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의 탄생 - 기획이 곧 예술이다
소홍삼 지음 / 미래의창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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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부터 무대에 서는 것을 좋아 했다. 아버지의 가무를 이어 받은 듯하다. 지금은 없겠지만 초등학교 시절 학예회 같은 것을 했는데 매년 나갔었다. 지금도 기억에 남는 것은 3인조 댄싱팀을 만들어 현진영과 와와의 춤을 따라 하기도 했었고 김민우의 사랑일뿐야를 부르기도 했었다. 초등학교 소풍과 수학여행 사진은 죄다 까부는 것투성이다. 사람들은 내게 무대 체질이라고 했다. 첫인상은 다소 무서워 보이지만 끼가 많고 붙임성이 좋았다. 남을 웃기는 게 유일한 낙이던 시절도 있었다. 누가 나보다 웃기고 있나 두리번거리다가 멀리서 웃는 소리가 들리면 얼른 달려가 끼를 부리기도(?)했다. 실제로 가까운 친구 몇은 연극영화과에 진학하라는 진지한 권유를 하기도 했었다. 어떤 사람들은 무대공포증, 마이크공포증이 있다고 하는데 나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나는 무대에 올라가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이야기 하는 게 좋고 나로 인해 웃는 게 좋다. 악기도 열렬히 배우던 때가 있어서 그쪽으로 나가볼까 고민도 했었다. (처음 드럼을 배우게 된 계기는 드럼을 치면 여자애들한테 인기가 좋았기 때문이다ㅎㅎ)

내가 서 본 무대 중 가장 크고 기억에 남는 무대는 두 군데였다. 하나는 고등학교 때 중창대회에 시대표로 나간 무대였고 또 하나는 대학 때 300명 정도 모인 연합수련회에서 드럼을 친 무대였다.

지금은 많이 점잖아(?) 졌다. 나이가 든 탓도 있고, 결혼을 한 탓도 있고, 힘이 달린 탓도 있을 것이다. 확실한 것은 분명히 어린 시절 보다 무대에 서는 일이 적고 서고 싶은 마음도 많이 줄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내게 무대는 로망이다. 꼭 많은 사람들을 앞에 둔 무대만이 아니라 내가 가진 능력과 소질을 가지고 설 수 있는 무대가 있다면 언제든지 서고 싶다. 무대 위에서 뭘 할지는 사실 중요하지 않다. 무대에 서는 것이 힘들지 않다는 것이 중요하다. 어쨌든 나는 무대체질이니까.

살다보면 언젠가 무대에 설 수 있는 날이 올 것 같다. 그게 언제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 책 「무대의 탄생」은 무대를 만드는 사람들과 그 무대를 통해 메시지를 얻는 사람들, 그 무대를 분석하고 해석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각 사례별로 기획배경 및 추진 과정, 에피소드 및 비하인드 스토리, 홍보마케팅 실행, 성공·실패원인 분석 등을 통해 예술 경영현장에서 유용하게 참고할 수 있는 자료가 되도록 하였다.” (p.7)

 

지난 10여 년 동안 한국 사회에서 선 무대들 중 몇 가지 무대에 대한 기획배경에서부터 성공과 실패에 대한 분석에 이르기까지 읽기 쉽게 풀어내고 있다. 앞서도 말했지만 무대에 서는 것을 좋아했던 학창시절을 뒤로 한 채 이제는 생업과 나이에 묶여 제대로 된 무대에 설 일이 없는 내게 이 책은 못 다 이룬 꿈을 대신 이룬 사람들의 기록을 보는 것 같기도 했다.

무대를 좋아하지만 실제로 무대를 찾아다닌 것은 별로 즐기지 않는다. 결혼 전에는 뮤지컬 마니아였던 아내가 결혼 후에는 나와는 한 번도 뮤지컬을 보러 가지 않았다. 나는 뮤지컬을 별로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시끄럽고 분잡스러우며 집중이 잘 되지 않고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너무 비싸다는 것이었다. 영화 한 편 보거나 책 한 권사거나 CD 한 장 사는 돈의 몇 배나 되는 돈을 지불해야 객석 저 끄트머리에 자리를 잡을 수 있다. 뮤지컬 배우들이 조금 성공하면 TV드라마에 많이 나온다. 아무리 뮤지컬을 해도 스타가 될 수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궁금했다. 비싼 관람료를 받고 연일 매진되는 뮤지컬 공연이 엄청나게 많은 데 왜 늘 뮤지컬 배우들은 곤궁한 삶을 살고 있는지 말이다. 대형 기획사에서 독점을 하고 있거나 스타마케팅에만 치중하고 있거나 대관료가 너무 비싸거나 등등 혼자서 생각을 해보기도 했는데 이 책을 읽으며 정확한 이유를 알게 되었다.

 

 

뮤지컬

“반면 공연계 일각에선 현실적 수용론을 제기하는 ‘주화파’도 없지 않았다. 이들은 그동안 한국 뮤지컬계가 과다경쟁으로 로열티를 올리고, 지나치게 스타마케팅에 의존해 제작비가 상승하고, 티켓 가격에 거품이 발생하는 등 문제점이 많다는 입장” (p.166)

“창작뮤지컬은 초기 제작비가 많이 드는 반면에 성공확률은 매우 낮다. 그러다 보니 수입 비용이 막대하게 들더라도 작품의 인지도나 완성도가 보장되는 외국뮤지컬을 선호하게 되는 것이다.” (p.285)

 

2000년대 중반 일본의 대형 기획사 극단 시키가 라이언킹을 가지고 국내로 진출했는데 이것을 두고 당시 엄청난 반대가 있었다고 한다. 가뜩이나 열악한 국내 뮤지컬 시장에서 일본의 대형 기획사에게 앞마당을 내줬다는 아우성에서부터 문화에 대한 일본 식민지화의 시작이라는 분노에 이르기까지 대단했었다고 한다. 그런데 극단 시키의 진출을 현실적으로 찬성하는 부류도 있었다고 한다. 당시 한국 뮤지컬계는 1세대 아이돌 출신 연예인들의 스타마케팅 전략으로 엄청난 뮤지컬 인기를 구가하던 때였고 그로 인해 뮤지컬 시장의 파이 자체가 과다 경쟁 구도로 들어가던 때였다. 당장 우리 편끼리 싸워도 ‘너 죽고 나 죽고’식의 무대포 경쟁이 되어 버리는데 엄청난 힘을 가진 극단 시키 앞에서는 풍전등화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극단 시키는 오랜 노하우와 세련된 연출, 무대 장치에도 불구하고 당시 국내 뮤지컬 관람료 20∼30% 수준으로 티켓을 판매 했다. 극단 시키 측은 이미 한국 뮤지컬 시장을 파악한 것이었다. 저자가 책에서 지적하는 것처럼 지나친 과다경쟁과 스타마케팅으로 티켓 가격에 거품이 잔뜩 들어 있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뮤지컬 질은 더 높지만 티켓은 저렴한 마케팅 전략을 들고 들어 온 것이었다.

지금도 이러한 구조는 크게 변화되지 않은 것 같다. 여전히 창작뮤지컬보다는 라이선스 뮤지컬이 주류를 이루고 있고 몇몇 스타 배우들은 국내 무대에 오르는 뮤지컬의 대부분을 돌아가면서 하고 있다. 이 작품에서도 이 배우가 주연하고 저 작품에서도 저 배우가 주연을 한다. 여전히 뮤지컬 배우들은 영화나 드라마에 진출한다. 더 돈이 되기 때문이다.

뮤지컬이라는 장르를 접근하는 시각부터 애초에 틀린 것이 가장 큰 이유다. 어느 정도는 손해 볼 것을 감수하고 뮤지컬을 만들어야 하는데 시장 논리로만 접근을 하니 이미 검증이 되고 대중에게 알려진 라이선스 뮤지컬을 들여올 수밖에 없었다. 위험부담을 안고 뮤지컬을 순수하게 창작해 내려는 마음이 없는 한 앞으로도 계속 이런 기형적 형태의 뮤지컬을 봐야 한다.

책에서 소개된 창작 뮤지컬 「명성황후」와 「대장금」, 그리고 세계적인 넌버벌 퍼포먼스 「난타」도 기획 초기부터 성공을 하리라 예상된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수도 없이 실패하고 적자를 낸 후에야 뮤지컬의 심장으로 퍼포먼스의 심장으로 진출할 수 있었다. 이 작품들을 만들어 낸 PMC프로덕션은 공동대표로 있는 송승환씨로 더 알려져 있다. PMC프로덕션이 성공할 수 있었던 비결에 대해 책에서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는데 나는 지금 한국의 무대가 가지고 있는 문제점에 더 치중해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싶어 그 내용은 쓰지 않는다.

 

 

“실제로 지난 『2008년 뮤지컬 실태조사』에서도 뮤지컬 작품 수입금액을 기준으로 상위 10편을 살펴보면, 창작뮤지컬은 단 1편뿐이다. 국내 뮤지컬계를 온통 라이선스 뮤지컬이 휩쓸고 있다는 점을 여실히 드러낸 연구 결과이다.” (p.178)

 

몇 년 전 통계지만 참고할 만하다. 라이선스 뮤지컬이 이미 구조화 된 한국의 뮤지컬 무대에서 창작뮤지컬이 살아남을 가능성은 적다. PMC프로덕션의 선례가 있기는 하지만 아주 드문 정도가 아니라 유일한 경우라고 봐야 한다. 앞으로도 한국의 뮤지컬 팬들은 계속해서 엄청나게 비싼 티켓을 사야하고 라이선스로 사온 외국 뮤지컬을 봐야 할 것이다. 쉽게 깨질 구조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오페라

“50만원이 넘는 티켓 값은 ‘오페라의 대중화’라는 취지를 무색하게 만드는 지나친 상업성 추구라는 비난을 불렀다. 오스트리아의 브레겐츠음악제의 야외 오페라, 핀란드 사본린나의 야외 오페라축제 등에서도 티켓 값은 아무리 비싸도 21만원을 넘지 않고 3만원이면 저렴한 티켓을 구입할 수 있다.” (p.100)

 

오페라도 뮤지컬과 거의 비슷한 구조적 문제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유명한 해외 라이선스 오페라가 반짝 국내에서 인기가 있으면 이후에는 모조리 해외 라이선스 오페라로 도배가 된다. 서울뿐만 아니라 지역 대도시에서도 오페라 무대가 선다. 사실 오페라는 뮤지컬 보다 더 어렵다. 나는 지역에서 열린 오페라축제에 딱 한번 가봤다. 지루해도 그렇게 지루할 수 없었다. 물론 오페라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야 황홀한 시간이겠지만 무슨 말인지도 모를 대사와 노래를 듣고 있는 것이 곤욕이었다. 오페라는 뮤지컬보다 더 비싸다. 교양 있고 돈 좀 있고 품위 있는 사람들이 전유하는 무대로 인식되어 있다. 외국어로 부르는 노래와 하는 대사를 못 알아들어도 알아듣는 척 하는 것인지, 진짜로 다 알아 듣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그들은 수십만 원을 호가하는 오페라 티켓을 주저하지 않고 구입한다. 세계적인 오페라 축제보다 왜 한국의 오페라 티켓 값이 무모하게 비싼지 모르겠다. 한국 사람들이 세계에서 가장 비싼 값을 주고 외국 브랜드 옷이나 명품을 사는 것이 습관이 되어 있어서 오페라 같은 고급문화를 헐값에는 볼 수 없어서 그런 것인지…….

 

 

“오페라의 대중화와 관객개발을 위해서는 오페라의 질적 수준을 높이는 문제와 함께 우리말과 언어로 관객에게 다가가야 한다. 가사를 우리말로 고치면 음악적인 뉘앙스에 변화가 발생할 수 있지만, 라이선스 뮤지컬이 시행초기의 어색함을 벗어났듯이 오페라도 충분히 가능하다. ‘원어로 공연을 해야 있어 보인다.’는 오폐라계의 낡은 관행과 인식에서 시급히 탈피해야 한다.” (p.113)

 

저자의 주장에 100% 동의한다. 구조적 문제가 있지만 뮤지컬은 엄청난 속도로 발전하고 대중화 되었다. 재미있게 즐기고 비싼 티켓 값이 생각도 나지 않을 만큼 기쁘게 기립박수를 치고 나온다. 그러나 오페라는 뮤지컬에 비하면 아직 멀었다. 아~! 물론 오페라가 ‘그런 저급한 뮤지컬과 나는 동급으로 여기지 마라. 나는 고급을 유지할래!!’라고 하면 할 말은 없다. 그러나 오페라가 더 대중화 되고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기 위해서는 바뀌어야 할 것이다. 알아듣지도 못하는 원어가 아니라(공연을 하는 배우들도 얼마나 힘이 들까) 배우도 관객도 다 알아듣는 우리말도 하면 안 될 이유가 도대체 뭔지 좀 알려주기를 바란다. 저자의 지적대로 뮤지컬도 처음에는 무지하게 낯선 장르였다. (내게는 아직도 낯선 장르이고 더 친해질 여력이 없는 사이기는 하지만) 지금은 달라졌다. 뮤지컬 배우들이 유명해 지고 많은 사람들이 뮤지컬 무대를 찾는다. 대중화에 성공한 것이다. 저자는 오페라도 뮤지컬과 같은 전철을 밟아야 한다고 피력하지만 글쎄……. 자존심 강한 오페라가 그렇게 할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현재까지는.

 

 

“크레디아 4대 프로젝트. 조수미,신영옥,홍혜경의 뒤를 이을 ‘제4의 소프라노’를 찾아라. 한국형 크로스오버 테너를 찾아라, 유키 쿠라모토에 대항할 한국의 뉴에이지 아티스트를 찾아라, 실내악을 활성화시킬 20대의 매력적인 남성그룹을 만들어라.” (p.191)

 

비올리스트 리처드 용재 오닐로 유명한 ‘앙상블 티토’를 만든 크레디아라는 기획사는 클래식 기획사다. 그들의 4대 프로젝트가 오페라계에도 좀 자극을 줬으면 한다. 대중에게 다가가지 않는 무대는 대중이 외면한다. 당연한 이치다. 크레디아에서 기획한 ‘앙상블 티토’는 용재 오닐의 스토리로 인해 급격하게 유명해지기도 했지만 실내악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높이는 데는 일조했다. 이미 활동하고 있는 크로스오버 테너도 있고 한국적 뉴에이지 아티스트도 대중적으로 인기를 끌 수 있으리라 본다. 일단 어렵지 않으니까 다가갈 수 있다. 오페라처럼 부담스럽지 않다.

 

 

 

서커스

“동춘서커스 2009년 11월15일 청량리 공연을 끝으로 활동을 중단. 현재 총 단원 수가 50명에 불과하다. 그나마도 대부분이 중국인이다. 현재 이 인원으로는 원활한 서커스공연을 펼치기 어렵다.”

 

동춘서커스가 이렇게 어려운 상황인 줄 전혀 몰랐다. 동춘서커스는 아니지만 아주 어린 시절 공성운동장에서 크게 열린 서커스 공연은 아직도 생생하다. ‘태양의 서커스’가 이미 세계적인 컨텐츠가 된 마당에 아직도 천막 서커스 공연을 해야 하고 단원의 대부분이 중국이이라는 사실에 놀랐다. 단원이던 개인이 홀로 운영을 하고 있고 단원들 월급을 주지 못하는 경우도 허다하며 서커스 전용극장을 만들기로 한 계획은 여러 번 수포로 돌아갔다고 한다. 마음이 아팠다. ‘태양의 서커스’나 ‘중국의 기예’와는 분명히 다른 동춘만의 서커스가 사람들의 애환을 달래고 시름을 덜어주는 역할을 했는데……. 저자는 여러 가지 방향으로 동춘이 다시 살아날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하는데 현실성이 적어 보여 소개하지는 않는다.

다만, 사람들이 좀 더 관심을 가졌으면 한다. 그럴 리야 없겠지만 아이돌 올림픽에서 출중한 운동 실력을 선보인 샤이니의 민호군이 동춘 특별 게스트로 곡예를 한다든가 육상돌 시스타 보라양이 공연을 한다면 관중 동원은 물론 시큰둥하던 지자체나 해당 기관의 관심을 한 몸에 받을 수 있을 텐데……. 그런 방법이 아니면 동춘서커스를 살릴 방안이 뚜렷하게 보이지 않는다.

 

 

“재정적 압박과 수입 및 지출간의 격차 속에서도 좋은 작품을 무대에 올렸을 때의 성취감과 보람은 경제적 손해에서 오는 불안과 좌절감을 뛰어넘을 만한 보상감을 안겨준다. 그래서 예술경영인들은 불 보듯 뻔히 적자가 예상될지라도 도전하고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 무대에 올린다.” (p.338)

 

아직 한국에서 오르는 모든 장르의 무대는 경제적 손해를 감수해야 한다고 한다. 자세한 내막을 다 알지는 못해도 이해가 되는 측면이 있다. 문화·예술 분야로 돈을 버는 장르는 아주 극소수로 한정되어 있다. 저자는 책에서 줄곧 무대를 만드는 기획자가 가장 중요하다고 말한다. 연출·배우·관객도 중요하지만 무대를 만들고 디자인하고 운영하는 기획자가 무대를 결정하는 것이 대분이라고 한다. 많이 부족하지만 그나마 한국의 문화·예술이 이 정도의 발전을 가져올 수 있었던 것은 저자의 말대로 돈 안 되는 장르에도 사명감과 열정을 가지고 뛰어드는 그들 기획자(예술경영인)들이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동춘서커스가 살아났으면 하는 바람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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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녀의 하루 - 여인들이 쓴 숨겨진 실록
박상진 지음 / 김영사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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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녀라 하면 은밀함이 먼저 떠오른다. 궁궐에 가보면 미로처럼 건물이 첩첩이 둘러 쌓여 있다. 궁은 지엄한 곳이었다. 하늘과도 같은 왕과 왕의 일가(家)가 모여 있는 곳이었다. 구약 성경에서 야훼 여호와를 보는 즉시 죽었던 것처럼 밭뙈기만 처다 보며 일평생 살았던 백성들에게 궁은 쳐다볼 수도 없는 곳이었다. 그저 떠받들어야 하는 존재,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을 것이다. 차마 쳐다볼 수 없어서 땅에 코를 처박고 엎드린 채 푸념만 뇌까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후대 사람들에게 궁하면 궁녀와 내시가 번뜩 떠오른다. 사람이라는 것이 자극적인 것에 먼저 반응하는 것이 당연하다. 사극 드라마나 영화를 통해 비춰진 그들의 모습은 늘 허리를 숙이고 있고 시선을 땅으로 향해 있다. 분명히 같은 사람들인데 그림의 풍경처럼 그렇게 있을 뿐이다. 그래서 더 궁금해 하는 것 같다. 거세를 당한 내시들은 어떻게 살았을지, 어리고 고운 나이에 궁에 들어 온 저 많은 궁녀들은 어떻게 살았을지. 궁녀를 주 소재로 한 영화 두 편이 생각난다. 박진희가 주연한 영화 <궁녀>와 조여정이 주연한 영화 <후궁>. 두 영화 모두 궁녀가 가진 이미지 중에서도 가장 자극적인 이미지를 영화로 그려 냈는데 이런 영화들로 인해 현시대의 사람들은 궁녀에 대한 편견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저 폐쇄된 궁에서 허드렛일만 하는 여자 내지는 왕의 승은을 입기만을 바라는 젊은 처녀들.

 

 

이 책 「궁녀의 하루」는 우리가 가진 궁녀에 대한 편견을 다소 걷어낼 수 있게 한다. 궁녀가 존재한 역사를 개괄적으로 풀어내는 것에서부터 궁녀의 하루와 궁녀의 스캔들, 그리고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궁녀를 소개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단순히 TV나 영화를 통해 알아왔던 궁녀에 대한 이미지와 정보가 틀린 것은 아니지만 아주 일부분의 이미지에 불과했다는 것을 바로 확인할 수 있었다.

 

 

“조선시대 궁녀들은 고소득자였다. 왕과 왕비의 생일이나 결혼식, 즉위식 등 특별한 날에는 특별 보너스에 해당하는 물품들을 하사받았고, 제조상궁이나 부제조상궁 등 실세 상궁들은 외국 사신이나 고관들에게 받는 선물도 적지 않았다. 도한 궁녀들은 궁궐 안에서만 근무하는 특성 때문에 상대적으로 지출이 적었고, 먹고 입고 잠자는 것 등을 궁 안에서 해결할 수 있었으므로 크게 돈 들어갈 곳이 없었다.” (p.165)

 

먼저 궁녀가 되는 여인들은 모두 노비인 줄로 알고 있었다. 한 번 들어오면 죽기 전까지 나갈 수 없는 곳이 궁으로 알고 있었고, 그런 삶을 살기로 작정한 여인들은 신분이 노비일 거라 지레 짐작하고 있었다. 궁에서 하는 일도 대부분 시중을 드는 일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몰락한 양반가 자제에서부터 양인 출신도 있고 당연히 노비 출신도 있었다. 오고 갈 데도 없고 미래도 없어서 어쩔 수 없이 궁으로 들어온 여인들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동기로 궁으로 들어와 궁녀가 된 여인들도 많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조선시대 궁녀들은 일반 백성들에 비해서 고소득자가 될 가능성이 컸다고 한다. 저자의 말대로 궁 안에서는 돈 들어갈 곳이 없었기 때문에 책에서 소개하는 어떤 상궁의 경우 양자를 들이고 평생 동안 궁에서 모은 돈을 가지고 땅을 사고 집을 사고 사람을 부리기도 했다. 궁녀라는 것이 직업이었던 셈이다. 지금 군인들은 의무복무를 하고 있기 때문에 한 달에 사회에서 버는 돈의 수십 분의 1에 불과한 월급을 받고도 생활을 해야 하지만 조선시대 궁녀는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직업의 하나였기 때문에 돈을 벌고 그것을 축적할 수도 있었다고 한다. 물론, 모든 궁녀가 고소득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자네의 글은 언제 봐도 유려하군. 내 마음을 어찌 이리도 잘 보누?”

“황공하옵니다 마마.”

며칠 수 이번에는 수렴첨정을 하고 있던 대왕대비 윤씨(정희왕후)가 조두대를 불렀다.

“조상궁, 이제부터 내 말을 잘 받아 적도록 하게.”

“예, 대왕대비마마.” (p.76)

 

수양대군이 보위에 올랐을 때 궁에 들어 온 조두대 상궁은 글 하나로 유명해진 여인이었다. 왕과 대비의 각종 간행물 편찬과 편지글을 대필하고 서문을 짓기도 하는 등 지금으로 따지면 책을 냈다 하면 베스트셀러가 되는 작가 정도의 능력을 가진 궁녀였다.

궁녀가 궁에서 하는 일은 세분화 되어 있었다. 수라간에서부터 왕의 침소에까지 궁녀가 있었다. 앞서 말한 대로 궁녀는 일종의 직업이었다. 조두대 상궁이 자신이 가진 글 능력 하나로 명성과 재산을 쌓은 것처럼 어린 나이에 입궁한 궁녀들은 평생토록 한 가지 기술을 갈고 닦으며 궁궐 생활을 지속했다.

 

 

“궁중에서는 열 살이 채 안 된 궁녀들을 뽑아 전문적인 자수 기술을 익히게 했다. 이 궁녀들은 평생을 수를 놓는 일에 전념했기 때문에 그 기술이 매우 뛰어나 보통사람들이 따를 수 없었다.” (p.109)

 

당연히 그들은 자신의 분야에서 전문가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성심을 다해 자신이 맡은 바 일을 해야만 윗전의 눈에 들어 높은 상궁의 지위에 오를 수 있었다. 궁녀라는 신분은 언제든지 궁밖으로 내쫓길 수 있는 운명이었다. 책에서도 몇 가지 사례가 나오지만 지엄한 궁궐 내에서 스캔들을 일으키거나 궁의 법도에 맞지 않는 온갖 언행을 했다거나 궁에서 취급되는 문서에 찍는 도장을 잠시 분실했을 경우에도 가차 없이 궁에서 쫓겨났다.

 

 

“도제식 교육과 현장 실습 교육이 비록 공식 교육은 아니었지만 보통 수년에 걸쳐 이루어졌고 이를 통해 궁녀들은 관련 분아에서 전문가로 성장할 수 있었다.” (p.143)

 

궁이라는 특수한 공간적 상황에서 선배 궁녀들에 의해 배우는 교육과 기술은 그대로 어린 궁녀들에게 전해졌다고 한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궁체도 궁녀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라는 것도 이 책을 읽으며 알게 되었다. 수라간에서 일하는 궁녀들은 요리 전문가가 될 수 있었고 왕실의 의복을 담당하는 궁녀들은 의복 전문가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궁녀들의 전문 기술의 효용가치는 궁 안에서만 유효했다. 출궁이 된 후에는 전혀 효용가치가 없었다고 한다. 글을 쓰거나 대필하는 기술을 가진 궁녀들의 경우 민간에서 유행하는 서책을 대필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경우 일반인과 결혼해 평범하게 살거나 불미스러운 일로 궁에서 나왔을 경우에는 크게 문초를 겪거나 죽어서 나오는 경우도 많았다. 궁녀들에게 궁은 전부였던 것이다.

 

궁녀들도 일반인들과 다를 바 없는 사람들이었다. 공납을 하고 소작을 하는 중노동은 피할 수 있었지만 쥐도 새도 모르게 송장이 될 수 있는 궁궐 생활이 그보다 쉬웠을 것이라고 쉽게 짐작할 수는 없다. 궁녀들에게는 일반 백성들이 겪지 못할 어려움이 많았을 것이다. 고개만 들면 높은 사람들 천지고 하고 싶은 말 한마디 시원하게 하지 못하는 궁궐 생활이 얼마나 답답하고 매일의 삶이 긴장의 연속이었을지는 쉽게 생각해볼 수 있다.

 

 

“궁녀들은 함께 생활하는 동료들끼리의 동성애를 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함께 근무하는 남성인 대전별감이나 중성인 내시, 일반 관리나 궁을 출입하는 종친, 심지어 승려와도 정을 통하여 궁 안에서 아이를 낳는 최악의 일까지 있었다.” (p.179)

 

어린 나이게 궁에 들어와 함께 지내는 사람들이라야 궁녀들이 전부였을 것이다. 언니이자 친구이자 애인이자 부모가 되기도 했을 것이고. 한창 꽃피울 나이에 폐쇄된 곳에서 생활 하다 보니 여러 가지 스캔들도 많았다고 한다. 책에서는 실록에 기록되거나 역사서에 소개된 몇 개의 사례만을 소개하고 있는데 무엇보다 실록에 기록되었다는 것은 이런 궁녀들이 연관된 스캔들이 궁궐 내에 만연해 있었다는 것이다. 인간의 욕망이라는 것이 누른다고 마냥 눌러지는 것이 아니니 인간사에 일어난 일들이 궁궐 내에서도 당연히 일어났을 것이다. 환경과 상황은 다를지라도 결국 사람 사는 모습은 비슷할 수밖에 없다. 궁녀 또한 궁에서 일하는 사람이었다. 궁이라는 곳이 지엄하고 법도를 중시하는 곳이었기 때문에 이런 궁녀들의 스캔들을 가혹하게 다스렸다.

 

어차피 사람 사는 곳은 매한가지일 것이고 사람은 모두 다르지만 살아가는 꼴은 엇비슷하다. 여러 번 말하지만 궁녀도 사람이었다. 단편적인 정보만을 가지고 그들은 속단하는 실수를 반복하는 것은 곤란한 일이고 일반 백성들과는 아주 다른 사람들이었다고 생각해서도 곤란하다. 그 시대를 살아간 평범한 여인들이었고 할 수 있는 일과 맡겨진 일에 묵묵히 하루를 살아낸 사람들이었다. 은밀한 무언가를 감추고 있기만 한 사람들로 오해하는 것도 곤란하고 윗전의 시중이나 들고 허드렛일만을 하던 하찮은 사람들로 오해하는 것도 곤란한 일이다. 궁녀의 대부분은 전문직 종사자들이었고 왕과 대비와도 독대해 그들의 명을 받는 권력의 구성원이기도 했다.

 

이 책을 통해 궁녀에 대한 새로운 면을 많이 알게 되었다. 오해하지도 과장하지도 않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는 것이 역사를 대하는 바른 자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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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가 기른 다람쥐 자음과모음 청소년문학 29
이상권 지음 / 자음과모음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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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권 소설집은 두 번째다. 이전에 읽은 「하늘로 날아간 집오리」에 대한 기억이 강렬해서 더욱 기대를 갖고 이 책을 읽었다.

「고양이가 기른 다람쥐」에는 4편의 소설이 담겨 있다. 이전 책만큼 강렬했다.

이상권 작가를 어떻게 분류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친자연주의 작가, 생태주의 작가, 어른을 위한 동화 작가, 친농촌 작가 등 붙이고 싶은 이름이 많다. 그의 책을 읽으면 이해될 것이다. 왜 이런 이름들을 붙여주고 싶은지. 책의 표지와 제목만 봐서는 아이들을 위한 동화나 청소년 문학이 아닐까 싶은데 내용은 전혀 그렇지 않다. (다시 책을 보니 출판사에서는 청소년 문학으로 이미 분류해 놓고 있다. 개인적으로 동의하지는 않지만^^;;) 이 책에 실린 4편의 작품들은 하나하나가 다 메시지를 담고 있다. 모두가 알고 있고 흔한 일이지만 가볍게 치부할 수 없고 그냥 흘려들을 수 없는 메시지다.

최근 들어 만난 소설 중 가장 강렬하게 내 마음에 와 닿았다. 일부러 피하지 않고 외면하지 않고 문제에 직면하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무늬만 그럴 듯 해 보이고 흉내만 내는 아류들과는 다른 깊이가 있다. 최근 각종 문학상 수상작의 내용들이 현실을 반영하는 것들이 많다. 추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현실의 팍팍함에 동의한다는 반증이 되기도 하겠다. 이상권 작가는 소재 만 놓고 보면 따스하고 시골 냄새 나고 할머니 생각나게 하는 것들이지만 더 포근하게 보이려 포장하거나 왜곡하거나 값싼 감동을 선사하기 위해 미사여구를 덧붙이지 않는다.

 

 

“미안하다, 태희야...나 요새 삼겹살만 먹으면 이렇게 토해. 단 한 점만 먹어도 토해. 아무리 참으려고 해도 막 아우성치듯이 토해져 나와.” (p.15)

“태희야, 지난 2월에... 대민 지원을 나갔는데, 그게 동물들 살처분하는 일이었어... 그때부터야.” (p.15)

 

<삼겹살>이라는 작품은 삼겹살이라면 사족을 못 쓰던 오빠가 군 입대 후 나온 휴가에서 삼겹살을 먹지 못하고 모두 토해내는 내용을 담고 있다. 나는 몇 해 전 창궐하는 전염병을 막기 위해 수많은 가축들을 산 채로 매장하는 TV뉴스 장면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 이후 그 어떤 소설에서도 이런 소재를 본 적이 없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더욱 놀랐다. 작가는 시대를 반영하고 현실의 가장 여리고 약한 곳에 펜을 들이 밀어 몸으로 써내려가야 하는 사람들인데 이상권 작가를 통해 처음 이런 주제를 가진 작품을 만나게 되었다. 물론, 이미 이런 주제로 출간된 작품이 있는데 내가 알지 못할 수도 있다.

당시 가축 생매장을 담당하는 공무원이 죽기도 하고 정신병에 시달리기도 했으며 가축을 잃은 농민이 절규하는 장면들도 고스란히 TV로 전해졌다. 모두들 가슴 아파하고 그 규모가 워낙 컸던 터라 내 가족 아니면 내가 아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되기도 해 더욱 암담했었다. 군대에서 하는 대민지원이라는 것이 실제로 수통을 차고 일을 하는 병사들이 취사선택할 수 없는 일이기에 더욱 비극적이다. 수해 복구나 산불 진화 대민지원은 그나마 낫다. 살아있는 가축을 생매장 하는 일에 동원된 일반 병사들은 살아 있는 악몽을 경험했다.

두 번의 대민지원을 다녀온 후 부대에서 나온 돼지고기를 더 이상 먹지 못한다.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던 돼지고기 였는데 삼키지 못한다. 마치 산 채로 죽어버린 돼지의 환영이 그대로 살아 있는 것처럼 그렇게 괴상한 트라우마에 사로잡힌다. 휴가를 나와서도 마찬가지다. 이미 그의 몸은 돼지고기를 안으로 받아들일 수 없게 되었다.

 

 

“우리는 무슨 팔자가 이렇게 사나워서 살아생전에 왜놈들이 염병하는 것도 보고, 6.25전쟁 나서 서로 총질해대는 것도 보고, 광주에서 군인들이 멀쩡한 시민들한테 총질해대는 것도 보고, 이렇게 지 자식 같은 소들을 다 잡아 죽이는 것도 보나…….” (p.186)

 

<젖>이라는 작품에서는 소 구제역이 주요 소재로 사용된다. 작가의 고향이 남도 쪽인지는 모르겠지만 광주 하면 이미 비극적인 여운이 떠오른다. 불과 30년 전에 수많은 사람들이 무고하게 희생된 피의 땅이다. 이 작품의 배경이 되는 곳은 광주와는 떨어진 시골인 것 같다. 시골에서 땅만 부쳐 먹고 살던 노인들일지라도 광주에서의 비극은 알고 있다. 그만큼 비극적이고 처참하고 다시는 일어나지 말아야 할 현실이었기 때문이리라. 왜놈들이 염병하고 같은 동포끼리 총질하는 꼬락서니에 그치지 않고 광주 학살까지. 더군다나 자식같이 키워오고 함께 지내던 소들을 잡는 꼴까지 마주한 노인들은 넋을 놓는다. 넋을 놓지 않으면 그것이 비정상일 것이다. 베트남에서 시집 온 쩐 투윗은 믿고 의지하던 남편의 교통사고를 마주 한다. 늙은 시어머니의 그칠 줄 모르는 잔소리와 의심을 이겨 내오던 유일한 도피처였던 남편의 부재는 필사적으로 소를 지키려는 시어머니의 발작적 행동에 버금가는 충격이었다. 하지만 쩐 투윗은 포기하지 않는다. 생을 놓지 않는다. 마음만 먹으면 잘나가는 베트남 언니를 통해 지긋지긋한 시골과 시어머니에게서 도망갈 수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다. 기적적으로 출생한 송아지를 지켜내기 위해 기꺼이 자신의 젖을 물리는 어머니로 되살아난다.

 

 

“소,닭,돼지,염소... 오랫동안 인간의 살과 영혼이 되어온 보살님들이여, 부디 우리 인간들의 어리석은 탐욕을 용서하시고, 원망을 푸시고, 다시는 인간들의 가축으로 태어나지 마십시오... 자, 그러허니 모든 원한과 근심을 다 내려놓으시고 편안하게 떠나가십시오.” (p.147)

 

독실한 교회 신자인 시어머니는 남편의 교통사고도, 소를 생매장 하는 것도 쩐 투윗이 신심으로 예수를 믿지 않고 교회에 출석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억지를 부린다. 잠시라도 자기가 자리를 비우면 쩐 투윗이 당장 도망갈 거라고 지레 짐작해 멀리 사는 동생을 불러 감시하게 한다.

쩐 투윗은 우연히 본 스님이 동물들의 명복을 비는 염불을 듣게 된다. 시집오기 전 베트남에서도 불교를 믿지는 않았지만 진심으로 동물들의 넋을 기리고 남편의 완치되도록 빈다.

이 부분은 저자가 마지막 작가의 말에서 소설 집필의 동기가 된 생각과 일치된다.

 

 

“이번 소설집을 엮으면서 숱한 동물들을 떠올렸다. 특히 구제역이다 조류독감이다 하여 아무런 유언조차 남기지 못하고 세상을 등진 수백 수천만 동물들의 영혼을 떠올렸다. 잔인한 학살극이었다. 그런 학살극이 또 있었을까? 그들은 아무런 죄가 없다. 오직 동물로 태어났다는 죄밖에 없다. 그들은 인간들을 원망조차 하지 않고 죽어갔다. 나는 한 인간으로서 너무 부끄러웠고, 어린 시절 나를 거쳐 간 숱한 생구들에게 미안했고, 내 살이 되었던 숱한 생명들에게 죄스러웠다.” (p.232)

 

시골 태생인 이상권 작가에게 동물들은 나와 같은 도시 출신과는 전혀 다를 것이다. 애완용으로 기르는 동물들과는 또 다른 교감이 있었을 것이라 추측한다. 작가는 구제역이다 조류독감이다 하면서 생매장한 것을 학살극이라고 표현한다. 조금 과하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소설을 통해 작가는 줄곧 인간들의 무자비함을 드러낸다.

 

 

“어이, 상권이, 우리는 저 닭님들은 모시고 살고 싶네. 그걸 업으로 받아들이고 싶네. 논농사를 접고 닭농사를 지으려고 하네. 벼를 키우는 것이나 닭님을 키우는 것이나 다 똑같은 것 아닌가. 다 모시는 것이지. 잘 모셔서 우리의 몸속으로 들어오게 해야 우리 모두가 건강하고 행복해지는 것 아닌가? 닭님들을 모시고 싶네.” (p.96) <시인과 닭님들>

 

그래서 전원생활에서도 이웃의 간섭으로 제대로 키우지 못했던 닭들을 양도한 문인 선배의 말에 더욱 감동을 받는다. 인간이 무자비하게 밀어붙인 4대강 공사와 인간이 저지른 자연 파괴로 인해 되돌려 받고 있는 이상기후에도 끄떡없이 살아남은 닭들을 향해 작가의 문인 선배는 존대를 한다. 닭이 아니라 닭님이라 높이는 것이다. 수많은 처세술 서적과 자기관리 서적이 쏟아져 나오고 있지만 당장 닥친 위험 앞에서는 속수무책인 인간들보다 어린 새끼들 한 놈의 털 하나까지 다치지 않고 위험을 이겨낸 닭님들의 생태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작가는 사람이 인정받고 존중받아야 할 만큼 동물들에게도 그렇게 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 책이 동물애호가들을 위한 책이 아니지만 내가 이렇게 생각하는 것 자체가 이미 동물에 대한 잘못된 편견을 가지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당연히 생명으로서 동물들을 존중하고 그들과 평화롭게 살 길을 찾아야 하는데 인간의 삶이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드러내 놓고 ‘나는 동물 애호론자요.’ 떠들거나 철저한 채식주의로 살 거나 그린피스 활동을 하거나 모피와 가죽의 사용을 반대해 누드 퍼포먼스를 펼치거나 하는 등의 적극적인 활동을 모두가 할 수는 없다. 일상에서 동물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생각 하나를 바꾸는 편이 차라리 빠르고 옳은 길이라 생각 된다.

당장 닭님, 개님, 고양이님 부를 수는 없지만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내 생각의 어떤 부분을 바꿀 수 있는지 생각해 볼 요량이다.

작가처럼 생구로 동물들과 함께 살아 온 경험은 없다. 앞으로도 그럴 일은 없을 것 같다. 어느 쪽이든 편견을 가지고 성급하게 판단하지 않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다.

 

이상권 작가를 통해 이 땅의 민낯을 있는 그대로 마주할 수 있어서 불편했지만 의미 있는 시간 있었다. 그저 뜬구름 잡는 얘기 실컷 들으면 들을 때는 재미있을지 몰라도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이내 잊어버리기 마련이다. 이상권 작가의 작품은 오래토록 기억에 남을 것 같다. 많은 사람들에게 소개해 주고 싶은 작품이고 작가다.

 

“특히 집에서 기르는 짐승들은 사람 말을 알아들어. 소도 알아듣고, 돼지, 개, 닭, 염소도……. 쥐는 사람이 기르지는 않지만 사람과 같이 살지. 그래서 쥐도 사람 말을 알아듣는단다.” (p.217) <고양이가 기른 다람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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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변하기로 했다 - 사회 생활에 지친 당신을 위한 선배의 코칭
허은아 지음 / 이지북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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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월요일부터 너무 재밌게 보고 있는 드라마가 있다. 「직장의 신」이다. 일본 원작을 각색한 작품인데 김혜수씨의 열연에 배꼽을 잡았다. 아직 방영 초기라 호불호가 분명한 것 같은데 이 시대 직장인이 겪는 애환을 과장된 코믹적 소재로 표현하는 것이 오히려 더 사실적으로 다가왔다. 직장의 모습을 CCTV에 기록된 그대로 본 다고 생각하면 아찔하다. 숨 막히고 식은땀이 난다. 더 애잔하고 불쌍하게 보일 것이다. 그런데 과장된 연기와 만화적 소재를 사용해 이러한 적나라한 현실을 비꼬듯이 묘사하니까 웃음이 난다. 이제까지 일본의 원작을 들여와 우리식으로 해석해 방영한 작품들 대부분이 일본 원작 보다 더 나았었다고 생각하는데 이번 드라마도 성공했으면 한다. 동일한 시간대에 타 방송사에서 방영되는 드라마는 엄청난 스타들이 나오는 사극이던데 지구 반대편 이야기보다 더 먼 이야기인 옛날이야기보다 나와 당신의 일상을 만화처럼 그려내는 이런 드라마가 더 잘돼야 한다.

내가 무슨 드라마 홍보하는 사람도 아닌데 말이 길어졌다.

 

아무튼 직장 생활은 쉽지 않다. 시쳇말로 ‘남의 돈 버는 게 쉬운 줄 아나?’라고 하는데 맞는 말이다. 정말 쉽지 않다. 너무 어렵다.

솔직히 말하면 「직장의 신」드라마에 나오는 것보다 더 치졸하고 악랄하고 음흉하고 무서운 곳이 나와 당신들이 오늘도 들어갔다 나오는 직장, 그 곳이다. 드라마에서 장규직 팀장으로 나오는 오지호씨가 대놓고 계약직인 미스김 김혜수씨를 무시하고 삿대질하는 장면이 자주 나오는데 사실 현실은 이것보다 더 잔인하다. 드라마처럼 대놓고 하면 차라리 어떤 놈이 나를 싫어하는지 나와 다른 사람들도 정확하게 알 수 있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 친절한 척 하면서 속으로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어떤 꿍꿍이가 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내가 너무 비관적인가?

 

이 책 「나는 변하기로 했다」는 여성 직장인들을 위해 쓴 책이다.

 

 

“나는 내 경험과 그 안에서 깨달은 것들 그리고 내가 만난 사람들의 분투기를 모아 누군가에게 힘이 되고 싶었다. 한때 나처럼 멘토가 필요한 이들을 응원하고 싶었다. 그것이 내가 이 책을 쓴 동기다.” (p.6)

 

우리 사회에서 비정규직, 계약직 문제가 공론화되기 훨씬 전부터 직장 내 여성에 대한 차별과 불평등한 처우는 관습처럼 내려 온 고질적 병폐였다. 아무리 이해하고 알아보려 해도 남자인 나는 여성들이 겪었던, 겪고 있는, 겪을 직장 내 차별일 어떤 것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다만 내 경험으로 미루어 보건대 21세기 첨단을 달리는 오늘에도 직장 내 여성 차별은 시퍼렇게 살아있다는 것이다. 물론 예전처럼 드러내 놓고 차별을 하거나 드라마에서처럼 김양, 이양, 최양 이렇게 호칭부터 ‘나는 너를 차별한다.’라는 전제를 깔아놓은 후 여성을 대하지는 않지만 동일한 직급의 남자 동료와 여자 동료를 대하는 직장 내 상사들과 타 동료들의 업무적·사적 태도를 되돌아보면 차별은 분명하게 존재한다.

 

저자는 이런 문제들에 대한 근본적인 원인이나 대책을 말하지 않는다. 그래서 처음 책을 읽을 때에는 ‘뭐야~ 여성들을 위하는 척 하면서 아무런 말도 없고 차라리 이런 사람들이 더 여성들을 위축시키는 거 아니야~’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저자가 오히려 현명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이미 수십 년간, 아니 역사적으로 보면 수백·수천 년간 이 땅에 상존해 온 남·여차별을 책 한권으로 불식시키고 금방 고치고 두드려 엎을 수 있을 것처럼 자신 있게 말하는 것이 오히려 희망고문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여성들이여 일어나라~ 여성들이여 각성하라~ 여성들이여 모여라~ 힘을 모으자~ 하는 선전·선동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오늘도 직장에서 업무를 제외한 차별적 언사와 처사에 굴복하거나 지쳐있거나 그것을 숙명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수많은 여성들에게 아주 작고 사소하지만 선배로서 팁을 제시한다. 책을 덮고 나니 이것이 차라리 낫다고 생각되었다. 구구절절 옳은 말 하는 사람은 지금도 충분히 넘쳐 난다. 방향을 제시하고 목청껏 떠들어 대는 사람도 충분하다. 하지만 말단 직장인으로 출발 해 치열한 적응 과정과 경쟁을 뚫고 승진 하고 결혼 해 아이를 낳고 키우며 육아와 가사에 대한 중압과 스트레스를 겪어 본 선배 여성 직장인의 솔직한 한마디가 그 무엇보다 필요하고 절실하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은 더 많은 여성 직장인들이 읽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더 많은 남성들도 읽었으면 좋겠다. 오늘도 반나절 넘게 함께 일하는 직장 내 여성 동료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사소한 심부름만으로도 됨됨이를 평가받는다. (p.16)

“인사만 잘해도 전화만 잘 받아도 평판이 달라진다. (p.31)

“인사는 부족한 것보다 지나친 게 낫다” (p.32)

“잘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호의를 살 수 있다” (p.109)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저자의 사소한 팁을 쉽게 지나칠 수 없었다. 처음 읽을 때에는 ‘뭐야~ 당연한 것들 가지고~ 이런 얘기는 나도 할 수 있겠다.’ 싶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사소한 심부름 하나로, 매일 하는 인사 한 번으로, 수도 없이 하고 받는 전화 한 통화로 직장인들이, 특히 그런 직장인 들 중 여성들이 차별을 당하고 격이 맞지 않는 처사를 당하기도 한다는 것을 알고 나니 다르게 보였다. 심부름 하나도, 인사 한 번도, 전화 한 통도 비장하고 심각하게 해야 한다. 맡은 업무만 잘해서는 살아남을 수 없는 곳이 이 사회가 만들어 놓은 괴물 같은 직장이다. 언제든지 잘릴 수 있다는 공포가 상존하는 곳이며 겉으로는 웃고 있지만 속으로는 어떤 칼을 숨겨놓고 있는지 알 수 없는 곳이 이 시대 직장이다. 그렇지 않은 곳이 있나? 있다면 날 좀 소개시켜 주기를 바란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런 직장에 들어가고 싶으니까. IMF 이후 신자유주의가 고밀도로 농축되어 발현된 한국에서, 직장인들은 너무 많은 일을 겪었다. 자신의 아버지가 운영하던 회사가 한 순간에 부도가 나고 아버지가 하루아침에 실직 해 실업자가 되고 가정이 파괴되고 해체되는 일을 직·간접적으로 체감했다. 그래서 그 공포 속에 공부하고 취업을 준비하고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늘어난 것은 눈치뿐이요 줄어든 것은 월급뿐이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경쟁해야 했다. 사랑과 정이 넘치는 학교는 이미 호랑이 담배 물던 시절보다 더 오랜 이야기가 되었다. 학문과 낭만을 배운다는 대학은 이미 사장된 지 오래다. MT, 동아리, 잔디밭 막걸리는 개뿔. 대학문을 들어서자마자 취업준비생으로 4년에서 6-7년을 보낸다. 그렇게 어렵게 졸업 해 어렵게 직장이라는 문턱에 올라서는 학생들도 소수다. 대부분은 비정규직, 계약직이라는 무저갱으로 낙엽처럼 떨어진다. 차라리 중력가속도 그 것 만큼 빨리 떨어졌으면 좋겠는데 잔인도 하지, 바람 없는 늦가을 을씨년스럽게 떨어지는 고목의 낙엽처럼 이리 휘청 저리 휘청 떨어질 듯 올라갈 듯 위태롭게 나부낀다.

 

 

“한 여성 팀장은 회의에만 들어가면 침묵하는 팀원들 때문에 늘 고민이 되었다. 도대체 이 친구들이 왜 그러는지 그녀는 늘 궁금했다. 어느 날 그녀는 회의 내용을 녹음해 들어보고 깜짝 놀랐다. 회의시간의 절반 이상을 자신이 떠들어댔기 때문이다.” (p.172)

“부하직원을 다룰 때 가장 주의해야 할 점은 다른 사람들 앞에서 잘못을 지적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p.201)

 

책은 입사 직 후부터 임원 승진을 하는 과정을 가정하고 있다. 실제로 여성 직장인 중 몇 퍼센트가 임원이 되는지 정확한 통계가 삽입되었다면 더 절망적일 거라 짐작해서 일부러 넣지 않은 것은 아닌가 생각 했다.

어려운 관문을 뚫고 직장에 진입한(물론 이 책에서는 정규직 여성 직장인을 설정하고 있다. 비정규직은 취급조차 하지 않는 현실 흐흐…….) 여성 직장인이 직장 내에서 겪을 수 있는 일에 대해서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 팁을 제시한다. 앞서도 말했듯이 나는 남성이기에 전적으로 공감할 수가 없다. 불가능한 일이다. 이 책을 읽은 실제 여성 직장인들에게는 어떻게 다가왔는지 궁금했다. 이 책에 대한 다른 리뷰도 하나하나 찾아봐야 할 것 같다.

 

결론은 결국 ‘남의 돈 벌기 쉽지 않다’는 거다. 예전에는 대학 졸업 전에 취업이 거의 결정 나기도 했었다고 하는데 꿈같은 얘기다. 어린이집에서부터 화장장에 들어가기 전까지 무한 경쟁 속에 살아야 하는 현실이다. 인정할 수밖에 없는 진짜 모습이다. 이 치열하고도 고독한 리얼 버라이어티에서 살아남기 위해 능력을 기를 것인지 인내력을 기를 것인지 뻔뻔함을 기를 것인지는 각자가 판단 할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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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 잘나가는 여자
아리카와 마유미 지음, 신지원 옮김 / 이지북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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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나가는 여자가 되어야 하나? 싶다. 모두가 잘나가고 싶기 때문이다. 잘 나갈 수는 있어도 잘나가기는 어렵다.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낙타의 미션 임파서블한 모양이 그대로 우리네 삶에 투영된다. 아내도 결혼 후 직장을 그만 뒀다. 한 동안은 너무 좋아했다. 십 년 정도 일을 하면서 제대로 쉬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아가씨 때보다 씀씀이도 줄어들고 사고 싶은 만큼 마음껏 사지 못하는 것은 아쉽지만 너무 좋아했다. 건강도 많이 좋아지고 진작부터 하고 싶었으나 짬이 나지 않아 미루어 두었던 것들을 하면서 행복해 했다. 그러면서도 한 번씩 예전 직장 생활을 그리워하기도 했다. 단순히 월급이 문제가 아니라 일을 하는 자신을 통해 삶의 의욕을 더 발견하고 성취를 느꼈던 기억을 곱씹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럴 때면 ‘다시 일 할까?’, ‘다시 일 하고 싶어’라는 말을 했다. 십 년이라는 시간 동안 해 왔던 일을 멈춘 지 이제 2년밖에 되지 않았는데 초조함과 불안함이 지금의 편안함과 여유를 잡아먹기도 하는 것 같았다.

사실 여자들이 잘나가고 싶어 하는 것 이상으로 남자들도 잘나가고 싶어 한다. 직장에서나 가정에서 잘나가고 싶고 가끔 가정에서 잘 나가고 싶어 한다.ㅎㅎ

총각 시절을 그리워하기도 하고 마음껏 꿈만 꿀 수 있었던 대학 시절과 학창 시절로 되돌아가고 싶기도 한다.

 

역사에서 가장 하지 않아야 할 가정이 만약 ∼했으면, ∼했다면 이라는 것인데 이것은 개인사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이미 지나간 과거는 후회하거나 마냥 추억한다고 해서 돌이킬 수 있는 것도 한 치도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잠시 추억하다가 후다닥 정신을 차려보면 지금의 현실과 마주할 수밖에 없다.

 

 

“사람에 따라서 선택은 제각각이에요. 어떤 선택이라도 좋으니 자기답게 솔직하게 선택해나가면 됩니다……. 인생은 선택의 연속입니다. 지금 일어나는 일은 전부 지금까지 자신이 선택해온 것들의 결과입니다.” (p.241)

 

이 책 「잘나가는 여자」는 선택에 대한 내용이 담긴 책이다. 저자인 아리카와 마유미씨는 지금까지 50개 정도의 일을 하고 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 두고 평생 꿈이었던 세계여행을 다녀온다. 세계여행을 다녀와서도 멋지고 연봉 많이 주는 좋은 회사에 들어간 것이 아니라 자신이 정말 하고 싶은 글쓰기를 위해 파트타임으로 일을 하기도 한다. 마유미씨는 책에서 계속 강조한다. 선택은 결국 본인이 하는 것이라고. 맞는 말이다. 지금 일어난 일은 모두 내가 선택해서 일어난 결과들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일상에서 쉽게 인식하지 못하는 말이기도 하다. 과거를 추억하며 지금의 현실을 잠시나마 잊어보려 하지만 불필요한 일이다. 한심한 지금의 현실이 내가 한 과거의 수많은 선택들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정말 한 번 뿐인 인생에서 주체적으로 선택해야 할 것 같다. 언제까지 남의 눈치보고 가까운 사람들 조언 들어가면서 우유부단하게 삶을 대할 수는 없다. 내 삶은 그 누구도 대신 살아주지 않고 대신 감당해 주지 않는다. 결국 내가 또 다시 선택해야 하고 그 선택의 결과를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날부터 매일매일 나 자신에게 질문을 했어요. ‘진심으로 어떻게 하고 싶어?’ 가능한 일인지 아닌지는 상관없이, 일단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을 자유롭게 생각해보자고 다짐했습니다. 그러자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진심들이 조금씩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세계 일주를 하면서 여러 나라를 돌아보고 싶어.’ 여기에는 나 스스로도 놀랐습니다.” (p.90)

 

마유미씨가 세계 여행을 하기로 결정한 것도 사실은 그녀의 내부에서 오랫동안 쌓아 온 선택의 결과일 것이다. 뜬금없이 든 생각에 모든 현실을 뒤로 한 채 무작정 세계 여행을 떠날 수는 없는 일이다.

지친 현실과 일상으로 인해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것은 뭘까?’, ‘나의 꿈은 무엇인가?’, ‘나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같은 철학적인 것 같지만 가장 현실적인 고민들을 잊고 산다. 당장 닥친 업무가 산더미 같이 쌓여 있고 반복되며 끝이 보이지 않는 현실의 무게에 두 어깨를 짓눌리다 보면 그런 고민들은 배부른 소리로 치부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아주 잠시라도 그런 고민에 진지하게 온전히 나를 던져 보지 않으면 결코 현실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 같다.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진심들이 드러나는 것은 이미 오래전부터 꿈꿔왔던 것이다. 다른 사람들을 통해서, TV를 통해서, 책을 통해서 마음 한 켠에 고이 쟁여 오던 진심이다. 마유미씨처럼 현실을 벗어나는 용기를 갖는 것이 잘나가는 여자와 잘나가고 싶은 남자들이 가장 먼저 선행해야 할 삶의 자세다.

사실 그 용기가 어디에서부터 비롯되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사람마다 처한 환경이 다르고 가치관이 다르고 마음 속 진심이 천양지차일 것이기 때문이다.

 

 

“‘이 꽃은 꼭 필 거야.’ 그런 마음으로 매일매일 살고, 당신 안에서 가장 멋진 당신과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가능성은 당신이 믿어주는 만큼만 주어지니까요.” (p.27)

“확실하지 않은 일을 환영해보세요. 무리하게 선을 긋고 스스로를 자신이 만들어놓은 틀에 밀어 넣어서는 안 돼요. 알 수 없는 미래를 기대하고, 발견하고, 그레이존을 즐길 수 있다면, 당신은 틀림없이 잘나가는 여자가 되어 있을 거예요.” (p.189)

 

저자는 매일의 삶 속에서, 그 일상 속에서 가져야 할 마음의 자세를 강조한다. 죽지 못해 살아가는 사람이 되지 말 것을 말한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반드시 꽃이 필 것이라는 믿음. 그 믿음이 주는 활력과 희망으로 매일을 살고 그 속에서 꾸미지 않아도, 내 존재 자체로 멋진 나를 발견하는 것. 그것을 강조 한다.

직장에서, 가정에서, 관계 속에서 우리는 늘 확실한 것을 강조 받는다. 우유부단한 사람은 뒤쳐진 사람으로 생각하기도 하고 떨어지는 사람으로 여기기도 한다. 물론, 책에서 우유부단한 사람이 되기를 말하지는 않는다. 다만 너무 철두철미하고 매사에 정확하고 맺고 끊는 것이 칼과 같은 사람은 되지 않기를 강조 한다. 특히 자기 자신에게는 더욱 그렇다. 사실 나는 남에게는 철저하고 나에게는 관대한 편이다. 그래서 늘 아내에게 핀잔을 듣는다. (이미 나는 저자가 말하는 잘나가는 축에 속하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저자가 말하는 가장 기본적인 삶의 자세에 있어서는...^^;;) 하지만 이런 나도 내 자신에게 실망하고 내 자신이 한심해 견딜 수 없을 때가 종종 있다.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오를 때도 있다. 흑이면 흑 백이면 백 정확한 것을 좋아하고 그렇게 살고 싶어 한다. 직장에서도 관계에서도 술에 술탄 듯 물에 물탄 듯 하는 사람을 가장 싫어한다.

그렇게 훈련 되어 온 듯하다.

 

 

“잘나가는 여자는 자신이 잘못하지 않은 일에도 먼저 사과합니다. 지금을 행복하게 살아내는 것이 가장 소중하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먼저 사과하지 않으면 대부분 결론이 나지 않습니다. 응어리가 남거나 불편한 분위기가 계속돼요. 그럴 때에는 먼저 사과의 말을 건네 봅니다. 내가 잘못하지 않았더라도 가볍게 ‘미안합니다., ‘죄송해요’라고 말이에요.” (p.53)

 

“대부분의 경우 먼저 사과하면 일은 쉽게 풀립니다. 쓸데없는 프라이드를 지키기보다는 그 자리에서 기분 좋게 풀어버리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p.59)

 

처음 책에서 이 부분을 읽었을 때에는 ‘나는 뭐 사과를 먼저 잘 하지~’ 생각했다. 리뷰를 쓰다 보니 나 혼자 만의 생각이었음을 정확하게 알 수 있었다. 실제로 사과를 하기도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거의 응어리를 품고 있었던 것 같다. ‘내가 정말 미안해서 사과하는 게 아냐~ 어쩔 수 없이 하는 거야~ 너는 모르지? 내가 이긴 거야~.’ 사과를 하면서 매번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럴 때가 많았던 것 같다.

저자가 말하는 잘나가는 여자가 되기 위해서, 잘나가는 남자가 되기 위해서는 기꺼이 내 프라이드를 접어 들어가는 것도 필요하다. 나는 이것 또한 용기라고 본다. 세상 어느 누구가 먼저 사과하고 싶겠나. 누구의 잘못인지 정확하게 판단하기 어려운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다. 누구 하나가 먼저 비켜주지 않으면 절대로 통과할 수 없는 좁은 골목길에 마주한 두 자동차와 같이 그런 상황 말이다. 더군다나 가까운 관계에서는 사과하기가 더욱 어렵다. 차라리 이해관계나 계약관계, 계급관계에서는 사과하기 쉽다. 나처럼 말이다. 너무 사과를 남발하는 것은 그 진심이 의심받게 되지만 가벼운 사과는 할 수 있다. 하지만 정말 가까운 관계. 이를테면 가족이나 친한 친구와의 관계에서 먼저 사과하는 것은 정말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다. 가까운 시기에 친구나 가족에게 사과한 일이 있는지 돌아보시라. 과연 그게 언제였는지를. 정말 가까운 사람에게 진심으로 사과하는 사람이 결국 잘나가는 사람이이라 생각된다. 앞서 말한 이해관계나 계약관계, 계급관계에서 만약 고집을 부려 끝까지 사과하지 않고 사과 받기를 바란다면 불상사가 벌어질 수도 있다. 중요한 약속이 깨지거나 계약이 취소되거나 한데로 내쳐질 수도 있다. 반대로 가족과 가까운 친구관계 속에서는 끝까지 고집을 부려도 말 안하면 그만이다. 큰 불상사가 벌어지지 않을 가능성이 많다. 그래서 진심을 담은 사과가 더욱 어렵다.

결혼 전 아내와 10년을 연애했다. 장수 연애의 비결을 묻는 친구나 동생들에게 늘 말했다. ‘저 주라고’ 이 책을 읽기 10여 년 전에 홀로 터득한 비결이다.ㅎㅎ ‘저 주면’ 안다고. 사실이었다. 여기서 내가 화를 내면 큰 싸움이 나겠다. 라고 발견되는 타이밍이 있다. 거기서 참지 않고 내뱉으면 싸움이 되는 것이고, 참으면 거기서 끝날 때가 많았다. 신기한 것은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른 후 지금의 아내가 내가 언제 참았고 저 줬는지 모두 알았다는 것이다. 가까운 사람이기에 가능한 일인 것 같았다.

 

가까운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가능한 선택부터 시작해야 한다. 굳이 잘나가기 위해서는 아니더라도 조금 더 나은 나와 마주하고 현실에 닿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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