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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통각하
배명훈 지음, 이강훈 그림 / 북하우스 / 2012년 10월
평점 :
총통의 등장 자체를 뭐라 할 수 없다. 선택한 일이다. 내 생각이 잘못된 것일 수도 있다는 자아비판을 한 번도 하지 못했다. 일방적으로 우리를 까는(?) 저들의 숨은 의도를 파헤치는 데 집중했다. 팬덤으로 폄하하는 것에 분노하고 전문적 식견이 없는 아마추어리즘이라 비하하는 것에 폭발했다. 우르르 몰려가 린치를 가하고 나서도 응당 우리의 정당성을 입증하느라 바빴다. 친한 이들의 우려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들의 우려와 염려를 소인배들의 시기와 질투 정도로 치부했다. 떠도는 여론의 향배가 당연히 우리들의 손아귀 안으로 들어온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 맞다. 그때까지는 그랬다.
찌라시들의 연일 계속되는 헛소리 향연을 그 어떤 코미디 프로그램보다 재밌게 보며 즐겼다. 그래 맞다. 그때까지는 그랬다.
그런 식으로 어떻게 해서든지 최소한 지금보다는 나아질 거라 생각했다. 총통의 5년은 그만큼 괴롭고 시들했고 짜증났고 부끄러웠기 때문이었다. 최소한 지금보다는 나은 선택을 하리라 믿었다. 적어도 저 위쪽 지역에 살고 계시는 의식 있고 제 정신 박힌 분들은 제대로 된 선택을 하시리라 추호의 의심도 가지지 않았다. 내가 살고 있는 고담시티야 말해 무엇 하랴? 여긴 희망이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저 위쪽은 좀 다를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그랬다.
“내년이 오면 다 해결되는 건가요? 문제는 멈춰져 있는 시간이 아니라 30년간 끊임없이 사람들을 지배해 온 이 도시 전체의 권력구조 아닌가요? 지배자 하나가 잘못된 것도 아니고, 사실상 이곳 사람들 하나하나가 피해자이면서 또 가해자일 텐데, 내년을 관철시킨다고 그게 갑자기 다 사라져버리는 건 아니잖아요.” (p.269)
「총통각하」속에 가득 담긴 배명훈 작가의 위트에 마음 놓고 방바닥을 두드리며 웃지 못해 아쉽다. 이 작품을 쓴 것이 일정한 기간 안이 아니라 지난 5년 동안 뮤즈께서 영감을 주실 때마다 비정기적으로 썼다고 하는 것이 작품 속에 그대로 드러난다. 지난 5년 동안 우리의 시뻘건 두 눈으로 고스란히 목격했던 일들이 작품 속에 비유되어 있다.
내년이 오더라도 전혀 해결되지 않을 것 같다. 그래서 더 슬프다.
군 생활을 하던 곳은 해안가에 위치한 독립 소초였다. 바로 해안에 인접한 곳이고 국도변에서 고개를 3개를 넘어야 닿을 수 있는 오지였다. 근처에 큰 저수지도 있어 일교차가 심한 날이라 계절이 바뀔 때에는 어김없이 며칠간 안개로 자욱한 곳이었다. 밤마다 순찰을 도느라 구름다리와 절벽을 오르내릴 때 나는 밤바다의 안개가 그렇게 무서운 것인지 처음 알게 되었다. 가파른 숨을 몰아쉬며 가만히 안개를 바라보면 마치 솜사탕 같기도 하고 따뜻한 고향집 솜이불 같기도 하고 처음 꺼내 입은 따뜻한 오리털잠바 같기도 하고 죽을 때까지라도 안겨있어도 좋을 그 여인의 품 같기도 했다. 통신병 놈 담배하나 물려주고 잠시 돌계단에 앉아 있으면 고놈의 이상야릇한 안개가 마치 춤을 추듯 희롱한다. 정신을 차려야지 하면서도 절벽 쪽으로 몸이 기울고 하는 경험이 몇 차례 있었다. 오래되고 외진 시골 마을에야 늘상 내려오는 얘기들이 그곳에도 있었다. 몇 번 초소에서 누가 죽었다더라. 마을의 처녀가 남자에게 버림받고 어디 절벽에서 죽었다더라. 비가 오고 안개가 끼면 원혼들이 군인들을 밤바다로 끌어내린다더라.
으스스한 밤바다 냄새와 야릇한 밤안개가 아직도 선명한 것 같다.
그만큼 자욱하고 이상하고 야릇하고 섬뜩하고 찝찝하고 무서운 밤안개였다
딱~! 그 밤안개 같았다. 지난 보름동안이.
배명훈의 위트 넘치는 작품에도 전혀 웃지 못하는 내가 더 걱정됐다. 안개가 여전히 자욱해 좌우분별이 되지 않는다.
그날 밤. 나는 혼자서 술을 먹었다. 마시지 않고 먹었다고 하는 것이 적확한 그때의 상황묘사일 것이다. 때려넣었다가 더 적확한가? 술기운을 빌리지 않고서는 어떻게 감당을 할 수 없었다. 밤늦게 친구들과 파티를 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할 수 없었다. 한 이틀 동안은 정말 감당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 문득 ‘내가 도대체 왜 이러나?’ 싶었다. 내가 원하던 총통후보가 총통이 되었다 치자. 내 삶이 뭐가 어떻게 더 나아지나? 생각하니 아차 싶었다. 어차피 최악이 아닌 차악을 위한 선거였고 구조적 병폐로 가득한 정치판이기에 내가 원하던 후보가 총통이 되었다 해도 여전한 구조적 문제로 골머리를 앓았을 것이 뻔했다. 그런데 내가 골머리를 싸안고 혼자서 시름시름 앓아봐야 나아지는 것 하나 없다는 생각이 불현 듯 든 것이었다. 그리고서 아내한테나 잘하고 내 꼬라지나 잘 살피자 싶었다. 그랬더니 마음이 그렇게 편안해 질 수가 없었다.
물론, 여전한 궁금증과 아쉬움과 의혹과 걱정은 있다. 하지만 더 솔직히 말하자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문제는 멈춰져 있는 시간이 아니라 30년간 끊임없이 사람들을 지배해 온 이 도시 전체의 권력구조 아닌가요?”
앞으로 또 5년 동안 멈춰져 있을 지도 모르는 시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수십 년간 끊임없이 사람들을 지배해 온 이 국가 전체의 권력구조가 중요한 것이다.
한쪽에서는 어서 멘붕을 털고 일어나자. 가만히 앉아 있어봐야 무엇하나? 힘을 합치자. 뭉치자. 대안언론을 만들자. 5년을 길게 싸울 힘을 만들자. 와라. 가자.
“한 5년만 잘래?” (p.15)
하지만 솔직히 정말 솔직히 나는 자고 싶다. 아내의 동면실험에 기꺼이 참여한 남편이 되고 싶다. 이것저것 쳐다보지 않아도 되니까 좋을 것 같다. 내 성격이 군데군데 모가 나 있어 그냥 5년을 참으며 보고도 못 본 척, 듣고도 못 들은 척, 알고도 모른 척하며 살 수 없을 것만 같다. 차라리 5년만 잘 수 있다면 좋겠다. 물론, 선거가 끝난 바로 다음 날로.
“저기, 5년 지난 거 맞아요?”
“맞잖아. 달력 봐.”
“근데 총통이 왜 아직도 저…….”
(중략)
“왜요? 개헌은 그렇다 치고, 사람들이 왜 또 저 사람을 뽑았어요?”
“그러게. 왜 또 뽑혔을까.”
“경제성장률이 10프로가 넘기라도 했어요?”
“10프로는, 개뿔.” (p.17)
30년이 지나도 총통이 바뀌지 않는다면!!!!! 그것보다 더 흉측하고 절망적인 악몽이 있을 수 있을까?? 그러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나? 30년 후에는 더 발전된 동면기술이 등장해 있을 테니 100년은 더 동면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혹시가 아니라 그거지 뭐. 독일이 아니라 미국에서 MBA를 마치고 온 거지. 내가 참 어이가 없어서. 우리는 다 선배가 독일 가서 사민당사 공부하고 오는 줄 알았거든. MBA가 뭐야, MBA가. 게다가 컨설팅 회사는 또 뭐람.” (p.144)
새로운 총통을 옹립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사람들은 기성세대다. 스마트폰 SNS로 무장된 젊은 세대를 완전히 KO시켜 버렸다. 그것도 마지막 10라운드 경기 시간 5초를 남기고 말이다. 1라운드에서 9라운드까지 내내 젊은 세대에게 밀렸다. 장내 아나운서와 중계 캐스터들은 모두 기성세대를 동정했다. 이제는 한물갔다. 이제 드디어 세대교체가 일어났다. 아직 경기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난리법석을 떨었다. 거의 그로기 상태에 빠져 10라운드에 들어갔다. 여전히 저돌적으로 들어오는 젊은 세대에게 마지막 10라운드에서도 난타당했다. 공이 울리기 5초 전 마지막까지 숨기고 있던 모든 힘을 모아 한 방의 어퍼컷을 날렸다.
그리고 경기는 끝났다.
그들을 탓할 수 없다. 무슨 수를 써도 바뀌지 않는 것이 사람이기도 하지만 기똥차게 갑자기 180도 바뀔 수 있는 것도 사람이기 때문이다.
대학 시절 운동권 내 프랑스 혁명의 여신과도 같았던 그 여자 선배가 독일에 가지 않고 미국에 가서 MBA를 하고 컨설팅 회사에 다니고 아들내미 공부에 혈안이 되어 있는 아줌마로 변한 것은 아니, 변한 것이 아니라 그런 아줌마가 된 것은 탓할 수 없다. 누가 누굴 탓할 수 있나?
80년의 봄, 광주, 87항쟁을 경험한 그들이라고 다를 거라 생각한 나의 거대한 착각을 탓할 수밖에 없다. 그들은 그래도 뭔가 다를 거라 믿은 내 어리석음을 탓할 수밖에 없다.
앞으로 5년 동안 마주하게 될 일들이 지난 총통의 5년 보다 나을지 아닐지 가늠할 수 없다. 무수한 말을 쏟아낼 수 있겠지만 내 입을 틀어막는다.
“각하. 양랑주에는 항구가 없지 않습니까?”
“그대가 만들라.”
“하지만 각하, 양랑주에는 해안선이 없습니다.”
“그것도 만들라.”
“예?” (p.162)
까라면 까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