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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티 라이프 - 흙을 만지다 사랑에 눈뜨다
크리스틴 킴볼 지음, 이경아 옮김 / 올(사피엔스21) / 2013년 3월
평점 :
품절
마크와 결혼 해 시골 농장에 안주인이 된 크리스틴은 뉴요커다. 누구나 한 번쯤은 가보고 싶어 하는 곳에서 나고 자란 토박이다. 많은 젊은이들의 로망이기도 한 프리랜서 작가일을 하다가 마크를 만나 180도 다른 삶을 살게 된다.
결혼식도 올리지 않은 채 궁벽진 외딴 마을에 위치한 에식스 농장에 자리를 잡는다. 일단 농장을 농장이라 불리울 수 있을 만큼 모양을 갖추는 것이 급선무였다. 계획을 짜고 가축을 사들이고 각종 기구와 도구를 사기도 하고 구하기도 하고 씨앗을 뿌리고 가꾸고 거두는 일을 한다.
이 책 제목인「더티 라이프」는 더러운 삶과 땅을 가꾸는 삶이라는 중의적 의미를 내포한 제목이다. 원래 농장을 꿈꾸고 그런 삶을 살아 온 마크와는 달리 크리스틴은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일이고 한 번도 꿈꾸지 않은 삶이었다. 둘 중 크리스틴에게는 이제까지 누리고 지녔던 모든 것을 던져버리는 것을 요구하는 삶이다.
나는 뜬금없는 생각이 자꾸 떠올랐다. 흔히 남자는 10대부터 70대 80대까지 여자의 외모만 본다는 우스개가 있는데 전혀 우스개가 아니다. 사실이다. ‘못 생긴 여자와는 살아도 요리 못하는 여자와는 산다.’라는 말도 있지만 요리를 아무리 못해도 너~무 예쁘면 매일 시켜먹는 수고와 돈을 기꺼이 지불하는 것이 남자다. 하지만 여자는 많이 다르다. 요즘 젊은 여자들은 워낙 조건을 따지면서 결혼 상대자를 고르기 때문에 항간에는 그런 여자들을 비꼬는 말도 떠돌기는 하지만 적어도 내가 주위에서 본 여자들은 남자들보다 훨씬 외모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아니, 아예 외모는 결혼 상대자를 판단하는 많은 기준 중 가장 아래 단계일지도 모른다. 대학원까지 나와서 미국에서 공부하고 현지 회사에서 일하다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셔서 모든 미국 생활을 정리하고 한국에서 살고 있는 여자가 전문대를 졸업한 비정규직 남자, 게다가 자신보다 키도 작은 남자와 결혼하는 것을 가까이에서 지켜봤다. 여자의 어머니와 가족 친지는 물론 친구, 동료, 선·후배까지 모두 만류했다. 결정적으로는 여자는 3대째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데 남자는 교회에 다니지 않을뿐더러 남자 집은 독실한 불자다. 결혼을 하겠다고 마음먹고 실제로 결혼을 하기까지 영화를 한 10편을 찍을 만큼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결국 결혼해서 지금은 아기 낳고 잘 살고 있다. 가까이에서 이 일을 겪은 후 정말 100% 동의할 수 있었다.
‘여자는 남자의 외모를 보지 않는다.’
이 책의 저자 크리스틴은 지금의 남편인 마크의 외모에 대해 자세히 기술하지 않았다. 키가 무척 크고 순수하게 생겼으며 늘 농장 일에 매달려 있어 후줄근한 옷차림에 부스스한 외모 정도. 하지만 인터뷰 상대자로 만난 그와 사랑에 빠지고 뉴요커를 집어던진 채 시골 농장으로 간다. 크리스틴도 마크의 외모는 물론 조건도 보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우리는 일단 농장에서 추수를 마치고 결혼식을 올리기로 약속했다.”
“우리는 우편으로 도착한 달력에 내년에 해야 할 작업을 체크하며 하루 종일 즐거운 흥분에 휩싸여 지냈다.”
“말을 장만했으니 말이 끌 농기구가 필요했다.”
“우리는 사기도 하고 얻기도 하면서 농기구를 갖추어나갔다.”
“2월이 되자 씨앗이 도착했다. 농장 하나가 상자 하나에 담겨 있었다.”
앞서 말했지만 결혼도 하지 않은 채 한 번도 해보지 않은 농장일을 한다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다. 본가 부모님께서 재작년부터 밭을 가꾸고 계신다. 아는 분의 소개로 밭을 무상으로 임대해 가꾸시는데 너무 좋아하신다. 두 분 다 충청도 시골 출신이시고 이제는 퇴임하셔서 시간적 여유도 많아져 운동도 할 겸 가끔 내려오는 자식들에게 두둑하게 챙겨 줄 겸. 그런데 이 밭 일구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한 번씩 전화 통화하면 밤이 될 때까지 저녁도 드시지 않고 밭에 계신다고 하면 그만 하시고 밥이나 드시라고 채근할 때가 많았는데 본가에 내려가 밭일을 도와드릴 때면 왜 그렇게 두 분이 밭에 매달려 계실 수밖에 없었는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농장은 우리를 쉴 새 없이 움직이게 만드는 피조물이다. 농장에서는 절대 끝이라고 말할 수 없다. 강물처럼 밀려드는 일감의 흐름은 멎을 기색이 보이지 않는다.” (p.191)
물론 마크 부부의 에식스 농장과도 비교도 할 수 없이 작은 밭이었지만 할 일이 너무 많았다. 심고 캐고 다듬고 따고 뿌리고 거두고 치우고 하는 일이 끝이 없었다. 허리를 숙인 채 한참을 하고 한 번 시원하게 허리를 펼라치면 바로 다른 일거리가 떨어졌다. 밭일이 없을 시기에 내려가서 이것저것 얻어 올 때는 그렇게 고생하셔서 거두신 것들인지 몰랐다. 몇 번 밭일을 도와드리고 나니 싣고 온 것들을 쉽게 먹을 수 없었다.
마크 부부도 계절을 몇 번 지내며 책에서 다 담지 못한 많은 일들을 겪었을 것이다. 농사일과 농장일이라는 게 단순히 일만 잘해서 수확이 잘 나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상하지 못한 기후나 날씨로 인해, 때로는 가축의 병으로 인한 불가항력적인 불안 요소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크리스틴이 뉴요커라는 멋진 옷을 집어 던지고 아무런 조건을 보지 않고 마크를 선택한 것처럼 많은 시행착오와 어려움도 그들의 열정을 식게 만들지는 못했다.
책에서는 크리스틴의 농장일에 대한 묘사가 가장 재미있게 읽혔다. 작지만 본가 텃밭 일을 조금 해보고 방학 때마다 시골 할머니 댁에 가서 농사일을 도왔던 기억 때문이지 눈에 그려지는 듯 했다. 책에서처럼 직접 도축을 하거나 말을 길러보지는 않았지만 젖소에 대한 묘사와 작물에 대한 묘사는 정말 눈앞에 펼쳐지는 듯 했다. 뉴요커 일 때도 꽤 유명한 프리랜서 작가였음이 틀림없는 듯 했다.
이 책을 읽는 대부분의 독자들이 도시 출신이기 때문에 자칫 자세한 묘사와 설명은 지루할 수도 있는데 진짜 그림책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전혀 지루하지 않고 농장에서 겪는 좌충우돌이 만화 같기도 하고 뜬금없는 긴장감을 자아내기도 했다.
“결혼식 전날까지 우리는 갓 철거한 별채 잔해를 치우고, 나뭇조각들을 모아 태우고, 자석으로 못을 찾아다니느라 정신없이 바빴다.” (p.310)
“내가 떨쳐내려는 것은 마크도, 농장도, 결혼도 아니었다. 바로 불완전한 나 자신이었다. 내가 아무리 도망친다 한들 불완전한 나 자신은 영원히 나를 따라다닐 것이 분명했다.” (p.324)
결혼식 전날까지도 농장일을 해야 했고 두 사람의 결혼을 축하해주기 위해 모인 하객들에게도 농장일을 시켜야 했다. 앞서도 말했지만 농장일이라는 게 절대로 끝이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결혼 전에도 결혼 후에도 마크 부부는 여전히 투닥거렸다. 작은 의견 대립에서부터 농장 전체를 운영하는 것에 대한 큰 의견 대립에 이르기까지 많이 싸웠다. 크리스틴이 단번에 180도로 휙 몸을 돌려 뉴욕에서 시골 에식스로 옮겨 왔지만 30년 넘게 살아 온 습관과 몸에 그대로 녹아 있는 진짜 속마음까지 마크와 함께 하는 농장에 자리 잡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렸다. 분명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마크 부부의 에식스 농장에서는 공동체지원농법‘CSA(Community Supported Agriculture)’이 농장전체의 운영방법이었다. 이것은 쉽게 말해 농장과 소비자간 직거래라 볼 수 있는데 구성이 협동조합 형태다. 회원들이 계절이 시작될 때 농장의 지분을 미리 구입하고 매주 농장의 생산물을 분배받는 방식이다. 책에서는 2000달러를 웃도는 돈을 미리 농장에 지급한다고 하는데 결코 저렴한 가격은 아니다. 하지만 시중에 판매되는 각종 유기농 제품의 가격을 생각하면 비싼 것도 아니다. 중간유통업자와 시장을 경유하지 않고 곧장 최종 소비자와 거래 할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이기 때문에 중간 마진을 떼이지 않아도 되고 공급하는 농장 입장에서도 불필요한 비용을 지급하지 않아도 되는 방식이다. 1980년대 일본에서 처음 도입되었고 유럽을 거쳐 미국으로 건너갔다고 책에서는 설명하고 있는데 실제로 한국에서도 이런 방식이 있는지 궁금했다. 이제 친구들을 만나면 우리의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그 중 하나가 시골로 내려가 함께 살자는 것이다. 아직은 머릿속에서만 꿈꾸고 있는 것인데 이 책을 읽고 좋은 방법을 하나 배웠다. 만약 에식스 농장같이 CSA농법을 기반으로 해서 안정적인 회원만 모을 수 있다면 좋을 것 같았다. 요즘 협동조합 형태의 각종 사업이 핫아이템으로 부상하고 있어서 더욱 관심이 가는 부분이기도 했다.
그냥 머릿속에서만 맴돌다가 친구들과 이야기 나누는 것으로 끝날 수도 있고 실제로 시골로 내려가 CSA농법으로 운영할 농장을 만들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우리는 회원이 원하는 것은 뭐든 키우고 싶었다. 온갖 육류와 계란, 우유를 비롯한 유제품, 곡류와 밀가루, 채소, 과일, 적어도 한 가지 이상의 감미료와 같은 먹을거리에서 시작해서 장작이나 건축 자재, 운동, 휴양처럼 궁극적으로 농장이 공급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소비자에게 제공하자는 꿈을 품었다.” (p.76)
“우리는 비록 소규모로 경작을 했지만 자신이 먹는 음식이 어떻게 재배되었는지 궁금해 하고, 호르몬제와 항생제를 쓰지 않는 식재료를 원하고, 어떻게 재배되고 키워지는지 직접 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 (p.208)
농장 하나가 살아있는 유기체와 같이 하나의 커뮤니티가 되는 것이 참 신선했다. 일부러 농장까지 찾아와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가져가고 그곳에서 만난 회원들과 교제를 나누고 관계를 형성해 나가는 시도가 한국에서도 가능할지 궁금했다. 아예 따로 공동체를 만들어 자신들끼리만 모여 사는 형태가 아니라 완전히 열린 형태여야 할 것이다. 제품을 공급하고 그 제품을 사가는 소비자의 관계에서 그치지 않고 에식스 농장의 경우처럼 매주 방문해 그들이 원하고 희망하는 제품이 어떻게 자라고 있고 어떻게 재배되고 있는지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보고 직접 그 모든 과정을 주관하는 공급자인 농장 사람들과 이야기 나누고 의견을 교환하는 그런 삶의 유대. 그런 삶을 함께 이어가는 시도와 형태가 가능해야 한다.
성격 급한 친구 한 명은 벌써 가까운 인근 시골 지역의 땅값 시세를 알아보러 다녔는데 땅값이 너무 비싸다고 했다. 땅을 사고 집을 지으려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돈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마크 부부처럼 무상으로 땅을 대여해주는 귀인을 만나지 않는 이상 수년 내에 이런 시도를 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될 것으로 보인다. 생각만 하는 거지 뭐.
크리스틴이 이 책에서 아주 재미있고 매력적으로 묘사한 농장일이라는 것이 결코 쉽지 않고 굉장히 어려운 일이겠지만 한 번 해보고 싶기는 하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