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편전쟁에서 5.4운동까지 - 중국근대사 인간사랑 중국사 1
호승 지음, 박종일 옮김 / 인간사랑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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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 대해서 관심을 가진 것은 아마 고등학교 때부터 일 것이다. 수학이야 중학교 2학년이 되자마자 포기를 했고 물리, 화학, 지구과학 같은 것들은 아무리 수업을 듣고 교과서를 봐도 이해되지 않는 것들 투성이었다. 역사는 재미있었다. 혹자들은 '역사는 암기과목 일 뿐이다'라고 말하기도 했지만 나는 재미있었다. 내가 살지 않았던 과거의 삶을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신기했다. '만약에~'라는 가정이 역사 연구에서 첫 번째로 배제해야 할 요소라면 나는 늘 역사 연구의 이단아였다. 국사, 세계사, 한국지리, 세계지리 교과서와 참고서를 보며 '만약 이때 이 선택이 아니라 저 선택을 했다면~'이라고 가정법을 전제해 놓고 혼자만의 상상에 빠지면 비록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있는 곳은 콩나물시루 속처럼 50-60명의 아이들로 빼곡히 채워진 콘크리트 성냥갑 같은 학교 교실이었지만 그 시간만큼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역사적인 사건 속 한가운데 있고는 했다. 그렇게 무서운 사탄의 인형쌤의 수학시간에도 나는 어김없이 지리과부도를 펴놓고 상상 속으로 빠져들었다.

내가 살던 지역의 시립 합창단의 지휘자면서 음악 교사를 하던 선생님에게 선발되어 학교 합창부에 들어가게 되었다. 선배들 중에는 겉모습을 한번만 봐도 문제학생 내지는 불량학생으로 보이는 선배가 있었다. 어김없이 그들에게 캐스팅(?)되어 함께 어울리게 되었고 어느 주말 시내 모처로 나오라는 명령을 받고 나갔다. 허름한 건물에 어울리는 허름하고 누추한 사무실로 들어가니 생전 처음 본 현수막과 포스터, 각종 국악기와 방의 삼면을 둘러싼 엄청난 양의 책을 마주하게 되었다. 학교 선배라고 소개한 사람에게 노래를 배웠는데 이상했다. 당시 유행하던 발라드나 댄스도 아니고 가곡도 아니고 팝도 아닌 것이 요상했다. 감옥, 창살이 어쩌고 산자가 어쩌고……. 대학에 들어가 운동을 하면서 사상학습을 받게 되면서 그 노래들이 민중가요이고 어떤 가사였는지를 알게 되었다. 고등학교 때 가끔 주말마다 방문한 그 사무실에서 본 책도 그랬고 잠시 몸담았던 대학 운동권 사무실에서 본 책도 여전히 역사에 관련된 책이었다. 누렇게 바래진 책들이었다. 이해할 수 없고 알아들을 수 없는 단어와 문장으로 가득 찼었지만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그 어떤 역사 교사도 말해주지 않았던 사실들로 가득차 있어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미지의 신세계를 처음 발견해 처음 본 과일을 따 먹는 것 같았다고나 할까. 본격적으로 책을 읽게 된 계기가 된 책도 역사에 관련된 책이었다. 이후로 다양한 분야의 책을 읽고 있지만 여전히 가장 큰 관심을 가지고 있는 분야는 역사다. 그 중에서도 한국 현대사. 아직 역사적으로 입증되거나 정리되지 못한 미완성의 영역이기도 하고 같은 사안에 대해서도 완전히 다른 해석이 나오는 영역이라 더욱 재미있다.

한국현대사에 지대한 관심이 있다 보니 일본과 중국의 근·현대사에 대해서도 자연스레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서로 영향을 주고받을 수밖에 없는 긴밀한 지리적·사회·경제·문화적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이 책 「아편전쟁에서 5·4운동까지」는 중국의 근대사를 다룬 책이다. 한국의 중학교와 고등학교에서 역사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면 이 책에 등장하는 주요한 사건들의 제목을 들어봤을 것이다. 아편전쟁, 태평천국운동, 무술변법, 양무운동, 의화단, 신해혁명, 5·4운동까지. 저자 호승은 중국 공산당의 당이론을 정립하고 발전시킨 사람으로 봐도 무방하다. 당연히 그의 역사 서술 방식은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하고 있다. 지배와 피지배계급으로 완전하게 구분된 계층 갈등은 이 책 전체를 아우르는 얼개가 된다. 수천 년간이어 온 중국의 봉건 전제 군주제도는 태풍처럼 휘몰아친 중국의 근대사를 낳는 필연적 동기가 되었고 이미 수천 년간 압제 속에 신음한 피지배 인민대중들은 그 태풍 속에서도 여전히 흔들리고 침몰하고 마는 과정을 담담하게 그려 낸다. 책의 여러 소개 글에서도 강조된바 저자는 마치 소설을 전개하는 것처럼 시간의 흐름에 따라 각 사건 간 개연성을 부여하고 인기리에 방영되는 미드가 시즌제 형식으로 재탄생 되는 것처럼 개별 인민대중과 지배계급의 외부충격에 따른 시시각각의 대응과 반응을 흥미롭게 그려 낸다. 그렇다고 해서 특별히 문학적 요소를 부각시키고자 불필요한 묘사와 미사여구를 첨가하지 않는다. 800페이지가 훌쩍 넘는 방대한 분량이지만 하나의 주제의식을 놓지 않고 있는 것이다.

 

고등학교 합창부 선배의 명령에 못 이겨 방문한 그 누추하던 방에서 본 책에서도, 열혈 운동 학생이 되고자 가열차게 학습하던 단과대학 사무실 책상에서 본 책에서도, 시원한 밤바람이 불어오는 내 방에서 내가 세상에서 취할 수 있는 가장 편한 자세로 본 한국현대사를 다룬 책에서도, 이번에 읽은 이 책 「아편전쟁에서 5·4운동까지」에서도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한 가지 사실은 "때리는 놈은 늘 때리고 맞는 놈은 늘 맞는다" 라는 것이다.

수천 년을 이어 온 때리고 맞는 관계 내지는 계급 설정은 결코 바뀌지 않았다. 갑자기 등장한 외세의 제국주의자들도 그것을 바꿔 놓지 못했다. 전체 중국 대륙을 뿌리부터 꼭대기까지 뒤흔든 봉기와 운동, 혁명이 일어나도 근본을 바꾸지 못했다. 어쩌면 그것이 이 책의 가장 큰 한계일 수도 있다. 아직 시장경제와 외산자본에 대한 적극적인 개혁·개방 정책이 펼쳐지기 전이던 중공 시절 중국 공산당 내부의 주요 이론가로 활동한 저자의 눈에는 현재(물론 당시 시점으로) 중국 공산당이 유일무이하게 이 계급 설정과 한계를 무너뜨렸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중국 공산당에 의해 비로소 인민은 해방되었고 수천 년을 그들 위에서 군림한 봉건·지주·관원 세력 또한 공산당에 의해 혁파되었다고 주장했을 것이다.

 

 

“선진적 지식분자, 다시 말해 마르크스주의를 받아들이기 시작한 지식분자들은 5.4운동의 경험을 통해 중국 무산계급의 역사를 지위를 인식하게 되었다. 그들은 노동자 대중 속으로 들어가 선전활동과 조직 활동을 펼쳤고, 이렇게 하여 마르크스주의 사상운동과 노동운동이 결합되었다. 많은 지역에서 공산주의 소조직이 결성되었고, 이는 중국공산당이 성립될 수 있는 토양이 되었다.” (p.832)

 

이 책의 마지막 부분에 설명되는 5·4운동은 이러한 위대한 중국 공산당이 탄생하게 되는 결정적 역할을 했다. 청 말기 대륙의 곳곳에서 일어난 수많은 인민·민중의 봉기와 혁명의 기운은 결국 실패했다. 저자가 책의 여러 곳에서 누차 밝히고 있는 것처럼 그 인민들을 영도할 수준의 지식인이나 영웅이 나타나지 않았고 기울어 가던 청 왕조는 자신들의 낡은 배에서 먹을 것 좀 달라고 울부짖는 인민들의 손은 놓은 채 멀리서 다가오는 시커먼 외산 기함과 군함에 손을 벌리고 미소 지었다. 하지만 저자는 이것 또한 역사적 필연 내지는 필수불가결한 역사적 요인으로 해석한다. 왜냐하면 어쨌든 실패한 운동과 봉기, 혁명이라 할지라도 종국에는 공산주의 소조직과 그것에 투신한 수많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을 양산했고 결국에는 중국공산당을 탄생시켰기 때문이다.

 

 

인민

 

“가혹한 봉건적 착취를 받고 있던 농민대중은 봉건사회 내부의 거대한 혁명역량이었다.” (p.106)

“위대한 태평천국 농민혁명 운동은 비록 실패하기는 했지만 봉건사회의 낡은 질서를 뿌리까지 흔들어 봉건사회의 붕괴를 촉진했다. 외국 자본주의 침략자들에게 중국의 광대한 노동인민들이 품고 있던 헤아릴 수 없는 강대한 혁명역량을 보여주었고 중국의 식민지화를 저지 하는 역할을 했다.” (p.251)

 

농민, 노동자, 도시빈민들을 통칭해 인민이라 한다면 중국의 인민들은 수천 년을 압제와 고통 속에 살았다. 한국의 역사와 마찬가지다. 그 어떤 국가의 인민들의 역사가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국가 이전 부족시대부터 "늘 때리는 놈들에게 맞던" 인민들은 그렇게 수천 년을 살아왔다. 밟으면 밟히고 때리면 맞으며 한 번 제대로 판을 엎어보지 못한 채 살았다. 그런 인민들이 참다못해, 견디다 못해, 도저히 방법이 없어 들고 일어 선 혁명 운동은 결론적으로 실패했다. 당장의 천지개벽은 이뤄내지 못했지만 혁명역량을 태동시키고 그것의 심장박동을 강화시킨 인민대중의 혁명 운동은 그 자체로 위대하고 아름답다고 해야 마땅하다고 말하고 있다.

 

“북경의 학생들이 먼저 일어나 제국주의, 그중에서도 특히 일본 제국주의와 친일파 북경정부에 대한 인민의 분노를 행동으로 표시했다.” (p.827)

“애국운동은 넓고도 깊게, 그리고 빠르게 발전해 나갔다. 특히 노동자 대중의 파업의 형식으로 투쟁에 참가하자 북경정부는 물론 제국주의 열강도 매우 놀랐다.” (p.830)

 

대중과 인민의 경험은 누적되고 학습된다. 지난 이명박 정권 시절 미국 소고기 수입에 대한 촛불시위는 이전의 시위와 봉기와는 확연히 다른 것이었다. 대학 운동권이나 시민단체, 각종 노조와 연합 운동조직의 깃발과 선동에 의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깃발도 확성기도, 절규하는 선동도 없었다. 각자 다른 방식과 이유로 학습된 기억과 태도는 자발적 참여의 창조적인 형식을 만들어 냈다. 핏발 선 외침이 없이도 촛불 하나로, 자유 발언 한번으로 대중과 인민은 하나가 되고 마음을 움직였다. 비록 정권이 연장된 탓에 이전 정권에서 벌어진 창조적이고 산뜻한 민중 봉기가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지만 이 책에 등장하는 태평천국 운동과 의화단 운동이 결국 5·4운동의 동인이 되고 그야말로 대륙을 뒤엎을 수 있는 지식 노동자들과 학생들의 의식을 고취시키고 혁명역량을 강화하여 중국 공산당을 만들어 낸 것처럼 언젠가는 한국 땅에서 일어난 대중과 인민의 운동과 시위, 봉기 또한 재평가 받을 것이다.

 

 

 

봉건지주·자산계급, 관원·매판자본 세력

 

“대중의 역량을 동원하여 청 정부의 압력에 저항하면서도 대중운동이 ‘윗사람을 거슬러 반란을 일으키는’ 정도로 확대되지 않도록 통제해야 하는 것이 입헌파 자산계급이 직면한 과제였다.” (p.680)

“자산계급 입헌파는 궁극적으로 독립적인 정치세력이 되지 못했다. 실제로 봉건 지주계급과 매판계급은 입헌파를 이용하여 혁명파를 속였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손을 빌려 혁명의 과실을 훔쳤다. 도도한 혁명의 물결을 거스를 수 없다고 판단한 봉건 지주계급과 매판계급은 일보 후퇴하여 자산계급 입헌파를 임시로 전면에 내세우고 혁명을 견제하는 역할을 맡겼다.” (p.736)

 

언제나 때리는 위치에 있던 사람은 자신의 폭력 행위를 굳이 정당화하지 않더라도 이미 체화되어 있어 불편함을 가지지 않는다. 군림하는 것은 편하고 때론 짜릿한 쾌감을 맛볼 수도 있다. 내 발 밑에서 기어 다니며 굽신거리는 치들은 그렇게 태어났고 그렇게 밖에 살 수 없도록 하늘이 정해놓았다. 같은 공기를 마시고 같은 하늘 아래 살고 있지만 절대로 다른 존재들이다. 그런데 그런 수천 년을 이어 온 구조가 뿌리째부터 뒤흔들리기 시작했다. 이들에게는 말 그대로 하늘이 무너지는 꼴이었다. 기어 다니며 굽신거리던 자들이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수천 년을 이어 온 방법대로 때리고 눌렀다. 그런데 듣지를 않았다. 가지고 있던 모든 기득권이 날아갈 수도 있다는 불안에 시달렸을 것이다. 그런데 다르게 생긴 자들이 큰 배를 타고 중국 대륙으로 건너오면서 다시 이들에게는 살 길이 열렸다. 그들이 가진 것을 내어놓지 않아도 중간에서 적절하게 처신하기만 하면 이제껏 누려오던 삶의 구조를 온전하게 지켜낼 수 있을 거라 판단했다. 그렇게 그들은 카멜레온처럼 색깔을 바꿔가며 살아남았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사실. 여전히 때리는 위치에서는 내려올 생각도 바꿀 생각도 전혀 하지 않았다.

 

 

“심지어 봉기의 총성이 울리기도 전에 입헌파 유지들은 혁명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고 지주계급과 매판계급의 대표인물과 청 왕조의 군정 관원들이 일시에 태도를 바꾸어 민주공화를 주장한 근본 원인은, 하층 대중과 진검승부를 벌여야 하는 혁명을 피하자면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그들이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p.745)

 

봉건지주 계급은 자연스레 자산계급이 되고 입헌파 세력이 되고 새롭게 탄생한 혁명조직의 우두머리가 되기도 했다. 혁명과 혁명이 이어지고 교차하는 시기에 어제의 동지가 내일의 적이 될 수도, 어제의 적이 내일의 동지가 될 수도 있었다. 그저 상황에 따라 시기에 따라 힘의 균형 추가 기우는 쪽에 따라 기회주의적으로 색깔을 바꾸면 그만이었다.

청나라가 완전히 주저앉고 중국 대륙 전체가 제국주의 국가들의 먹잇감이 되면서 이들 지배 계급들의 야욕은 더욱 두드러졌다. 청 왕조 그 이전부터 지배자로 군림하던 자들로부터 신식문화와 교육으로 무장한 지식계급에 이르기까지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들의 안위였다. 인민 대중의 맞는 모습과 그것이 내포하고 있는 구조적 모순과 한계에는 살을 맞대지 않았다.

 

 

“손중산은 신해혁명의 실패를 회고하면서 ‘그 시기에는 상황에 쫓겨 반혁명적 전제계급과 타협을 모색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타협은 실제로는 제국주의적 조종을 받은 것이었다. 이것이 혁명이 실패한 첫 번째 원인이었다.” (p.780)

“신해혁명은 실패했다. 황제가 대총통으로 바뀌었을 뿐 중국은 여전히 제국주의 열강의 지배를 받는 반식민지 반봉건 국가였다.” (p.783)

“마치 승전국이 패전국에 요구하는 듯한 무리한 요구를 두고 원세개 정부는 대표를 파견하여 일본 공사와 비밀리에 담판을 진행했다. 담판 과정에서 원세개 측에서는 여러 가지 양보를 하였으나 일본은 만족하지 않았다.” (p.798)

“원세개의 독재 통치는 중국을 더 심한 빈곤과 혼란 속에 빠뜨렸다.”

 

학교에서 쑨원으로 배웠던 손중산과 위안스카이로 배웠던 원세개 또한 이 한계에서 벗어날 수 없다. 혁명을 해내는 것이 전체 인민과 대중을 아우르는 것보다 우선되었기 때문에 그들은 거리낌 없이 반혁명 전제세력과 손을 잡을 수 있었고 더 나아가 외세의 앞잡이가 되어 대륙은 더욱 심한 갈등과 빈곤에 처하게 할 수 있었다.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36년 간 압제 속에 살아 온 조선의 해방은 꿈과 희망, 새나라, 새민족의 도래를 꿈꾸게 했다. 그런데 현실은 완전히 다른 형국으로 전개 되었다. 일제에 빌붙어 앞잡이 하던 친일 조선인들은 미군정의 요직에 다시 등용되어 행정과 치안 전체를 담당했다. 책에 등장하는 중국 근대 혁명세력과 단순 비교할 수는 없지만 역사라는 것이 인민 대중이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굳이 공통점을 찾아볼 수 있다.

늘 때리고 군림하던 자들은 맞는 것이, 굽신굽신 기는 것이 어떤 것인지 모른다. 단 한 번도 상상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역사는 늘 그들이 만들어 내는 방향으로 흐른다. 어김없이.

 

 

 

하이에나처럼 덤벼드는 제국주의세력

 

“갑오전쟁에서 일본 군국주의에 굴복한 중국은 마지막 숨을 몰아쉬는 거인과 같았다. 제국주의 열강은 굶주린 이리떼처럼 앞 다투어 달려들어 거인의 사지를 찢고 피와 살점을 삼켰다. 그들은 서로 간에도 먹이를 놓고 격렬하게 싸웠다.” (p.393)

 

이미 시체가 된 청 정부는 불같이 타오르는 인민 대중의 요구를 들어주지도 앞 다투어 밀려오는 제국주의 세력을 효과적으로 막아내지도 못했다. 우왕좌왕 했다고 보는 것이 가장 정확한 판단일 것이다. 제국주의 열강이 희망하는 대로 따랐고 굶주린 하이에나와 같이 몰려드는 그들에게서 인민을 지켜주지 않았다.

영국 자산계급이 1840년에 일으킨 아편전쟁에서부터 열강 제국주의 세력의 중국에 대한 야욕은 본격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일본 제국주의를 제외한 열강은 거의 모두 십자가를 목에 걸고 있었지만 본색은 중국 대륙이 가진 무한한 자원과 뜯어낼 돈과 노동력이었다. 더 이상 유럽 내에서 자본주의를 발전시킬 수 없었던 그들은 거대한 대포를 앞세워 땅따먹기를 하던 중이었다.

 

 

“전쟁 이전, 외국 침략자들은 청 왕조의 황제를 위시한 봉건 통치기구 전체를 그들의 중국 침략활동의 장애물로 보았으나 이제는 시각이 바뀌었다. 이 통치기구가 아니었더라면 그들은 광대한 중국 인민의 저항 투쟁과 직접 대면해야 했을 것이다.” (p.273)

“제국주의 열강은 중국이라는 거인을 마음대로 요리할 수 있는 대상으로 보아오다가 의화단운동이 폭발한 후로는 중국사회의 저층에 흐르는 거대한 저항 역량을 공포의 눈길로 바라보게 되었다.” (p.562)

 

앞서 살펴본 봉건지주·입헌파·자산 세력이 그들이 가진 기득권을 지켜내기 위해 인민 대중과 제국주의 열강 사이에서 기회주의적 처신을 했던 것과 비슷하게 열강은 이들을 이용했다. 대포로 억눌러 버리는 것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깨달은 이후 이이제이를 시작한 것이다. 굳이 제 손에 피 묻히지 않더라도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냈다. 저자는 이 부분 뿐만 아니라 책 전체에 걸쳐 중국 인민 대중의 기저에 흐르는 혁명 역량에 대해 다소 과한 평가를 하고 있는데 책을 처음 집필하던 시대적 배경을 생각하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지만 동의하기는 어렵다.

과연 제국주의 열강이 중국 인민 대중의 가진 혁명 역량에 공포를 체감한 것일까? 당시 열강은 중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걸쳐 땅따먹기를 하고 있었다. 아프리카 대륙은 물론 동남아시아에도 마수를 뻗치고 있었다. 물론, 중국에서 뜯어 먹을 것이 가장 많았지만 중국에만 집중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수많은 열강이 중국이라는 그릇에 모두 주둥이를 처박고 있었다. 열강은 단지 효율적인 것에 우선을 두었을 것이다. 인민 대중과 굳이 직면하지 않고 중국의 기존 지배계층을 적절히 이용하면서 자신들이 가져갈 이권과 이득을 쪽쪽 빼먹을 수 있다면 금상첨화이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는 한계

 

“그러나 선진계급의 영도를 받지 못하는 농민대중은 종교에서 혁명언어와 사상적 무기를 찾을 수밖에 없었고, 이것은 당연히 큰 약점이 될 수밖에 없었다.” (p.122)

“반(半)식민지 반(半)봉건 중국에서 농민이 갖고 있는 무궁무진한 반제국주의 반봉건주의 역량은 역사상 가장 선진적인 계급의 영도가 없이는 충분히 발휘될 수 없었다. 중국의 무산계급은 공산당을 통해 광대한 농민대중을 동원하고 단결시킬 수 있었으며, 농민운동을 태평천국이나 의화단 같은 자발적 운동이 도달하지 못했던 수준으로 끌어 올렸으며, 이런 업적을 통해 중국 무산계급은 중국 민족민주혁명의 영도자가 될 수 있었고 혁명을 발전시켜 최후의 승리에 이를 수 있었다.” (p.563)

 

작년 진보당과 관련된 문제에서 여실히 드러난 그들의 한계와 비슷하다. 그들만 대중과 인민을 선도하고 이끌 수 있다는 영웅주의. 앞서도 지적했던 바, 이 책이 처음 집필되던 시기는 여전히 중국공산당에 의해 전체 대륙과 인민이 영도되던 시기였다. 어쨌든 중국 공산당은 외세의 침략과 국·공 갈등, 소수민족 문제 등을 해결해 내며 중국 공산주의를 만들어 냈다. 비록 실패한 운동과 혁명 봉기 였지만 농민 대중, 인민들의 혁명 역량이 중국 공산당을 만들어 낸 대통이 되었다고 긍정적으로 저자가 해석할 수 있었던 여유는 소련 공산주의의 붕괴 이후에도 여전히 중국 공산주의는 건재했기 때문일 것이다. 당연한 논리적 귀결이겠지만 이것이 이 책이 가진 가장 중요한 한계다. 지금 중국은 사회주의 노선을 취하고는 있지만 경제적으로는 완전히 시장자본주의를 취하고 있다. 이미 중국 공산주의는 와해되었다고 봐야 한다. 몇몇의 영웅들이 등장해 강호를 평정하고 수도 없이 밀려드는 인민을 먹여 살리고 이끌어 가는 서사는 진부하다.

 

 

“몽고족” (p.260)

 

몽골을 몽고로 지칭하는 것이 불편하다. 몽고는 중국이 소수민족 정리 사업을 하면서 몽골을 격하하며 차용한 용어다. 어리석을 '몽(懵)'자와 옛 '고(古)'자를 써 몽고라 지칭한 것이다. 중국 대륙과 인민을 구원한 중국 공산당의 당 이론가였지만 중국인이라는 태생적 조건이 지닌 한계가 아니었을까 싶다. 설마 몽골의 인민은 당연히 중국의 인민과는 다른 존재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믿고 싶다. 몽골을 몽고라고 거침없이 표현하는 것에 하등 불편함을 느끼지 않았다면 그 또한 중국 제국주의 세력에 편승한 지식인 일 뿐이다. 중국의 인민도 몽골의 인민도 한국의 인민도 동일한 것은 분명하다. 그들이 오래전부터 당해 왔고 맞아 왔다는 것에서부터 앞으로도 이 상황이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비참한 예견에 이르기까지 말이다.

저자의 5·4운동 이후의 역사에 대한 책이 출간되기를 희망한다. 역사서술의 새로운 면을 발견하게 되었다. 쉽사리 바뀌지 않을 구조적 한계 상황에 놓여 있지만 그래도 역사는 오늘도 만들어져 가고 있다. 그 속에 나와 당신이 살아내고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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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이와이 하와이 - 나 홀로 훌쩍 떠나는 하와이 & 오아후 섬
쿠마 쿠마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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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드라마 <하와이 파이브 오>를 아내가 좋아해서 몇 번 같이 본 적이 있었다. 몇 년 전 대단한 인기가 있었던 <로스트>의 배경도 하와이 였다. <하와이 파이브 오>의 주인공 중 두 명이 한국계 미국인 대니얼 김과 그레이스 박이다. 둘 다 몸매도 훌륭하고 연기도 잘 하고 멋진 형사로 등장한다. 다른 미국드라마와는 다르게 하와이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보니 화면 자체가 굉장히 이국적이다. 하와이의 지리적 위치 자체가 태평양의 한 가운데이다 보니 여러 문화가 복합적으로 존재하는 곳 같았다. 하와이를 구성하는 사람들도 굉장히 다양한 것 같았다. 드라마에 등장하는 사람들 중 상당수가 아시아계가 많다. 특히 일본계 하와이언들이 많이 나온다. 중국계 삼합회도 나온다. <하와이 파이브 오>를 보기 전에는 하와이에 그렇게 아시아계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는지 몰랐다.

하와이는 품고 있는 이색적인 풍경만큼 낯설지만 호기심이 발동하는 문화와 모습으로 가득차 있는 것 같다.

 

“혼자서 하와이엘 가다니, 도대체 얼마나 외톨이인 거야? 자기 자신에게 태클 걸며 향했던 하와이. 메인 일정 한 개만 자고 기분 내키는 대로 만나는 사람에 맞춰 그날 하루가 펼쳐지는, 그런 스타일이 딱 어울리는 섬, 하와이.” (p.206)

 

이 책 「와이 와이 하와이」는 제목만큼이나 익살스럽고 호기심이 가득하며 친절하고 상세한 책이다. 일러스트 쿠마가 홀로 하와이에 장기간 체류하며 본 곳, 먹은 것, 묵은 곳, 만난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귀여운 일러스트로 표현 했다.

미국 본토인 들 뿐만 아니라 하와이는 한국인들에게 이상적인 여행 장소다. 여행 경비도 예전보다는 훨씬 저렴해 졌고 선택할 수 있는 옵션도 충분하다. 호주나 유럽 여행을 가는 것만큼이나 사랑 받고 있는 여행 장소다.

여행 책자를 많이 읽지 않았는데 신혼여행을 위해 산 프라하 소개책을 보고 여행 책자에 대한 시각을 크게 바꾸게 되었다. 실제로 많은 도움을 받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인터넷에서 자료를 찾고 현지인들에게 물어 가며 여행을 다닌다 해도 한국어도 쓰인 소개 책자를 보는 것보다 수월하지 않다. 물론, 그런 여행 책자를 쓰면서 전적으로 쓴 사람의 주관적인 의견이 반영되기 때문에 실제로 저자가 소개한 식당이나 관광지에 가보면 책의 내용과 다른 상황이 펼쳐지기도 했다. 책의 내용과 다르다고 해서 “뭐 이 따위야!!” 화가 나거나 한 것이 아니라 그 상황 자체가 재미있었다. 우리만의 여행 책자를 쓰는 것 같아 신나기도 했다. 여행 책자를 쓴 사람이 어떤 유명한 식당에서 접대를 받은 직원이 내가 만난 직원이 아닐 수 있으니까. 저자가 본 관광지의 그 풍경이 내가 갔을 때와는 전혀 다를 수도 있다. 그것이 여행을 하는 맛인 듯하다.

그렇다고 너무 책에 얽매여서 책에 소개된 모든 곳을 다녀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나도 그랬다. 책을 보며 ‘꼭 가봐야지.’했던 곳은 시간을 내서 찾아 갔고 별로 관심이 없던 곳은 찾아가보지 않았다. 이 책 「와이 와이 하와이」의 저자도 하와이에 장기간 체류하며 책을 썼는데, 생전 처음 가는 관광객들은 아무리 길어도 보통은 2주 이상 체류하지 못한다. 그래서 여행 책자를 읽으며 몇 군데 포인트를 체크해 두고 실제 여행을 하는 것이 재미있을 것이다.



 

앞서 얘기했던 프라하에 대한 여행 책자에서 가장 큰 도움을 받았던 것이 지도였다. 단순히 지명과 주소가 나열된 지도가 아니라 관광객들을 위한 위 사진과 같은 지도 말이다. 책에는 평면으로 삽입되어 있기 때문에 특정한 상점이나 위치에서 책을 위아래, 좌우로 맞춰가며 찾아가면 굉장히 재미있다. 인간 네비게이션이 되는 것 같기도 하다.

하와이가 이색적인 풍경과 복합적인 문화와 인종이 공존하는 특성이 있는 것처럼 볼만한 곳, 먹을 만한 것도 굉장히 풍성한 것 같다. 돈만 넉넉하게 있다면 쇼핑도 다채롭게 할 수 있는 곳이라고 한다.

아무래도 많은 인종이 함께 살고 있기 때문에 미국 본토를 여행할 때 갖는 영어 구사에 대한 부담은 훨씬 덜 한곳이 하와이라고 한다. 이것도 관광객들이 좋아할 만한 요소다. 실제로 프라하를 여행했을 때도 영어에 대한 부담이 거의 없었다. 물론 세계적으로 유명한 관광지이기 때문에 영어를 잘하는 사람이 많았지만 아주 친절하고 천천히 발음을 해주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관광지나 유명한 상점이 아니라 거리에서 만나는 현지인들은 영어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많이 없었기 때문에 대부분 바디 랭귀지를 사용 했다. 하와이는 그 만큼은 아니겠지만(어쨌든 미국이니까^^) 미국 본토보다는 부담이 덜하다고 한다.

사실 내가 하와이에 대해 가장 궁금한 것은 역사적인 배경인데, 이런 여행 책자에서는 그런 내용을 담지 않는다. 결코 아름답거나 호의적인 미국에 의한 병합을 아니었을 것이라 쉽게 짐작할 수 있는데 구체적인 내용은 알 수 없다. 이 부분은 따로 찾아보고 싶다.

 


몇 가지 아쉬운 점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 가장 아쉬웠던 부분은 전체적으로 내용이 한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위 사진에서처럼 저자가 촬영한 사진에 대한 소개는 최대한 간략했으면 좋겠는데 너무 장황하고 밑 부분에 또 다시 반복되는 경향이 많았다. 또 대부분의 내용에 저자의 일러스트가 들어가 있는데 그림이 사진처럼 너무 빽빽하게 삽입되어 있어 다소 혼잡했다. 그리고 전체 내용이 일정한 방향에서 전개되지 않고 뜬금없거나 반복되는 부분도 많았다.

 

뭐, 아쉬운 부분이 다소 있었지만 하와이를 여행하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큰 도움이 될 만한 책인 것은 틀림없어 보였다. 좀 장황해 보이고 혼잡해 보이지만 실제로 여행을 할 때는 이런 구체적인 소개가 큰 도움이 될 것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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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친구 기리시마 동아리 그만둔대 - 제22회 스바루 소설 신인상 수상작 자음과모음 청소년문학 31
아사이 료 지음, 이수미 옮김 / 자음과모음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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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상에서 일본을 맹목적으로 무시하는 나라는 대한민국이다. 분명 경제 규모나 여러 가지 면에서 일본은 이미 선진국이 된 지 오래고, 한국은 아니다. 그런데도 맹목적으로 싫어하고 무시한다. 30여 년의 침탈의 역사에 대한 분노와 증오, 거기에 더해 그들 편에 서서 같은 조선인들을 수탈했던 친일파들에 대한 제대로 된 숙청을 하지 못한 역사적 찌꺼기가 가득 끼어 있는 곳이 한국이다. 박정희는 일본의 경제 모델을 그대로 따라 했다. 국가 주도형 수출 경제, 재벌 중심 경제 성장 등 아직도 위에 계신 분들 중 대다수는 일본 바라기다. 그런데 대다수 한국인들의 감정은 완전히 다르다.

며칠 전 일본과 이탈리아의 컨페더레이션스컵 예선 경기를 시청했다. 결과는 이탈리아가 4대 3으로 이겼지만 경기 내용은 일본이 우세했다. 패스의 정확도나 전술의 독창성, 선수들 각자의 유기적인 공간 활용은 예술적이었다. 2002년 월드컵 이전에는 무조건 한국 축구가 일본 축구보다 우위에 있었다고 했다. 2002 월드컵 때도 한국은 4강 신화를 이뤄냈고, 일본은 고작 16강에 머물렀다. 2002년 이후 한국과 일본과의 축구 격차는 상당히 줄어들었다. 2000년대 중후반을 지나며 오히려 경기력이 역전 했다. 여전히 한국은 정신력만을 강조하는 고질적인 수비불안과 골 결정력 부족으로 허우적댔다. 일본 축구는 달라졌다. 한번씩 AFC챔피언스리그 경기를 통해 방송되는 일본의 프로축구 팀의 경기력과 관중 동원력은 유럽의 상위리그 못지않았다. 일본 축구 대표팀의 경기력은 점점 좋아지고 있었다.

우연히 스포츠 관련 잡지를 보던 중 엘리트 스포츠만을 중시하는 한국과는 달리 일본은 엄청나게 넓은 저변과 각종 경기장 등 스포츠 인프라 구축이 이미 수십 년 동안 만들어져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한국의 운동부는 학교 수업을 거의 듣지 않는다. 수업 시간에 들어와서 노골적으로 엎어져 자도 선생이 깨우지 않는다. 그저 올림픽에 나가 메달 따는 것에 사활을 건다. 그런데 일본은 그렇지 않다고 했다. 이미 미국이나 유럽처럼 학교에서 동아리 활동으로 하는 스포츠 활동이 보편화 되어 있고 체계화 되어 있다는 것이다. 특별히 선발된 운동부원만 운동에 전념하고 나머지 학생들은 밤 10시, 11시까지 남아서 야간자율학습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후까지 수업을 하고 다 같이 동아리 활동을 하는 것. 아주 작은 동네라도 야구장과 축구장, 실내체육관이 갖춰진 일본의 스포츠 인프라는 한국의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러니 당연히 축구 경기력이 역전될 수밖에. 30년 전부터 요구되던 정신력 드립은 이제 그만 거둘 때가 됐다.

 

이 책 「내 친구 기리시마 동아리 그만둔대」는 청소년 문학이다. 그들의 눈높이에서 읽는 것이 가장 좋은 독자일 텐데 그렇게 읽히지가 않았다. 계속 일본 축구, 한국 축구 문제가 떠오르고 앞서 얘기한 스포츠 잡지(일본과 한국의 스포츠 환경 비교기사가 실린)의 내용이 계속 생각났다.

이 책에 나오는 고등학교 2학년 일본 아이들의 모습이 부러웠다. 계속 그랬다.

오후 수업을 마치고 야구부로, 배구부로, 브라스밴드부로, 영화부로, 소프트볼부로, 배드민턴부로 흩어져 연습과 훈련을 하고 대회에 나가서 수상도 하고 하는 모습이 부러웠다.

내가 고등학교에 다니던 십 수 년 전의 상황과 지금 한국 고등학생의 상황이 전혀 달라진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머리가 멍해졌다.

도대체 밤 11시까지 아이들을 학교에 잡아 둔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는 건지 당최 알수가 없다.

경제뿐만 아니라 학교의 상황도 일본의 그것을 많이 닮아 가고 있다. 일본에서 한 때 큰 사회적 이슈가 되었던 이지메 현상이 한국의 학교에서 왕따 현상으로 그대로 복사 되었고 무너진 교권의 문제도 고스란히 복사 되었다. 그런데 그렇게 부정적 현상은 잘도 따라 하면서 방과 후 동아리 활동과 같은 긍정적 현상은 왜 도무지 따라할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인지 모르겠다. 형식적으로 정해진 방과 후 활동과 동아리 활동은 눈 가리고 아웅이다. 학교에서 체육시간 조차 없애는 분위기인데 더 말해봐야 입만 아플 뿐이다.

 

 

“그와 처음으로 이야기를 나눴다는 사실에 나는 약간 흥분 상태가 되었다. 저쪽 그룹 아이들과는 접촉할 기회도 없었고 그래서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p.121)

“하찮을지 모르지만, 여자에게 그룹은 세계다. 눈에 띄는 그룹에 들어가면 괜찮은 남학생과도 친해질 수 있고, 다양한 상황에서 비참함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 예쁘지 않은 그룹의 창작 무용은 보는 사람까지 비참하게 만든다. 어느 그룹에 속하느냐에 따라서 내가 서는 위치가 달라진다.” (p.143)

 

이 작품에서 표현된 일본의 학교는 여전히 냉혹하고 문제가 많은 것 같았다. 학교 안에서도 힘의 우위에 따라 서열이 완벽하게 정해졌고 이것은 교사나 학부모, 교육당국이 손을 써서 해결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 체계가 되어 버렸다. 위쪽 그룹과 아래쪽 그룹은 서로 각자의 위치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다. 내가 어느 쪽 그룹에 속해있는 지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는 것처럼 다른 아이가 어느 쪽에 속해있는 지도 정확하게 알고 있다. 힘의 우위만이 구조의 질서를 결정하는 정글 한복판이다.

하지만 적어도 한국의 학교들보다는 낫겠지. 라는 생각이 없어지지 않았다. 그래도 한국의 학교 안에서 벌어지는 기가 막히고 절망적인 상황보다는 낫겠지. 라는 생각.

2년 전 겨울, 느닷없는 뉴스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요즘 아이들은 노스페이스 잠바로 서열이 구분된다는 내용이었다. 100만원에 가까운 잠바를 입고 있는 아이는 자연적으로 일진이 되고 기껏해야 20-30만 원 정도의 잠바를 입고 있는 아이는 무시당한다는 것이다. 무서웠다. 어른들이 하는 나쁜 짓을 그대로 따라하고 있는 꼴이었다.

그래서 나는 일본보다 한국이 더 무섭다.

 

 

“여러분은 젊습니다. 힘이 있습니다. 앞으로 뭐든지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새하얀 도화지입니다.”

“17세, 고등학교 2학년. 새하얀 도화지. 자주 듣는 말이다. 분명 우리는 젊고 힘도 있고 새하얗고 도화지이기도 하지만, 어차피 붓도 없고 애당초 아무것도 그릴 마음이 없다는 게 문제다.” (p.173)

 

교장의 훈화는 언제나 지겹다. 불필요한 단어가 많고 쉽게 할 수 있는 표현을 굳이 어렵게 하는 특성이 있다. 희망고문 또한 지겹다. 물론, ‘너는 안 돼’ 라는 말보다야 낫겠지만 추상적이고 이상적이기만 한 위로는 독약이다. 작가의 표현대로 애당초 아무것도 그릴 마음이 없는 아이들에게 ‘너는 이렇게 그리고, 너는 저렇게 그리고...’하는 것은 코미디다. 그릴 마음이 없다면 왜 없는지, 그러면 어떤 마음인지 먼저 묻는 것이 중요한 과정일 것이다. 아이들은 많이 만나는데, 아이들의 가장 큰 불만은 그것이다. 아무도 자신의 얘기를 들어주려 하지 않는다는 것. 어른이랍시고 가르치려고만 하고 교육하려고만 하고 설득하려고만 하니, 정작 아이가 하고 싶은 말은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먼저 얘기해봐. 라고 해놓고서는 몇 마디 듣지도 않고 이러쿵저러쿵 충고부터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것이다.

 

기리시마가 왜 동아리를 그만두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끝까지 밝혀지지 않는다. 다만 얽히고설킨 관계가 나열 된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일본 아이들이 마냥 행복해 보이지는 않지만 내가 만나는 아이들, 뉴스에서 보는 아이들, 다큐멘터리에 나오는 모자이크 된 아이들의 얼굴이 자꾸만 떠올라 부러웠다. 밤늦게까지 학교에 있어야 하고 주말에는 학원으로 쫓아다니는 한국의 아이들보다는 행복해 보인다. 오후에 수업이 끝나고 하고 싶은 동아리 활동을 하고 대회에도 나가고, 하기 싫으면 언제든지 동아리를 그만둘 수 있는 기리시마의 상황이 부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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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들리는 순간 - 인디 음악의 풍경들
정강현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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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 대학교 주변 음식점에서 밥을 먹고 있는데 연예인 같은 사람들이 지나가는 것을 봤다. 마침 대학 축제가 있었고 많은 가수, 밴드가 초청되어 공연을 한다는 소식을 들었던 터였다. 내가 있는 식당 쪽으로 들어오더니 자리를 잡고 주문을 했다. 가만히 보니 크라잉넛이었다. 밴드 멤버들과 스텝 몇 명이서 밥을 먹으러 온 것이었다. 평소에도 무척 좋아하던 밴드라 반가웠는데 사인을 받거나 사진을 찍을 생각을 하지 못했다. 당시에는 스마트폰이 없던 때라 일부러 디카를 들고 다니지 않으면 사진 찍는 것이 거추장스러웠다. 슬쩍 다가가 “팬입니다.”하고 악수 한 번 할 수 있었을 텐데 아쉬웠다. 그들은 TV에서 보이는 모습 그대로였다. 뭐, 어떤 연예인들은 타고 다니는 밴에서 나오면서부터 다시 밴에 오를 때까지만 변신을 한다고 하던데 크라잉넛은 그렇지 않았다. 줄곧 장난 치고 아이 같이 노는 모습이었다.

 

나는 밴드 음악을 많이 들었다. 드럼을 교회에서 처음 배웠는데 학교에는 밴드동아리가 없었다. 교회에서야 교회음악만 줄곧 듣거나 연주할 뿐이라 다른 곳에서 드럼을 치고 싶었다. 하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그리고 아주 헤비한 메탈이나 하드락은 나와 잘 맞지 않았다. 한국의 메탈밴드 중에서는 블랙홀의 노래를 많이 들었다. 중·고등학교 당시 그들의 테이프를 많이 사서 테이프가 늘어날 때까지 듣곤 했다. 이상하게 외국의 슈퍼밴드들의 노래는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음악에 완전히 빠진 것도 아니었다. 펜팔을 하던 여자아이가 선물해 준 보이즈Ⅱ맨의 노래도 너무 좋았고 월광소나타도 좋았다. (그 아이가 피아노를 전공했었다) 대학 때 잠시 밴드 동아리에 들어갔던 적이 있는데 오래 하지 않았다. 당시 잠깐 계속 음악을 할까? 고민했던 적이 있었는데 세계적인 드러머가 될 수 없다면 음악쯤은 포기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만큼 음악을 사랑하지도 빠지지도 않았다는 반증일 것이다. 그래도 교회에서는 계속 밴드 활동을 했다. 예배 시간에 연주를 하기도 하고 특별한 행사 때에도 연주를 했다. 교회 음악도 90년대 중반부터는 대규모 집회의 실황을 담은 음악이 주류를 이루면서 밴드의 역할이 커지게 되었다. 그래서 교회 음악도 많이 듣게 되었고 프로그레시브 메탈밴드 예레미의 음악도 많이 듣게 되었다. 드럼을 연주하는 것이 꿈에서 취미로 넘어간 시점도 바로 그 때였던 것 같다. 재미있었다. 기타나 건반은 연주하는 사람이 워낙 많은 데 반해 드럼은 연주하는 사람이 상대적으로 적으니까 더 자부심을 가질 수도 있었다.

군대 전역 후 들어 간 첫 직장에서도 밴드 동아리 활동을 잠시 했었다. 지친 일상을 벗어나는 데 그만한 것이 없었다. 시간을 쪼개고 쪼개서 하는 활동이다 보니 밴드 구성원 모두 애착을 가지고 서로에게 더 많은 음악을 권하기도 했다. 그 때 많이 들었던 음악은 레드핫칠리페퍼스(이하 RHCP)와 레이지어게인스터더머신(이하 RATM)이다. 지금도 그 두 밴드를 가장 좋아한다. 그루브를 한껏 살린 펑키한 RHCP의 음악은 기분이 좋을 때 들어도 좋고 기분이 안 좋을 때 들어도 좋다. 드러머 채드 스미스 형님의 적확하고 심플한 플레이를 좋아 한다. 1집 자켓 사진 만으로 충분한 RATM의 음악은 저항과 분노, 선전과 봉기다. 뉴메탈신의 큰형님격인 그들의 음악은 새롭고 신선했다. 1집과 2집이 발매된 지 벌써 15년 이상 되었는데도 지금의 음악보다 더 진보적이고 파격적이다. 쏘는 듯한 랩과 톰 모렐로 형님의 혁신적인 리프를 듣고 있노라면 존재하는 모든 스트레스는 한 방에 해소된다.

 

 

“그러니까 여기에 묶인 글들은 오로지 나의 느낌의 세계에서만 정당하다. 나의 정서가 감전의 느낌으로 몸서리쳤던 음악에 대한 기록이다.” (p;8)

 

이 책 「당신이 들리는 순간」은 각자의 음악에 대한 기록을 기억하게 한다. 저자 자신이 분명하게 얘기하고 있듯이 음악은 듣는 이에 따라 달라진다. 그 자신의 느낌의 세계에서만 정당하기 때문에 오해하지 않고 강요받지 않는다. 철저하게 객관적이고 중립적이어서 마음에 들었다. 저자는 일간지 기자다. 일간지 기자라는 약력을 보고 책의 내용과 글을 크게 기대하지 않았는데, 필력이 상당했다. 다시 약력을 들여다보니 학부 때 국문학을 전공했었단다. 고개를 끄덕였다. 저자의 표현대로 각자의 정서가 감전의 느낌으로 몸서리쳤던 음악이 있었는지 이 책을 읽으며 생각해보면 좋을 것 같았다. 이제까지 살면서 감전이 되었던 적이 없어서 정확하게 어떤 느낌인지는 모르겠지만 책상에 팔꿈치를 꽝~ ! 하고 찧었을 때 오는 그 아찔하고 짜증나게 아픈 느낌보다 더 심하지 않을까 싶다. 앞서 장황하게 이야기 했듯이 나에게도 그런 음악이 있었다. 마이마이 카세트로 듣던 블랙홀의 음악이 그랬고, 한참 동안 많이 듣던 교회 집회 음악이 그랬고, 레드핫칠리페퍼스와 레이지어게인스트더머신의 음악이 그랬다. 이어폰으로 들어오는 멜로디와 악기 소리가 순식간에 내 온몸을 훑고 지나가 내가 그 음악이 되어 버리는 물아일체의 현상^^;;

처음 배웠던 악기가 드럼이었고 교회, 대학에서 밴드 활동을 했던 경험이 있어서인지 나는 주로 밴드 음악을 좋아한다. 우후죽순처럼 쏟아졌던 오디션 프로그램들 중에서도 저조한 시청률을 기록했던 ‘탑밴드’라는 프로그램을 가장 좋아했다. 어차피 다른 여타 오디션 프로그램은 보컬능력만을 위주로 보기 때문에 나는 큰 관심이 없었다. 90년대 중반부터 지금까지 한국의 음악시장을 기형적인 괴물로 만들어버린 보이,걸그룹 음원시장은 아직도 망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곧 끝날 거라고 봤는데 아니었다. 아카시 나무의 왕성하고 질긴 생명력이 온 산을 망치는 것처럼 기획사에서 찍어낸 보이,걸그룹은 수도 없이 사라지고 또 태어나면서 그 생명을 이어가고 있다. 모두가 이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모두가 그리로 뛰어 든다. 언제 들어도 낯 뜨거운 그들의 노래와 퍼포먼스는 지난 몇 년 동안은 한류라는 신기루에 포장되어 번식에 번식을 거듭했다.

그들의 노래에 이력이 난 사람들이 가끔 조용필에 열광하기도 하고 홍대 인디신에 눈을 돌리기도 하지만 그때뿐이다.

아참~!! 그리고 늘 궁금했던 점이 있다. 이렇게 기형적인 음악 시장을 가진 한국에서 어떻게 락페스티벌이 호황을 누리고 있는지 하는 점이다. 매년 여름이면 곳곳에서 락페스티벌이 열리는데 내한하는 외국 밴드들 거의 모두 한국의 팬들을 보고 놀란다고 한다. 한국 락팬들의 떼창과 뜨거운 호응은 이미 유명하다. 참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다. 국가대표 축구 경기는 늘 만원을 이루면서 해당 홈팀의 프로축구 경기에는 찾아가지 않는 축구팬들의 양태와 비슷하다고 봐도 무방할까?

 

 

“후……. 마음이 아리죠, 뭐. 음악 하는 후배들이 참 곤궁합니다. 우리 어른들이 그렇게 만든 겁니다. 음악 시장을 얼른 정상적인 상태로 되돌려놓아야 해요.” (p.92)

 

많은 인디밴드들이 롤모델로 삼고 있는 산울림의 김창완씨의 말이다. 자세한 이야기까지는 하지 않지만 분명히 한국의 음악 시장이 잘못되었다는 것에는 크게 동의한다고 본다.

이 책에서는 저자가 직접 홍대에서 만난 인디밴드와 그들의 음악에 대한 소개가 담겨 있다. 다 읽고 보니 이미 알고 있는 밴드가 절반, 알지 못하던 밴드가 절반이었다.

 

 

“오디션을 보라니까 보긴 봤다. 그런데 네 명 가운데 악기를 다룰 수 있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개념 없는’ 청춘들은 아무렇게나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누구는 입으로 기타 소리를 내고, 누구는 입술을 떨어가며 드럼 소리를 냈다. 결과는 합격. ‘개념 있는’ 사장은 이들의 ‘개념 없음’에 미래를 걸었다. 밴드 크라잉넛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p.29)

“언젠간 랩 메탈을 들려주겠다며 멤버 전원이 얼굴을 랩으로 싼 채 공연을 했는가 하면, 연주하다 말고 갑자기 레슬링을 해 관객들의 배꼽을 잡기도 했다.”

“크라잉넛은 저항하지 않는 록 음악도 가능하다는 걸 입증한 밴드다.” (p.34)

 

나는 크라잉넛의 이런 모습이 좋다. TV에서 그들의 라이브를 들으면 ‘아~ 연습 좀 더하지’ 싶다가도 그들이 쏟아내는 천진한 연주와 노래에 금세 빠져든다. 심각하지 않고 어렵지 않아서 좋다. 한참 음악을 듣던 시절 궁금했던 것이 왜 그렇게 외국 밴드음악만 듣는지 하는 것이었다. 거의 모든 이들이 외국 밴드음악만 들었다. 그들에게 경의를 표하고 찬양을 보냈다. 한국 밴드의 음악은 정확한 이유도 말하지 않은 채 듣지 않았다. 카피를 해도 거의 외국 밴드의 음악이었다. 나는 처음 들었던 밴드 음악이 블랙홀이었다. 아마 그 영향이 가장 큰 것 같다. 그런데 한국 밴드의 음악을 들으면 마치 락의 계보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면서 무작정 듣는 개념 없는 락팬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내가 들어서 좋으면 그만인데 음악에도 서열을 정하는 그들이 우스웠다. 사실 그래서 대학 밴드 동아리를 그만두게 되었었다.

 

 

“그런데 때는 1997년, 느닷없이 집안이 주저앉는 걸 경험한 스무 살 무렵의 청춘들은 이 노래에서 더 이상 사랑이나 그리움 따위를 읽어낼 여유가 없었다.” (p.45)

 

많은 인디밴드가 책에 소개되어 있지만 결국 나는 평소에 좋아하던 크라잉넛과 델리스파이스에 또 다시 집중하게 되었다. 델리스파이스의 모던락은 전혀 좋아하지 않았다. 그들의 밴드 이름을 알기 전 들었던 노래 ‘고백’과 ‘차우차우’의 가사에 완전히 감동하는 바람에 모던락까지 듣게 되었다. 1997년 수능을 실패하고 IMF로 집안의 가세가 단번에 기울어지던 그 추웠던 겨울. 델리스파이스의 가사는 그대로 위로가 되었다.

 

 

“홍대 주변에서는 이를 두고 ‘인디 정신 훼손’ 운운하는 사람들도 있다.”

“우리가 음악을 생산하는 방식은 명백히 ‘인디’라고 할 수 있지만 그게 중요한 건 아니다. 인디라서 더 들을 만한 게 아니라, 인디로 불리건 말건 들어서 좋은 음악이 최고” (p.87)

 

반복해서 말하게 되는데 음악은 듣는 이가 좋으면 그만이고 하는 이가 좋으면 그만이다. 음악을 하는 이들 사이에서도 선구자가 되고 싶고 음악을 하고 듣는 대중을 선도하고 싶은 경기동부연합같은 자들이 있는 가 보다. 장기하와 얼굴들이 TV에 나오고 십센치가 예능에 나오고 크라잉넛이 광고를 찍는 것이 왜 ‘인디 정신 훼손’인가? 우리나라 밴드음악은 구리니까 레드제플린, 딥퍼플을 들어~ 라고 했던 꼰대들과 다를 게 뭔가? 나는 진보입네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그저 서로 갉아먹는 것에 혈안이 되어 자신은 무슨 고귀한 혈통인양 나불대는 자들도 꼴 보기 싫고 음악계에서도 순수한 락의 정신을 유지하기 위해 TV출연 고사~ 뭐 이런 말 나불대는 자들도 똑같이 꼴 보기 싫다. 구차하고 꼰대스럽게 보일 뿐이다.

 

 

“김창완은 ‘존재하는 가치는 파괴돼도 된다.’고 말한다. 그런 가치 전복의 정신이 산울림 음악에 깔려 있다.” (p.95)

 

산울림의 음악을 듣기 전에 「하얀거탑」에 출연한 김창완씨를 보고 완전한 팬이 되었는데, 저런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다 보니 그렇게나 많은 후배 밴드가 산울림을 롤모델로 삼고 있나 보다. ‘존재하는 가치를 거침없이 파괴’하는 것이 예술가의 특성일 텐데 그들조차 꼰대가 되어가는 현실이 안타깝다. 물론, 한국의 음악 시장 자체가 요상하다 보니 밴드 음악을 하는 것은 엄청난 용기와 헌신이 필요한 일이다. 락음악을 하는 자존심 하나 가지고 버티고 버티는 뮤지션들이 꼰대가 되어 가는 것도 일견 이해가 되지 않는바 아니다. 하지만 음악과 글을 창조해 내는 인디밴드(홍대 신을 비롯한 모든 송라이터가 가능한 밴드의 음악을 포함해서)는 예술가다. 자유롭게 창작하듯이 다른 음악을 대하는 것에도 자유롭고 창의적이기를 기대한다. 물론, 보이·걸그룹 아이들이 하는 노래는 제외하고.

 

책은 생각보다 재미있다. 무엇보다 저자의 필력이 예사롭지 않다. 밴드가 달라지면 문체도 달라진다. 사심이 가득 들어간 소개라 더 마음에 와 닿았다. 손가락질 하는 일간지에 소속된 기자라 편견을 가진 나의 속좁음이 부끄러웠다.

밴드음악이나 인디음악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꼭 읽어보면 좋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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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아지똥별 - 가장 낮은 곳에서 별이 된 사람, 권정생 이야기
김택근 지음 / 추수밭(청림출판) / 2013년 6월
평점 :
품절


권정생 선생님의 책「우리들의 하느님」을 읽으며 부끄럽고 죄스러운 마음을 한동안 지울 수 없었는데 이 책 「강아지똥별」을 읽고는 그때보다 곱절로 그런 마음으로 가득하다.

 

“모든 아름다움에는 슬픔이 깃들어 있습니다.” (p.5)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선생의 삶은 말 그대로 슬픔이었다. 단 한순간도 슬픔이 사라졌던 때가 없었던 것 같다. 그냥 문학적으로 슬픈 감정을 좋아해서 카타르시스를 얻고자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내일이 오는 것이 두려운 압도적인 슬픔을 경험한 권정생 선생님의 고백은 그래서 더 슬프고 아프다. 슬프고 아픈 것에 평생을 눌려 지냈지만 그것을 아름다움으로 승화시켰다. 선생의 작은 몸... 그 하나로…….

 

 

“정생은 그러나 중학교에 갈 수 없었습니다. 그 이듬해야 1950년이었고, 6월 25일 바로 한국전쟁이 발발했기 때문입니다.” (p.45)

“1953년, 열여섯 살이 됐습니다. 정생은 전교 1등의 성적으로 졸업했습니다. 하지만 정생은 중학교에 갈 수 없었습니다. 돈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정생은 돈 벌 궁리를 하다가 우선 나무를 해서 내다 팔기로 했습니다.” (p.61)

 

권정생 선생님의 평생은 가난과 배고픔, 아픔과 헤어짐, 눈물과 고통이었다. 60년이 훌쩍 지난 지금 대학에 가지 않는 학생들이 없고 중학교까지 의무교육이 된 현실을 살고 있다. 6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난 나의 아버지도 시골에서 손가락 안에 드는 성적이었지만 집안일과 동생들 뒷바라지 때문에 대학에 가지 못하셨다. 그런데 왜 나는 나의 아버지 스토리보다 권정생 선생님의 스토리에 더 눈이 박히는 걸까?

빼앗긴 조국에서 태어나지 못하고 일본의 빈민가 구석에서 태어난 선생은 나중에 일직교회 뒤편에 움막을 짓기 전까지 한 번도 자기 집에서 살아본 적이 없었다. 열여섯 살이 되어서야 초등학교를 졸업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고 그나마도 여러 번 학교를 옮겼다. 전교 1등의 성적임에도 중학교에 진학할 수 없었다. 담임이던 선생님도 교장 선생님도 어머니도 아파하고 눈물 흘려줄 뿐 어린 선생님을 중학교에 입할 시킬 수 없었다. 직접 나무를 구해다 팔아보기도 하고 중학교 진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 병아리를 사다 잘 길렀지만 전염병이 돌아 모두 폐사시킬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불행이라는 놈은 한 사람에게만 집중될 수 있는 것인가? 나는 지난 선생님의 책과 이번 책을 읽으며 계속 울화가 치밀었다. 왜 굳이 권정생 이라는 사람에게만 불행과 슬픔이 휘몰아치는 것인지…….

성경에 욥이라는 인물이 주인공인 욥기가 있다. 그는 대단한 부자였고 자손도 많았고 당대에 의인이라 평가받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야훼 하나님은 그를 계속해서 시험한다. 시련과 아픔을 준다. 욥의 친구들은 욥을 구슬려 욥으로 하여금 야훼 하나님을 저주하고 부정하도록 유혹한다. 상황만 봐서야 당장이라도 욕지거리를 내뱉고도 남는다. 나 같으면 단 한 번의 유혹에 덜커덕 넘어갔을 것이다. 하지만 욥은 이겨냈다. 그의 믿음과 신앙을 지켜냈고 친구로 위장한 악의 유혹도 견뎌 냈다.

 

 

“그날 정생은 처음으로 저울 위에 새끼손가락을 올려놨습니다. 손님은 아무것도 모르고 평소처럼 정생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했습니다. ‘저울 속이기’가 계속되었습니다. 죄책감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희미해졌습니다. 나중에는 요령까지 생겨 빠르게 저울질을 했습니다. 눈속임에 익숙해진 것입니다.” (p.72)

 

권정생 선생님은 어떻게든 돈을 벌어야 했다. 아니면 집안의 숟가락 숫자라도 덜기 위해서 무조건 집에서 나와야 했다. 중학교 진학이 어렵게 되고 나서 고구마 가게 일을 보게 되었다. 장사가 잘 되는 와중에도 주인은 저울 속이기를 지시했다. 어린 정생은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돈을 벌어야 배고픔을 잠시라도 면할 수 있었다.

흘러흘러 간 부산의 정비공장에서도 기도원에서도 구걸을 하던 길거리에서도 그는 살아야 했다. 아무리 좋은 옷과 좋은 음식을 먹어 기름이 흘러도 거지들보다 더 더럽게 사는 사람들을 눈으로 온몸으로 볼 수 있었다. 생전 선생님은 약하디 약한 동물과 식물에 자연에 오히려 눈을 돌리고 애달파 했는지도 모르겠다.

 

 

“밤이면 예배당에 가서 홀로 기도를 드렸습니다. 이 기나긴 고통을 끊어 달라며 무릎을 꿇었습니다. 살려 주시든지, 아니면 빨리 죽여주시라고 빌었습니다.” (p.102)

 

20살 때부터 온 몸에 몹쓸 병을 달고 살았다. 하느님이든 하나님이든 신을 믿는 자가, 그가 믿는 신에게 ‘차라리 나를 죽여 달라’라고 하는 절망은 도대체 어떤 것일까? 가늠할 수도 짐작할 수도 없다. 책의 이 부분을 읽고 나서부터는 제대로 책을 읽어 낼 수 없었다. 마침 아내와 커피전문점에서 책을 읽고 있었는데 북적이는 실내에서 남의 눈 의식하지 않고 눈물을 쏟아냈다.

가늠할 수도 짐작할 수도 없는 절망과 슬픔, 고통의 한 켠이 마음으로 전해졌다.

 

 

“태어나 밥 한번 마음껏 먹어 보지 못했고, 꿈 한 번 제대로 꾸지도 못했습니다. 자식들 걱정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어머니의 삶 속에 어머니는 없었습니다. 병든 정생을 두고 떠나려니 제대로 눈을 감지 못했을 것입니다. 정생은 하늘이 무너졌습니다.” (p.106)

 

평생을 가난과 배고픔과 고통 속에서 살다 돌아가신 어머니를 그리는 부분에서는 주체할 수가 없었다. 선생님의 여러 집필을 엮어 만든 동화임에도 논픽션이 아니었다. 병든 몸으로 마음 놓고 어머니의 죽음을 슬퍼할 수도 없는 선생이 가여웠다. 슬프고 슬펐다.

 

 

“이 사람들은 모두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이 아닌가. 병들고 불쌍한 청년에게 도움은 주지 못할망정... 이들은 모두 자신만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들이 분명해.” (p.118)

“자신만 돌보는 사람들로 가득 찬 기도원에 하느님이 계실 리가 없었습니다. 분명 하느님은 문둥이 청년을 따라 멀리 떠나 버렸을 것입니다. 정생은 어쩌면 그 문둥이 청년이 예수였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p.120)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가세는 더욱 기울었다. 누나들은 일찍이 집을 떠났고 선생과 아버지 남동생이 살고 있었다. 아버지의 비참한 권유로 선생은 기도원에 가게 된다. 하지만 기도원에도 구원은 존재하지 않았다. 모두 가 자신들의 고통과 슬픔을 한가득 짊어진 채 올라 온 기도원이지만 여전히 행색이 초라하고 문둥병을 가진 청년에게 경멸어린 시선을 보내는 이중성에 선생은 질려 버린다. 요즘 한국 교회가 문제가 많다고 난리들이지만 수십 년 전 모습도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 더 절망적이다.

선생은 자연과 환경 어린아이, 작은 동식물과 미물들에 특히 사랑을 쏟는다. 무턱대고 삽을 들이밀던 시기부터 농업이 전 세계로 개방될 때까지 선생은 농촌에서 농촌이 무너지고 농촌 사람들이 스스로 목숨을 거두는 일을 수도 없이 목격했다. 도시의 발전이 가져 온 찌꺼기가 농촌의 황폐화를 낳은 것에 분노 했다. 웬만해서는 화를 내지 않는 선생님이 또 하나 분노에 차 소리를 지르는 것은 바로 한국의 교회다. 앞서도 말했지만 신앙, 믿음이라는 것이 그저 개인의 안락과 기복에만 치우쳐 있는 현실을 개탄한다. 그럴 때면 그 작은 몸, 병으로 가득한 몸에서 어떻게 그런 일갈이 나오는지 궁금하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교회가 권위주의, 물질만능주의, 신비주의에 물들었습니다. 조용히 가슴으로 드리던 기도는 큰 소리로 미친 듯이 외치고 있습니다. 장로와 집사는 직분이 아니라 명예와 계급, 권력이 되었습니다. 하느님께 의지하는 믿음이 아니라 하느님을 이용하여 출세하고 권력과 돈을 얻으려 합니다.” (p.189)

 

100% 맞는 말이다. 권위주의, 물질만능주의, 신비주의에 빠져 있는 한국 교회. 권정생 선생님은 오랜 시간 시골 교회의 종지기로 살았다. 아주 작은 움막에서 새벽을 열고 아주 작지만 강한 믿음을 가지고 살았다. 시골마저 도시와 같이 황폐화되고 시골 교회 또한 도시 교회와 같이 세속화되고 노골적으로 변하게 되는 것을 지켜봤다. 이 책에서도 소개되지만 선생의 소원 중에 하나가 작은 교회하나 만드는 것이었다. 옛날 집처럼 만들고 바닥을 나무로 해서 50∼100명 정도 교인이 있는 교회. 논어, 맹자도 공부하고 스님도 신부님도 모셔서 좋은 말씀 듣는 그런 교회.

 

수십 년을 슬픔과 배고픔, 육체적 고통 속에 살다가 빛나는 강아지똥별이 된 권정생 선생님. 비록 그가 소원하던 것들이 살아생전에는 이뤄지지 못했지만 선생님의 생전에는 이름조차 모르던 나와 같은 독자들이 여전히 선생님을 기억하고 선생님의 책을 읽으며 울고 감동받는 이것이 작은 기적이라 생각한다. 어느덧 기성세대가 되고 나도 그렇게 비판하던 기성 기독교인이 되어 가고 있는 시점에 이 책은 정신 바짝 차리게 하는 차가운 죽비다.

 

책을 읽는 내내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나는 너무 편하게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나는 너무 쉽게 신앙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나는 너무 교만하게 인생을 대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오늘 밤에 고개를 들어 가만히 강아지똥별을 찾아보려 한다. 조용하고 겸손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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