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섬에 내가 있었네 (반양장)
김영갑 지음 / 휴먼앤북스(Human&Books) / 2004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내 나이 서른다섯.

‘나는 이제껏 살면서 무언가 죽을 만큼 열심히 해본 적이 있나?’

내 자신에게 물어봤다.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이것도 하면서 저것도 하는 두 다리 인생이 아니라 정말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위해 다른 모든 것은 포기하고 오직 그것에만 집중해 본 적이 없었다. 순간 이런저런 핑계거리가 떠오른다. ‘요즘 같은 세상에 자기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사는 사람이 몇 이나 될려구?’, ‘배부른 소리 하고 앉아 있네!! 자기만 생각해? 가족은? 가족은 생각도 안 해?’, ‘지금도 충분히 최선을 다해서 살고 있는데 괜한 자기비하 하지 말라구!!’

이 핑계 저 핑계 다 갖다 붙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최소한 나는 이 책 「그 섬에 내가 있었네」의 김영갑씨처럼은 살아보지 않았다는 것이다. 살아보지 못한 것이라고 이 짧은 순간에도 핑계를 들이대고 싶지만 못한 것이 아니라 안한 것이다.

 


“홀로 사진 찍는 것보다 즐거운 일을 아직까지 발견하지 못했다. 문제는 사진 찍는 재미에 흠뻑 빠져 사람의 도리를 다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섬에 정착한 뒤로 한 번도 고향을 다녀오지 못했다. 부모님 제사는 물론이고 묘소도 찾아보지 못했다.” (p.119)

 

제주도에 빠져 그곳에서 사진만 찍은 김영갑 작가. 말 그대로 사진만 찍었다. 가족도 가정도 친구도 돈도 명예도 인기와 인정도 모두 내팽개친 채 사진만 찍은 사진작가. 요즘 같은 시대에 웬만한 스마트폰으로도 입이 떡 벌어지는 화질의 사진을 찍을 수 있다. 누구나 사진작가만큼의 사진을 찍을 수 있다. 하지만 김영갑 작가는 달랐다. 그는 단 한 장의 사진을 위해 그의 모든 것을 내던졌다.

이것은 용기다.

김영갑 작가의 삶이 용기인 이유는 아무나 할 수 없는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오직 사진을 찍기 위해 최대한 자신의 삶을 간소하게 꾸리고 작은 잡념이라도 그의 의지를 흔들리게 할라치면 과감히 내려쳤다.

이런 삶은 아무나 살 수 없다. 수십 년 동안 자신을 외로움과 고독에 가둔 채 한 가지 일에 몰두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없다. 잠시 흉내 내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다.

 


“불안과 두려움이 계속된다. 눈을 감고 수직 절벽을 인식하지 않는다. 마음이 편안하다. 수직 절벽임을 인식하면 다시 두려운 마음이 든다.” (p.25)

“내 사진은 ‘외로움과 평화’에 대해 이야기한다.” (p.29)

 

책 속에 수록된 그의 사진을 보면 편안하지 않다. 사진 속에 그의 외로움과 그의 고독과 그의 고달픔과 그의 번뇌와 그의 처절함이 그대로 녹아 난다. 그리고 동시에 그가 한라산 중턱 중산간에서 수십 년 동안 살면서 체험한 유토피아. 이어도의 환상을 맛볼 수 있다. 그의 평화와 천진함과 순수함과 열정과 치열함과 용기와 희망이 그대로 녹아 있다.

 

“오며 가며 만나는 사람들마다 한결같이 내가 궁금한 모양이다. 제주 토박이들은 내가 언제 섬을 떠날지 궁금해 한다. 밥벌이도 안 되는 일에 매달려 아직도 섬을 안 떠났느냐고 묻는다.” (p.45)

“그것을 통해 내가 알고 있는 것들이 얼마나 형편없고 가치 없는지 깨달았다. 자신만만하게 세상과 삶에 대해 떠벌렸던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그들의 삶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나는 말수가 적어졌다.” (p.161)

 

김영갑 작가의 사진과 글에는 사람냄새로 가득하다. 뭍사람들에게 좀처럼 마음을 열지 않는 섬사람들에게 억지로 다가가 마음을 열어젖히려 하지 않았다. 그는 그들의 눈높이보다 더 아래로 자신을 낮춘다. 그냥 그 옆에서 함께 사는 것이었다. 불필요한 오해와 억울한 누명을 받기도 했지만 억지로 해명하거나 설득하려 하지 않았다. 섬사람들의 말을 듣고 싶어 했고 그들 곁에 있으려 했다. 그래서 꽃이 많이 피거나 억새로 가득하거나 한라산이 눈꽃인 때에 맞춰 제주로 날아와 사진을 찍는 그런 사진작가들과의 사진과는 차원이 다른 사진을 찍을 수 있었던 것 같다. 김영갑 작가 자신이 기다린 것이다. 억지로 끼워 맞추거나 때를 놓치지 않기 위해 우르르 몰려가는 것이 아니라 기다리는 것.

한라산 중턱 중간산 초원에 매료되어 그곳 골방에 틀어박혀 자연이 선사하는 오르가슴에 자신을 온전히 맡기는 것.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카메라의 셔터를 누르는 경험.

사실 책을 읽는 나와 같은 일반 독자가 쉽사리 이해하거나 감정 이입할 수 없는 경험인 듯 했다. 그 정도의 경지에 이르는 경험이 아직 없기 때문이다.

 


“사진 속에 표현된 분위기는 사진가의 감정(마음)을 통과한 선택된 분위기다. 사진은 사진가의 감정(마음)을 통과해 해석된 분위기이다. 농부나 어부들이 자연의 변화를 읽어내듯, 사진가들도 자연의 변화를 읽고 적절하게 대처하지 못하면 좋은 사진을 기대할 수 없다.” (p.134)

 

같은 노래라도 부르는 사람이 다르면 느껴지는 맛이 다르고 같은 피사체라도 누구의 렌즈를 통하느냐에 따라 사진이 달라지는 것처럼 사진 속에 자신을 오롯이 녹아내는 사진을 찍었다. 똑같은 제주의 풍경이고 제주의 사람들이라도 누가 그 풍경과 사람들 곁에서 사진을 찍느냐에 따라 사진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완전히 그들 속에 들어가 그 미세한 변화를 감지하고 그것에 반응하는 것. 이것 또한 정확하게 이해하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어떤 정도의 의미인지는 알 수 있을 것 같다.


 

“이제야 진짜 사진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비로소 나만의 화두를 발견했어. 느낄 수 있으나 설명될 수 없는 그 무엇을 표현할 거다.” (p.61)

“작품을 다 걸어놓고 막상 전시가 시작되면 전시장에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사진가는 사진으로 이야기하면 그만이다.” (p.182)

 

김영갑 작가는 정말 지나치다고 생각이 들 정도로 고집스런 사람이었던 것 같다. 책을 읽는 독자의 입장에서도 ‘이 사람 정말 보통 사람 아니다. 감당이 불감당이다.’ 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가까이 있는 가족과 지인들에게는 골치 아픈 사람이었을 것이다.

물론 예술가로서는 완전했을 것이다. 자신의 손을 떠나 벽에 걸린 작품을 다시는 찾지 않고 다른 작가들처럼 앞에 나가 칭찬을 받기도 하고 지적을 받기도 하는 등의 일상적인 과정을 조금의 고민도 없이 생략해 버리는 고집 센 예술가다.

하지만 그를 걱정하고 염려하는 사람들에게는 정말 대책 없는 사람이었다. 사진을 찍는다고 골짜기에 틀어박혀 불도 떼지 않고 겨울을 보내고 끼니를 거르기 일쑤고 사진은 찍는데 돈벌이 할 생각은 하지도 않고 가족, 친구, 지인 연락이라도 올라치면 전화기를 없애버리고.

하지만 책을 읽는 내내 김영갑 작가의 삶이 멋있고 숭고해 보였다. 적어도 독자로서는 그랬다. 그가 죽기 전까지 누군가에게는 목에 가득 걸린 생선뼈 같은 존재였을 수도 있고 생각만 해도 가슴아린 존재였을 수도 있겠지만 그의 글을 읽고 그의 작품을 대하는 나에게는 숭고했다. 마치 성자(聖子)와 같은 삶을 산 사람 같았다. 수도승의 단계를 뛰어넘은 성자(聖子).

그래서 책에 실린 사진을 차마 옮길 수 없었다. 내가 가진 폰카메라로 찍어서 내 컴퓨터 폴더에 복사해 이런 저런 글에 붙여넣기 할 수 있는 사진이 아니었다. 쉽게 만질 수 없는 숭고함이 있다. 결연함도 있다.

 


“사진을 찍는 것은 아침저녁으로 두세 시간 정도다. 사진은 일 초도 안 되는 시간 안에 승부를 거는 처절한 싸움이다. 한번 실수하면 그 순간은 영원히 다시 오지 않는다. 특히 삽시간의 황홀은 그렇다. 잡념에 빠지면 작업에 몰입하기 힘들다. 눈앞에 펼쳐지는 황홀감은 삽시간에 끝이 난다. 그 순간을 한번 놓치고 나면 다시 일 년을 기다려야 한다. 일 년을 기다려서 되는 거라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기다려도 되돌아오지 않는 황홀한 순간들도 있다.” (p.243)

 

황홀한 찰나의 순간. 그 순간을 잡기 위해 하루 이틀, 한 달 두 달, 일 년 이년을 기다렸다. 한 번 지나간 시간을 되돌릴 수 없듯이 언제 올지 모를 황홀한 찰나의 순간을 위해 자신을 철저한 고독과 외로움 속에 내팽개쳤다. 그 안에서 자신만의 유토피아, 이어도를 발견하고 숨 쉬듯 자연과 호흡하고 사람들과 어깨동무 했다. 모든 것을 버린 후 자신도 모르게 채워주는 신비로운 경험이 그의 사진 속에 녹아 있다. 이 세상에 발붙이고 살았지만 죽을 때까지 이 세상에 발붙이지 않았다. 세속과는 조금도 섞이지 않은 성자(聖子)의 모습이 그의 삶과 사진을 통해 발현되었다.

 

대단한 종교적 경지에 오르거나 아무나 할 수 없는 체험을 하거나 엄청난 기적을 일으키는 사람만이 성자(聖子)가 아니다. 어떤 것에 몰두한 채 존재 자체를 완전히 던져버리는 삶. 아무나 할 수 없고 흉내조차 낼 수 없는 삶을 살아간 사람이 성자(聖子)다. 많은 말을 쏟아내고 많은 글을 담아내고 많은 사진을 걸어 놓지 않아도 그의 짧은 삶과 간소한 글, 혼을 담은 사진 몇 장만으로 영혼의 카타르시스를 경험하게 하는 그 사람이 성자(聖子)다.

몇 해 전 작고하신 권정생 선생을 보는 듯 했다.

 

 

이런 사람들은 하늘도 질투를 하는 것 같다. 너무 빨리 데려가니 말이다.

 

“손가락이라도 조금 움직일라치면 또다시 통증이 찾아왔다. 어느 한 군데가 아픈 것이 아니라 전신이 못 견디게 아파왔다. 조심스럽게 모로 누워보지만 그러고 나면 숨소리가 거칠어지고 호흡이 불안정해졌다.” (p.188)

“나는 이제 더 이상 사진을 찍을 수 없다. 온몸의 기력이 소진해 카메라를 들기는커녕 손가락 힘이 없어 셔터조차 누를 수 없기 때문이다.” (p.193)

 

김영갑 작가에게서 더 이상 사진을 찍을 수 없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육신은 아직 호흡하고 있지만 이미 죽은 상태가 아니었을까? 사진을 찍기 위해, 사진만을 찍기 위해 모든 것을 내던지다 못해 자신의 존재마저 내던진 사람에게 루게릭 병은 너무 가혹했다. 모든 것을 버린 채 아무것도 없는 성자(聖子)처럼 벌거벗은 채 셔터만 누른 사람에게 손가락도 움직일 수 없는 통증은 이미 사형집행과 다름없었을 것이다.

 


하늘은 참 야속하다. 빨리 데려갔으면 싶은 사람들은 백수, 천수를 누릴 것 같은데 김영갑 작가나 권정생 선생 같은 분들은 왜 그렇게 빨리 데려가는지…….

 

이 책은 그냥 사진작가의 책이 아니다. 제주도가 좋아 자기가 스스로 제주도의 풍경이 되고 사진이 좋아 자기가 스스로 필름이 된, 그래서 그렇게 살다 하늘의 시샘으로 일찍 그곳으로 간 벌거벗은 성자(聖子)의 일기다.

그래서 편하게 읽을 수 없는 책이다. 불편하고 마음 아픈 책이다. 그의 글 한 줄도 쉽게 쓰여 있지 않고 그의 작품 하나 쉽게 실려 있지 않다.

하지만 그의 글과 사진은 읽는 사람의 영혼을 치유한다. 보기 좋고 듣기 좋고 읽기 좋은 것은 분명히 아닌데 이상하게 치유가 된다. 눈물이 흐른다. 정화(淨化)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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