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수동 타이거스 - 2013년 제1회 한국경제 청년신춘문예 당선작
최지운 지음 / 민음사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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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준화 고등학교를 다녔다. 중학교에 들어가자마자 선생님과 부모님으로부터 어떤 학교에 가라는 압력을 받았다. 인문계 고등학교를 가지 못하면 실업계 고등학교를 가야 했다. 그때는 고등학교 입학시험도 꽤 비중이 있었다. 200점 만점(체력장 20점 포함) 180점 이상을 맞아야 그나마 서울 지역 대학에 갈 가능성이 있는 고등학교에 입학 할 수 있었다. 지역에 큰 철강공단이 있어 상위 2개 정도 공고는 어설픈 인문계 고등학교 보다 입학 커트라인이 높기도 했다.

공립 고등학교 1곳을 제외하고 사학 재단이 운영하는 학교는 대부분 중학교와 고등학교가 한데 붙어 있었다. 당연히 중학교 때부터 공부 좀 한다는 아이들을 똑같은 이름의 고등학교에 진학시키기 위해 이런저런 유혹(?)과 조건을 걸어 미리 스카웃 동의를 받기도 했다. 나도 그런 과정을 거쳐 똑같은 이름의 중학교에서 똑같은 이름의 고등학교로 진학하게 되었다.

내가 살았던 지역은 바닷가에 위치한 도시라 수산고등학교가 있었다. 농촌 지역에 농업고등학교가 있는 것처럼 말이다. 예전에는 유명한 상업고등학교와 자웅을 겨룰 정도로 수산고등학교의 인기가 대단했었다고 했다. 그러나 큰 철강단지가 생기고 더 이상 수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증가하지 않으면서 자연스레 수산고등학교의 인기는 떨어지고 입학하는 학생들의 상태(?)는 떨어지기 시작했다.

언제부터인가 수산고등학교는 공고조차 가지 못하는 학생들이 마지막으로 문을 두드리는 곳이 되었고 불량학생, 문제학생들의 온상으로 여겨졌다.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때까지도 그랬다.

대학 입학 후 방학을 맞아 고향에 내려갔다. 아버지와 방파제에 낚시를 하러 가는데 야산 비탈에 새로운 학교 건물 같은 것이 보였다. 이정표를 보니 “해양과학 고등학교”였다. 마침 그때가 한창 과학고 같은 것들이 많이 생길 때라 좋은 학교가 생겼나보다 했는데 아니었다. 수산고등학교가 이전하면서 이름도 “해양과학 고등학교”로 바꾼 것이었다. 몸은 그대로인데 이름표만 바꿔 달고 새 옷으로 쫙 빼 입은 것이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동해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산비탈에 멋있는 신식 건물을 지어 놓고 “해양과학 고등학교”라는 명칭만 보면 좋은 학교라고 생각하기 안성맞춤이었다.

 

 

 

“용공고의 설립 취지는 매봉산과 금호산 아래에 맞닿아 있는 금호동과 옥수동, 신당동과 한남동에 있는 실업계 지원을 희망하는 학생들을 육성하는 데에 있었다. 하지만 그럴듯한 취지와 달리 돈과 빽이 없어 제대로 교육받을 수 없는 학생들이 사회에서 낙오되지 않고 조금이나마 제 구실을 하며 살아갈 수 있게 최소한 고등학교 졸업장이라도 쥐어주고자 존재하는 곳이라는 게 학교 안팎의 인식이었다.” (p.109)

“용공고 학생들도 다들 그렇게 알고 있었다.” (p.109)

 

옥수동이 실제로 존재하는 동네인지 몰랐다. 서울에 살고 있지 않으니 모를 수밖에……. 옥수동이 서울에서도 변두리에 속하는 지역이라는 것도 새롭게 알게 되었다. 작품의 배경이 되는 2000년대 중반에도 공고가 이름 뒤에 붙는 학교가 있었다는 것도 생소했다. 나는 수산고등학교가 해양과학 고등학교로 바뀐 것처럼 모조리 이름이 바뀐 줄 알았다. 어떤 이유로든 돈과 빽이 없어 제대로 된 교육을 제공받을 수 없는 학생들에게 졸업장이라도 쥐어주고자 존재하는 학교가 여전히 있다는 것도 놀라운 사실이다. 요즘 같이 대학 진학률이 높고 너도나도 석·박사를 하는 상황에서 말이다. 옥수동에 있는 옥수공고는 용공고로 이름을 바꾼다. 이무기가 멋지게 하늘로 승천하는 용이 되는 것처럼 이무기 같은 보잘 것 없는 동네에서 한강을 남으로 가로질러 하늘로 뛰어오를 학생들이 되라고 ‘용’ 공고라고 바꿨다. 실제로 그렇게 효과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2002년 여름, 옥수동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매봉산에 재개발 사업이 시작되면서 옥수공고 오른편 아래 산비탈에 자리했던 빈민가가 사라진 것이다.” (p.23)

 

옥수동 주변에는 빈민가가 자리했었다. 중심으로 다가갈 수 없는 기정사실화 된 패배예정자들이 모여드는 곳이 빈민가가 아니었을까 싶다. 하루 종일 바위에 계란 같은 유릿장 몸뚱어리를 부딪치다 산비탈을 기어, 기어 올라가 그저 두 다리 뻗고 기절해 버릴 수 있는 곳. 반복되는 실패와 실패로 점철된 삶의 구렁텅이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고 기어 들어가는 곳.

용공고의 오호장군 다섯 명 또한 그런 실패와 아픔으로 짓눌린 아이들이다. 재덕은 공사판에서 막노동 하던 아버지와 친 엄마가 죽었다. 성혁의 아버지는 D그룹 계열사 대표였지만 경기침체와 회사 부도로 자살했다. 규태는 전직 조폭 부두목으로 감옥 생활을 한 서른 살의 전과자다. 지선은 엄마가 죽은 후 고아가 되어 생활비를 유흥주점과 요정에서 일하며 벌고 있다. 현승은 그나마 경제적 사정은 좋고 용공고에서도 대학진학반에 다니지만 가정 상황이 좋지 않다.

 

 

“용공고 학생과 학부모 들은 매봉산을 떠나라는 교육청의 처사에 이루 말할 수 없는 분노와 참담함을 표출하였다. 반대로 서당동 주민들은 옛 용공고 부지에 그들의 소원인 초등학교를 세울 수 있다는 기쁨에 들 떠 있었다.” (p.76)

 

옥수동 오른 편에는 서당동이 생겼다. 행정구역마저 바꿀 정도로 권력과 힘이 있는 사람들이 이주해 왔다. 강북에 또 다른 강남을 만들고자 하는 장밋빛 청사진을 들고. 그들은 로도 1등 당첨금으로도 살 수 없는 아파트를 건설했고 옥수동을 포함해 매봉산 지역 학생들은 절대로 들어갈 수 없는 명문 사립고 중앙외고를 만들었다. 그 중앙외고에 진학할 아이들을 위해 중학교를 만들었고 이제는 초등학교까지 만들기 위해 용공고를 폐교시키고자 애쓴다.

용공고에 오호장군이 있었듯이 중앙외고에도 캡틴파이브가 있었다. 공부도 잘하고 집도 잘 살고 싸움까지 잘하는 정말 재수없는 아이들. 용공고의 오호장군이 주변 학교들과의 싸움에서 모조리 승리하며 매봉산 일대를 호령하는 최고의 써클이 되었지만 공부도 잘하고 집도 잘살고 싸움까지 잘하는 정말 재수없는 중앙외고의 캡틴파이브가 도전장을 내밀었다. 용공고가 없어지기까지 총4번을 싸우는데 모두 용공고의 오호장군이 이긴다.

 

 

“현실을 부정하진 않았다. 아니, 부정할 수가 없다. 이런 것들은 깡으로 해결되는 게 아니다. 하지만 싸움은 다르다. 적어도 싸움의 세계에서는 예금 빵빵한 체크카드가 없다고 낙오자가 되는 건 아니다.” (p.117)

“아버지가 청소부든 의원님이든, 사는 집이 궁궐이든 판잣집이든 상관없이 서로 어깨를 나란히 하는 친구가 될 수 있었다.” (p.118)

 

현실에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돈도 없고 빽도 없고 권력도 없는 용공고 아이들의 부모와 돈도 있고 빽도 있고 권력도 있는 중앙외고 아이들의 부모가 싸울 수 있을까? 절대로 그럴 수 없다. 싸움 자체가 안 된다. 하지만 학생들의 싸움세계에서는 부모가 얼마만큼 돈이 많고, 얼마만큼 권력을 가졌고, 얼마만큼 인맥이 탄탄한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교복만 입고 있으면 어깨 높이를 맞출 수 있었다. 자신들이 가진 힘과 돈으로 도시에서 버림받고 산에까지 쫓겨 온 빈민가를 단번에 없애고 문제아들의 집합소인 용공고를 단번에 폐교시킬 수 있고 행정구역쯤은 단번에 바꿀 수 있는 부모들의 자식들과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절대로 만날 수 없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그 순간부터 용공고와 중앙외고 학생들 사이에는 넘사벽이 생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계급이 구분된다.

그나마 부모도 없고 공부도 못하고 싸움만 할 줄 아는 오호장군은 고등학교 교문 나가기 전에 캡틴파이브를 무찔러야 한다. 작품에서는 오호장군 출신 아이들이 유명한 배우가 되고, 유명한 정비사가 되고, 유명한 일식 요릿집 사장이 되었지만 현실에서는 흔하지 않은 일이다. 현실에서는 결국 캡틴파이브가 좋은 대학에 가고 부모덕에 외국에 유학도 가고 그런 스펙들로 좋은 회사에 취직도 한다. 그 정도 스펙이면 결혼도 잘 할 수 있고 나중에 그들의 자식들도 그들이 그랬던 것처럼 유명한 사립학교에 넣으면 그만이다. 그들이 가진 기득권은 대를 이어 계속된다. 소설에서처럼 ‘개천에서 용나는’ 일은 이제 현실에서는 일어나지 않는다. 로또 1등에 당첨되어도 살 수 없는 아파트에 살고 있는 사람들과 어떻게 싸워서 이길 수 있다는 말인지. 소설은 소설일 뿐이다.

작가는 당선소감에서 여타 다른 성장소설들처럼 성숙한 내면을 가꾸면 뭐든지 할 수 있다는 따위의 말을 하고 싶지 않고 현실에서 분명하게 존재하는 불평등과 구조적 모순을 낱낱이 밝혀내고자 했다는데 오호장군의 성공스토리가 작가의 당선소감을 무색케 하는 듯하다.

작품과 같이 비록 공부 못하고 문제만 일으키는 학생으로 치부되는 실업계 학생들이 사회에서 성공하고 나름대로 사회 구성원으로 역할을 잘 감당하고 있는 실제 사례가 많으면 얼마나 좋으랴마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 사실이다. 나도 알고 당신도 안다.

 

 

“이들은 여타 서클들과는 다른 행보를 걸었다. 삥을 뜯지도 않았고 지역 조직폭력배의 스카우트도 단호히 거절하였다. 다른 서클들이 공격해 오거나 용공고 학생들을 괴롭히는 놈들이 나타날 때만 움직였다.” (p.32)

“용공고 학생들과 같은 실업계 고교 학생들의 사회적 양극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교육 정책 마련이 시급한 때다.” (p.81)

 

용공고의 오호장군들은 양아치 같은 학생들은 아니었다. 삥을 뜯지도, 조직폭력배가 되지도, 사회악인 범죄를 일으키지도 않았다. 다들 무시하고 손가락질 하는 같은 학교 학생들을 지켜주고 오호장군의 위용에 도전하는 자들에게만 움직였다. 만화 같은 이야기다. 얼마 전 뉴스에서 담배피우지 말라는 어른을 두드려 팬 중학생들의 얘기를 들었다. 지금 아이들은 오호장군처럼 만화 같은 정의와 객기를 가진 캐릭터가 아니다. 아이들이 이렇게 무서워 진 이유를 자꾸만 문제제기하고 까발려야 한다. 구조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근본적인 해답은 찾을 수 없다. 실업계 고등학교를 아무리 특성화 시키고 졸업도 하기 전에 취업을 시켜준다 하더라도 결국 그들이 진출할 수 있는 사회의 단계는 한정되어 있다. 결코 열어젖힐 수 없는 분명한 한계가 직면했을 때 이들은 가을 낙엽처럼 우수수 떨어진다.

 

제롬, 아이작, 토비, 제시카, 마이크는 외고에 다닌다는 이유로 외국이름으로 불린다. 그들의 이름만큼 번드르르하게 살고 있을 것이다. 소설 속에서는 대학생이겠다. 외국에 있거나 힘 있는 부모덕에 군대를 면제 받았거나, 아니면 편한 곳에서 근무하고 있거나.

오호장군은 다들 성공했다. 하지만 캡틴파이브만큼 안정적일까? 그렇지 않다고 본다. 언제든 떨어질 수 있다.

 

프로야구 무대를 호령하던 해태 타이거스가 하루아침에 기아 타이거스가 된 것처럼 말이다. 빨간색 상의와 까만색 하의를 입은 강렬한 해태 타이거스 선수들이 기아 타이거스의 맹숭맹숭한 하얀 바탕에 빨간 색 글씨가 적힌 유니폼으로 갈아입은 후 마치 이빨 빠진 호랑이처럼 용맹함을 잃어버렸던 것처럼 말이다.

 

 

갑자기 없어진 해태 타이거스와 동대문운동장과 전국에 산재하던 공업고등학교, 농업고등학교, 상업고등학교, 수산고등학교를 추억하며…….

최소한 기억에서만큼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그래서 기억되고 기억되는 오호장군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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