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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올빼미 농장 ㅣ 작가정신 소설향 19
백민석 지음 / 작가정신 / 2003년 9월
평점 :
절판
친형제와 다름없는 민데형은 몽골 사람이다. 언젠가 민데형이 내게 물었다.
“아파트에서 살면 답답하지 않아?”
어린 시절 끝이 보이지 않는 초원에서 말을 타고 양을 몰던 민데형에게 분명 한국의 아파트는 이상하게 보였을 것이다. 형의 눈에는 네모난 상자에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몰려 들어가는 것이 낯설기도 했을 것이다. 답답하지 않냐는 형의 물음에 정확하게 내가 뭐라 대답했는지 기억나지 않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크게 의미를 두지 않았던 것 같다.
나는 초등학교 5학년 말부터 아파트에 살았다. 5층짜리 아파트의 1층에 살았는데 그전까지 살았던 주택보다 훨씬 좋았던 것 같다. 이후로 지금까지 계속 아파트에 살고 있다. 결혼 전 3년 정도 직장 때문에 원룸에서 혼자 살았던 기간을 제외하면 계속이다.
처음 살게 된 아파트가 온전한 의미의 ‘우리 집’이었던 것 같다. 15평에 불과했지만 어린 나와 동생에게는 큰 집이었고 무엇보다 부모님이 ‘우리 집’이라는 말을 무척이나 많이 하시며 좋아하시던 얼굴이 지금도 생생하다. 첫 아파트에 대한 경험이 그렇게 좋아서인지 나는 아파트에 사는 것이 좋았다. 편하고 전망 좋고(첫 아파트 이후에는 모두 고층이었다) 사람도 많고. 결혼 전 잠시 원룸에 살 때는 너무 불편했다. 주차문제, 주인집 영감님의 잔소리, 쓰레기 처리 문제 등 너무 싫었다. 결혼 전 신혼집을 구하러 다니면서도 빌라나 투룸 뭐 이런 것은 아예 쳐다보지도 않았다.
나는 아파트가 좋다.
이 책 「죽은 올빼미 농장」은 제목만큼이나 우울한 내용이다. 작품해설을 굳이 읽어보지 않더라도 작가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감을 잡을 수 있다. 한국의 건축, 건물 문화를 대표하는 아파트는 가장 많은 사람이 살고 있는 주거지다. 많은 건설 회사들이 아파트를 짓고 많은 돈을 벌었고 그 아파트가 들어서는 땅을 가진 주인들도 많은 돈을 벌었다. ‘내 집 마련’이라는 한국인의 가장 큰 꿈을 이뤄준 것도 아파트다. 어느 도시를 가나 아파트가 있다. 아파트가 많이 생기는 곳에는 상권도 생기고 학교도 생긴다. 신도시가 만들어지기도 한다. 다닥다닥 붙어 있는 아파트로 인해 한국 사람들은 전 세계에서 가장 빠른 인터넷을 사용하고 있다.
“분명한 건 우리가 뭔가 찾아냈다는 거야.”
“그래, 멍청아.” (p.33)
똑똑한 사람들이 너무 많다. 한국의 독특한 주거문화이자 건축물인 아파트에 대해서도 누구나 한마디씩은 할 수 있는 말이 있다. 사회·문화적, 정치·경제적, 역사·지형적 등 성게가 뻗을 수 있는 모든 방향으로 가시를 뻗쳐내는 것처럼 누구나 손을 뻗쳐 분석하고 해석할 수 있다.
작년에 유독 청소년의 투신자살이 많았다. 아이들이 아파트에서 뛰어 내린 것이다. 대구의 교육감이라는 자는 최소한 학교에서는 아이들이 뛰어내리지 못하도록 학교의 창문을 몇cm이상은 열지 말라는 공문을 내리는 미친 짓을 하기도 했다. 아이들이 아파트에서 뛰어 내린 것을 가지고도 성게 가시처럼 많은 입이 삐쳐 나와 제각각 할 말을 쏟아냈었다.
뭘 자꾸 찾아내고 분석해 내야 하는 것인지 사실 나는 잘 모르겠다.
내가 아파트에 대해서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은 어린 시절의 경험과 결혼 전 몇 년간 살았던 원룸에서의 좋지 않았던 경험 때문이다. 아이들이 아파트에서 뛰어 내린 건 단지 아파트가 그때, 거기에 있었기 때문이다. 푯대를 완전히 상실한 채 표류하던 아이들에게 굳이 뛰어내린 장소가 아파트였다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
백민석 작가가 이 작품에서 만들어 낸 주인공을 통해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가 전형적인 이 시대를 사는 현대인의 모호한 정체성과 파편화된 관계의 문제라면 적어도 내게는 별 설득력이 없다.
프리랜서 작사가인 주인공도, 미국인 남자친구의 아이를 가지고 싶어 하는 동성애자 손자도, 믿을 수 없을 만큼 형편없는 가창력으로 데뷔를 꿈꾸는 당돌한 여고생 해아리도, 애인도 아니고 친구도 아니면서 섹스를 나누는 상대인 민도 아파트로 상징되는 자신만의 네모난 공간에서 살아간다. 시대를 사는 대다수가 그렇다. 반복되는 일상을 벗어날 길 없는 사람들이다. 나갔다 들어오고, 다시 나갔다 들어오는 것을 되풀이한다. 되돌아갈 곳이 없다. 고향이라는 개념이 부모 세대와는 완전히 다른 자식 세대에게는 출발점이 모호하다. 출발점이 모호하니까 도착점도 멀기만 하다.
일탈과 탈출을 꿈꾸는 주인공은 농장에서 온 미상의 편지에 그대로 빠진다. 매료된다. 언젠가는 나를 구원해 줄지도 모를 메시아를 아직도 기다리는 유대인들처럼 기다리던 미지의 세계에 완전히 빠진 것이다. 강원도에서도 맨 위에 있는 고성으로 한달음에 도착한다. 수소문해 편지의 발신지를 찾았지만 찾을 수 없었다. 애초에 정확한 발신지를 찾아 편지를 돌려주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을 것이다. 지난한 삶에서 어떻게 해서든지 도망가고자 하는 욕망이었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아파트 같은 모텔에서 잠을 청한다. 벗어날 수 없다. 결코 일상에서 도망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그가 살고 있던 아파트에서도 그랬던 것처럼 욕조에 뜨거운 물을 가득 받아 그 안에서 잠이 든다. 그리고 아파트로 상징되는 현실의 구렁텅이는 무소부재하다. 손자의 집에서도, 민의 집에서도, 해아리의 스튜디오에서도 주인공의 아파트는 재창조된다.
그렇지만 잘 모르겠다.
현대인이 겪는 모호한 정체성의 이유가 단지 출발점을 잃은 아파트먼트 키즈의 숙명만이라고 볼 수 없다고 생각한다. 작품에서 그려진 주인공이 얼마나 탈출과 구원을 욕망했는지 알 수 없지만 여전히 또 다른 현실의 구렁텅이로 그렇게 쉽게 빠져 들어가는 것도 잘 이해되지 않았다.
“인형은 베란다에 나가 있었다. 손님이 오면 늘 그랬다. 아니면 작은방에 틀어박혀 있던가. 손자가 왔다 갔어. 나는 인형을 들어 무릎에 앉히며 말했다. 일이 그렇게 힘들대? 힘은 안 들어.” (p.49)
“인형은 며칠 더 그랬다. 베란다에 나가 앉아 넋을 놓고 온종일 바깥을 바라봤다.” (p.63)
“인형은 끊임없이 불평을 늘어놓았다. 인형은 손자가 불의의 침입자라면 단단히 앙심을 품고 있었다. 인형은 지난 며칠 새 히스테리가 머리 꼭대기까지 치밀어 조만간 돌아버릴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p.165)
현실에서 탈출 할 수 없는 주인공은 또 다른 ‘나’인 ‘인형’에게 집착한다. ‘나’의 입장에서는 늘 ‘인형’이 내게 히스테리를 일으키고 불평과 불만을 가득 쏟아 내며 변덕이 죽 끓듯 하는 것으로 묘사되지만 결국 ‘인형’은 ‘나’다. 파편화된 관계의 문제를 ‘인형’을 통해 묘사한 작가의 의도도 사실 별로 설득이 되지 않았다.
애초에 현대인이 가진 여러 가지 사회병리현상에 대한 전제 자체가 작가와는 많이 다르기 때문인 것 같다.
책을 읽으면서 ‘왜 굳이 인형이 등장해야 할까?’를 생각할 정도였다.
“내가 만약 너를 죽일 수 없다면 말야···· 하고 나는 농장 빈 땅으로 발을 들여놓으며 중얼거렸다. 또 다른 누군가가 죽겠지. 손자 같은 애가 말이야. 최악엔 나일 수도 있어. 그렇지? 아니라고 어떻게 장담하겠니? 벌써 내게 싫증이 난 기색이 역력하던데 말야.” (p.178)
“나는 가능한 한 팔을 길게 뻗어 잘 조준한 다음 흙탕물의 정중앙을 향해 인형을 던졌다.” (p.183)
결국 주인공이 그토록 찾으려 했던 죽은 올빼미 농장을 찾지 못하고 또 다른 ‘나’인 인형과도 돌이킬 수 없는 갈등의 골이 깊어졌다. 이제는 더 이상 나의 또 다른 ‘나’와도 화해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나’를 구렁텅이에 던져 넣어 버린다. 아무런 위안과 해결을 가져다주지 않는 ‘인형’과 계속 이런 관계를 이어간다면 ‘나’도 언젠가는 손자처럼 아파트에서 뛰어 내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친구나 애인이 될 때보다 올가미가 될 때가 더 많았던 ‘인형’을 내팽개치는 것으로부터 진정한 의미의 탈출과 구원은 시작되는 것이다.
“노트북은 종일 켜져 있었고 책상 한켠에는 메모지가 쌓여갔다.” (p.41)
나는 차라리 이런 방식이 좋다. 그냥 있는 대로 두는 것이다. 노트북은 종일 켜져 있고 한켠에는 메모지가 쌓여가고, 핸드폰은 여전히 잠들어 있고 한켠에는 생각이 쌓여가고, 무슨 노래인지도 모르는 노래는 머릿속에 맴돌고 현실에 대한 고민은 켜켜이 쌓여가고, 때가 되면 밥을 먹고 잠을 자고 다시 일어나 씻고 밥을 먹고 돈을 벌고, 책을 읽고 줄을 긋고 글을 쓰고 친구를 만나고, 전화를 하고 문자를 보내고 카톡을 하고, TV를 보고 게임을 하고 장난을 치고, 욕을 하고 욕을 얻어먹고 비난을 하고 비난을 받고, 지하주차장을 빙빙 돌아 겨우 빈 한 구석에 차를 집어넣고, 풀리지 않는 문제의 샅바를 쥐어 잡고 또 한 번 씨름하고, 멍 하니 바보가 되기도 하는.
그냥 이대로 살아가는 것이 나는 좋다.
굳이 발신지도 불분명한 편지를 돌려주려「죽은 올빼미 농장」을 찾아다니는 번거로움을 결행하고 싶지 않다. 잘못 왔으려니 우체통에 넣어 버리면 그만이다. 살아있는 농장에도 할 일이 태산인데 「죽은 올빼미 농장」에 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다. 나는 그렇다.
소설 리뷰 쓰는 것이 내게는 고되다.
이래서 소설은 좋아하는 작가의 책만 읽게 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