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피는 용산 - 딸에게 보낸 편지
김재호 지음 / 서해문집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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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월 20일 용산에서 한국의 국민 6명이 죽고 23명이 크고 작은 부상을 입은 참사가 일어났다. 한국의 수도인 서울에서 화염에 휩싸인 컨테이너와 진압을 위해 쓰인 크레인에서 경찰이 대치하고 돌이킬 수 없는 참사로 이어진 그 장면을 모두가 TV로 목격했다. 3년이 지난 지금 한국 사람들은 얼마나 용산 참사를 기억하고 있을까? 워낙 잘 잊는 사람들이 한국 사람들이기에 쉽게 잊혀진 것은 당연하다. 용산 참사에 대한 진상규명조차 제대로 되지 못한 판에 일반 국민들이 3년이나 지난 일을 생생히 기억해 주기를 바라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목숨을 걸고 함께 농성을 하던 사람 다섯 명이 비참하게 생을 마감하는 것을 눈앞에서 본다는 것은 끔찍한 일이다. 이 책의 저자 김재호씨가 그런 사람이었다. 눈앞에서 이웃이, 동지가 죽는 것을 봤지만 한순간에 그 조차 피해자에서 가해자로 몰려 구속이 되었다. 그리고 어처구니없는 판결과 정부, 언론의 악의적이고 왜곡된 대처는 그를 절망에 빠뜨렸다. 시간이 흐를수록 용산 참사는 사람들의 기억에서 멀어져 갔다. 그런 사람이 붙잡을 수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김재호씨는 너무나도 평범한 사람이었다. 늦은 나이지만 사랑하는 아내를 만났고 40을 넘은 나이에 귀한 딸아이를 얻었다. 1984년부터 용산에 자리 잡아 금은방을 운영하며 살아 온 사람이다. 덜렁대며 지갑을 자주 잃어버리는 아내를 위해, 혹시나 아내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지 않기 위해 몰래 아내의 외투 주머니에 돈 오천 원을 넣어주는 자상한 남편이다. 뒤늦게 얻은 딸 혜연이는 김재호씨의 유일한 꿈이자 희망이자 봄이자 노래였다. 자신의 외모뿐 아니라 성격까지 빼닮은 혜연이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려서부터 엄마와 있었던 시간보다 아빠와 있었던 시간이 많은 혜연이는 아빠를 더 따랐다. 그런 혜연이에게 아빠는 늘 든든한 그림자가 되어 주고 방패막이 되어 주고 보호자가 되어 주었다.

 

 

“불길이 걷잡을 수 없이 치솟자 그는 “여기 사람이 있다”고 소리쳤다. 용산참사의 생존자로 그는 구속되었고, ‘도심 테러리스트’라는 폭도의 오명을 쓰고 징역 4년을 확정 받았다.” (p.5)

 

그런 평범하고 너무나 흔한 이 가정에 불행이 찾아왔다. 자상한 남편, 따뜻한 아빠가 어느 날 갑자기 아내와 딸의 곁을 떠났다. 떠날 수밖에 없었다. ‘도심 테러리스트’라는 무시무시한 죄명을 쓰고 가족의 곁을 떠났다.

처음엔 자살을 생각하기도 했다고 한다. 도무지 이해되지 않고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피해자가 한순간에 가해자가 되어 징역 4년형을 받고 수감될 수 있는지.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는 자신을 지켜줄 존재가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느끼는 순간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었을 것이다. 어차피 노력하고 부딪혀도 손톱의 때만큼도 바뀌지 않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자신은 그저 그 동네어서 오래 살아서 이웃들과 어깨걸며 잘 지내왔을 뿐이고 사랑하는 아내와 딸을 위해 작은 금은방을 운영하며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다른 이들을 도우며 살아왔을 뿐이며 아무도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아 망루에 올라갔을 뿐인데……. 결론은 징역을 사는 수감자가 된 것이다. 아내를 매일 볼 수 없고 딸 아이 혜연이를 매일 안을 수 없다는 것이 쉬이 상상이 가지 않는다. 국가에 대한 절망과 좌절은 차치하더라도 아내와 딸을 매일 볼 수 없다는 갑작스런 상실은 어떤 것으로도 채울 수 없을 아픔이었을 것이다.

다행히 그는 첫 면회를 온 아내와 혜연이를 보고 다시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한다. 그리고 만화를 그리기 시작한다.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일이라고 한다.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는 일이 너무나 낯설었지만 아내와 혜연이를 그리워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담아 주2∼3회 총 400여 통의 그림 편지를 보냈다. 그것을 엮은 책이 「꽃피는 용산」이다. 제목처럼 꽃이 다 꺾여버린 용산에다 보내는 슬픈 희망의 노래인 것이다. 하루아침에 가장과 남편과 아빠를 잃어버린 두 가족이 느낀 절망과 두려움 또한 쉬이 상상하기 어렵다. 서로가 서로를 너무나도 필요로 하고 사랑하는 김재호씨와 두 가족은 그림 편지를 통해 대화하고 사랑을 나눈다. 또한 이전에는 미처 알지 못하고 있던 소중하고 아름다운 가치들을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며 나누게 된다.

 




혹시 오해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아빠가 딸아이에게 그림편지를 보내는 낭만적이고 아름다운 스토리라고. 절대로 그렇지 않다. 서로가 서로를 필사적으로 부둥켜안고 조금이라도 그들을 서로 잇고 있는 관계의 끈이 헐거워질까 봐 몸부림치는 것이다. 결코 낭만적이거나 아름답게 읽히지 않는다.

아이가 크는 것을 곁에서 지켜보지 못하는 아빠의 심정이 절절하게 녹아 있다. 완전하게 모든 것을 의지하고 자신만을 지지하고 응원해주던 세상의 단 하나뿐인 남편이 없는 아내의 심정이 절절하게 녹아 있다. 자신과 너무 똑같아서 너무 좋은 아빠를 잃은 아이의 심정이 절절하게 녹아 있다.

특히 김재호씨가 딸 아이 혜연이에 대한 복잡한 심정이 담긴 편지는 읽기조차 어려웠다. 징역 4년형을 받았지만 ‘혹시나 재판이 잘 되면 빨리 나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라는 가족의 희망이 차례로 꺾이고 힘들어하는 아내와 딸아이를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는 남편이자 아빠에게 엄습했을 절망과 아픔과 좌절의 깊이는 가늠할 수 없다. 짧은 편지글이지만 딸아이를 향한 지치지 않고 무한한 사랑을 가득 느낄 수 있다. 함께 했던 추억, 지나간 이야기들, 소소한 일상들조차 10분이라는 짧은 면회 시간을 통해서만 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그들을 지치게 했을까.

   

그럴 때마다 김재호씨는 만화를 그렸다.

책에 실린 한 커트 한 커트가 결코 쉽게 그려진 그림이거나 쉽게 쓰인 글이 아니기에 더욱 애절하다.



그들을 지켜준 것은 그들 자신이다.

국가도 조직도 단체도 김재호씨 가족을 지켜주지 않았다.

 

“정신과 전문의 선생님의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것만 같았습니다.”

“마음속 큰 충격과 스트레스로 인한 정신적 이상증세입니다. 빨리 치료를 받으셔야 할 것 같습니다.”

“뒤늦게 이 소식을 들은 아빠는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안타까움에 소리 내어 울었습니다.”

“자기야~ 우리 딸 어쩌면 좋으니. 이 못난 아빠 때문에” (p.255)

 

갑작스런 아빠와의 이별로 정신적 외상을 입은 혜연이는 정신과 치료를 받기도 하고 아내 또한 이유 없는 무기력과 우울증을 앓기도 했다. 그렇지만 아무도 엄마와 혜연이를 지켜주지 않았다. 엄마가 혜연이를 지켜주고 혜연이가 엄마를 지켜줬다. 그것으로 버틴 것이다. 남편이 보고 싶고 아빠가 보고 싶고 절실하게 필요했지만 엄마는 엄마대로 혜연이는 혜연이대로 서로를 보듬고 치유하며 버텨 나갔다.

그것이 언제 끝날지 모를 싸움을 홀로 하고 있는 남편과 아빠를 향한 진정한 응원과 사랑의 마음이었을 것이다.

한 순간에 모든 것을 놓아 버리고 싶은 절망의 끝을 경험하다가도 자신만을 기다리고 있는 아내와 혜연이를 떠올리며 재호씨도 버텼다.

 


 

혜연이는 훌쩍 자라 5학년이 되었고 사춘기에 접어들어 엄마와의 다툼도 늘어났다. 아빠 재호씨의 딸에 대한 그리움이 가장 잘 드러나는 커트다.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나고 3년이 지나 갔다. 몸과 마음이 하루가 다르게 바뀌고 달라지는 딸아이를 혼자 힘으로 양육하는 아내에 대한 미안함과 가까이서 만질 수 없는 딸에 대한 애틋함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키가 얼마나 컸을지, 공부는 잘 하고 있을지, 늦게까지 게임 하느라 학교에 지각은 하지 않는지, 사춘기라고 엄마한테 짜증을 많이 내지는 않는지, 아빠에 대한 그리움이 원망으로 바뀌지는 않았을지…….

 

                                                    (출처 : 문화연대)


김재호씨는 만기 출소 3개월을 앞둔 2012년 10월 26일 공주교도소에서 가석방으로 출소했다. 그토록 보고 싶었던 아내와 딸을 만난 것이다. 이 책에서는 이후의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김재호씨가 옥중에 보낸 편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믿고 싶다. 그들의 다음 이야기는 반드시 해피엔딩이어야 한다고. 제대로 된 진상규명조차 되지 않았고 참사의 피해자는 분명하지만 가해자는 밝혀지지 않은 지금 김재호씨와 아내와 혜연이 세 가족의 이야기가 헤피엔딩의 결말로 향해 가지 않는 다면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는 반드시 잘못된 것이다.새로운 대통령이 취임을 했다. 전 정권에서 제대로 밝히지 못한 용산참사에 대해 어떤 입장을 가지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 공식석상이나 언론을 통해 새 대통령의 말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비록 전 정권에서 일어난 일이지만 반드시 제대로 풀어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나라의 수도에서 일어난 참사다. 6명이라는 국민이 죽었다. 사람들의 기억에서는 점점 잊혀져 간다. 피해를 입은 사람과 가족들은 여전히 고통 받고 있다. 해결되지 않은 문제다. 끝나지 않은 사건이다.김재호씨의 세 가족이 예전처럼 다시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반드시 선행되어야 할 일이다.또한 우리들도 결코 잊지 말아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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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게 세상을 묻다 - 우리 사회 10대 난치병 feeling에서 thinking까지
이승연.김용희 지음 / 에이지21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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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영화를 많이 보는 편은 아니다. 심술이 많은 편인지 흥행이 엄청나게 되는 영화는 일부러 보러 가지 않기도 한다. 그래도 보고 싶은 영화는 꼭 챙겨본다. 10여 년 전 임권택 감독의 [춘향뎐]이 너무 보고 싶었는데 주위에서는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이 없었다. 아침 첫 영화를 보기 위해 극장에 갔는데 그 영화를 보러 온 사람은 나를 포함해 2명이었다. 극장 측에서 적어도 4-5명은 있어야 영사기를 돌릴 수 있다고 해서 늦잠 자고 있던 친구놈 둘을 불러내 감격하며 영화를 본 적도 있다. 책을 읽는 것만큼 영화에 대한 취향도 꽤나 편식이다. 좋아하는 감독의 영화는 주구장창 보지만 관심 없는 감독의 영화는 아무리 흥행을 한다 해도 잘 보지 않는다.

고약한 심술이다.

이런 내 고약한 심술은 결혼을 하고 나서 많이 완화(?)되었다. 혼자였다면 절대로 보지 않았을 로맨틱 코미디나 액션물을 보러 따라다니다 보니 장르에 대한 편식도 어느 정도 개선되었다.

몇 달 전「레 미제라블」을 극장에서 보면서 옆 사람을 방해 할 정도로 눈물을 흘렸던 것으로 미루어 보아 내 이런 영화에 대한 특정한 편식과 고약한 심술은 거의 고쳐진 것 같다.

좋은 영화 한 편 보는 것은 좋은 책 한 권 읽는 것보다 더 좋을 때가 있다. 여운이 오래 간다. 어두운 상영관을 나서면서 마치 주인공과 하나가 된 듯한 착각을 하기도 하고 잠자리에 누워서도 재미있었거나 감동적이었던 영화의 잔상이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영화 속 인물들을 통해 부닥치고 깨지며 고단한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낸 저자들은 ‘재미있는’영화와 ‘재미없는’정치가 마주치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말합니다.” (p.5)

 

이 책 「영화에게 세상을 묻다」의 저자들은 다분히 정치적인 것 같지만 실제로 그렇지 않아 보인다. 책에서 소개된 영화들 중 정치적인 소재가 주제가 되는 것도 있고 첨예한 정치적 쟁점이 되기도 하는 것도 있지만 그렇게 정치적이지 않다. 유독 한국에서는 ‘정치적’이라는 의미가 남용되기도 하고 오용되기도 한다. 개인적으로 나는 정치는 우리의 삶과 가장 가까운 것이라고 생각한다. 정치는 우리가 선출한 대리자들끼리 모여서 하는 것, 우리가 참견하기에는 어려운 것, 우리가 간섭할 수 없는 영역의 것이 결코 아니다. 그렇게 해서는 영원히 정치와 가까워질 수 없다. 바로 나의 일상에 직접적으로 간섭하고 영향을 주는 것이 정치이고 언제든지 뜻하고 의도하는 방향으로 정치를 움직일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지금까지 그래왔든 질질 끌려 다니며 우리가 뽑아 낸 정치인들이 하는 꼴사나운 짓을 4년에서 5년 동안 지켜볼 수밖에 없다.

 

이 책의 저자들도 어렵게 정치적인 이야기를 풀어나가지 않는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일어날 수 있는 일들, 많이 들어왔던 이야기들을 재미있는 영화와 함께 풀어낸다.

 

 

“영화 초반에 버드가 자조적인 투로 이런 말을 던집니다. ‘투표로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어. 마치 네 뜻대로 될 것 같다는 기분만 들게 할 뿐이지.’” (p.20)

 

케빈 코스트너가 주인공으로 연기한 [스윙보트]라는 영화는 예전에 읽었던 책에서 소개된 적이 있어 꼭 보고 싶은 영화였다.

선거 시즌에 되면 너도나도 쓰는 정치적 용어가 된 ‘스윙보트’ 내가 가진 한 표에 대한 가치를 직시하게 해주는 영화인 것 같다. 우리와는 선거제도가 달라 직접 비교하기는 어렵지만 작년 총선에서도 불과 수백표 차이로 당락이 결정되기도 했었다. 내가 행사하는 한 표가 당락의 여부를 넘어서 정치적 지형을 흔들 수 있다.

포털에서는 이 영화의 장르가 코미디로 되어 있다. 하루아침에 백수건달에서 전미 최고의 영향력을 가진 유권자로 신세가 바뀐 주인공의 삶과 정치인들이 보이는 이중적인 행태, 딸과의 잊었던 진정한 사랑을 찾아가는 과정이 코믹하지만 따뜻하게 그려진 영화라고 한다.

결국 ‘가족의 사랑이 가장 중요하고 필요하다.’라는 아주 피상적이고 당연한 결말의 영화지만 당연하다고 해서 모두가 그렇게 살고 있는 것은 아니다. 부모님을 모시고 보거나 아이와 함께 보기에 좋은 영화인 것 같다.

좀 다른 얘기지만 지난 대선에서 50대 이상의 투표가 ‘스윙보트’가 되었는데 앞으로 당분간은 이러한 정치적 지형이 더 심화되고 견고해 질 것이라 하니 정치하는 분들 머리가 아플 것 같다.

 

 

“청소년은 어쩜 이렇게 바스라지기 쉬운 존재들일까요? 어쩜 이렇게 예민하고 광적인 흥분에 휩싸일 수 있을까요?” (p.95)

 

[건축학개론]으로 엄청난 팬층이 생긴 배우 이제훈씨가 주인공으로 연기한 영화다. 얼마 전 TV에서 다룬 학교폭력과 왕따 관련 내용과 비슷한 면이 많은 영화였다. 세 명의 친구는 늘 함께 다니는 말 그대로 절친이다. 사소한 다툼과 갈등 따위는 헤드락 한방으로 해결되는 머슴애들이다. 그런데 이들 사이에 조금씩 골이 깊어진다. 작은 오해가 큰 싸움으로 번지고 이들의 우정은 폭력으로 바뀐다. 어제까지 친하게 지내던 친구가 갑자기 나를 왕따 시킨다. 셋 중에서도 힘의 우열을 가진 아이가 드러나고 중립적인 입장이던 나머지 한 아이는 힘을 가진 아이의 편에서 어제까지 친구였던 힘없는 아이를 왕따 시키는 데 동참한다. 결국 이 아이 마저도 힘을 가진 아이를 떠나게 되고 힘을 가진 아이는 모든 걸 잃게 된다는 내용이다. 앞서 언급한 TV프로그램도 비슷한 내용이었다. 여자 중학교 1학년 한 반에 10명 정도의 아이들이 모여 그룹을 형성한 친구들이 있는데 그 아이들은 초등학교 때부터 친구들이다. 그런데 한 명도 예외 없이 10명의 아이들 모두 초등학교 때 왕따를 경험했다는 것이다. 다름 아닌 자신들 10명의 친구들 사이에서 말이다. 말 그대로 돌아가면서 왕따를 시키고 왕따를 당하는 당했다. 어제까지 수다 떨고 카톡하고 그것도 모자라 집에 가서 몇 시간씩 통화 하던 친구가 다음 날 아침 나를 왕따 시키는 경험을 모두가 공유하고 있는 친구들. 이것이 정상적이지 않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또래 집단들에서는 거의가 자신들 같다고 한다는 사실이 더욱 놀라웠다. 그런 친구들 사이에서 진정한 신뢰와 사랑의 관계가 생길 수 있을까 싶었다. 그런데 뾰족한 해결 방법이 없었다. 인위적으로 제한하고 통제할 수 없는 문제이고 이제는 일반화된 현상이기 때문인 듯 했다.

 

‘너희는 도대체 왜 그러니?’

한숨짓는 것보다 아이들이 정말 우리 때와는 너무나 다르고 고통과 아픔을 견뎌내는 역치값이 예전의 아이들보다는 현격하게 낮다는 것을 직시하고 어떻든지 아이들을 안아주는 배려와 진심이 필요하다.

[파수꾼들]이라는 영화에서처럼 어린 시절 바스러진 관계를 경험한 아이들은 몸은 비록 성장할 지라도 여전히 ‘어른아이’로 남아있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인도에는 힌두어 외에도 상용어만 14개가 있다네요. 한 언어로 영화를 찍는다고 해도 그걸 알아듣는 인도 사람이 100퍼센트라고 장담할 수 없으니 중간 중간에 춤과 노래로 ‘눈치껏’ 내용을 따라갈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p.99)

 

한 아이가 나를 보고 영화 [세 얼간이]에 나온 주인공 중 한명을 닮았다는 얘기를 한 적이 있다. 나중에 영화를 보면서 나는 도무지 찾아낼 수 없었다. 주인공 셋 중 나와 닮은 사람은 없었다. 영화에서 란초역을 연기한 배우와 닮았다고 했던 것 같은데 나는 잘 모르겠다. 눈이 크고 쌍꺼풀이 진하고 피부색이 좀 어두운 것 빼고는 하나도 닮지 않았다. 키도 란초보다는 훨씬 크다.^^;;

대학 때 친구가 인도 영화를 국내에 수입하는 일을 하고 있어 영화에 큰 관심이 없는 내가 인도영화를 좀 많이 보게 되었다. 발리우드 영화는 뮤지컬 형식을 취하고 있는 경우가 대다수다. 영화의 흐름이나 전개에 상관없이 뜬금없이 단체로 춤을 추거나 노래를 부르기도 한다. 친구에게 물어봤지만 인도 영화를 직접 수입하는 일을 하고 있는데도 정확한 이유를 말하지 못했는데 이 책을 보며 알게 되었다. 중국 다음으로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인도이기에 가능한 일인 것 같았다. 이유를 알고 나서 다시 본 영화 [세 얼간이]에서 이전과는 다른 감동과 재미를 느낄 수 있었다.

영화를 보기 전 영화의 배경이 되는 상황을 미리 알아본다면 영화를 더욱 깊고 재미있게 볼 수 있다.

 

영화에 대해서 깊은 관심이 있거나 전문적인 평론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이 책은 다소 싱거울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나와 같이 영화에 대해 잘 모르지만 좋아하기도 하고 영화에 대한 좀 더 다른 면을 알아보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재미있고 유익할 것 같다.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고 우리의 일상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정치’의 문제를 쉽고 살에 와 닿게 영화와 함께 소개받을 수 있어 부담이 되지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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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세요? 북극곰 꿈나무 그림책 6
엠마누엘레 베르토시 글.그림, 이순영 옮김 / 북극곰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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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참 많이도 뛰어 다녔었다. 지금은 대단지 아파트가 들어선 곳이 어린 우리들에게는 요새였다. 야트막한 야산을 한 달음에 오르락내리락했다. 주변에 흩어진 나뭇가지와 나무판자들을 주워 모아 기지를 만들어 전쟁놀이를 하기도 하고 당시 유행하던 수많은 놀이를 하기도 했다.




 

하교해 책가방만 집에 던져 놓고 바로 뛰어 올라가 해질녘까지 한참을 놀았다. 그때는 참 가지고 놀 수 있는 장난감이나 게임기도 없었고 비싸기도 했다. 그저 친구들과 동네 형, 동생들과 몸으로 부대끼며 뛰어 놀고 뒹구는 것이 좋았다. 휴일에도 방학에도 무거운 가방을 둘러메고 학원으로, 학교로, 과외로 끌려 다니는 요즘 아이들을 보면 불쌍하고 안쓰럽다. 언젠가 MBC 무한도전에서 [명수는 12살]이라는 에피소드를 방송했었다. 연기자들의 어린 시절로 돌아가 그 시절 친구들과 하는 놀이를 재현하고 함께 즐기는 내용이었다. 무한도전 연기자들 대부분이 나보다 형들이지만 그들이 하는 놀이 대부분은 내가 어린 시절 동네 형들, 친구들, 동생들과 하던 놀이였다. 그 방송을 보고 아이들에게 그 얘기를 하며 아는 놀이가 있는지 물어봤는데 하나도 없었다. 얼굴이 벌개져서 신나게 떠드는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는 아이들에게는 전혀 자신들과 상관없는 얘기였을 것이다. 학원 숙제, 학교 숙제, 과외 숙제하기에도 하루가 다 모자란 자신들인데 얼마나 한심스러웠을까.

 

“우리 모두는 한때 어린이였습니다. 세상 모든 어린이들이 그 사실을 잊지 않고 자라기를 바랍니다.”

 

요즘 아이들에게는 훨씬 인체공학적이고 인체에 무해하며 안전한 장난감이 많다. 여러 전문가들이 개발하고 고안한 집중력 향상 프로그램도 즐비하고 심리 검사도 흔하다. 게임 세상은 완전히 별천지다. 아버지 주머니에서 천원을 몰래 훔쳐 한판에 50원 하던 동네 오락실에서 해가 질 때까지 오락을 하던 때는 지금 아이들에게는 조선시대 얘기와 다름없을 것이다. 비싸기는 하지만 좋은 장난감도 많다. 나와 같은 어른들은 ‘우리 때는 참 재미있게 실컷 놀았는데 요즘 애들은 참 불쌍해’라고 생각하거나 말할 때가 많다. 상황은 많이 달라지고 할 수 있는 것도 많이 달라졌지만 어린이는 어린이다. 아이는 아이다. 어른들도 누구나 자신의 아이였던 시절을 추억하며 그리워한다.

친구들과 만나 어린 시절 경험을 나눌 때마다 그 어떤 주제보다 더 재미있고 신나게 대화를 하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친구들도 자신만의 어린 시절, 아이였던 시절, 어린이였던 시절을 좋아하는 것 같다. 절대로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불변의 진리가 그것을 더욱 아련하게 만드는 것 같다.

 



 

“우리는 한때, 삽이었고 펜치였고 톱이었고 망치였고 못이었고 나사였고 그물이었고 흙받기였고 자물쇠였고 양동이 손잡이였고 파이프였고 손톱깎이였고 모자였고 돌이었단다.”

 

요즘 아이들은 장래희망에 연예인을 가장 많이 적는다고 한다는 것을 본 적이 있다. 내가 아이였을 때에는 지금보다 오히려 직종이 다양했던 것 같다. 그때보다 지금이 직종의 수가 훨씬 많을 텐데 지금 아이들의 눈에는 연예인이 가장 멋있고 예쁘게 보이는 것 같다. 아직 나는 아이가 없지만 이런 것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고 답답하다. 예전 이야기를 자꾸만 하게 되지만 그때는 학교 등하교시 거의 걸어 다녔다. 물론 부모님 세대 때 ‘십리길, 이십 리길을 걸어 학교에 다녔다.’에 비하면 새 발의 피, 열새 발의 피지만 걸어 다녔다. 걸어 다니며 들풀도 보고 꽃도 보고 산에 흐드러진 아카시 냄새도 맡고 길가에 떨어진 나무며 철근이며 보이는 대로 주워 다가 산에 있는 ‘우리 기지’에 쟁여 놓고는 했다. 그런데 요즘 아이들은 어떤가. 초등학교 하교 시간이 되면 학교 주변에 온갖 학원차로 가득 차 있다. 태권도 학원, 미술학원, 영어학원, 수학학원, 음악학원. 직접 아이들을 모시러 온 학부모 차량도 가득하다.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흉악 범죄가 많이 일어난 탓도 있겠지만 어쨌든 아이들은 걷거나 뭘 만지거나 줍거나 할 시간이 없다. 그럴 상황이 애초에 차단되는 것이다. 아이들을 위해서 인조잔디를 깔고 우레탄을 깐 최신식 운동장이 많다. 요즘 아이들은 언제 흙을 만져보나 싶다.

뛰고 뒹굴며 착한편이 되어 보기도 하고 나쁜편이 되어 보기도 하며 나무로 만든 총과 칼로 전쟁놀이도 하고 옷이 찢어지고 상처가 날 정도로 뒹굴어 보기도 하는 것은 생각 없는 나 같은 아직 아이 없는 어른의 현실감 없는 배부른 소리일까?

하긴 요즘은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이 워낙 잘 되어 있어서 밭에서 농작물을 길러 보기도 하고 유치원 내에 최신식 놀이터와 수영장이 갖춰진 곳도 많고 외국인 선생님들이 직접 영어를 가르쳐주기도 하며 놀이와 체육, 레크레이션을 전공한 선생님들이 직접 아이들을 가르치기도 한다니 나의 어린 시절 그때보다 더 유익하고 도움이 되는 교육환경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정말 그게 정답이고 정말 아이들을 위한 것일까 싶다.

 



 

“내가 누구냐고? 나는 한때 돌이었고 자물쇠였고 망치였고 양동이 손잡이였단다.”

 

좋은 책, 좋은 TV프로그램이 너무나 많지만 아빠, 엄마가 아이를 앉혀 놓고 자신들의 어린 시절을 얘기하고 아빠가 돌이었고 자물쇠였던 기억, 엄마가 망치였고 인형이 있고 들풀이었으며 놀이터였던 기억을 얘기해 주는 것이 아이에게는 그 어떤 최신식 놀이와 책과 교육보다 좋은 것이 아닌가 싶다.

어린 아이에게는 부모가 절대적인 영향을 준다고 했던 대학 때의 발달심리학 수업이 떠오른다. 그런데 그것도 요즘은 부모를 대신한 것들이 많아 적용되지 못하는 것 같다. 아빠와 엄마의 달래는 말보다 스마트폰과 뽀로로나 타요를 보여주면 더 좋아하니 말이다.

 



 

“나는 왜 이 책을 만들었을까? 스스로 질문을 해 보았어요. 그리고 답을 찾았어요. 어린이들에게 즐거움을 주고 싶었던 거예요. 환상 속에 빠져보는 즐거움. 조각품들이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 관찰하는 즐거움. 그리고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보는 즐거움을 주고 싶었어요.”

 

아이들에게 자신들의 이야기를 만들어 갈 수 있는 힘을 전해주는 것. 나를 포함한 어른들이 해야 할, 반드시 해야 할 숙제다. 우리 부모님들이 우리에게 그렇게 해주었던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아이들에게 해야 한다. 늑대와 맞선 양을 어떻게 구할 것인지 단박에 얘기해 주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자신들의 말로 이야기를 만들어 나갈 수 있도록 할 것인가. 이것은 분명한 숙제다. 어렵지만 기다리고 또 기다려야 한다.

아이들에게 즐거움을 주고자 하는 어른들의 마음을 이 책을 통해 찾아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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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 프레임 - 마녀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이택광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3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중세는 암흑의 세기라고 알려져 있다. 이제껏 봐온 책에서도 그랬고 TV에서도 그랬다. 중세를 암흑의 세기라고 지칭하는 이유가 많겠지만 이 책 「마녀 프레임」에서는 중세에 자행되었던 마녀사냥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

‘마녀사냥’ 워낙 많이 들었던 단어라 익숙해 졌지만 사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굉장히 무서운 말이다. 양 사냥, 곰 사냥도 아니고 ‘마녀사냥’이라니. 또 그 마녀가 어제까지 동네에서 함께 지내던 그 여자였다. 한 순간에 동네 이웃에서 ‘마녀’로 둔갑되어 동네 사람 모두가 보는 앞에서 공개적으로 처형을 당했다. 중세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에서 종종 등장하는 장면만 생각해 봐도 그 끔찍함과 광기를 짐작해 볼 수 있다.

 

 

“근대의 출현은 마녀를 다른 방식으로 규정했을 뿐이다. 마녀는 언제든 공동체가 위기에 처하면 호출될 수 있다는 의미이다. 누구라도 공동체가 필요로 할 때 마녀가 될 수 조건이야말로 근대 사회가 갖는 특징일지도 모른다.” (p.160)

 

저자는 ‘마녀사냥’이라는 현상을 거시적으로 접근한다. 지엽적인 차원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말세적 과도기에 인간의 본성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사건이었다는 것이다.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개인과 공동체 간의 유기적 관계가 끈끈하고 단단하던 중세 시절에는 공동체의 안락이 곧 개인의 안락이었고 공동체의 위기가 곧 개인의 위기였다. 전근대에 태동한 전체주의, 나치즘이 아니더라도 오랜 기간을 이어 온 중세적 질서가 무너지는 것을 목도하는 것은 집단의 이성보다 집단의 감성을 더욱 자극했을 것이다. 아주 작은 금 하나로 거대한 댐이 무너지는 것을 그대로 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던 것일 수도 있겠다. 흔들리기는 했지만 계급질서가 명확하고 공고했던 중세의 기득권에게는 분명한 위기였을 것이다. 그들이 가진 힘과 위세를 가지고 구조를 개선하고 발전시켜 나가는 방향으로 말세적 공동체의 위기를 극복했어야 했다. 하지만 그것은 악랄하고 염세적이며 폭력적인 ‘마녀사냥’의 형태로 표출되었다.

 

 

“마녀사냥이 얼마나 끔찍했는지는 희생자 수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데 대체로 20만 명에서 50만 명 정도가 처형되었다고 역사가들은 파악한다.” (p.40)

“중세 유토피아가 몰락한 곳에서 마녀사냥은 공동체에 닥친 위기를 해결하기 위한 방책으로 제시되었다. 마녀들을 제거하면 공동체는 다시 과거처럼 평온을 되찾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p.53)

 

역사가들이 파악한 ‘마녀사냥’의 희생자 수가 20만에서 50만에 이른다고 한다. 놀라운 숫자다. 중세를 뒤덮은 전염병에 버금간다. 눈에도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가 온 유럽을 휩쓸었던 것처럼 지상 낙원이라 여겼던 중세가 몰락의 기미를 보이자 공동체에는 죽음의 바이러스가 퍼져나갔던 것이다. 함께 힘을 모아 공동체를 더욱 굳건히 하고 개인 간 발전과 안녕을 도모하지 못하고 ‘내’가 아니라 ‘너의 잘못’이라는 쉽고 편한 논리 같지 않은 논리로 암울한 공동체의 감성을 동원했다. 책에서도 여러 번 저자가 지적한바 ‘마녀사냥’을 하고 난 다음 공동체의 위기가 바로 해결되지 않았다. 그러면 또 다른 논리가 등장 한다. ‘마녀가 더 있다. 찾아내 처형해야 한다.’ 이런 논리라면 끝이 없다. 처형을 한 다음 마녀로 몰았던 여자가 마녀라 아니었다 하더라도 크게 문제되지 않았다.

모두가 함께 죽음의 바이러스에 감염된 것이다.

저자는 이런 중세를 뒤덮은 ‘마녀사냥’이 한국의 정치 상황에 대입한다. 책의 제목이기도 한 ‘프레임’이라는 단어는 지난 해 대선을 앞둔 정국에서 수도 없이 쓰인 단어다. 사전적 의미만으로 단면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개념이다. 책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한번 만들어진 프레임은 반복적으로 활용되면서 인식 체계를 구성한다.” (p.8)

“한국 우파에게는 북한이 이런 마녀 같은 존재다.” (p.106)

 

나는 ‘프레임’을 됫박으로 이해한다. 예전 정미소나 지금 방앗간에서 쓰이는 됫박은 곡식 낱알들을 담는 도구다. 한 되를 담기 위해서 미리 만들어진 한 되짜리 됫박에 곡식 낱알을 담은 후 둥그렇게 쌓인 됫박 위 곡식을 손바닥으로 평평하게 쓸어내리면 한 되가 된다. 됫박 안에 쌀이 담겼든지, 조가 담겼든지, 깨가 담겼든지 손바닥으로 쓱 쓸어내리면 뭐든지 한 되다.

‘프레임’도 동일하다. 무시로 일어나는 각종 사회 현상들을 이해하는 됫박이다. 하나의 ‘프레임’만 짜 놓으면 어떤 종류의 현상이라도 한 되로 담아낼 수 있다.

책에서 저자가 예를 든 것처럼 ‘빨갱이 프레임’은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프레임’이기도 하고 가장 잘 먹히는 ‘프레임’이기도 하다. 큰 선거 직전 꼭 ‘북풍 프레임’이 짜이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학교 전교조도 ‘빨갱이 프레임’, 노동자들의 시위도 ‘빨갱이 프레임’, 학생들의 반값 등록금 요구도 ‘빨갱이 프레임’, 미국 소고기 수입 반대 시위에 참석한 유모차 부대도 ‘빨갱이 프레임’에 걸면 그만이다. 됫박 안에 넣어 “한 되!!”라고 재단해 버리면 그만이다.

수십 년 전부터 써오던 이 ‘프레임’이 여전히 유효한 한국 사회다.

 

 

책에서 소개된 중세 말기에도 ‘마녀사냥’이라는 ‘프레임’이 사람들에게 주효했다.

 

“마녀는 실제로 존재했다. 또한 존재해야 했다. 그렇게 존재하지 않는 마녀를 존재하게 한 것은 마녀 프레임이었다.” (p.112)

“마녀는 ‘판별’하는 것이지 증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유형에 맞으면 마녀였다. 지금까지 없던 낯선 질병이 창궐하면 어딘가에 마녀가 있다는 이야기다.” (p.105)

 

앞서도 말했던바 중세 말기를 온통 뒤덮고 있던 희망의 부재는 사람들로 하여금 염세주의를 불러 일으켰다. 당시로서는 첨단 기술이던 인쇄술의 발명으로 사람들은 마녀 ‘프레임’에 완전히 예속됐다. 과학의 발전과 이성의 찬미로 흔들리던 중세 교회는 희망의 부재로 신음하던 사람들에게 위안을 주고 안식을 설파하는 것이 아니라 이 마녀 ‘프레임’에 함몰되어 ‘마녀사냥’에 앞장섰다. 무너져 가는 교회의 권위를 다른 곳에 투사해 치사하게 자리를 보전했다. 저저도 말하는 것처럼 애초에 마녀로 점찍은 후 판별하는 것으로 충분했다. 마녀를 마녀라고 증명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이성에 근거한 논리가 아니라 감성에 근거한 억지였기에 가능한 일이다.

농협 전산망이 해킹을 당하고, 천안함이 두 동강 나고, 국민들이 말을 안 듣기 때문에 어딘가에 분명 ‘빨갱이’가 난무하는 것이다. ‘빨갱이’ 됫박만 들이밀면 된다. 장악된 언론은 앞을 다투어 이 프레임을 퍼뜨린다. 순식간에 ‘빨갱이’가 된다.

 

[빨갱이는 실제로 존재했다. 또한 존재해야 했다. 그렇게 존재하지 않는 빨갱이를 존재하게 한 것은 분명 빨갱이 프레임이었다.]

 

 

“법을 행하기 위한 절차적 합리성이 마녀사냥을 점점 더 힘들게 만들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p.158)

 

난무하던 ‘마녀사냥’은 중세의 종언과 함께 서서히 사라졌다. 더 이상 마녀를 증명하지 못하고 단지 일방적으로 ‘판별’하는 것으로는 ‘마녀 프레임’을 들이댈 수 없었다.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 서는 과도기적 상황을 낳은 동력이 되었다고 생각하면 희생된 수십만의 억울한 여인들에게 너무나 송구스럽다. 아직도 일부 대륙과 부족에서 중세와는 다른 형태지만 ‘마녀사냥’이 행해지고 있다. 부족의 명예라는 이유로, 종교의 규율이라는 이유로 억압받고 처형당한다. 뉴스위크에 실린 코가 잘린 아프간 소녀의 사진이 그것이다.

 

 

“이 희생양은 과거에 여성이었고 유태인이었고 ‘빨갱이’였지만, 오늘날도 여전히 무슬림이고 동성애자고 이주 노동자의 모습으로 현신하고 있는 것이다.” (p.142)

 

한국 사회에서도 여전히 이 ‘프레임’은 유효하고 주효하다. 특히 ‘빨갱이 프레임’은 영원히 없어지지 않을 됫박으로 보인다. 저자의 지적대로 과거에는 여성과 유태인에게만 국한되었던 ‘마녀사냥’이 이제는 다른 형태로 자행되고 있다. 우리 사회에는 ‘왕따 문제’와 잠재적 위험으로 생각되는 ‘이주 노동자·다 문화 가정 문제’가 프레임에 노출될 가장 큰 문제라고 생각한다.

공동체적 위기와 국가적 어려움을 두고 사회 전체적인 공감대가 형성 되어 개별 주체가 힘을 모아 이겨내는 것이 아니라 어느 한 곳으로 됫박을 들고 몰려가는 것은 굉장히 위험하다. 학교에서 일어나는 왕따가 특정한 아이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당장 내일부터 내가 왕따가 될 수 있는 구조인 것처럼 지금보다 더 큰 어려움과 위기에 닥쳤을 때 여전히 유효한 마녀사냥의 ‘프레임’이 어떠한 형태로 현현될지 알 수 없다.

‘그래도 성숙한 사회인데 그럴 리 있겠어?’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지난 대선에서도 목도했던바 대중은 결코 이성에 현혹되지 않는다. 한 순간의 거대한 감성에 휩쓸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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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올빼미 농장 작가정신 소설향 19
백민석 지음 / 작가정신 / 2003년 9월
평점 :
절판


친형제와 다름없는 민데형은 몽골 사람이다. 언젠가 민데형이 내게 물었다.

“아파트에서 살면 답답하지 않아?”

어린 시절 끝이 보이지 않는 초원에서 말을 타고 양을 몰던 민데형에게 분명 한국의 아파트는 이상하게 보였을 것이다. 형의 눈에는 네모난 상자에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몰려 들어가는 것이 낯설기도 했을 것이다. 답답하지 않냐는 형의 물음에 정확하게 내가 뭐라 대답했는지 기억나지 않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크게 의미를 두지 않았던 것 같다.

나는 초등학교 5학년 말부터 아파트에 살았다. 5층짜리 아파트의 1층에 살았는데 그전까지 살았던 주택보다 훨씬 좋았던 것 같다. 이후로 지금까지 계속 아파트에 살고 있다. 결혼 전 3년 정도 직장 때문에 원룸에서 혼자 살았던 기간을 제외하면 계속이다.

처음 살게 된 아파트가 온전한 의미의 ‘우리 집’이었던 것 같다. 15평에 불과했지만 어린 나와 동생에게는 큰 집이었고 무엇보다 부모님이 ‘우리 집’이라는 말을 무척이나 많이 하시며 좋아하시던 얼굴이 지금도 생생하다. 첫 아파트에 대한 경험이 그렇게 좋아서인지 나는 아파트에 사는 것이 좋았다. 편하고 전망 좋고(첫 아파트 이후에는 모두 고층이었다) 사람도 많고. 결혼 전 잠시 원룸에 살 때는 너무 불편했다. 주차문제, 주인집 영감님의 잔소리, 쓰레기 처리 문제 등 너무 싫었다. 결혼 전 신혼집을 구하러 다니면서도 빌라나 투룸 뭐 이런 것은 아예 쳐다보지도 않았다.

나는 아파트가 좋다.

 

이 책 「죽은 올빼미 농장」은 제목만큼이나 우울한 내용이다. 작품해설을 굳이 읽어보지 않더라도 작가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감을 잡을 수 있다. 한국의 건축, 건물 문화를 대표하는 아파트는 가장 많은 사람이 살고 있는 주거지다. 많은 건설 회사들이 아파트를 짓고 많은 돈을 벌었고 그 아파트가 들어서는 땅을 가진 주인들도 많은 돈을 벌었다. ‘내 집 마련’이라는 한국인의 가장 큰 꿈을 이뤄준 것도 아파트다. 어느 도시를 가나 아파트가 있다. 아파트가 많이 생기는 곳에는 상권도 생기고 학교도 생긴다. 신도시가 만들어지기도 한다. 다닥다닥 붙어 있는 아파트로 인해 한국 사람들은 전 세계에서 가장 빠른 인터넷을 사용하고 있다.

 

 

“분명한 건 우리가 뭔가 찾아냈다는 거야.”

“그래, 멍청아.” (p.33)

 

똑똑한 사람들이 너무 많다. 한국의 독특한 주거문화이자 건축물인 아파트에 대해서도 누구나 한마디씩은 할 수 있는 말이 있다. 사회·문화적, 정치·경제적, 역사·지형적 등 성게가 뻗을 수 있는 모든 방향으로 가시를 뻗쳐내는 것처럼 누구나 손을 뻗쳐 분석하고 해석할 수 있다.

작년에 유독 청소년의 투신자살이 많았다. 아이들이 아파트에서 뛰어 내린 것이다. 대구의 교육감이라는 자는 최소한 학교에서는 아이들이 뛰어내리지 못하도록 학교의 창문을 몇cm이상은 열지 말라는 공문을 내리는 미친 짓을 하기도 했다. 아이들이 아파트에서 뛰어 내린 것을 가지고도 성게 가시처럼 많은 입이 삐쳐 나와 제각각 할 말을 쏟아냈었다.

 

뭘 자꾸 찾아내고 분석해 내야 하는 것인지 사실 나는 잘 모르겠다.

내가 아파트에 대해서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은 어린 시절의 경험과 결혼 전 몇 년간 살았던 원룸에서의 좋지 않았던 경험 때문이다. 아이들이 아파트에서 뛰어 내린 건 단지 아파트가 그때, 거기에 있었기 때문이다. 푯대를 완전히 상실한 채 표류하던 아이들에게 굳이 뛰어내린 장소가 아파트였다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

백민석 작가가 이 작품에서 만들어 낸 주인공을 통해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가 전형적인 이 시대를 사는 현대인의 모호한 정체성과 파편화된 관계의 문제라면 적어도 내게는 별 설득력이 없다.

프리랜서 작사가인 주인공도, 미국인 남자친구의 아이를 가지고 싶어 하는 동성애자 손자도, 믿을 수 없을 만큼 형편없는 가창력으로 데뷔를 꿈꾸는 당돌한 여고생 해아리도, 애인도 아니고 친구도 아니면서 섹스를 나누는 상대인 민도 아파트로 상징되는 자신만의 네모난 공간에서 살아간다. 시대를 사는 대다수가 그렇다. 반복되는 일상을 벗어날 길 없는 사람들이다. 나갔다 들어오고, 다시 나갔다 들어오는 것을 되풀이한다. 되돌아갈 곳이 없다. 고향이라는 개념이 부모 세대와는 완전히 다른 자식 세대에게는 출발점이 모호하다. 출발점이 모호하니까 도착점도 멀기만 하다.

일탈과 탈출을 꿈꾸는 주인공은 농장에서 온 미상의 편지에 그대로 빠진다. 매료된다. 언젠가는 나를 구원해 줄지도 모를 메시아를 아직도 기다리는 유대인들처럼 기다리던 미지의 세계에 완전히 빠진 것이다. 강원도에서도 맨 위에 있는 고성으로 한달음에 도착한다. 수소문해 편지의 발신지를 찾았지만 찾을 수 없었다. 애초에 정확한 발신지를 찾아 편지를 돌려주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을 것이다. 지난한 삶에서 어떻게 해서든지 도망가고자 하는 욕망이었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아파트 같은 모텔에서 잠을 청한다. 벗어날 수 없다. 결코 일상에서 도망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그가 살고 있던 아파트에서도 그랬던 것처럼 욕조에 뜨거운 물을 가득 받아 그 안에서 잠이 든다. 그리고 아파트로 상징되는 현실의 구렁텅이는 무소부재하다. 손자의 집에서도, 민의 집에서도, 해아리의 스튜디오에서도 주인공의 아파트는 재창조된다.

그렇지만 잘 모르겠다.

현대인이 겪는 모호한 정체성의 이유가 단지 출발점을 잃은 아파트먼트 키즈의 숙명만이라고 볼 수 없다고 생각한다. 작품에서 그려진 주인공이 얼마나 탈출과 구원을 욕망했는지 알 수 없지만 여전히 또 다른 현실의 구렁텅이로 그렇게 쉽게 빠져 들어가는 것도 잘 이해되지 않았다.

 

 

“인형은 베란다에 나가 있었다. 손님이 오면 늘 그랬다. 아니면 작은방에 틀어박혀 있던가. 손자가 왔다 갔어. 나는 인형을 들어 무릎에 앉히며 말했다. 일이 그렇게 힘들대? 힘은 안 들어.” (p.49)

“인형은 며칠 더 그랬다. 베란다에 나가 앉아 넋을 놓고 온종일 바깥을 바라봤다.” (p.63)

“인형은 끊임없이 불평을 늘어놓았다. 인형은 손자가 불의의 침입자라면 단단히 앙심을 품고 있었다. 인형은 지난 며칠 새 히스테리가 머리 꼭대기까지 치밀어 조만간 돌아버릴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p.165)

 

현실에서 탈출 할 수 없는 주인공은 또 다른 ‘나’인 ‘인형’에게 집착한다. ‘나’의 입장에서는 늘 ‘인형’이 내게 히스테리를 일으키고 불평과 불만을 가득 쏟아 내며 변덕이 죽 끓듯 하는 것으로 묘사되지만 결국 ‘인형’은 ‘나’다. 파편화된 관계의 문제를 ‘인형’을 통해 묘사한 작가의 의도도 사실 별로 설득이 되지 않았다. 

애초에 현대인이 가진 여러 가지 사회병리현상에 대한 전제 자체가 작가와는 많이 다르기 때문인 것 같다.

책을 읽으면서 ‘왜 굳이 인형이 등장해야 할까?’를 생각할 정도였다.

 

 

“내가 만약 너를 죽일 수 없다면 말야···· 하고 나는 농장 빈 땅으로 발을 들여놓으며 중얼거렸다. 또 다른 누군가가 죽겠지. 손자 같은 애가 말이야. 최악엔 나일 수도 있어. 그렇지? 아니라고 어떻게 장담하겠니? 벌써 내게 싫증이 난 기색이 역력하던데 말야.” (p.178)

“나는 가능한 한 팔을 길게 뻗어 잘 조준한 다음 흙탕물의 정중앙을 향해 인형을 던졌다.” (p.183)

 

결국 주인공이 그토록 찾으려 했던 죽은 올빼미 농장을 찾지 못하고 또 다른 ‘나’인 인형과도 돌이킬 수 없는 갈등의 골이 깊어졌다. 이제는 더 이상 나의 또 다른 ‘나’와도 화해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나’를 구렁텅이에 던져 넣어 버린다. 아무런 위안과 해결을 가져다주지 않는 ‘인형’과 계속 이런 관계를 이어간다면 ‘나’도 언젠가는 손자처럼 아파트에서 뛰어 내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친구나 애인이 될 때보다 올가미가 될 때가 더 많았던 ‘인형’을 내팽개치는 것으로부터 진정한 의미의 탈출과 구원은 시작되는 것이다.

 

 

 

“노트북은 종일 켜져 있었고 책상 한켠에는 메모지가 쌓여갔다.” (p.41)

 

나는 차라리 이런 방식이 좋다. 그냥 있는 대로 두는 것이다. 노트북은 종일 켜져 있고 한켠에는 메모지가 쌓여가고, 핸드폰은 여전히 잠들어 있고 한켠에는 생각이 쌓여가고, 무슨 노래인지도 모르는 노래는 머릿속에 맴돌고 현실에 대한 고민은 켜켜이 쌓여가고, 때가 되면 밥을 먹고 잠을 자고 다시 일어나 씻고 밥을 먹고 돈을 벌고, 책을 읽고 줄을 긋고 글을 쓰고 친구를 만나고, 전화를 하고 문자를 보내고 카톡을 하고, TV를 보고 게임을 하고 장난을 치고, 욕을 하고 욕을 얻어먹고 비난을 하고 비난을 받고, 지하주차장을 빙빙 돌아 겨우 빈 한 구석에 차를 집어넣고, 풀리지 않는 문제의 샅바를 쥐어 잡고 또 한 번 씨름하고, 멍 하니 바보가 되기도 하는.

그냥 이대로 살아가는 것이 나는 좋다.

굳이 발신지도 불분명한 편지를 돌려주려「죽은 올빼미 농장」을 찾아다니는 번거로움을 결행하고 싶지 않다. 잘못 왔으려니 우체통에 넣어 버리면 그만이다. 살아있는 농장에도 할 일이 태산인데 「죽은 올빼미 농장」에 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다. 나는 그렇다.

 

 

소설 리뷰 쓰는 것이 내게는 고되다.

이래서 소설은 좋아하는 작가의 책만 읽게 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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