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력자 - 2012 제36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최민석 지음 / 민음사 / 2012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결과가 뻔한 영화를 보는 것은 고역이다. 중간도 읽지 않았는데 범인이 예상되는 추리소설을 읽는 것도 고역이다. 고속도로 정체로 평소의 2∼3배 이상 시간이 지체될 것을 알고도 IC를 들어가는 것도 고역이다.

어린 시절 어른이 빨리 되고 싶었다. 어른의 기준이 내게는 21살 이었다.(왜 그런 기준을 갖게 되었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알 방법이 없다) 그래서 계단을 오르거나 걸을 때 꼭 21걸음을 세고 다시 1을 세면서 언젠가 21살의 멋진 어른이 되어 있을 나에게 최면을 걸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가장 하고 싶었던 것은 운전이었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될 때까지 내 꿈은 트럭 운전기사였다. 하얀 장갑을 끼고 집채만 한 자동차를 제 맘대로 움직이고 운전하는 트럭 운전기사 아저씨가 그렇게 멋있을 수 없었다.

중학교와 고등학교에 진학하며 꿈을 바뀌었지만 여전히 21살에 대한 동경은 있었다. 부모님이 내가 21살이 되면 특별히 뭘 해주겠다는 약속을 하신 것도 아니었고 누군가 짠~! 하고 나타나 내 소원을 들어주겠다 약속을 한 것도 당연히 아니었다. 그냥 멋진 어른의 모습을 혼자 상상하고 동경하면서 자기만족을 했던 것 같다.

 

나의 삶에 대한 가치는 모호함에 있다. 앞날이 정확하게 예측이 되고 결말이 뻔히 보이는 삶을 살아가는 것은 내게는 무의미하다. 잘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고 만져지지 않는 미래를 살아가는 것이 내게는 유의미한 일이다.

만약 내게 어느 날 신이 나타나 “너의 미래를 보여주겠다. 너는 이렇게 살 것이고 이런 일을 겪을 것이고 저렇게 살면서 생을 마감할 것이다.” 라고 한다면 나는 신이 사라지자마자 그 신을 저주할 것이다. 그리고 다시 나타나 모두 뻥이라고 말해달라고 있는 대로 생떼를 부릴 것이다.

내게 있어 삶은 모호하고 불분명하기 때문에 살아나갈 가치가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공평수는 어쩌면 자신이 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므로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어떤 측면에서는 오로지 부끄럽지 않게 지는 것, 그것 하나뿐이었는지도 모르겠다.” (p.210)

 

공평수는 자신이 당연히 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다. 알고도 링에 올랐다. 링에 오르기 전 그가 부린 허영과 위세와 허풍은 그의 머리를 파먹어가는 두 개의 커다란 종양을 잠시라도 잊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나의 삶이 언제쯤 끝나갈 것이라는 시한부를 선고받은 인생을 사는 사람의 마음이 모두 다 공평수의 그것과 같지는 않을 것이다. 있는 대로 욕을 퍼붓고 마지막 눈을 감는 그 순간까지 주위 사람들을 힘들게 하는 사람도 있다. 너무나도 평안하고 평온하게 삶의 마지막을 보내는 사람이 있는 반면 마지막 순간까지 악을 쓰며 죽는 사람도 있다.

그만큼 나의 삶의 끝을 알고 있다는 것은 힘든 일이다. 공평수는 그가 행해 온 젊은 날의 허망함과 후회스러움을 그의 마지막 링 위에서 온전히 쏟아내고자 했다. 그래서 마지막 눈을 감는 그 순간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고 죄스럽지 않으며 후회스럽지 않기를 소원했다.

 

 

“대리운전 하는 챔피언도 있어.” (p.92)

“링 아래서 주먹을 휘두르면 선수 생명 끝장이야.”

“무슨 소리예요. 매미 타령이나 하는 주정뱅이 주제에!” (p.119)

 

예측이 불가능한 삶을 사는 것이 힘들 때도 있다. 왜 나만 힘들고 고통 받는지 원망스러울 때도 있다. 누구나 찬란했던 과거를 쏟아낸다.(그러고 보면 초등학교 때 반장을 안 해본 사람이 없다. 다들 반장을 해봤다고 하니)

아직 인생의 절반도 달려가지 못한 나와 동년배들에게도 과거 이야기는 대화의 단골 주제다.

자신의 말마따나 험악한 세월을 온몸으로 부딪쳐 온 공평수의 찬란했던 과거를 듣기 위해서는 삼일 밤낮이 필요했을 것이다. 시원한 맥주 수십 캔과 함께. 매미와 교감하는 초능력을 가졌다고 떠들고 다니는 왕년의 챔피언은 대리운전을 하는 왕년의 다른 챔피언을 보고 참혹했을 것이다. 링 아래서는 절대로 주먹만을 휘두르지 않는다는 철칙을 유지하면서 그의 유일한 자존심인 챔피언 자리를 지켜왔다. 언젠가 왕년의 돌주먹 박종팔씨가 나오는 교양 프로그램을 본 기억이 났다. 동양챔피언까지 지낸 박종팔 씨가 한때는 ‘돈팔이’라고 불릴 만큼 잘 나갔던 시절이 있었는데 여차여차해서 가진 돈 모두 잃고 권투계에서도 알력다툼으로 밀려나 완전한 야인생활을 했었다고 했다. 죽으려고도 하고 세상 다 산 사람처럼 엉망으로 살기도 했다며 챔피언의 삶을 돌아보며 회한 짓는 그 장면이 떠올랐다. 저 하늘 꼭대기에서 저 땅 속 깊은 끝까지 추락하는 것과 같으리라 짐작해 본다.

공평수 또한 그 고통을 자기 혼자만의 힘과 의지만으로는 버틸 수 없어 매미와 교감하는 초능력이라는 정체불명의 능력을 만들어 내 고통에서 눈을 돌려 버렸다. 그렇게 하지 않고는 살 수가 없으니까.

이제까지 살면서 ‘이게 정말 위기다.’라고 생각했던 적이 두 번 있었다. 앞으로의 인생 속에서 두 번이 더 있을지 여러 번 더 있을지 알 수 없다. 모르겠다. 공평수처럼 고통과 위기에 직면하지 않고 고개를 돌려 다른 곳에서 잊을 수 있는 능력을 찾아야 하는지 지난 두 번의 위기를 넘겼을 때처럼 시간의 흐름에 맡겨 둘지 그것도 알 수 없다. 최소한 링 아래에서는 절대로 주먹을 휘두르지 않는다는 원칙·철칙 하나는 가져야 한다. 그리고 비록 그가 당장의 위기와 고통에는 고개를 돌렸지만 무시로 커 가는 머릿속 종양 덩어리를 안고도 죽을힘을 다해 마지막 방어전을 치룬 것처럼 내게도 준비될 인생의 방어전을 준비해야 한다.

아직은 뭘 준비해야 할지, 공평수처럼 외딴 섬에 들어가 특별 훈련을 해야 할지 어떨지 모르겠다.

세상에는 공평수와 같은 사람만 있는 것은 아니다.

 

 

“물론 취재에는 취재비용이 들어가고, 그러기 위해서는 배우자의 안정적인 내조와 이해, 그리고 지원이 필요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나는 연지와 반드시 결혼을 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공평수의 자서전부터 써야 한다.” (p.105)

 

공평수의 조카로 추정되는 소설 속 ‘나’는 신인 작가다. 언제나 ‘을’의 스탠스를 유지할 수밖에 없는 가난하고 힘없고 어딘가 반드시 빌어 붙어살아야 할 존재다. 고작 10여일의 찬란함을 위해 7년에서 10년을 유충으로 생활하는 매미와 다를 바 없다. 언젠가 한번만 제대로 뜨면, 대박 터지면 지금의 추레함은 한방에 날려 버릴 수 있다. 그것을 꿈꾼다. 생각해 보면 다른 길도 없다. 한 해에 문학상을 통해 등단하는 작가의 수에 다가 몇 년 전부터 등단했지만 데뷔작을 발표하지 못한 채 어제나 저제나 출판사의 연락만을 기다리는 누적된 작가의 수를 더하면 기실 로또 당첨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요즘은 작가가 쓴 책이 아니라 스님이나 연예인, 유명인이 쓴 책이 불티나게 팔리는 현실이니 몇몇 이름만으로 책이 팔리는 대형작가가 아닌 다음에야 10년이 지나도 여전히 유충 생활을 벗어날 수 없다. 찬란한 10일을 말 그대로 꿈만 꾸는 것이다. 꿈만 꾸다가 지난한 삶을 마무리 하는 것. 꼴까닥.

 

 

“나는 왜 지금 여기에 와 있는가? 그 의문이 사라지지 않았다. 당연했다. 나는 연지와 결혼을 하기 위해 장인이 될 뻔 한 이건수 교수의 말대로 결혼 자금 2000만 원을 준비하기로 했다. 그리고 그 2000만 원을 위해 말도 안 되는 인간 망종 공평수의 자서전을 쓰기로 했고, 그 인간이 정말이지 말도 안 되는 복귀를 한다고 해서 전지훈련을 하는 섬까지 따라왔다.” (p.155)

 

누가 묻지도 않았는데 알아서 자기방어를 한다. ‘나는 작가로서의 자존심을 지키면서 연지와의 사랑을 완성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매미 초능력에 빠져 있는 생 양아치 같은 삼촌이라는 작자의 자서전을 써준다. 쓰는 것이 아니라 써 주는 것이다. 그래서 여기 이름 모를 섬까지 따라왔다.’

‘나’는 등단했지만 등단하지 않았다. 인정받았지만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신세가 처량하다. 아버지는 퇴물깡패고 되지도 않는 말을 지껄이는 삼촌이라는 작자는 갑자기 나타나 자신의 자서전을 써달라고 한다. 비록 데뷔작을 내보이지 못했지만 작가의 마지막 자존심을 지키고 싶었다. 누구나 알 만한 유명인사의 부탁도 아니고 자신이 보기에도 한심스럽고 어이없는 삼촌이란 작자의 자서전을 써야 한다.

코너에 몰린 복서는 쏟아지는 상대의 주먹을 다 피하지 못하고 클린치한다. 할 수 있을 때까지 클린치 한다. 상대복서는 어떻게든 클린치를 풀어 버리고 결정적 카운터펀치를 날리려 한다. 10년이 지나도 유충 신세를 벗어날 수 없는 매미유충이라면 차라리 그 나무에게 뛰어 내리는 편이 낫다. 가만히 앉아서 문단 탓, 출판사 탓, 저 놈 탓, 이 놈 탓하며 허송세월을 보내는 것 보다야 매미 초능력에 빠져 있는 생 양아치 같은 삼촌이지만 그치의 자서전을 써 주고 그 돈으로 연지와의 해피엔딩을 꿈꿀 수 있다면 ‘나’는 죽을힘을 다해 클린치를 해야 한다.

 

 

“어차피 언젠가는 질 수밖에 없는 게임이야. 어떻게 지느냐? 그래, 중요해. 사람들은 어쩌면 그걸 내 마지막 모습으로 기억할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 모습이 근사하지 않더라도, 초라하더라도, 보잘것없더라도, 상관없어. 헐렁한 트렁크스, 조명, 땀 냄새, 훈련, 실패로 터득한 내 스텝, 그걸 기다리는 링, 그것만으로 충분해. 이 위에 있을 때, 나는 필요한 사람이라는 게 느껴지거든.” (p.217)

 

 

책 제목인 「능력자」는 거짓말이다. 이 책 「능력자」에서는 능력자가 단 한 사람도 나오지 않는다. 공평수는 결국 졌다. ‘나’는 연지와 해피엔딩을 만들지 못했다. 공평수의 자서전은 나왔을 리 만무하다. 그렇게 그냥 방어전을 끝이 난다. 하지만 이것이 마지막 방어전이 아닌 것만은 확실하다. 그저 과거의 찬란함에 취해 ‘내가 옛날에~!, 내가 왕년에~!.’만 주절대던 공평수가 자신의 존재를 명확히 인식했다. 내게 최적화된 트렁크와 훈련, 스텝, 그리고 그것을 받아 줄 자신만의 링만 있으면 그의 삶 전체를 통틀어 가장 필요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생겼다. 그의 머릿속에서 자라나는 종양 덩어리가 갑자기 생긴 공평수의 자신감처럼 갑자기 공평수의 삶을 송두리째 빼앗아 갈지도 모르는 시한부 인생이지만 그래도 얼마만인지도 모를 정도로 너무나 오랜만에 자신이 비로소 필요한 사람인 것을 깨달은 그의 방어전에는 박수를 보내고 싶다. 아무도 기대하지 않은 그만의 방어전을 치러낸 것만으로도 그는 충분히 박수를 받을 만하다.

 

 

“어느 누구도 다운되지 않았고, 경기장 안의 모든 불빛과 눈빛이 이 둘의 움직임에 따라 움직였다.” (p.208)

 

어쩌면 능력자가 필요하지 않은 세상인지도 모르겠다. 누구나 능력자가 되고 싶어 하지만 매미가 7년에서 10년 동안 유충 생활을 견뎌내는 힘은, 죽을 만큼 운동하고 훈련해 살과 살이 맞닿는 치열한 링위에서의 혈투를 견뎌내는 힘은 대단한 것이 아닐 것이다. 내가 여전히 이 세상에서, 내 삶에서 중요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 필요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 그것이 모진 풍파를 헤쳐 나갈 힘이다. 능력이다.

 

그래서 당신도 나도 능력자다.

우리는 반드시 필요한 존재일지도 모르기 때문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