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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녀의 하루 - 여인들이 쓴 숨겨진 실록
박상진 지음 / 김영사 / 2013년 3월
평점 :
궁녀라 하면 은밀함이 먼저 떠오른다. 궁궐에 가보면 미로처럼 건물이 첩첩이 둘러 쌓여 있다. 궁은 지엄한 곳이었다. 하늘과도 같은 왕과 왕의 일가(家)가 모여 있는 곳이었다. 구약 성경에서 야훼 여호와를 보는 즉시 죽었던 것처럼 밭뙈기만 처다 보며 일평생 살았던 백성들에게 궁은 쳐다볼 수도 없는 곳이었다. 그저 떠받들어야 하는 존재,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을 것이다. 차마 쳐다볼 수 없어서 땅에 코를 처박고 엎드린 채 푸념만 뇌까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후대 사람들에게 궁하면 궁녀와 내시가 번뜩 떠오른다. 사람이라는 것이 자극적인 것에 먼저 반응하는 것이 당연하다. 사극 드라마나 영화를 통해 비춰진 그들의 모습은 늘 허리를 숙이고 있고 시선을 땅으로 향해 있다. 분명히 같은 사람들인데 그림의 풍경처럼 그렇게 있을 뿐이다. 그래서 더 궁금해 하는 것 같다. 거세를 당한 내시들은 어떻게 살았을지, 어리고 고운 나이에 궁에 들어 온 저 많은 궁녀들은 어떻게 살았을지. 궁녀를 주 소재로 한 영화 두 편이 생각난다. 박진희가 주연한 영화 <궁녀>와 조여정이 주연한 영화 <후궁>. 두 영화 모두 궁녀가 가진 이미지 중에서도 가장 자극적인 이미지를 영화로 그려 냈는데 이런 영화들로 인해 현시대의 사람들은 궁녀에 대한 편견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저 폐쇄된 궁에서 허드렛일만 하는 여자 내지는 왕의 승은을 입기만을 바라는 젊은 처녀들.
이 책 「궁녀의 하루」는 우리가 가진 궁녀에 대한 편견을 다소 걷어낼 수 있게 한다. 궁녀가 존재한 역사를 개괄적으로 풀어내는 것에서부터 궁녀의 하루와 궁녀의 스캔들, 그리고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궁녀를 소개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단순히 TV나 영화를 통해 알아왔던 궁녀에 대한 이미지와 정보가 틀린 것은 아니지만 아주 일부분의 이미지에 불과했다는 것을 바로 확인할 수 있었다.
“조선시대 궁녀들은 고소득자였다. 왕과 왕비의 생일이나 결혼식, 즉위식 등 특별한 날에는 특별 보너스에 해당하는 물품들을 하사받았고, 제조상궁이나 부제조상궁 등 실세 상궁들은 외국 사신이나 고관들에게 받는 선물도 적지 않았다. 도한 궁녀들은 궁궐 안에서만 근무하는 특성 때문에 상대적으로 지출이 적었고, 먹고 입고 잠자는 것 등을 궁 안에서 해결할 수 있었으므로 크게 돈 들어갈 곳이 없었다.” (p.165)
먼저 궁녀가 되는 여인들은 모두 노비인 줄로 알고 있었다. 한 번 들어오면 죽기 전까지 나갈 수 없는 곳이 궁으로 알고 있었고, 그런 삶을 살기로 작정한 여인들은 신분이 노비일 거라 지레 짐작하고 있었다. 궁에서 하는 일도 대부분 시중을 드는 일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몰락한 양반가 자제에서부터 양인 출신도 있고 당연히 노비 출신도 있었다. 오고 갈 데도 없고 미래도 없어서 어쩔 수 없이 궁으로 들어온 여인들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동기로 궁으로 들어와 궁녀가 된 여인들도 많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조선시대 궁녀들은 일반 백성들에 비해서 고소득자가 될 가능성이 컸다고 한다. 저자의 말대로 궁 안에서는 돈 들어갈 곳이 없었기 때문에 책에서 소개하는 어떤 상궁의 경우 양자를 들이고 평생 동안 궁에서 모은 돈을 가지고 땅을 사고 집을 사고 사람을 부리기도 했다. 궁녀라는 것이 직업이었던 셈이다. 지금 군인들은 의무복무를 하고 있기 때문에 한 달에 사회에서 버는 돈의 수십 분의 1에 불과한 월급을 받고도 생활을 해야 하지만 조선시대 궁녀는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직업의 하나였기 때문에 돈을 벌고 그것을 축적할 수도 있었다고 한다. 물론, 모든 궁녀가 고소득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자네의 글은 언제 봐도 유려하군. 내 마음을 어찌 이리도 잘 보누?”
“황공하옵니다 마마.”
며칠 수 이번에는 수렴첨정을 하고 있던 대왕대비 윤씨(정희왕후)가 조두대를 불렀다.
“조상궁, 이제부터 내 말을 잘 받아 적도록 하게.”
“예, 대왕대비마마.” (p.76)
수양대군이 보위에 올랐을 때 궁에 들어 온 조두대 상궁은 글 하나로 유명해진 여인이었다. 왕과 대비의 각종 간행물 편찬과 편지글을 대필하고 서문을 짓기도 하는 등 지금으로 따지면 책을 냈다 하면 베스트셀러가 되는 작가 정도의 능력을 가진 궁녀였다.
궁녀가 궁에서 하는 일은 세분화 되어 있었다. 수라간에서부터 왕의 침소에까지 궁녀가 있었다. 앞서 말한 대로 궁녀는 일종의 직업이었다. 조두대 상궁이 자신이 가진 글 능력 하나로 명성과 재산을 쌓은 것처럼 어린 나이에 입궁한 궁녀들은 평생토록 한 가지 기술을 갈고 닦으며 궁궐 생활을 지속했다.
“궁중에서는 열 살이 채 안 된 궁녀들을 뽑아 전문적인 자수 기술을 익히게 했다. 이 궁녀들은 평생을 수를 놓는 일에 전념했기 때문에 그 기술이 매우 뛰어나 보통사람들이 따를 수 없었다.” (p.109)
당연히 그들은 자신의 분야에서 전문가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성심을 다해 자신이 맡은 바 일을 해야만 윗전의 눈에 들어 높은 상궁의 지위에 오를 수 있었다. 궁녀라는 신분은 언제든지 궁밖으로 내쫓길 수 있는 운명이었다. 책에서도 몇 가지 사례가 나오지만 지엄한 궁궐 내에서 스캔들을 일으키거나 궁의 법도에 맞지 않는 온갖 언행을 했다거나 궁에서 취급되는 문서에 찍는 도장을 잠시 분실했을 경우에도 가차 없이 궁에서 쫓겨났다.
“도제식 교육과 현장 실습 교육이 비록 공식 교육은 아니었지만 보통 수년에 걸쳐 이루어졌고 이를 통해 궁녀들은 관련 분아에서 전문가로 성장할 수 있었다.” (p.143)
궁이라는 특수한 공간적 상황에서 선배 궁녀들에 의해 배우는 교육과 기술은 그대로 어린 궁녀들에게 전해졌다고 한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궁체도 궁녀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라는 것도 이 책을 읽으며 알게 되었다. 수라간에서 일하는 궁녀들은 요리 전문가가 될 수 있었고 왕실의 의복을 담당하는 궁녀들은 의복 전문가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궁녀들의 전문 기술의 효용가치는 궁 안에서만 유효했다. 출궁이 된 후에는 전혀 효용가치가 없었다고 한다. 글을 쓰거나 대필하는 기술을 가진 궁녀들의 경우 민간에서 유행하는 서책을 대필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경우 일반인과 결혼해 평범하게 살거나 불미스러운 일로 궁에서 나왔을 경우에는 크게 문초를 겪거나 죽어서 나오는 경우도 많았다. 궁녀들에게 궁은 전부였던 것이다.
궁녀들도 일반인들과 다를 바 없는 사람들이었다. 공납을 하고 소작을 하는 중노동은 피할 수 있었지만 쥐도 새도 모르게 송장이 될 수 있는 궁궐 생활이 그보다 쉬웠을 것이라고 쉽게 짐작할 수는 없다. 궁녀들에게는 일반 백성들이 겪지 못할 어려움이 많았을 것이다. 고개만 들면 높은 사람들 천지고 하고 싶은 말 한마디 시원하게 하지 못하는 궁궐 생활이 얼마나 답답하고 매일의 삶이 긴장의 연속이었을지는 쉽게 생각해볼 수 있다.
“궁녀들은 함께 생활하는 동료들끼리의 동성애를 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함께 근무하는 남성인 대전별감이나 중성인 내시, 일반 관리나 궁을 출입하는 종친, 심지어 승려와도 정을 통하여 궁 안에서 아이를 낳는 최악의 일까지 있었다.” (p.179)
어린 나이게 궁에 들어와 함께 지내는 사람들이라야 궁녀들이 전부였을 것이다. 언니이자 친구이자 애인이자 부모가 되기도 했을 것이고. 한창 꽃피울 나이에 폐쇄된 곳에서 생활 하다 보니 여러 가지 스캔들도 많았다고 한다. 책에서는 실록에 기록되거나 역사서에 소개된 몇 개의 사례만을 소개하고 있는데 무엇보다 실록에 기록되었다는 것은 이런 궁녀들이 연관된 스캔들이 궁궐 내에 만연해 있었다는 것이다. 인간의 욕망이라는 것이 누른다고 마냥 눌러지는 것이 아니니 인간사에 일어난 일들이 궁궐 내에서도 당연히 일어났을 것이다. 환경과 상황은 다를지라도 결국 사람 사는 모습은 비슷할 수밖에 없다. 궁녀 또한 궁에서 일하는 사람이었다. 궁이라는 곳이 지엄하고 법도를 중시하는 곳이었기 때문에 이런 궁녀들의 스캔들을 가혹하게 다스렸다.
어차피 사람 사는 곳은 매한가지일 것이고 사람은 모두 다르지만 살아가는 꼴은 엇비슷하다. 여러 번 말하지만 궁녀도 사람이었다. 단편적인 정보만을 가지고 그들은 속단하는 실수를 반복하는 것은 곤란한 일이고 일반 백성들과는 아주 다른 사람들이었다고 생각해서도 곤란하다. 그 시대를 살아간 평범한 여인들이었고 할 수 있는 일과 맡겨진 일에 묵묵히 하루를 살아낸 사람들이었다. 은밀한 무언가를 감추고 있기만 한 사람들로 오해하는 것도 곤란하고 윗전의 시중이나 들고 허드렛일만을 하던 하찮은 사람들로 오해하는 것도 곤란한 일이다. 궁녀의 대부분은 전문직 종사자들이었고 왕과 대비와도 독대해 그들의 명을 받는 권력의 구성원이기도 했다.
이 책을 통해 궁녀에 대한 새로운 면을 많이 알게 되었다. 오해하지도 과장하지도 않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는 것이 역사를 대하는 바른 자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