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력자 - 2012 제36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최민석 지음 / 민음사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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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가 뻔한 영화를 보는 것은 고역이다. 중간도 읽지 않았는데 범인이 예상되는 추리소설을 읽는 것도 고역이다. 고속도로 정체로 평소의 2∼3배 이상 시간이 지체될 것을 알고도 IC를 들어가는 것도 고역이다.

어린 시절 어른이 빨리 되고 싶었다. 어른의 기준이 내게는 21살 이었다.(왜 그런 기준을 갖게 되었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알 방법이 없다) 그래서 계단을 오르거나 걸을 때 꼭 21걸음을 세고 다시 1을 세면서 언젠가 21살의 멋진 어른이 되어 있을 나에게 최면을 걸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가장 하고 싶었던 것은 운전이었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될 때까지 내 꿈은 트럭 운전기사였다. 하얀 장갑을 끼고 집채만 한 자동차를 제 맘대로 움직이고 운전하는 트럭 운전기사 아저씨가 그렇게 멋있을 수 없었다.

중학교와 고등학교에 진학하며 꿈을 바뀌었지만 여전히 21살에 대한 동경은 있었다. 부모님이 내가 21살이 되면 특별히 뭘 해주겠다는 약속을 하신 것도 아니었고 누군가 짠~! 하고 나타나 내 소원을 들어주겠다 약속을 한 것도 당연히 아니었다. 그냥 멋진 어른의 모습을 혼자 상상하고 동경하면서 자기만족을 했던 것 같다.

 

나의 삶에 대한 가치는 모호함에 있다. 앞날이 정확하게 예측이 되고 결말이 뻔히 보이는 삶을 살아가는 것은 내게는 무의미하다. 잘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고 만져지지 않는 미래를 살아가는 것이 내게는 유의미한 일이다.

만약 내게 어느 날 신이 나타나 “너의 미래를 보여주겠다. 너는 이렇게 살 것이고 이런 일을 겪을 것이고 저렇게 살면서 생을 마감할 것이다.” 라고 한다면 나는 신이 사라지자마자 그 신을 저주할 것이다. 그리고 다시 나타나 모두 뻥이라고 말해달라고 있는 대로 생떼를 부릴 것이다.

내게 있어 삶은 모호하고 불분명하기 때문에 살아나갈 가치가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공평수는 어쩌면 자신이 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므로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어떤 측면에서는 오로지 부끄럽지 않게 지는 것, 그것 하나뿐이었는지도 모르겠다.” (p.210)

 

공평수는 자신이 당연히 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다. 알고도 링에 올랐다. 링에 오르기 전 그가 부린 허영과 위세와 허풍은 그의 머리를 파먹어가는 두 개의 커다란 종양을 잠시라도 잊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나의 삶이 언제쯤 끝나갈 것이라는 시한부를 선고받은 인생을 사는 사람의 마음이 모두 다 공평수의 그것과 같지는 않을 것이다. 있는 대로 욕을 퍼붓고 마지막 눈을 감는 그 순간까지 주위 사람들을 힘들게 하는 사람도 있다. 너무나도 평안하고 평온하게 삶의 마지막을 보내는 사람이 있는 반면 마지막 순간까지 악을 쓰며 죽는 사람도 있다.

그만큼 나의 삶의 끝을 알고 있다는 것은 힘든 일이다. 공평수는 그가 행해 온 젊은 날의 허망함과 후회스러움을 그의 마지막 링 위에서 온전히 쏟아내고자 했다. 그래서 마지막 눈을 감는 그 순간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고 죄스럽지 않으며 후회스럽지 않기를 소원했다.

 

 

“대리운전 하는 챔피언도 있어.” (p.92)

“링 아래서 주먹을 휘두르면 선수 생명 끝장이야.”

“무슨 소리예요. 매미 타령이나 하는 주정뱅이 주제에!” (p.119)

 

예측이 불가능한 삶을 사는 것이 힘들 때도 있다. 왜 나만 힘들고 고통 받는지 원망스러울 때도 있다. 누구나 찬란했던 과거를 쏟아낸다.(그러고 보면 초등학교 때 반장을 안 해본 사람이 없다. 다들 반장을 해봤다고 하니)

아직 인생의 절반도 달려가지 못한 나와 동년배들에게도 과거 이야기는 대화의 단골 주제다.

자신의 말마따나 험악한 세월을 온몸으로 부딪쳐 온 공평수의 찬란했던 과거를 듣기 위해서는 삼일 밤낮이 필요했을 것이다. 시원한 맥주 수십 캔과 함께. 매미와 교감하는 초능력을 가졌다고 떠들고 다니는 왕년의 챔피언은 대리운전을 하는 왕년의 다른 챔피언을 보고 참혹했을 것이다. 링 아래서는 절대로 주먹만을 휘두르지 않는다는 철칙을 유지하면서 그의 유일한 자존심인 챔피언 자리를 지켜왔다. 언젠가 왕년의 돌주먹 박종팔씨가 나오는 교양 프로그램을 본 기억이 났다. 동양챔피언까지 지낸 박종팔 씨가 한때는 ‘돈팔이’라고 불릴 만큼 잘 나갔던 시절이 있었는데 여차여차해서 가진 돈 모두 잃고 권투계에서도 알력다툼으로 밀려나 완전한 야인생활을 했었다고 했다. 죽으려고도 하고 세상 다 산 사람처럼 엉망으로 살기도 했다며 챔피언의 삶을 돌아보며 회한 짓는 그 장면이 떠올랐다. 저 하늘 꼭대기에서 저 땅 속 깊은 끝까지 추락하는 것과 같으리라 짐작해 본다.

공평수 또한 그 고통을 자기 혼자만의 힘과 의지만으로는 버틸 수 없어 매미와 교감하는 초능력이라는 정체불명의 능력을 만들어 내 고통에서 눈을 돌려 버렸다. 그렇게 하지 않고는 살 수가 없으니까.

이제까지 살면서 ‘이게 정말 위기다.’라고 생각했던 적이 두 번 있었다. 앞으로의 인생 속에서 두 번이 더 있을지 여러 번 더 있을지 알 수 없다. 모르겠다. 공평수처럼 고통과 위기에 직면하지 않고 고개를 돌려 다른 곳에서 잊을 수 있는 능력을 찾아야 하는지 지난 두 번의 위기를 넘겼을 때처럼 시간의 흐름에 맡겨 둘지 그것도 알 수 없다. 최소한 링 아래에서는 절대로 주먹을 휘두르지 않는다는 원칙·철칙 하나는 가져야 한다. 그리고 비록 그가 당장의 위기와 고통에는 고개를 돌렸지만 무시로 커 가는 머릿속 종양 덩어리를 안고도 죽을힘을 다해 마지막 방어전을 치룬 것처럼 내게도 준비될 인생의 방어전을 준비해야 한다.

아직은 뭘 준비해야 할지, 공평수처럼 외딴 섬에 들어가 특별 훈련을 해야 할지 어떨지 모르겠다.

세상에는 공평수와 같은 사람만 있는 것은 아니다.

 

 

“물론 취재에는 취재비용이 들어가고, 그러기 위해서는 배우자의 안정적인 내조와 이해, 그리고 지원이 필요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나는 연지와 반드시 결혼을 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공평수의 자서전부터 써야 한다.” (p.105)

 

공평수의 조카로 추정되는 소설 속 ‘나’는 신인 작가다. 언제나 ‘을’의 스탠스를 유지할 수밖에 없는 가난하고 힘없고 어딘가 반드시 빌어 붙어살아야 할 존재다. 고작 10여일의 찬란함을 위해 7년에서 10년을 유충으로 생활하는 매미와 다를 바 없다. 언젠가 한번만 제대로 뜨면, 대박 터지면 지금의 추레함은 한방에 날려 버릴 수 있다. 그것을 꿈꾼다. 생각해 보면 다른 길도 없다. 한 해에 문학상을 통해 등단하는 작가의 수에 다가 몇 년 전부터 등단했지만 데뷔작을 발표하지 못한 채 어제나 저제나 출판사의 연락만을 기다리는 누적된 작가의 수를 더하면 기실 로또 당첨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요즘은 작가가 쓴 책이 아니라 스님이나 연예인, 유명인이 쓴 책이 불티나게 팔리는 현실이니 몇몇 이름만으로 책이 팔리는 대형작가가 아닌 다음에야 10년이 지나도 여전히 유충 생활을 벗어날 수 없다. 찬란한 10일을 말 그대로 꿈만 꾸는 것이다. 꿈만 꾸다가 지난한 삶을 마무리 하는 것. 꼴까닥.

 

 

“나는 왜 지금 여기에 와 있는가? 그 의문이 사라지지 않았다. 당연했다. 나는 연지와 결혼을 하기 위해 장인이 될 뻔 한 이건수 교수의 말대로 결혼 자금 2000만 원을 준비하기로 했다. 그리고 그 2000만 원을 위해 말도 안 되는 인간 망종 공평수의 자서전을 쓰기로 했고, 그 인간이 정말이지 말도 안 되는 복귀를 한다고 해서 전지훈련을 하는 섬까지 따라왔다.” (p.155)

 

누가 묻지도 않았는데 알아서 자기방어를 한다. ‘나는 작가로서의 자존심을 지키면서 연지와의 사랑을 완성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매미 초능력에 빠져 있는 생 양아치 같은 삼촌이라는 작자의 자서전을 써준다. 쓰는 것이 아니라 써 주는 것이다. 그래서 여기 이름 모를 섬까지 따라왔다.’

‘나’는 등단했지만 등단하지 않았다. 인정받았지만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신세가 처량하다. 아버지는 퇴물깡패고 되지도 않는 말을 지껄이는 삼촌이라는 작자는 갑자기 나타나 자신의 자서전을 써달라고 한다. 비록 데뷔작을 내보이지 못했지만 작가의 마지막 자존심을 지키고 싶었다. 누구나 알 만한 유명인사의 부탁도 아니고 자신이 보기에도 한심스럽고 어이없는 삼촌이란 작자의 자서전을 써야 한다.

코너에 몰린 복서는 쏟아지는 상대의 주먹을 다 피하지 못하고 클린치한다. 할 수 있을 때까지 클린치 한다. 상대복서는 어떻게든 클린치를 풀어 버리고 결정적 카운터펀치를 날리려 한다. 10년이 지나도 유충 신세를 벗어날 수 없는 매미유충이라면 차라리 그 나무에게 뛰어 내리는 편이 낫다. 가만히 앉아서 문단 탓, 출판사 탓, 저 놈 탓, 이 놈 탓하며 허송세월을 보내는 것 보다야 매미 초능력에 빠져 있는 생 양아치 같은 삼촌이지만 그치의 자서전을 써 주고 그 돈으로 연지와의 해피엔딩을 꿈꿀 수 있다면 ‘나’는 죽을힘을 다해 클린치를 해야 한다.

 

 

“어차피 언젠가는 질 수밖에 없는 게임이야. 어떻게 지느냐? 그래, 중요해. 사람들은 어쩌면 그걸 내 마지막 모습으로 기억할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 모습이 근사하지 않더라도, 초라하더라도, 보잘것없더라도, 상관없어. 헐렁한 트렁크스, 조명, 땀 냄새, 훈련, 실패로 터득한 내 스텝, 그걸 기다리는 링, 그것만으로 충분해. 이 위에 있을 때, 나는 필요한 사람이라는 게 느껴지거든.” (p.217)

 

 

책 제목인 「능력자」는 거짓말이다. 이 책 「능력자」에서는 능력자가 단 한 사람도 나오지 않는다. 공평수는 결국 졌다. ‘나’는 연지와 해피엔딩을 만들지 못했다. 공평수의 자서전은 나왔을 리 만무하다. 그렇게 그냥 방어전을 끝이 난다. 하지만 이것이 마지막 방어전이 아닌 것만은 확실하다. 그저 과거의 찬란함에 취해 ‘내가 옛날에~!, 내가 왕년에~!.’만 주절대던 공평수가 자신의 존재를 명확히 인식했다. 내게 최적화된 트렁크와 훈련, 스텝, 그리고 그것을 받아 줄 자신만의 링만 있으면 그의 삶 전체를 통틀어 가장 필요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생겼다. 그의 머릿속에서 자라나는 종양 덩어리가 갑자기 생긴 공평수의 자신감처럼 갑자기 공평수의 삶을 송두리째 빼앗아 갈지도 모르는 시한부 인생이지만 그래도 얼마만인지도 모를 정도로 너무나 오랜만에 자신이 비로소 필요한 사람인 것을 깨달은 그의 방어전에는 박수를 보내고 싶다. 아무도 기대하지 않은 그만의 방어전을 치러낸 것만으로도 그는 충분히 박수를 받을 만하다.

 

 

“어느 누구도 다운되지 않았고, 경기장 안의 모든 불빛과 눈빛이 이 둘의 움직임에 따라 움직였다.” (p.208)

 

어쩌면 능력자가 필요하지 않은 세상인지도 모르겠다. 누구나 능력자가 되고 싶어 하지만 매미가 7년에서 10년 동안 유충 생활을 견뎌내는 힘은, 죽을 만큼 운동하고 훈련해 살과 살이 맞닿는 치열한 링위에서의 혈투를 견뎌내는 힘은 대단한 것이 아닐 것이다. 내가 여전히 이 세상에서, 내 삶에서 중요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 필요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 그것이 모진 풍파를 헤쳐 나갈 힘이다. 능력이다.

 

그래서 당신도 나도 능력자다.

우리는 반드시 필요한 존재일지도 모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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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 확률 높이기 프로젝트 - 지옥에 가기 싫은 한 남자의 요절복통 종교체험기
위르겐 슈미더 지음, 배명자 옮김 / 펜타그램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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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서울의 모 대형교회 목사가 설교 도중 교인들에게 사과를 하고 눈물을 보였다고 했다. 그 모 대형교회는 워낙 기세가 등등한 교회라 지하철역의 용도까지 변경하고 으리으리한 규모로 교회를 신축하고 있던 교회였다. 그런데 그 교회 담임목사의 학위 논문이 표절이라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당연히 부인하다가 공신력을 가진 곳에서 검증을 받아 표절이라는 판정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교인들에게 사과한 것 같았다. 더 재미있는 사실은 표절의혹은 제기한 사람들이 바로 그 교회 교인들이라는 것이었다. 교회 신축에 대해 반대하는 교인들 중 일부가 자신들의 담임목사의 학위논문 표절의혹을 제기하고 밝혀낸 것이다.

이제 더 이상 한국의 교회는 사람들에게 신뢰를 받지 못할 것 같다. 이유는 엄청나게 많지만 가장 큰 이유는 교회가 교회 노릇을 제대로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저 ‘제 배 채우기’에만 혈안이 되어 있었다. 더군다나 지난 5년 동안 그나마 가려져 있던 기독교인들의 치부가 낱낱이 드러났다.

이런 상황에서 ‘나는 교회에 다닙니다.’라고 떳떳하게 밝히는 것이 쉽지 않다. 술·담배를 하고 안 하고의 문제를 넘어서 교회에 다닌다고 하면 뭔가 이상하게 쳐다보고 ‘아직도 교회에 다녀?’ 라며 구리게 인식하기도 한다. 그 사람들을 탓할 수 없다. 교회가 교회답지 못하니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욕을 먹고 손가락질을 당하는 것이다.

나는 교회에 다닌다. 중3때부터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다. 중·고등학교와 대학교때 함께 교회에 다니던 사람들 중 지금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이 꽤 많다. 직업 특성상 상황이 여의치 않아서 교회에 가지 못하는 사람이 일부 있지만 대부분 본인의 의지로 교회 발길을 끊었다. 나 또한 대학시절을 거치며 내 신앙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거듭했다. 성경을 여러 번 읽고 책을 읽으면서 공부하고 고민했다. 나는 내 나름의 신앙관을 정립할 수 있었고 지금에 이르렀다. 사실 ‘교회 발길을 끊어야겠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었지만 근본적인 내 신앙을 무너뜨리지는 않았다.

나는 앞으로도 계속 이 신앙을 유지할 것 같다.

 

 

 

“나는 무신론자가 아니라 불가지론자다. 신의 존재는 증명할 수도 부정할 수도 없다는 것이 내 의견이다.” (p.19)

 

기독교인은 무신론자, 진화론자를 싫어한다. 불쌍하게 여기다가 혐오하기에 이른다. 기독교인들이, 특히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가장 많이 욕먹는 것이 배타적인 태도다. 자신들 편이 아니면 모두 나쁜 놈이 되는 것이다.

이 책 「구원 확률 높이기 프로젝트」의 저자 위르겐 슈미더씨 또한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딱 싫어할 타입니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사람이니까.

이 책을 읽기 전에는 불가지론자에 대해서 잘 알지 못했다. 나 역시 기독교인이라 무신론자에 대해서만 관심이 있었나 보다. 무신론자와 불가지론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뭐 물론 한국 교회는 둘 다 싫어할 것은 뻔하다.

 

 

“종교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읽어도 좋다. 종교를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읽는 편이 좋을 것이다. 삶의 의미를 찾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반드시 읽어야 한다.”  

“나는 여러 종교를 좀 더 자세히 연구하고 직접 조사하고 체험해 봄으로써 칩을 걸 숫자를 정확히 맞추고 싶다. 지금까지 나는 다른 종교에 대해 뜬구름 잡는 정도로 알고 있었다.” (p.27)

 

나는 다른 종교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을까?

앞서도 말했지만 대학 시절 내 신앙에 대한 진지한 공부와 치열한 고민을 했었다. 그리고 그것의 일환으로 다른 종교의 경전 몇 권을 읽었다. 그때 생각으로는 ‘다른 종교의 경전을 읽고 그것이 더 성경보다 내게 설득력이 있으면 나는 그 종교를 믿을 것이다.’ 라는 객기로 가득했었던 것 같다. 하지만 다른 종교의 경전들은 너무 어려웠다. 이해도 잘 되지 않았다. 그나마 「화엄경」은 조금 읽을 만했다.

나는 내 신앙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점검을 위해 다른 종교를 알아보고자 했다. 당시 내게는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여차하면 종교를 바꿀 수도 있는 문제였으니까.

그런데 불가지론자인 저자에게는 여러 종교를 공부하고 연구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 저자는 자신의 ‘구원 확률을 높이기 위해서’ 라고 했다. 재미있는 접근이다. 불가지론자이기 때문에 가능한 접근이다. 현세가 너무 지독하고 힘들어서 내세만을 기다리고 고대하는 것이 아니라 기왕이면 내세(내세가 있다면)에도 행복한 삶을 살고 가족들과 함께 즐겁게 지내고 싶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누구의 강요가 설득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직접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진행했다는 것이 흥미로웠다.

 

 

“범신앙론자가 되기 위한 기본적인 준비로, 여러 성물들 외에 대략 150권의 책과 100편의 영화를 구입했다.” (p.67)

 

불가지론자이던 저자는 범신앙론자가 되기로 한다. 범신앙론자란 모든 종교를 포용하고 각 종교에서 배울 수 있는 점은 배우고 차용할 점은 차용하는 자세를 말하는 것 같다. 책에서 저자는 달라이 라마의 말을 인용하면서 분명 모든 종교에는 사람을 행복하게 하기 위한 선한 의도가 있으리라 믿는다고 말한다. 그것을 찾아가기 위해서 저자는 예배·제사 의식에 필요한 성물과 책, 영화를 구입했다. 나는 겨우 책 몇 권을 사서 생색냈을 뿐인데 저자는 나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스케일이 컸다. 책에서는 구원 확률 높이기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몇 편의 영화를 봤고 몇 권의 책을 읽었는지 구체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지만 실제로 자신의 집 방 하나에 수많은 종교의 성물을 함께 진열해 놓고 노트에는 수많은 종교의 성일과 축일을 메모해 그것을 기리는 등 진짜 그의 프로젝트 범위에 들어간 종교에 온전히 심취하기 위해 노력하는 면모가 책에서 많이 보인다.

 

 

“심판대 앞에서 처음 받는 질문은 ‘신을 믿었느냐?’ 혹은 ‘기도와 예배를 열심히 했느냐?’가 아니라 ‘모든 이웃에게 친절했고 그들로부터 신망을 얻었는가?’이다. 나는 이 문장을 내 프로젝트의 기본 규칙으로 삼기로 했다.” (p.62)

 

저자는 비교종교학자가 되려고 하지 않았다. 여러 종교를 비교하고 분석해서 장·단점을 파악해 자신의 블로그나 SNS에 올리려고 하지 않았다. 모 기관으로부터 지원을 받아 특정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도 아니었다.

그는 그저 지금보다 더 착한 사람이 되고자 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하다. 나는 단면적으로 ‘착한 사람’이라고 표현했지만 지금 존재하는 수많은 종교인들이 가지지 못한 ‘착함’이다. 단순히 자신의 종교를 포교하고 끌어들이기 위한 ‘착함’이 아니라 일상에서 이웃들에게, 내 가족들에게 ‘착한 사람’이다. 당장 몇 주 뒤 교회에서 있을 [전도 대 축제]에 데려가기 위해 몇 주 동안 갖은 친절을 베풀고 호의를 베푸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나의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내 가족과 친구들에게 ‘지금보다 더 착한 사람’이 되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특히, 한국 교회는 더욱 그렇다. 교회에서만 착하고 선한 사람들이지 일주일의 나머지 6일 동안은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보다 더 불의하고 부정의한 일을 일삼는 사람들이 많다. 지난 5년 동안의 고위공직자 청문회만 돌이켜 봐도 쉽게 알 수 있다. 지금 박근혜 정권의 인사들만 봐도 그렇다. 교회에서는 존경받는 장로님일지는 모르겠지만 아주 간단한 인사 검증조차 통과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고 기득권을 가진 사람이지만 기본적인 국가의 의무조차 이행하지 않는 사람들.

저자의 프로젝트 범위에 한국 교회와 한국 교회 사람들이 들어가 있지 않아 다행이다. 만약 한국 교회를 조금이라도 들여다봤다면 그는 불가지론자에서 철저한 무신론자 내지는 한국 교회 혐오주의자가 되었을 지도 모른다.

 

 

“어떻게 이런 순간이 왔는지도 모른다. 다시 이런 순간을 맞으려 여러 번 시도했지만 소용없었다. 의도적으로 만들 수 있는 순간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냥 일어났고 어쩌면 다시는 일어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p.133)

“나는 잠든 아내 곁에 누워 있었고 내 배 위에는 아들이 잠들어 있었다. 나는 우리 가족의 지난날들을 잠시 회상했고 우리가 함께 했던 좋은 추억들을 떠올렸다. 그것이 전부였다.”

 

저자의 프로젝트는 사실 굉장한 용기가 필요했다. 자신의 직장에 몇 개월간 휴가를 내어야 했고 많은 종교를 알아간다는 것도 말이 쉽지 이상한 오해와 불필요한 관심을 받기도 했다. 한국에서는 어림도 없는 일이다. 출산휴가가 아닌 다음에야 그렇게 오랜 시간동안 휴가를 내 줄 직장도 없을뿐더러 당장 교회에서는 내 이름을 부르며 ‘회개하라’ 는 기도를 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삽시간에 온 교회에 내 이름이 퍼지고 ‘그렇다더라, 아이고, 어쩌나, 불쌍해, 이상해, 미쳤어’(알고 계신가? 뒷담화가 가장 많이 일어나는 곳이 한국의 교회다. 흐흐) 등등 모든 교인들의 기도제목에 내 이름이 올라갈 것이 뻔하다.

다행스럽게도 저자는 독일 사람이기에 이런 프로젝트가 가능했고 다행스럽게 저자는 자신만의 종교적인 체험을 한 것 같다. 책에서도 밝힌바 구체적으로 그 순간에 대해 설명할 수는 없지만 분명히 다시 일어나지 않을 순간을 경험했다.

나도 대학 때 그런 경험을 했다. 어떻게 설명할 수 없고 표현할 수는 없지만 분명 저자와 비슷한 경험이었을 것이다.

 

 

스리랑카에 있는 부처님의 거룩한 송곳니 사원을 방문한 것보다 뮌헨 공항의 ‘기도와 명상의 방’에 갔던 일이 훨씬 영적인 경험이었다.” (p.339)

 

갑작스레 자신의 침실에서 경험한 그 순간 이후 저자는 훨씬 더 깊고 세밀한 영적인 경험을 의도적으로 할 수 있게 된다. 요가나 명상일수도 있고 기도일수도 있는 그 영적인 행위가 그를 달라지게 했다. 물론, 그의 일상과 주변의 환경은 그 전과 동일하다. 자신이 바뀐 것이다. 일부러 부처님의 송곳니가 모셔진 사원을 방문하거나 주요한 종교적인 유적지나 문화재를 방문하지 않아도 자신의 일상 한 가운데서 영적인 경험을 맛본다는 것은 분명 행운이다.

나도 그랬으면 좋겠다.

 

 

“프로젝트를 시작하기 전에는, 신이나 절대자의 존재 증명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있든 없든 크게 상관하지 않고 불가지론자로서 편히 살다가 사후에 무슨 일이 생길지 느긋하게 기다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프로젝트를 진행한 후 나는 이런 느긋한 생각에서 한 단계 발전했다. 느긋함 대신에 기대와 기쁨이 자리했다.” (p.385)

 

무신론자인 저자에게는 별 상관이 없던 종교가 이제는 그의 삶을 조금 더 재미있게 하고 의욕적으로 하게 하는 도구가 되었다. 어쩔 수 없이 부모에게 물려받은 종교이거나 지금에 와서야 종교를 버리기도 애매해서 그냥 그렇게 자신의 종교를 유지하고 있는 수많은 종교인들은 저자만큼은 아닐지라도 자신의 종교를 제대로 돌아보는 프로젝트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특히 한국 교회 교인들은 더욱 그렇다. 그냥 일요일에 교회 와서 귀에 들리지도 않는 설교를 들은 후 친목 모임 하듯이 마음에도 없는 인사를 주고받는 것이 자신의 종교 행위의 전부라면 분명 신 혹은 절대자는 그런 종교 행위를 받지 않을 것 같다. 아무런 생각과 고민, 치열한 삶의 자세도 없이 꾸역꾸역 예배당으로 기어 들어오기만 하는 사람들은 예수시대 위선의 표상이던 바리새인들에 다름없다.

내가 한국 교회에 다니는 기독교인이기에 자꾸만 한국 교회를 트집 잡는 데, 뭐 어쩔 수 없다.

 

저자의 구원 확률이 얼마나 높아졌을지 알 수는 없지만 얼마만큼 확률을 높이겠다는 목표가 애초에 없었기 때문에 그 시도 자체로 그는 분명 행복했을 것이다.

 

 

“나는 십자가를 목에 걸고 오륜이 적힌 티셔츠를 입고 [모세오경], [코란], [도덕경]을 읽은 다음, 명상을 하고 요가를 했다.” (p.370)

 

나도 한 번 해보고 싶다.

내가 다니는 교회 사람들 모르게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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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마에서 나온 이슈북은 두 번째다. 첫 번째는 유종일 교수의 「경제민주화가 희망이다」라는 책이었다.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경제정책에 있어서의 실정과 괴상한 형태의 현재 한국의 정당체제, 신자유주의의 종말과 함께 대두된 경제민주화에 대한 실제적인 대안과 구체적 사례를 살펴 볼 수 있었다. 많지 않은 분량의 책이지만 양질의 내용을 담고 있는 책이라 생각했다. 두 번째 책은 지선스님과 손석춘 선생의 인터뷰를 엮은 「큰 무당 나와야 정치 살아난다」라는 책이다. 지선스님이라는 분을 처음 들어봤다. 언뜻 생각한 것은 참여정부 시절 천성산 터널 공사를 반대해 오랜 기간 단식한 스님이었다. 그런 분이 ‘6월 항쟁의 스님’이라니 TV에서 보던 것보다 나이가 많으시네 생각했다. 그런데 그 분은 지율스님이었다. 이분은 지선스님이다.

 

 

“국민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여기는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입니다. 지금부터 방송을 시작하겠습니다. 지금 이 시각 장충체육관에서 선출되고 있는 노태우 민정당 대통령 후보는 국민의 이름으로 무효임을 선언합니다.” (p.57)

 

6월 항쟁의 그날, 서울 성공회 성당의 종루에 올라가 옥상의 대형 스피커로 방송을 했다. 당시 지선스님은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 상임대표 11명 중 한 명 이었다. 6월 항쟁의 시발점이 되고 이후 중심에 섰던 인물이었다. 87년, 87세대, 6.29항쟁,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등 들어온 얘기는 무척이나 많은데 그 중심에서 열심히 운동을 하고 아침에 성공회 종루에서 서울시민들에게 방송을 한 사람을 전혀 몰랐다는 것이 의아했다. 다른 책에 실릴 만도, TV에서 언급될 만도 한데 전혀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우리는 방명록같이 생긴 것에 돌아가면서 사인을 했어요.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거든요. 국가전복죄, 내란음모죄를 비롯해 우리가 여기서 나가면 사형 당할지도 모른다, 실제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p.58)

 

서슬이 퍼렇던 박정희·전두환 독재시절 사람들은 혹시나 정권을 비판하거나 대통령을 비판하기만 해도 잡혀갔다. 몇 명이라도 모여 있으면 어김없이 감시를 받고 제지를 당했다. 광주는 더 했을 것이다. 그래서 당시 광주 시민들은 무등산에 많이 올랐다고 한다. 산에 오르며 뜻 맞는 사람들과 욕지거리도 내뱉고 술잔을 기울이며 실컷 비판도 하고 평소 하고 싶은 말을 많이 쏟아냈다고 한다. 당시 무등산의 한 사찰에서 주지로 있던 지선스님은 그런 광주시민들을 만나며 새로운 정치인식을 하게 된다. 정권에 붙어 조찬기도회나 하던 당시 종교계에 대한 일반 시민들의 불만은 상당했고 무등산에 오르던 시민들이 절간을 훼손하거나 한참 욕을 쏟아 붓고 가는 일도 허다했다고 한다.

그렇게 뛰어든 운동이 스님을 완전히 뒤흔들었다. 혼자서 수백 권의 사회서적을 독파하며 의식을 정립하고 다방면의 인사들과 교류하며 의식의 폭을 넓혔다. 앞날이 창창한 젊은이도, 먹여 살릴 처자식 걱정을 해야 할 직장인도 아닌 성직자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해 운동에 전념했다. ‘스님이 너무 나댄다.’는 안팎에서의 비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6월 항쟁 한복판에 있었고 정말 목숨을 내어놓고 운동을 한 사람이다.

이런 사람을 몰랐다는 것이 죄스러웠다.

 

 

“지금도 나는 그때 청와대로 갔어야 했다고 봅니다. 뿌리를 뽑아버렸어야 해요.” (p.70)

 

6월 항쟁의 최고 정점이었던 박종철 노제 직후 국민운동본부 내의 이견으로 청와대 진출이 무산되었다는 사실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지선스님은 청와대까지 진출해 정권 심판운동으로 나아갔어야 한다고 후회한다. 수십 년이 지난 일이라 새삼 후회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일이기는 하지만 단 한 번도 잘못된 과거를 청산하지 못한 한국의 괴상망측한 현대사를 상기해볼 때 두고두고 아쉬움이 남을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지선스님을 통해 생생한 6월 항쟁의 이야기를 전해들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의미 있는 책읽기였다. 단지 학생으로 참여하거나 넥타이 부대로 참여하거나 멀리서 지켜본 입장이 아니라 당시의 운동을 대표하던 국민운동본부의 상임대표를 맡고 있는 분이라 책임감과 부채의식까지 전해진다.

국민들의 열망과 민중들의 소망과는 다른 방식으로 노태우가 6.29의 가장 큰 수혜자이자 시혜자가 되어 버렸다. 목숨을 걸고 민주주의를 위해 싸워 온 사람들이 느꼈을 허탈함은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결국 정치를 하는 자들 입맛에 맞게 이리로 붙기도 하고 저리로 붙기도 하는 것이 민중과 국민들의 마음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경험 했다.

 

 

 

87년 이후 30년이 훌쩍 지난 지금 운동권, 나아가서 범 진보세력이 처한 위기에 대해서도 지선스님은 명쾌하게 진단한다.

 

“민주당에 들어간 운동권들 보세요. 야당에 많이 들어갔잖아요. 대통령이나 그 비서들, 국회의원이나 그 보좌관으로 들어갔거든요. 자기들이 그 자리에서 일 해봐서 너무 잘 알아요. 그래서 어떻게 운동권을 대합니까? 싸가지 없이 무시해버려요. 그럼 운동권은 인격적으로 모멸당하니까 복수심이 싹트고, 그래서는 안 되는 겁니다. 집구석이 안 돼요.” (p.95)

“학생운동은 청년운동에 소속되어야 하고 청년운동은 진보정당에 소속되어 가야 하는 건데, 우리는 그게 아니잖아요. 세상에 없는 거꾸로 하는 운동이에요. 지금 생각해보면 참 부끄러워요. 대부분 3-4년 싸우다가 이름이 난 의장이나 대표는 정치권으로 후루룩 날아가고, 그럼 또 죽기 살기로 새 의장 뽑아서 이름 알려지면 또 날아가 버리고, 이런 것들이 세계 운동사에 없어요.” (p.63)

 

나도 참 궁금했었다. 군사독재 시절 목숨을 걸어가며 운동을 한 사람들이 지난 수십 년 동안 정치판에 수도 없이 많이 진출했는데 정치가 발전하거나 국민들의 생활이 나아지지 않는 것. 그것이 궁금했다. 이해가 되지 않는 문제였다. 그 시절 그렇게 열심히 운동을 하던 사람들이 모두 다 변절해 버린 것은 아닐 텐데, 최소한 여당이 아니라 야당에 투신한 운동권 인사들이 왜 정치권에 발을 들여놓기만 하면 그전까지 살아온 자신의 정체성은 잊은 채 바보가 되어버리는지 지선스님은 한마디로 정리한다.

‘나도 운동 열심히 해봐서 아는데 그것가지도 안돼~’라는 생각과

정치를 하기 위해 운동을 하는 뒤틀린 운동방식의 한계였다.

 

 

조급성, 영웅주의 그리고 모험주의를 극복하지 못 해서 우리 운동이 지금 이 모양입니다.” (p.96)

 

최소한 운동권 출신 정치인들이 자신이 몸담았던 운동권을 좀 더 챙기고 동지의식을 가지고 운동의 한계를 정의하고 토론하고 발전 방향을 모색하는 노력을 했어야 했다. 그리고 운동권은 어차피 뒤틀린 운동 방식이지만 정치권에 진출한 어제의 동지에 대해서 여전한 동지애를 가졌어야 했다. 단순히 정치에 투신했다고 변절자라느니, 배신자라느니, 전향했다느니 하며 몰아붙이는 것은 피차 도움 될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 우리 운동권과 운동권 출신 정치인들은 서로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고 서로를 물어뜯기만 했고 그 결과가 지금 진보정당과 운동권의 공동 궤멸의 위기라는 현실을 낳았다는 것이다.

이 부분을 읽으며 격하게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다른 정치평론가나 작가들처럼 매끄럽게 표현을 하지는 못했지만 적확한 현실 인식이라 생각한다.

조급성, 영웅주의, 모험주의를 극복하지 못한 것이 가장 큰 이유라는 지적.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다. 수십 년 동안 지난하고 고되게 운동을 이어오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을지 그들만큼 느끼지는 못하지만 조금은 이해할 수 있다. 누군가 슈퍼맨처럼 등장해 악의 무리를 소탕하고 동지들을 구출하고 정의의 사회를 만드는 것을 꿈꿨을 것이다. 그런 꿈을 꿨던 사람들에게 ‘당신 운동을 한다면서 왜 그렇게 조급했습니까? 영웅주의에 빠져 있었습니까? 모험주의를 벗지 못했습니까? 그래서 지금 운동권과 진보진영이 요 모양 요 꼴 아닙니까? 예!?’ 라고 말할 수 없다.

한가운데 있었던 지선스님이기에 할 수 있는 말이다.

 

 

“내가 생각한 것은 ‘정치는 무당’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전두환-노태우 일당을 전부 몰아내기 위해, 저 ‘귀신’들을 몰아내기 위해 우리가 무당이 되어 전 국민이 푸닥거리를 할 때만 저들이 물러갈 수 있다고 시를 썼어요." (p.13)

 

‘정치는 무당’이다. 라는 표현이 의미심장하다. 마을과 가문, 집안의 액운을 떨쳐내는 것만이 무당이 하는 굿의 주목적이 아니었다. 하나의 문화요, 소통의 장이었을 것이다. 함께 슬픔을 나누고 원통함을 공감하고 웃고 울며 푸닥거리 해내는 것이었다. 정치를 하는 사람들, 정치를 하려는 사람들은 모두 무당이 되어야 한다고 스님은 말한다. 대신해서 억울함을 풀어주고 소통하게 하고 또는 벌하기도 하는 무당이 되어야 한다고. 동의하고 공감한다.

지금 한국정치의 현실처럼 무관심과 혐오를 넘어서서 상식이 통하지 않는 정치는 무당은커녕 국민들의 짐만 될 뿐이다. 정치만 보면 더 스트레스 받고 더 화가 쌓이니 골이 깊어만 간다.

 

 

“원통하게 죽어간 용산 철거민들의 참사, 불법 민간인 사찰, 부정부패로 얼룩진 청와대, 제주 강정마을의 해군기지, 한미FTA, 4대강사업 등에 대해 박근혜가 우리 국민 대대수가 느끼는 분노를 전혀 알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p.39)

 

이 책은 지난 대선 전에 출간 되었다. 지선스님은 특정 후보를 지지하거나 비판하지 않는다. 오히려 오랜 시간 운동을 해 오고 온 몸을 던져 투신해 온 어른이자 선생으로써 국민들의 한과 아픔을 진정으로 달래줄 수 있는 무당이 되어주기를 소망한다.

대통령 선거는 끝나고 박근혜 당선인이 취임식을 앞두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염려하고 걱정하고 불안해하던 일들이 제발 일어나지 않기를 바란다. 이것은 진심이다. 이명박이 집권 초 내각 구성에서부터 미국산 소고기 수입에 대한 대응에까지 민심과는 완전히 대치된 국정 운영을 했기 때문에 국민적 저항에 직면했던 것을 반면교사 삼아야 한다.

수십 년 동안 이 땅의 민주주의를 위해 투신해 온 지선스님과 나와 같은 평범한 소시민이 박근혜 당선인에게 바라는 바는 비슷할 것이다.

아직은 미심쩍고 기대조차 되지 않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지만 5년을 그냥 흘려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제발 잘 해주기를 바랄 뿐이다.

 

 

“저건 ‘인간 말종’이에요. 저분은 솔직히 말해서 스님으로서 할 얘기는 아닌데 개짐승만도 못한 사람이에요.” (p.86)

 

지선스님이 험한 말을 하며 비판한 어떤 사람의 모습만은 답습하지 않았으면 한다.

 

첫머리에서도 말했지만 알마에서 나온 [이슈북] 정말 추천할 만한 시리즈다. 인터뷰를 엮은 형식이라 어렵지 않다. 특히 나처럼 한국의 현대사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시리즈 중 마음에 드는 책을 골라 읽어보면 새로운 눈을 뜨게 될 것이다. 책이 두껍다고 다 좋은 책이 아니듯이 얇다고 다 가벼운 책이 아님을 [이슈북]을 통해 확인 할 수 있다.

관심 있는 분들 꼭 한 번 읽어보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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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낌표, 그리고 마침표
권인옥 지음 / 나남출판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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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다섯. 많다면 많고 적다면 적은 나이다. 이번 설에 시골에 다녀왔는데 사촌 동생들을 보면서 새삼 내 나이를 다시 돌아보게 되었다. 막내 동생이 아주 어릴 때 숙모 품에 안긴 아이를 안고 업고 놀아주던 때가 생생한데 벌써 고3이라고 스트레스 받는 모습이 퍽 어색했다. ‘너 언제 이렇게 컸냐? 징그럽다~!’ 놀렸더니 ‘큰오빠는 너무 늙었어~ 이젠 완전히 아저씨야. 아저씨’ 이런다. 삼촌, 숙모들을 뵈도 이제는 아픈 곳이 더 많고 얼굴과 손의 주름, 흰머리. 여름 시골집에서 동생들을 데리고 개울가에서 하루 종일 놀다가 들어오면 시원한 수박을 잘라주던 숙모들의 모습, 어디서도 맛볼 수 없었던 아궁이 계란볶음밥을 해주던 삼촌들의 모습이 그만큼 변한 내 모습처럼 변해 버렸다. 갑자기 밀려오는 우울함과 상실감으로 시할아버지 댁까지 명절에 와야 하는 아내를 위해 전력으로 충성하고 바지런히 보조하는 역할을 해야 하는 내가 넋을 놓고 있었다.

마침 가져 간 책이 「느낌표, 그리고 마침표」였다. 시어머님, 시숙모님들 사이에서 고생하고 있을 아내를 뒤로 한 채 구석방을 찾아 들어가 단숨에 이 책을 읽어냈다. 나로서는 목숨을 건 도박 이었다.(물론, 중간중간 부르심이 있으면 총알처럼 튀어나가 보조를 하고는 해서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막내 사촌 여동생의 갑작스런 성장이 내 서른 다섯 해를 갑작스레 돌아보게 한 느낌표가 된 것일까?

책은 권인옥 작가의 에세이다. 영화와 책, 일상에서 그녀가 느낀 감정과 마음가짐, 태도와 행동을 고스란히 글로 담아냈다. 영화에서의 느낌표, 책에서의 물음표, 삶의 길목에서의 쉼표는 마지막 마침표를 찍기 위한 의도된 과정도 아니고 책으로 엮기 위한 소재도 아니었다. 그녀가 자신의 삶 속에서 몸으로 담아낸 기록이었다.

그래서 읽기가 조금 버거웠다. 더군다나 명절에 몰래 방구석에 처박혀 귀는 항상 부엌으로 열어 놓은 채 읽어야 했기에 더욱 분잡스러웠던 탓도 있다.

이제까지 살아온 삶을 돌아보는 것은 온전히 홀로되는 시간이 있어야 가능한 것으로 생각했었는데 온 신경을 곤두세운 채 책을 읽으며 생각하고 귀를 열고 있는 것을 동시다발적으로도 할 수 있다는 것을 경험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크게 뭔가를 깨달았거나 발견했거나 다짐하고 그러지는 못했다. 못한 것인지, 안 한 것인지조차 정확히 알수는 없지만 분명한 것은 아직 멀고 또 멀었다는 확신이었다. 내 좌우명 중 하나인 [하늘로 기어간다]는 이런 내 삶에 대한 태도를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는 문장이다. 짧고도 길었던 서른다섯 해가 마냥 좋지 만은 않았고 마냥 안 좋지 만도 않았다. 한 해가 힘들면 다음 해가 좋기도 했다. 그렇게 그냥 살아낸 것 같았다. 당장 눈에 보이거나, 귀에 들리거나, 손에 잡히지 않지만 내가 눈을 들어 바라볼 그 이상향이 분명히 있다. 그것이 하늘일 테다. 당장 내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고, 손에 잡힌다면 그것은 더 이상 이상향이 아니다. 현실이다. 희뿌연 안개같이 가려져 있고 방향조차 가늠하기 힘들 때가 많기 때문에 오히려 이상향이 되고 하늘이 된다고 생각한다. 거기에 더해 서두르지 않는 다는 것. 날아가고 뛰어가고 싶지만 기어가는 것이다. 한참 달려갔는데 달려온 만큼 방향이 틀어져 있거나 급하게 달려 금세 지쳐버렸다면 말짱 도루묵이다. 천천히 주위도 살피고 챙기고 두발로는 세상을 인식하고 참여하기가 모자라니 네발로 기어간다는 것이다.

 

아직 남아있는 삶의 이상이 너무 많다. 지금은, 아직은, 그것을 준비하고 기다릴 때다.

내 결론은 그것이었다.

 

‘올 한 해 또 어떻게 살아갈까? 2세 소식은 언제쯤 들리게 될까? 뭔가 새로운 계기나 돌파구가 찾아왔으면 좋겠다.’

 

문득문득 찾아와 잠 못 들게 하는 고민이 산적해 있지만 기실 고민이라는 놈도 당장 없다면 무척이나 서운할 것 같다. 견뎌낼 만한 고민은 옆에 두고 친구하는 것이 일상을 더 윤기 있게 하는 방법 중 하나일 것 같다.

현재 주어진 것에 감사하고 만족하며 급하지 않게 이상향을 향해 기어가는 것. 적당하게 고민하고 갈등하면서 최선일 거라는 기대를 버리고 일상을 선택하는 것.

이것이다.

 

 

……>

확실한 직선은 아니지만 여전히 이어지는 것. 빠르게 높이 멀리 한꺼번에 가지 않고 띄엄띄엄 가는 것. 하지만 분명한 방향으로 끊임없이 향하는 것.

 

시골 구석방에서 결론 내린 것 치고는 꽤 괜찮았다.

책을 다 읽기도 전에 미리 내 결론에 도달해서 개인적으로 작가에게는 조금 미안했다. 하지만 내 결론은 내려져 있어도 작가의 삶을 들여다보는 것은 또 다른 즐거움이었다.

 

 

 

!

“하비가 맞서 싸우고자 한 대상은 종교적인 벽도 아니고 굳건한 정치적 아성도 아니고 바로 사람들 마음속에 자리 잡은 소수자에 대한 편견이다. 누구나 동성애자에게 관대하라고 소리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많은 사람들처럼 능력과 자질에 따라 평가하고 대우해 달라는 것이다.” (p.36)

 

영화[밀크]를 본 작가의 !이다. 작가는 주로 대중적으로 많이 알려지거나 흥행한 영화보다는 작품성이 있는 영화를 주로 보는 것 같았다. [밀크]라는 영화도 이 책을 통해 처음 알게 되었는데, 평소 내가 고민하던 동성애에 대한 내용이 있어 관심 있게 읽었다. 나는 늘 생각한다. ‘내가 평소에 잘 알고 지내던 지인이 어느 날 갑자기 날 찾아와서 커밍아웃한다면 과연 나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더군다나 함께 교회를 다니는 친구가 그런다면 나는 그 친구를 어떻게 대할까? 같은 생각들이다. 워낙 보수적이고 성정체성에 대한 극단적인 교조성이 지배하고 있는 한국의 교회이기 때문에 당장 파면을 당하거나 자연스레 기피대상이 되지 않을까 싶다. 불쌍한 죄인으로 여겨 기도를 하는 무리도 있을 것이고.

영화 [밀크]에서는 자신들의 더 권리를 보장받기를 바라는 것도 아니고, 특별하게 처우해 주기를 원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대해주기를 소망한다. 영화나 책에서 이런 장면이 연출되면 ‘나도 열려있는 사람이라 자부하는데 나는 정말 그(그녀)들을 그 이전처럼 대할 수 있어!’라고 장담하는데 어디까지나 장담일 뿐이다. 한 번도 그런 경험을 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말은 누구나 할 수 있다. 따뜻한 척. 열려있는 척. 관대한 척.

닥쳐봐야 알 수 있을 문제다.

 

 

?

“화연도 화연의 부모도 선생님도 반 아이들도 죽은 아이가 불쌍하다고 여기지만 정작 왜 그렇게까지 했어야 할까를 헤아리고자 하지 않는다. 곪은 상처를 드러내는 것이 두렵기도 하고 그 고름이 자신에게 묻을까 겁나기 때문이다.” (p.100)

 

김려령 작가의 책 [우아한 거짓말]을 본 작가의 ?이다.

말 한마디의 힘에 대한 작가의 생각이었다. 아이들에게 따돌림을 당하는 한 아이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아이의 부모, 선생, 반 친구들은 자신들이 하고 싶은 이야기만 한다. 자신이 알고 있고 인식해 온 만큼만 이야기 한다. 이야기가 넘쳐난다. 가만히 입 다물고 있는 것은 죽은 아이뿐이다. 가만히 있으면 자신에게 책임이 전가될까 두려워 잠시도 가만히 입 다물고 있지 못한다. 그리고는 우아하게 거짓말들을 늘어놓는다. 어차피 죽은 아이는 말이 없으니까.

내가 하루 종일 하는 말을 가만히 생각해 봤다. 사람을 살리는 말이 많은지 사람을 죽이는 말이 많은지. 분명 살리는 말보다 죽이는 말을 많이 하는 것 같은데 갑자기 자기합리화가 시작됐다. ‘아니야~ 이런 말쯤은 죽이는 말이 아니라 그냥 갈구거나 농담하는 거지 뭐~’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니 아니었다. 죽이는 말까지는 아니어도 분명 상대를 곤란하게 하거나 상대를 찍어 누르기위한 말이 많았다. 그리고 살리는 말처럼 우아하게 포장하고 있지만 기실 희롱하거나 비꼬는 말도 많았다. 서른 다섯 해를 살았지만 아직 어린아이 같은 내 안의 많은 모습들을 미리 감추려는 자기방어일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궁금했다. 저자가 영화를 볼 때는 !였는데 책을 볼 때는 ?였다. 왜 그랬을까 생각해 봤는데 결론을 내릴 수 없었다. 굳이 문장부호를 다르게 한 이유가 무엇인지…….

 

 

,

“속도 전쟁이 피할 수 없는 현대의 대세입니다. 누구나 앞만 보고 정신없이 달려가는 이 세상에서 늦게 가기 때문에 오히려 살 수 있고 행복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나무늘보입니다. 나무늘보는 아무리 빨리 가보아야 한 시간에 900m 정도밖에 가지 못합니다. 모두들 빨리 가느라고 서로 부딪치고 넘어지곤 하는데 나무늘보는 천천히 유유자적하게 자기 페이스를 유지하며 살아갑니다. 그 나무늘보에게서 느림의 행복을 배워야 합니다.”

 

“어쩜 나무늘보는 자신의 느림 때문에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어려움과 긴장 속에서 살고 있는지 모른다.” (p.191)

 

북한산을 오르다 앞서가는 등산객의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진행자의 멘트를 보고 깨달은 작가의 ,이다.

 

나무늘보가 얼마나 힘들까? 라고 생각해 본적이 없었다. 사람들은 자기가 생각하고 싶은 대로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하고 난 후 그렇게 결론 내린다. 그리고 난 후 그것에 상대방이나 대상을 맞추려 한다. 아집이고 교만임에도 잘 알지 못한다. 알지 못하는 것인지 알면서도 인정하려 하지 않는 것인지 당사자만 알 것이다. 급변하는 현대 사회에서 나무늘보에게 배울 점을 굳이 찾으려 한 라디오 작가나 진행자가 잘못한 것은 아니다. 사람들도 자신들의 인생을 살아내고 있듯이 나무늘보 또한 자신의 인생을, 삶을 살아내고 있는 것이다. 그냥 있는 그대로 보면 되는 것이다. 나무늘보의 생태적 특성에서 굳이 교훈을 이끌어 내거나 적용거리를 찾으려 하는 것은 자칫 만용일 수 있다.

사람들은 뭔가 많이 하려고 한다. 회의도 많이 하고, 운동도 많이 하고, 생각도 많이 하고, 말도 많이 한다. 많이 하는 만큼 변화가 있거나 성장이 있거나 진화가 있거나 하는 것도 아닌데 그렇게 많이들 한다. 자기만 많이 하면 상관없는데 주변 사람들까지 피곤하게 하는 경우가 많다.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는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임을 확인하려는 것인지 명령하고 잔소리하고 간섭하면서 많이 하게 만든다.

숨 한번 크게 들이켜고 따져보면 그렇게 급하거나 중요한 일이 아닐 때가 많다.

나무늘보는 나무늘보여서 최선을 다해 자신의 일상을 살아내는 것이다.

나무늘보 쳐다보지 말고 주위 사람 간섭하고 신경 쓰지 말고 자신의 일상을 살아내는 것에만 집중했음 싶다.

 

 

……>

나는 이렇게 살 것이다.

당신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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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시하라 - 단 한 번뿐인 인생을 위하여
에릭 J. 아론슨 지음, 노혜숙 옮김 / 이콘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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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를 시작하는 아침, 가장 먼저 하는 생각은 무엇일까? 오늘 아침에는 좋아하는 축구중계가 있어서 일어나자마자 그 결과부터 생각했다. 그러면 평소에는 어떨까?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날 그날 상황에 따라 기분에 따라 다른 생각을 하는 것 같기는 했지만 정확하게 내 하루 시작을 어떤 생각과 함께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아마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럴 거라 생각한다.

 

 

이 책 「대시하라」에서 저자가 소개하는 방법은 ‘좋은 생각하기’이다.

 

“내가 이 일을 꼭 해야 하나?”

이런 생각은 많이 하는 생각 중 하나 일 것이다. 내 업무가 아님에도, 내가 잘하는 것이 아님에도, 혹은 내 일을 즐기고 있지 못하다 보니 아침에 일어나서 ‘어휴~ 또 힘든 하루가 시작되는 구나~’ 한숨부터 쉴 때가 많다.

 

“어떻게 하면 이 일을 하면서 보람 있는 시간을 보낼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은 많이 하지 않는 생각 중 하나 일 것이다. 이렇게 긍정적으로 자신의 처한 현실을 직시하고 받아들이는 사람이라면 굳이 이런 책을 읽지 않아도 된다. 벗어날 수 없는 현실이라면 최대한 보람 있게 시간을 보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누구나 그것을 원할 것이다. 그런데 잘 되지 않는다. 당장 1시간 뒤에 출근해서 만날 그 사람, 그 작자……. 생각만 하면 벌써부터 뒷골이 땡기고 관자놀이가 욱신거린다. 해도 해도 끝이 없는 업무가, 들어도 들어도 끝이 없는 상사의 잔소리는 내가 하는 일이라는 것이 결국 먹고 살기 위한 밥줄 정도에 불과하게 만든다.

 

 

저자는 책에서 ‘대시의 법칙을 소개한다.’

 

‘대시의 법칙’이란

결단(Determination), 마음가짐(Attitude), 성공(Success), 행복(Happiness)으로 구성된 법칙이다.

 

“뷔페에서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인생에서도 선택을 해야 한다. 갖고 싶고, 하고 싶고, 보고 싶고, 되고 싶은 모든 것들을 내 접시에 담을 수 없다.” (p.19)

 

모든 사람들이 성공하고 싶어 하고 나름 안정된 삶을 살고 싶어 한다. 앞서 저자가 소개한 긍정적 생각이 말처럼 쉽게 실천하기 어려운 것처럼 저자는 이 ‘대시의 법칙’ 또한 쉽지 않은 법칙이라고 책에서 여러 번 강조 한다. 결혼식 뷔페가 대부분 가격에 비해 형편없는 음식 맛을 내기로 유명하지만 그래도 갈 때마다 ‘혹시나 맛있나?’하는 기대로 선택의 고민을 한다. 저자의 말대로 내 손에 쥔 접시에는 한정된 양의 음식만을 담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선택해야 한다. 인생은 B와 D사이의 C라고 하지 않나. 태어나서(Birth) 죽는(Death)순간 까지 끊임없는 선택(Choie)을 해야 하는 것이 인생이라는 말이다.

그 선택의 기준이 되는 것이 바로 ‘대시의 법칙’이다.

 

 

“대시의 법칙은 일생의 성공과 행복을 위한 법칙이다. 한 달, 일 년 혹은 기껏 십 년 동안 잘 살기 위한 법칙이 아니다. 지름길은 없다.” (p.71)

 

지름길은 없다. 결혼식 뷔페에 차려진 수많은 음식 중에서도 맛있는 음식을 단번에 골라내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맛있는 음식 50가지가 차려진 뷔페에서 내가 정말 먹고 싶은 몇 가지를 고르는 것도 어려운 일이지만 맛없는 음식 50가지가 차려진 결혼식 뷔페에서 그나마 맛있는 음식 몇 가지를 고르는 일은 더욱 어려운 일이다.

이것저것 먹어 보고 뱉어 보고 하면서 다음번 음식을 담으러 갈 때에는 전번의 시행착오를 반복하지 않게 된다. 선택에는 지름길이 결코 있을 수 없다. 만약 지름길이 있다면 불평등 한 것이다.

저자는 이 ‘대시의 법칙’을 두고 여러 가지 예화와 함께 자신의 경험담도 솔직하게 책에서 담아내고 있다. 일방적으로 계도하듯이 ‘이건 이렇게 하고, 저건 저렇게 해야 성공할 수 있다.’라고 하지 않는다. 100% 성공할 수 있다고 장담하고 있지도 않다.

다만, 꾸준하고 성실하게 일상의 습관을 만들어 갈 것을 주문한다.

 

 

 

저자의 많은 권유중에서도 나는 사람을 대하는 ‘대시의 법칙’중 마음가짐(Attitude)에 대한 부분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라, 이름을 기억하라, 의연하게 ‘노’를 받아들여라. 부정적인 사고와 습관을 버려라, 실패의 책임을 인정하라” (p.144∼145)

 

사실 책에서는 좀 더 많은 실제적인 지침을 소개하는 데 내게 꼭 필요한 마음가짐이거나,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마음가짐 몇 가지만을 발췌했다.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는 것. 이거 참 하지 못할 때가 많다. ‘감사합니다’도 그렇지만 ‘실례합니다’, ‘미안합니다’라는 말도 정말 잘 못하는 것 같다. 감사하고 실례하고 미안한 마음이 굴뚝같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을 때가 더 많다. 예전 직장에서 근무하던 남아공 금발 아가씨가 있었는데 아주 사소한 일에도 땡큐를 반복하는 것이 처음에는 어색했지만 듣다 보니 정말 좋았다. 그냥 무뚝뚝하게 땡큐하는 것이 아니라 땡~큐하면서 큐를 발음할 때 옥타브를 올린다. 우리가 뭐 궁금한 게 있을 때 “그래~?”하는 것처럼 땡~큐 할 때 목소리가 올라간다.

나도 타고난 경상도 남자라 표현에 서툰 것은 두말 할 것도 없다. 얼마 전에 결심한 바가 있어서 출·퇴근시 엘리베이터에서 먼저 인사를 하기로 했었는데 예전에 의식하지 않았을 때는 사람이 타건 말건 상관없었는데 엘리베이터에서 만나는 사람에게 인사를 건넬 생각을 하니 이것도 부담이 되었다. 속으로 ‘사람 없어라. 없어라’ 주문을 외며 기다리기도 하고 먼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으면 휙 돌아 계단으로 올라올 때도 있었다.

 

 

“당신의 목표가 까마득히 멀리 느껴질지 모르지만 오늘 그 목표에 한 발짝 다가갈 수 있는 뭔가를 할 수 있다. 오늘 그 한 걸음을 내딛어라!” (p.65)

 

단지 같은 아파트, 같은 통로에 살고 있다는 공통점 밖에 없는 사람들에게도 인사 한마디 건네는 것이 그렇게 어색한데 매일 지지고 볶는 동료들에게 먼저 ‘감사합니다’ 라고 말하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 일 것이다. 그래도 처음 ‘엘리베이터에서 먼저 인사 해야지’ 마음먹었을 때도 ‘내가 정말 지킬까?’ 의구심이 많았다. 지금도 썩 만족스러운 편은 아니지만 예전보다는 확실히 먼저 인사할 때가 많다. 밝게 웃으며 ‘감사합니다, 미안합니다. 실례합니다.’ 라고 동료들에게 말할 수 있을 때가 언제일지 까마득하지만 한 번 해보는 것은 좋은 시도일 것 같다. ‘저 사람 뭘 잘못 먹었나? 나한테 뭐 잘못 한 거 있나?’ 등등 온갖 오해를 받을 소지가 다분하지만 한 번 해보고 싶다.

 

 

“모든 사람이 역사에 이름을 남길 수는 없다. 하지만 적어도 그 행로에 한몫을 할 수는 있다. 어느 무명의 영웅은 미켈란젤로에게 붓 잡는 법을 가르쳤다. 어느 무명의 영웅은 아인슈타인에게 기초산수를 가르쳤다. 당신의 사소해 보이는 삶이 지금 역사의 영웅을 만들고 있는지도 모른다.” (p.7)

 

굳이 역사에 이름을 남기기 위함도 아니고 미켈란젤로와 아인슈타인 같은 대단한 사람들에게 이름 없는 영웅이 되고 싶은 마음도 없다. 다만 나의 일상이 조금은 더 밝고 긍정적으로 바뀌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사람 마음 하나 바꾸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모르는 바 아니지만 그렇다고 절대 안 바뀌는 요 모양 요 꼴로 그냥 살자. 라고 하는 것은 너무 패배주의적이다. 물론, 내가 이런 서평을 쓰고 나만의 다짐을 한다고 해서 바로 그렇게 살 수 있을 리는 만무하다. 이렇게 글로 다시 한 번 확인하면서 마음에 새기고 기억하는 것이 중요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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