래서도 안 되는 것이 자유무역이라 피력한다.

그러나 무역의 발전과 진화, 경제규모의 확장과 성장에 더불어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이 제대로 된 국가 내 성장일 텐데 그것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것이 아쉽다.

물론, 저자는 그것까지 언급하겠다고 말하지는 않았다. 다만 신자유주의의 폐해로 인해 자유무역 체제까지 싸잡아 비판받고 비난받는 것에 대해 해명하고자 했다면 그 반대급부도 조금은 생각해야 하지 않았을까 싶다.

 

“중국과 인도가 각각 1978년과 1991년에 대외 개방을 통해 경제개혁을 실시한 이후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중산층으로 진입했다.” (p.247)

“인도와 중국의 사례가 명백히 보여주는 것처럼, 높은 경제성장과 빈곤 감소를 저해하는 것은 다른 국가가 아니라 자국의 잘못된 정책 때문이다.” (p.287)

 

그래서 이런 언급들은 다소 위험한 일반화라 생각한다. 중국과 인도가 여전히 높은 경제성장을 하고 있고 실제로 폭발적인 경제규모의 확장과 발전을 가져왔다. 하지만 단순히 경제개혁과 개방, 즉 자유무역을 통해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중산층이 되었고 빈곤 감소가 되었다고 일반화시키는 것은 무지의 소치 내지는 성의 없는 분석의 자세라 생각한다. 인도와 중국의 부정부패와 부정축재야 모르는 사람이 없을 만큼 다 아는 사실 아닌가? 좀 더 세련되고 설득력 있는 사례를 소개했더라면 이해하기 쉬웠을 텐데 말이다. 하긴 그런 사례가 있기는 있는 걸까?

나도 자유무역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여러 번 말한 것처럼 필수불가결한 요소라 생각한다. 하지만 명명백백하게 알고 있듯이 세계 경제는 일부 국가와 일부 경제블럭에 의해 좌지우지 되는 것이 사실이다. 몇 해 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전 세계 경제를 빙하기로 돌려놓은 기억이 있지 않나? 분명한 힘의 우위가 있다는 것이다. 힘의 우위에 있지 못한 국가나 경제블럭은 결코 자유롭지 못한 무역을 할 수밖에 없다.

대표적인 것이 한미FTA 아닌가? 어떻게 체결되었는지 어떤 내용인지조차 제대로 모르는 국민들이 얼마나 많은가? 국회에 앉아 계신 분들조차 제대로 된 내용숙지가 없는 채로 으쌰으쌰 해서 날치기로 통과시켜 버리고 나서 부랴부랴 독소조항이니 뭐니 하며 야단을 떨었지 않나!!!

자유무역에서 힘의 균형은 결코 맞추어질 수 없다.

 

“수출은 생산성이 높은 고임금 산업의 고용자 수를 증가시키는 반면, 수입은 상대적으로 생산성이 낮은 저임금 산업의 고용자 수를 감소시키기 때문에 무역이 미국에 미치는 전반적 효과는 평균 임금을 상승시키는 것이다.” (p.161)

 

저자가 미국인이어서 그런지 몰라도 미국에 대한 얘기가 많이 소개되었다. 미국은 미국 내 불평·불만을 해소하는 데 전력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어차피 다른 국가경제나 경제블럭에는 우위를 점하고 있으니까. 지난번 이명박 대통령이 오바마 대통령과 함께 미국의 자동차 공장 노동자들 앞에서 연설을 했었다. 한미FTA체결되어 한국산 저렴한 자동차가 미국에 쏟아져도 당신들의 일자리가 줄어들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이 요지다. 미국도 남아도는 농산물과 축산물, 항공·기계·군수산업 제품을 수출하기 위해서는 수입을 할 수밖에 없다. 미국 국내의 생산단가보다 낮은 제품(신발·의류·자동차 등)을 수입하는 것이다.

 

“즉, 무역은 미국이 수출하는 고임금 산업(항공기, 기계 등)에서 일자리를 창출하며, 미국이 수입하는 저임금 산업(의류, 신발)의 일자리를 감소시킨다.” (p.163)

 

자유무역이라서 미국이 고임금 산업, 다시 말하면 생산단가가 높고 제품가격이 높은 산업을 수출하고 저임금 산업의 제품을 수입한다. 당연한 것이다. 그래서 자유무역이다.

 

“철강 가격의 상승은 철강 산업의 고용을 증가시키지만, 철강사용 산업의 고용을 감소시킨다.” (p.119)

“자유무역을 반대하는 논거 중 일반 대중과 정치인들 사이에 가장 많이 회자되는 것으로 수입은 일자리를 파괴한다는 논리가 있다.” (p.141)

“무역으로 인해 많은 영향을 받는 노동 집약적 산업에서도 일자리 상실의 원인은 수입이 아니라 자본에 의한 노동의 대체나 신기술의 도입과 같은 기술 변화 때문이다.” (p.153)

 

그런데 저자도 미국 내에서 일어나는 여러 일들에 대한 명확한 해결책을 내놓는 것이 버거운지 비슷한 말을 계속 반복한다. 자유무역 체제에서 미국의 수출로 인해 얻는 성장과 수익의 반대급부에 대해서는 뾰족한 해답이 없는 듯하다. 결국 미국도 제대로 된 분배가 이루어지지 못하다는 반증일 수도 있다.

 

“모든 국가에서 대다수의 사람들은 무역이 ‘대단히 좋거나’, ‘다소 좋은’ 것으로 믿고 있다. 세계화가 가장 덜 진행된 지역의 사람들의 무역을 더 많이 원하는 것으로 보인다.” (p.32)

“자유무역만이 한 국가가 번영을 달성할 수 있는 유일하거나 또는 가장 중요한 방법은 아니다.” (p.89)

 

자유무역만이 유일하거나 가장 중요한 방법이 아니라면 또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별다른 대안이 없으니 이대로 가는 것은 차선이 아니라 차악이 될 수도 있다. 물론, 오랜 기간 이어 온 자유무역을 단번에 폐기할 수는 없다. 그렇게 할 수도 없고. 국제적 금융기구와 체제가 국가 간 무역의 불균형을 해소하고 불평등하고 잘못된 관행으로 무역이 이루어지는 것에 대해서 규제하고 처벌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렇게 실제적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기구나 체제가 없다는 것이 더 큰 문제다. 지금처럼 제일 힘이 강해서 가장 우위에 있는 국가와 경제블럭만을 위한 것이라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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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된다고 하지 말고 아니라고 하지 말고 - 임윤택 에세이
임윤택 지음 / 해냄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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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생 아이가 생일 선물로 이 책을 선물해 줬다. 고등학교 1학년인 그 아이는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했지만 중3때부터 키워온 댄서의 꿈을 위해 열심히 준비하고 연습하고 있다. 부모님의 반대와 학교 선생님의 반대, 주변인들의 비웃음과 차가운 시선에 힘들어 할 때도 있지만 늘 밝게 웃으며 온 몸에 멍이 들도록 춤을 추는 아이다.

그런 아이가 선물해 준책이라 남달랐다.

지난 슈퍼스타K 시즌3은 단 한 편도 보지 못했다. 중간 중간 울랄라세션, 버스커버스커라는 이름이 나오고 그룹 미션 뭐 이런 말만 들었다. 결국 울랄라세션이 우승을 하고 끝이 났지만 대중들에게 더 유명해 진 건 버스커버스커였다. 싱어송라이터라는 아티스트적 요소가 대중들에게 어필하고 내게도 그랬던 것 같다. 기존의 가수와는 다른 노랫말과 귀엽게 생긴 외모 등이 한몫했다. 정작 우승은 울랄라세션이 했지만 나는 그들의 노래를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우승 이후 방송에도 나오지 않고 음반도 나오지 않아 관심이 없었다.

잠깐씩 본 기억으로는 오색찬란한 무대의상을 입은 키 작은 멤버들이 노래하면서 춤추는 그룹. 딱 그 정도였다. 그리고 리더인 임윤택씨가 암투병 중이라는 것. 그 정도.

 

“무슨 일이 생겨 내가 없더라도 아이들이 살아갈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주고 싶었다. 그리고 반드시 그렇게 될 수 있도록 해야만 했다.” (p.262)

 

슈퍼스타K 시즌3가 가장 인기가 있었던 시즌이 된 데에는 그룹의 참가를 허용해 스펙트럼을 넓힌 탓도 있지만 탄탄한 실력과 개성을 가진 참가자들이 많았고 슈스케에서 가장 중요시 하는 스토리가 많았던 시즌이었다고 한다.

슈스케 참가 직전 임윤택씨는 암 발병을 알았고 그 상태가 심각한 수준이라는 것을 알고 멤버들에게 참가를 독려했다.

이미 많은 장기로 암이 전이되어 있는 상태였고 어떻게 될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서 오랜 시간 동안 팀을 꾸려 온 리더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이름을 알리고 혹시 자신이 부재하더라도 알아서 살아갈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 주고 싶은 의도였다고 했다.

 

“춤과 노래는 물론 연기, 연주, 작사, 작곡 등 종합 엔터네이너로서 필요한 분야를 총망라한 ‘엔터테인먼트 제국 건설’이 지금 나의 최종 목표다.” (p.7)

 

책을 읽으면서 선입견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또 한 번 알게 되었다. 암 투병중인데 춤도 잘 추는 구만. 키들이 왜 저렇게 작아. 노래를 하던지, 춤을 추던지 하나만 하지. 작사, 작곡 능력이 없는데 무슨 아티스트야 아티스트는. 뭐 이런저런 생각들. 일부 네티즌은 임윤택 암 투병 조작설 이라는 황당한 음모설 까지 제기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하지만 임윤택의 꿈은 이미 춤에 빠져들기 시작했던 중학교 시절부터 단 하나였다.

‘엔터테인먼트 제국 건설’

춤을 좋아하거나, 노래를 좋아하거나, 연기를 좋아하는 아이들이 마음껏 연습하고 그 꿈을 위해 도전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주는 것이 꿈이라고 했다.

자신의 꿈을 발견하면서 학업에는 다소 미진하기도 했고 학창시절 잠시 방황하기도 했지만 그의 꿈은 변함이 없었다. 팀 내 분란이 생기고 해체되고 재결성되는 것을 반복하면서도 자신의 꿈을 잃지 않았다.

이것이 힘이다.

 

“우리 팀이 예선전에서 보여준 것은 남들과 다른 독창성이었다.” (p.66)

“붕어빵 기계에서 찍혀 나오는 똑같은 붕어 모양처럼 내 인생을 남들과 똑같이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p.155)

 

슈퍼스타K에서 울랄라세션이 보여 준 무대 중 가장 압권이었던 것은 신중현의 ‘미인’을 편곡 해 부른 무대였다고 한다. 그런데 그 무대가 이미 슈스케 출연 전부터 수많은 무대에서 이미 한 공연이었다고 했다. 통기타로 대변되던 미사리의 공연 문화를 바꾼 것도 그들이었고 그곳에서 한 공연의 대부분이 슈스케 공연에서 재연되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어느 날 갑자기 슈스케에 나와서 최루성 스토리를 탑재해 우승한 팀이 아니라 이미 오래전부터 자신들만의 무대와 공연을 하고 있었던 사람들이었고 그들만의 노하우로 트렌드를 만들어 온 팀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티스트의 조건 중 작사·작곡 능력이 필요하기는 하지만 절대적인 조건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울랄라세션이 방송을 통해 보여 준 공연은 독창성이었다. 그리고 편곡능력. 수많은 가수와 댄서가 있지만 편곡을 자유자재로 하면서 춤과 노래까지 잘하는 팀은 드물다. 공연 또한 다른 가수들과는 달랐다.

 

“<슈퍼스타K>에서 매주 정해지는 미션은 달랐지만 그때마다 우리가 새로운 스타일의 무대를 보여줄 수 있었던 것도 형이 오랫동안 준비해 온 결과였다.” (p.301)

 

미사리에서 공연문화의 새로운 트렌드를 만든 그들을 모방해 수많은 팀이 생겼다고 한다. 기존의 통기타, 포크송은 거의 사라지고 노래와 춤을 개성 있고 구성한 팀이 우후죽순 생겼다. 정상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달라야 하고 독창성이 있어야 했다.

미사리에서는 독보적인 존재였지만 다른 곳에서는 인지도가 없었기 때문에 당연히 열악한 조건을 벗어날 수 없었다. 하지만 자신들이 좋아하고 어릴 때부터 꿈꿔왔던 춤과 노래를 마음껏 하면서 돈도 벌수 있다는 사실에 밤을 새우며 콘티를 짜고 공연을 기획하고 춤추고 노래했다고 한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돈도 벌 수 있다면 정말 행복한 사람이다. 단지 살기 위해서,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서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울랄라세션은 리더십 있고 친화력 좋고 열정으로 가득 찬 임윤택을 중심으로 이미 준비되어 왔던 것이다.

 

사실 가장 중요한 것은 오랜 시간 팀을 이끌어 온 임윤택의 사람에 대한 진정성이라고 생각했다. 팀이 잘 될 때, 팀이 잘 안 될 때. 임윤택은 늘 자신의 팀원들에게 진정성 있게 다가갔다고 한다. 임윤택만을 스카웃하기 위한 기획사의 제의도 몇 차례 있었지만 동생들을 두고 떠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반드시 자신들은 더 큰 무대를 밟을 수 있고 더 큰 성공을 거둘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줬다고 한다.

쉽지 않은 일이다. 한 주에도 수많은 보이·걸그룹이 탄생하고 소멸하는 현실에서 외모·실력이 특출나지 않은 그들이 끝까지 꿈을 버리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팀 구성원들 간 관계의 진정성이다.

 

KBS 불후의 명곡에서 공연하는 울랄라세션을 보면서 가장 강하게 들었던 생각은 ‘이야~ 저 사람들 참 즐기면서 한다.’ 라는 것이었다. 분명 라이브로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는 일이 힘든 일일 텐데 멤버들 얼굴에 찡그림을 찾을 수 없었다.

책을 읽고 나니 일견 이해가 된다. 얼마나 오랫동안 기다리고 고대하며 준비한 무대인가. 그들은 분명 즐길 수밖에 없었다.

임윤택씨는 아직도 투병중이라고 한다. 암이라는 놈이 워낙 골치 아픈 놈이고 꽤 진행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이제껏 그래왔던 것처럼 암 따위 떨쳐버리고 더 큰 꿈과 무대, 공연을 위해서 달려갔으면 좋겠다.

이 책을 선물해 준 아이도 꿈을 잃지 않기를 기도한다.

주변과 비교하지 말고 상처 되는 말을 흘려버리며 그것을 향해 달려가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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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
신동준 지음 / 인간사랑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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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를 대변하던 서구의 가치들이 종언을 고하고 있다. 한국의 대표적 사상사 도올 선생은 “사랑”이라는 단어로 총화되던 서구의 가치·이념·비젼·철학을 이제는 벗어날 때라 피력하면서 신작 「사랑하지 말자」를 표현했다.

20세기 초 헤르만 헤세가 「싯다르타」발표한 이후 서구는 오히려 동양으로 눈을 돌렸다. 두 번의 참혹했던 전쟁을 치렀던 것 또한 이러한 경향에 일조했다.

 

 

이책 신동준씨의 「장자」를 읽으며 가장 크게 와 닿았던 것은 아주 오래전부터 서양과 동양은 달랐다는 것이다. 고대 중국과 고대 그리스·로마는 정치에서부터 문화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들이 판이하게 달랐다. 우리가 학창시절 배웠던 것이나 책을 읽거나 매체를 통해 알게 된 지식과 정보 이상으로 완전하게 다르게 탄생했고 다른 방법으로 전해졌으며 다른 차원으로 계승되기도 하고 없어지기도 했다.

 

수천 년에 걸쳐 완전히 다른 양극을 이뤄왔던 서양과 동양의 조우가 철학적 암흑기이던 중세시대 제국주의 팽창으로 인해 이루어졌다는 것이 얼핏 모순적 상황이라 생각된다. 힘의 균형이라는 것은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고 우연을 핑계로 하는 어떠한 만남도 허락되지 않을 때에야 가능하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힘을 내재하고 있고 그 힘은 어떤 형태로든 발산되어야 하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서양과 동양의 조우는 긍정적 결과뿐만 아니라 부정적 결과로도 반드시 귀결되어야 했다.

흔히 알고 있는 것처럼 중세를 대변하던 제국주의는 자신들은 제외한 모든 것들은 미개한 것으로 치부했다. 사람이든 생물이든 사상이든 언어든 철학이든 가리지 않고.

서양은 그들의 체제가 무너지고 나서야 제국주의의 망령을 벗어던질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미개하다고 치부하던 동양의 사상에 매료됐다.

 

 

그렇다면 동양은 어땠을까?

 

여기서 동양이라 함은 고대 중국과 현재 한국 정도를 함축한 의미다.

서양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태동하고 발전되고 계승되었지만 대부분 통치이념으로 사용되었다. 한국 사람들이 가장 많이 오해하고 잘못 활용된 유교사상 같은 경우에도 도덕 시간과 윤리 시간에 배웠던 것은 고작 ‘삼강오륜’에 불과했다. ‘효’와 ‘충’을 통해 가정과 국가가 필요로 하는 부속품에 충실해야 함을 세뇌되어 왔다. 하지만 동양사상에 대한 책을 읽어보면 가장 핵심은 ‘인간에 대한 문제’이다.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 어떤 인간이 되어야 하는 것인지? 단순히 피통치자가 교육 받아야 하고 체화시켜야 하는 것이 아니라 군주 자신이 어떤 군주가 되어야 하는 것인지가 핵심이다.

 

이것은 서양의 그것과는 완전히 다른 개념이다.

하지만 피통치자인 백성의 입장에서는 늘 나를 가두고 옭아매고 다스리는 수단으로만 교육받고 강요되다 보니 지난 20세기 초 이후부터는 동양사상을 오히려 부끄러워하고 터부시했다. ‘낡은 것’, ‘구린 것’으로 표현되었다. 그래서 오히려 서양의 그것에 빠져들었다. ‘신은 죽었다.’라는 충격적이고 혁명적인 레토릭에 열광했다. 이것은 단순히 사상사적인 부분에서만 국한되지 않았다. 서양이 이룬 찬란한 문명에 탐닉하고 희구했다. 힘의 균형이 완전히 저쪽으로 기울어졌다.

100여 년 시간이 흘렀다. 이제는 서양이다 동양이다 선을 확연하게 그을 수 없을 만큼 미디어와 기술이 발전하였기 때문에 힘의 균형 차원에서는 논의를 확장할 수 없다. 다만 서구가 대변하던 많은 가치와 이념, 철학과 사조, 기술과 과학 등이 결코 인류의 행복한 미래를 약속하지 않는 다는 것은 확인하고 있다.

 

글로벌 금융위기와 유럽 일부 국가들의 무기력한 경제 붕괴, 인종주의·극우주의로의 회귀 등은 우리가 이상향으로 생각하는 서양의 속살이다.

근래 국내에서 일어나는 불특정 다수를 향한 범죄와 잔인한 소아성폭력 등은 어떠한 조향장치 하나 없이 깜깜한 산길을 달리는 자동차와 같은 현대 한국인의 상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결과라 생각한다.

무언가 붙잡을 수 있는 것 하나 조차 없는 것이다. 기댈 수 있는 것 하나 조차 없는 것이다. 그것이 종교이든 가족이든 사회보장정책이든지 간에 그 어떤 것도 도움이 되지 못했고 결론적으로 해결책이 되지 못했다.

 

날로 심각해져가는 현대인들의 [의미상실]은 개인적으로는 가장 심각한 위기의 동인이 되리라 생각한다. 경제위기·정치위기는 이겨낼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사람이 [살아가는 의미를 상실해 버리면] 바람에 떨어지는 낙엽보다 더 처절하고 을씨년스러운 결과가 이어질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동양의 고전들은 많은 사람들이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어려운 내용을 나와 같은 일반인들도 쉽게 이해하고 읽을 수 있을 정도의 번역서가 적었던 것도 있다. 하지만 이전까지 핏줄의 피와 같이 이어지고 체화되어 있었지만 사용하지 않아 퇴화되었던 동양적인 것의 총화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사실 동양 고전을 읽으면 내용은 어렵고 분량은 방대하지만 읽는 순간에는 다 아는 내용 같다. ‘아~ 이 말이 이 말이지~’, ‘음~ 맞아~~ 이렇게 해야지~’ 고개가 끄덕여진다. 1세기 전 서양이 동양의 고전을 보고 열광했던 이유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그들은 완전히 다른 것에 매료된 것이고 내가 이 책 「장자」를 읽으며 공감하고 고개를 끄덕인 건 내가 동양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논리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 문제이다.

이 책은 크게 2부로 나뉘어 있다. 1부 장주론에는 장자사상의 특징과 구성에 대해 쉽게 설명하고 있고 2부에서는 본격적으로 장자의 내편과 외편 잡편 총 33장의 내용을 소개한다. ‘장자’라고 하면 흔히 노장사상으로만 인식되어 왔었다. 하지만 노자의 사상과는 많이 다른 것이 장자의 사상이고 일부 교집합에 포함되는 부분도 있지만 완전히 다르고 상충되기 까지 하는 부분도 많이 있었다

.

“장자는 비록 노자처럼 무위를 전면에 내세우기는 했으나 아예 무와 유의 구분조차 거부한 점에서 노자보다는 오히려 색과 공의 경계를 허문 불교에 가깝다.” (p.36, 제1편 사상론)

“장자가 볼 때 천당과 극락 등의 사후세계는 속세의 욕망을 재현해 놓은 것에 지나지 않았다. 삶과 죽음을 ‘무’에서 ‘무’로 돌아가는 자연의 순환과정으로 파악한 결과다.” (p.61, 자연주의)

 

무위자연만 머릿속에 맴돌고 있었는데 장자사상은 많이 다르고 매력적이었다. 한국과 중국의 대승불교가 장자의 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점도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었다. 하지만 기복적 형태로 발전된 불교의 극락·사바의 개념과는 차별성을 두고 있다.

“10여 만 자에 달하는 저서는 거의 대부분 우화로 채워져 있다.” (p.15, 제1편 생장론)

 

동양고전의 특징을 하나만 얘기해 보라고 하면 나는 ‘이야기꾼’이라고 대답 하겠다.

아리스토텔레스와 소크라테스, 헤겔과 칸트의 책을 읽을 때마다 무너졌던 나의 자아상과 한탄과 한숨을 기억한다. 어려워도 너~무 어려우니 진도가 나갈 수 없었다. 하지만 동양의 고전은 대부분 우화로 채워져 있다. 장자 또한 마찬가지다.

굳이 어렵고 현학적으로 표현할 수도 있었겠지만 굉장히 쉽게 표현했다. 어차피 장자가 일반 백성이나 천민에게 읽혀졌을 리는 만무하고 문자를 이해하고 일정 수준의 지적수준에 도달한 사람들만이 읽을 수 있었을 텐데 왜 굳이 우화의 형식을 사용한 것일까? 고담준론을 해도 괜찮았을 텐데 말이다.

궁금했다.

 

“세인들의 어리석은 모습을 목격할 때마다 특유의 비꼬는 말투로 사정없이 조롱하고 비웃었다. 조롱 자체가 목적은 아니었다. 여기에는 도저히 구제할 수 없는 인간세상을 안타깝게 생각하는 연민이 짙게 깔려 있다.” (p.30, 제1편 생장론)

 

장자를 포함한 동양의 사상가들은 책을 읽는 대상이 중요하지 않았던 것 같다. 전달하는 방식과 방법 또한 중요하지 않았던 것 같다. 아침에 눈을 떠 보는 산과 안개, 들리는 새소리와 물소리에서부터 밤에 잠들기 전 들리는 풀벌레소리, 달과 별 등 일상과 분리되지 않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 같다. 군자, 군주 얘기를 한다고 해서 꼭 어려운 말을 하고 어려운 단어를 사용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임금~ 당신 이렇게 저렇게 잘못했으니 좀 똑바로 하시오.’ 직접적으로 말하면 잡혀가서 죽임 당하는 것은 일도 아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 직접적으로 말하는 것보다 ‘개가 어떻고 두꺼비가 어떻고 물고기가 어떻고’ 아닌 척 하며 빙 둘러 조롱하고 풍자하면 더 재미있고 고소하기도 하니까.

 

 

 

 

1. 장자가 보는 인간

“무릇 사람의 마음은 산천보다 험하고, 하늘을 알기보다 어렵다. 하늘은 오히려 춘하추동과 아침저녁의 주기라도 있지만 사람은 표정을 두텁게 꾸미고 속셈을 깊이 감춘다.” (p.1012, 잡편 제10장 열어구)

“명예의 주인도, 모략의 창고도, 일의 책임자도, 지혜의 주인도 되지 말라. 그보다는 무궁한 도를 완전치 체득해 흔적이 없는 무위자연의 세계에서 노닐도록 하라. 하늘에서 받은 육신과 정신을 극진히 하면서 삶을 인위적으로 연장하는 등 이익을 탐하지 않으니 오직 마음을 비울 따름이다.” (p.396, 내편 제7장 응제왕)

 

인간에 대한 장자의 시선은 곱지 않다.

‘제발 그만 좀 해라.’

로 표현하면 딱 맞을 것 같다. 이치와 자연에 어긋나려 하지 말고 마음을 비우라고 말한다. 마음을 비우고 싶지 않은 이가 누가 있겠냐마는 마음을 비우지 못해 좋지 않은 결과를 빚어 낸 일들이 허다한 역사적 교훈을 생각하면 가슴에 담을 가르침이다.

 

 

 

 

2. 장자가 보는 군주

“군주가 앞서면 신하가 뒤따르고, 아비가 앞서면 자식이 뒤따르고, 형이 앞서면 아우가 뒤따르고, 어른이 앞서면 젊은이가 뒤따르고,” (p.533, 외편 제6장 천도)

“하소연할 곳이 없는 백성들을 함부로 대하지 않고, 궁색한 백성을 버리지 않고, 죽은 사람을 애도하고, 부모 없는 어린아이들을 사랑하고, 과부를 애처롭게 여긴다. 이것이 내가 천하를 다스리면서 마음을 쓰는 일이다.” (p.540, 외편 제6장 천도)

 

지금 시대에는 참으로 맞는 말이고 당연한 말이지만 고대 중국 춘추전국시대에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목숨을 내어놓는 일이었을 것이다. 자고 일어나면 군주가 바뀌고 온통 피비린내로 진동하던 때에 군주에게 모범을 보이고 과부와 궁핍한 백성을 돌보라고 얘기하는 것은 대단한 용기를 필요로 했을 것이다. 각국에서 장자를 영입하려 애쓴 것을 보면 장자의 가르침과 지적이 꽤나 먹혀들었던 것 같다.

 

 

 

 

3, 장자의 도(道)

“장자가 임종할 즈음 제자들이 후하게 장례를 치르고자 했다. 장자가 말했다.

‘나는 천지를 관곽으로 사고, 일월을 한 쌍의 구슬로 삼고, 하늘의 별들로 둥근 옥이나 모난 옥으로 삼고, 만물을 저승길의 선물로 삼을 것이다. 이 정도면 내 장례에 필요한 도구가 어찌 다 갖춰진 게 아니겠는가? 무엇을 더하려 하는 것인가!’ (p.1018, 잡편 제10장 열어구)

 

장자의 사상은 어디에, 무언가에 얽매이는 것을 경멸한다. 잡편 열어구에 등장하는 장자 자신의 이야기는 집약적으로 그의 사상을 압축하고 있다.

 

[있는 그대로]둘 것을 내내 강조한다. 자연도, 인간도, 도(道)도 [있는 그대로]둬야 한다고 했다. 애써서 뭘 하려고 하고 만들려고 하며 가르치려 하는 것 모두를 경계한다. 힘의 균형의 대척점에서 세상을 인식하지 않는다.

 

“제11편 「재유」는 사물을 인위적인 작위를 가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두어 본성을 보존케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을 담고 있다. 라살이 말한 ‘자유방임주의’ 차원을 넘어 크로포트킨 등이 역설한 ‘무정부주의’를 방불케 하는 대목이다. 후쿠나가는 ‘정치 없는 정치’로 표현했다. 이는 무치(無治)의 또 다른 표현에 해당한다.” (p.163)

 

이러한 장자의 사상은 불필요한 오해를 받기도 했지만 제도와 구조에 갇힌 채 수십 세기를 살아온 동양과 서양의 그것에 지치고 이골이 난 사람들에게는 청량제와 같은 북돋움이 될 것도 같다.

장자는 그냥 ‘다 벗어던져라.’라고만 말하지 않고 방법 또한 제시한다.

 

“자연의 ‘도’에 몸을 의탁하고, 이를 구체화하기 위해서는 천지변환의 흐름에 자연스럽게 순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투쟁’ 및 ‘발전’ 개념 대신 ‘조화’와 ‘순환’ 개념.” (p.150, 장자사상의 전개)

“외발 짐승인 기(蘷)는 발이 많은 노래기를 부러워하고, 노래기는 발이 없는 뱀을 부러워하고, 뱀은 모습이 없는 바람을 부러워하고, 바람은 움직이지 않고도 작용하는 눈을 부러워하고, 눈은 사물을 보지 않고도 모든 것을 다 아는 마음을 부러워했다.” (p.636, 외편 제10장 추수)

 

천지변환의 흐름. 다시 말해 자연적인 것으로의 회귀다. 그것으로의 복귀다. 자연스럽게 순응하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고 구체적 제시가 없는 개념이기 때문에 황당하기도 하지만 외발짐승이 노래기를 부러워하고 노래기가 뱀을, 뱀이 바람을, 바람이 눈을, 눈이 마음을 부러워하는 것처럼 흔들리는 마음이 아니라 뱀은 뱀대로 노래기는 노래기대로 자연으로부터 부여된 천기(天機)를 그저 움직이며 살 뿐이라는 것이다.

욕심내지 않고 비교하지 않으면 조바심 낼 이유가 없을 것이다. 다른 집의 아이들이 가기 때문에 내 아이도 학원에 보낼 수밖에 없다는 어불성설은 장자형님이 들으시면 싸대기를 올릴 말이다.

얼마나 바쁘고 각박한 현재인가. 일상의 모든 순간과 찰나에 자유로울 수없다. 아주 어려서부터 비교되고 경쟁의 부추김을 받아왔다. 니가 아니면 내가 되어야 하고 내가 아니더라도 너는 아니어야 하는 분위기 속에 천착해 살아왔다.

 

도(道)는 배부른 소리에 지나지 않았다.

먹고 사는 일에 모든 역량을 투입해도 될까 말까한 세상에 무슨 도?? 개 풀 뜯어먹는 소리다.

 

하지만 리뷰의 앞부분에서도 말했지만 개 풀 뜯어 먹는 소리에 워낙 관심이 없고 등한하다 보니 이제는 개 풀 뜯어 먹는 소리가 무엇인지 조차 가늠할 길이 없다. 떠다니는 봉지처럼 표류하고 있다. 가정을 가지고 아이를 낳고 직장생활을 하고 있지만 여전히 표류하는 것이다. 학교에 가서 공부를 하고 학원·과외에 둘러싸여 있지만 표류하는 것이다.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음악을 하고 예술을 하지만 표류하는 것이다.

 

가치는 투영하는 대상에 따라 정도가 달라진다. 특히 당장 돈이 되거나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되거나 취직이 되는 추상적 가치는 아주 낮은 수준의 정도에 머물러 있다. 대학에서 순수학문을 공부하는 전공들이 없어지거나 축소되는 것은 이것의 한 결과다.

대중을 자석처럼 끌어당길 극이 필요한데 동양사상, 특히 장자의 사상은 그것을 가능케 할 매력과 힘이 있다고 생각한다. 추상적이기는 하지만 현학적이지 않다. 레토릭이 아니라 다층의 세대를 아우를 수 있는 우화로 채워져 있다.

 

장자사상을 담은 동화책이나 청소년을 대상으로 조금 쉽게 번역한 책이 나온다면 장자를 읽는 어린아이와 청소년들이 지금의 아이들과 청소년들보다는 마음을 잘 지킬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더불어 나이가 많은 분들에게도 충분한 매력이 있을 것이다. 젊은 시절 치열한 삶과의 투쟁을 겪어 온 그들에게 ‘조화와 순환’을 설명하는 장자의 사상은 그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대변할 수 있을 만하리라 여겨진다.

이러한 것들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동양사상을 공부하는 이들이 많아져야 하고 그들이 조금씩 다르지만 많은 번역서를 낸다면 될 텐데 가능할지 모르겠다.

제 나라 역사조차 제대로 가르치지 않는 곳에서 장자가 가당키나 할지 말이다.

 

“도는 땅강아지나 개미에게 있소.”

“어찌 더욱 낮아지는 것이오?”

장자가 말했다.

“도는 기왓장이나 벽돌에 있소.”

“어찌 더욱 심해지는 것이오?”

장자가 말했다.

“도는 똥과 오줌 속에 있소.”

장자가 말했다.

“그대는 반드시 어떤 것이라고 고집하는 마음이 없어야 하오. 그래야만 도가 어떤 물건에서든 떠나지 않고 두루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게 되오. 지극한 도는 바로 이와 같소.” (p.760, 외편 제15장 지북유)

 

장자가 말하는 도(道)에 이르는 길이 쉽지 만은 않으리라 생각된다. 하지만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장자를 읽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도에 이르러 군자가 되지 않더라도 장자를 통해 정신수양을 할 수 있다면 최소한 지금보다는 더 낫고 더 안정된 사회가 될 것이라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저자인 신동준씨의 노고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일본과 중국에 비해 장자 연구가 너무나도 부족한 국내 현실에서 일본과 중국의 장자학 권위자들의 많은 책들을 쉽게 인용하고 풀어낸 것은 단기간에 할 수 있는 작업이 아니었을 것이다. 한자를 한글로 풀어 해석해 한국인의 의식구조에 적합한 형태의 단어와 문장을 담아내는 작업도 굉장히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참고 서적만 봐도 알 수 있다. 분량은 말할 것도 없고.

이런 책들이 많이 출간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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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빈에 대하여 - 판타스틱 픽션 WHITE 1-1 판타스틱 픽션 화이트 White 1
라이오넬 슈라이버 지음, 송정은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2년 7월
평점 :
품절


「케빈에 대하여」의 원제는 「We need to talk about Kevin」이다. 차라리 직역을 했더라면 책이 주고자 하는 메시지에 더 가까웠으리라 생각한다.

이 책을 다 읽고 나서 가만히 제목을 생각해 보니 한국어 제목 ‘케빈에 대하여’ 에서는 ‘대하여’보다 ‘케빈’에 더 주목이 되는 반면 원래 제목에서는 ‘Kevin'보다 ’We'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영화에 대한 설왕설래가 많았다. 미디어의 특성 상 관객이 혹 할 만한 자극적인 문장과 장면을 편집해 예고편으로 내놓는다.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지 않을 것 같은 차가운 표정의 엄마와 싸이코패스 살인마와는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맑은 눈동자와 새하얀 피부를 가진 케빈. 영화 포스터와 책 표지에서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연상시켜 마케팅 효과를 노리는 점이 보인다.

책은 케빈의 엄마인 에바가 남편이자 케빈의 아버지인 프랭클린에게 쓰는 편지글 형식으로 되어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구어체로 되어 있으나 처음부터 끝까지 만연체로 되어 있는 딱딱하고 지루한 논문을 읽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영화에서 에바역을 맡은 배우 ‘틸다 스윈튼’의 건조하고 메마른 영화 속 캐릭터의 이미지와 딱 맞아 떨어진다.

 

 

 

We

We가 지칭하는 대상이 누구일지 생각해 보았다. 편지를 쓰는 1인칭인 에바, 자신의 독백이었다면 We가 아니라 I라고 했어야 맞을 텐데. 에바를 포함한 제3자를 끌어 들인다. 그것은 남편인 프랭클린일 수도 있고, 책의 곳곳에서 저자가 지적하는 미국이라는 집단이 가진 구조적인 결함 내지는 한계일 수도 있으며, 이 책을 읽는 나와 같은 독자일 수도 있다. 어떤 것이라고 단정할 수 없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싸이코패스라는 단어가 이젠 대중화되어 있고 TV를 틀면 매일 케이블을 통해 방영되는 미국드라마 중 많은 것이 싸이코패스를 다루고 있다. 불과 수 년 전만 해도 상당히 생소한 단어였는데 말이다. 대학 시절 9.11사건을 자취방 앞 슈퍼에서 생중계로 지켜보며 받았던 충격만큼 미국발 뉴스로 전해지는 학교 내에서의 총기 난사 사건은 충격적이었다.

총기 소지와 술과 마약에 대한 접근이 그 어떤 곳보다 용이한 미국이다 보니 ‘그러려니~.’ 했지만 수년을 주기로 일어나는 학교 내 총기 난사 사건은 쉽게 이해되지 않았다. 인터넷의 발달로 광적으로 폭력적인 게임이 개발되고 유통되고 대중화 되면서 현실과 가상세계를 구분하지 못하는 정신적 질환도 늘어나고 사회적으로는 싸이코패스가 양산되는 결과를 낳았다. 10대의 아이들이 학교에 총을 가져와 마치 온라인 게임을 하듯이 총을 쏴 명중시키는 일이 벌어졌다.

 

“늘 그대로인 상황이 그 아일 미치게 만들 수도 있어요. 커다란 저택. 좋은 학교. 전 어느 면에서 그것이 요즘 아이들한테 매우 힘들 거라고 생각해요. 이 나라의 바로 그 번영이 부담이 되고 막다른 길목에 다다른 거예요. 모든 게 다 잘되고 있어요. 그렇죠? 최소한 백인에다 중산층이라면 말이에요. 하지만 그것 때문에 젊은이들이 자신을 쓸모없는 존재로 여기게 되는 것처럼 보일 때가 많아요. 마치 그들에게 더는 할 일이 없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말이죠.” (p.515)

 

내가 기억하기로는 최근에 일어난 미국 내 총기 사건의 가해자는 거의 백인 아이들이었다. 인종차별이나 경제적 문제로 벌어지는 범죄가 아닌 것이다. 어쩌면 배부른 소리일 수도 있겠지만 수십 년간 절대적 힘의 우위를 점하고 있던 미국 사회가 안으로 곪아가는 것에는 무감각했던 것이다. 경제적·군사적으로는 번영의 번영을 거듭하고 멋진 저택과 커다란 자가용을 타고 휴가 기간이면 카리브해로 멀리 인도양의 섬으로 날아가는 영화와 같은 삶 속에서 아무도 모르게 암덩이가 자라고 있었던 것이다. 당장 할 일이 없고 돈이 없고 미국 내에서도 최저생활을 연명하는 사람들이 많음에도 전형적인 아메리칸 드림의 표본인 이 백인 중산층 가정의 아이들은 지겨운 것이다. 재미있는 것도 가치 있는 것도 의미 있는 것도 찾지 못하는 지겨움. 이것은 불행이다. 너무나도 배부른 불행.

저자가 책에서 줄곧 에바의 편지글을 통해 케빈에 대한 엄마로써의 죄책감과 자기정당화 과정에 평행하여 언급하는 미국 내 사회 문제들은 총기 난사 사건과 같은 비극적인 사건이 단순히 한 가정에 국한된 가정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의 전체적인 구조의 문제임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당신은 항상 이 나라에 대해 불평하고, 말레이시아 같은 곳에서 살고 싶어 했잖아. 당신한테 이곳의 문제는 뭘까? 정말로 미국인의 물질만능주의인가? 당신의 불만은 뭐지?” (p.427)

 

케빈을 데리고 떠난 베트남 여행에서 케빈은 현지인들을 향한 원색적인 인종 차별을 한다. 쓰레기 취급을 하는 것이다. 케빈으로 지칭되는 미국의 일부 구조에 대한 가장 원초적이고 솔직한 표현이다. 케빈이 소외당한 것이 아니라 케빈이 소외 시킨 것이다. 이미 많은 것을 가진 쪽은 가지지 못한 쪽을 이해하지 못한다. 아니, 이해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그런 구조가 혈관속 피처럼 태생적으로 흐르고 있는 케빈은 에바의 불만을 이해하지 못한다. 이해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need to talk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이 책의 배경이 되기도 했던 미국의 총기 난사 사건을 비롯해서 최근 한국에서 심심찮게 벌어진 ‘묻지마 범죄’의 근본 원인은 개인적 차원이 아닌 사회 전체적인 구조의 문제라는 점을 상기한다면 그것을 끝인가?

우리는 무슨 말을 할 필요가 있을까?

 

“그 집은 내가 저항하는 만큼이나 여러 면에서 내게 저항을 하더군. 어느 하나 맞는 게 없었어. 제대로 된 각도가 없어서 서랍을 구석으로 밀어 넣을 때마다 항상 어색한 삼각 공간이 남았지.” (p.241)

 

우리의 삶이 새 책장을 사서 방 구석구석을 계산해가며 들여놓을 때 빈틈도 모자람도 없이 딱 맞아떨어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은 것이 삶이다.

최소한 내게 케빈의 환경은 이상향이다. 미국인에 백인에 돈 잘 버는 부모에 외모도 수려하고 한국 같은 나라에 가서 반년 동안 영어강사 한 돈으로 몇 개월 여행하고 돈 떨어지면 또 영어강사 해서 돈 벌고 실컷 즐기다 미국가면 그만이다. 이 책을 읽는 미국인에게도 케빈의 삶은 부러움일 것이다. 딱딱 맞아 떨어지고 착착 감기는 행복한 삶이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에바가 새로 이사한 집에서 느낀 이질감은 그녀만의 착각은 아니었다. 뭔가 좋지 않은 징조를 개선해 보고 문제를 해결해 보고자 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때로는 발버둥치고 최선을 다해 노력해도 되지 않는 일도 있다. 하늘의 뜻에 맡겨야 하는 일이라고 한다면 너무 인간 실존의 책무를 방기하는 것일까?

 

“난 개인의 파멸이 인생의 사소한 일들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게 만들어줄 거라 상상했던 거 같아.” (p.22)

“케빈은 불편해 보이고, 그런 면에서 옷은 적절한 선택이야. 케빈은 불편해. 작은 옷은, 케빈이 자신의 피부에서 느끼는 똑같은 속박을 자기 복제하지.” (p.268)

 

개인의 파멸은 부지불식간에 찾아오는 것이 대부분이다. 케빈을 가지기 전부터 임신과 양육, 가정에 대한 말할 수 없는 어색함과 불편함을 가지고 있던 에바의 파멸을 고스란히 케빈에게 전해진다. 케빈을 낳아 처음으로 자신의 젖을 먹이려 했던 순간부터. 갓 태어난 대부분의 아이들처럼 힘차게 엄마의 젖을 빠는 것과는 달리 케빈은 젖을 빨지 않았다. 에바와 케빈은 그 순간부터 서로 파멸을 자기 복제한 것이다.

세상이 온통 엉망으로 돌아가고 있어도 결국 나 살아가는 것에 지쳐있다 보니 돌아볼 겨를이 없다. 파멸로 가는 비둘기호 완행열차를 탄 것에 그나마 감사해야 하는 것일까? KTX를 탔다면 벌써 종착지로 골인했을 수도 있다. 삶의 진창은 너무 질고 넓고 아득해서 아무리 새 장화로 갈아 신어도 끝이 없다. 자기 검열은 가차 없어 지고 늘 지기만 하는 QPR처럼 패배의 자기복제는 용이하고 수월해 진다.

우리는 분명히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

 

 

 

 

about Kevin

“그러니까 난 내 엄마가 되는 게 두려웠던 게 아니라, 보통 엄마가 되는 게 두려웠던 거야.” (p.59)

“케빈은 내게도 인생이 있었다는 걸 깨달았던 게 분명해. 그리고 목적의식을 갖고서 그걸 망쳐버리려 했지.” (p.96)

“그래, 난 아기도 싫었어. 그때까지도 그것은 내게 미래에 대한 희망과 이야깃거리, 만족감, 그리고 ‘전환점’을 가져다주지 못했으니까. 여전히 난 그것을 단지 거추장스러운 것, 당혹스러운 것, 해저에게 꾸르륵 거리고 있는 것으로만 여겼어.” (p.126)

 

이 책을 나보다 먼저 읽은 아내는 너무 무섭다며 에바의 마음에 공감이 간다고 했다. 아직 아이가 없는 터라 더욱 그런 것 같았다. 나도 책을 읽기 전에는 에바에 초점을 맞췄다. 그런데 책을 읽고 나니 케빈에 초점을 맞출 수밖에 없었다.

나는 앞서도 언급했지만 케빈이 싸이코패스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엄마의 젖을 처음부터 거부하고 아빠와 여동생까지 화살로 쏴 죽인 케빈이 이후 에바의 편지글에 등장하는 모습은 전형적인 사이코패스다. 하지만 책은 철저하게 엄마인 에바의 1인칭일 뿐이다. 예전에 찢어버린 줄로만 알고 있었던 엄마의 사진이 케빈의 방 한 켠에 붙여져 있었고

 

“고마워. 꼭 그래줘.” (p.605)

 

계속해서 자신을 면회 올 것을 약속하는 엄마의 말에 대답하는 케빈이 싸이코패스일까?

그렇다고 해서 케빈의 범죄의 무거움이 줄어드는 것은 물론 아니다. 케빈이 싸이코패스이건 아니건 그가 저지른 범죄가 무마되는 것이 아니다.

케빈은 처음부터 끝까지 엄마인 에바의 사랑과 인정에 목말라 있었다. 엄마의 젖을 빨지 않고 말도 제때하지 않고 배변도 가리지 않고 일부러 엄마의 시선을 확보해 자위를 하고 엄마를 아줌마 혹은 당신이라 부르고 멍청한 친구 한 놈을 골라 나쁜 짓을 시키고 여동생에게 끔찍한 상처를 입히고 사람들을 죽이는 일 전부가 엄마의 사랑을 갈구하는 행위였다면 너무 비참하고 끔찍한 일이다.

내가 케빈이 싸이코패스가 아니라고 한 것의 의미는 정신분석학·범죄심리학 적으로는 케빈이 사이코패스로 분류될 수 있겠지만 싸이코패스로 쉽게 단정하고 규정짓는 것으로 케빈의 모든 행위를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에바가 아들의 손에 죽은 남편에게 쓰는 하릴없는 편지글에서 줄곧 케빈의 감정을 배제하고 있는 것처럼 케빈의 삶 전체에서 사랑은 줄곧 배제되어 온 감정이었다. 가르칠 수 없고 이해시킬 수 없는 차원의 문제는 끊임없는 자기발현의 욕구와 겹쳐져 행동으로 표현되었다. 당연히 에바가 싫어하고 경멸하는 행위로.

 

만약 엄마에게조차 싸이코패스적이었다면 가장 먼저 살해했어야 하지 않을까?

어떻게 입에 담기도 힘들 범죄로 마무리 된 케빈의 불행은 아직 진행형이라는 것이 더욱 암담하다. 책의 말미에 엄마와 일정 부분 정서적 화해를 이루는 듯 한 표현이 있지만 쉬이 풀릴 것 같지는 않다.

 

또한 케빈과 같은 아이들이 앞으로도 계속해서 양산될 것을 생각하면 몸이 떨린다. 미국만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우리의 문제일 수도 있음을 인지하게 되면 머리까지 아프다.

케빈에 대하여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 언제까지 TV뉴스를 통해 비극적인 현실을 게워낼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나의 케빈. 우리의 케빈에 대하여 이야기해야 한다.

 

우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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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 독일 대통령은 왜 지금 자유를 말하는가
요아힘 가우크 지음, 권세훈 옮김 / 부엔리브로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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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총리 메르켈은 알고 있었지만 독일의 대통령은 알지 못했다. 우리의 정치구도와는 다른 구조이기 때문에 실상 총리가 더 많은 권한을 가지고 있고 대통령은 상징적인 국가수반에 불과한 것이 독일이다.

그래서 그런지 이 책의 저자인 독일 대통령 ‘요아힘 가우크’라는 이름을 처음 들어봤다. 불과 반 년 전인 올 3월 요아힘 가우크는 특정 정당 소석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국민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 독일의 11대 대통령이 되었다고 한다.

 

구동독의 목사 출신 자유주의자가 극우 정당과 극좌 정당이 공존하는 치열한 독일의 정치구도 속에서 정당들의 고른 지지를 받아 대통령이 되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이 책 「자유」는 요아힘 가우크 대통령이 대통령으로 선출되기 전 연회에서 행한 연설을 토대로 작성된 것이다.

 

가우크 대통령은 구동독 시절 목사로 재임하면서도 공산주의 체제에 대한 비판을 서슴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동독의 정보기관이던 슈타지의 오랜 감시를 받았고 통일 후에는 슈타지를 해체하는 작업을 맡게 되기도 한다.

추천의 글에서 이어령 선생이 아이처럼 기대하며 쓴 것처럼 한반도의 암울한 정세지만 북한 출신 성직자가 남·북 정당 모두의 천거를 받고 국민적 지지를 얻어 한반도가 탄생시키는 새로운 통일국가의 대통령이 되는 날이 빨리 오기를 마음 나 또한 간절하지만 그것에 언제가 될지는 전혀 알 수 없다.

하지만 소련과 동유럽 또한 공고하던 철벽이 한꺼번에 와르르 무너졌던 것을 감안하면 먼 미래의 뜬구름 잡는 이야기만은 아닐 거라 희망해 본다.

만약 통일이 되어 북한 측 인사가 대통령 선거에 나왔다고 가정한다면 남쪽의 유권자들이 색안경을 끼지 않고 그를 판단할 수 있을까? 남쪽 내에서도 지역주의가 팽배하고 그것으로 먹고 사는 정치인이 수백 명인 판국에 말이다.

 

독일은 우리만큼은 아니겠지만 구서독에 속해 있던 유권자들의 마음까지 사로잡은 인물이라면, 이 책에서 구체적으로 가우크 대통령의 과거를 소개하지는 않았지만 책의 머리말에 있는 소개처럼 ‘자유’의 정신을 지속적으로 고양하고 지향하며 살아 온 인물임에는 틀림없을 듯싶다.

한국의 실정처럼 대통령이 엄청난 권력과 힘을 독점하는 구조가 아닌 것도 특정 정당 소속이 아닌 재야인사(우리 정치 실정에 맞는 표현으로 각색한다면)가 여·야의 고른 지지를 받고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중요한 이유가 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가우크 대통령이 살아온 인생의 흔적이 독일인들의 마음을 움직였음은 자명한 사실일 것이다.

흡사 이번 대선에 출마 한 모 인사를 생각게 하는 대목이다.

최초로 국민에 의해서 떠오르고 추대되어 대통령 선거의 유력한 후보가 되었으니 말이다.

 

 

 

 

자유

시민이란 시민의 권리를 가지고, 또한 그것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 (p.34)

 

시민이란 권리를 가지고 그것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이다. 당연한 말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말의 뜻을 잘 알지 못한다. 중·고등학교 시절 다다다다 외우기만 했지 정치경제 시간이나 사회문화 시간에 시민, 시민권에 대해 제대로 교육을 받은 기억이 없다. 그저 주워듣고 책을 보고 알게 된 것이 전부다.

그래서

‘주체적인 시민이니 주체적으로 판단하시오.’

얘기를 들어도 뭘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지 못한다.

‘자유’라고 하면 단순히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이다.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살고 있는 시민이라면 자유롭게 나를 표현하고 사안을 표현하고 가치와 방향에 대한 찬반을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렇지 못한 경우가 너무 많다. 파렴치한 성범죄자가 늘어나는 것을 예방코자 경찰의 불신검문을 증가하는 것이 자유민주주의 사회인가?

단순한 예이지만 그런 예가 너무 많다.

자유의 범위와 시민의 범위, 나아가서 시민권의 정확한 의미와 가치를 말해주지 않는 국가는 자유주의 국가라 말할 수 없다.

 

 

 

 

책임

“우리는 ‘무엇에서 벗어난 자유’를 체험할 수는 있었지요. 하지만 아직 ‘무엇을 향한 자유’를 체험할 수는 없던 때.” (p.48)

 

가우크 대통령은 구동독의 공산주의 체제를 경험했다. 공산주의 체제로부터의 속박에서는 벗어났지만 ‘무엇을 향한 자유’에는 닿지 못했다.

책임이라는 것의 출발은 ‘무엇을 향한 자유’라고 말한다. 동의한다.

한국의 현실도 비슷하다. 유럽은 수백 년에 걸쳐 겪어 온 현대화가 한국은 불과 60여 년 만에 압축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래서 세대 간 갈등과 부작용이 심각하게 나타나고 있다. 전쟁과 독재를 겪은 정치의식은 늘 수동적이고 피동적일 수밖에 없었고 전 국가가 하나의 공장이 되어버렸던 개발독재는 어떻게는 낙수효과를 신화처럼 믿고 삼성이 망하면 나라가 망한다는 단군신화보다 더 황당한 스토리를 양산했다.

압축된 60년의 한국 현대사는 이제 조금 ‘무엇에서 벗어난 자유’를 느껴볼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늘 피해를 입는 건 시민들이었다. 국가는 늘 주체였다. 그래서 한국전쟁과 박정희 독재를 경험한 어르신들 중 많은 분들은 아직도 국가에 대한 신뢰를 버리지 못한다.

능동적·주체적 세력이 되어 본 적이 없다. 월드컵 응원 같은 것 말고 정치적 행위 내지는 시민권을 가진 시민으로서의 권리 행사에 말이다.

가장 중요한 권리는 투표권이라 생각한다. 투표하는 세대는 정치인들이 두려워하게 되어 있다. 반대로 투표하지 않는 세대는 두려워하지 않는다. 가볍게 본다. 어차피 투표하지 않으니까 신경 쓰지 않는다.

‘무엇을 향한 자유’를 오롯이 경험하기 위해서는 시민들이 주체적으로 참여하여 바꿔야 한다. 누가 대신해 줄 수 없는 문제이다.

 

 

 

 

관용

 

“무관심은 결코 관용의 또 다른 이름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무책임을 달리 부르는 것입니다.” (p.83)

 

무개념 ‘인’들이 쏟아지고 있다. 여러 가지 사회 구조적 문제가 빚은 파행적 결과라 진단들을 한다. 자유롭게 책임 있는 사회 혹은 국가가 된다면 관용은 그 사회·국가 전체에 흐르는 시대정신이 될 것임은 자명하다.

 

[똥이 더럽다고 피하지 무섭다고 피하나!!]

이런 말은 집어치워야 한다. 내 눈 앞에 더러운 똥이 있으면 치워버려야 한다. 똥을 보고도 나 혼자 독야청청 한답시고 눈 감고 피해버리면 다른 사람들은 그 똥은 또 봐야 한다.

정치가 더럽다고? 썩은 내 난다고?

그래서 뭐 어쩌겠다는 것인가.

고개 돌리지 말고 이제는 직시해

야 한다. 무관심은 관용이 아니다. 무책임을 자위하는 비겁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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