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느낌표, 그리고 마침표
권인옥 지음 / 나남출판 / 2013년 1월
평점 :
서른다섯. 많다면 많고 적다면 적은 나이다. 이번 설에 시골에 다녀왔는데 사촌 동생들을 보면서 새삼 내 나이를 다시 돌아보게 되었다. 막내 동생이 아주 어릴 때 숙모 품에 안긴 아이를 안고 업고 놀아주던 때가 생생한데 벌써 고3이라고 스트레스 받는 모습이 퍽 어색했다. ‘너 언제 이렇게 컸냐? 징그럽다~!’ 놀렸더니 ‘큰오빠는 너무 늙었어~ 이젠 완전히 아저씨야. 아저씨’ 이런다. 삼촌, 숙모들을 뵈도 이제는 아픈 곳이 더 많고 얼굴과 손의 주름, 흰머리. 여름 시골집에서 동생들을 데리고 개울가에서 하루 종일 놀다가 들어오면 시원한 수박을 잘라주던 숙모들의 모습, 어디서도 맛볼 수 없었던 아궁이 계란볶음밥을 해주던 삼촌들의 모습이 그만큼 변한 내 모습처럼 변해 버렸다. 갑자기 밀려오는 우울함과 상실감으로 시할아버지 댁까지 명절에 와야 하는 아내를 위해 전력으로 충성하고 바지런히 보조하는 역할을 해야 하는 내가 넋을 놓고 있었다.
마침 가져 간 책이 「느낌표, 그리고 마침표」였다. 시어머님, 시숙모님들 사이에서 고생하고 있을 아내를 뒤로 한 채 구석방을 찾아 들어가 단숨에 이 책을 읽어냈다. 나로서는 목숨을 건 도박 이었다.(물론, 중간중간 부르심이 있으면 총알처럼 튀어나가 보조를 하고는 해서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막내 사촌 여동생의 갑작스런 성장이 내 서른 다섯 해를 갑작스레 돌아보게 한 느낌표가 된 것일까?
책은 권인옥 작가의 에세이다. 영화와 책, 일상에서 그녀가 느낀 감정과 마음가짐, 태도와 행동을 고스란히 글로 담아냈다. 영화에서의 느낌표, 책에서의 물음표, 삶의 길목에서의 쉼표는 마지막 마침표를 찍기 위한 의도된 과정도 아니고 책으로 엮기 위한 소재도 아니었다. 그녀가 자신의 삶 속에서 몸으로 담아낸 기록이었다.
그래서 읽기가 조금 버거웠다. 더군다나 명절에 몰래 방구석에 처박혀 귀는 항상 부엌으로 열어 놓은 채 읽어야 했기에 더욱 분잡스러웠던 탓도 있다.
이제까지 살아온 삶을 돌아보는 것은 온전히 홀로되는 시간이 있어야 가능한 것으로 생각했었는데 온 신경을 곤두세운 채 책을 읽으며 생각하고 귀를 열고 있는 것을 동시다발적으로도 할 수 있다는 것을 경험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크게 뭔가를 깨달았거나 발견했거나 다짐하고 그러지는 못했다. 못한 것인지, 안 한 것인지조차 정확히 알수는 없지만 분명한 것은 아직 멀고 또 멀었다는 확신이었다. 내 좌우명 중 하나인 [하늘로 기어간다]는 이런 내 삶에 대한 태도를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는 문장이다. 짧고도 길었던 서른다섯 해가 마냥 좋지 만은 않았고 마냥 안 좋지 만도 않았다. 한 해가 힘들면 다음 해가 좋기도 했다. 그렇게 그냥 살아낸 것 같았다. 당장 눈에 보이거나, 귀에 들리거나, 손에 잡히지 않지만 내가 눈을 들어 바라볼 그 이상향이 분명히 있다. 그것이 하늘일 테다. 당장 내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고, 손에 잡힌다면 그것은 더 이상 이상향이 아니다. 현실이다. 희뿌연 안개같이 가려져 있고 방향조차 가늠하기 힘들 때가 많기 때문에 오히려 이상향이 되고 하늘이 된다고 생각한다. 거기에 더해 서두르지 않는 다는 것. 날아가고 뛰어가고 싶지만 기어가는 것이다. 한참 달려갔는데 달려온 만큼 방향이 틀어져 있거나 급하게 달려 금세 지쳐버렸다면 말짱 도루묵이다. 천천히 주위도 살피고 챙기고 두발로는 세상을 인식하고 참여하기가 모자라니 네발로 기어간다는 것이다.
아직 남아있는 삶의 이상이 너무 많다. 지금은, 아직은, 그것을 준비하고 기다릴 때다.
내 결론은 그것이었다.
‘올 한 해 또 어떻게 살아갈까? 2세 소식은 언제쯤 들리게 될까? 뭔가 새로운 계기나 돌파구가 찾아왔으면 좋겠다.’
문득문득 찾아와 잠 못 들게 하는 고민이 산적해 있지만 기실 고민이라는 놈도 당장 없다면 무척이나 서운할 것 같다. 견뎌낼 만한 고민은 옆에 두고 친구하는 것이 일상을 더 윤기 있게 하는 방법 중 하나일 것 같다.
현재 주어진 것에 감사하고 만족하며 급하지 않게 이상향을 향해 기어가는 것. 적당하게 고민하고 갈등하면서 최선일 거라는 기대를 버리고 일상을 선택하는 것.
이것이다.
……>
확실한 직선은 아니지만 여전히 이어지는 것. 빠르게 높이 멀리 한꺼번에 가지 않고 띄엄띄엄 가는 것. 하지만 분명한 방향으로 끊임없이 향하는 것.
시골 구석방에서 결론 내린 것 치고는 꽤 괜찮았다.
책을 다 읽기도 전에 미리 내 결론에 도달해서 개인적으로 작가에게는 조금 미안했다. 하지만 내 결론은 내려져 있어도 작가의 삶을 들여다보는 것은 또 다른 즐거움이었다.
!
“하비가 맞서 싸우고자 한 대상은 종교적인 벽도 아니고 굳건한 정치적 아성도 아니고 바로 사람들 마음속에 자리 잡은 소수자에 대한 편견이다. 누구나 동성애자에게 관대하라고 소리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많은 사람들처럼 능력과 자질에 따라 평가하고 대우해 달라는 것이다.” (p.36)
영화[밀크]를 본 작가의 !이다. 작가는 주로 대중적으로 많이 알려지거나 흥행한 영화보다는 작품성이 있는 영화를 주로 보는 것 같았다. [밀크]라는 영화도 이 책을 통해 처음 알게 되었는데, 평소 내가 고민하던 동성애에 대한 내용이 있어 관심 있게 읽었다. 나는 늘 생각한다. ‘내가 평소에 잘 알고 지내던 지인이 어느 날 갑자기 날 찾아와서 커밍아웃한다면 과연 나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더군다나 함께 교회를 다니는 친구가 그런다면 나는 그 친구를 어떻게 대할까? 같은 생각들이다. 워낙 보수적이고 성정체성에 대한 극단적인 교조성이 지배하고 있는 한국의 교회이기 때문에 당장 파면을 당하거나 자연스레 기피대상이 되지 않을까 싶다. 불쌍한 죄인으로 여겨 기도를 하는 무리도 있을 것이고.
영화 [밀크]에서는 자신들의 더 권리를 보장받기를 바라는 것도 아니고, 특별하게 처우해 주기를 원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대해주기를 소망한다. 영화나 책에서 이런 장면이 연출되면 ‘나도 열려있는 사람이라 자부하는데 나는 정말 그(그녀)들을 그 이전처럼 대할 수 있어!’라고 장담하는데 어디까지나 장담일 뿐이다. 한 번도 그런 경험을 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말은 누구나 할 수 있다. 따뜻한 척. 열려있는 척. 관대한 척.
닥쳐봐야 알 수 있을 문제다.
?
“화연도 화연의 부모도 선생님도 반 아이들도 죽은 아이가 불쌍하다고 여기지만 정작 왜 그렇게까지 했어야 할까를 헤아리고자 하지 않는다. 곪은 상처를 드러내는 것이 두렵기도 하고 그 고름이 자신에게 묻을까 겁나기 때문이다.” (p.100)
김려령 작가의 책 [우아한 거짓말]을 본 작가의 ?이다.
말 한마디의 힘에 대한 작가의 생각이었다. 아이들에게 따돌림을 당하는 한 아이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아이의 부모, 선생, 반 친구들은 자신들이 하고 싶은 이야기만 한다. 자신이 알고 있고 인식해 온 만큼만 이야기 한다. 이야기가 넘쳐난다. 가만히 입 다물고 있는 것은 죽은 아이뿐이다. 가만히 있으면 자신에게 책임이 전가될까 두려워 잠시도 가만히 입 다물고 있지 못한다. 그리고는 우아하게 거짓말들을 늘어놓는다. 어차피 죽은 아이는 말이 없으니까.
내가 하루 종일 하는 말을 가만히 생각해 봤다. 사람을 살리는 말이 많은지 사람을 죽이는 말이 많은지. 분명 살리는 말보다 죽이는 말을 많이 하는 것 같은데 갑자기 자기합리화가 시작됐다. ‘아니야~ 이런 말쯤은 죽이는 말이 아니라 그냥 갈구거나 농담하는 거지 뭐~’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니 아니었다. 죽이는 말까지는 아니어도 분명 상대를 곤란하게 하거나 상대를 찍어 누르기위한 말이 많았다. 그리고 살리는 말처럼 우아하게 포장하고 있지만 기실 희롱하거나 비꼬는 말도 많았다. 서른 다섯 해를 살았지만 아직 어린아이 같은 내 안의 많은 모습들을 미리 감추려는 자기방어일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궁금했다. 저자가 영화를 볼 때는 !였는데 책을 볼 때는 ?였다. 왜 그랬을까 생각해 봤는데 결론을 내릴 수 없었다. 굳이 문장부호를 다르게 한 이유가 무엇인지…….
,
“속도 전쟁이 피할 수 없는 현대의 대세입니다. 누구나 앞만 보고 정신없이 달려가는 이 세상에서 늦게 가기 때문에 오히려 살 수 있고 행복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나무늘보입니다. 나무늘보는 아무리 빨리 가보아야 한 시간에 900m 정도밖에 가지 못합니다. 모두들 빨리 가느라고 서로 부딪치고 넘어지곤 하는데 나무늘보는 천천히 유유자적하게 자기 페이스를 유지하며 살아갑니다. 그 나무늘보에게서 느림의 행복을 배워야 합니다.”
“어쩜 나무늘보는 자신의 느림 때문에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어려움과 긴장 속에서 살고 있는지 모른다.” (p.191)
북한산을 오르다 앞서가는 등산객의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진행자의 멘트를 보고 깨달은 작가의 ,이다.
나무늘보가 얼마나 힘들까? 라고 생각해 본적이 없었다. 사람들은 자기가 생각하고 싶은 대로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하고 난 후 그렇게 결론 내린다. 그리고 난 후 그것에 상대방이나 대상을 맞추려 한다. 아집이고 교만임에도 잘 알지 못한다. 알지 못하는 것인지 알면서도 인정하려 하지 않는 것인지 당사자만 알 것이다. 급변하는 현대 사회에서 나무늘보에게 배울 점을 굳이 찾으려 한 라디오 작가나 진행자가 잘못한 것은 아니다. 사람들도 자신들의 인생을 살아내고 있듯이 나무늘보 또한 자신의 인생을, 삶을 살아내고 있는 것이다. 그냥 있는 그대로 보면 되는 것이다. 나무늘보의 생태적 특성에서 굳이 교훈을 이끌어 내거나 적용거리를 찾으려 하는 것은 자칫 만용일 수 있다.
사람들은 뭔가 많이 하려고 한다. 회의도 많이 하고, 운동도 많이 하고, 생각도 많이 하고, 말도 많이 한다. 많이 하는 만큼 변화가 있거나 성장이 있거나 진화가 있거나 하는 것도 아닌데 그렇게 많이들 한다. 자기만 많이 하면 상관없는데 주변 사람들까지 피곤하게 하는 경우가 많다.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는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임을 확인하려는 것인지 명령하고 잔소리하고 간섭하면서 많이 하게 만든다.
숨 한번 크게 들이켜고 따져보면 그렇게 급하거나 중요한 일이 아닐 때가 많다.
나무늘보는 나무늘보여서 최선을 다해 자신의 일상을 살아내는 것이다.
나무늘보 쳐다보지 말고 주위 사람 간섭하고 신경 쓰지 말고 자신의 일상을 살아내는 것에만 집중했음 싶다.
……>
나는 이렇게 살 것이다.
당신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