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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무당 나와야 정치 살아난다 - 6월항쟁의 스님 지선과의 대화 ㅣ 이슈북 3
지선.손석춘 지음 / 알마 / 2012년 10월
평점 :
알마에서 나온 이슈북은 두 번째다. 첫 번째는 유종일 교수의 「경제민주화가 희망이다」라는 책이었다.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경제정책에 있어서의 실정과 괴상한 형태의 현재 한국의 정당체제, 신자유주의의 종말과 함께 대두된 경제민주화에 대한 실제적인 대안과 구체적 사례를 살펴 볼 수 있었다. 많지 않은 분량의 책이지만 양질의 내용을 담고 있는 책이라 생각했다. 두 번째 책은 지선스님과 손석춘 선생의 인터뷰를 엮은 「큰 무당 나와야 정치 살아난다」라는 책이다. 지선스님이라는 분을 처음 들어봤다. 언뜻 생각한 것은 참여정부 시절 천성산 터널 공사를 반대해 오랜 기간 단식한 스님이었다. 그런 분이 ‘6월 항쟁의 스님’이라니 TV에서 보던 것보다 나이가 많으시네 생각했다. 그런데 그 분은 지율스님이었다. 이분은 지선스님이다.
“국민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여기는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입니다. 지금부터 방송을 시작하겠습니다. 지금 이 시각 장충체육관에서 선출되고 있는 노태우 민정당 대통령 후보는 국민의 이름으로 무효임을 선언합니다.” (p.57)
6월 항쟁의 그날, 서울 성공회 성당의 종루에 올라가 옥상의 대형 스피커로 방송을 했다. 당시 지선스님은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 상임대표 11명 중 한 명 이었다. 6월 항쟁의 시발점이 되고 이후 중심에 섰던 인물이었다. 87년, 87세대, 6.29항쟁,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등 들어온 얘기는 무척이나 많은데 그 중심에서 열심히 운동을 하고 아침에 성공회 종루에서 서울시민들에게 방송을 한 사람을 전혀 몰랐다는 것이 의아했다. 다른 책에 실릴 만도, TV에서 언급될 만도 한데 전혀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우리는 방명록같이 생긴 것에 돌아가면서 사인을 했어요.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거든요. 국가전복죄, 내란음모죄를 비롯해 우리가 여기서 나가면 사형 당할지도 모른다, 실제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p.58)
서슬이 퍼렇던 박정희·전두환 독재시절 사람들은 혹시나 정권을 비판하거나 대통령을 비판하기만 해도 잡혀갔다. 몇 명이라도 모여 있으면 어김없이 감시를 받고 제지를 당했다. 광주는 더 했을 것이다. 그래서 당시 광주 시민들은 무등산에 많이 올랐다고 한다. 산에 오르며 뜻 맞는 사람들과 욕지거리도 내뱉고 술잔을 기울이며 실컷 비판도 하고 평소 하고 싶은 말을 많이 쏟아냈다고 한다. 당시 무등산의 한 사찰에서 주지로 있던 지선스님은 그런 광주시민들을 만나며 새로운 정치인식을 하게 된다. 정권에 붙어 조찬기도회나 하던 당시 종교계에 대한 일반 시민들의 불만은 상당했고 무등산에 오르던 시민들이 절간을 훼손하거나 한참 욕을 쏟아 붓고 가는 일도 허다했다고 한다.
그렇게 뛰어든 운동이 스님을 완전히 뒤흔들었다. 혼자서 수백 권의 사회서적을 독파하며 의식을 정립하고 다방면의 인사들과 교류하며 의식의 폭을 넓혔다. 앞날이 창창한 젊은이도, 먹여 살릴 처자식 걱정을 해야 할 직장인도 아닌 성직자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해 운동에 전념했다. ‘스님이 너무 나댄다.’는 안팎에서의 비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6월 항쟁 한복판에 있었고 정말 목숨을 내어놓고 운동을 한 사람이다.
이런 사람을 몰랐다는 것이 죄스러웠다.
“지금도 나는 그때 청와대로 갔어야 했다고 봅니다. 뿌리를 뽑아버렸어야 해요.” (p.70)
6월 항쟁의 최고 정점이었던 박종철 노제 직후 국민운동본부 내의 이견으로 청와대 진출이 무산되었다는 사실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지선스님은 청와대까지 진출해 정권 심판운동으로 나아갔어야 한다고 후회한다. 수십 년이 지난 일이라 새삼 후회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일이기는 하지만 단 한 번도 잘못된 과거를 청산하지 못한 한국의 괴상망측한 현대사를 상기해볼 때 두고두고 아쉬움이 남을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지선스님을 통해 생생한 6월 항쟁의 이야기를 전해들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의미 있는 책읽기였다. 단지 학생으로 참여하거나 넥타이 부대로 참여하거나 멀리서 지켜본 입장이 아니라 당시의 운동을 대표하던 국민운동본부의 상임대표를 맡고 있는 분이라 책임감과 부채의식까지 전해진다.
국민들의 열망과 민중들의 소망과는 다른 방식으로 노태우가 6.29의 가장 큰 수혜자이자 시혜자가 되어 버렸다. 목숨을 걸고 민주주의를 위해 싸워 온 사람들이 느꼈을 허탈함은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결국 정치를 하는 자들 입맛에 맞게 이리로 붙기도 하고 저리로 붙기도 하는 것이 민중과 국민들의 마음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경험 했다.
87년 이후 30년이 훌쩍 지난 지금 운동권, 나아가서 범 진보세력이 처한 위기에 대해서도 지선스님은 명쾌하게 진단한다.
“민주당에 들어간 운동권들 보세요. 야당에 많이 들어갔잖아요. 대통령이나 그 비서들, 국회의원이나 그 보좌관으로 들어갔거든요. 자기들이 그 자리에서 일 해봐서 너무 잘 알아요. 그래서 어떻게 운동권을 대합니까? 싸가지 없이 무시해버려요. 그럼 운동권은 인격적으로 모멸당하니까 복수심이 싹트고, 그래서는 안 되는 겁니다. 집구석이 안 돼요.” (p.95)
“학생운동은 청년운동에 소속되어야 하고 청년운동은 진보정당에 소속되어 가야 하는 건데, 우리는 그게 아니잖아요. 세상에 없는 거꾸로 하는 운동이에요. 지금 생각해보면 참 부끄러워요. 대부분 3-4년 싸우다가 이름이 난 의장이나 대표는 정치권으로 후루룩 날아가고, 그럼 또 죽기 살기로 새 의장 뽑아서 이름 알려지면 또 날아가 버리고, 이런 것들이 세계 운동사에 없어요.” (p.63)
나도 참 궁금했었다. 군사독재 시절 목숨을 걸어가며 운동을 한 사람들이 지난 수십 년 동안 정치판에 수도 없이 많이 진출했는데 정치가 발전하거나 국민들의 생활이 나아지지 않는 것. 그것이 궁금했다. 이해가 되지 않는 문제였다. 그 시절 그렇게 열심히 운동을 하던 사람들이 모두 다 변절해 버린 것은 아닐 텐데, 최소한 여당이 아니라 야당에 투신한 운동권 인사들이 왜 정치권에 발을 들여놓기만 하면 그전까지 살아온 자신의 정체성은 잊은 채 바보가 되어버리는지 지선스님은 한마디로 정리한다.
‘나도 운동 열심히 해봐서 아는데 그것가지도 안돼~’라는 생각과
정치를 하기 위해 운동을 하는 뒤틀린 운동방식의 한계였다.
“조급성, 영웅주의 그리고 모험주의를 극복하지 못 해서 우리 운동이 지금 이 모양입니다.” (p.96)
최소한 운동권 출신 정치인들이 자신이 몸담았던 운동권을 좀 더 챙기고 동지의식을 가지고 운동의 한계를 정의하고 토론하고 발전 방향을 모색하는 노력을 했어야 했다. 그리고 운동권은 어차피 뒤틀린 운동 방식이지만 정치권에 진출한 어제의 동지에 대해서 여전한 동지애를 가졌어야 했다. 단순히 정치에 투신했다고 변절자라느니, 배신자라느니, 전향했다느니 하며 몰아붙이는 것은 피차 도움 될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 우리 운동권과 운동권 출신 정치인들은 서로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고 서로를 물어뜯기만 했고 그 결과가 지금 진보정당과 운동권의 공동 궤멸의 위기라는 현실을 낳았다는 것이다.
이 부분을 읽으며 격하게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다른 정치평론가나 작가들처럼 매끄럽게 표현을 하지는 못했지만 적확한 현실 인식이라 생각한다.
조급성, 영웅주의, 모험주의를 극복하지 못한 것이 가장 큰 이유라는 지적.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다. 수십 년 동안 지난하고 고되게 운동을 이어오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을지 그들만큼 느끼지는 못하지만 조금은 이해할 수 있다. 누군가 슈퍼맨처럼 등장해 악의 무리를 소탕하고 동지들을 구출하고 정의의 사회를 만드는 것을 꿈꿨을 것이다. 그런 꿈을 꿨던 사람들에게 ‘당신 운동을 한다면서 왜 그렇게 조급했습니까? 영웅주의에 빠져 있었습니까? 모험주의를 벗지 못했습니까? 그래서 지금 운동권과 진보진영이 요 모양 요 꼴 아닙니까? 예!?’ 라고 말할 수 없다.
한가운데 있었던 지선스님이기에 할 수 있는 말이다.
“내가 생각한 것은 ‘정치는 무당’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전두환-노태우 일당을 전부 몰아내기 위해, 저 ‘귀신’들을 몰아내기 위해 우리가 무당이 되어 전 국민이 푸닥거리를 할 때만 저들이 물러갈 수 있다고 시를 썼어요." (p.13)
‘정치는 무당’이다. 라는 표현이 의미심장하다. 마을과 가문, 집안의 액운을 떨쳐내는 것만이 무당이 하는 굿의 주목적이 아니었다. 하나의 문화요, 소통의 장이었을 것이다. 함께 슬픔을 나누고 원통함을 공감하고 웃고 울며 푸닥거리 해내는 것이었다. 정치를 하는 사람들, 정치를 하려는 사람들은 모두 무당이 되어야 한다고 스님은 말한다. 대신해서 억울함을 풀어주고 소통하게 하고 또는 벌하기도 하는 무당이 되어야 한다고. 동의하고 공감한다.
지금 한국정치의 현실처럼 무관심과 혐오를 넘어서서 상식이 통하지 않는 정치는 무당은커녕 국민들의 짐만 될 뿐이다. 정치만 보면 더 스트레스 받고 더 화가 쌓이니 골이 깊어만 간다.
“원통하게 죽어간 용산 철거민들의 참사, 불법 민간인 사찰, 부정부패로 얼룩진 청와대, 제주 강정마을의 해군기지, 한미FTA, 4대강사업 등에 대해 박근혜가 우리 국민 대대수가 느끼는 분노를 전혀 알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p.39)
이 책은 지난 대선 전에 출간 되었다. 지선스님은 특정 후보를 지지하거나 비판하지 않는다. 오히려 오랜 시간 운동을 해 오고 온 몸을 던져 투신해 온 어른이자 선생으로써 국민들의 한과 아픔을 진정으로 달래줄 수 있는 무당이 되어주기를 소망한다.
대통령 선거는 끝나고 박근혜 당선인이 취임식을 앞두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염려하고 걱정하고 불안해하던 일들이 제발 일어나지 않기를 바란다. 이것은 진심이다. 이명박이 집권 초 내각 구성에서부터 미국산 소고기 수입에 대한 대응에까지 민심과는 완전히 대치된 국정 운영을 했기 때문에 국민적 저항에 직면했던 것을 반면교사 삼아야 한다.
수십 년 동안 이 땅의 민주주의를 위해 투신해 온 지선스님과 나와 같은 평범한 소시민이 박근혜 당선인에게 바라는 바는 비슷할 것이다.
아직은 미심쩍고 기대조차 되지 않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지만 5년을 그냥 흘려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제발 잘 해주기를 바랄 뿐이다.
“저건 ‘인간 말종’이에요. 저분은 솔직히 말해서 스님으로서 할 얘기는 아닌데 개짐승만도 못한 사람이에요.” (p.86)
지선스님이 험한 말을 하며 비판한 어떤 사람의 모습만은 답습하지 않았으면 한다.
첫머리에서도 말했지만 알마에서 나온 [이슈북] 정말 추천할 만한 시리즈다. 인터뷰를 엮은 형식이라 어렵지 않다. 특히 나처럼 한국의 현대사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시리즈 중 마음에 드는 책을 골라 읽어보면 새로운 눈을 뜨게 될 것이다. 책이 두껍다고 다 좋은 책이 아니듯이 얇다고 다 가벼운 책이 아님을 [이슈북]을 통해 확인 할 수 있다.
관심 있는 분들 꼭 한 번 읽어보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