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친구 기리시마 동아리 그만둔대 - 제22회 스바루 소설 신인상 수상작 자음과모음 청소년문학 31
아사이 료 지음, 이수미 옮김 / 자음과모음 / 2013년 5월
평점 :
품절


지구상에서 일본을 맹목적으로 무시하는 나라는 대한민국이다. 분명 경제 규모나 여러 가지 면에서 일본은 이미 선진국이 된 지 오래고, 한국은 아니다. 그런데도 맹목적으로 싫어하고 무시한다. 30여 년의 침탈의 역사에 대한 분노와 증오, 거기에 더해 그들 편에 서서 같은 조선인들을 수탈했던 친일파들에 대한 제대로 된 숙청을 하지 못한 역사적 찌꺼기가 가득 끼어 있는 곳이 한국이다. 박정희는 일본의 경제 모델을 그대로 따라 했다. 국가 주도형 수출 경제, 재벌 중심 경제 성장 등 아직도 위에 계신 분들 중 대다수는 일본 바라기다. 그런데 대다수 한국인들의 감정은 완전히 다르다.

며칠 전 일본과 이탈리아의 컨페더레이션스컵 예선 경기를 시청했다. 결과는 이탈리아가 4대 3으로 이겼지만 경기 내용은 일본이 우세했다. 패스의 정확도나 전술의 독창성, 선수들 각자의 유기적인 공간 활용은 예술적이었다. 2002년 월드컵 이전에는 무조건 한국 축구가 일본 축구보다 우위에 있었다고 했다. 2002 월드컵 때도 한국은 4강 신화를 이뤄냈고, 일본은 고작 16강에 머물렀다. 2002년 이후 한국과 일본과의 축구 격차는 상당히 줄어들었다. 2000년대 중후반을 지나며 오히려 경기력이 역전 했다. 여전히 한국은 정신력만을 강조하는 고질적인 수비불안과 골 결정력 부족으로 허우적댔다. 일본 축구는 달라졌다. 한번씩 AFC챔피언스리그 경기를 통해 방송되는 일본의 프로축구 팀의 경기력과 관중 동원력은 유럽의 상위리그 못지않았다. 일본 축구 대표팀의 경기력은 점점 좋아지고 있었다.

우연히 스포츠 관련 잡지를 보던 중 엘리트 스포츠만을 중시하는 한국과는 달리 일본은 엄청나게 넓은 저변과 각종 경기장 등 스포츠 인프라 구축이 이미 수십 년 동안 만들어져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한국의 운동부는 학교 수업을 거의 듣지 않는다. 수업 시간에 들어와서 노골적으로 엎어져 자도 선생이 깨우지 않는다. 그저 올림픽에 나가 메달 따는 것에 사활을 건다. 그런데 일본은 그렇지 않다고 했다. 이미 미국이나 유럽처럼 학교에서 동아리 활동으로 하는 스포츠 활동이 보편화 되어 있고 체계화 되어 있다는 것이다. 특별히 선발된 운동부원만 운동에 전념하고 나머지 학생들은 밤 10시, 11시까지 남아서 야간자율학습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후까지 수업을 하고 다 같이 동아리 활동을 하는 것. 아주 작은 동네라도 야구장과 축구장, 실내체육관이 갖춰진 일본의 스포츠 인프라는 한국의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러니 당연히 축구 경기력이 역전될 수밖에. 30년 전부터 요구되던 정신력 드립은 이제 그만 거둘 때가 됐다.

 

이 책 「내 친구 기리시마 동아리 그만둔대」는 청소년 문학이다. 그들의 눈높이에서 읽는 것이 가장 좋은 독자일 텐데 그렇게 읽히지가 않았다. 계속 일본 축구, 한국 축구 문제가 떠오르고 앞서 얘기한 스포츠 잡지(일본과 한국의 스포츠 환경 비교기사가 실린)의 내용이 계속 생각났다.

이 책에 나오는 고등학교 2학년 일본 아이들의 모습이 부러웠다. 계속 그랬다.

오후 수업을 마치고 야구부로, 배구부로, 브라스밴드부로, 영화부로, 소프트볼부로, 배드민턴부로 흩어져 연습과 훈련을 하고 대회에 나가서 수상도 하고 하는 모습이 부러웠다.

내가 고등학교에 다니던 십 수 년 전의 상황과 지금 한국 고등학생의 상황이 전혀 달라진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머리가 멍해졌다.

도대체 밤 11시까지 아이들을 학교에 잡아 둔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는 건지 당최 알수가 없다.

경제뿐만 아니라 학교의 상황도 일본의 그것을 많이 닮아 가고 있다. 일본에서 한 때 큰 사회적 이슈가 되었던 이지메 현상이 한국의 학교에서 왕따 현상으로 그대로 복사 되었고 무너진 교권의 문제도 고스란히 복사 되었다. 그런데 그렇게 부정적 현상은 잘도 따라 하면서 방과 후 동아리 활동과 같은 긍정적 현상은 왜 도무지 따라할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인지 모르겠다. 형식적으로 정해진 방과 후 활동과 동아리 활동은 눈 가리고 아웅이다. 학교에서 체육시간 조차 없애는 분위기인데 더 말해봐야 입만 아플 뿐이다.

 

 

“그와 처음으로 이야기를 나눴다는 사실에 나는 약간 흥분 상태가 되었다. 저쪽 그룹 아이들과는 접촉할 기회도 없었고 그래서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p.121)

“하찮을지 모르지만, 여자에게 그룹은 세계다. 눈에 띄는 그룹에 들어가면 괜찮은 남학생과도 친해질 수 있고, 다양한 상황에서 비참함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 예쁘지 않은 그룹의 창작 무용은 보는 사람까지 비참하게 만든다. 어느 그룹에 속하느냐에 따라서 내가 서는 위치가 달라진다.” (p.143)

 

이 작품에서 표현된 일본의 학교는 여전히 냉혹하고 문제가 많은 것 같았다. 학교 안에서도 힘의 우위에 따라 서열이 완벽하게 정해졌고 이것은 교사나 학부모, 교육당국이 손을 써서 해결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 체계가 되어 버렸다. 위쪽 그룹과 아래쪽 그룹은 서로 각자의 위치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다. 내가 어느 쪽 그룹에 속해있는 지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는 것처럼 다른 아이가 어느 쪽에 속해있는 지도 정확하게 알고 있다. 힘의 우위만이 구조의 질서를 결정하는 정글 한복판이다.

하지만 적어도 한국의 학교들보다는 낫겠지. 라는 생각이 없어지지 않았다. 그래도 한국의 학교 안에서 벌어지는 기가 막히고 절망적인 상황보다는 낫겠지. 라는 생각.

2년 전 겨울, 느닷없는 뉴스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요즘 아이들은 노스페이스 잠바로 서열이 구분된다는 내용이었다. 100만원에 가까운 잠바를 입고 있는 아이는 자연적으로 일진이 되고 기껏해야 20-30만 원 정도의 잠바를 입고 있는 아이는 무시당한다는 것이다. 무서웠다. 어른들이 하는 나쁜 짓을 그대로 따라하고 있는 꼴이었다.

그래서 나는 일본보다 한국이 더 무섭다.

 

 

“여러분은 젊습니다. 힘이 있습니다. 앞으로 뭐든지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새하얀 도화지입니다.”

“17세, 고등학교 2학년. 새하얀 도화지. 자주 듣는 말이다. 분명 우리는 젊고 힘도 있고 새하얗고 도화지이기도 하지만, 어차피 붓도 없고 애당초 아무것도 그릴 마음이 없다는 게 문제다.” (p.173)

 

교장의 훈화는 언제나 지겹다. 불필요한 단어가 많고 쉽게 할 수 있는 표현을 굳이 어렵게 하는 특성이 있다. 희망고문 또한 지겹다. 물론, ‘너는 안 돼’ 라는 말보다야 낫겠지만 추상적이고 이상적이기만 한 위로는 독약이다. 작가의 표현대로 애당초 아무것도 그릴 마음이 없는 아이들에게 ‘너는 이렇게 그리고, 너는 저렇게 그리고...’하는 것은 코미디다. 그릴 마음이 없다면 왜 없는지, 그러면 어떤 마음인지 먼저 묻는 것이 중요한 과정일 것이다. 아이들은 많이 만나는데, 아이들의 가장 큰 불만은 그것이다. 아무도 자신의 얘기를 들어주려 하지 않는다는 것. 어른이랍시고 가르치려고만 하고 교육하려고만 하고 설득하려고만 하니, 정작 아이가 하고 싶은 말은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먼저 얘기해봐. 라고 해놓고서는 몇 마디 듣지도 않고 이러쿵저러쿵 충고부터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것이다.

 

기리시마가 왜 동아리를 그만두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끝까지 밝혀지지 않는다. 다만 얽히고설킨 관계가 나열 된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일본 아이들이 마냥 행복해 보이지는 않지만 내가 만나는 아이들, 뉴스에서 보는 아이들, 다큐멘터리에 나오는 모자이크 된 아이들의 얼굴이 자꾸만 떠올라 부러웠다. 밤늦게까지 학교에 있어야 하고 주말에는 학원으로 쫓아다니는 한국의 아이들보다는 행복해 보인다. 오후에 수업이 끝나고 하고 싶은 동아리 활동을 하고 대회에도 나가고, 하기 싫으면 언제든지 동아리를 그만둘 수 있는 기리시마의 상황이 부러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