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국
나카무라 후미노리 지음, 양윤옥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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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소설을 많이 읽지는 않았지만 이 작품 「왕국」은 전형적인 일본 소설의 틀을 갖추고 있다. 개인 간에 일어나는 사건과 갈등의 증폭이 반드시 사회 구조적인 문제에 기인한다는 틀 말이다. 그러고 보면 일본 작가들은 다른 나라의 작가들보다 더 자신들의 작품 속에 그런 면을 드러낸다. 하지만 직접적으로 훅~! 들어가지는 않고 알 듯 모를 듯, 건드린 듯 건드리지 않은 듯 그렇게 은근 살짝!! 일본 소설만의 특징이자 재미있는 면이기도 하다.

오에 겐자부로 상을 수상한 젊은 작가인 나카무라 후미노리는 그의 전작 「쓰리」의 자매작으로 이 책을 내놓았다. 전작을 읽어보지 않았지만 그가 말하고자 하는 얼개는 어느 정도 파악이 된다. 전후 모든 가치가 국가에 의해 주도되고 개인은 철저하게 차후가 되는 수십 년을 살아 온 일본인들에게 시스템은 벗어날 수 없는 운명과도 같은 것이었을까? 그래서 이런 내용의 작품이 많이 나오는 것 같기도 하다.

 

작품 속 주인공 유리카는 국가에서 만든 아동시설에서 자라난다. 친 자매와도 같던 언니의 비극적인 죽음과 그녀가 남긴 어린아이를 위해 자신의 모든 운명을 내던진다. 특별한 언니의 유언이나 부탁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혈육관계도 아니었지만 그렇게 그 운명의 굴레 속으로 귀속된다. 하지만 탓할 수 없다. 억지로 밀어 넣은 것이 아니라 유리카 자신이 그렇게 선택한 것이니까.

 

 

“한 건에 삼십만 엔을 주겠어. 만을 잘해내면 다음부터는 오십만 엔이야.”

사회적 유명 인사의 약점을 조작해내는 일이었다. 여자와 나란히 호텔에 들어가는 사진이나 동영상. 성매매 여성과 침대에서 함께 발가벗고 집적거리는 증거. 성적인 수치감이 느껴질 만한 증거. 어느 누구에게도 알려지기를 원하지 않는 일의 증거. 스무 번 일하면 최소한 천만 엔이다. 돈은 얼마든지 필요했다. (p.73)

 

한 건에 삽십만 엔, 잘 만 하면 한 번에 오십만 엔, 스무 번만 하면 천만 엔. 말이 천만 엔이지 엔화가 많이 떨어진 지금 돈으로도 1억이 넘는 돈이다. 유리카는 어쩔 수 없는 운명과도 같은 넝쿨 속으로 계속해서 빠져 든다. 매력적인 외모와 그 외적인 능력을 정확하게 이용할 줄 알았던 유리카는 수치심, 죄책감 따위를 느끼지 않았다. 아니, 느낄 필요조차 없었다. 그만큼 유리카를 찾는 사회 유명 인사들이 많았다는 것이다. 하룻밤에 수십만 수백만 엔을 젊은 여성에게 뿌려 댈 수 있는 사회 유명 인사들은 그렇게 많았다. 떳떳하게 데이트 하고 드러내 놓고 맺는 관계가 아님에도 그들은 목을 매고 달려들었다. 유리카의 젊고 싱싱한 육체에 탐닉하는 위험한 불장난 한번이 그들이 가진 구조에 조금이라도 위험을 주리라는 염려를 하등 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힘 좀 쓰고 돈 좀 꽤나 있는 사람들에게는 잠시 현실의 지루함에 기름칠 할 수 있는 일탈이었을 테니까.

뜨겁게 데어 죽을 줄 모르고 하얀 불빛으로 날아드는 밤 나방 같이 유리카는 그 심연 속으로 뛰어 들어 갔다. 하얀 불빛으로 무수한 나방과 날벌레가 몰려 들 듯이 유리카의 무모한 돌진을 기꺼이 반기는 들개 같은 자들도 그녀에게 몰려들었다. 아동시설, 하세가와, 기자키, 야다 모두 그녀를 이용하려 든다. 이제껏 사회를 만들고 지탱해 온 구조는 개인 하나가 달려들어 머리를 짓이긴다 해도 꿈쩍도 하지 않는다. 더군다나 들개 같은 자들은 나가떨어진 개인에게 달려들어 살을 파먹는다. 끔찍하고 무서운 현실이다.

하세가와와 야다, 기자키는 철저하게 유리카를 이용한다. 유리카가 어떻게든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이중으로 속임수를 쓰며 애를 쓰지만 그들의 손바닥 안에서 조금도 벗어날 수 없다.

 

 

“가장 갖고 싶은 것은 내 손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걸 깨달은 게 언제쯤이었을까.” (p.7)

“……뭐랄까, 괴물이야, 그 사람은. 자, 그럼.” (p.27)

 

그렇다. 개인은 그렇다. 할 수 있는 것이 뭐가 있을까. ‘개인’의 가치라는 것이 그 어떤 곳보다 경시되는 사회에서는 더욱 박탈감은 커진다. 괴물과 같은 구조와 들개 같은 자들 사이에서 유리카는 철저하게 유린당한다. 한 건에 삽십만 엔도 오십만 엔도 벌어들일 수 있는 그 일을 유리카는 자신의 의지로 한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그들의 손아귀에서 한 치도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이다. 갖고 싶은 것을 마음껏 가질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결코 그렇지 않았다.

괴물 같은 세상과 사람들에게 철저히 유린 되었다. 유리카 자신도 미처 깨닫기도 전에.

 

 

“……이용할 사람을 선정하고, 그자의 약점을 인위적으로 만들어내는 것. 이 세계에서 역사적으로 줄곧 해온 일이야.” (p.74)

 

처음 그 일을 시작하면서 유리카는 그자들의 약점을 인위적으로 이용하고 만들어냈다고 생각했다. 들개들도 그렇게 말해줬고 그자들이 가진 구조에 기인한 기득권의 손톱만큼 정도만 이용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 세계에서 줄곧 해온 일이고 지금도 하고 있고 앞으로도 문명이 존재하고 이 세계가 지속되는 한 줄곧 이어질 것이기 때문에 값싼 동정이나 자책 따위는 필요하지 않았다. 시원하게 짱돌을 던지는 것처럼 그들을 향해 전기충격기를 들이 밀고 꼼짝하지 못하게 약을 먹였다. 어차피 전기충격기의 충격에서 깨어나고 약 기운에서 깨어나면 그들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 구조 속에서 안위를 누리고 또 다시 그 구조를 공고히 하는 일을 하며 살아가니까. 그것이 세계의 질서이고 구조의 속내니까.

 

 

“학대를 당하면서도 필사적으로 애원하는 여자의 표정이 내 안의 뭔가를 찌른다. ‘제발 부탁이야! 아아아! 부족해! 좀 더, 제발 부탁이야!’ (p.102)

 

작품 속에서 사디즘보다 마조히즘이 더 지배적 위치를 가진다고 표현한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개인을 향한 들개와 구조의 사디즘적 공격에 피동적으로 반응하는 개인은 마조히즘적 태도로 방응하고 그것이 결국 반격이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 또한 결국 구조를 벗어날 수 없는 한계가 정해져 있다. 마조히스트라는 존재적 한계를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묶여 있고 옴짝달싹 할 수 없는 상태에서의 반격이라고 해봐야 별 볼일 없는 것이다. 내 손과 발은 여전히 묶여 있고 저들은 여전히 군침을 흘리고 있다.

 

 

“가장 갖고 싶은 것은 내 손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걸 깨달은 게 언제쯤이었을까. 지금도 나는 그것을 갖고 싶은 것일까. 만일 그것이 내 손에 들어온다면 무엇을 할까.” (p.203)

 

유리카는 늦게나마 발견한다. 가장 갖고 싶은 것을 결국 가질 수 없다는 현실을.

절대로 구조를 벗어나거나 이겨낼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패배자로 낙인은 찍힌다면 유리카가 아닌 나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어떻게 해서든지 구조의 끄트머리라도 붙잡고 늘어져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과감하게 벗어던지고 자유로운 개인이 되어야 하는 걸까. 쉽게 선택할 수 없는 문제다.

갖고 싶은 것이 몇 가지 있다. 유리카처럼 내가 원하는 것을 내 손에 넣지 못한다는 깨달음 따위 하고 싶지 않다. 한번만 내 손에 쥐어 준다면 멋지게 사용할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래서 철벽과 같이 둘러친 구조 속에서도 며칠을 굶주린 늑대 무리 속에서도 요리조리 피해 다니는 것으로 그들을 골려 주며 신나게 지낼 수 있다. 한 번만 기회를 주시기를…….

아! 유리카처럼 낭패를 먼저 선사하신다면 저는 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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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려지지 않은 밤과 하루
배수아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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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더위를 유달리 많이 탄다. 집안 내력인 탓이다. 아버지는 조금만 뜨거운 음식이나 조금만 매운 음식을 드셔도 땀을 비 오듯 흘리신다. 나와 내 동생도 아버지의 그런 기질을 그대로 닮았다. 그래서 중학생이던 어느 여름 날 밥상머리에서 어머니가 숟가락을 내려치시며 화를 내신 적이 있다. 그때도 분명 뜨거운 음식을 먹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 되는데 밥상에 앉은 세 남자가 하나같이 땀을 주륵주륵 흘리고 있으니 갑자기 밥맛이 떨어지신 것인지 보기에 안쓰러운 것을 넘어 짜증이 나셨던 것인지 아무튼 화를 내셨다. 대학 입학 후 지금까지 대한민국에서 가장 더운 도시 중 하나인 대구에서 살고 있는데 나는 대학 입학 첫 해 여름을 잊지 못한다. 여름방학을 맞아 내 손으로 돈 한번 벌어보겠다고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그런데 2주일 만에 그만 뒀다. 도로 이정표를 교체하고 수리하는 일이었는데 한 여름 대구의 더위를, 그것도 아스팔트 위에서 맛보니 이건 정말 장난이 아니었다. 원래 더위를 많이 타고 한 겨울에도 땀이 나는 기질인 내게 그 아르바이트는 지옥불과도 같았다. 2주 일 하고 바로 고향으로 내려갔었다. 더위 중에서도 푹푹 찌는 습기가 가득한 눅눅하고 기분 나쁜 더위를 가장 싫어한다. 차라리 햇볕이 미친 듯이 내리쬐고 기온이 쭉쭉 올라가는 폭염은 그나마 낫다. 나를 둘러 싼 온 세계가 원래부터 물을 잔뜩 먹은 스펀지 마냥 축 늘어지는 여름 더위에는 그대로 K.O패다.

 

 

 

“창문을 열면 흠뻑 젖은 담요보다도 더 묵직하고 둔중한 더운 공기가 선풍기도 에어컨도 없는 좁다란 방 하나짜리 집 안으로 뜨거운 살덩이처럼 밀려들었고” (p.31)

 

이 책에서 반복적으로 묘사되는 문장이다. 전체 작품의 내용만큼이나 등장인물 또한 이런 분위기다. 모호하고 아리송하고 개운하지 않다. 배수아 작가의 작품은 처음인데 솔직히 나와는 맞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가 이 작품 속에서 반복적으로 묘사하는 저 분위기만큼은 100% 이해할 수 있었다. 전역 후 바로 취업을 했다. 혼자 살아야 했기에 직장 근처에 살 집을 구했다. 직장의 위치가 시내 중심이라 집값이 만만치 않았다. 3년 6개월 동안 군대에서 갖은 고생을 하며 모은 돈을 몽땅 쏟아 부어도 허름한 원룸 한 칸에 만족해야 했다. 그 곳에서 4년 정도 살았는데 정말 여름에는 최악인 주거지였다. 원룸 촌이 모여 있어 창을 열어도 맞바람이 불지 않는 구조였고 처음 들어 간 해에는 에어컨도 없었다. 에어컨을 틀어도 상황은 그다지 나아지지 않았다. 시내 근처라 열섬현상도 심각했던 것 같다. 퇴근 후 샤워를 하고 잠시만 앉아 있어도 땀이 주르륵 흘렀다.

 

“창문을 열면 흠뻑 젖은 담요보다도 더 묵직하고 둔중한 더운 공기가 선풍기도 에어컨도 없는 좁다란 방 하나짜리 집 안으로 뜨거운 살덩이처럼 밀려들었고”

 

담요보다도 더 묵직하고 둔중한 더운 공기가 어떤 것인지 나는 정확하게 알 수 있다. 결코 잊을 수 없는 그 후텁지근하고 기분 나쁜 여름 밤 공기. 기분 좋게 TV를 보다가도 금세 스트레스 지수가 폭발할 수 있을 정도의 그 여름 밤 공기. 한 여름 만원 버스 안에서 엉겁결에 내 팔뚝에 비벼진 찐득찐득하고 뜨거운 그 사람의 살덩이. 사실 기분 나쁜 것보다 짜증이 난다. 그렇게 매년 더위에 완패를 당하기를 4년을 하고 나니 ‘여름’하면 치가 떨렸다.

 

 

“헤더야트는 이란의 작가로 「눈먼 부엉이」는 그의 대표작이죠. 고통과 몽환으로 가득 찬 분위기와 염세주의 미학으로 이름 높은 작품입니다. 특히 작품의 곳곳에 등장하는 신비한 반복 진술이 환상과 초현실주의적 효과를 느끼게 합니다.” (p.119)

 

주인공 아야미가 일하던 오디오 극장에서 상영한 공연이다. 아야미가 공연 전 관객들에게 작품 설명을 하는데 마치 배수아 작가가 독자인 내게 들려주는 작품 설명 같았다. 헤더야트와 「눈먼 부엉이」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내가 이 작품을 읽으며 느낀 감상이 그대로 표현되어 있다.

작품에 등장하는 아야미와 극장장 여니……. 모두 고통을 가진 인물들이다. 각자의 삶은 철저하게 독립되어 있지만 동시에 철저하게 얽혀 있다. 벗어날 수 없는 숙명을 지고 태어 난 것처럼 그렇게 따로 떨어져 함께 존재하고 있다. 그들의 고통은 서로로 인해 가중되고 상쇄된다. 작품 속에서 작가의 이러한 의도를 하나하나 찾아보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었다. 사실, 책을 다 읽고 난 뒤에도 정확하게 어떤 의미인지 알지 못하겠다. 하지만 분명한 건 삶에 내재된 고통과 혼란의 실제가 때론 몽환적으로 염세적으로 표현되고 받아들여지는 탓에 그나마 삶의 끈을 놓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한 여름 기분 나쁘고 나를 녹다운 시키는 작은 원룸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더운 공기처럼 숨이 막힐 듯 막힐 듯 하지만 겨우 잠들어 버리면 아침은 또 온다. 비록 그 아침이 여전히 25도가 넘는 열대야의 더운 공기를 그대로 들어 마신 찝찝하고 개운하지 않은 아침일지라도 아침은 아침이다. 새로운 시작이니까.

 

 

“버스는 남자의 몸 바로 앞에서 기적처럼 멈추어 섰고 이미 남자의 몸은 도로에 길게 쓰러진 뒤였다. 길게 누운 커다란 짐승 같은 검은 덩어리. 환하게 실내등을 밝힌 버스 안에는 여러 명의 여자들이 탁자를 둘러싸고 반듯하게 앉아서 책을 읽고 있었으며 가장 어두운 뒷자리 구석에는 가사를 걸친 승려가 눈을 감고 앉아 있었다.” (p.82)

 

그렇다 하더라도 나는 이런 문장을 대할 때 난감하다. 도무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아먹을 수가 없다. 문학적 감수성이 떨어진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이건 뭐 아무리 들여다봐도 잘 모르겠다.

뭔가 몽환적이고 사이키델릭하며 엽기적이고 그로테스크한 장면인데 뭘 말하고 싶은지는 모르겠다. 인상 깊게 봤던 영화 「파고」의 그 메마른 스크린이 생각나기도 하고 실존주의 영화의 대가 홍상수 감독의 「생활의 발견」도 생각나는데 왜 그 영화들이 생각나는지도 잘 모르겠다.

소설을 읽고 ‘잘 모르겠다.’라는 서평을 쓰고 있는 나를 더 잘 모르겠다. 흐흐흐…….

 

 

“아야미는 조그맣게 소리 내어 시집의 제목을 읽었다.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p.157)

 

그 불쾌했던 한 여름 더운 공기를 온 몸으로 맞았던 그 여름 날 밤 비루한 원룸 안에 누워 있는 것처럼 찝찝하다. 그들은 고통을 몸으로 그대로 감내한다. 특별하게 이겨내려 몸부림치거나 발버둥치는 것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어쩌면 소설 속 인물들은 자신들이 어떤 고통에 놓여 있는지조차 몰랐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이르니 그것은 고통이 아니라 떨어질 듯 끊어질 듯 위태롭게 이어진 낡은 실 한가닥같은 위안일수도 있겠다. 당연히 그 위안조차 그들이 의도하지 않았던 것이다. 한 여름 시원한 수박 한 통 잘라먹고 사방이 트인 넓은 평상에 드러누워 반나절 달콤한 낮잠을 잘 수 있다면 생각만으로 유쾌해 진다. 소설 속 인물들은 그렇게 단 한 번도 시원하게 서로를 마주하거나 속 시원히 서로를 내보이지 않는다. 말을 감추지 못하고 드러내고 온몸의 감정을 하나도 숨기지 못하고 얼굴에 그대로 드러내는 나와 같은 기질의 사람에게는 분통 터지는 답답한 처사지만 이런 유의 소설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꽤 공감을 얻어낼 수 있는 상황과 내용일 것 같다.

 

괜스레 오기도 생긴다. 한 여름에 배수아씨의 다른 작품을 읽어보고 싶다는. 에어컨도 선풍기도 틀지 않고 온 집에 있는 창문이란 창문은 모두 단단히 닫은 채 하얀 책 위에 투명한 땀을 후드득 흘려 가며 읽어보고 싶다. 그러면 그녀의 작품을 조금 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 둔중하고 묵직하며 불쾌한 공기를 온 몸으로 맞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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쟁경 - 동양 고전에서 배우는 이기는 기술
자오촨둥 지음, 노만수 옮김 / 민음사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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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는 실로 장구하다. 학창시절 세계사의 한 꼭지로 다룰 만한 것이 아니다. 삼국지 같은 역사 소설로만 인식할 수도 없다. 그런 면에서 「쟁경」같은 책은 군 시절 도저히 끝날 것 같지 않던 작업량을 눈앞에 마주 하고 절망에 빠진 이등병에게 슈퍼맨처럼 나타난 말년 병장의 신들린 듯한 삽질과 같다. 중국 고대 왕국부터 청나라에 이르기까지 수천 년을 가로지를 역사서를 단번에 볼 수 없다. 그 방대한 분량 앞에 기만 죽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알고리즘에 의한 공부는 필수적이다. 특정한 영역을 선택해 접근하는 방식이다. 이 책은 수천 년을 이어 온, 그래서 접하는 이로 하여금 기가 질려 도저히 들여다 볼 수 없을 정도로 장구하고 방대한 중국의 역사 중에서 그 역사를 만들어 온 사람들의 말(論)을 모아 놓은 책이다. 역사라는 것이 입(口)으로 전해진 시기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기록이다. 딱딱한 만연체로 서술된 역사는 지겹다. 이 책은 말(論)을 그대로 풀어내고 소개한다. 지겹기는커녕 900페이지가 넘는 잠들기 딱 좋은 분량이지만 긴장감이 있다. 장강의 길이만큼 길게 펼쳐진 중국의 역사를 논쟁(論爭)으로 풀어낸다. 쟁(爭)이지만 단순히 정치적인 다툼이나 토론만이 아니라 말(論)로 인해 일어난 여러 가지 국면에 대한 사례를 알기 쉽고 재미있게 소개한다.

책의 범위는 이러한 논쟁(論爭)의 역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춘추전국시대부터 중국의 마지막 왕조 청나라까지다.

 

이 책을 한 마디로 ‘말의 역사’라고 함축해도 무방할 것이다.

책에 소개된 수십 명의 황제에서부터 책사, 정치인, 환관들의 말은 지금의 중국을 만들어 온 역사다. 수천, 수만 명의 군사보다 한 사람의 말이 역사의 방향을 완전히 바꾸기도 하고 목숨을 내어놓는 용기로 악행을 저지르는 왕과 황제에게 간언을 하기도 한다. 또 욕심과 쾌락에 빠졌지만 이러한 신하와 간관의 충언을 들어 자신의 잘못을 뉘우쳐 바른 정치를 시행한 왕과 황제도 소개 된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진시황, 공자, 노자, 장자, 제갈량도 나온다. 한 권의 책에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의 ‘말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다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다.

말로 인해 성공을 하기도 하고 실패를 하기도 하는 것이 어찌 보면 인생의 무상함을 표현하는 것 같기도 하지만 당시를 살았던 그들에게는 그것이 삶의 가장 적극적인 자세였을 것이라 생각된다. 그래서 따로 구분을 하거나 작위적으로 해석하지 않고 책의 흐름대로 1부에서부터 4부까지의 내용 중에서 기억에 남는 ‘말’들을 소개하고 내 의견을 간략하게 덧붙이는 형태가 좋을 것 같다.

 

 

 

1부 춘추전국시대 책사들이 천하를 종횡하고 논변의 백가쟁명이 일어나다

 

“춘추 전국 시대로 접어든 뒤 논변은 불꽃이 활활 타오르듯 그 기세가 자못 왕성한 형세였다. 혀는 검과 같고 입술은 창과 같은 논변가들이 예리한 언사로 상대 논객과 날카롭게 맞서는 논변 장면이 사람들의 마음을 흥분시키고 격동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춘추 전국 시대는 말 그대로 군웅할거의 시대였다. 하루아침에 왕이 되고 왕이 죽고 나라가 바뀌고 온 산과 강은 피비린내로 진동을 하던 시대였다. 오직 칼만이 힘의 우위를 결정하는 시대였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실제로 많은 국면에서 논변가들의 말로 아위가 결정되었다는 것이 신기하면서도 허탈했다. 워낙 많은 나라가 태어나고 사라지는 것이 반복되는 시기였기에 조금 더 말을 잘 하고 내게 유리한 국면으로 이끌 수 있는 사람을 내 옆에 앉히는 것은 천하를 호령할 욕심을 가진 힘 있는 자들이라면 당연히 가졌을 욕심이었다. 그래서 이 책에서도 1부 춘추전국시대의 ‘말’들에 대한 분량이 가장 많다. 그 만큼 많은 말이 쏟아졌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감히 태후의 일로 나에게 간언을 하는 자가 있으면 옷을 벗겨 찔레 가시로 그의 골육을 도려내고 몽둥이로 때려 죽여, 그 사지를 잘라 대궐 아래 쌓으리라!”

 

의붓아버지를 거열형에 처해 죽이고 또 두 아우를 자루에 넣어 쳐 죽였으며 어머니를 부양궁에 옮겨 가두어 옴짝달싹 못하게 만든 그 유명한 진시황제는 그러한 자신의 처사에 대해 입만 벙긋해도 다 잡아다 죽였다. 말 그대로 입 다물고 있어야 했다. 그렇게 난장판이던 천하를 통일한 진시황에게 거칠 것이 무엇이 있었겠나. 신하라고 앉힌 자들은 모두 자신에게 감히 맞설 수 없는 자들이었을 것이다. 그러던 중 ‘모초’라 하는 사람이 아무도 할 수 없었던 간언을 진시황에게 올린다. 그가 간언을 하기 바로 직전 진시황의 심기를 거슬리게 한 신하 이십 여명이 그대로 처형되는 사건이 있었지만 모초는 두려움 없이 쫄지 않고 진정한 신하의 자세로 진시황에게 위 건에 대한 간언을 올린다. 처음에는 진시황이 당장 거열형에 처하라며 난리를 치는데 결국에는 모초의 간언을 받아 들여 자신의 악행을 바로 잡는다. 진시황이라 하면 폭군으로만 알고 있는 사람이 많은 데 사실 나는 모초의 용기도 대단하지만 아무것도 거칠 것 없던 진시황이 신하의 쓴 소리를 결국 들었다는 것도 대단하다고 생각 되었다. 물론, 그가 저지른 수많은 악행과 패악질은 비판받아 마땅하지만 최소한 목숨을 내어 놓고 올린 간언마저 내치지는 않았다는 것이 한편 다행이기도 하다.

 

“위세로써 백성들의 여론을 막는 짓은 마치 강물의 흐름을 막는 것과 같소. 방죽을 크게 터서 한꺼번에 흐르게 하면 더 큰 피해가 생기듯, 정치적 올도 크게 터질수록 반드시 백성들의 아픔만 커질 뿐이오.”

 

정나라 정치가 ‘자산’이라는 사람은 정나라 왕이 충언과 간언을 하지 않는 신하들에 가려 백성들의 목소리를 제대로 듣지 못하고 있는 실정을 강도 높게 비판했다. 백성들의 여론을 맞는 짓은 마치 강물의 흐름을 막는 것과 같다고까지 말했다. 자연스레 흐르는 강물을 막으면 필시 부작용이 생긴다. 섭리와 질서가 무너지면 옳은 일을 낳을 수 없는 것은 자명한 이치다. 자연스레 흐르던 대로 놔두면 되는데 억지로 막거나 방향을 틀려 하거나 더 높이 방죽을 쌓다가는 더 큰 일이 날 거라 말한다. 지금 한국의 상황도 비슷하지 않나 싶다. 국민들이 밑에서부터 부르짖는 목소리가 위정자들에게 자연스레 흘러 들어가고 있지 않는 것 같다. 이리 막히고 저리 막혀 상달되지 않는다. 한꺼번에 터져 감당 못할 지경에 이르는 것은 위정자들도 원하는 일이 아닐 텐데 백성의 아픔, 국민의 고통이 그대로 흘러 들어가기를 바라는 것은 무리한 일일까?

진나라 ‘모초’처럼 목숨을 내어 놓아야만 겨우 들어줄 것인지 모르겠다.

 

“앞뒤 가리지 말고 간언을 올리라는 명령이 떨어지자, 신하들이 앞 다투어 진언하는 모양새가 문정약시(門庭若市)를 이루었다. 제나라 위왕은 간언이 옳으면 반드시 따랐다. 한 해가 지나자 신하들과 백성들은 비록 간언을 하고 싶어도 말할 것이 없게 되었다. 제나라는 그리하여 재빠르게 강성해졌다.” 

 

제나라의 ‘위왕’은 모든 여론의 길을 열어 놓았다. 신하들은 물론 일반 백성들까지 더 이상 간언할 거리가 없을 정도로 언로(言路)가 열려 있고 이쪽과 반대쪽의 소통이 활발했다는 것이다. 그냥 듣는 것에 보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그 간언을 따랐다고 한다. 그래서 그렇게 어지럽던 시대에도 큰 성장을 이룰 수 있었다고 소개하는데 시사 하는 바가 크다. 물론, 올리는 모든 간언과 흘러가는 여론에 모두 따라야 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최소한 국가가 힘없는 국민들의 목소리에 귀를 닫고 있지는 않다는 아주 작은 위안 정도는 주어야 하지 않나 싶다.

 

“묵자 비공(非攻) 침략전쟁 반대, 비악(非樂)음악은 나라를 다스리는 데 이롭지 않다. 비명(非命) 숙명론은 ‘폭도의 이론’이다. 비유(非儒) 공자의 유학은 민생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시비를 논하지 않고 일체의 사물에 아랑곳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만물과 조화를 이루고 초탈하는 분기점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장자는 이렇게 주장 했다.”

“변론보다 침묵이 더 낫다.”

 

그런 반면에 ‘묵자’와 ‘장자’는 예의 시크함을 그대로 보여 준다. 두 사상가는 워낙 유명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들이 쏟아낸 무수한 ‘말’들이 있을 텐데 저자는 춘추전국시대 담을 수 없을 정도로 넘쳐나던 ‘말’들의 쓰나미에서 그것을 시크하게 비판하는 두 사상가의 삐뚤어짐(?)을 소개하는데 재미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묵자’의 견해가 더 와 닿는다. ‘장자’에 대해서는 책도 몇 권 읽고 워낙 많이 알려진 터라 주워들었던 내용인데 ‘묵자’의 것은 완전히 새로웠다. 찾아보고 싶다. 모두가 그것이 옳고 그쪽으로 간다고 해서 휩쓸리지 않고 좀 삐딱하게 자신만의 목소리를 내는 ‘묵자’가 오히려 멋있다.

 

춘추전국시대를 소개 하는 1부에 비해 나머지 2,3,4부는 분량도 적고 1부의 내용과 비슷한 것도 많다. 그래서 내용보다는 왕조가 바뀌면서 해당 왕조의 특성대로 ‘말의 역사’가 어떻게 달라졌는지 살펴보는 것이 의미도 있고 더 재미있다.

 

 

 

2부 백가쟁명이 끝나고 궁정 논변이 펼쳐지다. 양한·위진 남북조 시대

3부 쟁신을 육성하여 궁정 논변의 황금기를 이루다 당나라·송나라 시대

 

“유총은 여전히 삼가지 않으며 충신들의 간언과는 정반대로 환관 선회의 양녀를 중황후로 세웠다. 어쩌면 유총의 죄악이 너무도 많아, 주변 십 리 안에서 혈우(血雨)가 내렸을 것이다. 오래지 않아 유총의 아들 유약이 죽고 유총은 정신 착란을 일으켜 늘 귀신 소리를 들었다.”

 

중국 오호 십육국의 하나인 전조의 황제였던 유총은 이 책에서 가장 심한 악행을 저지른 군주로 보인다. 저자가 그렇게 소개하지는 않았지만 유총을 소개하는 부분의 처음부터 끝까지 그가 저지른 악행으로 가득하다. 오죽했으면 하늘에서 혈우(血雨)가 내리고 귀신이 도처에 깔렸으며 온갖 이상한 자연현상들이 넘쳐났다고 한다. 충성스런 신하들의 쓴 소리는 듣지 않고 환관들에게 전권을 내던진 채 오직 쾌락과 향락을 일삼고 백성들의 목소리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당연히 그와 그의 나라는 비극적인 결말을 맞는다.

 

“위징은 저명한 간관으로, 절묘한 그의 웅변은 설득력이 강했다. 위징은 당태종을 십칠 년간 보좌하며 수백 가지의 정사에 진언을 했는데 당태종은 이를 대부분 받아들였다. 게다가 당태종은 위징에서 수차례 큰 상을 내리고 작위로 여러 차례 올려 주었다.”

 

그와 반대로 당나라를 탄생시키고 초대 황제가 된 당태종은 ‘위징’이라는 신하의 간언을 소중히 여겼다. 수나라가 부정과 부패, 환관들의 정치로 무너진 것을 두 눈으로 봤기 때문에 더 간언을 잘 받아들였을 수도 있고 새롭게 시작된 당나라의 기틀을 다지기 위한 처세였기도 했겠지만 비극적인 결말을 맞은 전조의 황제 ‘유총’과는 판이하게 다른 모습을 보여 준 당태종이었다. 그 덕에 당나라는 빠른 시기에 안정적인 황권을 구축하고 중국의 역사 상 가장 위대했던 나라가 후대에 평가받기도 한 것 같다.

 

 

 

4부 소수 민족 정권과 함께 논변의 격변기를 맞다 원·명·청나라 시대

 

“원나라 왕조는 몽골 귀족 통치 계급의 이익을 대변하는 정권일 뿐이었다. 원나라 조정은 몽골 귀족의 기득권을 확보하기 위해 대다수의 한족 백성들을 차별하고 착취하는 통제 정치를 펼쳤다.”

 

마지막 4부에서는 저자가 다소 힘이 빠진 탓인지 아니면 정통 한족이 아닌 소수 민족이 잡은 정권이라 그래서인지 자세한 내용을 소개하지 않는다. 아무리 그래도 역사를 바꿀 수 없고 부정할 수 없는데 원·명·청나라 중에서 명나라에 비해 원·청나라에 대해서는 ‘원래 태생이 한족이 아니라 오랑캐이니 간관, 간언 이런 것은 애초에 기대할 수 없었던 시기’라고 얘기하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크게 다루지 않고 있다. 이 책에서 유일하게 아쉬운 부분이기 하다. 그리고 몽골에 대해서 우리들도 오랫동안 잘못 써왔던 단어 ‘몽고’를 책에서 여러 번 기술하는데 이것은 전형적인 중국인의 시각이다. ‘어리석을 몽(懞)’에 ‘옛 고(古)’자를 써서 몽골을 비하하는 표현으로 쓰인 것은 그대로 가져와 우리도 ‘몽고’라고 흔히 말해 왔지만 실제 몽골인 들은 이 표현을 굉장히 싫어한다. 분명하게 ‘몽골’이라 표현해야 한다. 중국인 저자가 그렇게 썼다하더라도 번역 과정에서 몽골로 바꾸어 표현했더라면 더 좋았을 듯싶다.

 

이 책은 900페이지 넘는 두꺼운 책이다. 그렇지만 읽어보지도 않고 지레 겁먹거나 지루해 하지 않기를 바란다. 책에 소개된 각 시대별 사례는 짧게 실려 있어서 띄엄띄엄 읽어도 무방하다. 이미 알고 있는 유명한 사상가, 황제, 정치가도 많아 그들의 새로운 면모도 발견하며 보는 것도 또 하나의 재미다.

모쪼록 한국에도 ‘말’이 넘쳐나는 ‘쟁(爭)’이 넘쳐나야 할 것이다. 막아 놓고 귀를 틀어막는 다고 해결되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모든 것은 대통령 탓이다.’라고 하며 마음껏 대통령을 씹고 돌리고 비틀어 대던 때가 그나마 지금 보다는 나았던 때라고 복기 해봐야 별 의미 없다. 신의 경지이던 황제조차 간언을 하는 신하와 백성들의 부르짖음을 들었는데 신도 아니면서 모든 것을 마음대로 하고 인의 장막에 가려 여론을 오판하고 있다면 거추장한 것들 좀 걷어내고 언로(言路)부터 좀 트여주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려 본다.

이 책은 위정자들부터 읽게 해드리는 것이 옳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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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과 낮 사이 1 밤과 낮 사이 1
마이클 코넬리 외 지음, 이지연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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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과 낮 사이」두 권은 전문적인 견해는 아니지만 미국 문학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는 듯하다. 좀 더 아마추어 적인 개인적 표현을 하자면 미국 냄새가 나는 작품인 듯하다. 미국 작가들의 작품을 많이 읽지는 않아서 기껏 읽어본 작품이라야 전 세계적으로 알려진 몇 작품에 불과하다. 그 중에서도 으뜸은 「분노의 포도」였다. 불멸의 역작 펄 벅 여사의 「대지」에 버금가는 작품이었다. 최근에는 업튼 싱클레어의 「정글」이 인상 깊었다. 생각해보니 둘 다 장편 소설인데 자음과모음에서 출간된 「밤과 낮 사이」는 단편 소설을 묶었다. 묶인 수십 편의 작품들 모두 재미있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처음에 얘기한대로 뭔가 미국 냄새가 나는 작품들이었다.

 

 

1권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작품은 「심술생크스 여사 유감」이라는 작품이다. 이 책에 묶인 작품들은 장르도 다양한데 로맨스에서부터 스릴러에 이른다. 「심술생크스 여사 유감」은 딱히 어떤 장르라고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가벼운 것 같으면서도 소설 이면에 내포된 의미가 다면적이다.

 

 

“여기요, 편집장님. 심술생크스 여사의 이번 주 습격이에요.”

“일주일에 한 번씩 시계처럼 꼬박꼬박 그들이 냈던 기사를 자기 식으로 교정 본 것이 배달된다. 온통 눈이 어질어질할 지경으로 빨간 잉크투성이가 돼서 온다.”

 

심술생크스 여사가 사는 작은 동네는 늘 심술쟁이 할머니로 인해 골치가 아프다. 특히 신문사는 죽을 지경이다. 찔러도 피가 나지 않을 정도로 딱딱하고 생크스 할머니 주방 냉장고 위를 스윽 문질러도 먼지 한 톨 묻지 않을 정도로 철두철미한 성격과 기질의 소유자이기 때문이다. 뭐 이런 성격은 사실 많은 장점도 가지고 있다. 다만 그것이 자신에게 뿐만 아니라 타인에게 요구될 때는 피곤해 진다.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많이 피곤해 진다. 아니 자신의 성격과 기질은 자신에게는 편하고 당연한 것일 수 있다. 그렇게 살아왔고 그렇게 살아갈 것이니까. 하지만 주변 사람들, 타인들에게 그것이 요구될 때는 문제가 달라진다. 작은 마을 신문사는 심술 생크스 여사의 이런 기질과 타인을 향한 요구로 죽을 지경이다. 편집장은 노이로제에 걸려 심술생크스 여사가 보낸 빨간색 잉크 투성이의 기사를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한다. 사소한 오탈자부터 어색한 문맥(물론, 심술 생크스 여사의 개인적인 입장에서)에 대한 교정, 조금이라도 틀린 내용이 있으면 그녀의 빨간 펜이 가차 없이 춤춘다. 처음 몇 번은 이렇게 자신들의 기사를 꼼꼼하게 읽고 정성 들여 교정해 준 것에 고마워한다. 그러나 이것이 한 번 두 번, 수십 번 반복되면 정말 미쳐버린다. 예전 직장의 모과장도 그랬다. 기획안이나 결재안의 내용을 보는 것이 아니라 표가 작다느니, 그래프를 더 명확하게 표시하라느니 크게 중요하지 않는 것으로 몇 번이고 되돌려 보내고는 했다. 그래서 나를 포함한 부하 직원들은 아예 결재를 요하는 서류는 놔두고 일부러 미완성된 서류를 미리 가져가 몇 번 퇴짜를 맞은 후 완성된 기 서류를 들고 가고는 했다. 몇 번이고 되돌아오면서 쏟아낸 모과장을 향한 욕설과 탕비실에서 내 뱉은 저주로 인해 그 모과장은 아마 200수는 천명을 누릴 것이라 확신 한다.

심술생크스 여사의 주변도 그랬다. 편집장은 어김없이 배달되는 여사의 빨간 잉크 교정본을 본체만체 하는데 이른다.

우편을 배달하는 직원을 붙잡고 매번 심술을 부리고 트집을 잡기 일쑤다. 그래서 그 직원은 심술생크스 여사가 집 앞으로 나오는 시간을 정확히 체크해 두고 있다가 그녀가 집 안으로 들어가면 광속과 같은 속도로 달려가 우편물을 집어넣고 도망가기도 했다.

그야말로 마을의 골칫덩어리가 된 것이다. 하지만 내 예전 직장의 모과장도 그런 것처럼 이런 사람들은 늘 상대방을 탓한다. 사람들이 왜 자신에게 그렇게 대하는지, 왜 자신을 멀리 하는지 알지 못한다. 아니, 알려고 하지 않는다. ‘자신이 100% 맞다.’라고 결론만 내리면 이후의 일들은 편하다. ‘내가 아니라 니가 잘못한 거야. 당신들이 틀린 거야.’ 낙인찍어 버리면 그만이다. 그렇게 심술생크스 여사는 마을 사람들로부터, 모과장은 직장 동료들로부터 멀어져 간다.

 

 

“이웃집 여자가 건너와 경찰이 들어갈 수 있도록 문을 열어주자, 그들은 집주인이 1층 층계참에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앙상하게 마른 목에 교살흔이 남아 있었다. 빨간, 그녀의 펜에 담겨 있는 잉크처럼 새빨간 손자국이었다.”

 

그러던 중 심술생크스 여사가 자신의 집 안에서 피살당하는 일이 발생한다. 작은 마을이기에 충격적인 뉴스가 된다. 그런데 사람들의 반응은 미리 짠 것처럼 똑같다. 사건을 수사하는 경찰들도 소식을 알리는 신문사도 다른 주변 사람들도 비슷한 반응을 보인다.

 

 

“하나님이 보우하사 이거야말로 사상 최고로 긴 피의자 명단이 나올 사건이구먼!”

“경찰은 아직까지 아무도 체포하지 않았는데, 이는 용의자가 너무나도 많았기 때문이다.”

“알잖나, 아무리 우리가 이 사건의 범인을 발견해서 재판에 회부한다 해도, 피고인 측 변호사가 피고 외에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 여자를 증오했는지 입증하면서 아주 신나게 판을 벌여놓을 거야. 그거면 어떤 배심원이라도 ‘합리적인 의혹’에 근거한 무죄 평결을 내기에 충분할걸.”

 

심술생크스 여사의 목에 교살흔을 남긴 용의자의 대상이 너무 방대하다. 아무리 심술생크스 여사의 심술이 도가 지나치고 많은 사람들을 피곤하게 하고 괴롭혔다 하더라도 아니 사람이 죽었는데 이 사람들의 반응이 이상하다. 확고하고 분명한 법집행을 행사해야 할 사람들도 미리 고개를 내저었다. 사상 최고로 긴 피의자 명단이 나오더라도 그 판결이 심술생크스 여사로부터 피곤함을 당한 주민들이 배심원으로 참여하는 판결이 될 것이기에 무죄 판결을 미리 짐작한다.

사실 나는 이 작품을 읽으며 등골이 오싹했다. 집단·군중의 심리가 이렇게 작용된다면 무섭고 차가운 세상이 될 것 같았다. 심술생크스 여사가 그만큼 사람들에게서 미움을 받고 원망을 사는 일을 평소에 얼마나 많이 했으면 이런 결론이 맺어질까 싶으면서도 마치 중세 마녀사냥처럼 나는 분명 맞는 것 같은데 나를 제외한 다른 모든 사람들이 틀렸다고 한다면 내가 마녀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작품을 읽으며 몇 몇 기사가 생각났다. 아파트에서 사람이 죽었는데도 전혀 주변에서 알지 못해 나중에 시체가 썩는 냄새가 온 아파트에 진동하고서야 문을 열어봤다는 기사들 말이다. 당장 내 앞집, 윗집, 아랫집에 누가 사는지 모르고 인사 한 번 나눠보지 않은 내 사는 모습도 뇌리를 스쳐갔다.

물론, 심술생크스 여사 같은 사람들도 좀 마음을 열고 타인과 상대방에게 다가가야 한다.

내 집에서 죽었는데도 제대로 범인을 잡지 못할 것 같은 삶을 살아서야 되겠나.

 

 

또 인상 깊었던 작품은 「첫 남편」이라는 작품이다. 우연히 발견한 아내의 옛 사진에 담긴 옛 연인과의 다정한 아내의 모습에 편집증적인 집착과 의심을 시작하고 결국 그 사진 속 아내의 옛 애인을 살해하는 내용이다.

너무나도 아름다우신 다이안레인 누님이 주연한 영화 『언페이스플』이 생각났다. 젊은 남성과의 아슬아슬한 밀회를 즐기다 남편인 리처드기어 형님이 알게 되고 결국 젊은 남성을 살해한다.

 

“나하고 단둘이 되고 싶지 않은 거야. 이 여자가 나를 그놈과 비교하는 거지, 안 그래!” 편

“나를 사랑하긴 했어, 발레리? 처음에 나하고 결혼했을 때라도 말이야.”

“잠시라도 날 사랑했어? 처음에라도? 사랑한 때가 있기는 했어?”

 

한 번 빠진 의심은 걷잡을 수 없다. 평소와 다름없는 아내의 행동도 다르게 보이고 다르게 판단한다. 전후 사정을 조금만 따져 보고 아내와 허심탄회하게 대화만 했어도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하지는 않았을 텐데 이 작품의 남편은 한 번 정한 방향으로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질주한다. 의심은 커지고 확신이 된다. 의심에서 확신이 되는 데 긴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이게 무서운 것이다. 유턴을 할 수 없는 무제한 고속도로를 하릴없이 내달리는 꼴이다. 다이안레인 누님은 젊은 남성과의 밀회를 정확하게 들켰지만 이 작품의 아내는 그저 남편의 의심으로 부정을 저지른 못된 여자가 되어 버린 것이다. 남편은 자신의 가정을 지키기 위해서라고 변명을 할지도 모르겠지만 그것으로 인한 파국은 되돌릴 수 없다.

이제 결혼 3년차 남편인 나는 저 남편처럼은 되지 않아야지 소심하게 다짐해 본다. 당연히 나도 행동거지 조심하고^^

 

 

2권에서 인상 깊었던 작품은 「오 양의 정반대」라는 작품이다. 저자인 마틴 리먼은 20년간 미군에 복무한 퇴역 군인이고 그의 복무 기간 중 10년은 한국에서 보냈다. 주한미군 출신이다. 그래서 등장하는 인물과 지명이 반가웠다. 이 작품을 제외한 1,2권 모든 작품이 외국이 배경인데 딱 한 편 이 작품에서 한국사람 이름과 지명이 나와 반가웠다. 하지만 내용은 그리 반갑지 않았다.

 

“지리학상으로 말하면 한국이 지구상에서 미국과 정확하게 정반대 위치에 있지는 않지만, 그래도 상당히 그에 가깝다. 여기에서는 온갖 것이 다 다르다. 사람들이 인생을, 인간관계를, 이 세상에서 자신이 있는 곳을 바라보는 눈이 미국에 거주하는 이들과 같지 않다.”

 

미국과 지리상으로 떨어진 거리만큼 한국은 미국과 다르다. 미국과의 인연은 다른 어떤 국가보다 오래 되고 돈독하지만 그래도 많이 다르다. 미국이 한국을 보는 눈과 한국이 미국을 보는 눈도 많이 다를 것이다. 한국 내에서도 미국에 대한 생각이 천양지차다. 나의 군 생활 중에서도 설문을 했는데 우리의 주적이 북한이 아니라 미국이라 표기한 숫자가 상당했으니 말이다. 주한미군을 보는 한국 사람들의 눈과 한국 사람들을 보는 주한미군의 눈 또한 하늘과 땅 차이인 것은 당연하다. 이렇게 다른 차이에도 미국, 미국 하는 걸 보면 배알이 없는 것인지 심성이 너무 착한 것인지 알 길은 없다.

이 작품은 철저하게 한국에 주둔한 주한 미군의 눈으로 사건을 풀어낸다. 그래서 좀 불편하다.

 

 

“8군에 돌아와서 나는 보고서를 타자 쳤다. 에버렛 P. 로텐버그 일병은 한국 경찰에게서 풀려났다. 딱한 노릇이 된 신 씨는 병원으로 실려 갔고 별 탈 없이 잘 낫고 있었다.”

 

수십 년간 주둔해 온 미군의 기간만큼 그들로 인해 발생한 범죄도 많았다. 특히 기지촌 여성들에 대한 범죄. 이 작품도 기지촌에서 일하는 오 양이 살해된 것에서 이야기가 시작 된다. 유력한 용의자 로텐버그 일병은 결국 풀려났고 신 씨라는 사람이 용의자로 대두된다. 작품이 명확한 결말을 맺고 있지 않기 때문에 실제로 오 양을 살해한 범인이 누구인지는 알이지 못하겠다. 하지만 여전히 계속되는 주한미군에 대한 여러 가지 문제가 또 다시 상기되어 불편하고 또 불편했다. 예전처럼 주한미군 철수를 내건 목소리는 많이 들리지 않지만 여전히 그들이 한반도의 운명을 좌지우지 하는 중요한 도구가 되고 있는 지금이다. 언제쯤이나 이런 문제들이 해결될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통일이 되어도 미군은 계속 이 곳에 주둔하고 있을 것 같다는 씁쓸한 확신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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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려라, 돌콩 자음과모음 청소년문학 30
홍종의 지음 / 자음과모음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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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공일, 159cm, 46kg, 홀어머니, 이복 형, 학교폭력 피해자, 기수

 

오공일이 갖춘 조건은 전형적인 루저가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공일(일요일)에 태어나 오공일로 이름 붙여졌고 남성의 평균 신장에 십 여 센티미터가 모자라며 아버지는 비명횡사 했고 배다른 형이 있고 형수는 지독히도 싫어한다. 학교에서는 늘 두드려 맞기 일쑤였고 자퇴를 했다. 할 수 있는 것도, 하고 싶은 것도 없었다. 우연히 기수를 검색하다 무작정 기수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런 오공일이 한국 땅에서 할 수 있는 것이 몇 가지나 될까. 비명횡사한 아버지가 엄청난 부자가 아닌 이상 사회에 진출해 성공할 확률은 아주 작다. 아직 제대로 꽃망울도 피워보지 못한 아이들이 수십 미터 아파트에서 뛰어 내리는 일이 비일비재한 이 사회에서 오공일이 비집고 들어갈 자리는 없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가정문제로, 학교폭력문제로, 성적문제로 아이들은 떨어지고 또 떨어진다.

아이들이 더 이상 캄캄한 땅 밑으로 몸을 던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이 사회는, 이 국가는 하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 왜 저러지? 나약해 빠져가지고 말이야!, 학교에서만은 떨어지지 않도록 창문을 열지마!! 이런 정도다.

오공일은 우연히 찾아 본 기수라는 직업을 통해 자신의 꿈을 실현해 낸다. 기존 사회에서 사람들이 실패할 거라고, 사회의 루저가 될 거라고 짐작하고 판단하고 폄하했지만 오공일은 해 낸다. 이 책 「달려라 돌콩」은 그래서 신난다. 오공일을 향한 사회와 사람들의 이죽거림에 어퍼컷을 날린다. 그래서 다행이다. 참 다행이다.

 

 

“도민이는 형의 아들로 나보다 두 살 많지만 족보상으로 엄연한 조카다. 그놈도 나를 철저하게 무시한다. 도민이는 일찌감치 축구 선수가 되어 대학의 스카우트가 확정된 상태였다.” (p.13)

 

배 다른 형의 아들은 조카지만 모든 면에서 오공일을 능가한다. 인물도, 조건도, 능력도 오공일보다 낫다. 그래서 주눅 들어 산다. 눈도 제대로 맞추지 못하고 피해 다닌다.

 

 

“엄마! 형의 입에서 엄마라는 소리가 나오는 것을 처음으로 들었다. 네 엄마라는 3인칭이 아니라 그냥 엄마다. 나의 엄마, 형의 엄마다. 가슴에서 무엇인가가 치밀어 오르더니 목구멍을 콱 막았다. 숨이 막혀 당장 죽어 버린다 해도 정말 뱉어 내고 싶지 않았다.” (p.42)

 

배 다른 형에게서 어쩌다 ‘엄마’ 소리가 나온 것에 이 정도의 의미를 둔 나약하고 작고 애달픈 캐릭터가 오공일이다. 구제역에 걸려 죽음을 앞둔 형의 목장에 있는 소 우공일도 그랬다. 죽음을 직감한 듯이 평소 천방지축이던 우공일이 체념한 듯 그렇게 좋아하는 들콩도 받아먹지 않는다. 오공일과 너무 비슷하고 닮아 소‘우’자를 붙여 우공일로 이름을 붙였다. 누구에게도 허락하지 않았던 등을 오공일에게 내어 준 녀석이었다. 기수를 준비하기 전 일을 하던 형의 목장에서 녀석은 유일한 오공일의 친구였다. 그런데 그 녀석도 죽었다.

하지만 오공일 곁에는 금자, 영태, 아영이가 있었다. 자신의 일처럼 발 벗고 나서주는 금자와 오공일을 향한 폭력 행사자였지만 기수가 되려는 오공일을 도와주는 영태, 학교 일진에 어마어마한 부잣집 딸이지만 아픈 가정사를 가진 아영이가 곁에서 오공일을 지켜 준다.

 

몇 년 전에 이 책을 읽었다면 나는 좋은 평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거 뭐 전형적인 청소년 소설이네~. 결국 잘 되는 거잖아. 현실에서는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일들 말이야.’ 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돌콩 공일이의 스토리는 다르게 다가 왔다. 현실에서 청소년들이 겪는 스트레스는 어른들이 생각하는 이상이다. 수치상으로 따져 볼 수 없을 정도로 차이가 크다. 20대 30대가 50대 60대와 겪는 세대차의 몇 곱절은 될 것이다. 나도 이제 어느 정도 나이를 먹었는지 요즘 아이들을 보며 마음속으로나 입 밖으로 ‘우리 때는 저러지 않았는데.’ 하기도 한다. 실제로 아이들이 될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을 전적으로 이해할 수는 없다. 그 아이들의 부모도 모르는 속을 타인이야 어떻게 짐작할 수 있나. 없다.

작품 속에서나마 모든 조건이 루저로 향하는 공일이가 사회에서 만들어 놓은 당연한 듯 여겨지는 궤도를 떠나 자신만의 길을 발견하고 그것을 향해 가는 과정에서 좋은 조력자들을 만나는 과정이 내게도 위로가 되었다. 내가 다시 고등학생이 되어 공일이와 함께 꿈을 이뤄가는 것 같기도 했고 공일이 옆에서 공일이를 도와주는 사람들에게 절이라도 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출산율이 너무 저조합니다. 어서 어서 아이를 낳으세요!! 국민의 의무를 다하세요!! 일단 낳으세요!”

떠들지만 일단 낳으면 아무도 책임져 주지 않는 현실이다.

“학생들 힘내세요!! 우리가 도와줄게요!! 여러분은 소중합니다. 우리의 미래입니다!!”

떠들지만 여린 순 같은 아이들을 폭풍 같은 경쟁 속으로 밀어 넣기만 하는 것이 현실이다.

 

이런 것을 생각하니 공일이의 스토리가 더 반갑고 신난다. 비록 현실에서는 공일이와 같은 스토리를 접해본 적은 없지만 이런 스토리라면 아이들이 스스로 제 목숨을 내던지는 일은 없을 것 같았다. 말로만 공치사를 날리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책의 저자 홍종의 작가는 거창한 말을 늘어놓지 않는다.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가 어떻고 하는 따위 말이다. 오공일처럼 작고 작은 것들에 그런 존재들을 꺼낸다. 다마스도 그렇고 돌콩도, 오공일도, 우공일도, 제주마도 그렇다. 작은 것에 눈을 멈춘다.

 

“드디어 체력검사 시작이다. 첫 번째로 악력 테스트, 아귀 힘이다. 준비운동으로 손을 탈탈 털었다. 잡는 것이라면 자신 있었다. 놈들에게 당할 때 최선의 방어는 막는 것이 아니라 잡는 것이었다. 놈들의 손이든 물건이든. 그것도 못하면 주먹이 부서지도록 꽉 쥐며 참았다.” (p.104)

 

오공일은 학교 폭력의 피해자였다. 얼마나 맞았는지 도로를 가로질러 도망치다 무면허로 다마스를 운전하기도 했다. 그런데 학교 폭력을 겪었던 그 경험이 기수 시험의 한 관문인 체력테스트에서 도움이 될 줄 몰랐다. 고삐를 쥐는 악력테스트에 오공일의 과거가 도움이 된 것이다. 세상이 그렇다. 어떤 일이 어떤 방법과 방향으로 나에게 도움이 될지 피해가 될지 알수 없다. 그래서 세상일은 모르는 것이라고 어른들이 얘기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누구나 희망은 있다. 단순히 힘든 현실을 잠시나마 잊기 위해서 하는 합리화가 아니라 오공일에게 일어났던 것처럼 그런 우연같은 희망들이 분명히 있다. 비록 오공일보다 훨씬 세상을 오래 산 나에게는 그런 희망이 일어난 적은 없지만 내게도 분명 있을 거라고 믿는다.

 

 

“어땠어? 잘 봤어?”

“죽을 만큼 버르적거렸는데 모르겠다. 근데 돌콩이 뭐야?”

“그럼 됐겠지. 뭐, 돌콩?”

“가녀린 줄기지만 한 번 잡으면 끊어져도 꽉 잡고 있는 것. 작은 데 단단하게 익는 콩.” (p.109)

 

아영이가 공일이에게 붙여준 별명 돌콩. 작지만 단단하게 익는 콩. 우공일도 너무 좋아했고 아영이의 제주도 목장에서 마음껏 뛰어 노는 제주마도 돌콩이다.

 

크고 단단하고 튼튼하고 거침없는 것들만 주류가 되어 가는 세상에서 돌콩과 같은 존재들은 보이지 않는다. 애써 찾아보지 않으면 볼 수 없다. 그들이 꼭꼭 숨은 것이 아니라 이미 기존의 질서에 익숙해 진 내 눈이 눈앞에 돌콩을 두고도 보지 않는 것이다. 홍종의 작가처럼 세상을 보는 눈에 라식을 해야 한다. 한번 시술하면 영구적인 라식 시술 말이다. 쉽지 않은 일이지만 또 다른 공일이를 만들어 내고 키워내야 하는 것이 사회와 어른들의 당연한 임무다. 적어도 내 자식만큼은 불행한 인생을 살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 모든 부모들의 마음일 것이다. 그렇다면 아이들에게 향한 눈을 조금만 거두고 내 눈을 다시 한 번 씻어내야 한다. 키도 작고 가정사도 불행 하고 허구한 날 학교에서 두드려 맞고, 자퇴한 오공일과 같은 아이가 당장 내 앞에 있다면 나와 우리는 작고 보잘 것 없지만 무엇보다 단단한 돌콩으로 키워내야 한다. 허우대는 멀쩡하지만 속은 곪을 대로 곪은 쭉 뻗기 만한 나무는 결코 풍파를 견뎌낼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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