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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편전쟁에서 5.4운동까지 - 중국근대사 ㅣ 인간사랑 중국사 1
호승 지음, 박종일 옮김 / 인간사랑 / 2013년 7월
평점 :
역사에 대해서 관심을 가진 것은 아마 고등학교 때부터 일 것이다. 수학이야 중학교 2학년이 되자마자 포기를 했고 물리, 화학, 지구과학 같은 것들은 아무리 수업을 듣고 교과서를 봐도 이해되지 않는 것들 투성이었다. 역사는 재미있었다. 혹자들은 '역사는 암기과목 일 뿐이다'라고 말하기도 했지만 나는 재미있었다. 내가 살지 않았던 과거의 삶을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신기했다. '만약에~'라는 가정이 역사 연구에서 첫 번째로 배제해야 할 요소라면 나는 늘 역사 연구의 이단아였다. 국사, 세계사, 한국지리, 세계지리 교과서와 참고서를 보며 '만약 이때 이 선택이 아니라 저 선택을 했다면~'이라고 가정법을 전제해 놓고 혼자만의 상상에 빠지면 비록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있는 곳은 콩나물시루 속처럼 50-60명의 아이들로 빼곡히 채워진 콘크리트 성냥갑 같은 학교 교실이었지만 그 시간만큼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역사적인 사건 속 한가운데 있고는 했다. 그렇게 무서운 사탄의 인형쌤의 수학시간에도 나는 어김없이 지리과부도를 펴놓고 상상 속으로 빠져들었다.
내가 살던 지역의 시립 합창단의 지휘자면서 음악 교사를 하던 선생님에게 선발되어 학교 합창부에 들어가게 되었다. 선배들 중에는 겉모습을 한번만 봐도 문제학생 내지는 불량학생으로 보이는 선배가 있었다. 어김없이 그들에게 캐스팅(?)되어 함께 어울리게 되었고 어느 주말 시내 모처로 나오라는 명령을 받고 나갔다. 허름한 건물에 어울리는 허름하고 누추한 사무실로 들어가니 생전 처음 본 현수막과 포스터, 각종 국악기와 방의 삼면을 둘러싼 엄청난 양의 책을 마주하게 되었다. 학교 선배라고 소개한 사람에게 노래를 배웠는데 이상했다. 당시 유행하던 발라드나 댄스도 아니고 가곡도 아니고 팝도 아닌 것이 요상했다. 감옥, 창살이 어쩌고 산자가 어쩌고……. 대학에 들어가 운동을 하면서 사상학습을 받게 되면서 그 노래들이 민중가요이고 어떤 가사였는지를 알게 되었다. 고등학교 때 가끔 주말마다 방문한 그 사무실에서 본 책도 그랬고 잠시 몸담았던 대학 운동권 사무실에서 본 책도 여전히 역사에 관련된 책이었다. 누렇게 바래진 책들이었다. 이해할 수 없고 알아들을 수 없는 단어와 문장으로 가득 찼었지만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그 어떤 역사 교사도 말해주지 않았던 사실들로 가득차 있어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미지의 신세계를 처음 발견해 처음 본 과일을 따 먹는 것 같았다고나 할까. 본격적으로 책을 읽게 된 계기가 된 책도 역사에 관련된 책이었다. 이후로 다양한 분야의 책을 읽고 있지만 여전히 가장 큰 관심을 가지고 있는 분야는 역사다. 그 중에서도 한국 현대사. 아직 역사적으로 입증되거나 정리되지 못한 미완성의 영역이기도 하고 같은 사안에 대해서도 완전히 다른 해석이 나오는 영역이라 더욱 재미있다.
한국현대사에 지대한 관심이 있다 보니 일본과 중국의 근·현대사에 대해서도 자연스레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서로 영향을 주고받을 수밖에 없는 긴밀한 지리적·사회·경제·문화적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이 책 「아편전쟁에서 5·4운동까지」는 중국의 근대사를 다룬 책이다. 한국의 중학교와 고등학교에서 역사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면 이 책에 등장하는 주요한 사건들의 제목을 들어봤을 것이다. 아편전쟁, 태평천국운동, 무술변법, 양무운동, 의화단, 신해혁명, 5·4운동까지. 저자 호승은 중국 공산당의 당이론을 정립하고 발전시킨 사람으로 봐도 무방하다. 당연히 그의 역사 서술 방식은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하고 있다. 지배와 피지배계급으로 완전하게 구분된 계층 갈등은 이 책 전체를 아우르는 얼개가 된다. 수천 년간이어 온 중국의 봉건 전제 군주제도는 태풍처럼 휘몰아친 중국의 근대사를 낳는 필연적 동기가 되었고 이미 수천 년간 압제 속에 신음한 피지배 인민대중들은 그 태풍 속에서도 여전히 흔들리고 침몰하고 마는 과정을 담담하게 그려 낸다. 책의 여러 소개 글에서도 강조된바 저자는 마치 소설을 전개하는 것처럼 시간의 흐름에 따라 각 사건 간 개연성을 부여하고 인기리에 방영되는 미드가 시즌제 형식으로 재탄생 되는 것처럼 개별 인민대중과 지배계급의 외부충격에 따른 시시각각의 대응과 반응을 흥미롭게 그려 낸다. 그렇다고 해서 특별히 문학적 요소를 부각시키고자 불필요한 묘사와 미사여구를 첨가하지 않는다. 800페이지가 훌쩍 넘는 방대한 분량이지만 하나의 주제의식을 놓지 않고 있는 것이다.
고등학교 합창부 선배의 명령에 못 이겨 방문한 그 누추하던 방에서 본 책에서도, 열혈 운동 학생이 되고자 가열차게 학습하던 단과대학 사무실 책상에서 본 책에서도, 시원한 밤바람이 불어오는 내 방에서 내가 세상에서 취할 수 있는 가장 편한 자세로 본 한국현대사를 다룬 책에서도, 이번에 읽은 이 책 「아편전쟁에서 5·4운동까지」에서도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한 가지 사실은 "때리는 놈은 늘 때리고 맞는 놈은 늘 맞는다" 라는 것이다.
수천 년을 이어 온 때리고 맞는 관계 내지는 계급 설정은 결코 바뀌지 않았다. 갑자기 등장한 외세의 제국주의자들도 그것을 바꿔 놓지 못했다. 전체 중국 대륙을 뿌리부터 꼭대기까지 뒤흔든 봉기와 운동, 혁명이 일어나도 근본을 바꾸지 못했다. 어쩌면 그것이 이 책의 가장 큰 한계일 수도 있다. 아직 시장경제와 외산자본에 대한 적극적인 개혁·개방 정책이 펼쳐지기 전이던 중공 시절 중국 공산당 내부의 주요 이론가로 활동한 저자의 눈에는 현재(물론 당시 시점으로) 중국 공산당이 유일무이하게 이 계급 설정과 한계를 무너뜨렸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중국 공산당에 의해 비로소 인민은 해방되었고 수천 년을 그들 위에서 군림한 봉건·지주·관원 세력 또한 공산당에 의해 혁파되었다고 주장했을 것이다.
“선진적 지식분자, 다시 말해 마르크스주의를 받아들이기 시작한 지식분자들은 5.4운동의 경험을 통해 중국 무산계급의 역사를 지위를 인식하게 되었다. 그들은 노동자 대중 속으로 들어가 선전활동과 조직 활동을 펼쳤고, 이렇게 하여 마르크스주의 사상운동과 노동운동이 결합되었다. 많은 지역에서 공산주의 소조직이 결성되었고, 이는 중국공산당이 성립될 수 있는 토양이 되었다.” (p.832)
이 책의 마지막 부분에 설명되는 5·4운동은 이러한 위대한 중국 공산당이 탄생하게 되는 결정적 역할을 했다. 청 말기 대륙의 곳곳에서 일어난 수많은 인민·민중의 봉기와 혁명의 기운은 결국 실패했다. 저자가 책의 여러 곳에서 누차 밝히고 있는 것처럼 그 인민들을 영도할 수준의 지식인이나 영웅이 나타나지 않았고 기울어 가던 청 왕조는 자신들의 낡은 배에서 먹을 것 좀 달라고 울부짖는 인민들의 손은 놓은 채 멀리서 다가오는 시커먼 외산 기함과 군함에 손을 벌리고 미소 지었다. 하지만 저자는 이것 또한 역사적 필연 내지는 필수불가결한 역사적 요인으로 해석한다. 왜냐하면 어쨌든 실패한 운동과 봉기, 혁명이라 할지라도 종국에는 공산주의 소조직과 그것에 투신한 수많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을 양산했고 결국에는 중국공산당을 탄생시켰기 때문이다.
인민
“가혹한 봉건적 착취를 받고 있던 농민대중은 봉건사회 내부의 거대한 혁명역량이었다.” (p.106)
“위대한 태평천국 농민혁명 운동은 비록 실패하기는 했지만 봉건사회의 낡은 질서를 뿌리까지 흔들어 봉건사회의 붕괴를 촉진했다. 외국 자본주의 침략자들에게 중국의 광대한 노동인민들이 품고 있던 헤아릴 수 없는 강대한 혁명역량을 보여주었고 중국의 식민지화를 저지 하는 역할을 했다.” (p.251)
농민, 노동자, 도시빈민들을 통칭해 인민이라 한다면 중국의 인민들은 수천 년을 압제와 고통 속에 살았다. 한국의 역사와 마찬가지다. 그 어떤 국가의 인민들의 역사가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국가 이전 부족시대부터 "늘 때리는 놈들에게 맞던" 인민들은 그렇게 수천 년을 살아왔다. 밟으면 밟히고 때리면 맞으며 한 번 제대로 판을 엎어보지 못한 채 살았다. 그런 인민들이 참다못해, 견디다 못해, 도저히 방법이 없어 들고 일어 선 혁명 운동은 결론적으로 실패했다. 당장의 천지개벽은 이뤄내지 못했지만 혁명역량을 태동시키고 그것의 심장박동을 강화시킨 인민대중의 혁명 운동은 그 자체로 위대하고 아름답다고 해야 마땅하다고 말하고 있다.
“북경의 학생들이 먼저 일어나 제국주의, 그중에서도 특히 일본 제국주의와 친일파 북경정부에 대한 인민의 분노를 행동으로 표시했다.” (p.827)
“애국운동은 넓고도 깊게, 그리고 빠르게 발전해 나갔다. 특히 노동자 대중의 파업의 형식으로 투쟁에 참가하자 북경정부는 물론 제국주의 열강도 매우 놀랐다.” (p.830)
대중과 인민의 경험은 누적되고 학습된다. 지난 이명박 정권 시절 미국 소고기 수입에 대한 촛불시위는 이전의 시위와 봉기와는 확연히 다른 것이었다. 대학 운동권이나 시민단체, 각종 노조와 연합 운동조직의 깃발과 선동에 의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깃발도 확성기도, 절규하는 선동도 없었다. 각자 다른 방식과 이유로 학습된 기억과 태도는 자발적 참여의 창조적인 형식을 만들어 냈다. 핏발 선 외침이 없이도 촛불 하나로, 자유 발언 한번으로 대중과 인민은 하나가 되고 마음을 움직였다. 비록 정권이 연장된 탓에 이전 정권에서 벌어진 창조적이고 산뜻한 민중 봉기가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지만 이 책에 등장하는 태평천국 운동과 의화단 운동이 결국 5·4운동의 동인이 되고 그야말로 대륙을 뒤엎을 수 있는 지식 노동자들과 학생들의 의식을 고취시키고 혁명역량을 강화하여 중국 공산당을 만들어 낸 것처럼 언젠가는 한국 땅에서 일어난 대중과 인민의 운동과 시위, 봉기 또한 재평가 받을 것이다.
봉건지주·자산계급, 관원·매판자본 세력
“대중의 역량을 동원하여 청 정부의 압력에 저항하면서도 대중운동이 ‘윗사람을 거슬러 반란을 일으키는’ 정도로 확대되지 않도록 통제해야 하는 것이 입헌파 자산계급이 직면한 과제였다.” (p.680)
“자산계급 입헌파는 궁극적으로 독립적인 정치세력이 되지 못했다. 실제로 봉건 지주계급과 매판계급은 입헌파를 이용하여 혁명파를 속였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손을 빌려 혁명의 과실을 훔쳤다. 도도한 혁명의 물결을 거스를 수 없다고 판단한 봉건 지주계급과 매판계급은 일보 후퇴하여 자산계급 입헌파를 임시로 전면에 내세우고 혁명을 견제하는 역할을 맡겼다.” (p.736)
언제나 때리는 위치에 있던 사람은 자신의 폭력 행위를 굳이 정당화하지 않더라도 이미 체화되어 있어 불편함을 가지지 않는다. 군림하는 것은 편하고 때론 짜릿한 쾌감을 맛볼 수도 있다. 내 발 밑에서 기어 다니며 굽신거리는 치들은 그렇게 태어났고 그렇게 밖에 살 수 없도록 하늘이 정해놓았다. 같은 공기를 마시고 같은 하늘 아래 살고 있지만 절대로 다른 존재들이다. 그런데 그런 수천 년을 이어 온 구조가 뿌리째부터 뒤흔들리기 시작했다. 이들에게는 말 그대로 하늘이 무너지는 꼴이었다. 기어 다니며 굽신거리던 자들이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수천 년을 이어 온 방법대로 때리고 눌렀다. 그런데 듣지를 않았다. 가지고 있던 모든 기득권이 날아갈 수도 있다는 불안에 시달렸을 것이다. 그런데 다르게 생긴 자들이 큰 배를 타고 중국 대륙으로 건너오면서 다시 이들에게는 살 길이 열렸다. 그들이 가진 것을 내어놓지 않아도 중간에서 적절하게 처신하기만 하면 이제껏 누려오던 삶의 구조를 온전하게 지켜낼 수 있을 거라 판단했다. 그렇게 그들은 카멜레온처럼 색깔을 바꿔가며 살아남았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사실. 여전히 때리는 위치에서는 내려올 생각도 바꿀 생각도 전혀 하지 않았다.
“심지어 봉기의 총성이 울리기도 전에 입헌파 유지들은 혁명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고 지주계급과 매판계급의 대표인물과 청 왕조의 군정 관원들이 일시에 태도를 바꾸어 민주공화를 주장한 근본 원인은, 하층 대중과 진검승부를 벌여야 하는 혁명을 피하자면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그들이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p.745)
봉건지주 계급은 자연스레 자산계급이 되고 입헌파 세력이 되고 새롭게 탄생한 혁명조직의 우두머리가 되기도 했다. 혁명과 혁명이 이어지고 교차하는 시기에 어제의 동지가 내일의 적이 될 수도, 어제의 적이 내일의 동지가 될 수도 있었다. 그저 상황에 따라 시기에 따라 힘의 균형 추가 기우는 쪽에 따라 기회주의적으로 색깔을 바꾸면 그만이었다.
청나라가 완전히 주저앉고 중국 대륙 전체가 제국주의 국가들의 먹잇감이 되면서 이들 지배 계급들의 야욕은 더욱 두드러졌다. 청 왕조 그 이전부터 지배자로 군림하던 자들로부터 신식문화와 교육으로 무장한 지식계급에 이르기까지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들의 안위였다. 인민 대중의 맞는 모습과 그것이 내포하고 있는 구조적 모순과 한계에는 살을 맞대지 않았다.
“손중산은 신해혁명의 실패를 회고하면서 ‘그 시기에는 상황에 쫓겨 반혁명적 전제계급과 타협을 모색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타협은 실제로는 제국주의적 조종을 받은 것이었다. 이것이 혁명이 실패한 첫 번째 원인이었다.” (p.780)
“신해혁명은 실패했다. 황제가 대총통으로 바뀌었을 뿐 중국은 여전히 제국주의 열강의 지배를 받는 반식민지 반봉건 국가였다.” (p.783)
“마치 승전국이 패전국에 요구하는 듯한 무리한 요구를 두고 원세개 정부는 대표를 파견하여 일본 공사와 비밀리에 담판을 진행했다. 담판 과정에서 원세개 측에서는 여러 가지 양보를 하였으나 일본은 만족하지 않았다.” (p.798)
“원세개의 독재 통치는 중국을 더 심한 빈곤과 혼란 속에 빠뜨렸다.”
학교에서 쑨원으로 배웠던 손중산과 위안스카이로 배웠던 원세개 또한 이 한계에서 벗어날 수 없다. 혁명을 해내는 것이 전체 인민과 대중을 아우르는 것보다 우선되었기 때문에 그들은 거리낌 없이 반혁명 전제세력과 손을 잡을 수 있었고 더 나아가 외세의 앞잡이가 되어 대륙은 더욱 심한 갈등과 빈곤에 처하게 할 수 있었다.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36년 간 압제 속에 살아 온 조선의 해방은 꿈과 희망, 새나라, 새민족의 도래를 꿈꾸게 했다. 그런데 현실은 완전히 다른 형국으로 전개 되었다. 일제에 빌붙어 앞잡이 하던 친일 조선인들은 미군정의 요직에 다시 등용되어 행정과 치안 전체를 담당했다. 책에 등장하는 중국 근대 혁명세력과 단순 비교할 수는 없지만 역사라는 것이 인민 대중이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굳이 공통점을 찾아볼 수 있다.
늘 때리고 군림하던 자들은 맞는 것이, 굽신굽신 기는 것이 어떤 것인지 모른다. 단 한 번도 상상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역사는 늘 그들이 만들어 내는 방향으로 흐른다. 어김없이.
하이에나처럼 덤벼드는 제국주의세력
“갑오전쟁에서 일본 군국주의에 굴복한 중국은 마지막 숨을 몰아쉬는 거인과 같았다. 제국주의 열강은 굶주린 이리떼처럼 앞 다투어 달려들어 거인의 사지를 찢고 피와 살점을 삼켰다. 그들은 서로 간에도 먹이를 놓고 격렬하게 싸웠다.” (p.393)
이미 시체가 된 청 정부는 불같이 타오르는 인민 대중의 요구를 들어주지도 앞 다투어 밀려오는 제국주의 세력을 효과적으로 막아내지도 못했다. 우왕좌왕 했다고 보는 것이 가장 정확한 판단일 것이다. 제국주의 열강이 희망하는 대로 따랐고 굶주린 하이에나와 같이 몰려드는 그들에게서 인민을 지켜주지 않았다.
영국 자산계급이 1840년에 일으킨 아편전쟁에서부터 열강 제국주의 세력의 중국에 대한 야욕은 본격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일본 제국주의를 제외한 열강은 거의 모두 십자가를 목에 걸고 있었지만 본색은 중국 대륙이 가진 무한한 자원과 뜯어낼 돈과 노동력이었다. 더 이상 유럽 내에서 자본주의를 발전시킬 수 없었던 그들은 거대한 대포를 앞세워 땅따먹기를 하던 중이었다.
“전쟁 이전, 외국 침략자들은 청 왕조의 황제를 위시한 봉건 통치기구 전체를 그들의 중국 침략활동의 장애물로 보았으나 이제는 시각이 바뀌었다. 이 통치기구가 아니었더라면 그들은 광대한 중국 인민의 저항 투쟁과 직접 대면해야 했을 것이다.” (p.273)
“제국주의 열강은 중국이라는 거인을 마음대로 요리할 수 있는 대상으로 보아오다가 의화단운동이 폭발한 후로는 중국사회의 저층에 흐르는 거대한 저항 역량을 공포의 눈길로 바라보게 되었다.” (p.562)
앞서 살펴본 봉건지주·입헌파·자산 세력이 그들이 가진 기득권을 지켜내기 위해 인민 대중과 제국주의 열강 사이에서 기회주의적 처신을 했던 것과 비슷하게 열강은 이들을 이용했다. 대포로 억눌러 버리는 것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깨달은 이후 이이제이를 시작한 것이다. 굳이 제 손에 피 묻히지 않더라도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냈다. 저자는 이 부분 뿐만 아니라 책 전체에 걸쳐 중국 인민 대중의 기저에 흐르는 혁명 역량에 대해 다소 과한 평가를 하고 있는데 책을 처음 집필하던 시대적 배경을 생각하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지만 동의하기는 어렵다.
과연 제국주의 열강이 중국 인민 대중의 가진 혁명 역량에 공포를 체감한 것일까? 당시 열강은 중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걸쳐 땅따먹기를 하고 있었다. 아프리카 대륙은 물론 동남아시아에도 마수를 뻗치고 있었다. 물론, 중국에서 뜯어 먹을 것이 가장 많았지만 중국에만 집중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수많은 열강이 중국이라는 그릇에 모두 주둥이를 처박고 있었다. 열강은 단지 효율적인 것에 우선을 두었을 것이다. 인민 대중과 굳이 직면하지 않고 중국의 기존 지배계층을 적절히 이용하면서 자신들이 가져갈 이권과 이득을 쪽쪽 빼먹을 수 있다면 금상첨화이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는 한계
“그러나 선진계급의 영도를 받지 못하는 농민대중은 종교에서 혁명언어와 사상적 무기를 찾을 수밖에 없었고, 이것은 당연히 큰 약점이 될 수밖에 없었다.” (p.122)
“반(半)식민지 반(半)봉건 중국에서 농민이 갖고 있는 무궁무진한 반제국주의 반봉건주의 역량은 역사상 가장 선진적인 계급의 영도가 없이는 충분히 발휘될 수 없었다. 중국의 무산계급은 공산당을 통해 광대한 농민대중을 동원하고 단결시킬 수 있었으며, 농민운동을 태평천국이나 의화단 같은 자발적 운동이 도달하지 못했던 수준으로 끌어 올렸으며, 이런 업적을 통해 중국 무산계급은 중국 민족민주혁명의 영도자가 될 수 있었고 혁명을 발전시켜 최후의 승리에 이를 수 있었다.” (p.563)
작년 진보당과 관련된 문제에서 여실히 드러난 그들의 한계와 비슷하다. 그들만 대중과 인민을 선도하고 이끌 수 있다는 영웅주의. 앞서도 지적했던 바, 이 책이 처음 집필되던 시기는 여전히 중국공산당에 의해 전체 대륙과 인민이 영도되던 시기였다. 어쨌든 중국 공산당은 외세의 침략과 국·공 갈등, 소수민족 문제 등을 해결해 내며 중국 공산주의를 만들어 냈다. 비록 실패한 운동과 혁명 봉기 였지만 농민 대중, 인민들의 혁명 역량이 중국 공산당을 만들어 낸 대통이 되었다고 긍정적으로 저자가 해석할 수 있었던 여유는 소련 공산주의의 붕괴 이후에도 여전히 중국 공산주의는 건재했기 때문일 것이다. 당연한 논리적 귀결이겠지만 이것이 이 책이 가진 가장 중요한 한계다. 지금 중국은 사회주의 노선을 취하고는 있지만 경제적으로는 완전히 시장자본주의를 취하고 있다. 이미 중국 공산주의는 와해되었다고 봐야 한다. 몇몇의 영웅들이 등장해 강호를 평정하고 수도 없이 밀려드는 인민을 먹여 살리고 이끌어 가는 서사는 진부하다.
“몽고족” (p.260)
몽골을 몽고로 지칭하는 것이 불편하다. 몽고는 중국이 소수민족 정리 사업을 하면서 몽골을 격하하며 차용한 용어다. 어리석을 '몽(懵)'자와 옛 '고(古)'자를 써 몽고라 지칭한 것이다. 중국 대륙과 인민을 구원한 중국 공산당의 당 이론가였지만 중국인이라는 태생적 조건이 지닌 한계가 아니었을까 싶다. 설마 몽골의 인민은 당연히 중국의 인민과는 다른 존재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믿고 싶다. 몽골을 몽고라고 거침없이 표현하는 것에 하등 불편함을 느끼지 않았다면 그 또한 중국 제국주의 세력에 편승한 지식인 일 뿐이다. 중국의 인민도 몽골의 인민도 한국의 인민도 동일한 것은 분명하다. 그들이 오래전부터 당해 왔고 맞아 왔다는 것에서부터 앞으로도 이 상황이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비참한 예견에 이르기까지 말이다.
저자의 5·4운동 이후의 역사에 대한 책이 출간되기를 희망한다. 역사서술의 새로운 면을 발견하게 되었다. 쉽사리 바뀌지 않을 구조적 한계 상황에 놓여 있지만 그래도 역사는 오늘도 만들어져 가고 있다. 그 속에 나와 당신이 살아내고 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