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국
나카무라 후미노리 지음, 양윤옥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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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소설을 많이 읽지는 않았지만 이 작품 「왕국」은 전형적인 일본 소설의 틀을 갖추고 있다. 개인 간에 일어나는 사건과 갈등의 증폭이 반드시 사회 구조적인 문제에 기인한다는 틀 말이다. 그러고 보면 일본 작가들은 다른 나라의 작가들보다 더 자신들의 작품 속에 그런 면을 드러낸다. 하지만 직접적으로 훅~! 들어가지는 않고 알 듯 모를 듯, 건드린 듯 건드리지 않은 듯 그렇게 은근 살짝!! 일본 소설만의 특징이자 재미있는 면이기도 하다.

오에 겐자부로 상을 수상한 젊은 작가인 나카무라 후미노리는 그의 전작 「쓰리」의 자매작으로 이 책을 내놓았다. 전작을 읽어보지 않았지만 그가 말하고자 하는 얼개는 어느 정도 파악이 된다. 전후 모든 가치가 국가에 의해 주도되고 개인은 철저하게 차후가 되는 수십 년을 살아 온 일본인들에게 시스템은 벗어날 수 없는 운명과도 같은 것이었을까? 그래서 이런 내용의 작품이 많이 나오는 것 같기도 하다.

 

작품 속 주인공 유리카는 국가에서 만든 아동시설에서 자라난다. 친 자매와도 같던 언니의 비극적인 죽음과 그녀가 남긴 어린아이를 위해 자신의 모든 운명을 내던진다. 특별한 언니의 유언이나 부탁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혈육관계도 아니었지만 그렇게 그 운명의 굴레 속으로 귀속된다. 하지만 탓할 수 없다. 억지로 밀어 넣은 것이 아니라 유리카 자신이 그렇게 선택한 것이니까.

 

 

“한 건에 삼십만 엔을 주겠어. 만을 잘해내면 다음부터는 오십만 엔이야.”

사회적 유명 인사의 약점을 조작해내는 일이었다. 여자와 나란히 호텔에 들어가는 사진이나 동영상. 성매매 여성과 침대에서 함께 발가벗고 집적거리는 증거. 성적인 수치감이 느껴질 만한 증거. 어느 누구에게도 알려지기를 원하지 않는 일의 증거. 스무 번 일하면 최소한 천만 엔이다. 돈은 얼마든지 필요했다. (p.73)

 

한 건에 삽십만 엔, 잘 만 하면 한 번에 오십만 엔, 스무 번만 하면 천만 엔. 말이 천만 엔이지 엔화가 많이 떨어진 지금 돈으로도 1억이 넘는 돈이다. 유리카는 어쩔 수 없는 운명과도 같은 넝쿨 속으로 계속해서 빠져 든다. 매력적인 외모와 그 외적인 능력을 정확하게 이용할 줄 알았던 유리카는 수치심, 죄책감 따위를 느끼지 않았다. 아니, 느낄 필요조차 없었다. 그만큼 유리카를 찾는 사회 유명 인사들이 많았다는 것이다. 하룻밤에 수십만 수백만 엔을 젊은 여성에게 뿌려 댈 수 있는 사회 유명 인사들은 그렇게 많았다. 떳떳하게 데이트 하고 드러내 놓고 맺는 관계가 아님에도 그들은 목을 매고 달려들었다. 유리카의 젊고 싱싱한 육체에 탐닉하는 위험한 불장난 한번이 그들이 가진 구조에 조금이라도 위험을 주리라는 염려를 하등 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힘 좀 쓰고 돈 좀 꽤나 있는 사람들에게는 잠시 현실의 지루함에 기름칠 할 수 있는 일탈이었을 테니까.

뜨겁게 데어 죽을 줄 모르고 하얀 불빛으로 날아드는 밤 나방 같이 유리카는 그 심연 속으로 뛰어 들어 갔다. 하얀 불빛으로 무수한 나방과 날벌레가 몰려 들 듯이 유리카의 무모한 돌진을 기꺼이 반기는 들개 같은 자들도 그녀에게 몰려들었다. 아동시설, 하세가와, 기자키, 야다 모두 그녀를 이용하려 든다. 이제껏 사회를 만들고 지탱해 온 구조는 개인 하나가 달려들어 머리를 짓이긴다 해도 꿈쩍도 하지 않는다. 더군다나 들개 같은 자들은 나가떨어진 개인에게 달려들어 살을 파먹는다. 끔찍하고 무서운 현실이다.

하세가와와 야다, 기자키는 철저하게 유리카를 이용한다. 유리카가 어떻게든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이중으로 속임수를 쓰며 애를 쓰지만 그들의 손바닥 안에서 조금도 벗어날 수 없다.

 

 

“가장 갖고 싶은 것은 내 손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걸 깨달은 게 언제쯤이었을까.” (p.7)

“……뭐랄까, 괴물이야, 그 사람은. 자, 그럼.” (p.27)

 

그렇다. 개인은 그렇다. 할 수 있는 것이 뭐가 있을까. ‘개인’의 가치라는 것이 그 어떤 곳보다 경시되는 사회에서는 더욱 박탈감은 커진다. 괴물과 같은 구조와 들개 같은 자들 사이에서 유리카는 철저하게 유린당한다. 한 건에 삽십만 엔도 오십만 엔도 벌어들일 수 있는 그 일을 유리카는 자신의 의지로 한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그들의 손아귀에서 한 치도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이다. 갖고 싶은 것을 마음껏 가질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결코 그렇지 않았다.

괴물 같은 세상과 사람들에게 철저히 유린 되었다. 유리카 자신도 미처 깨닫기도 전에.

 

 

“……이용할 사람을 선정하고, 그자의 약점을 인위적으로 만들어내는 것. 이 세계에서 역사적으로 줄곧 해온 일이야.” (p.74)

 

처음 그 일을 시작하면서 유리카는 그자들의 약점을 인위적으로 이용하고 만들어냈다고 생각했다. 들개들도 그렇게 말해줬고 그자들이 가진 구조에 기인한 기득권의 손톱만큼 정도만 이용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 세계에서 줄곧 해온 일이고 지금도 하고 있고 앞으로도 문명이 존재하고 이 세계가 지속되는 한 줄곧 이어질 것이기 때문에 값싼 동정이나 자책 따위는 필요하지 않았다. 시원하게 짱돌을 던지는 것처럼 그들을 향해 전기충격기를 들이 밀고 꼼짝하지 못하게 약을 먹였다. 어차피 전기충격기의 충격에서 깨어나고 약 기운에서 깨어나면 그들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 구조 속에서 안위를 누리고 또 다시 그 구조를 공고히 하는 일을 하며 살아가니까. 그것이 세계의 질서이고 구조의 속내니까.

 

 

“학대를 당하면서도 필사적으로 애원하는 여자의 표정이 내 안의 뭔가를 찌른다. ‘제발 부탁이야! 아아아! 부족해! 좀 더, 제발 부탁이야!’ (p.102)

 

작품 속에서 사디즘보다 마조히즘이 더 지배적 위치를 가진다고 표현한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개인을 향한 들개와 구조의 사디즘적 공격에 피동적으로 반응하는 개인은 마조히즘적 태도로 방응하고 그것이 결국 반격이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 또한 결국 구조를 벗어날 수 없는 한계가 정해져 있다. 마조히스트라는 존재적 한계를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묶여 있고 옴짝달싹 할 수 없는 상태에서의 반격이라고 해봐야 별 볼일 없는 것이다. 내 손과 발은 여전히 묶여 있고 저들은 여전히 군침을 흘리고 있다.

 

 

“가장 갖고 싶은 것은 내 손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걸 깨달은 게 언제쯤이었을까. 지금도 나는 그것을 갖고 싶은 것일까. 만일 그것이 내 손에 들어온다면 무엇을 할까.” (p.203)

 

유리카는 늦게나마 발견한다. 가장 갖고 싶은 것을 결국 가질 수 없다는 현실을.

절대로 구조를 벗어나거나 이겨낼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패배자로 낙인은 찍힌다면 유리카가 아닌 나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어떻게 해서든지 구조의 끄트머리라도 붙잡고 늘어져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과감하게 벗어던지고 자유로운 개인이 되어야 하는 걸까. 쉽게 선택할 수 없는 문제다.

갖고 싶은 것이 몇 가지 있다. 유리카처럼 내가 원하는 것을 내 손에 넣지 못한다는 깨달음 따위 하고 싶지 않다. 한번만 내 손에 쥐어 준다면 멋지게 사용할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래서 철벽과 같이 둘러친 구조 속에서도 며칠을 굶주린 늑대 무리 속에서도 요리조리 피해 다니는 것으로 그들을 골려 주며 신나게 지낼 수 있다. 한 번만 기회를 주시기를…….

아! 유리카처럼 낭패를 먼저 선사하신다면 저는 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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