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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의 자유 - 해직기자 김종철의 젊은이를 위한 한국 현대언론사
김종철 지음 / 시사IN북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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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조선일보에 대한 채동욱 전 검찰총장의 기자회견이 있은 후 각계각층에서 하고 싶은 말을 쏟아내고 있는 형세다. 언제 한번이라도 조선일보가 이름 그대로 언론이었던 적이 있었나 싶고 언제 한번이라도 검찰이 이름 그대로 사법기관이었던 적이 있었나 싶은데 너도나도 이것이다 저것이다 하며 말이 많다. 입이 있고 손이 있는 것은 신체의 자유이고 하고 싶은 표현을 하는 것은 표현의 자유이다. 하지만 조선일보와 채 전 총장을 둘러싼 일련의 사건은 뻔한 연예인 스캔들 기사를 보는 것보다 더 노골적이고 저질적이다.

지난 이명박 정권 이후 지상파 뉴스와 종이 신문을 보지 않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버젓이 한 나라에서 같은 공기를 마시고 사는 이들인데 SNS상에서는 뜨거운 이슈가 9시 뉴스에서는 전혀 보도되지 않고 아침 신문들에서는 정권과 여당, 수구세력을 대변하는 기사만 쏟아낼 뿐이었다. 조폭처럼 국회를 점거해 통과시킨 종합편성 채널은 내년 재심사를 앞두고 또 말도 되지도 않는 편향적 기준을 만들어 내고 있는 중이다. 뭐, 그것도 자유다. 한겨레, 경향, 오마이뉴스 같은 신문과 인터넷 언론이 못마땅한 사람에게는 채널A와 TV조선이 좋을 수 있다. 반대로 조·중·동은 물론 지상파 TV뉴스도 보지 않는 사람에게는 종편 같은 것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짐짝 취급을 받을 수 있다. 아무리 종편채널을 싫어한다 해도 하루 종일 종편을 틀어놓는 식당에서 점심을 먹으며 굳이 식당 손님 모두가 보는 TV의 채널을 바꿀 필요는 없다. 그럴 권리도 없고. 반대로 누구나 자신의 의견을 자유롭게 개지하는 것이 가장 큰 사용 이유인 SNS의 어떤 의견과 발언 또한 제재할 필요도 권리도 없어야 한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서는 한쪽의 권리는 무작정 보장해주는 반면 반대쪽 권리는 각종 규정과 법률, 댓글알바 따위로 제한하고 있다. 그것도 자유인가?

결코 자유일 수 없다. 애초에 공정한 룰과 공정한 경기장이 확보되지 않은 채 벌이는 싸움은 그 자체로 잘못된 것이다.

 

 

“종합편성채널은 상업 유료방송인데도 방송법에는 ‘의무전송 채널’로 규정되어 있다. 공영방송도 누리지 못하는 특혜를 받은 것이다. 편성과 광고에 대한 심의 규정도 느슨하다. 이명박 정권이 밀어붙인 ‘언론 시장주의’는 ‘미디어 악법’을 통한 종편 체제 구축으로 정점에 이르렀다.” (p.489)

 

지난 대선 이후 대선에 패배한 진영에서는 부랴부랴 언론 싸움에 뛰어들었다. ‘종편이 뭐 대선에 영향을 주겠어? 1% 시청률도 안 나오는데~’라고 쉽게 생각했다가 크게 당했다. 생각보다 기득권과 노년층, 보수 세력은 종편에서 방송해주는 뉴스와 프로그램을 기가 막히게 이용하고 영향을 받았다. 그래서 매달 거의 강제적으로 시청료를 내고 있음에도 공영방송, 공적 언론의 역할을 전혀 하지 않고 있는 뉴스와 언론을 포기 했다. 여러 개의 협동조합 형태의 언론이 탄생했고 몇 만 명의 후원자를 모집해 그나마 언론의 역할을 해내고 있는 몇 개의 인터넷 뉴스를 만들었다. 뭐 그래봐야 계란으로 바위치기다. 고래와 피라미 정도의 싸움이랄까?

박근혜 대통령과 새누리당, 기존의 기득권은 원하는 것을 그대로 밀어 붙이고 있다. 각종 기관의 장에 수구세력을 심고 있고 대선 때 부르짖었던 공약은 이미 집어 치운 것 같다. 아무리 촛불을 켜도 눈 하나 깜빡이지 않는다. 지난 이명박 정권이 후퇴시켰던 정치적 민주주의와 개인의 자유의 정도는 곱절로 후퇴하고 있는 것 같다.

 

 

이 책 「폭력의 자유」는 언론 자유의 역사에 대한 기록이 아니다. 언론을 통제하려는 자들의 자유에 대한 역사적 기록이다. 이 책을 쓴 김종철씨는 동아투위 때부터 공정언론과 언론의 민주화를 위해 온몸으로 싸워 온 사람이다. 말 그대로 기자다.

 

 

“심지어 국내의 움직임을 외국의 출판물을 통해 알기가 일쑤다. 언론은 국민들로부터 불신당하고 언론인들은 자기의 의무를 다하지 못해 긍지를 잃고 실의에 빠져 있다. 우리는 오늘날 한국의 언론이 중대한 위기에 처해 있음을 통감” (p.182) -1971년5월 동아기자-

 

국정원 대선 개입 사건에 대한 뉴스가 한국에서 벌어진 일임에도 언론들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조용했다.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모두들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오히려 외국 언론에서 더 적극적으로 기사를 쓰고 칼럼을 썼다. 외국 언론을 통해 이 나라의 상황을 파악하는 것은 40년 전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왜 이렇게까지 언론이 망가진 것일까?

저자는 언론 중 신문의 역사에 주목한다. 일제 강점기 언론의 상황에서부터 이명박 정권과 박근혜 정권에 이르기까지 언론이 어떻게 통제되어 왔고 또는 권력에 유착해 어떻게 살아왔는지 자세하게 기록했다. 차마 하나하나 소개하기가 민망할 정도다. 한국의 메이저 신문이라는 것들이 일제 강점기부터 미군정기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이명박을 거치며 어떻게 기생해 왔는지 또는 권력을 좌지우지했는지 적나라한 그들의 치부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언론이라 함은 권력의 4부가 되어야 하고 사회의 공기이며 비상식과 불의에 타협하지 않고 진실을 추구해야 하는데 한국의 신문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는 것이 주된 내용이다. 언론은 언제나 권력의 편이었고 사회를 더 어지럽히기 일쑤였으며 상식과 정의에는 눈감았다.

 

 

“5.16 군사혁명은 문자 그대로 혁명이기 때문에 ‘비민주적인 방법이긴 하나’ 장 정권의 무능과 부패를 이 이상 묵인하여준다고 함은 다시 걷잡을 수 없는 위험한 사태를 초래하는 것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 국민의 공통된 느낌이었으니 한국의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우해서는 다소간 ‘비민주적인 방법’이라 하더라도 이를 피할 도리는 없을 것이다.” (p.132)

<동아일보 1961.5.26 ‘혁명 완수로 총진군하자’>

 

독재 권력에 굴종할 수밖에 없었다고 애써 변명하고 싶겠지만 그렇다면 독재 권력에 그렇게 굴종했던 과거를 제대로 참회하고 사과해야 한다. 서슬 퍼런 독재시절 국민들은 살아가는 것 자체가 공포였는데 신문이라는 것들이 국민의 편이 되기보다는 정권의 나팔수가 되었으니 그 역할을 다하지 못한 것이다. 역할은커녕 존재 이유 자체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박정희, 전두환 독재권력 내내 그들 편에 붙었다. 독재자들은 장군님으로 위대한 영도자로 찬양하고 그들을 뒷받침했다. 당연히 그에 따른 보상은 광고나 투자로 돌아갔다. 노태우, 김영삼 정권 때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김영삼 정권 말기 나라 경제가 와르르 무너지는 와중에도 그들은 “경제위기감 과장 말자 (중앙일보 11월1일자)” “경제 비관할 것 없다(조선일보 11월 2일자)” “외신들의 한국 경제 흔들기 (동아일보 11월 10일자)” 라고 하며 무작정 권력의 편에 섰다. 그리고 진짜 나라 경제가 무너지고 빈털터리가 되었을 때 그들은 단 한 번도 잘못된 보도에 대한 사과를 하지 않았다. 이후 민주 정부 10년 동안은 줄곧 정권 트집 잡는 것으로 시간을 보냈다.

 

 

여기서 저자는 중요한 사실을 지적하는데 한겨레, 경향과 같은 소위 개혁·진보 신문의 행태다.

 

“한겨레와 경향신문의 반성과 자기비판은 두 신문의 제작책임자와 일선 기자들이 왜 검찰의 ‘기획·표적 사정’에 휘말려들었는지에 관한 원인과 과정을 명확히 밝히지 않았다. ‘노무현 죽이기’가 대세를 이룬 상황에서 지나친 상업주의적 보도 경쟁에 뛰어들었는지, 노무현에 대한 적대적 감정에 편승했는지를 해명하지 않았던 것이다.” (p.471)

 

고 노무현 대통령을 두고 검찰과 조중동이 칼춤을 추고 있을 때 참여정부의 언론 자유 아래 마음껏 날개를 펼쳤던 소위 진보 매체들 또한 그 칼춤에 동조 했다. 무분별한 추측과 가정, 폭로와 음모가 활개를 치고 있을 때 어느 진보 매체 하나 객관적이고 중립적으로 그 사안을 다루지 않았다. 사실 이 문제에 있어서는 적극적으로 동의하고 노무현을 욕하던 부류이든 암묵적으로 동의한 채 입 다물고 있던 부류이든 져야 할 책임의 무게는 크게 다르지 않다. 그때는 모두들 그 배를 타야만 했다. ‘모든 것이 노무현 때문이었다.’ 노무현 대통령이 서거한 후 그들의 태도는 조중동이든 진보 매체든 180도 달라졌다. 그들의 칼춤에 대한 반성은 전혀 없었다. 애초에 그런 것을 기대하는 것이 불가능한 조중동이야 원래 그런 존재들이니 말할 필요 없지만 진보매체들의 행태는 이해하기 어렵다.

 

 

“‘천안함 사건’ 명예훼손 재판이 열리던 시기에 한겨레와 경향신문, 오마이뉴스와 프레시안을 비롯한 ‘진보적 매체들’은 ‘침묵의 카르텔’을 맺었던 것인가? 2010년 3월 26일 천안함 침몰 사고이래. 그렇게 끈질기게 기사와 논평으로 ‘북한 어뢰에 의한 폭침설’을 반박하던 자세는 어디로 사라졌는가?” (p.507)

 

천안함 사건과 같은 중차대한 문제에 대해서도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법이 없다. 모든 사안이 그렇지는 않겠지만 권력과 언론은 한 몸이 된 지 오래다. 모든 것이 정치적 물타기 혹은 정치적 노림수를 위한 보도 내지는 폭로는 아니겠지만 그런 일이 많다. 그래서 한꺼번에 확 하고 타올랐다가 금세 후다닥 하고 잊어버린다. 그리고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른 먹잇감을 찾아 하이에나 떼처럼 두리번거린다. 4대강도 그랬다. 쇠고기 파동도 그랬고 이명박 정권에서 일어났던 수많은 비리와 의혹들에 대해서도 그랬다. 앞서도 말했지만 조중동이야 원래 그러니 애초에 기대같은 것도 없지만 진보 매체 또한 그들과 똑같으니 대중의 실망이야 짐작조차 하기 어렵다.

언론이 4의 권력이 되어 실제 권력을 견제하고 면밀하게 지켜보고 비판하는 기능을 잃어버렸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다. 실제 권력과 한 몸이 된 언론은 그 자체로 폭력이다. 그런 폭력 또한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자유라고 말할 지도 모르겠지만 그것은 대중에게는 폭력이다. 그들이 만들고 싶은 사회와 정치, 문화와 의식을 점유하고 있는 시장과 자본, 권력의 배후를 발판삼아 손쉽게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대중은 실제 몸으로 체감하는 현실과 다른 만들어 낸 현실에서 판단을 흐리게 된다. 이렇게 되면 옳고 그른 것, 상식과 몰상식, 정의와 불의의 구분은 모호해 진다. 민주주의는 후퇴하고 개인의 자유는 통제의 대상에 들어가게 될 수도 있다.

 

 

오늘 오전 주요 포털의 메인과 검색어 상위를 장식하고 있는 것은 연예인의 열애 기사와 추신수, 류현진 뿐이다. 오늘 오전에 박근혜 대통령이 스스로 공약을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해 기자회견을 했는데 그런 사안에 대해서 각종 논쟁이 쏟아지고 분석이 나와야 하는데 다들 침묵이다. 국민과 대중을 호구로 알아도 이렇게 호구로 취급할 수는 없다. 하지만 착한 것인지 정치의식이 없는 것인지 대중과 국민들은 별로 그런 것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대통령이 선거 공약을 뒤집거나 폐기해도, 말도 안 되는 정책과 인사가 이루어져도 별 말 하지 않는다. 제대로 된 공동 저항조차 하지 않는다. 너무도 조용한 국민들이다. 그러니 ‘이 정도쯤 해도 가만있을걸.’이라는 생각이 저들에게도 가득할 것이다. 어차피 언론은 자기들 편이니 언론에서 물타기로 며칠간 시끌벅적하게 만들어 관심을 돌려 버리면 그만인 것이다.

폭력에 시달리고 싶은 사람은 없다. 하지만 애당초 폭력을 폭력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그저 질질 끌려 다니는 사람들의 태도도 문제다.

 

 

“과거를 망각하는 민족은 자유를 향유할 자격이 없다.” (p.86)

 

한국의 언론 역사는 질곡의 과정이었다. 민족지, 정론지 자청하는 자들은 있지만 정작 자세히 살펴보면 그런 것과는 거리가 먼 자들이다. 언론이 제대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잘못된 과거를 반성하지 않은 채 지금에 이르렀다면 그 자체로 역사는 잘못된 것이다. 과거의 잘못을 덮어두지 않고 청산해낸 프랑스는 현재 언론 자유의 최상위에 위치해 있다. 드골의 나치 협력자 숙청이 없었다면 지금의 프랑스는 없었을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민족정기를 바로 세운다는 도덕적 차원의 해석보다는 ‘반역의 역사’를 다시는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 후세에 중대한 교훈을 남겨준 사실에서도 큰 의미를 갖는다. 박근혜 대통령 집권 이후 민주주의가 급속하게 후퇴하고 잘못된 과거를 부활시키려는 분위기가 일어나고 있다. 친일청산에서부터 독재부역에 이르기까지 잘못된 과거를 단 한 번도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까닭이다. 반민특위는 친일파 경찰에 의해 습격을 받았고 독재에 부역한 언론과 재벌은 이제껏 살아남아 떵떵거리며 기득권이 되었다. 그러니 역사의 시계를 수십 년 뒤로 돌리는 일에 주저하지 않는다. 기가 막힌 일이지만 기껏해야 SNS상에서나 뜨거운 감자일 뿐이고 TV에서나 신문에서는 이런 경향을 아예 다루지도 않는다.

드골의 말대로 ‘과거를 망각하는 민족은 자유를 향유할 자격이 없다.’ 이 사회의 전반적인 면에서 잘못된 과거에 대한 청산이 필요하다. 그 중에서도 언론 분야는 더욱 심각하고 시급하다. 지금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망각하면서 시간을 보내면 언젠가는 돌이키려는 시도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망가져 있을지도 모른다.

 

 

“권력이나 대자본과 하나가 되거나 스스로 권력이 되어 민중을 억압하는 언론은 그 자체가 반사회적이다. 가난하고 소외당한 사람들을 자유롭게 하는 언론이야말로 민중의 진정한 벗이다.” (p.7)

 

대중은 자신의 마음을 줄 곳을 찾는다. 표류하는 바다 위에서 등대 불빛 하나를 찾는 것이다. 대단한 것을 바라는 것도 아니다. 진실을, 사실을 그대로 보도해 주는 것만으로도 만족할 것이다. 분명히 오늘 일어나고 있는 일이 왜 9시 뉴스에서 다음날 아침 신문의 1면에서 찾아볼 수 없는지 그것이 궁금한 것이다.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지금 몇몇 대안 언론들이 탄생하여 활동하고 있는데 사실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단지 선거를 앞두고 연합하는 것이 아니라 장기적인 관점에서 조중동과 지상파 뉴스를 뛰어 넘을 수 있는 세력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공정한 룰과 경기장을 가질 수 있다.

 

대중과 국민도 그럴 자격을 미리 갖추어야 한다. ‘내 먹고 사는 일하고 관계 없는데 뭐~’,

‘정의, 진실 찾아봐야 뭐 도움이 돼~’, ‘어차피 똑같은 것들인데 뭐~’ 라는 수동적이고 패배

주의적인 자세는 버려야 한다. 조금 더 관심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반응하고 행동해야 한다.

후원같은 것도 제대로 시작해 보고 찾아서 홍보도 해보는 노력이 필요하다.

 

더 이상 저들의 폭력이 자유롭게 우리를 유린하지 못하게.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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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자신을 속이도록 진화했을까]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우리는 왜 자신을 속이도록 진화했을까? - 진화생물학의 눈으로 본 속임수와 자기기만의 메커니즘
로버트 트리버스 지음, 이한음 옮김 / 살림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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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책이다. 「우리는 왜 자신을 속이도록 진화했는가?」하는 문제에 대한 심리학적 접근이다. 심리학 중에서도 사회심리학적인 접근으로 보이는데 책의 제목처럼 흥미를 끈다. 진화론적 관점에서 진화의 가장 강력한 동인은 ‘살아남기 위한 의지’라고 본다. 어쨌든 살아남기 위해 불필요한 기관을 퇴화시키고 효과적으로 상황에 대처하고 적응해 나가는 것이다. 비단 동·식물 세계에 국한된 문제는 아니다.

 

 

“이 책은 이 반직관적인 배치가 남을 조작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가설을 펼친다. 우리는 구경꾼에게 더 잘 숨기기 위해 자신의 의식적인 마음이 모르게 현실을 숨긴다.” (p.31)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쉽지 않은 곳이다. 호락호락 하지 않다. 예측하기 어렵고 기준을 찾기 힘들다. 고대 어느 어른이 ‘어린 것들이 문제야’ 라고 했던 프레임은 수천 년이 지난 지금도 유효하다. 우리는 늘 그렇게 살아 온 것이다. 시간이 지나고 역사가 되풀이되며 첨단의 발전과 함께 살아도 우리는 늘 ‘구경꾼’의 시선을 의식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원래 그렇게 만들어졌다는 창조론에 더 가까운 해석인지 가장 적절한 형태로 적응되었다는 진화론에 가까운 해석인지 모르겠지만 분명한 것은 어제도 그랬고 오늘도 그렇고 내일도 그럴 것이라는 확고한 믿음이다.

‘나’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는 세상이기 때문에 늘 ‘너’와 ‘상대’ 혹은 ‘타인’들과 함께 살아간다. 만약 이 세상에 ‘나 혼자’만 존재한다면 재미는 없겠지만 ‘남 눈치’보는 일은 적어도 없을 것이다. 내가 어떻게 보일까? 저 사람은 나를 어떻게 평가할까? 내 옷차림, 내 말투, 내 외모를 보고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할까? 따위의 고민은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러나 ‘나 혼자’ 살 수 없는 세상이다. 반드시 ‘너’가 있고 ‘상대’가 있다.

그렇다면 인식하고 인지하여 의식적으로 생각하거나 행동할 수밖에 없다. 이것 또한 원래부터 그렇게 만들어진 것인지 살아오면서 적응해 온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이 논란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분명히 의식해서 생각하고 행동해야 할 대상이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통제착각이라는 것도 있다. 우리가 결과에 영향을 미치는 능력이 실제보다 더 크다고 믿는 것이다. 주식 시장에서 우리는 자기 행동의 결과에 영향을 미칠 능력이 전혀 없으므로, 우리가 영향을 미친다는 개념은 무엇이든 가에 착각임에 분명하다.” (p.50)

 

<통제착각>이 얼마나 일반적으로 실제 생활에서 나타나고 있는지 생각해 보면 깜짝 놀란다. <통제착각>은 다른 심리학적 개념인 <확증편향>과 비슷한 개념인데, 실제 나의 능력보다 내가 생각하는 나의 능력이 크다는 것이다. 우리가 쉽게 이 함정에 빠지는 가장 큰 이유는 이것은 늘 결과론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업무를 수행함에 있어 팀이나 그룹으로 그것에 매달리는 경우가 많다. 학교에서도 그렇고 직장에서도 심지어 군대나 가정에서도 그렇다. 이제 시작했는데 도대체 언제 마무리하고 결론을 만들어 낼까 걱정부터 앞선다. 곧 이어 제대로 하고 있는 것인지, 우리가 내린 결론이나 결과가 효과가 있을 것인지에 대해서도 걱정이 뒤따른다. 어쨌든 결과나 결론을 내어 놓고 난후 그것이 긍정적이고 좋은 방향으로 마무리 되었다면 으레 이렇게 생각할 때가 많다.

‘내가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이야.’

솔직히 그렇다. 물론, 아주 드물게 실제로 그 업무와 과업을 수행함에 있어 타 인원들 보다 곱절로 노력하고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지만 천성이 겸손하고 극히 수도자적인 기질을 가진 사람일 경우에는 적극적으로 자신을 낮추고 자신에게 쏟아지는 찬사와 칭찬을 다른 이에게 토스하기도 하지만 말 그대로 극히 드문 케이스다.

드러내놓고 생색을 내느냐 혼자 속으로 쾌재를 부르느냐의 차이일 뿐이지 누구나 <통제착각>의 유혹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이것이 더 매혹적인 이유는 사회적 위치나 직장 내 계급, 조직 내 서열이 높은 사람일수록 <통제착각>에 빠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내가 지시를 잘 해서 그래~!’, ‘내가 내 밑에 있는 부하들을 잘 선발해서 그렇지~!’라고 생각하는 것은 누워서 떡을 먹는 것보다 더 쉬운 일이다.

책은 이것이 큰 착각이라는 점을 지적한다. 내가 통제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착각이라는 것이다. 착각이라도 혼자서 남에게 피해 주지 않을 정도로 빠진다면 괜찮을 것 같기도 한데^^

 

 

역사적으로 지위가 낮았거나 멸시 당했으며 현재 사회적으로 종속된 처지에 있는 소수 집단은 부정적인 암묵적 자아상을 지니고, 자기보다 남-사실상 자신을 억압하는 자-을 선호한다.” (p.115)

 

이 책의 사회심리학적 접근은 내가 가지고 있던 오래된 정치적 의문에 대한 일정 부분의 답을 주기도 했다.

나는 사회안전망에 속하는 하위계층의 사람들이 오히려 수구세력과 기득권을 옹호하고 그들의 정당과 언론 정치인을 지지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콘크리트화 되어 도저히 해결할 방법이 없는 지역주의의 폐해라고만 생각하기에도 이해하기 어려웠다. 당장 내 살 길이 힘들고 앞으로 5년 10년 후에도 내 연봉과 생활수준의 발전이 크게 기대되지 않음에도 부자와 재벌, 기득권을 옹호하는 정당과 정치인과 세력을 지지하는 것이다. 더욱 심각한 것은 20-30대의 젊은 세대도 이러한 경향을 보이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나는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여러 정치인과 언론인, 평론가와 사상가의 글과 책을 읽어도 쉽게 답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그간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접근을 통해 일정 부분 설득이 되는 분석을 한다. ‘부정적인 암묵적 자아상’을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사회적으로 오랜 기간 동안 종속된 집단은 그렇게 매커니즘화 된 것이다. 빽빽한 숲 속에서 솔방울 하나 찾기 힘들 듯이 구조라는 거대한 괴물에 갇혀 버린 소수 집단은 부정적인 자아상으로 말미암아 오히려 자신을 억압하는 자를 선호하게 된다는 것이다. 한 번도 접하지 못한 접근이라 흥미롭고 실제를 놀라울 정도로 반영하고 있어 무섭다.

 

 

“우리는 남에게, 즉 남의 견해와 욕구와 행동에 대단히 민감하다. 게다가 남들은 우리를 조작하고 지배할 수 있다. 그것은 남이 우리에게 강요한 자기기만을 낳을 수 있다.” (p.111)

 

결국에는 그들의 강요로 인해 스스로 <자기기만>을 하기에 이르는 것이다.

‘그래도 돈 있는 사람들이 경제를 좀 더 잘 하지 않겠어요?’, ‘박정희 대통령님께서 경제는 살리셨잖아!!’, ‘전두환 장군께서 물가 잡고 조폭 놈들 때려잡은 거 몰라!!’

멀쩡하게 기록된 역사마저도 모른 채 할 수 있을 정도의 <자기기만>을 낳게 되는 것이다. 무섭다 정말로.

 

 

“아이는 만2∼3세가 되면 다양한 기만을 보여주고, 기만의 명확한 징후는 생후 약6개월째에 처음 나타난다.” (p.150)

“남녀의 관계만큼 기만과 자기기만의 가능성이 풍부한 관계는 거의 없다. 유전적으로 무관한 두 사람은 새로운 인간을 만들어내는 유일한 행위를 하기 위해 하나가 된다. 바로 섹스다.” (p.161)

 

좀 더 귀여운 형태의 <기만>도 책에서 소개된다. 아이의 경우는 주위 친구나 지인들의 이야기를 10분만 들어도 클리어 하게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남녀관계에서는 무궁무진하다.

남자와 여자가 만나서 서로를 알아가고 데이트를 하고 결혼을 하고 섹스를 하는 모든 관계에 있어서 남자와 여자는 <기만>을 주고받는다. 연애의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100% 동의할 수 있다. 아무 여자 쪽에서 <기만>이 더 많이 일어날 거라 생각하는데 다행인 것은 남자들은 그 여자에게 빠지면 아주 간단한 형태의 <기만>에도 활짝 웃으며 속아 넘어 간다는 것이다. 눈치는 이미 저 멀리 내던져 버린다. 개그콘서트의 한 프로그램에서 보통 남자가 연애를 하면서 “왜~왜~ 사람 많아서 그래 잠시 쉬었다 갈까?”, “왜 그래~ 너무 밝아서 그래. 술 빨리 마시고 취할까?” 라고 하는 연기가 있는데 처음 보면서 배꼽을 잡았다. 너무 사실적이어서. 대부분의(적어도 90%는 넘을 것이다) 남자들은 섹스가 목적일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사실을 이제는 12세 관람가인 지상파 개그프로그램에서도 다룬다는 것은 이 사회가 그만큼 자유로워 진 것인지 모두가 한꺼번에 ‘내 얘기는 아닌데~’하며 <자기기만>에 빠지는 것인지 명확하지는 않다.

하지만 남자와 여자 사이에서 일어나는 각종 <기만>은 그들의 연애와 결혼생활에 있어 도움이 될 때가 더 많기 때문에 긍정적인 측면이다.

 

 

오늘도 나는 <자기기만>을 몇 번 했다. 기억나는 것만 세 번이다. 돈을 벌기 위해 뛰어든 세계에서 <자기기만>은 필수다. 적절하게 칭찬하고 적절하게 편을 들고 적절하게 같이 뒷담화를 하면서 하루를 보낸다. 책의 제목처럼 굳이 나 자신을 속일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대부분의 사회현상이 그렇듯이 과도하지 않는다면 문제될 것은 없다고 본다. 하긴 과도한 경우가 더 많아서 문제가 많이 일어나고 갈등이 속출하는 것이 현실이기도 하다.

나는 내일도 그 상사 앞에서 웃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함께 이야기하고 점심 먹으며 그의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내 스스로 <자기기만>을 하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하루를 보낼 수 있을 정도의 적응력으로 진화하지 않았다면 나는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진작에 퇴화하거나 멸종한 종의 목록에 이름을 올렸을 지도 모른다.

살아남기 위한 <자기기만> 쯤은 괜찮다. 오늘도 내일도.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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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에선 그대가 꽃이다 - 시들한 내 삶에 선사하는 찬란하고 짜릿한 축제
손미나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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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선배 형이 생각난다. 필리핀 어학연수 6개월을 다녀오고서는 마치 샌프란시스코에 2년 정도 살다 온 사람처럼 대화 마다 영어를 갖다 붙이고 대단한 자격증이라도 취득한 것처럼 허세를 부리던 형이었다. 고작 6개월, 그것도 필리핀에서, 더군다나 한국 사람들로 우글거리는 어학원에서 영어를 배우고 온 것이 전부였는데 말이다. 당시에는 뭘 저렇게 오버를 하지? 생각했다. 그런데 여행에 대한 생각이 180도 바뀌게 된 몽골여행 이후 내가 주위 사람들에게 대학 때 그 선배처럼 허세를 부리고 몽골에서 3년은 살다 온 사람처럼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3주 정도 여행한 것에 불과했는데 말이다. 경험은 무척 소중하다. 아무리 실감나는 간접경험이라 하더라도 짧은 직접경험에 비할 수 없다.

 

이 책 「파리에선 그대가 꽃이다」는 파리에서 3년을 산(여행한 것이 아니라) 사람의 이야기다. 파리에서 파리지앵으로 살면서 소설을 완성한 사람의 이야기다.

 

 

 

“눈부신 햇살이 1년 내내 쏟아질 것 같지만 그것 역시 사실이 아니다. 변덕 심한 한여름 하늘은 갑자기 먹구름을 몰고 와 소나기를 쏟기도 하고, 겨울은 한밤중처럼 어둡고 습한 날이 지긋지긋하게 이어져 악명이 높다. 음산한 날씨의 대명사인 런던보다 일조량이 적어서 우울증 환자가 더 많단다.” (p.32)

 

 

나와 아내가 계획하고 있는 여행 순위 중 상위에 랭크되어 있는 곳이 파리다. 많은 이상향 중 한 곳이다. 여러 번 리뷰에서 밝힌 바 있듯이 나는 원래 여행에 대해서 굉장히 부정적인 사람이었다. 하지만 몇 번의 해외여행으로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고, 예전 같으면 상상도 하지 못했을 파리여행을 꿈꾸고 있다. 런던, 로마, 바르셀로나 보다 ‘파리’ 하면 괜스레 더 따뜻하고 멋있고 분위기 있을 것 같다. 프랑스, 파리... 흔히 생각하거나 기대하는 이미지가 있게 마련이다. 런던! 하면 우울한 날씨에 맛없는 요리가 바로 생각나듯이.

그런데 파리에서 3년을 산 사람은 파리의 날씨가 런던보다 더 고약하고 우울하다고 한다. 헐~ 전혀 예상하지 않았던 파리다. 파리는 따뜻한 햇살과 노천카페, 센느강, 푸른 하늘... 이런 게 아닌가 보다. 적어도 한 도시에서 3년을 산 사람의 말이니 웬만한 여행서적보다는 더 정확한 정보라 본다.

직접경험이 정말 중요하다. 말로만 듣거나 책만 읽어서는 알 수 없다. 직접 그 곳에서 그곳의 냄새를 맡고 그곳의 이미지를 내 눈에 담는 것이 가장 정확하다.

지금 나는 휴가 차 서울에 올라와 있다. 평소 궁금했었던 이태원의 터키레스토랑에 가서 양고기 요리를 먹었다. 양고기라면 몽골 사막에서 먹었던 ‘허르헉’이 유일했는데, 터키식 양고기 요리는 화덕에 고기를 익혀 낸 후 그릴에 구운 것이었다. 인터넷에서 본 사진과 먹어 본 이들의 반응이 여러 가지이었는데, 역시 직접 먹어보는 것이 제일이었다. 사진으로 보고 글로 본 맛이 전혀 아니었다. 간단하게 표현하자면 ‘처음 맛 본 맛있는 맛’이었다. 생각보다 양고기 특유의 잡내도 덜했고 특유의 향신료 맛도 덜했다. 아주 맛있게 먹었다.

직접 경험하는 것이 가장 좋다.

 

 

 

“세상에, 말도 안 돼! 한국이 성형을 많이 하는 나라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정말이야, 그게? 우선 보톡스의 경우 쉰 살이 안 된 사람이 그런 걸 맞기 시작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난센스야. 게다가 멀쩡한 얼굴을 째고 뭘 넣거나 깎아낸다고? 그렇게 만들어진 얼굴은 전혀 자기만의 느낌이 없어지는데 왜들 그런 짓을 하는 거지?” (p.101)

 

이 부분을 읽으며 두 번째로 갔던 몽골 여행이 생각났다. 몽골 사람들은 한국과 한국 사람을 아주 좋아했다. 그들 말로 한국은 ‘솔롱고’. 무지개라는 뜻이고, 한국인은 ‘솔롱고스’. 무지개에서 온 사람이라는 뜻이다. 한국과 한국 사람에 대한 이미지가 아주 좋았다. 처음 갔던 몽골에서는 어딜 가나 한국에서 왔다고 하면 다들 좋아 했다. 그런데 3년 후 몽골에서의 한국이미지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우리를 초대한 몽골 형님은 요즘 한국 관광객들에게 폭행을 가하는 일이 많아졌으니 해가 진 이후 외출은 삼가라고 말할 정도였다. 이유를 알고 보니 전적으로 한국 사람들 책임이었다.

먼저 개발을 명목으로 울란바타르의 부동산을 대규모로 사들인 후 몽골인 들에게 비싸게 되파는 부동산 투기를 대대적으로 펼쳐 시내 땅값과 집값을 엄청나게 상승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몽골 여행이 대중화 되면서 한국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하는 유흥업소와 불법 윤락업소가 엄청나게 생겨나게 되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런저런 사건 사고가 많아지고 점점 한국과 한국 사람에 대한 이미지가 안 좋아졌다고 했다. 할 말이 없었다. 너무 부끄러웠다.

파리에 살고 있는 사람이 프랑스 인이 ‘한국이 성형을 많이 하는 나라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이라고 말했다는 것 자체가 낯부끄럽다. 얼마나 유명하면 그 사람들도 다 알고 있을까 싶다.

 

 

 

한국과 프랑스 엄마들의 가장 큰 차이점은 이런 거야. 영어 성적은 별로지만 수학에 뛰어난 아이가 있을 때 두 나라 엄마들의 교육은 완전히 반대 방향으로 나가지. 한국 엄마는 뒤떨어지는 과목인 영어를 집중적으로 가르치고, 프랑스 엄마는 아이에게 재능이 엿보이는 수학을 열심히 가르치는 거야. 어쩌면 당장 눈에 보이는 전체 석차는 한국 학생이 높을지 모르지만,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 자기의 전문 분야에서 빛나는 성과를 내는 사람은 프랑스 학생이 될 가능성이 높지 않겠어?” (p.119)

 

 

한국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는 프랑스인일까 싶다. 작가의 친구가 이렇게 정확하게 한국의 교육실정을 파악하고 있다니 놀랍다. 하긴 작년 대선 전 프랑스 언론에서 대선 정국을 그 어떤 한국 언론보다 정확하게 보도한 일도 있었다. 영어는 물론 수학과 국어도 잘해야 하는 한국의 아이들은 참 불쌍하다. ‘내 아이 만큼은’ 이라며 기를 쓰고 시키는 엄마들도 불쌍하다. 예술 고등학교에서 플루트를 전공하는 아이가 있다. 시험 기간이 되면 스트레스로 아이가 미치겠다고 했었다. 전공 실기 연습도 해야 하고 인문계 아이들만큼은 아니지만 영어, 수학 공부도 해야 된단다. 예고에서 악기를 전공하는 아이에게 얼마만큼의 학력 수준이 필요한지 모르겠다.

때론 나와는 전혀 다른 타인의 눈을 통해 제대로 된 나의 모습을 발견하기도 한다. 파리에 살고 있는 프랑스인의 눈에서 한국의 교육현실을 가장 객관적으로 볼 수도 있고, 울란바타르에 살고 있는 몽골인의 눈에서 한국인의 추악한 탐욕을 가장 적나라하게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소설 속 인물이 드디어 서서히 그 정체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p.223)

 

 

나는 평소 이 책을 쓴 손미나씨에 대한 관심이 없었다. KBS 아나운서라는 것도 이 책을 통해 알게 된 사실이다. 아나운서라는 것은 알았지만 어느 방송국 출신인지는 몰랐다. 그녀의 전작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여행 작가 인 줄 알았다. 원래 외국어나 여행에 대해 어릴 때부터 관심이 많았다고 책에 소개되어 있다. 스페인에서도 오래 있었고 그 여행기가 책으로 출간되어 베스트셀러까지 되었다고 하니 살짝 부러웠다. 이후 프랑스에서 살았고 그 이야기를 담은 이 책이 출간되기 전 그녀의 첫 장편소설이 출간되었다고 하니 더 시샘이 났다. 찌질 하게 하는 시샘. ‘좋겠다. 이 사람은. 여행하면서 책 내고. 어? 소설도?’ 손미나씨는 프랑스에서 소설을 썼다. 파리에 있으면서 황석영, 신경숙, 김영하 작가들과도 직접 만나 소설과 글쓰기에 대한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고 한다. 참 부럽고 질투가 났다. 내가 그때 파리에서 그 작가들을 만났다고 하더라도 내가 개인적으로 그들에게 글쓰기에 대한, 소설에 대한 충고를 들을 수는 없었을 테니 말이다. 손미나씨는 베르나르 베르베르도 직접 만났다. ‘나도 1년 정도는 언어 공부하고 1년 정도는 글 쓸 수 있는데’ 싶었다. ‘어느 정신 나간 출판사에서 제의해 주면 모든 것을 내팽개치고 날아갈 수 있는데’ 싶었다. 꿈같은 얘기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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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선 1
필립 마이어 지음, 임재서 옮김 / 올(사피엔스21)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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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워드 진의「오만한 제국」을 읽지 않았다면, 마이클 무어의 『화씨 9/11』을 보지 않았다면, 샘 멘데스의 『아메리칸 뷰티』를 보지 않았다면 나는 미국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책과 영화를 통해 미국의 진면목을 알 수 있었다. 막연히 미국이라 하면 좋은 나라, 잘 사는 나라, 우리나라를 도와 준 착한 나라로 인식해 왔다. 그렇게 가르쳤기 때문에 그렇게 인식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알아 가면 알아갈수록 미국이라는 나라는 착한 나라만은 아니었다. 깡패 같고, 무자비하고, 부도덕하고, 비상식적이고, 위험천만한 나라인 것만 같았다. 어린 내게 그 누구라도 미국이라는 나라에 대해 이쪽과 저쪽의 평가에 대해 가르쳤다면 허구한 날 영어공부 하느라 밤을 새고 이해도 되지 않는 문법을 붙들고 씨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뭐, 요즘도 자식 영어 공부 시키느라 별의별 방법을 다 쓰는 한국의 엄마들을 생각하면 오늘 내일 해서 사라질 문제는 아닐 것 같다.

작년에 읽은 업튼 싱클레어의「정글」은 현재 미국을 만든 힘의 추악한 단면을 고스란히 그려내고 있다. 모두가 동경해 마지않는(특히 한국인들이) 미국이라는 나라의 속살이 정육점에 배가 갈린 채 걸려 있는 한 마리 돼지의 적나라함처럼 펼쳐진다.

그렇다고 내가 반미주의자거나 미국을 증오하거나 하지는 않는다. 나는 류현진과 추신수가 미국프로야구리그(MLB)에 진출하기 훨씬 전부터 MLB의 팬이었다. 플레이스테이션2에서 가동되는 <MLB10 THE SHOW>라는 게임을 가장 좋아했다. 30개 팀의 선수들을 모조리 외울 정도다. NBA도 좋아 한다. 영어학원에서 일한 적도 있다. 오바마 대통령이 당선될 때는 마치 내 나라에서 내가 원하는 대통령이 된 것 처럼 기뻐했었다.

하지만 무작정 미국을 좋아하지도 않는다. 여전히 미국으로 인해 세계 각국에서 벌어지는 말도 안 되는 일들이 많기 때문이다. 왜 자국 군에서는 폐물 취급을 받는 전투기를 굳이 우방국인 한국군에 비싸게 팔려고 하는 지나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 FTA로 그만큼 퍼줬으면 됐지 얼마나 더 긁어가려 그러는지도 잘 모르겠다. 적대적 인수합병으로 돈만 챙기고 튀어버린 월가의 금융기업은 또 얼마나 많은지 일일이 셀 수 없다.

그래도 여전히 나는 미국을 싫어한다고 이야기 할 수 없다. 오래전부터 DNA에 각인되어 흐르고 있는 숭미주의와 사대주의 사상이 내게도 동일하게 흐리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흐흐...

 

 

 

“내가 터에퍼러였을 때, 아마 여섯 살쯤 됐을 땐데, 텍사스인 들이 우리 무리를 공격했어. 다음 날 동생과 나는 야영지로 돌아갔는데, 1백 명의 죽은 여자와 죽은 노인과 죽은 아이들 사이에서 엄마를 발견했어.” (p.422)

 

매컬로 가(家)의 가계도에서 두 번째로 높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엘리’가 인디언에게 붙잡힌 후 그들의 일원으로 인정받아 함께 살게 되는데, 그를 좋아하는 인디언 여자와 잠자리에서 나눈 대화이다. 그 인디언 아가씨는 ‘초원의 꽃’으로 불리는 아리따운 여성인데, 내용 상 충격적인 가족사를 듣게 된다. 백인놈들에 의해 가족이 몰살당하고 자신과 어린 동생만이 살아남은 이야기다. 그런데 엘리는 전혀 동요하거나 미안해하거나 아파하지 않는다. 자신도 꼭 그렇게 인디언놈들에게 당했기 때문이다. 평화롭게 지주로 살던 엘리 가족에게 어느 날 밤 갑자기 인디언들이 침입했다. 무자비하게 가족을 죽이고 엘리와 형만이 사로잡혔다. 애완동물이나 장난감처럼 자신들을 취급하며 마구잡이로 괴롭히고 못살게 구는 인디언들 틈에서 탈출을 감행해 보기도 하고 반란을 시도해 보기도 하지만 엘리는 살아남아야겠다는 의지로 버티다. 형은 의지도 약하고 고난과 마주할 용기도 부족해 이겨내지 못하고 사라졌다. 엘리는 푸른 눈과 흰 피부를 가진 분명한 백인이지만 인디언이 되기 위해서 그들의 말을 익히고 그들처럼 행동하고 그들처럼 생각했다.

미국이라는 나라와 미국이라는 나라의 역사를 ‘공격과 지배’라는 큰 틀로 보는 내게 이 장면은 꽤 흥미로웠다.

‘골드러시’로 서부개척시대가 열리고 동부 항구에 몰려 있던 백인들의 러시가 이어졌다. 서부로, 서부로 가기만 하면 원하는 옥토를 얻을 수 있고 삽만 갖다 대면 펑펑 쏟아지는 황금을 얻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동부에서 서부로 가는 길은 험난했다. 멀기도 멀었다. 가다가다 지쳐 정착한 백인들도 많았고 기어코 서부에 닿은 백인들은 더 많았다. 백인들의 입장에서는 하루하루가 개척의 시간이었을 것이다. 새로운 땅을 발견하고 개간하고 역사를 만들어가는 것이었다.

하지만 원래 그곳에서 수천, 수만 년을 살아 온 원주민들에게 백인들의 골드러시는 한 밤 중의 날벼락이었을 것이다. 평화롭게 땅에 발을 딛고 바람이 가져오는 냄새를 맡으며 살아 온 그들에게 백인의 등장은 악몽이었다.

누구를 탓할 수 있을까? 원래 백인이 평화롭게 정주하고 있던 인디언들을 살육하고 쫓아냈으니 백인들이 무조건 악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복수라는 논리로 똑같이 백인들을 공격하고 죽인 인디언들의 행위는 선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이 책 「더 선」의 흐름이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지 않아 좋았다. 오히려 한 가정의 100년 역사를 통해 미국 근대를 톺아보는 전개가 좋다. 매컬로 가(家)의 과거와 현재를 왔다 갔다 하는 전개 방식도 전개의 긴장감을 더하는 구성이라 본다. 만약 무조건 ‘백인이 나쁘다.’라는 것으로 읽혔다면 나는 이 책을 읽지 않았을 것이다. 동시에 무조건 ‘인디언이 피해자다.’라는 것으로 읽혔더라도 마찬가지다.

 

 

“씨발, 나는 좆같이 더러운 인디언이 되지 않을 거야, 엘리. 난 차라리 죽는 게 나아.” (p.83)

 

함께 인디언 부족에서 붙잡힌 형이 그 생활을 견디지 못해 엘리에게 털어놓은 속마음이다. 하지만 엘리는 생각이 달랐다. 의지도 달랐다. 어차피 죽어버릴 바에야 살아남는 것을 선택했다. 엘리에게는 ‘좆같이 더러운’ 것이라는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의미 없이 죽어버리는 것이 ‘좆같이 더러운’ 것이었다. 결국 엘리에 의해 매컬로 가(家)의 역사는 이어지게 된 것이니 어쨌든 엘리의 그 선택은 옳았다.

 

 

“우리 가족의 많은 이들을 앗아갔고 어쩌면 몇 명을 더 앗아갈지 모르는 이 땅을 대령이 얼마나 사랑하는지, 나는 모른다.” (p.107)

 

후에 엘리의 막내아들이 되는 피터 매컬로의 일기에 기록된 내용이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찾아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닿은 곳은 말 그대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었다. 새로운 법을 만들고 새로운 경제를 일으키고 새로운 가족들을 탄생시켰다. 서부로 서부로 달려가 미국이라는 나라는 만들었다. 하지만 그들의 최초 역사는 아름답지만은 않았다. 나는 이것이 이 소설의 가장 중요한 맥락이자 주제라고 생각한다. 지금도 미국을 바라볼 때 상반된 의견이 있는 것처럼 비록 그것이 ‘국가’라는 거대담론이 아닐지라도 하나의 사안에는 반드시 양면성이 존재한다. 동시에 양가성 또한 존재한다. 매컬로 가(家)라는 한 가족의 역사를 통해서도 이것은 고스란히 드러난다. 아버지가 아무리 사랑한 땅일지라도 자식들에게는 아무런 쓸모없는 불모지로 여겨질 수도 있다. 동시에 자식들이 아무리 소중히 여기는 가치일지라도 아버지에게는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들의 객기로 여겨질 수도 있다. 동시에 두 가지를 인정해야 한다. 물론, 내가 그 가족의 일원이라면 그 정도의 객관화를 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미지수지만...

 

 

“어디 틀어박혀 숨어 있고 싶지 않는 한, 나는 별이 지기도 전에 일어나서는 젖은 풀밭을 걸어가 차가운 시냇물로 물 항아리를 채우고 화톳불이 꺼지지 않게 손을 봤어. 하루 중 남은 시간은 여자들이 하기 싫어하는 일을 맡아 했지.” (p.159)

 

이럴 때는 엘리의 삶에 대한 자세가 가장 좋다고 본다. 그것이 ‘옳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좋다’고 하는 것이다. 엘리는 인디언 부족의 일원으로 인정받아 ‘티에테티’로 불렸다. 그들의 가족이 된 것이다. 「더 선」이 몇 권이 더 출간될지 알 수는 없지만 2권, 3권으로 이어지면서 엘리가 어떻게 다시 가문을 일으키는 지 궁금했다. 당장 닥친 현실과 구조를 엎을 수 없다면 현재에 최대한 충실하고 요구되는 것들에 자신을 맞추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본다.

 

 

“아버지처럼 의식이나 양심 따위에 시달리지 않는 막무가내 짐승이 될 것. 인간이란 쇠고기 같은 소모품에 불과하다는 확신을 품고 숙면을 취할 것.” (p.252)

 

엘리의 아들 피터 매컬로가 아버지를 평가하는 내용이다. 이 한 문장을 통해 엘리의 생애 후반부가 어떻게 펼쳐질 지 어느 정도 가늠이 되기도 한다.

다만 그 열심과 삶에 대한 의지가 자식들에게는 어떻게 비춰질지 모르겠다. 목숨을 걸고 삶을 지켜온 엘리인데, 인생의 후반부 아들에게서 ‘막무가내 짐승’이라는 평가를 받게 된다면 그것이 행복한 인생은 아닐 것 같다.

 

다음 시리즈에서 펼쳐질 엘리의 그 치열한 삶의 여정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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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피부, 하얀 가면 - 전면개정판
프란츠 파농 지음, 이석호 옮김 / 인간사랑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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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호 선수가 귀국 했다. 말 그대로 금의환향이었다. 당시만 해도 메이저리그에서 동양인이 그것도 한국인이 투수로 성공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모두들 박찬호를 좋아했고 그의 경기를 챙겨 봤다. 나도 강의를 빠지면서까지 구내식당 앞자리를 3시간 동안 지키며 그를 응원했었다. 공항에서 기자회견을 하는데 뭔가 이상했다. “엄~ 엄~” 박찬호 선수의 다른 인터뷰 내용은 전혀 기억나지 않고 엄~ 엄~ 하는 뜻을 알 수 없는 감탄사(?) 조사(?)만 이후의 기억에 남아 있다. 아마 익숙지 않은 영어를 마이너리그에서부터 고생고생 하며 배운 터라 이제는 한국어를 할 때도 마치 영어 발음을 하는 것처럼 그렇게 적응이 된 것이다. 이후 코미디언들이 우스개로 흉내 내기도 하고 일반인들도 따라 하며 웃기도 했다.

서울로 유학을 가거나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는 친구나 지인을 오랜만에 만나면 꼭 서울말을 쓴다. 경상도 사람인 내가 들어도 어색한 서울말 말이다. TV드라마나 영화에서 어색하게 경상도 사투리를 쓰면 바로 “저렇게 어색하게 사투리를 쓸 바에야 아예 쓰지 말지~”라는 생각이 든다. 서울 사람들이 내 친구의 어색한 서울말을 듣고 얼마나 속으로 웃었을지 가늠하고도 남는다.

 

 

“새로 귀향한 신참 흑인이 그가 태어난 고장 사람들과 전혀 다른 형태의 언어를 구사한다는 것은 그의 공간적 일탈의지와 튀고 싶어 하는 차별의식의 반영으로 볼 수 있다.” (p.31)

 

프란츠 파농의 탈식민주의 저서 「검은 피부 하얀 가면」은 어려운 책이었다. 프랑스 식민지배를 받던 제도(여러 개의 섬으로 이루어진)의 흑인을 정신분석학적으로 해석한 책이다. 사실 파농은 식민지배 이후 흑인이 백인에 대해 가지는 이해할 수 없는 정신적·신체적 굴종과 찬양을 정신분석학적·탈식민주의적 관점으로 해석하는 데 내가 궁금하고 알고 싶었던 것과는 사실 좀 달랐다.

박찬호 선수가 오랜 미국 생활로 발음구조가 한국어보다는 영어에 맞춰진 것과 내 친구가 서울로 가면서 익힌 서울말을 대구에 돌아와서도 여전히 사용하는 것에서 ‘공간적 일탈의지, 튀고 싶어 하는 차별의식의 반영’을 굳이 찾아내고 싶지는 않다. 다만, 현재보다 나은 미래를 상정하는 것이 인간의 일반적인 경향이다. 좀 더 새롭고 발전된 것에 의지하게 되는 것 또한 일반적인 경향이다. 그렇다면 프랑스의 식민 지배가 끝난 이후에도 여전히 프랑스어를 구하하기 위해 일부러 튀고 싶어 식민국가의 언어를 구사하고, 자신을 압제하던 백인들에 대한 무한한 동경을 가지게 된 것 또한 일반적인 경향이라 볼 수 있을까? 여기에는 다른 정치적·경제적 요인이 참견하게 된다. 그래서 단편적으로 결론 내릴 수는 없다. 한국도 일본에 의해 30년이 넘는 오랜 기간 식민 지배를 받았다. 이후에도 실제적 식민 통치는 아니지만 자주국가의 모습을 제대로 갖추게 된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고 봐도 무방하다. 한국인은 영어에 목숨을 건다. 영어만 제대로 하면, 아니 영어 유학을 1년만 다녀와도 영어학원에서 받는 월급이 달라진다. 한국처럼 미국을 좋아하는 곳이 있을까 싶다. 학문적 토양도 거의 미국 것이다. 스포츠, 문화도 미국 것에 영향을 받았다. 지금은 미국에 의한 실제적 식민 지배를 받고 있지 않는데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지는 것일까?

 

 

“유색인 동료들의 반발을 살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흑인은 인간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p.9)

“흑인에게는 단 하나의 운명만이 존재한다. 그것은 백인이다.” (p.13)

 

파농은 자신과 같은 피부색을 가진 동료와 친구들, 인종을 만나 개탄스러운 결론을 내린다. 흑인의 단 하나의 운명이 바로 백인이라니. 무슨 수를 쓰더라도 결코 백인이 될 수 없음은 그 당사자 흑인이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파농은 당시 연구의 배경이 되던 시기를 살았던 흑인들(주로 동족 흑인)이 가진 모순된 정신을 분석한다.

 

 

“내가 연구한 지역의 특성에 상관없이 한 가지 충격적인 것은 열등감의 노예가 된 흑인이나 우월감의 노예가 된 백인이나 모두 신경증의 증후를 드러내고 있다는 사실이다.” (p.80)

“이런 상황에 노골적으로 걸려들면 대부분의 백인들은 십중팔구 자기 여동생을 흔쾌히 흑인에게 넘긴다. 단 하나 ‘자넨 토종 검둥이들과 다르네. 다시 말해 흑인이 아니란 말일세. 좀 검을 뿐이지.’ 라는 조건을 달면서.” (p.93)

 

파농은 더욱 충격적인 결론에 도달한다. 열등감의 노예가 된 흑인이나 우월감의 노예가 된 백인이나 동일한 형태의 신경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백인은 갑중의 갑이었다. 그들의 피부색이 상대적으로 희고, 그들이 제국주의 국가의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군인이 되고 정치인이 된 것 자체로 갑중의 갑이었다. 마음대로 흑인을 사고 팔수 있었고 사용할 수 있었으며 유린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런 갑중의 갑, 백인들도 흑인에 대해 성적인 면에서는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다는 결론은 흥미롭다. 여기에서는 프로이트의 이론을 자주 차용하는 데 억압하고 탄압하고 억누르는 그들의 행동 기저에는 무의식적으로 ‘저 검둥이는 나보다 훨씬 정력이 좋을 거야. 저 검둥이 놈이 내 아내와 내 딸을 겁탈할지도 몰라. 나보다 더 여자들을 만족시키면 어쩌지.’라는 불안이 내재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의 서술은 거의 논문의 그것과 비슷해서 읽는 것이 다소 어려웠는데 이 부분을 읽으며 눈이 번쩍 뜨였다. 이런 해석은 어디에서도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다중적·다층적 연구와 설문을 통해 결코 ‘흑인의 성능력이 백인의 그것에 비해 월등하지 않다.’라고 소결론을 내놓기는 하지만 사람들은 흔히 더 자극적인 것에 판단의 추를 하나 더 얹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런 인식이야 겉으로 잘 드러내지 않는 은밀하고 개인적인 것이기에 전체 논리의 흐름에서는 중요하지 않아 보인다.

 

 

“놀랍도록 우아한 금발의 아이, 이 문구에는 얼마나 풍성한 평화와 축복과 희망이 깃들어 있는가! 우아한 흑인 아이, 이 문구는 비교 대상도 안 된다.” (p.252)

 

현실은 겉으로 드러나는 것에 의해 결론나기 때문이다. 정치적으로는 이미 식민지배를 탈피했지만 그 식민지배에서 탈피하지 못한 개인의 인식과 행동은 그만큼 오래 지속될 수밖에 없다. 강요하거나 교육한 것이 아니라 개인이 체화(體化)한 것이기 때문이다. 기존 탈식민주의를 다루는 책에서는 어쨌든 초점이 식민지배자에 맞춰져 있었다. 그들이 오만방자하게 내지른 식민정책들로 식민지를 초토화하고 식민지 국민들의 생각과 영혼을 세뇌한 것에 집중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파농은 식민지배를 받았던 사람들의 무조건적인 식민국가와 백인에 대한 추종과 찬양에 대해 새로운 관점으로 접근한다. 흥미롭다.

 

 

“그러나 사랑이라는 항상성을 나는 소실했다. 나 자신을 절대적 시작이라고 규정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네그리튀드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눈물을 머금고 그 기제를 다시 조립했다. 산산 조각난 그것을 다시 세웠다. 칡뿌리 같은 양 손의 직감에 따라 그것을 다시 구성 했다.” (p.192)

 

이러란 식민지 민중의 식민국가와 백인에 대한 의존을 파농은 콤플렉스로 해석한다. 그러면서 자생적으로 일어났던 <네그리튀드>운동의 부활과 중흥을 주문한다. <네그리튀드>는 한마디로 프랑스 문화 또는 유럽 문화의 본질적 우위성을 부정하고 동시에 아프리카 문화의 전통적 풍요를 주장하는 토착 운동이라 볼 수 있는데, 산산 조각난 그것을 다시 붙들 수밖에 없는 유색 지식인 계급의 회한이 읽히기도 한다. 이것 또한 ‘계란으로 바위 치기’인 싸움이 될 텐데, 그래도 포기할 수 없는 것이다. 누군가의 힘에 의존하거나 그것만을 기다리다가는 언제 우리가 식민지배를 받았는지조차 가물가물할 정도로 프랑스화(化)되어 갈 것이 불 보듯 뻔한 일이었을 것이다.

 

 

“타자를 만지고 타자를 느끼며 동시에 타자를 나 자신에게 설명하려는 단순한 노력을 왜 그대는 하지 않는가?” (p.316)

 

물리적으로 가깝지 않아 만지는 것이 불가능하고 느끼는 것이 불가능한 상황만 아니라면 파농의 지적처럼 타자와 공감하고 타자에게 나 자신을 설명하는 것은 가치있는 일이다. 식민주의에서 그대로 머문 채 탈출하지 못한 정신적 식민지배의 지속을 끊어야 한다. 그것은 전적으로 타자에게 책임을 전가할 수 없다. 그렇다고 책임감과 죄의식에 함몰되어 있어서도 안 된다. 어쩌면 파농의 뜬금없는 지적이 생각지도 못했던 반전의 해답이 될 수도 있다. “검은 피부”를 가진 채 “하얀 가면”을 아무리 써도 그(그녀)는 흑인일 수밖에 없다. 반대로 “하얀 피부”를 가진 채 “검은 가면”을 쓰고 있다 하더라고 그(그녀)는 백인일 수밖에 없다. 당연하고 쉬운 이치다. 나를 타자에서 설명하며 내보이는 일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흔한 일이고 익숙한 일이다. 하지만 타자를 ‘나 자신’에게 설명하는 일은 어려울 것 같다. 해보지 않은 일이다. ‘너’를 객관화 해 ‘타자’로 인식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다. 하지만 해보지 않고서야 뭔가를 이뤄낼 수 없다. 바꿀 수 없다. 그것 또한 변하지 않는 진리다.

류현진 선수가 올 시즌을 마치고 인천공항에서 귀국 기자회견을 하면서 “음~ 암~” 이라는 단어를 수십 번 쓴다 해도 나는 류현진 선수를 ‘타자’로 인식 해 ‘나 자신’에게 설명하려 노력할 것이다. 다가 올 추석에 서울에서 내려 온 친구를 만날 텐데 그 녀석이 사용하는 어색하기 짝이 없는 서울말에도 타박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이야~ 이제 진짜 서울 사람 다 됐뿐네~ 사투리 다 잊아뿌째? 내한테도 서울말 좀 갈키도~” 라며 ‘타자’에게 용기를 북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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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ather 2016-03-21 09: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잘 읽고 갑니다. 석사과정중에 이책이 있어서 유심히 읽어보았어요. 현실이랑 잘 비교되는 애기예요 어렵게 느껴지는 것들이 쉽게 생각이 되네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