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기자로 산다는 것
문정우 외 50인 지음 / 시사IN북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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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IN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이숙이 편집국장 때문이다. 예전 직장의 출근 시간이 좀 빨랐던 편이라 출근길 자동차 안에서 평소 좋아하던 손석희의 시선집중이라는 라디오 프로그램을 들을 수 있었다. 그 프로그램에 한 꼭지에는 김종배라는 정치평론가가 늘 진행을 했었는데 언제부터인가 굵은 남성 목소리가 들리지 않고 분위기 있고 목소리만으로도 보통 기자는 아닌 것 같은 여성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처음 그 여성 정치평론가를 소개하는 손석희씨의 멘트가 낯설었다.

“시사IN의 이숙이”

‘엥? 시사IN?? 뭐지?’

속으로 생각했다.

당시만 해도 손석희의 시선집중은 MBC 내에서도 척결 대상이었고 시선집중에 출연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객관적 팩트를 가지고 평론을 하는 사람들이었다. 지금도 그렇겠지만 그때는 객관적 팩트로 평론을 한다는 자체가 반정부적이고 정권에 대한 비판적 인사로 몰렸었기 때문에 속으로 이런 생각도 했다. ‘이 사람 용기가 대단하네~ 어떻게 여길 나와~’ 했다.

 

 

이 책 「다시 기자로 산다는 것」에서는 지금은 시사IN의 편집국장인 이숙이씨가 손석희의 시선집중에 출연하게 된 경위도 나와 있다. 주위의 많은 걱정을 무릅쓰고 출연을 결정한 것이라는 것을 책에서 확인하니 몇 해 전 출근 시간에 했었던 내 생각이 다시금 떠올라 흥미로웠다.

 

이후 시사IN을 다시 인지하게 된 것은 전적으로 주진우 기자 때문이다. (재작년 말부터 작년 말까지 시대가 준 결핍을 채워줬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나꼼수에 출연한 주진우 기자를 알게 되면서 그가 속해있는 사사IN을 알게 되었다. 나꼼수에 출연해 주진우 기자가 가장 처음 하는 멘트는

 

“정통 시사 주간지 시사IN의 주진우입니다.”였다.

원래 말이 좀 어눌하고 나꼼수라는 방송 자체가 웃음과 해학 풍자와 비꼼, 비판과 조롱이 얽히고설킨 방송이기에 저 문장 하나 말하는데도 옆에서 물어뜯고 비웃고 “그거 하나 제대로 못하냐”고 난리를 쳤다.

주진우 기자가 나꼼수 다른 멤버들의 비아냥거림과 조롱을 들으며 발음했던 “정통 시사 주간지”가 결코 함부로 말할 수 없고 그냥 한번 웃어넘기는 것으로 대신할 수 없는 눈물과 땀과 피가 어린 이름이라는 것을 이 책 「다시 기자로 산다는 것」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삼성 기자단 삭제 사건’이 터진 후 1년 동안 뭉쳐 싸워 온 22명의 시사저널 파업기자단은 이날 눈물의 고별식을 마친 뒤 자본권력으로부터 독립된 새 매체 창간을 엄숙히 선언했다.” (p,17)

 

원래 시사저널이라는 주간지에서 일하던 기자들이 새롭게 창간한 언론사가 바로 시사IN이다. 대학 시절 ‘말’지와 더불어 언론에 관심 있는 학생들이 많이 보던 주간지가 ‘시사저널’이었다. 그런데 시사저널이 원래 유지하고 있었던 사회비판적 정체성과 언론으로서의 모습을 삼성에 관련된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잃어버렸다는 것은 까맣게 모르고 있었던 사실이다. 일선 기자들이 정말 목숨을 걸고 최선을 다해서 가열차게 쓴 보도가 일방적으로 회사에 의해 삭제되는 사건이 있었다. 말 그대로 언론 유린이요 탄압이었다. 기자들과의 논의나 토론은 고사하고 일방적으로 삼성에 해당하는 기사를 회사 차원에서 삭제한 것이다. 당연히 당시 시사저널 기자들은 항의를 하고 파업을 시작했다. 단식농성에서부터 1인 시위까지 1주일 내내 하나의 기사에 매진해도 모자를 기자들이 거리로 나 앉은 것이었다. 당시 이 사건은 주류 언론에서도 큰 관심을 가질 만큼 큰 사안이었다. 일개 주간지 기자들이 대한민국 최고의 권력기관인 삼성에 대항해 펜과 손발을 놓고 백병전을 벌인 것이다.

생각하는 그대로 시사저널 측은 기자들을 해고하고 그들의 구미에 맞는, 자본권력에는 입도 뻥긋 하지 않을 기자들로 파업 기자들의 빈자리를 메꾸었다.

하지만 그들에게도 희소식은 있었다. 당시의 파업을 두고 언론계는 물론이요 일반 시민들이 그들이 벌인 파업의 정당성과 진실함에 동의해 물심양면으로 지원하고 응원하게 된 것이다.

 

 

회사와 반목해 뛰쳐나온 기자들이 합심해 매체를 만들어 성공한 예가 없었다. 세계 언론사를 뒤져봐도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p.27)

 

일반 시민들과 뜻있는 사람들의 응원과 지지는 새로운 매체의 창간이라는 기적과 같은 일을 현실로 만들었다. 이 책에서 시사IN기자들이 여러 번 강조하는 대로 이것은 기적과 같은 일이라고 한다. 생각해 보면 일선 기자들이 몸담고 있던 언론사를 나와서 새로운 매체를 만들어 성공한 예는 정말 없었다. 해고당하거나 사직서를 내고 나오면 다른 언론사에 들어가거나 그냥 야인으로 살거나 둘 중 하나일 경우가 많았는데 파업 기자들 모두가 뜻을 모아 새로운 매체를 창간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책에서도 여러 번 기자들이 강조하고 감사함을 표현한 대로 처음에는 몇 만원 단위의 독자들의 후원이 많았다고 한다. 그러고 나서 조금씩 더 큰 액수의 후원이 많아지고 그들조차 마음에 확신을 할 수 없었던 시사IN창간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시사IN은 창간 몇 해 후 업계의 압도적 1위가 되었다. 능력이 있고 제대로 된 언론관을 가지고 있으며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보도하고 취재하고 탐사하는 기자들이 회사의 눈치, 자본권력의 눈치로부터 해방되니 독수리에게 슈퍼차저 엔진을 하나 더 달아준 것이다. 하고 싶은 대로 표현하고 싶은 대로 보도하는 그들에게 사람들은 공감했다.

돌이켜보면 주진우 기자가 나꼼수에 출연하기 전부터 버스정류장이나 지하철역, 서점 등의 가판대에서는 시사IN이 꼭 있었다. 이름도 생소하고 낯선 시사IN이 꼭 있었다. 일간 신문은 물론이고 주간지에도 관심이 없는 사람은 잘 모르겠지만 분명히 있었다.

이미 오래전부터 주간지를 발행해 온 몇몇 언론사들은 가뿐히 뛰어넘은 것은 순전히 시사IN기자들의 힘이다. 그들은 책에서 수십 번 독자들과 후원자들에게 감사를 표시했다. 하지만 제대로 된 뉴스를 보도하고 취재해서 알려주지 않았다면 사람들은 시사IN을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컴퓨터로 핸드폰으로 언제 어디서든 원하는 뉴스를 찾아볼 수 있는 지금 굳이 1년 정기구독을 하고 가판대에서 종이로 된 주간지를 사서 읽는다는 것은 그들의 뉴스가 흥미가 가고 궁금하고 시대가 만들어낸 결핍을 채워주는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지금과 같은 결과는 결코 달성할 수 없었을 것이다.

 

우연히 출근길 라디오에서 들었던 이숙이 편집국장, 나꼼수로 인해 전국적인 스타가 된 주진우 기자 말고도 시사IN에는 뛰어난 기자들이 많다는 것이 이 책을 읽는 가장 큰 묘미다. 한 명 한 명의 기자들이 보석과 같다. 그들은 언론사가 자본권력에 군림해 주저앉는 꼴을 그대로 지켜본 사람들이다. 그래서 뛰쳐나와 힘겨운 파업을 진행해 본 사람들이고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여긴 새로운 주간지 창간도 이루어 낸 사람들이다. 그래서 지금 이렇게 시사IN이라는 회사를 만들어서 대한민국에 존재하는 그 어떤 언론사(방송·신문을 통틀어서)보다 자유롭게 기획, 회의, 취재, 편집 과정을 논의하고 토론하는 회사를 만들었다. 그들에게는 지금이 가장 행복한 순간일 것이다. 마음껏 취재하고 보도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말이다. 

시사IN의 기사를 제대로 한번만 정독해 본 사람은 알 것이다. 이 사람들이 얼마나 기사를 쓰는데 최선을 다하고 온 힘을 다하고 있는지를.  

 

“모니터와 휴대전화에 글자들이 투옥된 지 오래인 이 시대에도 시사IN 편집국은 여전히 종이와 펜이 지배한다.”(p.146)

 

어느 직장에서나 직책과 연배에 따라서 구분되는 영역이 분명히 있는데 언론사는 더욱 그럴 것이다. 아주 작은 실수 하나로 큰 사고를 칠 수 있는 것이 언론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시사IN은 그런 기존의 언론사가 가지고 있는 폐쇄적이고 소극적인 틀을 깨고 있는 듯 하다. 그래서 그들의 기사가 살아 있고 생명력이 있나 보다.

 

“장일호 어리버리 정치부 1년차, 오늘도 죽자고 마신다”

 

자신을 어리버리 정치부 1년차 기자라고 소개한 장일호 기자의 부분이 인상 깊다. 이전 시사저널에서 편집국장을 하던 고종석씨와 김훈씨의 글을 수도 없이 보고 배웠다고 하는데, 과연 책에 실린 짧은 글로도 장일호 기자의 필력을 확인해 볼 수 있었다. 짧은 호흡의 글이지만 힘이 있고 강단이 있어 보인다. 나는 모바일과 지면으로 시사IN을 애독하고 있는데 장일호 기자의 기사가 더욱 기대된다.

 

 

마음껏 취재하고 보도하는 시사IN의 특성 상 그들의 취재 대상이 되는 사람이나 조직, 기관은 참 피곤할 것 같다. 대한민국에 무수한 언론사가 있지만 시사IN만큼 그들을 피곤하게 되는 곳은 아마 없을 것이다. 지난 오세훈의 사퇴기자회견에서도 수십 명의 기자가 꿀 먹은 벙어리처럼 내뱉는 오세훈의 말만 타이핑 하고 있을 때 주진우 기자가 홀로 손을 들고 질문했다.

 

“언제 사퇴하십니까?”

 

기자는 말을 듣지 않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데 대한민국에는 말을 잘 듣는 기자들로 넘쳐난다. 말을 잘 듣는 것에 더해서 듣기를 원하는 기사를 만들어 주기도 한다. 그냥 하는 말을 논평도 없이 기자 개인의 논지도 없이 쓰는 것은 앵무새와 다름없다.

그래서 나는 시사IN의 미래가 더 걱정된다. 이명박 정권에서도 어이없는 고소를 많이 당했었는데 차기 박근혜 정권에서도 시사IN 기자들이 그냥 타 언론들처럼 알아서 고개 숙일 리는 만무하고 하고 싶은 대로 보도하고 싶은 대로 취재하고 싶은대로 한다면 분명 더 많은 고소를 당한 것이 자명한데……. 걱정이다.

5년은 견딜 수 있었는데 10년은 어떻게 버텨나갈지 걱정이다.

 

독자로써, 그들을 응원하고 지지하는 시민으로써 진심으로 시사IN의 건투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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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이성을 마비시키는 그럴듯한 착각들
실뱅 들루베 지음, 문신원 옮김, 니콜라스 베디 그림 / 지식채널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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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당신의 이성을 마비시키는 그럴듯한 착각들」은 우리의 일상에서 흔하게 일어나는 군중 심리와 개인의 심리적 기제의 작용 과정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심리학이라는 학문적 특성 상 본인은 자신의 심리적 상태와 작용 과정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마트에 가서 물건 하나를 집어들 때 ‘나는 왜 지금 이 깐대파를 집어 들었지? 나의 이 행동은 어떤 심리적 작용에 의해 표출된 것이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매 행동마다 그런 생각을 한다면 둘 중 하나다. 학문에 미쳐버린 심리학자이거나 정말 미친 사람이거나. 그래서 심리학에 대한 책을 읽거나 강의를 들으면 참 재미있다. 대학 때 심리학을 부전공했다. 본래 내 전공보다 더 열심히 강의 듣고 레포트 쓰고 토론하고 발표했던 기억이 있다. ‘내가 강의를 듣기 전에도 수 십 번 반복했던 그 행동이 심리학적으로는 이렇게 해석되는구나~’ 알게 되면 짜릿짜릿했다. 특히 발달심리학이 가장 재미있는 분야였는데 아쉽게도 이 책에서는 발달심리학에 대한 내용은 담겨 있지 않다.

이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개인들은 타인과 관계를 맺어 살아갈 수밖에 없다. 물론, 외톨이로 살아가거나 문명과는 담을 쌓은 채 의도적으로 고립을 택한 채 살아가는 사람도 있기는 하지만 대다수는 사회에 속해 있다. 당연히 사회에 속한 타인들과의 관계에서 오는 심리적 작용과 결과는 관심을 가질 만한 주제다.

내가 대학 때 심리학 강의를 들으며 나의 행동과 성격, 기질의 형성에 대한 심리학적 분석에 무릎을 치며 동의하고 감탄했던 것처럼 이 책을 읽으면 심리학에 전혀 관심이 없던 사람이나 어렵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에게 재미있는 확인의 과정, 감탄의 기회가 될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

총12가지 주제로 우리가 그렇게 행동하고 관계 맺으며 살고 있지만 그 행동의 기제를 알고 있지 못했던 것을 파헤친다. 그러한 주제로 심리학자들이 실행한 연구와 실험을 제시하고 그것에 대한 살을 붙이는 형식으로 책은 전개되는데 올망졸망한 삽화까지 들어가 있어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12가지 주제 중 나는 4가지 주제에 관심이 갔다.

첫 번째는 <무엇이 진정 군중을 움직이는가?>이다.

 

“군중을 동원하는 ‘연관성’은 위기나 갈등 상황 또는 위협을 받는 상황에서 나타난다. 그 상황이 실제 상황이든 가상의 상황이든 상관없다. 만일 갈등 상황에서 나타난다면 그 위협이나 갈등이 사라지는 순간 함께 사라진다. 실제로 조국이든 공화국이든 ‘위험에 처했을’때만큼 의미심장한 현실성을 드러낼 때는 없다.” (p.217)

 

 

2002년 4월 21일 프랑스 대선 1차 투표 결과 프랑스 내에서도 극우파인 루펜 결선에 오르자 프랑스 국민과 좌파지식인과 문화예술인은 물론 우파정치인에 이르기까지 거리로 쏟아져 나오고 똘레랑스를 견지하는 프랑스 시민의 힘을 보여주자는 군중집회를 하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2차 투표에서는 이러한 군중의 열망이 그대로 투표에 반영되어 반대편 자크 시라크가 압승을 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고 한다.

군중을 움직이는 힘은 그들이 속한 사회(조국, 공동체)가 위기·위험에 처했을 때 가장 강렬하게 나타난다고 한다. 프랑스는 그것을 눈으로 보여준 것이다. 프랑스 시민의 힘이다.

이명박 대통령 임기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미국산 쇠고기 수입에 대한 군중집회가 열렸다. 조직이나 정치집단의 선동이 아니라 학생·주부·직장인들이 자발적으로 거리로 쏟아져 나와 국가의 위기에 대항했다. 결과는 프랑스의 그것과 완전히 다른 형태로 나타났지만 군중을 움직인 주체는 똑같았다고 볼 수 있다.

 

 

두 번째는 <완벽해 보이는 그들이 어리석은 결정을 내리는 이유>이다.

 

“미국의 심리학자 어빙 제니스에 따르면 결집력이 높은 집단의 구성원들일수록 여러 가지 가능성에 대해 다각도로 면밀히 검토하지 않은 채 쉽게 만장일치로 의견을 결정하는 경향이 있다.” (p.143)

 

이것은 여의도에 있는 사람들만 들여다봐도 100% 정확하게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유권자들을 대리해 여의도에서 정치를 하는 사람들임에도 그들이 내리는 결정들을 보면 어리석다 못해 바보 같은 때가 많다. 그저 TV카메라 앞에서 ‘쇼’하는 배우들 같다. 국민적 열망을 담은 여러 가지 정책에 대해서는 나 몰라라 하고 자기들 밥그릇 챙기는 연금법 같은 것은 여당이든 야당이든 한통속이 되어 일사천리로 통과시켜 버리는 자들이다. 아~ 이 사람들 미국 심리학자 어빙 제니스씨가 한 번 내한하여 300명 전원을 대상으로 실험 해봤으면 싶다. 이렇게 제니스씨의 이론에 충실하게 부합하는 실험 표본은 아마 지구상에 없을 것이다.

 

 

세 번째는 <왜 우리는 어처구니없는 짓을 할까?>이다.

 

“그 종파의 추종자들이 너무나 열심히 기도를 해서 감명 받은 외계인들이 지구를 지켜주기로 했다는 것이다. 이후 추종자들은 전보다 더 열심히 포교 활동을 하며 한층 단결력이 강화되었다……. 자신들의 모든 행동들을 부정해야 했으니 그럴 바에는 차라리 믿음을 강화하는 편을 택한 것이다.” (p.113)

 

휴거, 종말……. 뭐 이런 말들이 내 생애 가운데 벌써 몇 번이나 있었다. 1992, 1999, 2000, 2012. 얼마 전 모 TV 프로그램에서 종말론을 신봉하던 사람들에 대한 취재를 한 내용을 본 적이 있다. 그들이 내 걸었던 종파의 이름도 간판을 내리고 교주도 자취를 감추고 종말을 기다린다는 사람들이 폭행·사기·공갈·협박 등 현세에서 가능한 실증죄를 많이 지어 경찰수사도 강도 높게 받았다고 했다. 그래서 그들이 거의 없어졌을 거라 생각했는데 취재 결과 그들이 더욱 은밀하게 그들만의 믿음을 더욱 굳건히 지켜오고 전파해 오고 있었다. 나는 그 내용을 보면서 아찔했다. 조금만 밖에서 바라보면 어처구니없고 말도 안 되는 내용인데 안으로 들어갈수록 그들이 스스로 만들어 놓은 믿음에 빠져 벗어나지 못하는지 섬뜩했다.

사람은 정말 그렇다. 목숨을 걸 정도로 신봉하고 신뢰하던 믿음이 어느 날 한순간에 거짓으로 드러난다면 차라리 이제껏 내가 보여 온 믿음의 형태를 부정하기 보다는 차라리 믿음을 더 강화하고 나의 믿음을 합리화하는 편이 더 낫기 때문이다.

책에서는 쉽게 읽고 서평에서는 쉽게 쓸 수 있지만 사실 무서운 것이다. 자신이 믿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믿고 있다고 착각하는 그 착각을 믿는 것이다. 맹목적이고 폐쇄적일 수밖에 없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네 번째는 <틀린 줄 알면서도 왜 다수의 의견에 따를까?>이다.

 

“다수(타인)에게서 얻은 정보를 진실의 증거라고 여기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 놀림감이 되는 일을 피하기 위해 다수의 의견을 택해 동조하거나” (p.78)

 

이것은 많이 알고 있는 이론일 것이다. 분명히 A라는 줄이 제일 짧은데 나를 제외한 다른 모든 사람들이 B라는 줄이 제일 짧다고 말하면 나도 B라고 말해버린다는 것이다. 모두가 YES할 때 NO하고 모두가 NO할 때 YES하는 사람은 사회 생활 내에서는 부적응자, 돌+아이, 눈치 없는 사람으로 비난 받는다. 결코 용기가 아니다. TV광고나 드라마에서는 그런 사람들이 역경을 겪지만 결국 최종 승리자가 되는 장밋빛 스토리를 만들어 내지만 최소한 내가 살아본 현실에서 그렇게 하는 사람들은 조직에서 적응하지 못하고 손가락질 받고 인정받지 못했다. 나서기보다 입 다물고 남들 하는 만큼만 하면 적어도 내쳐지지는 않는다. 다수의 의견이 설령 잘못된 결과를 낳는다 해도 책임은 n분의1만큼 경감되기 때문에 부담도 적다.

 

 

책에 소개된 12개의 주제들 중 재미있고 와 닿았던 4개의 주제들만 살펴봤는데, 책을 읽어보면 사실 더 재미있다. 책을 읽으면서 ‘어! 맞아~! 나도 그런 생각을 했었지, 그런 행동을 했었지, 그때 걔가 그런 말을 한 게 이런 뜻이구나~’ 여러 번 고개를 끄덕였다. 사회심리에 관한 책이지만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다. 어차피 내가 살아가고 당신이 살아가는 일상에 대한 기록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런 책을 읽는다고 해서 이런이런 내 행동은 고쳐야지, 이건 잘못된 거야. 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심리학적 기제로 개인과 군중의 심리를 분석한 것뿐이지 옳고 그름의 문제를 논하는 내용의 책은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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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는 어떻게 이동하는가 - 토플러가 말하는 제3 물결 정치학
앨빈 토플러 & 하이디 토플러 지음, 김원호 옮김 / 청림출판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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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누가 이기든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데?” (p.140)

 

정치가 밥 먹여주지는 않는다는 이상한 믿음에 심취된 대한민국 사람들(특히 젊은 사람들)은 이번에도 많이 투표하지 않았다. 오히려 나이 지긋한 기성세대들이 원래 투표열기보다 더욱 뜨거운 열기를 나타냈다. 괴상한 정치적 향수, 추억, 감정적 동조가 있기도 했지만 나이 지긋한 기성세대들에게는 정치가 밥을 먹여주지는 않을지라도 밥그릇에 담길 쌀의 양을 결정할 수는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이 책 「정치는 어떻게 이동하는가」를 읽어보면 정치에 대한 혐오를 넘어선 무관심은 대한민국만의 문제는 아닌 것 같다. 다만 저명한 미래학자인 앨빈 토플러와 그의 아내이자 같은 미래학자인 하이디 토플러는 이 책에서 아직까지 제3의 물결로의 완전한 변화는 오지 못했고 전반적인 정치적 무관심도 제2의 물결에서 제3의 물결로 전이되는 과정 가운데 겪는 하나의 진통으로 해석 한다.

 

 

기존의 정치구조들이 근본적으로 바뀌어야 하는 이유는 이것들이 더 이상 제대로 작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완전히 달라진 세상의 요구에 더 이상 부응하지 못하는 것이다.” (p.182)

 

미국의 정치 구조를 예로 들면서 공화당, 민주당의 공약과 스탠스의 차이를 두고 논리를 전개하는 것이 아니라 300년에 걸쳐 지속되어 온 정치구조 전체를 완전히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토플러 부부는 그들의 유명한 책들에서 이미 예견한 이론과 가설들을 가지고 이것을 해석하는데 처음에는 ‘아직도 제3의 물결 타령이야?’생각했지만 여타 복잡하고 난잡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이론들 보다 훨씬 낫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제1의 물결을 지나 제2의 물결 속에서 인류는 무한할 것만 같은 발전과 진화, 성장을 거듭했다. 경제뿐만이 아니라 정치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분명히 지금의 정치구조가 산적해 있는 현안을 해결하고 있지 못함은 분명한 사실이다. 전체 시민들을 대신해 정치를 하고 있는 정치인과 그들이 속한 정당은 나눠 먹기식으로 권력을 주고받았을 뿐 진정 그들이 대리하는 전체 시민과 국민들에게는 부응하지 못했다. 세계의 어느 나라건 정치인은 시민과 국민들에게 사랑받거나 존경받지 못한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상한 일 아닌가? 자신들 손으로 직접 뽑은 대리자를 그토록 싫어하고 혐오하는 것이 말이다. 문명의 발전과 진화에 더불어 정치구조도 엄청나게 발전해 온 것은 사실이다. 얼마 전 엄청난 인기를 누렸던 영화「레미제라블」과 같은 사회적 배경보다는 최소한 나은 삶을 구가하고 있지 않나? 하지만 문명과 경제가 발달해 온 것만큼의 행보에 정치는 발맞추지 못했다. 어디까지나 시민과 국민을 대리하는 정체성을 가지고 겸손하게 그 뜻을 받들어야 하는데 권력이라는 괴물은 그들 스스로 주체·주인이라 인식하게 만들었던 것 같다. 그래서 다음 선거 즈음 되면 스멀스멀 기어 나와서 지키지도 않을 헛소리를 늘어놓고 보장된 임기 동안 절대 들여다보지 않을 밑바닥까지 기어 내려가 악수를 해댄다. 시민과 국민들은 또 속을 줄 알면서 또 표를 던진다.

앞서 말했듯이 토플러 부부는 이러한 현상 또한 제3의 물결로 완전히 전이하지 못한 것이 가장 큰 원인이라고 주장한다.

 

 

“탈대량화된 제3의 물결 사회는 산업시대에 만들어진 기계적인 다수결의 원칙을 근간으로 하는 정치 시스템보다 훨씬 더 정교한 시스템을 필요로 한다.” (p.190)

 

탈대량화되어야 하는 제3의 물결 사회를 운용할 정치 구조는 이전보다 분명 더 정교해야 한다. 지금처럼 온전히 저들에게 맡겨서 될 일은 아니다. 그것은 분명하다.

이 정교한 정치시스템에 관해서는 이 책에서 몇 가지 대안을 제시하기는 하는데 굳이 리뷰에서까지 소개할 만큼 특별한 대안은 아니다. 이미 지난 금융위기 이후 신자유주의 종말을 예견하며 새로운 경제구조의 대안을 제시한 책이 쏟아졌다. 쏟아진 책의 종류만큼 다양한 대안이 쏟아졌으면 좋았겠지만 몇 권만 읽어보면 나머지는 다 거기서 거기다. 물론 현재까지는.

토플러 부부가 주장하는 정치구조의 제3의 물결이 정확하게 어떤 형태인지 모르겠다. 가늠이 잘 되지 않는다. 책에서 제시한 대안이 내게는 별로 설득력이 없어서 그런 것이기도 하고 정치구조를 뒤엎고 새롭게 판을 짤 대안이 쉽게 떠오르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사실 이런 것은 잘 생각하지 않는 주제다.

이 책에서는 그것을 확인할 수 없었지만 앞으로 쏟아질 책이나 이론에서 확인하고 찾아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이다.

 

 

“새로 제안되는 제도들에 대해서는 비현실적이라는 딱지를 붙여 그대로 죽이려 하는 ‘아이디어의 암살자들’과도 싸워야 한다.” (p.214)

 

더불어 뭔가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버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새롭게 창조된 구조가 이제껏 자신들이 누려온 기득권을 빼앗고 자신들의 자리를 가로챈다고만 생각한다면 토플러 부부가 말하는 제3의 물결은 결코 오지 않을 것이다.

그들의 주장대로 ‘아이디어를 암살하려는 자들’은 분명 지금의 시스템의 정점에 있는 사람이거나 그 정점에 있는 사람에게서 콩고물을 얻어먹는 사람일 것이다. 결코 그들의 자리를 쉽게 내어놓지는 않을 것이지만 전혀 대안이 되지 못하고 해결책이 되지 못하는 지금의 정치체제를 전환하는 것이 거대한 힘이 되어 동력으로 작용한다면 못할 것도 없으리라 생각된다.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하드웨어는 언제나 소프트웨어보다 더 중요한 것이었으나, 우리는 컴퓨터혁명을 통해 현실은 오히려 그 반대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p.135)

“제3의 물결 경제에서 가장 중요한 원료는 바로 소프트웨어를 비롯한 무형의 것들인데, 전 세계의 사회주의는 이러한 제3의 물결 경제가 부상하는 상황에 대해 아무런 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p.136)

 

사회주의 체제가 성공하지 못한 것에 대한 분석이 재미있었다. 이분들은 거의 모든 현상을 자신들이 내어놓은 이론 안에서 해석하는데, 좋게 보면 재미있는 일이다. 어설프게 남의 것 따라하고 모방하는 것보다야 훨씬 낫다고 생각한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유물론적 세계관과 인식은 토플러 부부가 말하는 제3의 물결로의 전환에는 쥐약이었다. 소프트웨어는 눈이 돌아갈 정도로 급속도로 변형하고 발전하는데 여전히 하드웨어만 쥐고 나사를 조이고 하는 제2의 물결에나 어울릴만한 그들의 자세는 실패할 수밖에 없는 원인이 된 것이라고 분석한다. 뭐, 전적으로 동의하기에는 좀 성긴 것 같다.

 

 

“대량생산 중심의 제2의 물결 경제에서 지식 중심의 제3의 물결 경제로의 전이를 완전하게 이루어낸 나라는 아직 없다.” (p.55)

“‘프롤레타리아’는 ‘코그니타리아(cognitariat - 기존의 프롤레타리아를 대신해 21세기를 이끌어갈 새로운 권력계층으로 떠오른 유식계급을 일컫는다)에 의해 대체” (p.103)

 

하지만 여전히 토플러 부부는 미래를 예견하고 예측하는 데 힘을 쏟는다. 그것에는 아낌없는 박수와 찬사를 보낸다. 당장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것이 인생인데 수십 년간 미래를 연구하고 분석하고 예측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노력이 선행되었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함께 얘기하는 것에 슬쩍 목소리를 얹는 것은 쉬운 일이지만 아무도 얘기하지 않는 것을 먼저 말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끊임없는 노력과 성찰, 연구와 고민이 없으면 불가능 한 일이다.

제2의 물결에서 제3의 물결로 전이되는 과정을 그들과 함께 지켜보는 것도 유의미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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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조건 - 꽃게잡이 배에서 돼지 농장까지, 대한민국 워킹 푸어 잔혹사
한승태 지음 / 시대의창 / 2013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대학교 4학년을 앞둔 겨울 방학에 나는 처음으로 노가다(막일)를 해봤다. 내가 다니던 대학 앞으로는 도시철도 2호선 공사가 한창이었다. 그 해 겨울이 유난히 추웠는데 무작정 공사 현장에 세워진 컨테이너 박스로 찾아간 날도 귀가 떨어져 나갈 정도로 추운 날이었다.

 

“저기... 여기서 일하고 싶은데요.(당당하게 쳐다보며)

“에??(여기서는 목소리가 평소보다 15dB이 올라갔다)

“여기서... 일 할 수 있습니까?(가소롭게 쳐다보며)

“네...(눈을 서서히 내리깔며)”

“여 학교 다니는 대학생 아니에요?(여전히 가소롭게 쳐다보며)

“예...맞는데요...(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어...여서 일 할 수 있겠나?(끝까지 가소롭게 쳐다보며) 일 힘든데~”

 

다음날부터 새벽6시 출근을 시작했다. 당시 나는 공사 현장에서 걸어서 1시간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원룸촌에서 자취를 하고 있었는데 제 시간에 출근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5시30분에 일어나서 씻고 나와서 자전거로 한 겨울 새벽바람을 뚫어야 했다.

6시 까지 출근하면 현장에서 일하는 모든 사람이 아침조회를 한다. 처음 들어본 이상한 음악을 틀고 간부로 보이는 사람이 나와 체조를 하면 아저씨들은 18,18,28 궁시렁대며 몸을 턴다. 그리고 체조를 한 간부보다 조금 더 높아 보이는 간부가 나와 아침 훈화를 하고 나면 현장 근무자들은 각 팀별로 흩어져 각 팀을 담당하는 십장의 통솔 하에 옹기종기 모닥불로 모여든다. 한바탕 욕의 향연을 듣다보면 내가 욕인지 욕이 나인지 모를 정도로 얼이 빠지곤 했었다. 하나같이 왕년에 한 가닥 해보지 않은 아저씨가 없었고, 하나같이 줄담배를 시도 때도 없이 피워 댔으며, 하나같이 나를 이상하게 쳐다보고 경계했다. 하고 많은 알바 중에 왜 이런 험한 일을 하냐~

당시 내게 처음 배정된(?) 일은 철근보조공이었다. 지하철이 지하로 다니게 하기 위해서는 지하의 암반을 뚫고 그 곳을 완전히 콘크리트로 덮어야 한다. 지상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지하에는 무수한 콘크리트와 철골 구조물이 있어야 한다. 그 철골 구조물을 만들기 위한 틀을 만드는 것이 철근인데 수십 미터에 달하는 철근 수톤이 아침마다 배달되어 오면 그것을 용도에 따라 가공하고 변형시키는 일이 철근공의 일이었다. 다른 작업팀과는 달리 철근공은 지상에서 일을 한다. 공사장 펜스 안에 수십 톤의 철근을 쌓아둔 채 일하기 때문에 오다가 떨어지면 바로 작업을 해서 지하로 내려주는 것이 주된 일이었다.

나는 철근공 이씨 아저씨를 데모도(보조)하는 철근 보조공이었다. 주로 하는 일은 아저씨 말에 크게 대답하고 시키는 일 하는 것이었다.

나를 가장 힘들게 했던 것은 한 겨울 날씨에 10차선 왕복도로 한편에 보기만 해도 비실한 철제 펜스를 두른 공사현장의 황량함도, 출근부터 퇴근하는 그 순간까지 한 시도 멈추지 않았던 아저씨들의 욕설도 아니었다. 바로 노가다 용어였다.

 

“야!(이런 현장에선 이름이 불려 꽃이 되길 바라는 것은 사치다) 저~ 가서 가꾸목 포바이포 갖고 와라, 얌마! 저쪽 철근 가빠로 덮어라!, 어이! 반도가지고 단디 해라, 나라시 똑바로 해라!”

 

처음 열흘 정도는 외계에 홀로 떨어진 지구의 유일한 생존자 같았다. 숱하게 지나가는 차들의 소음, 수시로 현장에 드나드는 트럭들의 소음, 아저씨들의 욕, 현장 기계들의 폭발적인 사운드.

아저씨들은 분명 소리 질러 오다를 줬는데 멀뚱멀뚱 서 있는 내게 다시 한 번 욕설과 함께 2차 오다를 내린다. 수백 번 정도 아저씨가 원하는 도구와 장비를 가져오지 못하다 보면 자연스레 노가다 용어가 몸으로 익혀진다.

어는 정도 일이 몸에 익혀지니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2주 정도 출근을 계속하자 처음 나와 면접(?)을 봤던 십장 아저씨의 태도가 달라졌다. 뒤로 간식도 더 챙겨주고 작업화와 장갑도 챙겨주곤 했다. 하루 종일 함께 일하는 이씨 아저씨도 자신의 인생스토리를 들려주고 철근공은 주로 큰 공사 현장(도로, 교량, 원전 등)을 찾아 전국을 다닌다며 자기 밑에서 제대로 일을 배워 돌아다니자는 권유를 하기도 했다. 전국 각지에서 모인 아저씨들은 그들이 쓰는 사투리와 욕설의 다채로움만큼 다양한 인생들이었다. 함바(현장의 식당)에서 식사하며, 모닥불에 모여 앉아 간부 욕 하며 해주는 말들은 영화, 책 이상이었다. 당시 현장에는 동남아, 중국에서 온 사람들도 함께 일하고 있었다. 그들의 어설픈 한국말을 듣는 것도 재밌는 일이었다.

개강 전까지 3개월을 꼬박 일했다. 물론, 재밌기만 했던 것은 당연히 아니다. 크게 다칠 뻔 하기도 했고 수십 미터 지하 현장으로 떨어질 뻔도 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알이 배겨 걸으면 그대로 내 몸이 산산이 조각나 부서질 것 같은 고통을 맛보기도 했다. 군대에서도 걸려보지 않은 동상에 시달려 보기도 했고, 괜히 평온한 현장에서 물 흐리려 온 거 아니냐(지금 생각해보면 괜히 대학생이 들어와서 노조결성을 도모하거나 아저씨들을 선동하기 위해 들어온 거 아니냐는 정도였던 것 같다. 당시 내가 다닌 학교가 데모를 많이 하던 곳이라 그런가?) 현장 간부들의 의혹을 사기도 했다.

하지만 새로운 경험이 주는 기대가 훨씬 컸기 때문에 3개월을 버틸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렇다.

3개월 동안 나는 좋은 경험을 하고 사람들과도 잘 지내고 젊어서 고생을 꼭 해봐야지 했던 호기가 있었던 것이다. 나는 피할 데가 있었다는 것이다. ‘너 같은 젊은 놈이 철근일 잘하는 놈 못 봤다. 나랑 같이 일해보자.’는 이씨 아저씨의 권유에도 감사하는 척 하면서 속으로 으스대며 거절할 수 있었던 것은

‘어차피 나는 당신과는 달라요~. 나는 여기에 그냥 알바 하러 온 거고요~. 나는 봄이 오면 저 길 건너 대학에서 공부할 사람이고요~. 졸업하면 그때 내가 여기에서 일했었지 하며 추억삼아 아주 가끔씩 떠올려는 볼게요~.’

 


“지금이 21세기라고 해서 모두가 화상 통화를 하고 제트팩을 메고 출근하는 건 아니다. 어떤 사람은 여전히 IMF시절을 살고 있고 또 어떤 사람은 서울 올림픽 시대의 삶을 산다. 삶의 스펙트럼 전체를 살펴본다면 얼마나 소수의 사람들만이 ‘동시대적인’ 생활수준을 누리는지 확인하고 놀라게 될 것이다.” (p.238)

 

 

이 책 「인간의 조건」은 한국사회에서 루저로 통칭되는 한 젊은이의 잔혹기다. 꽃게잡이 어선에서 편의점과 주유소로, 돼지농장에서 비닐하우스로 이른 바 아무도 일하려 하지 않는 곳으로 일을 하러 갔다.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은 분명 대한민국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지만 대한민국에서 살고 있지 않는 사람들이기도 했다. 모두가 너무 힘든 시기라고 하지만 여전히 시내 백화점에는 사람들로 넘쳐 난다. 없는 살림에도 아이패드는 꼭 사야하고 자동차는 남들 눈에 꿀릴 정도로 아닌 사양으로 꼭 타고 다녀야 한다.

이 책을 쓴 한승태라는 사람은 적어도 나의 노가다 경험보다는 훨씬 순수한 동기였던 것 같다. 여기서 ‘순수한’ 이라고 정의한 것은 그가 나보다는 더 생각 없이 일을 시작했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어서다. 밑바닥 인생을 경험하고 그것을 토대로 글을 써야지.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후일을 도모할 양분으로 삼아야지. 열심히 벌고 모아서 장사를 해야지. 뭐 이런 흔한 동기마저 없다. 적어도 이 책에서 저자 한승태가 이야기고자 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봐도 무방할 것 같다.

그래서 동기가 순수하다. 그냥 산 것이니까 그렇다.

 

 


“이 괴상망측한 사회가 비틀거리면서도 여전히 굴러갈 수 있는 이유는 수많은 사람들이 정당한 보상을 받지 못하고 있음에도 자신이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기 때문이다.” (p.438)

 

다만 그가 꽃게잡이 배에서 돼지농장에서 비닐하우스에서 주유소에서 만난 그 사람들과 그의 표현대로 괴상망측한 사회가 유지되는 이유를 찾았다는 것이 이 책을 통해 그가 하고자 하는 가장 절실한 말일 거라 생각한다. 작업장에서 숙소에서 술자리에서 누구보다 열을 올리며 욕지거리를 내뱉고 죽일 놈, 살릴 놈 하면서 당장 회칼을 집어 들고 쑤셔 넣을 것처럼 광분하지만 다음 날 출근하면 으레 고분고분한 사람으로 변해버리는 것. 응당 일한 대가를 받아야 함에도 ‘이렇게 어려운 시기에 일할 수 있다는 게 어디야, 남의 돈 버는 게 쉬운 일인 줄 알어?’ 라며 일하는 사람이 받아야 할 권리를 자체적으로 포기한 사람들이 막장 같은 사회를 굴려간다는 것. 하지만 저자는 심각하지 않다. 일을 시작하는 이유는 불분명했지만 그가 일을 그만둔 이유는 분명했다. 옆의 동료가 말하지 못하는 것을 상사에게 사장에게, 고용주에게 대놓고 얘기했다. 그리고 또 다른 막장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러나 이 책이 심각하지만은 않다. 분명 가슴이 답답하고 먹먹하고 짜증이 밀려오고 분노가 솟구치는 내용임에도 책을 읽다보면 히죽히죽 웃기도 한다. 저자의 사람됨 자체가 심각하고 고뇌하는 캐릭터가 아닌 것이 그의 글에서도 드러난다. 최악의 환경과 상황임에도 그것을 재미있게 표현한다. 자신을 끊임없이 자학하며 상대를 웃기는 블랙코미디 같기도 하다. 이를테면 이런 부분.

 

 

“홍어를 삭힌 데 쓴 짚에다 소변과 식초를 뿌린 다음 그 속에다 청국장과 날생선과 날고기를 열 달 정도 묵혀둔 냄새 같았다.” (p.188)

 

국도변을 지나다 보면 갑자기 훅! 하고 차안으로 유입되는 분뇨 냄새 중에서도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은 돼지사육장, 돼지농장 인근의 냄새다. 맡아 본 사람은 누구나 알 것이다. 저자는 법인에서 운영하는 대규모 돼지 농장에서 일했는데, 그가 그곳에서 맡은 냄새에 대한 표현이 재미있다. 지옥의 냄새라는 단편적인 표현에서는 느낄 수 없는 입체적이고 다면적인 묘사는 흡사 ‘내가 지금 돼지농장 기숙사 안에서 이 책을 읽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착각과 함께 순식간에 콧구멍을 손으로 움켜쥐기에 이르렀다.

이런 부분 말고도 앞서 말한 대로 자신의 절망적인 상황을 블랙코미디로 승화하는 부분이 많은데 키득거리며 웃으면서 슬픈, 어느 유명한 카피라이터의 표현대로 웃픈 상황이 책의 곳곳에서 펼쳐진다.

 

 


“긴장 때문에 깊게 잠들 수가 없었다. 나는 언제나 일어날 시간이 되기 전에 잠을 깼다.” (p.32)

“오늘 오전발이만 하고 땃배 잡으러 간다.”

선주가 말했다.

한 문장 안에 처음 듣는 단어가 두 개 이상일 땐 언제나 큰형님에게 뜻을 물었다. (p.53)

“항구에서는 모든 사람의 삶이 하향 평준화된 사회가 주는 만족감이 있었다.” (p.83)

 

어설픈 위로는 독이 된다. 나는 최소한 이 책을 쓴 한승태씨와 비슷한 경험을 잠시나마 해본 적이 있다. 6시 출근 시간을 맞추기 위해 새벽잠을 깨우고 일어나 늦지 않으려 자전거 페달을 미친 듯이 밟아댔던 기억, 도로 한 벌판의 현장에서 겨울바람을 온 몸으로 맞으며 한참을 일하다 참 시간에 맞춰 모닥불에 모여 듣던 아저씨들의 오색 창연한 욕의 향연, 한 대가리·반대가리부터 반도·반셍·가빠·오함마 태어나서 처음 들어보던 단어를 열흘 만에 몸으로 배웠던 기억, 그들과 나누었던 이야기, 이야기, 이야기.

처음의 동기와 일을 그만두게 된 경위가 저자와는 많이 달랐다. 그래서 그의 동기가 최소한 나보다는 순수한 것 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 또한 뭐 그렇게 불손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돌이켜 보면 이씨 아저씨를 따라 데모도 하며 전국을 떠돌아다니는 삶도 내게 어울렸을지도 모른다. 함께 일하던 방글라데시 형님들을 자취방으로 초대해 함께 놀았던 밤도 소중한 기억이다.

저자의 말대로 결국 아무런 영향도 미칠 수 없는 체스판에서 아슬아슬하게 서 있는 병정하나에 불과하다면 최소한 좋았던 기억과 지금의 삶의 양분이 된 과거의 경험을 곱씹는 것은 결코 찌질한 회상이나 비겁한 회피가 아니다.

한승태씨가 지금은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지금도 최선을 다하고 있으리라는 추측이다. 최선을 다해 살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나아지지 않는 삶의 고됨이 여전히 두 어깨를 내리 누르지만 분명히 최선을 다하고 있다. 분노로 가득한 거대한 풍선 안에서 살고 있는 것 같은 한국이라는 사회가 언제 뻥~! 하고 터져버릴지 모르지만 적어도 「인간의 조건」과 같은 책을 읽고 더 슬퍼지고 더 화나고 더 우울해지는 사회는 아니었으면 좋겠다. 풍선이 터지기 전까지 말이다. 내가 10년 전 철근 보조공의 일을 곱씹으며 뭔지 모를 마음의 충만함을 느끼는 지금처럼 이런 종류의 책을 보며 가볍게 웃음 짓고 일상을 대하는 마음을 한 번 더 다 잡는 정도였음 좋겠다.

정말 딱 그 정도 만이었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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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고양이를 데리고 노는 것일까, 고양이가 나를 데리고 노는 것일까? - 내가 나를 쓴 최초의 철학자 몽테뉴의 12가지 고민들
솔 프램튼 지음, 김유신 옮김 / 책읽는수요일 / 2012년 12월
평점 :
절판


지식인이 지금 시대만큼 푸대접을 받고 있는 때는 없으리라 생각한다. 정보가 넘쳐나는 시대를 살다 보니 너도나도 지식인 행세를 하고 있으니 말이다. 컴퓨터 앞에만 앉으면 세계가 내 모니터 앞으로 펼쳐져더니 이제는 조그만 전화기 하나만 있으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 인문학은 더 이상 매력 있는 학문이 되지 못하고 있고 밥벌이가 되지 않는 학문 분야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너도나도 TV에 나오면 전문가라고 떠벌인다. 책을 읽지 않는 시대라고 하지만 서점에는 온갖 종류의 책으로 넘쳐난다. 기준이 없다. 그래서 헷갈린다. 전문가라는 양반들이 나와서 하는 얘기들을 가만히 듣고 있노라면 도대체 누구 말이 맞는 것인지 알 수 없다. 한동안 회자되던 우스개 중 “100분 토론의 가장 큰 미스터리는 단 한 번도 토론의 결론이 내려진 적이 없다는 사실” 이라는 말이 있었다. 지금의 넘쳐나는 정보쓰나미 시대를 정확하게 함축하는 표현이라 생각한다.

최소한 80년대 후반 정도까지는 지식인, 지식인의 현실, 지식인의 고통, 지식인의 고민 따위의 담론이 멋있게 보이던 시대였으리라 짐작된다. 실제로 현실의 부조리를 몸으로 밀어내며 고민하고 고통하며 살아낸 지식인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장의 내 밥벌이 보다 시대의 아픔과 고민, 열망과 분노에 참여하고 그것에 젊음을 투신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의 삶을 담아낸 책이나 TV프로그램을 보면 가슴이 뜨거워지기도 하고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부채의식을 느끼기도 했다.

조금 더 이전 일제 식민시대를 사는 조선의 지식인들의 삶은 더욱 치열했을 것이다. 목숨을 담보하지 않으면 섣불리 나설 수 없는 시대적 상황에서 지식인의 정체성을 역사에 투영해 온전히 빼앗긴 나라와 민족, 해방과 독립을 위해 몸과 혼을 던진 이들이 있었다.

말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앞을 다투어 나와 말을 쏟아낸다. 혹시나 잘못 내뱉은 말이 있을까봐 조심스러워하는 기색도 없다. 당당하게 뱉는다. 그의 삶까지 이르는 치열한 자기 고백과 그것을 뒷받침하는 행동이 선행되지 않음에도 떳떳하다. 무슨 배짱인지 모르겠다.

혹자는 ‘힐링이 필요하다.’ 혹자는 ‘누군가 책임을 져야한다.’ 혹자는 ‘더 큰 승리를 위해 지금부터 준비해야 한다.’ 혹자는 ‘더 아파야 한다.’ 혹자는 ‘에라이~ 모르겠다. 될 대로 되라!’

뒤죽박죽 엉킬 대로 엉켜 실마리를 찾을 수 없을 것만 갔다. 십여 년 전 고(故)리영희 선생님의 책을 처음 접하며 받았던 지적인 충격과 쾌감을 다시 한 번 경험하고 싶다.

 

 

“독자여, 이 책은 선의로 쓴 것이다. 우선 이 책은 나의 집안일과 사사로운 일들을 기록해두기위해 쓴 것일 뿐, 독자를 의식하거나 나 자신의 영광을 위해 쓴 것이 아님을 밝힌다.” (p.344)

 

르네상스 시대를 대표하는 지식인 중 한 명인 몽테뉴의 「에세」를 12가지 주제로 나누어 엮은 이 책 「내가 고양이를 데리고 노는 것일까, 고양기가 나를 데리고 노는 것일까?」는 이후에 암흑의 시대로 기록된 16세기를 살았던 지식인 몽테뉴의 일기로 봐도 무방할 것 같다. 몽테뉴가 「에세」를 끝마치며 남긴 말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에세」는 정밀한 논리와 사고로 시대를 베어내는 책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법학자, 철학자, 영주, 시장, 거부 등 으리으리한 스펙을 가진 몽테뉴였지만 가까운 가족들과 절친한 친구의 죽음을 경험하고 난 후 완전히 새로운 가치관으로 바뀐 몽테뉴가 되었다. 철저한 스토아학파였던 그의 삶이 조금은 유연하게 바뀌는 과정을 담았다. 그리고 죽는 순간까지 그를 괴롭히던 지병(요로결석)과 싸우는 병상기록이다. 그런 것들에 대한 일기이자 일지다.

이 책의 긴 제목 「내가 고양이를 데리고 노는 것일까, 고양기가 나를 데리고 노는 것일까?」라는 문장도 몽테뉴의 「에세」에 있는 문장이다. 스토아 철학자 중 철학자였던 몽테뉴의 삶을 뒤바꾼 특별한 경험이 없었더라면 기르던 고양이를 보고 저런 생각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삶을 대하는 태도가 공격에서 수비로 바뀌고 철저함에서 유연함으로 전환된 사람이라는 것을 함축하는 가장 적절한 문장을 제목으로 선택한 것 같다.

 

 

“16세기에는 죽음이 전면적인 공세를 펼치고 있었다. 몽테뉴는 세네카의 말을 빌려 ‘죽음이 도처에 있다.’ 고 말했고” (p.46)

“총소리가 들리면 벌떡 일어나야 할까, 아니면 몸을 숙여야 할까? 적에게 저항해야 할까, 아니면 항복해야 할까? 어떻게 처신해야 옳은지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또한 전혀 알 수 없었다. 이 전쟁터에서 확실히 알고 있는 것 하나는, 언젠가는 모두 죽는다는 사실뿐. 16세기 프랑스의 종잡을 수 없는 싸움터에서 할 수 있는 일은, 그러한 현실에 어떻게 잘 대비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밖에 없었다.” (p.144)

 

앞서도 말했지만 16세기 유럽, 그 중에서도 프랑스는 격동의 장소였던 것 같다. 책의 곳곳에서도 몽테뉴가 가슴 아파하면서 표현하고 있는데 오랜 종교전쟁으로 인해 가까운 이웃과 친척, 한 집안에서 살고 있는 하인과도 한순간에 적이 되어버리는 암흑의 시대였다. 중세를 뒤덮은 종교의 어두운 장막을 간신히 벗어나 인간다움의 절정을 향해 달음질 하던 당시 지식인들에게 유럽 도처에서 벌어진 종교전쟁은 끝이 보이지 않는 절망의 터널도 다시 고꾸라지는 경험이었을 것 같다.

나와 종파가 다르고 종교적인 색깔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암살을 자행하고 마녀사냥을 하고 숙청을 가했다. 어느 한 편으로 서지 않을 수 없는 그 상황에 직면한 지식인들에게 명확한 것은 몽테뉴의 말대로 확실한 죽음뿐이었을 것이다.

총과 칼을 들어 전쟁에 참여하거나 그런 무기들보다 더 위력적일 수 있는 펜을 들어 한쪽의 민중과 추종자들을 격동시키는 시도와 의도가 지식인들에게는 반드시 맞닥뜨려야 할 상황이었을 것이다. 피해갈 수 없는 현실 앞에서 장렬하게 산화(散華)하거나 꽁무니 빼 달아나거나 입 닫고 귀 막고 눈 감고 쥐 죽은 듯이 숨어 있거나, 어쨌든 한 가지는 선택해야 했을 것이다.

 

 

“팔을 들어 어떤 것을 후려치려고 하다가 잘못 휘둘러 허공만 치면 내가 오히려 아픈 것처럼, 정신이 혼란스럽게 동요할 때 마음을 붙일 데가 없으면 우리의 마음은 갈 곳을 잃고 안으로 숨어버린다. 동물이 돌이나 쇠붙이에 맞으면 대드는 것처럼, 대상이 옳든 그르든 인간도 책임을 전가할 대상을 골라서 비난의 화살을 돌려야 하지 않겠는가.” (p.82)

 

몽테뉴가 살았던 시대의 지식인과 지금 내가 살아가는 시대의 지식인은 개념적으로도 천양지차일 테고 실제로 시대에 얼마만큼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의 정도에 있어서도 천양지차일 것이다.

단순히 지지하고 응원하고 꼭 당선되기를 고대하던 후보가 낙선하고 지지하지 않고 응원하지 않았으며 절대로 당선되기를 바라지 않았던 후보가 당선되는 시대에 대해서 절망하고 내팽개친 채 숨어버리는 것은 비겁한 짓에 지나지 않는다.

적어도 매일매일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었던 몽테뉴나 일제 강점기의 지식인들의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피하지 말고 도망가지 말고 꽁꽁 숨어있지 말고 나와야 한다. 그렇다고 뭐 대단한 사명과 소명으로 똘똘 뭉쳐 결연하게 목숨을 내던질 정도를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몽테뉴가 그랬던 것처럼 유연하게. 그렇지만 단호하고 일정하게 삶을 기록하고 점검하고 새로운 방향으로 생각하고 고민하는 것이 필요할 것 같다.

단순히 싸워 이겨야 할 대상, 극복해야 할 대상, 넘어서야 할 대상만 두고 있으면 매일이 고달프다. 피곤하다. 적어도 내가 기르는 고양이, 강아지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몽테뉴처럼 게으른 듯 게으르지 않은 여유 있는 고민 정도는 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내가 굳이 핏대 올리며 뛰어들지 않아도 나보다 더 잘할 수 있는 사람이 많다. 이것을 인정하는 것은 사실 쉽지 않다. 지식인입네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이기적일 수밖에 없다. 그런 사람들은 남을 인정하는 것에 인색하다. 남을 인정하는 것이 반사적으로 나보다 낫다는 자백을 하는 것으로 여기는 착각을 하기 때문이다. 굳이 내가 숟가락 얹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지난 연말 이후 계속되던 내 머릿속 실타래가 조금씩 풀어져 가고 있던 차에 이 책을 만나 다행이다. 몽테뉴를 만나 다행이다. 실타래를 풀어가는 또 하나의 방법을 배웠다.

내가 고민을 하고 있는 것인지, 고민이 내가 된 것인지 한참을 골똘히 생각했다. 몽테뉴를 한 번 따라 해보면 뭔가 새로운 사유의 세계로 넘어갈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별다른 변화는 없다. 생각이 꼬리를 물고 엉켜있는 실타래 옆에서 춤을 추고 있지만 골치가 아프지는 않다. 자극이 된다.

이 책에 소개된 몽테뉴는 자신을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든 여러 상황(시대적 상황, 가정사, 절친한 친구의 죽음, 본인의 병)을 두고 그것을 회피하거나 미친 듯이 이겨내려 애쓰지 않았다. 오히려 좀 더 멀리 떨어져서 관조하며 담담하게 기록했다. 삶의 작은 순간과 소소한 일상을 지나치지 않았다.

정체성을 잃어버린 이 시대 지식인들이 가져야 할 삶의 태도가 아닌 가 싶다. 말 잘하는 사람 수두룩하고 똑똑한 사람 수두룩하다. 글 잘 쓰는 사람도 수두룩하다. 너무 애쓰고 매달리면 절망도 크다.

 

 

나도 너무 애쓰지 않기로 했다.

 

“몽테뉴의 집에서 발생한 사건은, 결국 데카르트의 태도와는 다른 태도를 취하는 것이 좋다는 교훈을 준다. 진실이나 신뢰를 재구축하려면 다른 사람들을 피해 희귀한 형태의 이성으로 도피하지 말고, 사람들과 직접 대면하며 도덕성을 가까이에서 재확인해야 한다는 것이다.” (p.336)

 

나도 데카르트보다는 몽테뉴가 좋다.

어떤 책에서 본 이 문장이 지금의 내 실타래를 하나하나 풀어주고 있는 마법이 되었기 때문이다.

 

[진리는 오랜 숙고와 성찰을 통해 이를 수 있지만, 진리에 대한 신실함은 가장 단순하고도 간결한 실천으로 담보된다]

 

몽테뉴가 봤어도 무릎을 탁! 쳤을 것 같다.

굳이 그렇게 애쓰지 말고 가장 단순하고 간결한 일상의 실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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