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섬에 내가 있었네 (반양장)
김영갑 지음 / 휴먼앤북스(Human&Books) / 2004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내 나이 서른다섯.

‘나는 이제껏 살면서 무언가 죽을 만큼 열심히 해본 적이 있나?’

내 자신에게 물어봤다.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이것도 하면서 저것도 하는 두 다리 인생이 아니라 정말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위해 다른 모든 것은 포기하고 오직 그것에만 집중해 본 적이 없었다. 순간 이런저런 핑계거리가 떠오른다. ‘요즘 같은 세상에 자기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사는 사람이 몇 이나 될려구?’, ‘배부른 소리 하고 앉아 있네!! 자기만 생각해? 가족은? 가족은 생각도 안 해?’, ‘지금도 충분히 최선을 다해서 살고 있는데 괜한 자기비하 하지 말라구!!’

이 핑계 저 핑계 다 갖다 붙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최소한 나는 이 책 「그 섬에 내가 있었네」의 김영갑씨처럼은 살아보지 않았다는 것이다. 살아보지 못한 것이라고 이 짧은 순간에도 핑계를 들이대고 싶지만 못한 것이 아니라 안한 것이다.

 


“홀로 사진 찍는 것보다 즐거운 일을 아직까지 발견하지 못했다. 문제는 사진 찍는 재미에 흠뻑 빠져 사람의 도리를 다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섬에 정착한 뒤로 한 번도 고향을 다녀오지 못했다. 부모님 제사는 물론이고 묘소도 찾아보지 못했다.” (p.119)

 

제주도에 빠져 그곳에서 사진만 찍은 김영갑 작가. 말 그대로 사진만 찍었다. 가족도 가정도 친구도 돈도 명예도 인기와 인정도 모두 내팽개친 채 사진만 찍은 사진작가. 요즘 같은 시대에 웬만한 스마트폰으로도 입이 떡 벌어지는 화질의 사진을 찍을 수 있다. 누구나 사진작가만큼의 사진을 찍을 수 있다. 하지만 김영갑 작가는 달랐다. 그는 단 한 장의 사진을 위해 그의 모든 것을 내던졌다.

이것은 용기다.

김영갑 작가의 삶이 용기인 이유는 아무나 할 수 없는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오직 사진을 찍기 위해 최대한 자신의 삶을 간소하게 꾸리고 작은 잡념이라도 그의 의지를 흔들리게 할라치면 과감히 내려쳤다.

이런 삶은 아무나 살 수 없다. 수십 년 동안 자신을 외로움과 고독에 가둔 채 한 가지 일에 몰두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없다. 잠시 흉내 내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다.

 


“불안과 두려움이 계속된다. 눈을 감고 수직 절벽을 인식하지 않는다. 마음이 편안하다. 수직 절벽임을 인식하면 다시 두려운 마음이 든다.” (p.25)

“내 사진은 ‘외로움과 평화’에 대해 이야기한다.” (p.29)

 

책 속에 수록된 그의 사진을 보면 편안하지 않다. 사진 속에 그의 외로움과 그의 고독과 그의 고달픔과 그의 번뇌와 그의 처절함이 그대로 녹아 난다. 그리고 동시에 그가 한라산 중턱 중산간에서 수십 년 동안 살면서 체험한 유토피아. 이어도의 환상을 맛볼 수 있다. 그의 평화와 천진함과 순수함과 열정과 치열함과 용기와 희망이 그대로 녹아 있다.

 

“오며 가며 만나는 사람들마다 한결같이 내가 궁금한 모양이다. 제주 토박이들은 내가 언제 섬을 떠날지 궁금해 한다. 밥벌이도 안 되는 일에 매달려 아직도 섬을 안 떠났느냐고 묻는다.” (p.45)

“그것을 통해 내가 알고 있는 것들이 얼마나 형편없고 가치 없는지 깨달았다. 자신만만하게 세상과 삶에 대해 떠벌렸던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그들의 삶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나는 말수가 적어졌다.” (p.161)

 

김영갑 작가의 사진과 글에는 사람냄새로 가득하다. 뭍사람들에게 좀처럼 마음을 열지 않는 섬사람들에게 억지로 다가가 마음을 열어젖히려 하지 않았다. 그는 그들의 눈높이보다 더 아래로 자신을 낮춘다. 그냥 그 옆에서 함께 사는 것이었다. 불필요한 오해와 억울한 누명을 받기도 했지만 억지로 해명하거나 설득하려 하지 않았다. 섬사람들의 말을 듣고 싶어 했고 그들 곁에 있으려 했다. 그래서 꽃이 많이 피거나 억새로 가득하거나 한라산이 눈꽃인 때에 맞춰 제주로 날아와 사진을 찍는 그런 사진작가들과의 사진과는 차원이 다른 사진을 찍을 수 있었던 것 같다. 김영갑 작가 자신이 기다린 것이다. 억지로 끼워 맞추거나 때를 놓치지 않기 위해 우르르 몰려가는 것이 아니라 기다리는 것.

한라산 중턱 중간산 초원에 매료되어 그곳 골방에 틀어박혀 자연이 선사하는 오르가슴에 자신을 온전히 맡기는 것.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카메라의 셔터를 누르는 경험.

사실 책을 읽는 나와 같은 일반 독자가 쉽사리 이해하거나 감정 이입할 수 없는 경험인 듯 했다. 그 정도의 경지에 이르는 경험이 아직 없기 때문이다.

 


“사진 속에 표현된 분위기는 사진가의 감정(마음)을 통과한 선택된 분위기다. 사진은 사진가의 감정(마음)을 통과해 해석된 분위기이다. 농부나 어부들이 자연의 변화를 읽어내듯, 사진가들도 자연의 변화를 읽고 적절하게 대처하지 못하면 좋은 사진을 기대할 수 없다.” (p.134)

 

같은 노래라도 부르는 사람이 다르면 느껴지는 맛이 다르고 같은 피사체라도 누구의 렌즈를 통하느냐에 따라 사진이 달라지는 것처럼 사진 속에 자신을 오롯이 녹아내는 사진을 찍었다. 똑같은 제주의 풍경이고 제주의 사람들이라도 누가 그 풍경과 사람들 곁에서 사진을 찍느냐에 따라 사진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완전히 그들 속에 들어가 그 미세한 변화를 감지하고 그것에 반응하는 것. 이것 또한 정확하게 이해하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어떤 정도의 의미인지는 알 수 있을 것 같다.


 

“이제야 진짜 사진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비로소 나만의 화두를 발견했어. 느낄 수 있으나 설명될 수 없는 그 무엇을 표현할 거다.” (p.61)

“작품을 다 걸어놓고 막상 전시가 시작되면 전시장에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사진가는 사진으로 이야기하면 그만이다.” (p.182)

 

김영갑 작가는 정말 지나치다고 생각이 들 정도로 고집스런 사람이었던 것 같다. 책을 읽는 독자의 입장에서도 ‘이 사람 정말 보통 사람 아니다. 감당이 불감당이다.’ 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가까이 있는 가족과 지인들에게는 골치 아픈 사람이었을 것이다.

물론 예술가로서는 완전했을 것이다. 자신의 손을 떠나 벽에 걸린 작품을 다시는 찾지 않고 다른 작가들처럼 앞에 나가 칭찬을 받기도 하고 지적을 받기도 하는 등의 일상적인 과정을 조금의 고민도 없이 생략해 버리는 고집 센 예술가다.

하지만 그를 걱정하고 염려하는 사람들에게는 정말 대책 없는 사람이었다. 사진을 찍는다고 골짜기에 틀어박혀 불도 떼지 않고 겨울을 보내고 끼니를 거르기 일쑤고 사진은 찍는데 돈벌이 할 생각은 하지도 않고 가족, 친구, 지인 연락이라도 올라치면 전화기를 없애버리고.

하지만 책을 읽는 내내 김영갑 작가의 삶이 멋있고 숭고해 보였다. 적어도 독자로서는 그랬다. 그가 죽기 전까지 누군가에게는 목에 가득 걸린 생선뼈 같은 존재였을 수도 있고 생각만 해도 가슴아린 존재였을 수도 있겠지만 그의 글을 읽고 그의 작품을 대하는 나에게는 숭고했다. 마치 성자(聖子)와 같은 삶을 산 사람 같았다. 수도승의 단계를 뛰어넘은 성자(聖子).

그래서 책에 실린 사진을 차마 옮길 수 없었다. 내가 가진 폰카메라로 찍어서 내 컴퓨터 폴더에 복사해 이런 저런 글에 붙여넣기 할 수 있는 사진이 아니었다. 쉽게 만질 수 없는 숭고함이 있다. 결연함도 있다.

 


“사진을 찍는 것은 아침저녁으로 두세 시간 정도다. 사진은 일 초도 안 되는 시간 안에 승부를 거는 처절한 싸움이다. 한번 실수하면 그 순간은 영원히 다시 오지 않는다. 특히 삽시간의 황홀은 그렇다. 잡념에 빠지면 작업에 몰입하기 힘들다. 눈앞에 펼쳐지는 황홀감은 삽시간에 끝이 난다. 그 순간을 한번 놓치고 나면 다시 일 년을 기다려야 한다. 일 년을 기다려서 되는 거라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기다려도 되돌아오지 않는 황홀한 순간들도 있다.” (p.243)

 

황홀한 찰나의 순간. 그 순간을 잡기 위해 하루 이틀, 한 달 두 달, 일 년 이년을 기다렸다. 한 번 지나간 시간을 되돌릴 수 없듯이 언제 올지 모를 황홀한 찰나의 순간을 위해 자신을 철저한 고독과 외로움 속에 내팽개쳤다. 그 안에서 자신만의 유토피아, 이어도를 발견하고 숨 쉬듯 자연과 호흡하고 사람들과 어깨동무 했다. 모든 것을 버린 후 자신도 모르게 채워주는 신비로운 경험이 그의 사진 속에 녹아 있다. 이 세상에 발붙이고 살았지만 죽을 때까지 이 세상에 발붙이지 않았다. 세속과는 조금도 섞이지 않은 성자(聖子)의 모습이 그의 삶과 사진을 통해 발현되었다.

 

대단한 종교적 경지에 오르거나 아무나 할 수 없는 체험을 하거나 엄청난 기적을 일으키는 사람만이 성자(聖子)가 아니다. 어떤 것에 몰두한 채 존재 자체를 완전히 던져버리는 삶. 아무나 할 수 없고 흉내조차 낼 수 없는 삶을 살아간 사람이 성자(聖子)다. 많은 말을 쏟아내고 많은 글을 담아내고 많은 사진을 걸어 놓지 않아도 그의 짧은 삶과 간소한 글, 혼을 담은 사진 몇 장만으로 영혼의 카타르시스를 경험하게 하는 그 사람이 성자(聖子)다.

몇 해 전 작고하신 권정생 선생을 보는 듯 했다.

 

 

이런 사람들은 하늘도 질투를 하는 것 같다. 너무 빨리 데려가니 말이다.

 

“손가락이라도 조금 움직일라치면 또다시 통증이 찾아왔다. 어느 한 군데가 아픈 것이 아니라 전신이 못 견디게 아파왔다. 조심스럽게 모로 누워보지만 그러고 나면 숨소리가 거칠어지고 호흡이 불안정해졌다.” (p.188)

“나는 이제 더 이상 사진을 찍을 수 없다. 온몸의 기력이 소진해 카메라를 들기는커녕 손가락 힘이 없어 셔터조차 누를 수 없기 때문이다.” (p.193)

 

김영갑 작가에게서 더 이상 사진을 찍을 수 없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육신은 아직 호흡하고 있지만 이미 죽은 상태가 아니었을까? 사진을 찍기 위해, 사진만을 찍기 위해 모든 것을 내던지다 못해 자신의 존재마저 내던진 사람에게 루게릭 병은 너무 가혹했다. 모든 것을 버린 채 아무것도 없는 성자(聖子)처럼 벌거벗은 채 셔터만 누른 사람에게 손가락도 움직일 수 없는 통증은 이미 사형집행과 다름없었을 것이다.

 


하늘은 참 야속하다. 빨리 데려갔으면 싶은 사람들은 백수, 천수를 누릴 것 같은데 김영갑 작가나 권정생 선생 같은 분들은 왜 그렇게 빨리 데려가는지…….

 

이 책은 그냥 사진작가의 책이 아니다. 제주도가 좋아 자기가 스스로 제주도의 풍경이 되고 사진이 좋아 자기가 스스로 필름이 된, 그래서 그렇게 살다 하늘의 시샘으로 일찍 그곳으로 간 벌거벗은 성자(聖子)의 일기다.

그래서 편하게 읽을 수 없는 책이다. 불편하고 마음 아픈 책이다. 그의 글 한 줄도 쉽게 쓰여 있지 않고 그의 작품 하나 쉽게 실려 있지 않다.

하지만 그의 글과 사진은 읽는 사람의 영혼을 치유한다. 보기 좋고 듣기 좋고 읽기 좋은 것은 분명히 아닌데 이상하게 치유가 된다. 눈물이 흐른다. 정화(淨化) 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총통각하
배명훈 지음, 이강훈 그림 / 북하우스 / 2012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총통의 등장 자체를 뭐라 할 수 없다. 선택한 일이다. 내 생각이 잘못된 것일 수도 있다는 자아비판을 한 번도 하지 못했다. 일방적으로 우리를 까는(?) 저들의 숨은 의도를 파헤치는 데 집중했다. 팬덤으로 폄하하는 것에 분노하고 전문적 식견이 없는 아마추어리즘이라 비하하는 것에 폭발했다. 우르르 몰려가 린치를 가하고 나서도 응당 우리의 정당성을 입증하느라 바빴다. 친한 이들의 우려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들의 우려와 염려를 소인배들의 시기와 질투 정도로 치부했다. 떠도는 여론의 향배가 당연히 우리들의 손아귀 안으로 들어온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 맞다. 그때까지는 그랬다.

찌라시들의 연일 계속되는 헛소리 향연을 그 어떤 코미디 프로그램보다 재밌게 보며 즐겼다. 그래 맞다. 그때까지는 그랬다.

그런 식으로 어떻게 해서든지 최소한 지금보다는 나아질 거라 생각했다. 총통의 5년은 그만큼 괴롭고 시들했고 짜증났고 부끄러웠기 때문이었다. 최소한 지금보다는 나은 선택을 하리라 믿었다. 적어도 저 위쪽 지역에 살고 계시는 의식 있고 제 정신 박힌 분들은 제대로 된 선택을 하시리라 추호의 의심도 가지지 않았다. 내가 살고 있는 고담시티야 말해 무엇 하랴? 여긴 희망이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저 위쪽은 좀 다를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그랬다.

 


“내년이 오면 다 해결되는 건가요? 문제는 멈춰져 있는 시간이 아니라 30년간 끊임없이 사람들을 지배해 온 이 도시 전체의 권력구조 아닌가요? 지배자 하나가 잘못된 것도 아니고, 사실상 이곳 사람들 하나하나가 피해자이면서 또 가해자일 텐데, 내년을 관철시킨다고 그게 갑자기 다 사라져버리는 건 아니잖아요.” (p.269)

 

「총통각하」속에 가득 담긴 배명훈 작가의 위트에 마음 놓고 방바닥을 두드리며 웃지 못해 아쉽다. 이 작품을 쓴 것이 일정한 기간 안이 아니라 지난 5년 동안 뮤즈께서 영감을 주실 때마다 비정기적으로 썼다고 하는 것이 작품 속에 그대로 드러난다. 지난 5년 동안 우리의 시뻘건 두 눈으로 고스란히 목격했던 일들이 작품 속에 비유되어 있다.

내년이 오더라도 전혀 해결되지 않을 것 같다. 그래서 더 슬프다. 


군 생활을 하던 곳은 해안가에 위치한 독립 소초였다. 바로 해안에 인접한 곳이고 국도변에서 고개를 3개를 넘어야 닿을 수 있는 오지였다. 근처에 큰 저수지도 있어 일교차가 심한 날이라 계절이 바뀔 때에는 어김없이 며칠간 안개로 자욱한 곳이었다. 밤마다 순찰을 도느라 구름다리와 절벽을 오르내릴 때 나는 밤바다의 안개가 그렇게 무서운 것인지 처음 알게 되었다. 가파른 숨을 몰아쉬며 가만히 안개를 바라보면 마치 솜사탕 같기도 하고 따뜻한 고향집 솜이불 같기도 하고 처음 꺼내 입은 따뜻한 오리털잠바 같기도 하고 죽을 때까지라도 안겨있어도 좋을 그 여인의 품 같기도 했다. 통신병 놈 담배하나 물려주고 잠시 돌계단에 앉아 있으면 고놈의 이상야릇한 안개가 마치 춤을 추듯 희롱한다. 정신을 차려야지 하면서도 절벽 쪽으로 몸이 기울고 하는 경험이 몇 차례 있었다. 오래되고 외진 시골 마을에야 늘상 내려오는 얘기들이 그곳에도 있었다. 몇 번 초소에서 누가 죽었다더라. 마을의 처녀가 남자에게 버림받고 어디 절벽에서 죽었다더라. 비가 오고 안개가 끼면 원혼들이 군인들을 밤바다로 끌어내린다더라.

으스스한 밤바다 냄새와 야릇한 밤안개가 아직도 선명한 것 같다.

그만큼 자욱하고 이상하고 야릇하고 섬뜩하고 찝찝하고 무서운 밤안개였다

딱~! 그 밤안개 같았다. 지난 보름동안이.


배명훈의 위트 넘치는 작품에도 전혀 웃지 못하는 내가 더 걱정됐다. 안개가 여전히 자욱해 좌우분별이 되지 않는다.

그날 밤. 나는 혼자서 술을 먹었다. 마시지 않고 먹었다고 하는 것이 적확한 그때의 상황묘사일 것이다. 때려넣었다가 더 적확한가? 술기운을 빌리지 않고서는 어떻게 감당을 할 수 없었다. 밤늦게 친구들과 파티를 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할 수 없었다. 한 이틀 동안은 정말 감당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 문득 ‘내가 도대체 왜 이러나?’ 싶었다. 내가 원하던 총통후보가 총통이 되었다 치자. 내 삶이 뭐가 어떻게 더 나아지나? 생각하니 아차 싶었다. 어차피 최악이 아닌 차악을 위한 선거였고 구조적 병폐로 가득한 정치판이기에 내가 원하던 후보가 총통이 되었다 해도 여전한 구조적 문제로 골머리를 앓았을 것이 뻔했다. 그런데 내가 골머리를 싸안고 혼자서 시름시름 앓아봐야 나아지는 것 하나 없다는 생각이 불현 듯 든 것이었다. 그리고서 아내한테나 잘하고 내 꼬라지나 잘 살피자 싶었다. 그랬더니 마음이 그렇게 편안해 질 수가 없었다.

물론, 여전한 궁금증과 아쉬움과 의혹과 걱정은 있다. 하지만 더 솔직히 말하자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문제는 멈춰져 있는 시간이 아니라 30년간 끊임없이 사람들을 지배해 온 이 도시 전체의 권력구조 아닌가요?”

 


앞으로 또 5년 동안 멈춰져 있을 지도 모르는 시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수십 년간 끊임없이 사람들을 지배해 온 이 국가 전체의 권력구조가 중요한 것이다.

한쪽에서는 어서 멘붕을 털고 일어나자. 가만히 앉아 있어봐야 무엇하나? 힘을 합치자. 뭉치자. 대안언론을 만들자. 5년을 길게 싸울 힘을 만들자. 와라. 가자.

 

 

“한 5년만 잘래?” (p.15)

 

하지만 솔직히 정말 솔직히 나는 자고 싶다. 아내의 동면실험에 기꺼이 참여한 남편이 되고 싶다. 이것저것 쳐다보지 않아도 되니까 좋을 것 같다. 내 성격이 군데군데 모가 나 있어 그냥 5년을 참으며 보고도 못 본 척, 듣고도 못 들은 척, 알고도 모른 척하며 살 수 없을 것만 같다. 차라리 5년만 잘 수 있다면 좋겠다. 물론, 선거가 끝난 바로 다음 날로.


“저기, 5년 지난 거 맞아요?”

“맞잖아. 달력 봐.”

“근데 총통이 왜 아직도 저…….”

(중략)

“왜요? 개헌은 그렇다 치고, 사람들이 왜 또 저 사람을 뽑았어요?”

“그러게. 왜 또 뽑혔을까.”

“경제성장률이 10프로가 넘기라도 했어요?”

“10프로는, 개뿔.” (p.17)

 

30년이 지나도 총통이 바뀌지 않는다면!!!!! 그것보다 더 흉측하고 절망적인 악몽이 있을 수 있을까?? 그러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나? 30년 후에는 더 발전된 동면기술이 등장해 있을 테니 100년은 더 동면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혹시가 아니라 그거지 뭐. 독일이 아니라 미국에서 MBA를 마치고 온 거지. 내가 참 어이가 없어서. 우리는 다 선배가 독일 가서 사민당사 공부하고 오는 줄 알았거든. MBA가 뭐야, MBA가. 게다가 컨설팅 회사는 또 뭐람.” (p.144)

 

새로운 총통을 옹립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사람들은 기성세대다. 스마트폰 SNS로 무장된 젊은 세대를 완전히 KO시켜 버렸다. 그것도 마지막 10라운드 경기 시간 5초를 남기고 말이다. 1라운드에서 9라운드까지 내내 젊은 세대에게 밀렸다. 장내 아나운서와 중계 캐스터들은 모두 기성세대를 동정했다. 이제는 한물갔다. 이제 드디어 세대교체가 일어났다. 아직 경기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난리법석을 떨었다. 거의 그로기 상태에 빠져 10라운드에 들어갔다. 여전히 저돌적으로 들어오는 젊은 세대에게 마지막 10라운드에서도 난타당했다. 공이 울리기 5초 전 마지막까지 숨기고 있던 모든 힘을 모아 한 방의 어퍼컷을 날렸다.

그리고 경기는 끝났다.

그들을 탓할 수 없다. 무슨 수를 써도 바뀌지 않는 것이 사람이기도 하지만 기똥차게 갑자기 180도 바뀔 수 있는 것도 사람이기 때문이다.

대학 시절 운동권 내 프랑스 혁명의 여신과도 같았던 그 여자 선배가 독일에 가지 않고 미국에 가서 MBA를 하고 컨설팅 회사에 다니고 아들내미 공부에 혈안이 되어 있는 아줌마로 변한 것은 아니, 변한 것이 아니라 그런 아줌마가 된 것은 탓할 수 없다. 누가 누굴 탓할 수 있나?

80년의 봄, 광주, 87항쟁을 경험한 그들이라고 다를 거라 생각한 나의 거대한 착각을 탓할 수밖에 없다. 그들은 그래도 뭔가 다를 거라 믿은 내 어리석음을 탓할 수밖에 없다.

앞으로 5년 동안 마주하게 될 일들이 지난 총통의 5년 보다 나을지 아닐지 가늠할 수 없다. 무수한 말을 쏟아낼 수 있겠지만 내 입을 틀어막는다.

 

“각하. 양랑주에는 항구가 없지 않습니까?”

“그대가 만들라.”

“하지만 각하, 양랑주에는 해안선이 없습니다.”

“그것도 만들라.”

“예?” (p.162)

 


까라면 까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야기를 만드는 기계
김진송 지음 / 난다 / 2012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 두꺼비

 

두껍아, 두껍아 헌 집 줄게 새 집 다오.

두껍아, 두껍아 헌 집 줄게 새 집 다오.

 

국내 최대 두꺼비 산란지인 망월지는 대구시 수성구 욱수동에 위치해 있다. 매년 2월 두꺼비의 서식지인 인근 욱수골에서 산란지인 망월지로 이동하는 두꺼비들의 장관부터 5월에서 6월 사이 부화된 새끼 두꺼비 수백만 마리가 서식지인 욱수골로 이동하는 장관이 펼쳐지는 곳이다. 이곳은 그 보존가치를 인정받아 ‘꼭 지켜야 할 자연유산’으로 선정되고 해당 지자체가 두꺼비들의 이동이 원활하고 안전하게 하기 위해 펜스를 설치하기도 하며 망월지에 서식하는 외래어종 블루길과 배스 잡기 대회를 펼치기도 한다. 도심 속에 국내 최대 두꺼비 산란지가 있다는 것 자체가 이야깃거리다.

 

두껍아, 두껍아 헌 집 줄게 새 집 다오.

두껍아, 두껍아 헌 집 줄게 새 집 다오.

 

어린 시절 흙이 있는 놀이터나 모래사장에서 친구들 혹은 가족들과 함께 불렀던 노래다. 누구나 한 번은 불러봤음 직 한 노래다. 모래 속에 한 손을 집어넣고 그 위로 흙은 보듬어 덮으며 부르는 노래. 그런데 왜 두꺼비에게 헌 집을 줄 테니 새 집을 달라고 하며 우악스러운 노래를 부르는 것일까?

해당 두꺼비는 그저 제 어미의 어미가, 그 어미의 어미가, 그 그 어미의 어미가, 그 그 그 어미의 어미가 그랬던 것처럼 흙길을, 신작로를, 아스팔트를 건너 알을 낳고 그렇게 어미가 한 대로 다시 산으로 올라가는 일을 했을 뿐인데. 그들은 그냥 거기에 있었을 뿐이다.

두꺼비에게는 애초에 집이라는 개념조차 없었을 텐데 말이다. 웃기는 일이다. 나쓰메 소세키의 고양이가 시크하게 내뱉는 인간에 대한 말과 이 책에 등장하는 개와 의자가 나누던 대화와 같은 인식 정도가 두꺼비들에게도 있지 않을까 싶다. 도대체 누가 누구에게 헌 집, 새 집을 논할 자격이 있는지 말이다.

 

 

 

2. 이야기

 

“작년에 아주 작은 몸으로 겨우 망월지를 헤엄쳐 나와 추적추적 비가 오는 밤 친구들과 함께 엄마가 가르쳐 주었던 옆 집 아줌마와 아저씨가 이야기 해주었던 그곳으로 올라갔었다. 앞도 보이지 않고 낯선 공기와 무시로 들리는 벌레와 곤충이 내는 소리들은 무서웠다. 하지만 끝이 보이지 않는 많은 친구들이 있어 안심이 된다. 희미하게 코끝으로 전해오는 나무와 돌, 계곡물의 냄새가 점점 가까워오기 때문이다. 그래. 엄마가 들려주던 그 이야기 그대로다. 그 냄새가 맞아. 우리는 그렇게 한 걸음 한 걸음 긴 이야기 속으로 걸어들어 갔다.”

                                                                                                              「작은 두꺼비 이야기」

 

어디엔가 부유하고 있는 생각의 입자를 잡아내고 싶다면 우리는 글을 쓰든 그림을 그리든 아니면 이야기를 만드는 기계를 작동시키든 해야 할 것이다.” (p.25)

 

붐비는 스타벅스 안에서 1시간만 앉아 있어 보라. 애써 관심 없는 척 이어폰을 꽂고 있어도 이어폰 패드와 귀 구멍 사이로 들어오는 저 수많은 소리들. 지난여름 어렵게 얻은 월차를 방구석에서 썩히기 싫어 책과 노트북을 들고 스타벅스로 갔었다. 시원한 에어컨 바람과 아무리 사용해도 뭐라 하지 않는 콘센트가 즐비한 그곳으로. 그러나 37도의 폭염보다 더 무서운 아줌마들의 뒷담화 파티가 벌어지고 있었으니.

일부러 들으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다. 기껏해야 1미터 남짓한 옆 테이블에 앉은 내가 잘못이었다. 시월드, 남편, 자식, 집값, 핸드백, 홈쇼핑, 누구누구집 시월드, 누구누구집 남편, 누구누구집 자식, 누구누구집 집값, 누구누구 핸드백……. 아~ 도저히 그 끝을 가늠할 수 없는 아줌뫼비우스의 뒷담화띠여!!!!

 

이야기는 부유해 다닌다. 하지만 이야기의 주도권을 쥐고 있는 사람은 따로 있기 마련이다. 몇 명이 모여 이야기를 나눈다 해도 상관없이 그 곳에는 이야기의 주도권을 쥔 사람이 분명이 있다. 부유해 다니는 생각의 입자, 이야깃거리를 센스 있게 잡아 채 내 것으로 소화해 풀어내는 것은 능력이다. 이야기를 만드는 것은 사람이다.

스타벅스가 떠나갈 듯, 볼륨을 아무리 높여도 내 이어폰 사이로 흘러들어오는 고주파의 아줌마 목소리들은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 끝도 없는.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것은 사람일까? 기계일까?

 

“이야기의 시간을 이미지의 시간으로 바꾸는 일, 그게 ‘이야기를 만드는 기계’를 만드는 일이다.” (p.11)

 

망월지에서 욱수골로의 여정은 죽음의 여정이었다. 흙길이 신작로가 되고 신작로가 아스팔트가 되고 냄새나고 미끄러운 아스팔트에는 욱수골 바위덩이 보다 훨씬 큰 괴물 같은 것들도 요란한 빛을 내뿜고 굉음을 내지르며 질주한다. 많이들 죽었다. 언제부터인가 이상한 것들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상한 망같은 것들을 만들어 그곳으로만 갈 수 있게 하기도 하고 낚시꾼들을 불러 모아 우리를 한 입에 잡아먹는 커다란 물고기를 잡아가기도 했다.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사진을 찍기도 하고 그 사진을 찍는 인간의 새끼로 보이는 인간은 밝게 웃으며 안녕 인사하기도 했다. 무서웠다.

우리는 그저 엄마가 전해주는 이야기대로 그렇게 했을 뿐이다. 나 또한 그렇게 할 것이고 내 새끼 또한 자신의 새끼에게 그렇게 해 줄 것이다.

 

이야기를 만드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두꺼비다.

 

 

 

3. 기계

 

“논리적이고 수학적인 계산은 감으로 바꿔버리고, 감각적 섬세함은 물리적 기능으로 대체하며, 상상의 자유로움을 경험의 차원으로 끌어내리려는 몸에 밴 버릇은 도무지 벗어버릴 수가 없었다.” (p.203)

 


나는 기계치다. 아니! 기계와 친하지 않다. 아니! 기계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아니! 기계는 나를 싫어한다.

컴팩 프리사리오 시리즈 구형 노트북을 9년 째 쓰고 있다. 아이폰 5를 사고, 아이맥을 사고, 미니 아이패드를 샀다고 자랑하는 친구놈 면전에서 “그 돈이면 내가 사고 싶은 책을 몇 권을 살 수 있으며.. 블라블라...”

그렇다고 집안에서 풀려진 나사를 조이거나 철마다 커튼을 바꿔 달거나 전등과 형광등을 교체한다 거나 자동차 보닛을 열어 엔진오일 양을 체크하거나 워셔액 보충쯤은 거뜬히 해낸다.

하지만 저자가 사용하는 장비로 추정되는 위 사진을 보면서 나는 ‘이쁘다’라는 생각보다 ‘무섭다’라는 생각이 앞섰다. 그렇다. 나는 기계와 친하지 않고 그를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다. 고로 기계가 나를 좋아해 줄 리도 만무하다.

 

 

이 책 「이야기를 만드는 기계」는 꽤 흥미로운 책이었다. 미술평론가이자 목수이도 하고 국문학을 전공한 그의 글은 깊었다. 중간 중간 등장하는 그의 작업실로 보이는 곳의 사진은 노출을 최소화 한 듯 밝음보다는 어두움에 가까웠다. 그래서 그의 글이 더 깊어 보였다.

문명의 이기(利器)의 첨단을 살고 있는 이 시대에 이야기조차 기계가 대신한다고 생각하면 개인적으로 나는 슬프다. 스타벅스의 아줌마들과 망월지의 두꺼비들이 만들어내는 이야기보다 더 편리하고 인간에게, 그리고 자연에게 이로울 수 있는 문명은 과연 이기(利器)일까? 이야기조차 아줌마와 두꺼비를 대신하는 기계는 이기(利器)가 아니라 이기(利己)다.

저자는 아줌마와 두꺼비와 기계를 잇는다. 삼각 다리를 놓는 작업 과정과 결과물을 담담하게 책에 담았다. 단순히 나무만 다루는 사람이 아니라 단순히 작품 평론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단순히 책보고 글만 쓰는 사람이 아니라 세 가지를 할 줄 아는 사람이라 작품도, 글도, 사진도 깊다.

 


[짐을 잔뜩 진 노새]와 [하늘에 갇힌 새]라는 작품은 제목과 작품의 사진만으로 수백 페이지 책을 갈무리하고도 남는다. 문명의 이기와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과 그 사람들과 공존해야 하는 두꺼비들 사이를 잇는다. 저자의 깊은 노력이 마음에 와 닿는다.

 

해야 할 이야기가 있고 해야만 하는 이야기가 있다. 하루를 가만히 돌이켜 보면 ‘왜 그때 그 말을 했을까’ 후회할 때가 있다. 그렇다. 사람은 안 해도 되는 이야기를 더 많이 하는 것 같다. 해야만 하는 이야기. 불편한 이야기. 사람들이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는 중요한 이야기를 무시하지 않는 것이 작가의 삶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직업 작가는 물론이고 책을 읽고 그 책에 대한 서평을 쓰는 사람들도 작가다. 이야기를 창조해내는 사람은 작가다. 작가는 시대를 부유하는 이야기를 잡아내야 하기 때문에 시대의 그늘과 생채기에서 눈을 돌리면 안 된다.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는 것도 즐거울 수 있지만 기타를 만드는 일도 즐거울 수 있습니다……. 단지, 딱 일한 만큼의 한 달 치 월급이 꼬박꼬박 나올 수 있다면 말입니다. 사장이 돈 떼먹고 도망가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멀쩡한 회사를 닫아걸고 저 멀리 도망쳐 새 공장을 짓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p.217)

 

[기타 만드는 사람들]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콜트 노동자인 것 같았다. 그들이 열악하고 불합리한 환경에서 만들어 내는 기타를 연주하는 사람들만 즐겁다면 세상은, 문명의 이기는 너무 이기적이다. 밥벌이를 넘어서는 즐거움이 동반될 수 있다면 기타 만드는 이야기는 그들의 자식과 자식들에게 이어져 내려갈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이 만들어 낸 제도와 법률은 사람을 이롭게 해야 한다. 문명도 이롭게 해야 하고 두꺼비들에게도 이로워야 한다.

 

 

 

4.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

 

두껍아, 두껍아 헌 집 줄게 새 집 다오.

두껍아, 두껍아 헌 집 줄게 새 집 다오.

 

결론은 사람이다. 두꺼비에게 새 집을 달라는 우악스런 요구를 하는 것도 사람이다. 첨단의 첨단을 넘어 도저히 그 끝을 알 수 없는 문명을 창조해 내는 것도 사람이다. 기계를 만들어 내는 것도 사람이다.

사람과 두꺼비와 기계 사이의 단절을 막고자 다리를 이으려고 하는 것도 사람이다.

결국은 사람이다.

두꺼비와 스타벅스 아줌마와 기계와 나를 이어주는 것은 사람이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울까?

사람의 몫이다.

 

「이야기를 만드는 기계」또한 사람이 만들어 낸 것이다.

사람의 몫이다.

이제 우악스런 손짓은 주머니에 집어 넣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모두가 기적 같은 일 - 바닷가 새 터를 만나고 사람의 마음으로 집을 짓고 자연과 어울려 살아가는
송성영 지음 / 오마이북 / 2012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 「모두가 기적 같은 일」의 저자 송성영씨의 글을 처음 보게 된 곳은 인터넷 매체 오마이뉴스였다. 글로도 그대로 전해지는 푸근한 충청도 사투리의 아저씨의 마음이 좋았다. 한 번씩 그의 기사를 봤지만 책이 출간된 소식은 모르고 있었다.

 

 

“생면부지의 낯선 땅, 고흥으로 이사 오기 위해 준비할 무렵 사람들이 걱정스런 눈빛으로 그랬습니다. 거기 가서 뭘 해 먹고살 거냐고요. 저 자신에게도 물었습니다. ‘뭘 하고 살지?’ 늘 그래왔듯이 답은 빤했습니다. ‘살다 보면 어떻게 되겠지. 하물며 네 발 달린 짐승도, 하늘을 나는 새도 모두 제 먹고살 구멍이 있는데 살다 보면 살아지겠지.’” (p.361)

 

좋은 직장을 그만두고 산골로 들어가 움막 같은 집에서 네 식구가 살았다. 있는 대로 바람이 들고 비가 새고, 벌레와 쥐와 살다가 쭉쭉 뻗는 고속도로를 건설한다고 쫓겨났다. 저자와 그의 아내는 전국을 돌아다니며 새로운 터전을 찾았다. 어떤 사람들처럼 멋진 외제차를 타고 썬글라스를 끼고 땅을 보러 다니는 것이 아니라 정말 살 집이 없어서 구하러 다녔다. 더 심각한 것은 돈도 없는 사람들이 말이다.

이 책은 제목대로 기적 같은 일로 가득하다. 어떻게 어떻게 전라도 땅 끝 고흥 바닷가에서 부부가 원하던 땅을 찾고 어떻게 어떻게 알음알음하여 목수를 구하고 말도 안 되는 인건비로 집을 짓기 시작했다. 또 어떻게 어떻게 말도 안 되는 가격의 자재를 구하고 집을 완성해 갔다. 집을 짓고 또 작은 건물을 만들어 아이들을 위한 도서관을 만들었다. 도서관을 채울 책들도 어떻게 어떻게 기적 같은 사람들의 관심과 손길로 넘칠 정도로 채워졌다.

 

 

“그렇게 우리 부부는 헌 집을 팔고 새집을 완성해가고 있었지만, 제 마음은 갈수록 복잡하기만 했습니다. 찝찝했습니다. 그것이 딱히 무엇인지는 분명치 않았지만, 우리 가족이 그동안 소박하게 살아오며 가슴속에 간직했던 소중한 것들을 하나하나 도려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p.176)

 

분에 넘치는 것이 아닐까. 과한 것은 아닐까. 생각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겸손이 아닐까 싶다. 아무리 많이 가져도 ‘어떻게 더 가질 것은 없을까?’ 굶주린 승냥이 마냥 두리번거리는 것이 사람이기 때문이다. 두 부부의 소박하고 겸손한 삶에 대한 자세가 오히려 채움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부부가 애초에 산골로 들어오며 가졌던 작고 간소한 삶에 대한 이상은 조금 망가졌지만 오히려 채워진 것으로 더 많은 사람들에게 베풀 수 있다는 것은 삶의 기적이다. 그렇다. 그것이 삶의 기적이다.

 

 

“부조리한 세상을 등지고 시골에서 혼자서만 잘 살면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과 부대껴 살면서 부조리한 세상을 바꿔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p.224)

 

산골에만 틀어박혀 글 질이나 하는 그를 두고 어떤 사람들은 투쟁에 불타 비판하기도 했다. 혼자 숨어서 고고한 척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저자의 아들 친구가 가출해 저자의 집에서 며칠을 머물게 되는데 그 아이와의 일화를 가만히 들어보면 더 중요한 것을 발견해 낼 수 있다.

 

 

“녀석은 집을 나서며 몇 번이고 돌아서서 인사를 했습니다. 저는 저만치 떠나는 녀석에게 고맙다고 말하지 못한 것을 후회했습니다. 절 찾아와줘서, 제게 친구처럼 속마음을 털어놔줘서 고맙다고 말하지 못했습니다.” (p.319)

 

‘요즘 아이들은 다 그래~!’, ‘우리 때는 안 저랬는데~!’라는 몇 마디 말로 아이들을 좁고 차가운 창살 안에 가두는 것이 어른들이다. 이 시대이다. 당연히 내 말을 주의 깊게 듣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고 당연히 버릇이 없을 것이라 생각하고 당연히 고쳐지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아이들의 말을 듣지 않는다. 더 솔직히 말해 볼까? 어떻게 아이들에게 다가가야 할지조차 모르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시대의 고매한 정치적 문제와 사회적 문제에 대해서는 침이 튀도록 외쳐대지만 정작 자기 집 자식에게는 여전히 영어 학원을 강요하고 좋은 대학을 주입한다. 87년과 노무현을 겪은 50대가 이번 대선에서 보여 준 행태가 바로 그것이다.

차라리 저자처럼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아들 친구 녀석과 친구가 되어주는 것이 진보다. 개혁이다.

도시에서 좋은 말을 쏟아내고 휘황찬란한 글을 써 갈겨도 아들 친구놈 하나와 친구는커녕 대화조차 제대로 할 수 없다면 그가 쌓은 것은 모래성에 불과하다.

그런 면에서 저자는 가장 진보적이다. 개혁적이다. 소통의 달인이다.

책에서 소개된 땅을 사고 집을 짓고 도서관을 짓는 과정이 모두 기적 같은 일이었지만 나는 저자가 가출한 아들 친구와 세대를 뛰어넘는 우정을 나누는 장면이 가장 기적이라고 생각한다. 아무것도 아닌 일 같지만 가장 어렵고 가장 중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앞으로 세대 간 갈등이 가장 첨예한 사회적 문제로 대두될 것이라 생각하는 내게 있어서 저자의 기적은 그대로 닮고 싶은 기적이다.

나는 적어도 저렇지는 않을 거야~. 누구나 자신한다. 그런데 차차 기성세대가 되면서 사고는 경직되고 판단은 유보되며 가치는 실종된다. 지난 현대사가 그랬다. 아무리 투쟁적이고 호전적인 운동가라도 막상 기성세대가 되면 그가 욕하던 세대가 하던 것대로 따라 산다. 그들을 욕할 생각은 없다.

다만 나 또한 동일한 세대가 되지 않기를 기도할 뿐이다.

끊임없이 나를 단련하고 성찰하며 가열차게 삶을 진단해야 한다.

그러면 어느 순간 내 삶에도 기적 같은 일들이 일어날거라 확신한다.

 

 

“세상살이는 하나로 이어져 있습니다. 한쪽에서 필요 이상으로 누리면 다른 한쪽에서는 그만큼 고통당하게 됩니다.” (p.32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장강의 뒷물결 - 시진핑의 7인방, 중국의 권력이동
고진갑.유광종 지음 / 책밭(늘품플러스) / 2012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가깝고도 먼 나라는 늘 일본이었다. 학교에서도 그렇게 배웠고 어른들도 그렇게 말했었다. 언제부터인가 중국도 그런 것 같다. 이제는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초강대국이 되었고 주변국의 눈치를 보지 않고 역사문제를 거론할 수 있는 뻔뻔함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그런 중국에 대해서 정말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하는 사람들은 바로 한국 사람일 것이다. 그저 지저분하고 시간 약속 안 지키고 뭐든지 떼거지로 몰려다니는 등의 이미지만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몇 년 전 올림픽도 열리고 이제는 수많은 관광객이 중국 여행을 가기도 하지만 중국에 대해서는 모르는 것 투성이다.

경제력은 이미 최소한 미국과 어깨를 견주거나 미국을 뛰어넘는 규모이고 군사력 또한 엄청나다. 전 세계 어디를 가도 중국인이 없는 나라가 없고 항공우주산업 또한 비약적인 발전을 거뒀다.

한국 사람들 미국 무지하게 좋아한다. 영어도 무지하게 좋아한다. 그런데 중국은 좋아하지 않는다. 별로 관심도 없다. 많은 전문가들이 멀지 않는 시기에 중국이 미국을 추월할 것이라 예견하지만 한국 사람들은 미국 신화에 빠져 귀담아 듣지 않는 것 같다. 미국에서는 중국어를 배우는 것이 열풍처럼 일어나고 있다고 하는데 시내에는 영어학원만 주구장창 생겨나고 있다.

중국에 대해서 모르는 것 투성이지만 가장 알려지지 않는 것은 바로 정치권력이다.

공산당 일당전제가 여전히 이어져 오고 있는 나라라는 것도 이 책을 읽으며 알게 되었다. 개혁·개방 정책 이후 급속도로 자본주의화 되어 비약적인 성장을 거둔 것만 표면적으로 알고 있었을 뿐 13억 중국을 움직이고 사실상 다스리는 것은 여전히 중국공산당이었다.

 

 

“중국 정계에서 엘리트 코스를 밟는 일은 정말 어렵다. 2012년 현재 8200만 명에 달하는 수많은 공산당원 가운데 30명 남짓한 공산당 정치국에 오르는 일, 아울러 다시 그 정점을 형성하는 7인 멤버의 정치국 상무위원 자리에 오르는 것은 타고난 운과 능력이 뒷받침해주지 않으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 봐야 한다.” (p.235)

 

후진타오 주석, 원자바오 총리. 사실 주석과 총리도 구분해 내지 못했다. 8200만 명에 달하는 공산당원이 뽑고 뽑은 7명의 정치국 상무위원. 이런 것도 전혀 알지 못했다. 사실 상 중국 공산당 권력 내부에서 사람을 심고 사람을 키우고 그 사람을 상무위원 자리에 앉히는 막후의 권력 다툼과 자리싸움이 얼마나 치열한 것인지도 알지 못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 「장강의 뒷물결」은 읽는 재미가 쏠쏠했다.

전혀 알지 못하던 소재고 흥미로운 소재였기 때문이다.

이 책은 7명의 정치국 상무위원에 대한 짤막한 소개글이라 봐도 무방하다. 7명 중에서도 1인자인 시진핑부터 마지막 7번째 왕양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성장 배경과 정치적 과정을 소개하고 있다.

 

 

“그들의 권력 성분은 상하이방이나 공청단, 태자당 등으로 갈리게 마련이다.” (p.19)

 

일당전제 정치구조를 가지고 있는 중국은 여느 나라들처럼 정당정치가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 오히려 파벌 간 힘의 균형을 유지하고 적절한 자리분배와 나눠먹기로 13억 중국을 이끌어가고 있었다. 상하이를 중심으로 한 파벌인 상하이방과 고위 관직 출신이거나 원로의 자제인 공청단과 태자당, 이 세 파벌이 중국을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이 부분이 꽤 흥미로웠다. 아무리 현대 정당구조의 정치형태가 한계가 많고 문제가 많다고 하더라도 그것대로 문제를 보완하고 발전하는 것이 민주주의 정착과 성숙에 가장 유용한 길이고 방법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13억 명 전체 인구 중에서 8200만 명, 그 중에서 300명, 그 중에서 30명, 그 중에서 7명이 전체를 좌지우지 한다니 놀랍기도 하고 이해되지 않기도 했다.

중요한 것은 이 구조는 절대로 뒤집어 지거나 엎어지지 않는다는 데 있다. 18차 전인대(전국인민대표회의)에서 1인자로 내정된 시진핑은 이미 17차 전인대에서 7인의 상무위원에 뽑혔던 전력이 있었다. 공산당 일당전제 구조에서는 결국 어떤 줄을 타느냐가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다.

전 차의 전인대에서 주석과 총리, 7인의 상무위원으로 뽑힌 사람들은 다음 차 전인대에서 자신의 사람들을 내정하고 자리에 끼워 맞추는 것이다. 앞서 말한 상하이방, 공청단, 태자당 각 라인에서 몇 명의 지도위원을 배출하는가가 가장 중요한 관건인 것이다.

효율성으로 따지자면 이런 정치구조가 최고일 것 같았다. 큰 선거나 잡음 따위는 존재할 여력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권력구조가 얼마나 폐쇄적이고 이기적일 것인지는 쉽게 유추해 볼 수 있다.

각 파벌의 지도자들은 차기 공산당 지도자를 이미 내정해 트레이닝을 시키는 것이다. 지방 성의 부서기, 서기를 시키거나 시의 부서기 서기를 두루 시키며 자질을 테스트 하고 능력을 점검해 보는 것이다. 이 책에 소개된 7명의 상무위원 모두 그런 코스를 통과한 사람들이다. 물론, 다른 수많은 공산당 관리들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고속 승진을 한 것은 다르지만 말단 관리에서부터 한 성의 최고자리에까지 두루 경험과 자질을 쌓게 했다.

지진과 홍수, SARS와 같은 재난과 재해에 대한 판단과 대책, 맡고 있는 도시와 성 안에서 일어나는 온갖 비리와 불법에 대한 대책을 어떻게 마련하고 어떻게 그러한 시련을 극복하는지 수십 년 동안 지켜보는 것이다.

이런 부분은 오히려 다른 나라의 정치구조보다 진일보한 면이라 생각했다. 법조계에 있다가 정치권의 권유로 선거에 나와 덜컥 국회의원이 되거나 지역 유지 행세하다가 국회의원이 되어 입법기관이 되는 한국의 국회의원들보다는 훨씬 위기에 대한 대처나 집행력, 행정력 등은 뛰어날 것으로 보인다. 그것이 많은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13억 중국을 지금까지 이끌어오고 이제는 미국과 나란히 힘을 겨루는 중국을 만들어 낸 원동력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중국 권력자들에게 그가 쥔 권력만큼의 재산은 늘 따라다니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 점은 일종의 관행으로 봐도 좋을 정도다. 누구도 제 권력의 두께 만큼에 해당하는 재력은 지니는 게 보통이다.” (p.230)

 

물론, 문제가 많다. 일당전제의 구조가 가질 수 있는 가장 큰 문제. 비리와 불법. 현재 중국이 가진 가장 시급한 문제인 지역 불균형과 빈부격차와 비교해도 모자라지 않을 비리와 불법. 한 번씩 중국발 뉴스를 보면 비리와 불법을 저지른 공무원을 사형하기도 하는 극한의 처벌을 가하기도 하는데 왜 여전히 비리와 불법이 해소되지 않는지 모르겠다.

중국에서 오랜 기간 특파원을 한 중국 전문가인 두 저자도 중국 권력자가 가지는 어느 정도의 비리와 불법은 눈감는 것이 중국 내 관행이라고 한다. 그런데 작은 것부터 눈을 감아주면 종국에는 아무리 큰 것이라도 눈을 감아줄 수밖에 없는데 외국 언론인들조차 저렇게 생각할 정도라면 실제 중국 정치권력 내부에서는 더 모호하고 성긴 기준을 자신들에게 적용하고 있을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어느 나라에나 정치인들은 환영받지 못하고 사랑받지 못한다. 나와 우리들의 요구를 대신해 잘 해줄 것이라 기대하고 뽑았는데 늘 그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한국은 물론이고 미국도 마찬가지 일 것이라 본다. 이제 중국이 단순히 크기와 양이 아니라 의식과 정치수준 또한 미국에 이르기 위해서는 정치권력 내부의 비리와 불법에 대한 기준이 더 높아지고 촘촘해 져야 할 것이라 생각한다.

 

 

“시진핑 그는 통합적 리더에 해당한다. 한 분야에서의 두드러진 특기가 돋보이는 사람이 아니라 남과 기꺼이 어울려서 무엇인가 새로운 에너지를 창출할 수 있는 ‘여백’의 힘을 지닌 인물로 보인다.” (p.5)

“요란한 업적보다는 그가 얼마나 청렴하게 생활하며 공정하게 일을 처리했는지에 관한 일화가 전해진다. 닝더에서는 당 서기로 있으면서 60만 위안의 거액 뇌물을 돌려줬다는 일화가 있고” (p.74)

 

무엇보다 앞으로 중국을 이끌어 갈 시진핑에 대한 관심이 많은 것 같다. 한국에서도 그에 대한 책이 여러 권 출간되기도 했다. 다른 나라들 같이 매스컴에 충분히 노출된 후 선거를 통해 당선이 되는 구조가 아니기 때문에 더 그런 것 같다. 오랜 시간 장막에 가려져 있다가 갑자기 짠~~!! 하고 나타나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책에서 저자들은 시진핑은 통합적 리더라고 역설한다. 소통에 능하고 추진력이 강하지만 배려할 줄 아는 지도자라고도 한다. 또한 비리와 불법에 민감해 청렴의 기준을 충족하는 지도자라고도 한다.

아직 본격적으로 시진핑 시대가 열린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런 분석과 평가가 단순히 예상에 머물 것인지, 들어맞는 예언이 될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올 3월 이후에야 조금씩 그 실체가 드러날 것이다.

 

이제는 더 알아야만 하는 중국의 구중궁궐 얘기를 조금이나마 들을 수 있어서 재미있었다.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던 것이었다. 새로운 사실도 많이 알게 되었다. 이제는 정말 더 알아야만 한다. 예전 중국의 모습만 생각해서 무시하고 돈벌이로만 생각하다가는 정말 큰 코 다칠 것 같다. 지난 5년 간 중국과의 관계가 엉망이었는데 새로 들어설 정부 또한 그런 기조를 이어갈 것으로 보인다. 된 통 당하기 전에 준비하고 분석하고 알아가기를 바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