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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노비들, 천하지만 특별한
김종성 지음 /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 2013년 3월
평점 :
조선 최고의 목조 건축물로 손꼽히는 경회루를 만든 사람이 노비 출신 박자청이다. 이 사실은 유홍준 교수의 책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6」에서 알게 되었다. 조금만 찾아보면 박자청이라는 사람이 얼마나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는지 알 수 있다. 조선의 개국 공신의 노비였지만 건축기술 하나로 종1품에까지 오르고 나중에는 <조선왕조실록> 졸기(卒記)에도 박자청에 대한 인물평이 실릴 정도였다. ‘개천에서 용 나는’ 정도가 아니라 쩍쩍 말라버린 개울에서 수천마리 용이 승천하는 것과 같을 정도라고 봐야 한다.
“전체 인구에서 노비의 비중이 30퍼센트를 훨씬 넘은 18세기 중반까지는 한국이 노예제 사회였던 것으로 봅니다.” (p.42)
한국학 전문가인 미국의 제임스 팔레 교수가 지난 2002년에 성균관대학교에서 가진 특강에서 한 말이다. 당시 월드컵 4강 분위기를 타고 고조된 애국심에 고취되어 있던 학계에서는 날선 비판을 가했다고 한다. ‘어떻게 월드컵 4강 까지 올라간 나라의 역사에서 노예제 사회가 존재할 수 있었겠나!! 잘 알지도 못하는 미국인의 모함이다!!’ 라며 난리가 났다고 한다.
이 책 「조선 노비들」은 조선의 노비들에 대한 이야기가 담긴 책이다. 시대가 조선에 맞추어져 있을 뿐이지 사실 노비는 아주 오래전부터 존재했다고 한다. 우리의 역사뿐만 아니라 고대 부족 사회에서 다른 부족과의 전쟁에서 승리하면 당연히 그 부족원 전체를 전리품으로 취해 노예로 삼는 것이 일반이었다. 그만큼 노예·노비는 역사와 함께 존재해 왔다.
이 책에서는 조선에 초점을 맞춘다. 아무래도 가장 근거리의 역사이기도 하거니와 공식적으로 조선시대 말기에 ‘노예제’가 폐지되었기 때문에 조선의 노비들에 대한 역사를 되짚어 보는 일은 굉장히 의미 있는 일이다.
“노비는 사극에서처럼 어쩌다 한 명씩 볼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실은 아주 쉽게 만날 수 있는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노비가 아주 평범한 존재였다는 것은 노비가 그 시대의 일반인이었음을 의미한다.” (p.7)
얼마 전 종영한 사극 『마의』의 주인공인 백창현은 말의 의사 마의였다. 당시 마의는 인의와는 처음부터 끝까지 달랐다. 아무리 출중한 의술을 가졌다 할지라도 천한 마의 출신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궁궐에 들어가서도 온갖 모함과 공격을 받는다. 결국 왕의 의사인 어의에 까지 이르게 되는 내용이었다.
책을 읽으며 의아했다. 드라마 『마의』를 돌이켜 보니 도대체 누가 노비였고 누가 양인이었는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백창현과 함께 살았던 사람들, 도성 내 가장 유명한 국밥집을 운영하던 주인, 손창민의 수행무사 역할을 한 무사 중 누가 노비인지 양인인지 알수가 없다. 드라마를 보면서는 대부분 평범한 양인이겠거니 생각할 뿐이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숫자가 노비였다고 한다.
저자가 얘기한 대로 사극에서처럼 어쩌다 한 명씩 볼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지금 시대로 말하면 일반인으로 여겨도 될 만큼 숫자가 많았고 제임스 팔레 교수의 지적대로 전체 인구의 30퍼센트가 노비였다면 분명 조선은 노예제 사회였던 것만은 분명하다.
“솔거노비는 무형의 노동력을 제공했다. 반면에 외거노비는 원칙적으로 유형의 물건을 제공해야 했다.” (p.135)
솔거노비, 외거노비의 개념도 책을 통해 처음 알게 되었다. 저자의 지적대로 우리가 드라마를 볼 때 가마를 지거나 으리으리한 양반집에서 몸종을 하거나 하는 사람들만 노비라고 알고 있었다. 하지만 조선시대에 노비의 범위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 이상이었다. 말 그대로 양반집에 딸려 함께 사는 노비가 솔거노비고 따로 양반집 바깥에서 사는 노비는 외거노비다. 양반집 안의 노비는 온갖 허드렛일부터 농사일까지 시키는 일은 모조리 해야 했을 것이고 양반집 밖의 노비는 주로 소작을 하는 일이 주된 일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따지면 내가 본 사극 드라마에 등장하는 수많은 사람들 중 1/3은 노비였다는 말이다.
조선시대는 임진왜란 이후에는 별다른 전쟁이 없었고 후기 이전까지 큰 민란도 없었는데 왜 이렇게 노비가 많았는지 궁금했다.
“조선의 행정 실무가 사실상 이원들에 의해 수행되었다는 점은, 과거시험의 본질에서도 드러난다. 과거시험은 관원을 뽑는 시험이었다. 그런데 이 시험은 행정 전문가를 뽑는 시험은 아니었다. 이 시험에서 뽑힌 사람들은 유교경전을 이해하고 시를 잘 짓는 이들이었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철학자이자 문학자였다. 그런데도 조선의 관청은 이들에 의해 장악되었다. 학술관청이든 행정관청이든 군사관청이든 기술관청이든, 벼슬아치라 불린 관원들은 기본적으로 선비 출신의 문관이었다. 선비들은 성리학 이념에 입각해서 자기 부서를 철학적으로 경영했고, 실무는 구실아치라 불린 서리나 아역들이 담당했다. 장관에서 말단까지 관원들은 하나같이 실무에는 비전문가였으니, 실무를 수행하는 이원의 역할이 클 수밖에 없었다.” (p.140)
단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내용이었다. 역사에 대해서 관심이 많거나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은 이미 알고 있던 내용일지 모르겠지만 나는 전혀 몰랐던 내용이다. 얼마나 내가 역사에 무지했고 TV를 통해 전달받거나 습득되는 지식이 얼마나 습자기 같은 것이었는지 알게 되었다. 이 부분을 읽을 때에는 몇 해 전 너무도 재밌게 시청했었던 한석규 주연의 사극『뿌리 깊은 나무』가 생각났다. 한글창제에 얽힌 이야기가 주된 내용인데 드라마에서 세종대왕이 만든 집현전이 자주 나온다. 젊은 집현전 학자들이 세종대왕과 함께 한글을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컷이 많이 나오는데 기억을 더듬어 보니 집현전이 나오는 컷에서 엑스트라로 연기한 사람들이 있었다. 이 책을 읽지 않았다면 당연히 집현전에서 일하는 양반 출신의 관료이겠거니 생각했을 텐데 그들 중 분명히 노비들이 있었을 것이라 생각하니 괜히 미안해지기도 하고 왠지 모를 서글픔과 동정이 밀려오기도 했다. 비록 출신은 노비이지만 조선의 행정체계 전체를 뒷받침하고 이끌어 간 사람들이 그들이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장사를 잘해서 노비지만 거상이 된 경우는 몇 번 들어본 적이 있었지만 조선의 관료제 내부에 깊숙이 자리 잡아 그 근간을 움직인 이들이 관청에 소속된 공노비들이었다는 것이 신기했다. 일은 그들이 다 하는데 노비 출신이라고 얼마나 무시 받고 천대받았을지 안 봐도 뻔한 사실에 욱 하는 성질이 치밀어 오르기도 했다. 임진왜란 이후부터 몇 세기 동안 그야말로 태평성대한 조선이었지만 여전히 노예제 사회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이미 조선의 모든 구조를 밑바닥에서부터 움직이고 만들어 가고 있는 일개미와 같은 노비들 때문이었다는 사실이 왜 그렇게 노비가 많았는지에 대한 의문에 답이 되었다.
박자청과 백광현(물론 백광현의 본래 신분은 사대부였지만)과 같은 입지전적인 출세를 이룬 노비들뿐만 아니라 사극 드라마에서는 결코 볼 수 없었던 조선의 구석구석에 노비들이 존재했었다.
“행정도 상당 부분은 노비들에 의해, 수공업제품의 생산도 노비들에 의해, 거기에다가 농업생산 역시 상당 부분은 노비들에 의해 이루어졌으니, 조선이란 나라는 기본적으로 노비들에 의해 굴러가는 나라였던 셈이다.” (p.153)
“사극이나 역사소설에 나오는 노비들은 무식한 사람들의 이미지를 띠고 있지만, 조선이란 나라의 행정의 많은 부분이 이들에 의해 운영되었으니 모든 노비들이 무식했다고 할 수도 없다. 이런 역할을 수행했는데도, 그들은 관에 얽매인 몸이라는 이유로 무보수로 일을 했다. 국가와 노비주로부터 착취를 당하면서” (p.142)
태어날 때부터 솔거노비라 양반집 문턱을 넘어선 적이 없는 노비는 글을 배우지도 제대로 된 책 한권 보지도 못하고 양반집 안에서 죽어라 일만하다 양반집 안에서 죽었을 것이다. 그래서 분명 노비들 중 사극이나 역사소설의 묘사처럼 무식한 노비들이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분명 조선을 지탱한 노비들 중에서는 급제만 한 채 한량으로 살던 관료들 보다 더 똑똑하고 오로지 몸 하나로 거상이 되거나 건축기술 하나로 종1품에 오른 뛰어난 인물들도 있었다. 관청의 살림살이를 도맡아 하고 있어서 노비들이 없으면 조선의 구조 자체가 무너질 수도 있었지만 그들은 노비라는 신분으로 인해 무보수로 일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의 비정규직보다 더 심한 노동착취에다가 인권유린이었다. 단순히 서류상 존재하는 노비라는 신분 하나만으로. 잔인한 역사다.
조선이라는 국가와 양반, 사대부와 노비주들에게 노비는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였다.
“여자 양인과 남자 노비가 결혼하는 경우보다는 여자 노비와 남자 양인이 결혼하는 경우가 훨씬 많았기 때문에, 종모법은 노비의 수를 늘리는 데 기여했다.” (p.109)
“국가가 노비와 주인을 법적으로 차별한 것은 단순히 신분제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가장 본질적인 목적은 노비를 생산현장에 묶어두기 위한 데에 있었다.” (p.170)
노비는 노비주와 사대부, 양반과 국가를 그대로 먹여 살리는 존재들이었다. 그래서 노비제를 잘 운용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시국과제였을 것이다. 그래서 노비와 관련된 각종 법률을 제정하고 수정하고 폐지했다가 다시 재개정하기도 하는 등 조선 전체 역사를 통해 노비운용에 엄청난 신경을 쏟았을 것임은 자명하다. 지금으로 봤을 때 불합리하고 말도 안 되는 처사였을지 모르지만 당시에는 당연히 감내해야 할 신분적 숙명 내지는 팔자라고 여겼을 것이다. 그래서 소처럼 그렇게 꾸역꾸역 살다 가는 것이었다.
“노비 가정의 재산이 해마다 논 한 마지기 이상 늘어났을 리도 없는데, 주인집에서는 그 정도의 재산증식을 이루었으니, 노비들이 얼마나 심하게 착취를 당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렇게 가중한 착취를 당했으니, 노비들이 만성적인 가난에서 헤어나기는 힘든 일이었다.” (p.136)
“사극에서는 노비의 노력이나 노비주의 시혜가 면천으로 이어진 것처럼 묘사하는 경향이 있지만 면천은 주로 국가의 정책적 차원에서 시행됐다. 국가가 비상사태, 재정 부족, 자연재해, 기근 등을 타개해야 할 경우에 면천 문제가 대두된 것이다.” (p.234)
노비의 삶이 곤궁했다는 것은 흔히 알고 있는 사실이다. 대를 이어 노비로 살아가는 그들에게 무슨 희망이 있었을까 싶다. 가뭄이 와도, 큰 홍수가 와도 주인집에 갖다 바쳐야 할 곡식의 양은 줄어들지 않으니 배겨날 재간이 없었을 것이다. 조선이라는 국가가 정책적 차원에서 시행한 노비 면천이라는 것도 실상은 빈궁한 재정을 채우기 위해, 때로는 국가적 비상사태를 극복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시행한 것이다. 국가에 속한 공노비나 양반 가문에 속한 솔거노비들에게서는 공식적인 공납을 받을 수가 없으니 일부러 면천하여 양인의 신분을 던져준 채 마음껏 쥐어짜는 것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참 나쁜 놈들이다.
“1894년, 동학농민전쟁과 청일전쟁이 벌어지던 그 해, 수천 년간 이 땅에 존재했던 노비제도가 공식적으로 소멸했다.” (p.257)
조선 노비들이 모두 박자청 같지 않았고 백광현 같지 않았지만 그들은 그 억압과 착취와 멸시와 천대를 온 몸으로 받아 내며 조선을 지탱했다. 1894년 공식적으로 노비제도가 소멸되기는 했지만 온전히 노비들의 힘으로, 민중들의 힘으로 이룬 것이 아니기에 개운하지 못하다. 여전히 2013년 한국 사회에 노비가 존재한다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몇 푼 되지 않는 돈에 청춘과 젊음을 담보 잡힌 채 그저 크기를 알 수 없는 수레바퀴 안 작은 부속품에 지나지 않는 우리들의 현실에 마음 아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