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노비들, 천하지만 특별한
김종성 지음 /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 2013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조선 최고의 목조 건축물로 손꼽히는 경회루를 만든 사람이 노비 출신 박자청이다. 이 사실은 유홍준 교수의 책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6」에서 알게 되었다. 조금만 찾아보면 박자청이라는 사람이 얼마나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는지 알 수 있다. 조선의 개국 공신의 노비였지만 건축기술 하나로 종1품에까지 오르고 나중에는 <조선왕조실록> 졸기(卒記)에도 박자청에 대한 인물평이 실릴 정도였다. ‘개천에서 용 나는’ 정도가 아니라 쩍쩍 말라버린 개울에서 수천마리 용이 승천하는 것과 같을 정도라고 봐야 한다.

 

 

“전체 인구에서 노비의 비중이 30퍼센트를 훨씬 넘은 18세기 중반까지는 한국이 노예제 사회였던 것으로 봅니다.” (p.42)

 

한국학 전문가인 미국의 제임스 팔레 교수가 지난 2002년에 성균관대학교에서 가진 특강에서 한 말이다. 당시 월드컵 4강 분위기를 타고 고조된 애국심에 고취되어 있던 학계에서는 날선 비판을 가했다고 한다. ‘어떻게 월드컵 4강 까지 올라간 나라의 역사에서 노예제 사회가 존재할 수 있었겠나!! 잘 알지도 못하는 미국인의 모함이다!!’ 라며 난리가 났다고 한다.

 

 

이 책 「조선 노비들」은 조선의 노비들에 대한 이야기가 담긴 책이다. 시대가 조선에 맞추어져 있을 뿐이지 사실 노비는 아주 오래전부터 존재했다고 한다. 우리의 역사뿐만 아니라 고대 부족 사회에서 다른 부족과의 전쟁에서 승리하면 당연히 그 부족원 전체를 전리품으로 취해 노예로 삼는 것이 일반이었다. 그만큼 노예·노비는 역사와 함께 존재해 왔다.

이 책에서는 조선에 초점을 맞춘다. 아무래도 가장 근거리의 역사이기도 하거니와 공식적으로 조선시대 말기에 ‘노예제’가 폐지되었기 때문에 조선의 노비들에 대한 역사를 되짚어 보는 일은 굉장히 의미 있는 일이다.

 

 

“노비는 사극에서처럼 어쩌다 한 명씩 볼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실은 아주 쉽게 만날 수 있는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노비가 아주 평범한 존재였다는 것은 노비가 그 시대의 일반인이었음을 의미한다.” (p.7)

 

얼마 전 종영한 사극 『마의』의 주인공인 백창현은 말의 의사 마의였다. 당시 마의는 인의와는 처음부터 끝까지 달랐다. 아무리 출중한 의술을 가졌다 할지라도 천한 마의 출신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궁궐에 들어가서도 온갖 모함과 공격을 받는다. 결국 왕의 의사인 어의에 까지 이르게 되는 내용이었다.

책을 읽으며 의아했다. 드라마 『마의』를 돌이켜 보니 도대체 누가 노비였고 누가 양인이었는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백창현과 함께 살았던 사람들, 도성 내 가장 유명한 국밥집을 운영하던 주인, 손창민의 수행무사 역할을 한 무사 중 누가 노비인지 양인인지 알수가 없다. 드라마를 보면서는 대부분 평범한 양인이겠거니 생각할 뿐이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숫자가 노비였다고 한다.

저자가 얘기한 대로 사극에서처럼 어쩌다 한 명씩 볼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지금 시대로 말하면 일반인으로 여겨도 될 만큼 숫자가 많았고 제임스 팔레 교수의 지적대로 전체 인구의 30퍼센트가 노비였다면 분명 조선은 노예제 사회였던 것만은 분명하다.

 

 

“솔거노비는 무형의 노동력을 제공했다. 반면에 외거노비는 원칙적으로 유형의 물건을 제공해야 했다.” (p.135)

 

솔거노비, 외거노비의 개념도 책을 통해 처음 알게 되었다. 저자의 지적대로 우리가 드라마를 볼 때 가마를 지거나 으리으리한 양반집에서 몸종을 하거나 하는 사람들만 노비라고 알고 있었다. 하지만 조선시대에 노비의 범위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 이상이었다. 말 그대로 양반집에 딸려 함께 사는 노비가 솔거노비고 따로 양반집 바깥에서 사는 노비는 외거노비다. 양반집 안의 노비는 온갖 허드렛일부터 농사일까지 시키는 일은 모조리 해야 했을 것이고 양반집 밖의 노비는 주로 소작을 하는 일이 주된 일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따지면 내가 본 사극 드라마에 등장하는 수많은 사람들 중 1/3은 노비였다는 말이다.

조선시대는 임진왜란 이후에는 별다른 전쟁이 없었고 후기 이전까지 큰 민란도 없었는데 왜 이렇게 노비가 많았는지 궁금했다.

 

 

“조선의 행정 실무가 사실상 이원들에 의해 수행되었다는 점은, 과거시험의 본질에서도 드러난다. 과거시험은 관원을 뽑는 시험이었다. 그런데 이 시험은 행정 전문가를 뽑는 시험은 아니었다. 이 시험에서 뽑힌 사람들은 유교경전을 이해하고 시를 잘 짓는 이들이었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철학자이자 문학자였다. 그런데도 조선의 관청은 이들에 의해 장악되었다. 학술관청이든 행정관청이든 군사관청이든 기술관청이든, 벼슬아치라 불린 관원들은 기본적으로 선비 출신의 문관이었다. 선비들은 성리학 이념에 입각해서 자기 부서를 철학적으로 경영했고, 실무는 구실아치라 불린 서리나 아역들이 담당했다. 장관에서 말단까지 관원들은 하나같이 실무에는 비전문가였으니, 실무를 수행하는 이원의 역할이 클 수밖에 없었다.” (p.140)

 

단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내용이었다. 역사에 대해서 관심이 많거나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은 이미 알고 있던 내용일지 모르겠지만 나는 전혀 몰랐던 내용이다. 얼마나 내가 역사에 무지했고 TV를 통해 전달받거나 습득되는 지식이 얼마나 습자기 같은 것이었는지 알게 되었다. 이 부분을 읽을 때에는 몇 해 전 너무도 재밌게 시청했었던 한석규 주연의 사극『뿌리 깊은 나무』가 생각났다. 한글창제에 얽힌 이야기가 주된 내용인데 드라마에서 세종대왕이 만든 집현전이 자주 나온다. 젊은 집현전 학자들이 세종대왕과 함께 한글을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컷이 많이 나오는데 기억을 더듬어 보니 집현전이 나오는 컷에서 엑스트라로 연기한 사람들이 있었다. 이 책을 읽지 않았다면 당연히 집현전에서 일하는 양반 출신의 관료이겠거니 생각했을 텐데 그들 중 분명히 노비들이 있었을 것이라 생각하니 괜히 미안해지기도 하고 왠지 모를 서글픔과 동정이 밀려오기도 했다. 비록 출신은 노비이지만 조선의 행정체계 전체를 뒷받침하고 이끌어 간 사람들이 그들이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장사를 잘해서 노비지만 거상이 된 경우는 몇 번 들어본 적이 있었지만 조선의 관료제 내부에 깊숙이 자리 잡아 그 근간을 움직인 이들이 관청에 소속된 공노비들이었다는 것이 신기했다. 일은 그들이 다 하는데 노비 출신이라고 얼마나 무시 받고 천대받았을지 안 봐도 뻔한 사실에 욱 하는 성질이 치밀어 오르기도 했다. 임진왜란 이후부터 몇 세기 동안 그야말로 태평성대한 조선이었지만 여전히 노예제 사회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이미 조선의 모든 구조를 밑바닥에서부터 움직이고 만들어 가고 있는 일개미와 같은 노비들 때문이었다는 사실이 왜 그렇게 노비가 많았는지에 대한 의문에 답이 되었다.

박자청과 백광현(물론 백광현의 본래 신분은 사대부였지만)과 같은 입지전적인 출세를 이룬 노비들뿐만 아니라 사극 드라마에서는 결코 볼 수 없었던 조선의 구석구석에 노비들이 존재했었다.

 

 

“행정도 상당 부분은 노비들에 의해, 수공업제품의 생산도 노비들에 의해, 거기에다가 농업생산 역시 상당 부분은 노비들에 의해 이루어졌으니, 조선이란 나라는 기본적으로 노비들에 의해 굴러가는 나라였던 셈이다.” (p.153)

“사극이나 역사소설에 나오는 노비들은 무식한 사람들의 이미지를 띠고 있지만, 조선이란 나라의 행정의 많은 부분이 이들에 의해 운영되었으니 모든 노비들이 무식했다고 할 수도 없다. 이런 역할을 수행했는데도, 그들은 관에 얽매인 몸이라는 이유로 무보수로 일을 했다. 국가와 노비주로부터 착취를 당하면서” (p.142)

 

태어날 때부터 솔거노비라 양반집 문턱을 넘어선 적이 없는 노비는 글을 배우지도 제대로 된 책 한권 보지도 못하고 양반집 안에서 죽어라 일만하다 양반집 안에서 죽었을 것이다. 그래서 분명 노비들 중 사극이나 역사소설의 묘사처럼 무식한 노비들이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분명 조선을 지탱한 노비들 중에서는 급제만 한 채 한량으로 살던 관료들 보다 더 똑똑하고 오로지 몸 하나로 거상이 되거나 건축기술 하나로 종1품에 오른 뛰어난 인물들도 있었다. 관청의 살림살이를 도맡아 하고 있어서 노비들이 없으면 조선의 구조 자체가 무너질 수도 있었지만 그들은 노비라는 신분으로 인해 무보수로 일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의 비정규직보다 더 심한 노동착취에다가 인권유린이었다. 단순히 서류상 존재하는 노비라는 신분 하나만으로. 잔인한 역사다.

조선이라는 국가와 양반, 사대부와 노비주들에게 노비는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였다.

 

 

“여자 양인과 남자 노비가 결혼하는 경우보다는 여자 노비와 남자 양인이 결혼하는 경우가 훨씬 많았기 때문에, 종모법은 노비의 수를 늘리는 데 기여했다.” (p.109)

“국가가 노비와 주인을 법적으로 차별한 것은 단순히 신분제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가장 본질적인 목적은 노비를 생산현장에 묶어두기 위한 데에 있었다.” (p.170)

 

노비는 노비주와 사대부, 양반과 국가를 그대로 먹여 살리는 존재들이었다. 그래서 노비제를 잘 운용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시국과제였을 것이다. 그래서 노비와 관련된 각종 법률을 제정하고 수정하고 폐지했다가 다시 재개정하기도 하는 등 조선 전체 역사를 통해 노비운용에 엄청난 신경을 쏟았을 것임은 자명하다. 지금으로 봤을 때 불합리하고 말도 안 되는 처사였을지 모르지만 당시에는 당연히 감내해야 할 신분적 숙명 내지는 팔자라고 여겼을 것이다. 그래서 소처럼 그렇게 꾸역꾸역 살다 가는 것이었다.

 

 

“노비 가정의 재산이 해마다 논 한 마지기 이상 늘어났을 리도 없는데, 주인집에서는 그 정도의 재산증식을 이루었으니, 노비들이 얼마나 심하게 착취를 당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렇게 가중한 착취를 당했으니, 노비들이 만성적인 가난에서 헤어나기는 힘든 일이었다.” (p.136)

  “사극에서는 노비의 노력이나 노비주의 시혜가 면천으로 이어진 것처럼 묘사하는 경향이 있지만 면천은 주로 국가의 정책적 차원에서 시행됐다. 국가가 비상사태, 재정 부족, 자연재해, 기근 등을 타개해야 할 경우에 면천 문제가 대두된 것이다.” (p.234)

 

노비의 삶이 곤궁했다는 것은 흔히 알고 있는 사실이다. 대를 이어 노비로 살아가는 그들에게 무슨 희망이 있었을까 싶다. 가뭄이 와도, 큰 홍수가 와도 주인집에 갖다 바쳐야 할 곡식의 양은 줄어들지 않으니 배겨날 재간이 없었을 것이다. 조선이라는 국가가 정책적 차원에서 시행한 노비 면천이라는 것도 실상은 빈궁한 재정을 채우기 위해, 때로는 국가적 비상사태를 극복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시행한 것이다. 국가에 속한 공노비나 양반 가문에 속한 솔거노비들에게서는 공식적인 공납을 받을 수가 없으니 일부러 면천하여 양인의 신분을 던져준 채 마음껏 쥐어짜는 것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참 나쁜 놈들이다.

 

 

“1894년, 동학농민전쟁과 청일전쟁이 벌어지던 그 해, 수천 년간 이 땅에 존재했던 노비제도가 공식적으로 소멸했다.” (p.257)

 

조선 노비들이 모두 박자청 같지 않았고 백광현 같지 않았지만 그들은 그 억압과 착취와 멸시와 천대를 온 몸으로 받아 내며 조선을 지탱했다. 1894년 공식적으로 노비제도가 소멸되기는 했지만 온전히 노비들의 힘으로, 민중들의 힘으로 이룬 것이 아니기에 개운하지 못하다. 여전히 2013년 한국 사회에 노비가 존재한다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몇 푼 되지 않는 돈에 청춘과 젊음을 담보 잡힌 채 그저 크기를 알 수 없는 수레바퀴 안 작은 부속품에 지나지 않는 우리들의 현실에 마음 아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체르노빌의 봄 핵없는 세상을 위한 탈핵 만화
엠마뉘엘 르파주 지음, 해바라기 프로젝트 옮김 / 길찾기 / 2013년 3월
평점 :
절판


얼마 전 후쿠시마 원전 주변에 살고 있는 동물들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봤다. 갑작스런 사고에 가족같이 지내던 사람들이 자신들을 두고 떠났지만 아무런 원망도 질타도 할 수 없었다. 그곳은 이미 사람이 접근하지 않는 죽음의 땅, 저주의 땅이 되었고 사람의 발길이 끊긴 그 곳은 이제는 사람과 함께 지낼 수 없는 동물들의 세상이 되어 있었다.

1986년 체르노빌 원전 사고는 곧 터질 듯 터질 듯 하던 미국과 소련의 냉전을 무너뜨린 굉장히 중요한 사건이 되었고 직접적인 피해자는 물론 아직까지 후유증과 간접적 피해로 고통 받는 사람이 많은 현재 진행형인 사건이다.

후쿠시마는 불과 2년 전에 원전 사고가 일어났지만 이미 죽음의 땅으로 여겨지고 있는데 체르노빌은 30년이 다 되어 간다.

사실 한국과는 워낙 거리가 멀고 ‘체르노빌, 체르노빌’해도 살에 잘 와 닿지 않는다. 후쿠시마만 해도 거리도 가깝고 심정적으로 바로 옆 동네 일로 여겨져 촉각을 곤두세우기도 하고 혹 사건 당시 일본 열도 어딘가에 살았던 사람을 만난다면 마치 후쿠시마에서 사고를 겪은 사람에게 당일 생생한 사건에 대해 듣는 것처럼 감정을 이입해 들을 것이다.

체르노빌 사고는 책과 TV를 통해서 알게 된 오래 전 사고로만 인식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 책 「체르노빌의 봄」을 읽으며 이것이 단지 지리상으로 멀리 떨어져 있고 완전히 다른 문화권에서 살고 있는 나와 같은 사람만 그런 것이 아니라 유럽에 살고 있는 사람에게도 동일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미 끝난 사건이 아니라 여전히 유효하고 여전히 죽음의 땅, 저주의 땅으로 불리고 있는 곳의 찬란한 비극에 대해서도 간접적으로나마 느껴볼 수 있었다.

 

 


 

1986년에서 시간이 멈추어 버린 체르노빌로 들어가려는 시도는 당사자들을 제외한 다른 모든 사람들이 보기에 무모한 짓이었다.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 될지도 모르고 어떤 위험에 노출될지도 모르는 상황이다. 이 그림책에 등장하는 예술가들은 자신들도 분명히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믿음 하나로 죽음의 땅, 저주의 땅으로 들어간다. 무수한 사람들이 체르노빌에서 죽어가고 피해를 입고, 또 무수한 사람들이 조사하고 파헤치고 분석하고 해체한 곳이 체르노빌이다. 하지만 이 예술가들은 엉뚱하게만 들리는 일을 하기 위해 그 곳, 체르노빌로 들어간다.

예술가들을 위한 집.

그곳이 얼마나 위험한지, 얼마나 죽음에 가까운 곳인지 미처 알지 못한 채 열차에 몸을 싣는다. 이 무모하고 용감한 예술가들은 그 곳에 닿는다. 그들의 무모함과 용기는 그 곳의 숲을 직면하는 순간 무너진다.

 


“갈까요?”

“인상적이군요.”

“그럴 만도. 5∼6마이크로시버트예요. 아주 높군요.”

“파스칼은 측정기 소리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그것만이 오염 정도를 알려주는 정보였으니”

“피터팬에 나오는 악어가 생각나네요.”

“?”

“악어는 후크 선장의 한 쪽 손을 먹고 그 맛에 반해버리죠. 그래서 나머지도 먹으려고 쫓아다니잖아요! 그런데 악어가 불행히도 시계를 같이 삼켜버린 탓에, 가까이 다가갈 때마다 선장은 똑딱-똑딱 소리를 들을 수 있었죠. 후크 선장에겐 그 소리가 죽음의 경고처럼 들렸을 거예요.” (p.97)

 

이 그림책의 저자이기도 한 르파쥐는 그림을 그렸다. 비닐장갑을 끼고 비닐 신발을 신고 마스크를 하고 가져간 의자에 앉아서. 유일하게 위험한 지역임을 가르쳐주는 방사능 측정기계에 온 몸의 감각을 의지한 채.

 

 


사람이 떠난 자리에 늑대가 자리 잡았다. 그들 예술가들은 그곳으로 들어갔다. 사고 시점에서 시간이 멈춰 버린 도시를 대한다. 금지 구역 그 깊숙한 곳으로 조금씩 조금씩 들어갔다.

책에서 말한 대로 르파쥐는 있는 그대로의 체르노빌의 모습을 그려내고 싶었다고 했다.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그대로의 모습을. 그래서 가져간 도구로 자신의 눈에 보이는 그대로를 스케치 했다.

 

그런데.

금지구역 속으로 깊숙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멈춰버린 시간에 정신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무언가 잘못됐다. 나는 체르노빌을 그려오라는 주문을 받았다. 난 이곳의 끔찍함을 보여주기 위해 왔는데, 형형색색의 그림을 그리다니!” (p.117)

“질다스, ‘체르노빌은 아름답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 나는 그 말에 모순을 느낀다. 하지만 내 그림이 그렇게 보여주고 있다. 거기서 죽음을 느낄 수 있는가? 전혀……. 그런 것들을 그려오라고 사람들이 나를 보낸 게 아니다!” (p.129)

 

시간이 멈춰 버린 그곳은 분명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무채색의 스케치 도구만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경이로운 자연의 복원에 넋을 놓았다. 저자의 표현대로 시간의 끝을 놓은 채 그곳에 완전히 붙들려 버렸다.

여전히 사고의 잔재가 흉측하게 널려 있기도 하고 사람의 흔적은 찾아보기 힘들지만 오히려 멈춰 진 시간 속에서 체르노빌은 스스로 살아나고 있었다. 방사능 측정기에서 가리키는 방사능 수치와는 벌개의 세상이 존재하고 있었다.

이미 예술가들의 집을 스스로 만들어 열어놓고 있었다.




“내가 본 것은 진정 무엇일까? 난 생각지도 못했던 전혀 다른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것들은 저항할 수 없을 정도로 나를 끌어당겼다.” (p.130)

 

그리고 저자를 진심으로 감동시킨 것은 삶이었다. 체르노빌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삶. 사고 이전의 풍요롭고 활기 넘치는 역동적인 삶은 분명 아니었지만 오히려 죽음과 저주와 맞닿아 있어서 욕심 없고 꾸밈없는 그들의 진솔한 삶에 감동한 것이다. 그 사람들의 삶과 마주하지 않은 이들은 멀리서 손가락질 한다. 가까이 가지 않는다. 전염병을 옮기는 숙주처럼 대하기도 한다. 그들은 누구보다 불쌍하고 가련한 피해자들일 뿐인데 말이다.

저자를 포함한 예술가들은 오히려 체르노빌의 깊숙한 그들의 삶 속에서 위로를 받고 위안을 받는다. 애써 그들이 뭘 만들고 바꾸어 보려는 노력과 시도가 얼마나 무의미한 것인지 깨닫게 된다.

체르노빌……. 그곳은 여전히 죽음의 땅이고 저주의 땅이지만, 그곳에는 여전히 삶이 이어지고 있고 그들의 삶을 마주해보지 않는 이상 그들을 판단할 수 없다. 판단해서도 안 된다.

 

1986년 이후로 여전히 고통 받고 있는 모든 체르노빌 사고의 피해자들에게 진심으로 위로를 전한다. 더불어 후쿠시마의 피해자들에게도 같은 마음을 전한다.

 

지금보다 더 따뜻한 바람이 불면 곧 벚꽃이 지고 완연한 봄이 온다. 체르노빌에도 후쿠시마에도 여전히 찬란한 봄이 도래하기를 기도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더티 라이프 - 흙을 만지다 사랑에 눈뜨다
크리스틴 킴볼 지음, 이경아 옮김 / 올(사피엔스21) / 2013년 3월
평점 :
품절


마크와 결혼 해 시골 농장에 안주인이 된 크리스틴은 뉴요커다. 누구나 한 번쯤은 가보고 싶어 하는 곳에서 나고 자란 토박이다. 많은 젊은이들의 로망이기도 한 프리랜서 작가일을 하다가 마크를 만나 180도 다른 삶을 살게 된다.

결혼식도 올리지 않은 채 궁벽진 외딴 마을에 위치한 에식스 농장에 자리를 잡는다. 일단 농장을 농장이라 불리울 수 있을 만큼 모양을 갖추는 것이 급선무였다. 계획을 짜고 가축을 사들이고 각종 기구와 도구를 사기도 하고 구하기도 하고 씨앗을 뿌리고 가꾸고 거두는 일을 한다.

 

 

이 책 제목인「더티 라이프」는 더러운 삶과 땅을 가꾸는 삶이라는 중의적 의미를 내포한 제목이다. 원래 농장을 꿈꾸고 그런 삶을 살아 온 마크와는 달리 크리스틴은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일이고 한 번도 꿈꾸지 않은 삶이었다. 둘 중 크리스틴에게는 이제까지 누리고 지녔던 모든 것을 던져버리는 것을 요구하는 삶이다.

나는 뜬금없는 생각이 자꾸 떠올랐다. 흔히 남자는 10대부터 70대 80대까지 여자의 외모만 본다는 우스개가 있는데 전혀 우스개가 아니다. 사실이다. ‘못 생긴 여자와는 살아도 요리 못하는 여자와는 산다.’라는 말도 있지만 요리를 아무리 못해도 너~무 예쁘면 매일 시켜먹는 수고와 돈을 기꺼이 지불하는 것이 남자다. 하지만 여자는 많이 다르다. 요즘 젊은 여자들은 워낙 조건을 따지면서 결혼 상대자를 고르기 때문에 항간에는 그런 여자들을 비꼬는 말도 떠돌기는 하지만 적어도 내가 주위에서 본 여자들은 남자들보다 훨씬 외모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아니, 아예 외모는 결혼 상대자를 판단하는 많은 기준 중 가장 아래 단계일지도 모른다. 대학원까지 나와서 미국에서 공부하고 현지 회사에서 일하다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셔서 모든 미국 생활을 정리하고 한국에서 살고 있는 여자가 전문대를 졸업한 비정규직 남자, 게다가 자신보다 키도 작은 남자와 결혼하는 것을 가까이에서 지켜봤다. 여자의 어머니와 가족 친지는 물론 친구, 동료, 선·후배까지 모두 만류했다. 결정적으로는 여자는 3대째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데 남자는 교회에 다니지 않을뿐더러 남자 집은 독실한 불자다. 결혼을 하겠다고 마음먹고 실제로 결혼을 하기까지 영화를 한 10편을 찍을 만큼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결국 결혼해서 지금은 아기 낳고 잘 살고 있다. 가까이에서 이 일을 겪은 후 정말 100% 동의할 수 있었다.

‘여자는 남자의 외모를 보지 않는다.’

 

이 책의 저자 크리스틴은 지금의 남편인 마크의 외모에 대해 자세히 기술하지 않았다. 키가 무척 크고 순수하게 생겼으며 늘 농장 일에 매달려 있어 후줄근한 옷차림에 부스스한 외모 정도. 하지만 인터뷰 상대자로 만난 그와 사랑에 빠지고 뉴요커를 집어던진 채 시골 농장으로 간다. 크리스틴도 마크의 외모는 물론 조건도 보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우리는 일단 농장에서 추수를 마치고 결혼식을 올리기로 약속했다.”

“우리는 우편으로 도착한 달력에 내년에 해야 할 작업을 체크하며 하루 종일 즐거운 흥분에 휩싸여 지냈다.”

“말을 장만했으니 말이 끌 농기구가 필요했다.”

“우리는 사기도 하고 얻기도 하면서 농기구를 갖추어나갔다.”

“2월이 되자 씨앗이 도착했다. 농장 하나가 상자 하나에 담겨 있었다.”

 

앞서 말했지만 결혼도 하지 않은 채 한 번도 해보지 않은 농장일을 한다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다. 본가 부모님께서 재작년부터 밭을 가꾸고 계신다. 아는 분의 소개로 밭을 무상으로 임대해 가꾸시는데 너무 좋아하신다. 두 분 다 충청도 시골 출신이시고 이제는 퇴임하셔서 시간적 여유도 많아져 운동도 할 겸 가끔 내려오는 자식들에게 두둑하게 챙겨 줄 겸. 그런데 이 밭 일구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한 번씩 전화 통화하면 밤이 될 때까지 저녁도 드시지 않고 밭에 계신다고 하면 그만 하시고 밥이나 드시라고 채근할 때가 많았는데 본가에 내려가 밭일을 도와드릴 때면 왜 그렇게 두 분이 밭에 매달려 계실 수밖에 없었는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농장은 우리를 쉴 새 없이 움직이게 만드는 피조물이다. 농장에서는 절대 끝이라고 말할 수 없다. 강물처럼 밀려드는 일감의 흐름은 멎을 기색이 보이지 않는다.” (p.191)

 

물론 마크 부부의 에식스 농장과도 비교도 할 수 없이 작은 밭이었지만 할 일이 너무 많았다. 심고 캐고 다듬고 따고 뿌리고 거두고 치우고 하는 일이 끝이 없었다. 허리를 숙인 채 한참을 하고 한 번 시원하게 허리를 펼라치면 바로 다른 일거리가 떨어졌다. 밭일이 없을 시기에 내려가서 이것저것 얻어 올 때는 그렇게 고생하셔서 거두신 것들인지 몰랐다. 몇 번 밭일을 도와드리고 나니 싣고 온 것들을 쉽게 먹을 수 없었다.

 

마크 부부도 계절을 몇 번 지내며 책에서 다 담지 못한 많은 일들을 겪었을 것이다. 농사일과 농장일이라는 게 단순히 일만 잘해서 수확이 잘 나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상하지 못한 기후나 날씨로 인해, 때로는 가축의 병으로 인한 불가항력적인 불안 요소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크리스틴이 뉴요커라는 멋진 옷을 집어 던지고 아무런 조건을 보지 않고 마크를 선택한 것처럼 많은 시행착오와 어려움도 그들의 열정을 식게 만들지는 못했다.

책에서는 크리스틴의 농장일에 대한 묘사가 가장 재미있게 읽혔다. 작지만 본가 텃밭 일을 조금 해보고 방학 때마다 시골 할머니 댁에 가서 농사일을 도왔던 기억 때문이지 눈에 그려지는 듯 했다. 책에서처럼 직접 도축을 하거나 말을 길러보지는 않았지만 젖소에 대한 묘사와 작물에 대한 묘사는 정말 눈앞에 펼쳐지는 듯 했다. 뉴요커 일 때도 꽤 유명한 프리랜서 작가였음이 틀림없는 듯 했다.

이 책을 읽는 대부분의 독자들이 도시 출신이기 때문에 자칫 자세한 묘사와 설명은 지루할 수도 있는데 진짜 그림책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전혀 지루하지 않고 농장에서 겪는 좌충우돌이 만화 같기도 하고 뜬금없는 긴장감을 자아내기도 했다.

 

 

“결혼식 전날까지 우리는 갓 철거한 별채 잔해를 치우고, 나뭇조각들을 모아 태우고, 자석으로 못을 찾아다니느라 정신없이 바빴다.” (p.310)

“내가 떨쳐내려는 것은 마크도, 농장도, 결혼도 아니었다. 바로 불완전한 나 자신이었다. 내가 아무리 도망친다 한들 불완전한 나 자신은 영원히 나를 따라다닐 것이 분명했다.” (p.324)

 

결혼식 전날까지도 농장일을 해야 했고 두 사람의 결혼을 축하해주기 위해 모인 하객들에게도 농장일을 시켜야 했다. 앞서도 말했지만 농장일이라는 게 절대로 끝이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결혼 전에도 결혼 후에도 마크 부부는 여전히 투닥거렸다. 작은 의견 대립에서부터 농장 전체를 운영하는 것에 대한 큰 의견 대립에 이르기까지 많이 싸웠다. 크리스틴이 단번에 180도로 휙 몸을 돌려 뉴욕에서 시골 에식스로 옮겨 왔지만 30년 넘게 살아 온 습관과 몸에 그대로 녹아 있는 진짜 속마음까지 마크와 함께 하는 농장에 자리 잡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렸다. 분명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마크 부부의 에식스 농장에서는 공동체지원농법‘CSA(Community Supported Agriculture)’이 농장전체의 운영방법이었다. 이것은 쉽게 말해 농장과 소비자간 직거래라 볼 수 있는데 구성이 협동조합 형태다. 회원들이 계절이 시작될 때 농장의 지분을 미리 구입하고 매주 농장의 생산물을 분배받는 방식이다. 책에서는 2000달러를 웃도는 돈을 미리 농장에 지급한다고 하는데 결코 저렴한 가격은 아니다. 하지만 시중에 판매되는 각종 유기농 제품의 가격을 생각하면 비싼 것도 아니다. 중간유통업자와 시장을 경유하지 않고 곧장 최종 소비자와 거래 할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이기 때문에 중간 마진을 떼이지 않아도 되고 공급하는 농장 입장에서도 불필요한 비용을 지급하지 않아도 되는 방식이다. 1980년대 일본에서 처음 도입되었고 유럽을 거쳐 미국으로 건너갔다고 책에서는 설명하고 있는데 실제로 한국에서도 이런 방식이 있는지 궁금했다. 이제 친구들을 만나면 우리의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그 중 하나가 시골로 내려가 함께 살자는 것이다. 아직은 머릿속에서만 꿈꾸고 있는 것인데 이 책을 읽고 좋은 방법을 하나 배웠다. 만약 에식스 농장같이 CSA농법을 기반으로 해서 안정적인 회원만 모을 수 있다면 좋을 것 같았다. 요즘 협동조합 형태의 각종 사업이 핫아이템으로 부상하고 있어서 더욱 관심이 가는 부분이기도 했다.

그냥 머릿속에서만 맴돌다가 친구들과 이야기 나누는 것으로 끝날 수도 있고 실제로 시골로 내려가 CSA농법으로 운영할 농장을 만들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우리는 회원이 원하는 것은 뭐든 키우고 싶었다. 온갖 육류와 계란, 우유를 비롯한 유제품, 곡류와 밀가루, 채소, 과일, 적어도 한 가지 이상의 감미료와 같은 먹을거리에서 시작해서 장작이나 건축 자재, 운동, 휴양처럼 궁극적으로 농장이 공급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소비자에게 제공하자는 꿈을 품었다.” (p.76)

“우리는 비록 소규모로 경작을 했지만 자신이 먹는 음식이 어떻게 재배되었는지 궁금해 하고, 호르몬제와 항생제를 쓰지 않는 식재료를 원하고, 어떻게 재배되고 키워지는지 직접 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 (p.208)

 

농장 하나가 살아있는 유기체와 같이 하나의 커뮤니티가 되는 것이 참 신선했다. 일부러 농장까지 찾아와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가져가고 그곳에서 만난 회원들과 교제를 나누고 관계를 형성해 나가는 시도가 한국에서도 가능할지 궁금했다. 아예 따로 공동체를 만들어 자신들끼리만 모여 사는 형태가 아니라 완전히 열린 형태여야 할 것이다. 제품을 공급하고 그 제품을 사가는 소비자의 관계에서 그치지 않고 에식스 농장의 경우처럼 매주 방문해 그들이 원하고 희망하는 제품이 어떻게 자라고 있고 어떻게 재배되고 있는지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보고 직접 그 모든 과정을 주관하는 공급자인 농장 사람들과 이야기 나누고 의견을 교환하는 그런 삶의 유대. 그런 삶을 함께 이어가는 시도와 형태가 가능해야 한다.

성격 급한 친구 한 명은 벌써 가까운 인근 시골 지역의 땅값 시세를 알아보러 다녔는데 땅값이 너무 비싸다고 했다. 땅을 사고 집을 지으려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돈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마크 부부처럼 무상으로 땅을 대여해주는 귀인을 만나지 않는 이상 수년 내에 이런 시도를 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될 것으로 보인다. 생각만 하는 거지 뭐.

크리스틴이 이 책에서 아주 재미있고 매력적으로 묘사한 농장일이라는 것이 결코 쉽지 않고 굉장히 어려운 일이겠지만 한 번 해보고 싶기는 하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우리는 맨손으로 학교 간다
한국글쓰기교육연구회 지음 / 양철북 / 2013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나의 학창 시절에는 문집이 단 한 번도 없었다. 흔하디흔한 졸업기념 문집도 없었다. 그저 학교에서 하는 반공 표어·포스터 그리기만 했던 기억이 또렷할 뿐이다. 그때는 한 반의 학생이 50명에서 60명에 이르렀고 초등학교 저학년 때에는 학생들이 너무 많아 오전, 오후반으로 나누어 학교에 다니던 기억도 있다.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인성교육이니 1:1 맞춤지도니 하는 것들이 가당키나 했을까 싶다. 요즘은 적어도 내가 학교에 다니던 때보다 학생 수가 반 정도는 줄어들었다고 알고 있다. 그렇지만 교사 1인당 30명에 가까운 학생들을 지도해야 하는 것은 굉장히 힘든 일임은 분명하다. 요즘 아이들이 예민하기도 하고 우리가 학교에 다니던 때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스트레스를 받는 지경이라 더욱 신경이 쓰이고 어려울 것이라 생각된다.

학교를 둘러싼 여러 가지 문제들이 이제는 학교와 학교의 구성원들이 해결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해 져서 3자의 입장에서 안타까울 때가 많다. 그나마 우리 때는 평생을 기억해갈 아름다운 추억 몇 개쯤은 가지고 있는데 요즘 학교 얘기를 들어보면 추억은커녕 큰 사고나 일어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비록 나는 문집을 한 번도 해보지 못했지만 나의 학창시절 다른 반 친구들은 반 문집에 실린 자신의 글을 보여주며 자랑스러워했었다.

요즘 학교에서는 이런 문집 같은 것을 할 수나 있을지 의문이다.

나의 학창시절과 지금의 학교가 가진 공통점은 있다. 바로 일기쓰기다. 이 책에도 아이들이 쓴 일기가 많이 삽입되어 있는데 사실 우리 때 일기는 거의 벼락치기였다. 책에서처럼 매일 선생님이 거두어 검사를 하거나 코멘트를 달아줬던 기억이 없다. 일기도 방학숙제여서 개학을 하루 앞두고 부랴부랴 밀린 일기 쓰느라 쩔쩔매던 기억만 가득하다.

학생수가 30명이든지 60명이든지 이 일기쓰기는 꽤 중요한 것 같다. 선생님 입장에서야 비슷비슷한 일기 수십 개지만 선생님이 보는 내 일기는 단 하나이기 때문이다. 선생님과 나만 아는 비밀이다.

그런 비밀들을 담은 책이 바로 이 책 「우리는 맨손으로 학교 간다」이다. 글쓰기교육연구회 선생님들이 엮은 「우리반 일용이」를 너무 재밌고 의미 있게 읽었던 터라 이 책도 단숨에 읽어냈다.

 

 

「우리반 일용이」라는 책을 통해 학생들을 마음으로 사랑하고 사명감으로 교사 생활을 하고 있는 선생님이 아직도 많다는 사실에 감격했고 개인적으로 위로를 받기도 했다. 직접 만나지는 못한 선생님들이지만 아이들의 작은 목소리와 신음에 반응하고 자신이 할 수 있는 범위에서 최선을 다해 돌보고 양육하는, 그래서 부모와 같은 역할을 하는 선생님도 만날 수 있었다. 이 책이 아이들을 지도하고 양육하고 돌보는 선생님들에게 조금 더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면「우리는 맨손으로 학교 간다」는 문집이나 과제, 일기를 통해 들여다 본 아이들의 속내에 조금 더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선생님과 아이 두 사람만의 비밀을 들여다보는 것 같았다. 물론, 정제되지 않고 터져 나오는 아이들의 속내를 판단하거나 미루어 두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듣고 함께 아파하고 함께 기뻐하는 선생님들의 정성도 가득 들어 있는 책이다.

 

 

<나뭇잎>

 

나는 오늘 집에서 늦게 일어낫다.

그래서 학교로 뛰어 가는데 나무에 조금 있던 잎이

더 이상 못 참아 엄마 품에서 떨어졌다.

나뭇잎이 불쌍하다.

그래서 그 벌어진 잎을 쭈어서 엄마나무 옆에

나뚜어 주었다.

 

 

아이들 글을 읽으니 누군가 내 머리를 세게 내리치는 것 같았다. 1년 가까이 아이들 형편이 어떤지 하나도 모르고 지내 왔구나. 그저 겉으로 보이는 모습으로만 아이들을 판단했구나. 아이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아이들의 삶을 가꾼다고 떠들어 댔구나. 아이들에게 미안하고 내 자신이 부끄러웠다.” (p.223)

 

맞춤법은 다 틀리고 시적 은유도 없는 시지만 아이의 속내가 고스란히 담긴 시다. 평소 선생님 말을 지독하게 듣지 않고 수업에도 집중하지 못하는 한 학생이 쓴 시에는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았던 속마음이 가득했다. 엄마를 잃은 아이가 나무에서 떨어진 나뭇잎에 자신을 투영한 것이다. 자신처럼 나뭇잎은 엄마 품을 잃어버리지 말라고 ‘잎을 쭈어서 엄마나무 옆에 나뚜어 주었다.’ 선생님은 비로소 아이의 속내를 알아차린다. 그리고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자신이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아이를 판단했던 것을 반성한다. 이것이 교육자의 자세가 아닌가 싶다. 혹시나 교사로서의 위신이 떨어질까 봐 자신의 잘못된 행동과 말을 주워 담지 못하고 모른 체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과 진정한 소통을 하기 위해 노력한다. 저 시를 본 선생님은 이 아이가 전과 같은 행동을 다시 한다 할지라도 대하는 태도나 행동, 말이 달라질 것이다.

 

 

“마음이 조금 가라앉고 아이들과 함께 앉으니 내가 잘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가위로 목을 그었다는 말에 그냥 흥분해 소리치고 때렸다. 선생 하다 보면 더한 일도 있는데 슬기롭게 풀지 못하고 일을 그르치기 일쑤다. 그다음엔 괴로워하고, 처음 선생 시작했을 때나 열여섯 해 지난 지금이나 똑같다.” (p.119)

 

아이 둘이 서로 싸워 한 아이가 다른 아이 목에 가위로 그었다는 것을 듣고 야단치지 않은 교사가 있을까? 아주 호되게 야단을 치고 부모님을 불러야 할 정도로 심각한 사안이 될 수 도 있다. 하지만 그것만이 능사는 아닐 것이다. 교실 내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일에 일일이 경중을 따질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렇게 된다면 마치 군대 훈육하듯이 아이들을 교육할 수밖에 없다. 위의 선생님처럼 슬기롭게 교실의 일들을 풀려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바로 눈앞에 보이는 상황만으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한 번 더 생각하고 돌아보는 자세. 위의 선생님은 16년 동안 교사생활을 하고 있지만 여전히 타성에 젖지 않는 선생님이다. 여전히 자신을 돌아보고 반성할 줄 아는 선생님이다. 사실 그것으로 충분하다. 쉽게 결정내리고 체벌하거나 원리원칙대로 처리하는 것은 오히려 쉽다. 하지만 전후좌우를 따지고 문제를 둘러싼 당사자들의 말을 다 듣고 누구도 더 큰 상처를 받지 않도록 하는 과정은 어렵고 힘들다. 그래도 이런 선생님들이 있어 아직 학교에 희망이 있다고 생각한다.

 

 

“지혜는 준혁이 자리를 부지런히 오가며 고구마 도장을 빌려 찍더니 다했다고 가지고 왔다 잘 못했다고 생각했지만 덤덤하게 잘했다고 말해 줬다.” (p.120)

“어제 지수한테 편지를 주었는데 오늘 답장을 써 왔다. 편지에 다시는 까불지 않겠다고 해 놓고 다른 날보다 더 말을 안 들었다.” (p.117)

“아침에 준혁이한테 초코파이 하나를 상으로 줬다. 글씨를 잘 쓴다고 줬다. 준혁이 글씨는 정말 엉망이었다.” (p.121)

 

김광견 선생님의 일기다. 이 일기를 읽고 너무 많이 웃었다. 지혜가 한 과제는 잘 못했지만 준혁이를 열심히 도와주던 마음씨가 예뻐 잘했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리고 정말 엉망인 준혁이의 글씨를 보고도 상을 줬다고 한다. 이런 선생님들이 정말 많았으면 좋겠다. 하루 이틀 교직 생활한 선생님들이 아닐 테고 딱 봐도 잘했는지 잘 못했는지 알 수 있고 반의 아이들 모두에게 똑같은 사랑을 줄 수는 없을 것이다. 수십 명의 아이들 모두가 마음에 들리는 없으니까. 하지만 차별은 하지 않아야 한다. 비록 선생님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성에 차지는 않지만 그 모습 그대로 칭찬해주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많은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선생님이 해주는 칭찬은 엄청난 효과가 있으니까.

 

 

“우리 반에는 상이 참으로 많다. 다달 연필 깎기를 하면서 주는 손재주 있다 상, 모둠 활동을 자랬다고 모둠 식구 모두에게 주는 모둠 상, 훌라후프 잘 돌린 상, 모래 쌓기 잘한 상, 맨발로 잘 걸은 상, 벌 받기를 잘한 상... 결석을 한 뒷날에 주는 결석 상도 있다.(중략)

상은 칭찬이다. 그래서 상은 많을수록 좋지만 다른 동물들을 주눅 들게 하면서까지 주고받아서는 안되겠다 싶어서 이렇게 여러 가지를 만들었다.“ (p.141)

 

윤태규 선생님의 아이디어는 정말 기상천외하다. 나의 학창시절에는 들어보지 못했던 상들이다. 우리 때는 분단이었는데 이제는 모둠이라고 용어가 바뀐 것도 처음 알았다.(‘분단’이라는 용어를 다시 생각해보니 완전히 군대용어다. 끔찍하다ㅡ.ㅡ) 모둠 상도 있고 모래 쌓기 잘한 상도 있고, 하하하, 벌 받기 잘한 상도 있단다.

 

 

“칭찬은 좋은 것이기는 하지만 상을 받는 까닭이 구체로 드러나지 못하고 막연하게 인격을 평가하는 듯한 ‘품행이 방정하고 학업 성적이 우수하여’ 이렇게 써 주는 상장은 결코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상은 누구라도 인정할 수 있도록 상장 문구를 아주 분명하게 써야 한다. 청소를 잘했으면 청소 잘한 상을 줘야지 착한 어린이상을 줘서는 오히려 칭찬이 아니라 부담을 주게 된다는 말이다.” (p.142)

 

그냥 틀에 맞춰져 있는 똑같은 상이 아니라 아이들 각자에게 맞는 상이다. 정말 기발하고 그 정성이 느껴져서 내 마음까지 따뜻해진다. 이런 상을 받는 아이들은 얼마나 좋을까? 꼭 성적이 우수하거나 품행이 방정해야만 상을 받던 것과는 천지가 다르다. 상에 있어서도 아이들을 차별하지 않고 누구하나 소외되지 않도록 배려하는 윤태규 선생님의 아이디어는 놀랍다. 벌 받기 잘한 상을 받았다면 어떻게 그것을 잊을 수 있겠나. 두고두고 추억하며 선생님을 떠올리고 반 친구들을 떠올리는 계기다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모든 선생님들이 윤태규 선생님처럼 아이디어를 쏟아 내고 뭔가 꼭 창의적인 교육지도를 해야만 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교실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의 전제가 아이들을 한 번 더 생각하는 배려였으면 한다는 말이다.

말처럼 쉽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 책을 읽다보면 ‘분명 전국 곳곳에 이런 선생님들이 많을 거야. 그래 분명히 그럴 거야.’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최면을 거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그런 확신이 생긴다. 비록 학교를 둘러싼 문제가 너무 심각해져 있는 상태지만 학교와 교사, 학부모와 학생, 지자체와 교육당국 간에 서로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것에 급급한 것이 아니라 정말 아이들을 위해 학생들을 위해 서로를 배려하고 믿어주는 것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매번 ‘내가 아니라 니가 바뀌어야 한다!!’라는 이기적인 마음과 태도로는 절대로 문제를 풀지 못할 것이다.

 

 

“글쓰기 공부를 하지 않았다면 민준이 마음은 들여다보지 못하고 문제아로 내 마음에 남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정인숙 선생님처럼 흔히 문제아로 불리는 아이들을 볼 수 있다면 분명 학교는 지금과는 달라질 것이다. 아무도 손댈 수 없을 것 같았던 학생이 따뜻한 말과 관심, 위로에 눈물을 쏟아내고 자신의 상처를 드러내어 함께 치유해가는 것을 우리는 많이 봐 왔다. 단지 TV에서만 보는 것이 아니라 나도 당신도 그렇게 해야 한다. 그저 공부만 하는 기계로 대하기에는 아이들의 존재는 너무 귀하다. 요즘 아이들은 어른들을 무서워하지 않고 나무람을 폭력으로 되갚기도 하지만 속내를 알기 전까지는 쉽게 판단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 학교에 책임을 전가할 수 없는 것처럼 부모에게 전가해서도 안 된다. 주변에 있는 아이들부터 관심을 가져야 한다. 글쓰기교육연구원에 속한 선생님들처럼 다른 선생님들도 아이들과 글쓰기 공부를 하거나 매일매일 일기를 주고받으면서 소통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단지 선생님이기 때문에 단번에 마음을 열고 다가가는 아이는 없을 것이다. 매년 반복되는 생활이지만 교사의 사명을 잊지 말아야 한다. 아직까지는 학교에 희망이 있고 되살아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학교가 아이들에게도, 교사에게도, 학부모에게도, 지켜보는 제3자들에게도 불편하고 미간이 찌푸려지는 곳이 되지 않아야 할 것이다. 더 이상은. 함께 만들어가야 한다.

그것의 출발은 아이들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이다.

 

 

<싸움>

 

우리 아빠 일하는 데에서

돈을 안 준다.

엄마, 아빠는 싸운다.

저러다

이혼하면 안 되는데

때리면 안 되는데

그 돈이 뭔데

이렇게 아프게 할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옥수동 타이거스 - 2013년 제1회 한국경제 청년신춘문예 당선작
최지운 지음 / 민음사 / 2013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비평준화 고등학교를 다녔다. 중학교에 들어가자마자 선생님과 부모님으로부터 어떤 학교에 가라는 압력을 받았다. 인문계 고등학교를 가지 못하면 실업계 고등학교를 가야 했다. 그때는 고등학교 입학시험도 꽤 비중이 있었다. 200점 만점(체력장 20점 포함) 180점 이상을 맞아야 그나마 서울 지역 대학에 갈 가능성이 있는 고등학교에 입학 할 수 있었다. 지역에 큰 철강공단이 있어 상위 2개 정도 공고는 어설픈 인문계 고등학교 보다 입학 커트라인이 높기도 했다.

공립 고등학교 1곳을 제외하고 사학 재단이 운영하는 학교는 대부분 중학교와 고등학교가 한데 붙어 있었다. 당연히 중학교 때부터 공부 좀 한다는 아이들을 똑같은 이름의 고등학교에 진학시키기 위해 이런저런 유혹(?)과 조건을 걸어 미리 스카웃 동의를 받기도 했다. 나도 그런 과정을 거쳐 똑같은 이름의 중학교에서 똑같은 이름의 고등학교로 진학하게 되었다.

내가 살았던 지역은 바닷가에 위치한 도시라 수산고등학교가 있었다. 농촌 지역에 농업고등학교가 있는 것처럼 말이다. 예전에는 유명한 상업고등학교와 자웅을 겨룰 정도로 수산고등학교의 인기가 대단했었다고 했다. 그러나 큰 철강단지가 생기고 더 이상 수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증가하지 않으면서 자연스레 수산고등학교의 인기는 떨어지고 입학하는 학생들의 상태(?)는 떨어지기 시작했다.

언제부터인가 수산고등학교는 공고조차 가지 못하는 학생들이 마지막으로 문을 두드리는 곳이 되었고 불량학생, 문제학생들의 온상으로 여겨졌다.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때까지도 그랬다.

대학 입학 후 방학을 맞아 고향에 내려갔다. 아버지와 방파제에 낚시를 하러 가는데 야산 비탈에 새로운 학교 건물 같은 것이 보였다. 이정표를 보니 “해양과학 고등학교”였다. 마침 그때가 한창 과학고 같은 것들이 많이 생길 때라 좋은 학교가 생겼나보다 했는데 아니었다. 수산고등학교가 이전하면서 이름도 “해양과학 고등학교”로 바꾼 것이었다. 몸은 그대로인데 이름표만 바꿔 달고 새 옷으로 쫙 빼 입은 것이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동해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산비탈에 멋있는 신식 건물을 지어 놓고 “해양과학 고등학교”라는 명칭만 보면 좋은 학교라고 생각하기 안성맞춤이었다.

 

 

 

“용공고의 설립 취지는 매봉산과 금호산 아래에 맞닿아 있는 금호동과 옥수동, 신당동과 한남동에 있는 실업계 지원을 희망하는 학생들을 육성하는 데에 있었다. 하지만 그럴듯한 취지와 달리 돈과 빽이 없어 제대로 교육받을 수 없는 학생들이 사회에서 낙오되지 않고 조금이나마 제 구실을 하며 살아갈 수 있게 최소한 고등학교 졸업장이라도 쥐어주고자 존재하는 곳이라는 게 학교 안팎의 인식이었다.” (p.109)

“용공고 학생들도 다들 그렇게 알고 있었다.” (p.109)

 

옥수동이 실제로 존재하는 동네인지 몰랐다. 서울에 살고 있지 않으니 모를 수밖에……. 옥수동이 서울에서도 변두리에 속하는 지역이라는 것도 새롭게 알게 되었다. 작품의 배경이 되는 2000년대 중반에도 공고가 이름 뒤에 붙는 학교가 있었다는 것도 생소했다. 나는 수산고등학교가 해양과학 고등학교로 바뀐 것처럼 모조리 이름이 바뀐 줄 알았다. 어떤 이유로든 돈과 빽이 없어 제대로 된 교육을 제공받을 수 없는 학생들에게 졸업장이라도 쥐어주고자 존재하는 학교가 여전히 있다는 것도 놀라운 사실이다. 요즘 같이 대학 진학률이 높고 너도나도 석·박사를 하는 상황에서 말이다. 옥수동에 있는 옥수공고는 용공고로 이름을 바꾼다. 이무기가 멋지게 하늘로 승천하는 용이 되는 것처럼 이무기 같은 보잘 것 없는 동네에서 한강을 남으로 가로질러 하늘로 뛰어오를 학생들이 되라고 ‘용’ 공고라고 바꿨다. 실제로 그렇게 효과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2002년 여름, 옥수동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매봉산에 재개발 사업이 시작되면서 옥수공고 오른편 아래 산비탈에 자리했던 빈민가가 사라진 것이다.” (p.23)

 

옥수동 주변에는 빈민가가 자리했었다. 중심으로 다가갈 수 없는 기정사실화 된 패배예정자들이 모여드는 곳이 빈민가가 아니었을까 싶다. 하루 종일 바위에 계란 같은 유릿장 몸뚱어리를 부딪치다 산비탈을 기어, 기어 올라가 그저 두 다리 뻗고 기절해 버릴 수 있는 곳. 반복되는 실패와 실패로 점철된 삶의 구렁텅이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고 기어 들어가는 곳.

용공고의 오호장군 다섯 명 또한 그런 실패와 아픔으로 짓눌린 아이들이다. 재덕은 공사판에서 막노동 하던 아버지와 친 엄마가 죽었다. 성혁의 아버지는 D그룹 계열사 대표였지만 경기침체와 회사 부도로 자살했다. 규태는 전직 조폭 부두목으로 감옥 생활을 한 서른 살의 전과자다. 지선은 엄마가 죽은 후 고아가 되어 생활비를 유흥주점과 요정에서 일하며 벌고 있다. 현승은 그나마 경제적 사정은 좋고 용공고에서도 대학진학반에 다니지만 가정 상황이 좋지 않다.

 

 

“용공고 학생과 학부모 들은 매봉산을 떠나라는 교육청의 처사에 이루 말할 수 없는 분노와 참담함을 표출하였다. 반대로 서당동 주민들은 옛 용공고 부지에 그들의 소원인 초등학교를 세울 수 있다는 기쁨에 들 떠 있었다.” (p.76)

 

옥수동 오른 편에는 서당동이 생겼다. 행정구역마저 바꿀 정도로 권력과 힘이 있는 사람들이 이주해 왔다. 강북에 또 다른 강남을 만들고자 하는 장밋빛 청사진을 들고. 그들은 로도 1등 당첨금으로도 살 수 없는 아파트를 건설했고 옥수동을 포함해 매봉산 지역 학생들은 절대로 들어갈 수 없는 명문 사립고 중앙외고를 만들었다. 그 중앙외고에 진학할 아이들을 위해 중학교를 만들었고 이제는 초등학교까지 만들기 위해 용공고를 폐교시키고자 애쓴다.

용공고에 오호장군이 있었듯이 중앙외고에도 캡틴파이브가 있었다. 공부도 잘하고 집도 잘 살고 싸움까지 잘하는 정말 재수없는 아이들. 용공고의 오호장군이 주변 학교들과의 싸움에서 모조리 승리하며 매봉산 일대를 호령하는 최고의 써클이 되었지만 공부도 잘하고 집도 잘살고 싸움까지 잘하는 정말 재수없는 중앙외고의 캡틴파이브가 도전장을 내밀었다. 용공고가 없어지기까지 총4번을 싸우는데 모두 용공고의 오호장군이 이긴다.

 

 

“현실을 부정하진 않았다. 아니, 부정할 수가 없다. 이런 것들은 깡으로 해결되는 게 아니다. 하지만 싸움은 다르다. 적어도 싸움의 세계에서는 예금 빵빵한 체크카드가 없다고 낙오자가 되는 건 아니다.” (p.117)

“아버지가 청소부든 의원님이든, 사는 집이 궁궐이든 판잣집이든 상관없이 서로 어깨를 나란히 하는 친구가 될 수 있었다.” (p.118)

 

현실에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돈도 없고 빽도 없고 권력도 없는 용공고 아이들의 부모와 돈도 있고 빽도 있고 권력도 있는 중앙외고 아이들의 부모가 싸울 수 있을까? 절대로 그럴 수 없다. 싸움 자체가 안 된다. 하지만 학생들의 싸움세계에서는 부모가 얼마만큼 돈이 많고, 얼마만큼 권력을 가졌고, 얼마만큼 인맥이 탄탄한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교복만 입고 있으면 어깨 높이를 맞출 수 있었다. 자신들이 가진 힘과 돈으로 도시에서 버림받고 산에까지 쫓겨 온 빈민가를 단번에 없애고 문제아들의 집합소인 용공고를 단번에 폐교시킬 수 있고 행정구역쯤은 단번에 바꿀 수 있는 부모들의 자식들과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절대로 만날 수 없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그 순간부터 용공고와 중앙외고 학생들 사이에는 넘사벽이 생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계급이 구분된다.

그나마 부모도 없고 공부도 못하고 싸움만 할 줄 아는 오호장군은 고등학교 교문 나가기 전에 캡틴파이브를 무찔러야 한다. 작품에서는 오호장군 출신 아이들이 유명한 배우가 되고, 유명한 정비사가 되고, 유명한 일식 요릿집 사장이 되었지만 현실에서는 흔하지 않은 일이다. 현실에서는 결국 캡틴파이브가 좋은 대학에 가고 부모덕에 외국에 유학도 가고 그런 스펙들로 좋은 회사에 취직도 한다. 그 정도 스펙이면 결혼도 잘 할 수 있고 나중에 그들의 자식들도 그들이 그랬던 것처럼 유명한 사립학교에 넣으면 그만이다. 그들이 가진 기득권은 대를 이어 계속된다. 소설에서처럼 ‘개천에서 용나는’ 일은 이제 현실에서는 일어나지 않는다. 로또 1등에 당첨되어도 살 수 없는 아파트에 살고 있는 사람들과 어떻게 싸워서 이길 수 있다는 말인지. 소설은 소설일 뿐이다.

작가는 당선소감에서 여타 다른 성장소설들처럼 성숙한 내면을 가꾸면 뭐든지 할 수 있다는 따위의 말을 하고 싶지 않고 현실에서 분명하게 존재하는 불평등과 구조적 모순을 낱낱이 밝혀내고자 했다는데 오호장군의 성공스토리가 작가의 당선소감을 무색케 하는 듯하다.

작품과 같이 비록 공부 못하고 문제만 일으키는 학생으로 치부되는 실업계 학생들이 사회에서 성공하고 나름대로 사회 구성원으로 역할을 잘 감당하고 있는 실제 사례가 많으면 얼마나 좋으랴마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 사실이다. 나도 알고 당신도 안다.

 

 

“이들은 여타 서클들과는 다른 행보를 걸었다. 삥을 뜯지도 않았고 지역 조직폭력배의 스카우트도 단호히 거절하였다. 다른 서클들이 공격해 오거나 용공고 학생들을 괴롭히는 놈들이 나타날 때만 움직였다.” (p.32)

“용공고 학생들과 같은 실업계 고교 학생들의 사회적 양극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교육 정책 마련이 시급한 때다.” (p.81)

 

용공고의 오호장군들은 양아치 같은 학생들은 아니었다. 삥을 뜯지도, 조직폭력배가 되지도, 사회악인 범죄를 일으키지도 않았다. 다들 무시하고 손가락질 하는 같은 학교 학생들을 지켜주고 오호장군의 위용에 도전하는 자들에게만 움직였다. 만화 같은 이야기다. 얼마 전 뉴스에서 담배피우지 말라는 어른을 두드려 팬 중학생들의 얘기를 들었다. 지금 아이들은 오호장군처럼 만화 같은 정의와 객기를 가진 캐릭터가 아니다. 아이들이 이렇게 무서워 진 이유를 자꾸만 문제제기하고 까발려야 한다. 구조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근본적인 해답은 찾을 수 없다. 실업계 고등학교를 아무리 특성화 시키고 졸업도 하기 전에 취업을 시켜준다 하더라도 결국 그들이 진출할 수 있는 사회의 단계는 한정되어 있다. 결코 열어젖힐 수 없는 분명한 한계가 직면했을 때 이들은 가을 낙엽처럼 우수수 떨어진다.

 

제롬, 아이작, 토비, 제시카, 마이크는 외고에 다닌다는 이유로 외국이름으로 불린다. 그들의 이름만큼 번드르르하게 살고 있을 것이다. 소설 속에서는 대학생이겠다. 외국에 있거나 힘 있는 부모덕에 군대를 면제 받았거나, 아니면 편한 곳에서 근무하고 있거나.

오호장군은 다들 성공했다. 하지만 캡틴파이브만큼 안정적일까? 그렇지 않다고 본다. 언제든 떨어질 수 있다.

 

프로야구 무대를 호령하던 해태 타이거스가 하루아침에 기아 타이거스가 된 것처럼 말이다. 빨간색 상의와 까만색 하의를 입은 강렬한 해태 타이거스 선수들이 기아 타이거스의 맹숭맹숭한 하얀 바탕에 빨간 색 글씨가 적힌 유니폼으로 갈아입은 후 마치 이빨 빠진 호랑이처럼 용맹함을 잃어버렸던 것처럼 말이다.

 

 

갑자기 없어진 해태 타이거스와 동대문운동장과 전국에 산재하던 공업고등학교, 농업고등학교, 상업고등학교, 수산고등학교를 추억하며…….

최소한 기억에서만큼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그래서 기억되고 기억되는 오호장군이기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