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마녀 프레임 - 마녀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이택광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3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중세는 암흑의 세기라고 알려져 있다. 이제껏 봐온 책에서도 그랬고 TV에서도 그랬다. 중세를 암흑의 세기라고 지칭하는 이유가 많겠지만 이 책 「마녀 프레임」에서는 중세에 자행되었던 마녀사냥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
‘마녀사냥’ 워낙 많이 들었던 단어라 익숙해 졌지만 사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굉장히 무서운 말이다. 양 사냥, 곰 사냥도 아니고 ‘마녀사냥’이라니. 또 그 마녀가 어제까지 동네에서 함께 지내던 그 여자였다. 한 순간에 동네 이웃에서 ‘마녀’로 둔갑되어 동네 사람 모두가 보는 앞에서 공개적으로 처형을 당했다. 중세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에서 종종 등장하는 장면만 생각해 봐도 그 끔찍함과 광기를 짐작해 볼 수 있다.
“근대의 출현은 마녀를 다른 방식으로 규정했을 뿐이다. 마녀는 언제든 공동체가 위기에 처하면 호출될 수 있다는 의미이다. 누구라도 공동체가 필요로 할 때 마녀가 될 수 조건이야말로 근대 사회가 갖는 특징일지도 모른다.” (p.160)
저자는 ‘마녀사냥’이라는 현상을 거시적으로 접근한다. 지엽적인 차원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말세적 과도기에 인간의 본성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사건이었다는 것이다.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개인과 공동체 간의 유기적 관계가 끈끈하고 단단하던 중세 시절에는 공동체의 안락이 곧 개인의 안락이었고 공동체의 위기가 곧 개인의 위기였다. 전근대에 태동한 전체주의, 나치즘이 아니더라도 오랜 기간을 이어 온 중세적 질서가 무너지는 것을 목도하는 것은 집단의 이성보다 집단의 감성을 더욱 자극했을 것이다. 아주 작은 금 하나로 거대한 댐이 무너지는 것을 그대로 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던 것일 수도 있겠다. 흔들리기는 했지만 계급질서가 명확하고 공고했던 중세의 기득권에게는 분명한 위기였을 것이다. 그들이 가진 힘과 위세를 가지고 구조를 개선하고 발전시켜 나가는 방향으로 말세적 공동체의 위기를 극복했어야 했다. 하지만 그것은 악랄하고 염세적이며 폭력적인 ‘마녀사냥’의 형태로 표출되었다.
“마녀사냥이 얼마나 끔찍했는지는 희생자 수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데 대체로 20만 명에서 50만 명 정도가 처형되었다고 역사가들은 파악한다.” (p.40)
“중세 유토피아가 몰락한 곳에서 마녀사냥은 공동체에 닥친 위기를 해결하기 위한 방책으로 제시되었다. 마녀들을 제거하면 공동체는 다시 과거처럼 평온을 되찾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p.53)
역사가들이 파악한 ‘마녀사냥’의 희생자 수가 20만에서 50만에 이른다고 한다. 놀라운 숫자다. 중세를 뒤덮은 전염병에 버금간다. 눈에도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가 온 유럽을 휩쓸었던 것처럼 지상 낙원이라 여겼던 중세가 몰락의 기미를 보이자 공동체에는 죽음의 바이러스가 퍼져나갔던 것이다. 함께 힘을 모아 공동체를 더욱 굳건히 하고 개인 간 발전과 안녕을 도모하지 못하고 ‘내’가 아니라 ‘너의 잘못’이라는 쉽고 편한 논리 같지 않은 논리로 암울한 공동체의 감성을 동원했다. 책에서도 여러 번 저자가 지적한바 ‘마녀사냥’을 하고 난 다음 공동체의 위기가 바로 해결되지 않았다. 그러면 또 다른 논리가 등장 한다. ‘마녀가 더 있다. 찾아내 처형해야 한다.’ 이런 논리라면 끝이 없다. 처형을 한 다음 마녀로 몰았던 여자가 마녀라 아니었다 하더라도 크게 문제되지 않았다.
모두가 함께 죽음의 바이러스에 감염된 것이다.
저자는 이런 중세를 뒤덮은 ‘마녀사냥’이 한국의 정치 상황에 대입한다. 책의 제목이기도 한 ‘프레임’이라는 단어는 지난 해 대선을 앞둔 정국에서 수도 없이 쓰인 단어다. 사전적 의미만으로 단면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개념이다. 책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한번 만들어진 프레임은 반복적으로 활용되면서 인식 체계를 구성한다.” (p.8)
“한국 우파에게는 북한이 이런 마녀 같은 존재다.” (p.106)
나는 ‘프레임’을 됫박으로 이해한다. 예전 정미소나 지금 방앗간에서 쓰이는 됫박은 곡식 낱알들을 담는 도구다. 한 되를 담기 위해서 미리 만들어진 한 되짜리 됫박에 곡식 낱알을 담은 후 둥그렇게 쌓인 됫박 위 곡식을 손바닥으로 평평하게 쓸어내리면 한 되가 된다. 됫박 안에 쌀이 담겼든지, 조가 담겼든지, 깨가 담겼든지 손바닥으로 쓱 쓸어내리면 뭐든지 한 되다.
‘프레임’도 동일하다. 무시로 일어나는 각종 사회 현상들을 이해하는 됫박이다. 하나의 ‘프레임’만 짜 놓으면 어떤 종류의 현상이라도 한 되로 담아낼 수 있다.
책에서 저자가 예를 든 것처럼 ‘빨갱이 프레임’은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프레임’이기도 하고 가장 잘 먹히는 ‘프레임’이기도 하다. 큰 선거 직전 꼭 ‘북풍 프레임’이 짜이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학교 전교조도 ‘빨갱이 프레임’, 노동자들의 시위도 ‘빨갱이 프레임’, 학생들의 반값 등록금 요구도 ‘빨갱이 프레임’, 미국 소고기 수입 반대 시위에 참석한 유모차 부대도 ‘빨갱이 프레임’에 걸면 그만이다. 됫박 안에 넣어 “한 되!!”라고 재단해 버리면 그만이다.
수십 년 전부터 써오던 이 ‘프레임’이 여전히 유효한 한국 사회다.
책에서 소개된 중세 말기에도 ‘마녀사냥’이라는 ‘프레임’이 사람들에게 주효했다.
“마녀는 실제로 존재했다. 또한 존재해야 했다. 그렇게 존재하지 않는 마녀를 존재하게 한 것은 마녀 프레임이었다.” (p.112)
“마녀는 ‘판별’하는 것이지 증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유형에 맞으면 마녀였다. 지금까지 없던 낯선 질병이 창궐하면 어딘가에 마녀가 있다는 이야기다.” (p.105)
앞서도 말했던바 중세 말기를 온통 뒤덮고 있던 희망의 부재는 사람들로 하여금 염세주의를 불러 일으켰다. 당시로서는 첨단 기술이던 인쇄술의 발명으로 사람들은 마녀 ‘프레임’에 완전히 예속됐다. 과학의 발전과 이성의 찬미로 흔들리던 중세 교회는 희망의 부재로 신음하던 사람들에게 위안을 주고 안식을 설파하는 것이 아니라 이 마녀 ‘프레임’에 함몰되어 ‘마녀사냥’에 앞장섰다. 무너져 가는 교회의 권위를 다른 곳에 투사해 치사하게 자리를 보전했다. 저저도 말하는 것처럼 애초에 마녀로 점찍은 후 판별하는 것으로 충분했다. 마녀를 마녀라고 증명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이성에 근거한 논리가 아니라 감성에 근거한 억지였기에 가능한 일이다.
농협 전산망이 해킹을 당하고, 천안함이 두 동강 나고, 국민들이 말을 안 듣기 때문에 어딘가에 분명 ‘빨갱이’가 난무하는 것이다. ‘빨갱이’ 됫박만 들이밀면 된다. 장악된 언론은 앞을 다투어 이 프레임을 퍼뜨린다. 순식간에 ‘빨갱이’가 된다.
[빨갱이는 실제로 존재했다. 또한 존재해야 했다. 그렇게 존재하지 않는 빨갱이를 존재하게 한 것은 분명 빨갱이 프레임이었다.]
“법을 행하기 위한 절차적 합리성이 마녀사냥을 점점 더 힘들게 만들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p.158)
난무하던 ‘마녀사냥’은 중세의 종언과 함께 서서히 사라졌다. 더 이상 마녀를 증명하지 못하고 단지 일방적으로 ‘판별’하는 것으로는 ‘마녀 프레임’을 들이댈 수 없었다.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 서는 과도기적 상황을 낳은 동력이 되었다고 생각하면 희생된 수십만의 억울한 여인들에게 너무나 송구스럽다. 아직도 일부 대륙과 부족에서 중세와는 다른 형태지만 ‘마녀사냥’이 행해지고 있다. 부족의 명예라는 이유로, 종교의 규율이라는 이유로 억압받고 처형당한다. 뉴스위크에 실린 코가 잘린 아프간 소녀의 사진이 그것이다.
“이 희생양은 과거에 여성이었고 유태인이었고 ‘빨갱이’였지만, 오늘날도 여전히 무슬림이고 동성애자고 이주 노동자의 모습으로 현신하고 있는 것이다.” (p.142)
한국 사회에서도 여전히 이 ‘프레임’은 유효하고 주효하다. 특히 ‘빨갱이 프레임’은 영원히 없어지지 않을 됫박으로 보인다. 저자의 지적대로 과거에는 여성과 유태인에게만 국한되었던 ‘마녀사냥’이 이제는 다른 형태로 자행되고 있다. 우리 사회에는 ‘왕따 문제’와 잠재적 위험으로 생각되는 ‘이주 노동자·다 문화 가정 문제’가 프레임에 노출될 가장 큰 문제라고 생각한다.
공동체적 위기와 국가적 어려움을 두고 사회 전체적인 공감대가 형성 되어 개별 주체가 힘을 모아 이겨내는 것이 아니라 어느 한 곳으로 됫박을 들고 몰려가는 것은 굉장히 위험하다. 학교에서 일어나는 왕따가 특정한 아이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당장 내일부터 내가 왕따가 될 수 있는 구조인 것처럼 지금보다 더 큰 어려움과 위기에 닥쳤을 때 여전히 유효한 마녀사냥의 ‘프레임’이 어떠한 형태로 현현될지 알 수 없다.
‘그래도 성숙한 사회인데 그럴 리 있겠어?’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지난 대선에서도 목도했던바 대중은 결코 이성에 현혹되지 않는다. 한 순간의 거대한 감성에 휩쓸리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