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고양이를 데리고 노는 것일까, 고양이가 나를 데리고 노는 것일까? - 내가 나를 쓴 최초의 철학자 몽테뉴의 12가지 고민들
솔 프램튼 지음, 김유신 옮김 / 책읽는수요일 / 2012년 12월
평점 :
절판


지식인이 지금 시대만큼 푸대접을 받고 있는 때는 없으리라 생각한다. 정보가 넘쳐나는 시대를 살다 보니 너도나도 지식인 행세를 하고 있으니 말이다. 컴퓨터 앞에만 앉으면 세계가 내 모니터 앞으로 펼쳐져더니 이제는 조그만 전화기 하나만 있으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 인문학은 더 이상 매력 있는 학문이 되지 못하고 있고 밥벌이가 되지 않는 학문 분야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너도나도 TV에 나오면 전문가라고 떠벌인다. 책을 읽지 않는 시대라고 하지만 서점에는 온갖 종류의 책으로 넘쳐난다. 기준이 없다. 그래서 헷갈린다. 전문가라는 양반들이 나와서 하는 얘기들을 가만히 듣고 있노라면 도대체 누구 말이 맞는 것인지 알 수 없다. 한동안 회자되던 우스개 중 “100분 토론의 가장 큰 미스터리는 단 한 번도 토론의 결론이 내려진 적이 없다는 사실” 이라는 말이 있었다. 지금의 넘쳐나는 정보쓰나미 시대를 정확하게 함축하는 표현이라 생각한다.

최소한 80년대 후반 정도까지는 지식인, 지식인의 현실, 지식인의 고통, 지식인의 고민 따위의 담론이 멋있게 보이던 시대였으리라 짐작된다. 실제로 현실의 부조리를 몸으로 밀어내며 고민하고 고통하며 살아낸 지식인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장의 내 밥벌이 보다 시대의 아픔과 고민, 열망과 분노에 참여하고 그것에 젊음을 투신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의 삶을 담아낸 책이나 TV프로그램을 보면 가슴이 뜨거워지기도 하고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부채의식을 느끼기도 했다.

조금 더 이전 일제 식민시대를 사는 조선의 지식인들의 삶은 더욱 치열했을 것이다. 목숨을 담보하지 않으면 섣불리 나설 수 없는 시대적 상황에서 지식인의 정체성을 역사에 투영해 온전히 빼앗긴 나라와 민족, 해방과 독립을 위해 몸과 혼을 던진 이들이 있었다.

말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앞을 다투어 나와 말을 쏟아낸다. 혹시나 잘못 내뱉은 말이 있을까봐 조심스러워하는 기색도 없다. 당당하게 뱉는다. 그의 삶까지 이르는 치열한 자기 고백과 그것을 뒷받침하는 행동이 선행되지 않음에도 떳떳하다. 무슨 배짱인지 모르겠다.

혹자는 ‘힐링이 필요하다.’ 혹자는 ‘누군가 책임을 져야한다.’ 혹자는 ‘더 큰 승리를 위해 지금부터 준비해야 한다.’ 혹자는 ‘더 아파야 한다.’ 혹자는 ‘에라이~ 모르겠다. 될 대로 되라!’

뒤죽박죽 엉킬 대로 엉켜 실마리를 찾을 수 없을 것만 갔다. 십여 년 전 고(故)리영희 선생님의 책을 처음 접하며 받았던 지적인 충격과 쾌감을 다시 한 번 경험하고 싶다.

 

 

“독자여, 이 책은 선의로 쓴 것이다. 우선 이 책은 나의 집안일과 사사로운 일들을 기록해두기위해 쓴 것일 뿐, 독자를 의식하거나 나 자신의 영광을 위해 쓴 것이 아님을 밝힌다.” (p.344)

 

르네상스 시대를 대표하는 지식인 중 한 명인 몽테뉴의 「에세」를 12가지 주제로 나누어 엮은 이 책 「내가 고양이를 데리고 노는 것일까, 고양기가 나를 데리고 노는 것일까?」는 이후에 암흑의 시대로 기록된 16세기를 살았던 지식인 몽테뉴의 일기로 봐도 무방할 것 같다. 몽테뉴가 「에세」를 끝마치며 남긴 말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에세」는 정밀한 논리와 사고로 시대를 베어내는 책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법학자, 철학자, 영주, 시장, 거부 등 으리으리한 스펙을 가진 몽테뉴였지만 가까운 가족들과 절친한 친구의 죽음을 경험하고 난 후 완전히 새로운 가치관으로 바뀐 몽테뉴가 되었다. 철저한 스토아학파였던 그의 삶이 조금은 유연하게 바뀌는 과정을 담았다. 그리고 죽는 순간까지 그를 괴롭히던 지병(요로결석)과 싸우는 병상기록이다. 그런 것들에 대한 일기이자 일지다.

이 책의 긴 제목 「내가 고양이를 데리고 노는 것일까, 고양기가 나를 데리고 노는 것일까?」라는 문장도 몽테뉴의 「에세」에 있는 문장이다. 스토아 철학자 중 철학자였던 몽테뉴의 삶을 뒤바꾼 특별한 경험이 없었더라면 기르던 고양이를 보고 저런 생각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삶을 대하는 태도가 공격에서 수비로 바뀌고 철저함에서 유연함으로 전환된 사람이라는 것을 함축하는 가장 적절한 문장을 제목으로 선택한 것 같다.

 

 

“16세기에는 죽음이 전면적인 공세를 펼치고 있었다. 몽테뉴는 세네카의 말을 빌려 ‘죽음이 도처에 있다.’ 고 말했고” (p.46)

“총소리가 들리면 벌떡 일어나야 할까, 아니면 몸을 숙여야 할까? 적에게 저항해야 할까, 아니면 항복해야 할까? 어떻게 처신해야 옳은지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또한 전혀 알 수 없었다. 이 전쟁터에서 확실히 알고 있는 것 하나는, 언젠가는 모두 죽는다는 사실뿐. 16세기 프랑스의 종잡을 수 없는 싸움터에서 할 수 있는 일은, 그러한 현실에 어떻게 잘 대비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밖에 없었다.” (p.144)

 

앞서도 말했지만 16세기 유럽, 그 중에서도 프랑스는 격동의 장소였던 것 같다. 책의 곳곳에서도 몽테뉴가 가슴 아파하면서 표현하고 있는데 오랜 종교전쟁으로 인해 가까운 이웃과 친척, 한 집안에서 살고 있는 하인과도 한순간에 적이 되어버리는 암흑의 시대였다. 중세를 뒤덮은 종교의 어두운 장막을 간신히 벗어나 인간다움의 절정을 향해 달음질 하던 당시 지식인들에게 유럽 도처에서 벌어진 종교전쟁은 끝이 보이지 않는 절망의 터널도 다시 고꾸라지는 경험이었을 것 같다.

나와 종파가 다르고 종교적인 색깔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암살을 자행하고 마녀사냥을 하고 숙청을 가했다. 어느 한 편으로 서지 않을 수 없는 그 상황에 직면한 지식인들에게 명확한 것은 몽테뉴의 말대로 확실한 죽음뿐이었을 것이다.

총과 칼을 들어 전쟁에 참여하거나 그런 무기들보다 더 위력적일 수 있는 펜을 들어 한쪽의 민중과 추종자들을 격동시키는 시도와 의도가 지식인들에게는 반드시 맞닥뜨려야 할 상황이었을 것이다. 피해갈 수 없는 현실 앞에서 장렬하게 산화(散華)하거나 꽁무니 빼 달아나거나 입 닫고 귀 막고 눈 감고 쥐 죽은 듯이 숨어 있거나, 어쨌든 한 가지는 선택해야 했을 것이다.

 

 

“팔을 들어 어떤 것을 후려치려고 하다가 잘못 휘둘러 허공만 치면 내가 오히려 아픈 것처럼, 정신이 혼란스럽게 동요할 때 마음을 붙일 데가 없으면 우리의 마음은 갈 곳을 잃고 안으로 숨어버린다. 동물이 돌이나 쇠붙이에 맞으면 대드는 것처럼, 대상이 옳든 그르든 인간도 책임을 전가할 대상을 골라서 비난의 화살을 돌려야 하지 않겠는가.” (p.82)

 

몽테뉴가 살았던 시대의 지식인과 지금 내가 살아가는 시대의 지식인은 개념적으로도 천양지차일 테고 실제로 시대에 얼마만큼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의 정도에 있어서도 천양지차일 것이다.

단순히 지지하고 응원하고 꼭 당선되기를 고대하던 후보가 낙선하고 지지하지 않고 응원하지 않았으며 절대로 당선되기를 바라지 않았던 후보가 당선되는 시대에 대해서 절망하고 내팽개친 채 숨어버리는 것은 비겁한 짓에 지나지 않는다.

적어도 매일매일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었던 몽테뉴나 일제 강점기의 지식인들의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피하지 말고 도망가지 말고 꽁꽁 숨어있지 말고 나와야 한다. 그렇다고 뭐 대단한 사명과 소명으로 똘똘 뭉쳐 결연하게 목숨을 내던질 정도를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몽테뉴가 그랬던 것처럼 유연하게. 그렇지만 단호하고 일정하게 삶을 기록하고 점검하고 새로운 방향으로 생각하고 고민하는 것이 필요할 것 같다.

단순히 싸워 이겨야 할 대상, 극복해야 할 대상, 넘어서야 할 대상만 두고 있으면 매일이 고달프다. 피곤하다. 적어도 내가 기르는 고양이, 강아지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몽테뉴처럼 게으른 듯 게으르지 않은 여유 있는 고민 정도는 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내가 굳이 핏대 올리며 뛰어들지 않아도 나보다 더 잘할 수 있는 사람이 많다. 이것을 인정하는 것은 사실 쉽지 않다. 지식인입네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이기적일 수밖에 없다. 그런 사람들은 남을 인정하는 것에 인색하다. 남을 인정하는 것이 반사적으로 나보다 낫다는 자백을 하는 것으로 여기는 착각을 하기 때문이다. 굳이 내가 숟가락 얹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지난 연말 이후 계속되던 내 머릿속 실타래가 조금씩 풀어져 가고 있던 차에 이 책을 만나 다행이다. 몽테뉴를 만나 다행이다. 실타래를 풀어가는 또 하나의 방법을 배웠다.

내가 고민을 하고 있는 것인지, 고민이 내가 된 것인지 한참을 골똘히 생각했다. 몽테뉴를 한 번 따라 해보면 뭔가 새로운 사유의 세계로 넘어갈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별다른 변화는 없다. 생각이 꼬리를 물고 엉켜있는 실타래 옆에서 춤을 추고 있지만 골치가 아프지는 않다. 자극이 된다.

이 책에 소개된 몽테뉴는 자신을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든 여러 상황(시대적 상황, 가정사, 절친한 친구의 죽음, 본인의 병)을 두고 그것을 회피하거나 미친 듯이 이겨내려 애쓰지 않았다. 오히려 좀 더 멀리 떨어져서 관조하며 담담하게 기록했다. 삶의 작은 순간과 소소한 일상을 지나치지 않았다.

정체성을 잃어버린 이 시대 지식인들이 가져야 할 삶의 태도가 아닌 가 싶다. 말 잘하는 사람 수두룩하고 똑똑한 사람 수두룩하다. 글 잘 쓰는 사람도 수두룩하다. 너무 애쓰고 매달리면 절망도 크다.

 

 

나도 너무 애쓰지 않기로 했다.

 

“몽테뉴의 집에서 발생한 사건은, 결국 데카르트의 태도와는 다른 태도를 취하는 것이 좋다는 교훈을 준다. 진실이나 신뢰를 재구축하려면 다른 사람들을 피해 희귀한 형태의 이성으로 도피하지 말고, 사람들과 직접 대면하며 도덕성을 가까이에서 재확인해야 한다는 것이다.” (p.336)

 

나도 데카르트보다는 몽테뉴가 좋다.

어떤 책에서 본 이 문장이 지금의 내 실타래를 하나하나 풀어주고 있는 마법이 되었기 때문이다.

 

[진리는 오랜 숙고와 성찰을 통해 이를 수 있지만, 진리에 대한 신실함은 가장 단순하고도 간결한 실천으로 담보된다]

 

몽테뉴가 봤어도 무릎을 탁! 쳤을 것 같다.

굳이 그렇게 애쓰지 말고 가장 단순하고 간결한 일상의 실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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