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 - 독일 대통령은 왜 지금 자유를 말하는가
요아힘 가우크 지음, 권세훈 옮김 / 부엔리브로 / 2012년 8월
평점 :
품절


독일의 총리 메르켈은 알고 있었지만 독일의 대통령은 알지 못했다. 우리의 정치구도와는 다른 구조이기 때문에 실상 총리가 더 많은 권한을 가지고 있고 대통령은 상징적인 국가수반에 불과한 것이 독일이다.

그래서 그런지 이 책의 저자인 독일 대통령 ‘요아힘 가우크’라는 이름을 처음 들어봤다. 불과 반 년 전인 올 3월 요아힘 가우크는 특정 정당 소석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국민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 독일의 11대 대통령이 되었다고 한다.

 

구동독의 목사 출신 자유주의자가 극우 정당과 극좌 정당이 공존하는 치열한 독일의 정치구도 속에서 정당들의 고른 지지를 받아 대통령이 되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이 책 「자유」는 요아힘 가우크 대통령이 대통령으로 선출되기 전 연회에서 행한 연설을 토대로 작성된 것이다.

 

가우크 대통령은 구동독 시절 목사로 재임하면서도 공산주의 체제에 대한 비판을 서슴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동독의 정보기관이던 슈타지의 오랜 감시를 받았고 통일 후에는 슈타지를 해체하는 작업을 맡게 되기도 한다.

추천의 글에서 이어령 선생이 아이처럼 기대하며 쓴 것처럼 한반도의 암울한 정세지만 북한 출신 성직자가 남·북 정당 모두의 천거를 받고 국민적 지지를 얻어 한반도가 탄생시키는 새로운 통일국가의 대통령이 되는 날이 빨리 오기를 마음 나 또한 간절하지만 그것에 언제가 될지는 전혀 알 수 없다.

하지만 소련과 동유럽 또한 공고하던 철벽이 한꺼번에 와르르 무너졌던 것을 감안하면 먼 미래의 뜬구름 잡는 이야기만은 아닐 거라 희망해 본다.

만약 통일이 되어 북한 측 인사가 대통령 선거에 나왔다고 가정한다면 남쪽의 유권자들이 색안경을 끼지 않고 그를 판단할 수 있을까? 남쪽 내에서도 지역주의가 팽배하고 그것으로 먹고 사는 정치인이 수백 명인 판국에 말이다.

 

독일은 우리만큼은 아니겠지만 구서독에 속해 있던 유권자들의 마음까지 사로잡은 인물이라면, 이 책에서 구체적으로 가우크 대통령의 과거를 소개하지는 않았지만 책의 머리말에 있는 소개처럼 ‘자유’의 정신을 지속적으로 고양하고 지향하며 살아 온 인물임에는 틀림없을 듯싶다.

한국의 실정처럼 대통령이 엄청난 권력과 힘을 독점하는 구조가 아닌 것도 특정 정당 소속이 아닌 재야인사(우리 정치 실정에 맞는 표현으로 각색한다면)가 여·야의 고른 지지를 받고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중요한 이유가 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가우크 대통령이 살아온 인생의 흔적이 독일인들의 마음을 움직였음은 자명한 사실일 것이다.

흡사 이번 대선에 출마 한 모 인사를 생각게 하는 대목이다.

최초로 국민에 의해서 떠오르고 추대되어 대통령 선거의 유력한 후보가 되었으니 말이다.

 

 

 

 

자유

시민이란 시민의 권리를 가지고, 또한 그것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 (p.34)

 

시민이란 권리를 가지고 그것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이다. 당연한 말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말의 뜻을 잘 알지 못한다. 중·고등학교 시절 다다다다 외우기만 했지 정치경제 시간이나 사회문화 시간에 시민, 시민권에 대해 제대로 교육을 받은 기억이 없다. 그저 주워듣고 책을 보고 알게 된 것이 전부다.

그래서

‘주체적인 시민이니 주체적으로 판단하시오.’

얘기를 들어도 뭘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지 못한다.

‘자유’라고 하면 단순히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이다.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살고 있는 시민이라면 자유롭게 나를 표현하고 사안을 표현하고 가치와 방향에 대한 찬반을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렇지 못한 경우가 너무 많다. 파렴치한 성범죄자가 늘어나는 것을 예방코자 경찰의 불신검문을 증가하는 것이 자유민주주의 사회인가?

단순한 예이지만 그런 예가 너무 많다.

자유의 범위와 시민의 범위, 나아가서 시민권의 정확한 의미와 가치를 말해주지 않는 국가는 자유주의 국가라 말할 수 없다.

 

 

 

 

책임

“우리는 ‘무엇에서 벗어난 자유’를 체험할 수는 있었지요. 하지만 아직 ‘무엇을 향한 자유’를 체험할 수는 없던 때.” (p.48)

 

가우크 대통령은 구동독의 공산주의 체제를 경험했다. 공산주의 체제로부터의 속박에서는 벗어났지만 ‘무엇을 향한 자유’에는 닿지 못했다.

책임이라는 것의 출발은 ‘무엇을 향한 자유’라고 말한다. 동의한다.

한국의 현실도 비슷하다. 유럽은 수백 년에 걸쳐 겪어 온 현대화가 한국은 불과 60여 년 만에 압축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래서 세대 간 갈등과 부작용이 심각하게 나타나고 있다. 전쟁과 독재를 겪은 정치의식은 늘 수동적이고 피동적일 수밖에 없었고 전 국가가 하나의 공장이 되어버렸던 개발독재는 어떻게는 낙수효과를 신화처럼 믿고 삼성이 망하면 나라가 망한다는 단군신화보다 더 황당한 스토리를 양산했다.

압축된 60년의 한국 현대사는 이제 조금 ‘무엇에서 벗어난 자유’를 느껴볼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늘 피해를 입는 건 시민들이었다. 국가는 늘 주체였다. 그래서 한국전쟁과 박정희 독재를 경험한 어르신들 중 많은 분들은 아직도 국가에 대한 신뢰를 버리지 못한다.

능동적·주체적 세력이 되어 본 적이 없다. 월드컵 응원 같은 것 말고 정치적 행위 내지는 시민권을 가진 시민으로서의 권리 행사에 말이다.

가장 중요한 권리는 투표권이라 생각한다. 투표하는 세대는 정치인들이 두려워하게 되어 있다. 반대로 투표하지 않는 세대는 두려워하지 않는다. 가볍게 본다. 어차피 투표하지 않으니까 신경 쓰지 않는다.

‘무엇을 향한 자유’를 오롯이 경험하기 위해서는 시민들이 주체적으로 참여하여 바꿔야 한다. 누가 대신해 줄 수 없는 문제이다.

 

 

 

 

관용

 

“무관심은 결코 관용의 또 다른 이름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무책임을 달리 부르는 것입니다.” (p.83)

 

무개념 ‘인’들이 쏟아지고 있다. 여러 가지 사회 구조적 문제가 빚은 파행적 결과라 진단들을 한다. 자유롭게 책임 있는 사회 혹은 국가가 된다면 관용은 그 사회·국가 전체에 흐르는 시대정신이 될 것임은 자명하다.

 

[똥이 더럽다고 피하지 무섭다고 피하나!!]

이런 말은 집어치워야 한다. 내 눈 앞에 더러운 똥이 있으면 치워버려야 한다. 똥을 보고도 나 혼자 독야청청 한답시고 눈 감고 피해버리면 다른 사람들은 그 똥은 또 봐야 한다.

정치가 더럽다고? 썩은 내 난다고?

그래서 뭐 어쩌겠다는 것인가.

고개 돌리지 말고 이제는 직시해

야 한다. 무관심은 관용이 아니다. 무책임을 자위하는 비겁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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