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빈에 대하여 - 판타스틱 픽션 WHITE 1-1 판타스틱 픽션 화이트 White 1
라이오넬 슈라이버 지음, 송정은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2년 7월
평점 :
품절


「케빈에 대하여」의 원제는 「We need to talk about Kevin」이다. 차라리 직역을 했더라면 책이 주고자 하는 메시지에 더 가까웠으리라 생각한다.

이 책을 다 읽고 나서 가만히 제목을 생각해 보니 한국어 제목 ‘케빈에 대하여’ 에서는 ‘대하여’보다 ‘케빈’에 더 주목이 되는 반면 원래 제목에서는 ‘Kevin'보다 ’We'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영화에 대한 설왕설래가 많았다. 미디어의 특성 상 관객이 혹 할 만한 자극적인 문장과 장면을 편집해 예고편으로 내놓는다.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지 않을 것 같은 차가운 표정의 엄마와 싸이코패스 살인마와는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맑은 눈동자와 새하얀 피부를 가진 케빈. 영화 포스터와 책 표지에서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연상시켜 마케팅 효과를 노리는 점이 보인다.

책은 케빈의 엄마인 에바가 남편이자 케빈의 아버지인 프랭클린에게 쓰는 편지글 형식으로 되어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구어체로 되어 있으나 처음부터 끝까지 만연체로 되어 있는 딱딱하고 지루한 논문을 읽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영화에서 에바역을 맡은 배우 ‘틸다 스윈튼’의 건조하고 메마른 영화 속 캐릭터의 이미지와 딱 맞아 떨어진다.

 

 

 

We

We가 지칭하는 대상이 누구일지 생각해 보았다. 편지를 쓰는 1인칭인 에바, 자신의 독백이었다면 We가 아니라 I라고 했어야 맞을 텐데. 에바를 포함한 제3자를 끌어 들인다. 그것은 남편인 프랭클린일 수도 있고, 책의 곳곳에서 저자가 지적하는 미국이라는 집단이 가진 구조적인 결함 내지는 한계일 수도 있으며, 이 책을 읽는 나와 같은 독자일 수도 있다. 어떤 것이라고 단정할 수 없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싸이코패스라는 단어가 이젠 대중화되어 있고 TV를 틀면 매일 케이블을 통해 방영되는 미국드라마 중 많은 것이 싸이코패스를 다루고 있다. 불과 수 년 전만 해도 상당히 생소한 단어였는데 말이다. 대학 시절 9.11사건을 자취방 앞 슈퍼에서 생중계로 지켜보며 받았던 충격만큼 미국발 뉴스로 전해지는 학교 내에서의 총기 난사 사건은 충격적이었다.

총기 소지와 술과 마약에 대한 접근이 그 어떤 곳보다 용이한 미국이다 보니 ‘그러려니~.’ 했지만 수년을 주기로 일어나는 학교 내 총기 난사 사건은 쉽게 이해되지 않았다. 인터넷의 발달로 광적으로 폭력적인 게임이 개발되고 유통되고 대중화 되면서 현실과 가상세계를 구분하지 못하는 정신적 질환도 늘어나고 사회적으로는 싸이코패스가 양산되는 결과를 낳았다. 10대의 아이들이 학교에 총을 가져와 마치 온라인 게임을 하듯이 총을 쏴 명중시키는 일이 벌어졌다.

 

“늘 그대로인 상황이 그 아일 미치게 만들 수도 있어요. 커다란 저택. 좋은 학교. 전 어느 면에서 그것이 요즘 아이들한테 매우 힘들 거라고 생각해요. 이 나라의 바로 그 번영이 부담이 되고 막다른 길목에 다다른 거예요. 모든 게 다 잘되고 있어요. 그렇죠? 최소한 백인에다 중산층이라면 말이에요. 하지만 그것 때문에 젊은이들이 자신을 쓸모없는 존재로 여기게 되는 것처럼 보일 때가 많아요. 마치 그들에게 더는 할 일이 없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말이죠.” (p.515)

 

내가 기억하기로는 최근에 일어난 미국 내 총기 사건의 가해자는 거의 백인 아이들이었다. 인종차별이나 경제적 문제로 벌어지는 범죄가 아닌 것이다. 어쩌면 배부른 소리일 수도 있겠지만 수십 년간 절대적 힘의 우위를 점하고 있던 미국 사회가 안으로 곪아가는 것에는 무감각했던 것이다. 경제적·군사적으로는 번영의 번영을 거듭하고 멋진 저택과 커다란 자가용을 타고 휴가 기간이면 카리브해로 멀리 인도양의 섬으로 날아가는 영화와 같은 삶 속에서 아무도 모르게 암덩이가 자라고 있었던 것이다. 당장 할 일이 없고 돈이 없고 미국 내에서도 최저생활을 연명하는 사람들이 많음에도 전형적인 아메리칸 드림의 표본인 이 백인 중산층 가정의 아이들은 지겨운 것이다. 재미있는 것도 가치 있는 것도 의미 있는 것도 찾지 못하는 지겨움. 이것은 불행이다. 너무나도 배부른 불행.

저자가 책에서 줄곧 에바의 편지글을 통해 케빈에 대한 엄마로써의 죄책감과 자기정당화 과정에 평행하여 언급하는 미국 내 사회 문제들은 총기 난사 사건과 같은 비극적인 사건이 단순히 한 가정에 국한된 가정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의 전체적인 구조의 문제임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당신은 항상 이 나라에 대해 불평하고, 말레이시아 같은 곳에서 살고 싶어 했잖아. 당신한테 이곳의 문제는 뭘까? 정말로 미국인의 물질만능주의인가? 당신의 불만은 뭐지?” (p.427)

 

케빈을 데리고 떠난 베트남 여행에서 케빈은 현지인들을 향한 원색적인 인종 차별을 한다. 쓰레기 취급을 하는 것이다. 케빈으로 지칭되는 미국의 일부 구조에 대한 가장 원초적이고 솔직한 표현이다. 케빈이 소외당한 것이 아니라 케빈이 소외 시킨 것이다. 이미 많은 것을 가진 쪽은 가지지 못한 쪽을 이해하지 못한다. 아니, 이해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그런 구조가 혈관속 피처럼 태생적으로 흐르고 있는 케빈은 에바의 불만을 이해하지 못한다. 이해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need to talk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이 책의 배경이 되기도 했던 미국의 총기 난사 사건을 비롯해서 최근 한국에서 심심찮게 벌어진 ‘묻지마 범죄’의 근본 원인은 개인적 차원이 아닌 사회 전체적인 구조의 문제라는 점을 상기한다면 그것을 끝인가?

우리는 무슨 말을 할 필요가 있을까?

 

“그 집은 내가 저항하는 만큼이나 여러 면에서 내게 저항을 하더군. 어느 하나 맞는 게 없었어. 제대로 된 각도가 없어서 서랍을 구석으로 밀어 넣을 때마다 항상 어색한 삼각 공간이 남았지.” (p.241)

 

우리의 삶이 새 책장을 사서 방 구석구석을 계산해가며 들여놓을 때 빈틈도 모자람도 없이 딱 맞아떨어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은 것이 삶이다.

최소한 내게 케빈의 환경은 이상향이다. 미국인에 백인에 돈 잘 버는 부모에 외모도 수려하고 한국 같은 나라에 가서 반년 동안 영어강사 한 돈으로 몇 개월 여행하고 돈 떨어지면 또 영어강사 해서 돈 벌고 실컷 즐기다 미국가면 그만이다. 이 책을 읽는 미국인에게도 케빈의 삶은 부러움일 것이다. 딱딱 맞아 떨어지고 착착 감기는 행복한 삶이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에바가 새로 이사한 집에서 느낀 이질감은 그녀만의 착각은 아니었다. 뭔가 좋지 않은 징조를 개선해 보고 문제를 해결해 보고자 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때로는 발버둥치고 최선을 다해 노력해도 되지 않는 일도 있다. 하늘의 뜻에 맡겨야 하는 일이라고 한다면 너무 인간 실존의 책무를 방기하는 것일까?

 

“난 개인의 파멸이 인생의 사소한 일들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게 만들어줄 거라 상상했던 거 같아.” (p.22)

“케빈은 불편해 보이고, 그런 면에서 옷은 적절한 선택이야. 케빈은 불편해. 작은 옷은, 케빈이 자신의 피부에서 느끼는 똑같은 속박을 자기 복제하지.” (p.268)

 

개인의 파멸은 부지불식간에 찾아오는 것이 대부분이다. 케빈을 가지기 전부터 임신과 양육, 가정에 대한 말할 수 없는 어색함과 불편함을 가지고 있던 에바의 파멸을 고스란히 케빈에게 전해진다. 케빈을 낳아 처음으로 자신의 젖을 먹이려 했던 순간부터. 갓 태어난 대부분의 아이들처럼 힘차게 엄마의 젖을 빠는 것과는 달리 케빈은 젖을 빨지 않았다. 에바와 케빈은 그 순간부터 서로 파멸을 자기 복제한 것이다.

세상이 온통 엉망으로 돌아가고 있어도 결국 나 살아가는 것에 지쳐있다 보니 돌아볼 겨를이 없다. 파멸로 가는 비둘기호 완행열차를 탄 것에 그나마 감사해야 하는 것일까? KTX를 탔다면 벌써 종착지로 골인했을 수도 있다. 삶의 진창은 너무 질고 넓고 아득해서 아무리 새 장화로 갈아 신어도 끝이 없다. 자기 검열은 가차 없어 지고 늘 지기만 하는 QPR처럼 패배의 자기복제는 용이하고 수월해 진다.

우리는 분명히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

 

 

 

 

about Kevin

“그러니까 난 내 엄마가 되는 게 두려웠던 게 아니라, 보통 엄마가 되는 게 두려웠던 거야.” (p.59)

“케빈은 내게도 인생이 있었다는 걸 깨달았던 게 분명해. 그리고 목적의식을 갖고서 그걸 망쳐버리려 했지.” (p.96)

“그래, 난 아기도 싫었어. 그때까지도 그것은 내게 미래에 대한 희망과 이야깃거리, 만족감, 그리고 ‘전환점’을 가져다주지 못했으니까. 여전히 난 그것을 단지 거추장스러운 것, 당혹스러운 것, 해저에게 꾸르륵 거리고 있는 것으로만 여겼어.” (p.126)

 

이 책을 나보다 먼저 읽은 아내는 너무 무섭다며 에바의 마음에 공감이 간다고 했다. 아직 아이가 없는 터라 더욱 그런 것 같았다. 나도 책을 읽기 전에는 에바에 초점을 맞췄다. 그런데 책을 읽고 나니 케빈에 초점을 맞출 수밖에 없었다.

나는 앞서도 언급했지만 케빈이 싸이코패스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엄마의 젖을 처음부터 거부하고 아빠와 여동생까지 화살로 쏴 죽인 케빈이 이후 에바의 편지글에 등장하는 모습은 전형적인 사이코패스다. 하지만 책은 철저하게 엄마인 에바의 1인칭일 뿐이다. 예전에 찢어버린 줄로만 알고 있었던 엄마의 사진이 케빈의 방 한 켠에 붙여져 있었고

 

“고마워. 꼭 그래줘.” (p.605)

 

계속해서 자신을 면회 올 것을 약속하는 엄마의 말에 대답하는 케빈이 싸이코패스일까?

그렇다고 해서 케빈의 범죄의 무거움이 줄어드는 것은 물론 아니다. 케빈이 싸이코패스이건 아니건 그가 저지른 범죄가 무마되는 것이 아니다.

케빈은 처음부터 끝까지 엄마인 에바의 사랑과 인정에 목말라 있었다. 엄마의 젖을 빨지 않고 말도 제때하지 않고 배변도 가리지 않고 일부러 엄마의 시선을 확보해 자위를 하고 엄마를 아줌마 혹은 당신이라 부르고 멍청한 친구 한 놈을 골라 나쁜 짓을 시키고 여동생에게 끔찍한 상처를 입히고 사람들을 죽이는 일 전부가 엄마의 사랑을 갈구하는 행위였다면 너무 비참하고 끔찍한 일이다.

내가 케빈이 싸이코패스가 아니라고 한 것의 의미는 정신분석학·범죄심리학 적으로는 케빈이 사이코패스로 분류될 수 있겠지만 싸이코패스로 쉽게 단정하고 규정짓는 것으로 케빈의 모든 행위를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에바가 아들의 손에 죽은 남편에게 쓰는 하릴없는 편지글에서 줄곧 케빈의 감정을 배제하고 있는 것처럼 케빈의 삶 전체에서 사랑은 줄곧 배제되어 온 감정이었다. 가르칠 수 없고 이해시킬 수 없는 차원의 문제는 끊임없는 자기발현의 욕구와 겹쳐져 행동으로 표현되었다. 당연히 에바가 싫어하고 경멸하는 행위로.

 

만약 엄마에게조차 싸이코패스적이었다면 가장 먼저 살해했어야 하지 않을까?

어떻게 입에 담기도 힘들 범죄로 마무리 된 케빈의 불행은 아직 진행형이라는 것이 더욱 암담하다. 책의 말미에 엄마와 일정 부분 정서적 화해를 이루는 듯 한 표현이 있지만 쉬이 풀릴 것 같지는 않다.

 

또한 케빈과 같은 아이들이 앞으로도 계속해서 양산될 것을 생각하면 몸이 떨린다. 미국만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우리의 문제일 수도 있음을 인지하게 되면 머리까지 아프다.

케빈에 대하여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 언제까지 TV뉴스를 통해 비극적인 현실을 게워낼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나의 케빈. 우리의 케빈에 대하여 이야기해야 한다.

 

우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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