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아지똥별 - 가장 낮은 곳에서 별이 된 사람, 권정생 이야기
김택근 지음 / 추수밭(청림출판) / 2013년 6월
평점 :
품절


권정생 선생님의 책「우리들의 하느님」을 읽으며 부끄럽고 죄스러운 마음을 한동안 지울 수 없었는데 이 책 「강아지똥별」을 읽고는 그때보다 곱절로 그런 마음으로 가득하다.

 

“모든 아름다움에는 슬픔이 깃들어 있습니다.” (p.5)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선생의 삶은 말 그대로 슬픔이었다. 단 한순간도 슬픔이 사라졌던 때가 없었던 것 같다. 그냥 문학적으로 슬픈 감정을 좋아해서 카타르시스를 얻고자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내일이 오는 것이 두려운 압도적인 슬픔을 경험한 권정생 선생님의 고백은 그래서 더 슬프고 아프다. 슬프고 아픈 것에 평생을 눌려 지냈지만 그것을 아름다움으로 승화시켰다. 선생의 작은 몸... 그 하나로…….

 

 

“정생은 그러나 중학교에 갈 수 없었습니다. 그 이듬해야 1950년이었고, 6월 25일 바로 한국전쟁이 발발했기 때문입니다.” (p.45)

“1953년, 열여섯 살이 됐습니다. 정생은 전교 1등의 성적으로 졸업했습니다. 하지만 정생은 중학교에 갈 수 없었습니다. 돈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정생은 돈 벌 궁리를 하다가 우선 나무를 해서 내다 팔기로 했습니다.” (p.61)

 

권정생 선생님의 평생은 가난과 배고픔, 아픔과 헤어짐, 눈물과 고통이었다. 60년이 훌쩍 지난 지금 대학에 가지 않는 학생들이 없고 중학교까지 의무교육이 된 현실을 살고 있다. 6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난 나의 아버지도 시골에서 손가락 안에 드는 성적이었지만 집안일과 동생들 뒷바라지 때문에 대학에 가지 못하셨다. 그런데 왜 나는 나의 아버지 스토리보다 권정생 선생님의 스토리에 더 눈이 박히는 걸까?

빼앗긴 조국에서 태어나지 못하고 일본의 빈민가 구석에서 태어난 선생은 나중에 일직교회 뒤편에 움막을 짓기 전까지 한 번도 자기 집에서 살아본 적이 없었다. 열여섯 살이 되어서야 초등학교를 졸업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고 그나마도 여러 번 학교를 옮겼다. 전교 1등의 성적임에도 중학교에 진학할 수 없었다. 담임이던 선생님도 교장 선생님도 어머니도 아파하고 눈물 흘려줄 뿐 어린 선생님을 중학교에 입할 시킬 수 없었다. 직접 나무를 구해다 팔아보기도 하고 중학교 진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 병아리를 사다 잘 길렀지만 전염병이 돌아 모두 폐사시킬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불행이라는 놈은 한 사람에게만 집중될 수 있는 것인가? 나는 지난 선생님의 책과 이번 책을 읽으며 계속 울화가 치밀었다. 왜 굳이 권정생 이라는 사람에게만 불행과 슬픔이 휘몰아치는 것인지…….

성경에 욥이라는 인물이 주인공인 욥기가 있다. 그는 대단한 부자였고 자손도 많았고 당대에 의인이라 평가받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야훼 하나님은 그를 계속해서 시험한다. 시련과 아픔을 준다. 욥의 친구들은 욥을 구슬려 욥으로 하여금 야훼 하나님을 저주하고 부정하도록 유혹한다. 상황만 봐서야 당장이라도 욕지거리를 내뱉고도 남는다. 나 같으면 단 한 번의 유혹에 덜커덕 넘어갔을 것이다. 하지만 욥은 이겨냈다. 그의 믿음과 신앙을 지켜냈고 친구로 위장한 악의 유혹도 견뎌 냈다.

 

 

“그날 정생은 처음으로 저울 위에 새끼손가락을 올려놨습니다. 손님은 아무것도 모르고 평소처럼 정생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했습니다. ‘저울 속이기’가 계속되었습니다. 죄책감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희미해졌습니다. 나중에는 요령까지 생겨 빠르게 저울질을 했습니다. 눈속임에 익숙해진 것입니다.” (p.72)

 

권정생 선생님은 어떻게든 돈을 벌어야 했다. 아니면 집안의 숟가락 숫자라도 덜기 위해서 무조건 집에서 나와야 했다. 중학교 진학이 어렵게 되고 나서 고구마 가게 일을 보게 되었다. 장사가 잘 되는 와중에도 주인은 저울 속이기를 지시했다. 어린 정생은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돈을 벌어야 배고픔을 잠시라도 면할 수 있었다.

흘러흘러 간 부산의 정비공장에서도 기도원에서도 구걸을 하던 길거리에서도 그는 살아야 했다. 아무리 좋은 옷과 좋은 음식을 먹어 기름이 흘러도 거지들보다 더 더럽게 사는 사람들을 눈으로 온몸으로 볼 수 있었다. 생전 선생님은 약하디 약한 동물과 식물에 자연에 오히려 눈을 돌리고 애달파 했는지도 모르겠다.

 

 

“밤이면 예배당에 가서 홀로 기도를 드렸습니다. 이 기나긴 고통을 끊어 달라며 무릎을 꿇었습니다. 살려 주시든지, 아니면 빨리 죽여주시라고 빌었습니다.” (p.102)

 

20살 때부터 온 몸에 몹쓸 병을 달고 살았다. 하느님이든 하나님이든 신을 믿는 자가, 그가 믿는 신에게 ‘차라리 나를 죽여 달라’라고 하는 절망은 도대체 어떤 것일까? 가늠할 수도 짐작할 수도 없다. 책의 이 부분을 읽고 나서부터는 제대로 책을 읽어 낼 수 없었다. 마침 아내와 커피전문점에서 책을 읽고 있었는데 북적이는 실내에서 남의 눈 의식하지 않고 눈물을 쏟아냈다.

가늠할 수도 짐작할 수도 없는 절망과 슬픔, 고통의 한 켠이 마음으로 전해졌다.

 

 

“태어나 밥 한번 마음껏 먹어 보지 못했고, 꿈 한 번 제대로 꾸지도 못했습니다. 자식들 걱정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어머니의 삶 속에 어머니는 없었습니다. 병든 정생을 두고 떠나려니 제대로 눈을 감지 못했을 것입니다. 정생은 하늘이 무너졌습니다.” (p.106)

 

평생을 가난과 배고픔과 고통 속에서 살다 돌아가신 어머니를 그리는 부분에서는 주체할 수가 없었다. 선생님의 여러 집필을 엮어 만든 동화임에도 논픽션이 아니었다. 병든 몸으로 마음 놓고 어머니의 죽음을 슬퍼할 수도 없는 선생이 가여웠다. 슬프고 슬펐다.

 

 

“이 사람들은 모두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이 아닌가. 병들고 불쌍한 청년에게 도움은 주지 못할망정... 이들은 모두 자신만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들이 분명해.” (p.118)

“자신만 돌보는 사람들로 가득 찬 기도원에 하느님이 계실 리가 없었습니다. 분명 하느님은 문둥이 청년을 따라 멀리 떠나 버렸을 것입니다. 정생은 어쩌면 그 문둥이 청년이 예수였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p.120)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가세는 더욱 기울었다. 누나들은 일찍이 집을 떠났고 선생과 아버지 남동생이 살고 있었다. 아버지의 비참한 권유로 선생은 기도원에 가게 된다. 하지만 기도원에도 구원은 존재하지 않았다. 모두 가 자신들의 고통과 슬픔을 한가득 짊어진 채 올라 온 기도원이지만 여전히 행색이 초라하고 문둥병을 가진 청년에게 경멸어린 시선을 보내는 이중성에 선생은 질려 버린다. 요즘 한국 교회가 문제가 많다고 난리들이지만 수십 년 전 모습도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 더 절망적이다.

선생은 자연과 환경 어린아이, 작은 동식물과 미물들에 특히 사랑을 쏟는다. 무턱대고 삽을 들이밀던 시기부터 농업이 전 세계로 개방될 때까지 선생은 농촌에서 농촌이 무너지고 농촌 사람들이 스스로 목숨을 거두는 일을 수도 없이 목격했다. 도시의 발전이 가져 온 찌꺼기가 농촌의 황폐화를 낳은 것에 분노 했다. 웬만해서는 화를 내지 않는 선생님이 또 하나 분노에 차 소리를 지르는 것은 바로 한국의 교회다. 앞서도 말했지만 신앙, 믿음이라는 것이 그저 개인의 안락과 기복에만 치우쳐 있는 현실을 개탄한다. 그럴 때면 그 작은 몸, 병으로 가득한 몸에서 어떻게 그런 일갈이 나오는지 궁금하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교회가 권위주의, 물질만능주의, 신비주의에 물들었습니다. 조용히 가슴으로 드리던 기도는 큰 소리로 미친 듯이 외치고 있습니다. 장로와 집사는 직분이 아니라 명예와 계급, 권력이 되었습니다. 하느님께 의지하는 믿음이 아니라 하느님을 이용하여 출세하고 권력과 돈을 얻으려 합니다.” (p.189)

 

100% 맞는 말이다. 권위주의, 물질만능주의, 신비주의에 빠져 있는 한국 교회. 권정생 선생님은 오랜 시간 시골 교회의 종지기로 살았다. 아주 작은 움막에서 새벽을 열고 아주 작지만 강한 믿음을 가지고 살았다. 시골마저 도시와 같이 황폐화되고 시골 교회 또한 도시 교회와 같이 세속화되고 노골적으로 변하게 되는 것을 지켜봤다. 이 책에서도 소개되지만 선생의 소원 중에 하나가 작은 교회하나 만드는 것이었다. 옛날 집처럼 만들고 바닥을 나무로 해서 50∼100명 정도 교인이 있는 교회. 논어, 맹자도 공부하고 스님도 신부님도 모셔서 좋은 말씀 듣는 그런 교회.

 

수십 년을 슬픔과 배고픔, 육체적 고통 속에 살다가 빛나는 강아지똥별이 된 권정생 선생님. 비록 그가 소원하던 것들이 살아생전에는 이뤄지지 못했지만 선생님의 생전에는 이름조차 모르던 나와 같은 독자들이 여전히 선생님을 기억하고 선생님의 책을 읽으며 울고 감동받는 이것이 작은 기적이라 생각한다. 어느덧 기성세대가 되고 나도 그렇게 비판하던 기성 기독교인이 되어 가고 있는 시점에 이 책은 정신 바짝 차리게 하는 차가운 죽비다.

 

책을 읽는 내내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나는 너무 편하게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나는 너무 쉽게 신앙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나는 너무 교만하게 인생을 대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오늘 밤에 고개를 들어 가만히 강아지똥별을 찾아보려 한다. 조용하고 겸손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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