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인권수업
정광욱 외 지음, 안경환 감수 / 미래의창 / 2013년 8월
평점 :
절판


한국에서는 서울대를 나오면 출셋길이 열린다. 지방 고등학교에서는 입시 이후 현수막을 건다. “서울대 몇 명 합격. 누구누구 서울대 무슨 과 합격.” 학원에서도 현수막을 자랑스레 걸어 놓는다. 작은 마을에서는 “누구누구 장녀, 차남 서울대 합격.” 이라고 현수막을 건다. 예전만큼은 아니겠지만 여전히 서울대는 한국을 쥐락펴락하는 존재다. 한국을 움직이는 거의 모든 분야에 서울대 출신이 있다. 이미 서울대에 입학하는 순간 그(그녀)의 운명은 한국 사회를 이끌어 갈 엘리트로 결정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죽을 동 살 동 서울대에 들어가기 위해서 갖은 애를 쓴다. 그렇게 평소에 삼성을 욕하고 비판하면서도 내 자식이 삼성에 들어가면 동네잔치를 열고 만나는 사람마다 자랑하는 것처럼 서울대가 한국의 비정상적인 교육현실을 만든 장본인이라며 서울대 철폐나 대학서열 철폐를 외치거나 그것에 동의하다가도 내 자식이 서울대에 들어가기를 바라는 사회가 한국이다. 서울대 철폐는 한국에서 공산당이 집권하는 것보다 더 불가능한 일이다. 지금 한국 사회를 손아귀에 쥐고 있는 사람들이 서울대 출신들인데 그들이 서울대 철폐를 두고 보고 있을 리 만무하다.

그렇다면 이미 운명의 반쯤이 결정지어진 서울대에서 학생들을 조금 더 바르고 건강하게 교육하기를 바라는 편이 더 현실적이지 않을 까 싶다. 그것도 거의 불가능한 것 같기는 하지만 말이다.

 

 

이 책 「서울대 인권수업」은 서울대 법학과 강의 중 벌어진 토론 내용을 책으로 묶은 것이다. 대단하다. 전국의 수많은 대학교 강의실에서 온갖 토론과 강의가 존재할 텐데 말이다. 역시 서울대가 최고다. 서울대 법학과 정도 되어야 학부에서 벌어진 토론 내용을 가지고 책을 낼 수 있다. 이미 멍석을 깔아주고 시작하는 것이다.

책에는 <인권>, <신상털기>, <양심적 병역거부>, <장애인등급제>, <다문화>, <범죄자 인권>, <성소수자>, <동물의 권리>, <안락사>, <인권위원회> 등의 주제를 놓고 벌인 토론 내용이 실려 있다. <신상털기>를 제외하고는 크게 중요하게 부각되지 않은 주제다.

평소 좋아하던 출판사인 ‘시대의 창’에서 제목부터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서울대 인권수업」을 출간한 것이 생선가시에 목에 걸린 듯 불편했다.

하지만 이 책을 읽는 중에 터진 기사를 보면서 서울대 전체 학생들에게 이런 토론이 이루어져야 하는 것을 아닐까 싶었다. 그 기사는 ‘막말판사’에 대한 것이었다. 지금은 사퇴한 ‘막말판사’는 이미 유명한 사람이다. 막말을 쏟아낸 것도 이미 여러 번 이었다. 사회적으로 이슈화 되고 비판이 봇물치자 단순한 말실수였다며 핑계를 댔지만 시간이 가도 그의 인성 자체는 변하지 않는 법니다. 그 판사가 서울대를 졸업했는지 어떤지는 모르겠다. 여성을 비하하고 노인을 비하하는 발언을 사적인 자리도 아니고 공판장에서 했다는 것 자체가 어이없지만 판사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 중 그런 사람이 또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저 고시 공부를 위해 수년을 노력하고 판사가 된 사람에게 그 어떤 인성과 사회성을 요구할 수 있을까. 어쩌면 그런 ‘막말판사’는 많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공판장에서 그런 막말을 내뱉느냐 속으로만 생각하느냐의 차이일 것이다.

그런 뉴스를 접하고 나니 이런 책, 이런 책의 내용이 서울대에서 많이 시행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아무래도 서울대를 졸업한 사람들이 한국 사회의 더 중추적인 자리에 앉게 될 가능성이 많으니까.

적어도 인권이나 정의, 첨예하게 대립하는 갈등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접근하느냐를 학부 때부터 공부하고 훈련한다는 것은 큰 자산이 될 것이다. 굳이 서울대를 다니지 않아도 이것은 동일하다. 요즘 아이들에게는 인성교육이나 인문교육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중고등학교 심지어 초등학교때부터 경쟁에 내몰린다. 그렇게 진학을 하고 대학에 들어가면 이제 취업을 하기 위한 경쟁의 바다에 뛰어 든다. 인권, 정의, 평등 이런 개념에 대해서도 취업을 위한 공부나 면접을 준비하면서 보게 되는 것이 전부일 것이다.

 

 

“인권 존중의 출발점은 ‘서로 다른 입장을 바꾸어 생각해보기’잖아요. 토론의 본질도 ‘다름’에서 시작해 다양한 이야기들을 존중하는 것이고” (p.10)

“인권은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입니다. 우리가 사람답게 살고자 하는 것은 사람답게 사는 그 자체가 목적이지 사람답게 삶으로써 무언가를 더 이루려는 것이 아닙니다.” (p.29)

 

사회에 진출하기 전 인권에 대해서 깊은 토론을 나누고 공부하는 것은 분명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학생들 각자에게도 그렇고 우리 사회에도 그렇다. 우리 사회는 토론문화가 없는 사회다. TV의 토론 프로그램에서는 수백 회를 진행하면서 단 한 번도 결론에 이르는 꼴을 보지 못했다. 이쪽 편과 저쪽 편으로 나뉘어 싸움질만 하고 자신들의 이야기만 뇌까릴 뿐 상대편의 이야기를 들으려 하지 않는다. 토론이라는 것에는 입보다 귀가 더 필요하다. 이 책에 실린 학생들의 토론 내용이 얼마나 편집이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책에서는 하나의 주제를 두고 첨예하게 의견이 대립되는 것도 있고 거의 접점을 찾는 주제도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는 다양하고 복잡하고 예민하기 때문에 하나로 단정 지을 수 없다. 각자 다른 사람들이 각자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내 의견이 존중되는 것을 바라는 것만큼이나 다른 사람들의 의견도 존중해야 한다. 그런 마음과 자세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는 사람에게 토론은 무의미하다. 특히, 인권이라는 주제는 더 많은 토론이 이루어져야 한다. 시의성이 있는 정치적 쟁점과 사회적 문제에 대한 토론만 넘쳐나고 있다. 양쪽의 의견이 너무 첨예하게 나뉘고 이해 당사자 간 거리가 너무 멀기 때문에 그런 토론은 늘 피가 튄다. 당장 시급한 것 같지만 결론이 나지 않는다. 한참 토론을 해도 결론이 나기는커녕 속만 더 뒤집어 진다. 그러나 인권 같은 주제는 시급해 보이지 않는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이런 것이 더 중요하다. 있으면 당연히 있겠거니 살지만 없으면 크게 불편을 겪게 된다. 지금은 그쪽의 인권을 걱정해야 하는 인권위원회지만 당장 어디 하소연 할 데도 없고 인간다운 처우를 받지 못해 억울해 하고 있을 때 전화 한통 하거나 게시판에 글 하나 올릴 수 있는 인권위원회조차 없는 사회라면 답답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오늘날 양심적 병역거부자는 ‘병역기피자이며 범죄자이고 국민의 의무를 저버리는 사람’으로 받아들여질 때가 많습니다. 취업이나 사회생활을 할 때에도 차별을 겪고요. 실제로 2012년 어떤 양심적 병역거부자는 교통안전공단에 합격했지만 ‘병역거부자를 평생 채용금지’하는 내부 규정으로 입사하지 못했습니다.” (p.93)

“우리나라에서는 어떨까요? ‘장애인은 신체적·정신적 장애로 오랫동안 일상생활이나 사회생활에서 상당한 제약을 받는 자이다’라고 밝히는 것처럼 의학적인 결함에 따라 장애인인지를 결정합니다. 세계적으로 의학적인 면과 함께 사회적인 면까지 고려하는 추세를 생각한다면 우리나라 현행법상 장애의 개념은 상당히 단편적인 수준에 머무는 것으로 보입니다.” (p.107)

 

양심적 병역거부자와 장애인은 사회적 약자에 속한다. 양심적 거부를 하면 이후 사회생활을 하는데 막대한 패널티가 주어진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들은 자신의 신념에 방점을 찍는다. 장애인은 선천적이든 후천적이든 비장애인보다 불편한 사람들임은 분명하다. 최대한 차별을 받지 않도록 해야 하지만 그들을 우선적으로 챙기고 배려하는 것이 사회가 가진 의무다. 그런데 현재 한국 사회에서 양심적 병역거부자와 장애인은 누려야 할 권리, 최소한의 인권조차 담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특히 양심적 병역거부자의 경우 이것은 더욱 심각하다. 병역거부에 대한 개념 자체부터 너무 낯설고 단지 특정 종교인들의 종교적 행동으로 치부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특정 종교인이 아니라도 양심적 병역거부를 한 사람들도 많은데 이래서 사회가 무서운 것이다. 한번 편견을 가지면 좀처럼 벗지 않기 때문이다.

 

인권은 사회적 약자에게는 가장 필요한 권리다. 사회적 강자에게는 굳이 인권을 들이밀지 않더라도 많은 권리를 누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서울대 학생들이 자신들이 수업 시간에 나눈 토론이 책으로 출간된 것에 그치지 않고 그 토론의 내용을 숙고해 주기를 기대해 본다. 덧없는 기대가 될 것으로 생각되지만 최소한 인권에 대해서 사회 정의에 대해서 깊게 공부하고 나와 의견이 다른 이들과 충분한 토론을 나눴다는 자체만으로 의미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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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 - 가진 것마저 빼앗기는 나에게 던지는 질문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안규남 옮김 / 동녘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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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며칠 전 보도에서 충격적인 사실을 접했다. 한국 사회에서 가장 신뢰하는 집단을 조사한 결과 모든 정치집단, 시민단체, 방송국, 연구소, 학교, 언론인 들을 제치고 1위가 삼성, 2위가 현대자동차라는 것이었다. 자세히 살펴보지 않아 어떤 기준으로 누구를 대상으로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충격적이었다. 천박한 물신(物神)숭배 이데올로기에 잡아 먹혀 버린 대한민국의 현실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결과라고 보였다. 사실 한국 사람들만큼 역동적인 현대사를 겪은 사람들도 없다. 급격한 경제성장 이후 나라 전체가 망해버린 IMF를 경험했다. 한 순간에 사장님에서 실직자가 되어 버리고 자기 목숨을 버리는 일이 부지기수로 일어났다. IMF 이후 정의, 상식, 진리, 공평, 평등 따위는 배부른 소리가 되어 버렸다. 초등학교 때부터 이미 경쟁과 성공의 신화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대학의 낭만, 청춘의 고뇌는 옛날이야기가 되었고 MT나 동아리는 철없는 객기가 되었다. 공무원이 되기 위해 젊은날을 묵힌다. 천박한 물신주의는 천박한 처세를 낳았고 그것은 오롯이 각자의 몫이 되었다. 정치는 더 이상 희망을 주지 않는다. 이미 수십 년 전부터 그래왔고 지금도 그렇다. 반도의 허리가 두 동강 나 있는 것도 모자라 그 두 동강 안에서도 지지고 볶고 지역감정이 켜켜이 쌓여 있다. 먹고 살기 바쁘니 대신 나라 좀 잘 이끌어 달라고 뽑아 드린 놈들은 그것을 교묘히 이용하고 조작해 가며 정치놀음 하며 입신양명만을 노리는 꾼들이 되었다. 유일하게 권력을 견제할 수 있는 언론은 이전까지 그래왔듯이 권력의 편에 붙어 아양을 떨며 떨어지는 콩고물에만 혈안이 되어 있다. 사람들은, 국민들은 진실을 모른 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자기가 진실을 모른 채 살아간다는 현실조차 모른다는 것이다. 더 심각한 것은 그것을 모르는 것이 문제가 된다는 것조차 알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저 내 아파트값 떨어트리지 않는 놈이면 만사 오케이다. 아무리 욕을 많이 먹고 문제가 많은 사람이라도 상관없다.

 

저소득 계층과 청년·대학생 계층에서 오히려 집권 여당에 대한 지지가 높은 현상에 대해 한동안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저소득 계층이라면 사회의 일반적인 부의 균형 축에서 멀어진 사람들이고 무엇보다 많이 가진 자들로부터 소외되어 괄시받는 사람들일 텐데 그들이 오히려 정부 여당에 대한 지지가 높다는 것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가장 열렬히 정부와 집권 여당을 비판하고 현실에 대한 반대 목소리를 내야 하는 사람들임에도 말이다. 또한 그 어느 때보다 어려운 취업 상황을 만든 정부와 집권 여당에 대한 청년·대학생 계층의 지지도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들이야말로 제대로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며 자신들의 권리를 찾아야 하는 사람들임에도 너무 조용하고 수동적이고 패배주의적이었다. 너무 생각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아니 잠시만 생각해봐도 왜 이런 취업난이 만들어졌고 자신들의 아버지는 대학만 나와도 골라서 들어갈 수 있는 회사가 있는 시기였는데 왜 나는 아버지보다 수십, 수백 배 더 공부를 하고 스펙을 쌓아도 들어갈 회사가 없는지, 이런 상황은 도대체 누가 만들었는지에 대해서 생각해야 하는데 생각이 없다. 처음에는 너무 할 일이 많고 바빠서 생각할 시간이 없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그런데 막상 주위 대학생들을 보면 그런 것도 아니다. 할 거 다한다. 놀 거 다 놀고.

사회가 급격하게 보수화되고 신자유주의 경제구조가 천박한 물신주의로 변신하면서 젊은 대학생들조차 정신은 이미 늙어버린 것이다.

그렇다면 누구에게 책임을 돌려야 하는 것인가?

 

 

“오늘날 전 세계의 최고 부자 10명이 총 2조 7000억 달러의 부를 소유하고 있는데, 이는 세계 5위 경제 대국인 프랑스의 경제 규모와 거의 같다.” (p.57)

 

한국만의 문제는 이미 아닌 것 같다. 이 책 「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는 저명한 사상가 지그문트 바우만의 얇은 책이다. 작은 책이지만 많은 생각거리를 던져주는 책이다. 책에서는 유럽 사회의 현상을 소개하는데 한국과 별반 다르지 않다. 어라? 유럽이 한국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한국 사람들은 유럽에 대해 일정정도 환상을 가지고 있다. 이전 세대가 미국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었던 것처럼 유럽이라 하면 일단 잘 살고 복지가 우선이고 오래된 문화가 잘 보존되어 있고 인권과 평등의 기치로 국가와 사회가 운영되는 일종의 이상향으로 생각하기도 한다.(물론 일부 유럽 국가들에 한해서) 그런데 지그문트 바우만이 바라보는 현 유럽 사회의 현상은 심각한 수준이다. 한국사회가 IMF 이후에 급격하게 보수화되고 물신화된 것처럼 유럽사회도 신자유주의 체제 이후 한국과 비슷한 경향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유럽의 일면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사고는 전 세계를 아우르는데 단지 한국과 유럽대륙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이러한 불평등의 현실과 그것을 감수하는 국민·대중의 현실이 비슷한 맥락에서 겹쳐진다.

 

 

“‘경제성장’은 소수에게는 부의 증가를 의미하지만, 수많은 대중에게는 사회적 지위와 자존감의 급격한 추락을 의미한다.” (p.59)

 

경제성장. 말은 좋다. 낙수효과. 말은 좋다. 그런데 단 한번이라도 그것이 수많은 일반 대중과 국민들에게 제대로 효과를 발휘한 적이 있었나? 적어도 대한민국에서는 단 한 번도 없었다. 지난 이명박 정권이 대선 전 수많은 공약을 남발했다. 747이니, 주가 5000포인트 돌파니 뭐니 해서 또 한국의 유권자들은 건설회사 사장 출신이면 경제 좀 잘 하겠나보다 싶어 그를 뽑아줬다. 그런데 이명박 정권 5년 동안 도대체 일반 대중의 살림살이가 얼마나 더 피폐해 졌는지 모두가 알게 되었다. 재벌은 사상 최고의 실적을 기록했다. 중소기업 및 하청업체는 죽어나갔다. 부동산은 여전히 공고했고 물가는 시간이 갈수록 올랐다. 오죽했으면 월급 빼고는 모든 것이 올랐다는 자조 섞인 넋두리가 유행을 했을까. 민주 정권 10년 이후 딱 5년 동안 천박한 물신주의가 국가 정책이라는 배를 탔을 때 어떻게 개별 국민들에게 구현되는지 우리는 5년 동안 낱낱이 지켜봤다.

그런데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쪽은 그런 불평등과 몰상식을 그대로 감수하는 우리 쪽이다. 그래서 문제는 더욱 심각한 국면으로 접어드는 것이다.

종부세를 두고 집도 절도 없는 일반 대중이 반대니 찬성이니 하는 것이 이해되지 않는다. 강남에서 수억 원을 호가하는 집을 몇 채씩 가지고 있는 부자들에게는 종부세가 철퇴와도 같을 텐데 집이 단 한 채 밖에 없거나 내 집 조차 없는 사람들에게 종부세는 아주 먼 나라 저기 아프리카의 부르키나파소의 이야기보다 더 먼 나라 이야기다. 그런데 이것을 두고 정부와 집권 여당에서 하는 소리를 그대로 받아들인다.

이번 박근혜 정부 출범 초기 인사 문제로 시끄러웠다. 고위 공직자로 추천된 자들이 하나같이 위장전입문제, 병역문제, 부동산투기문제로 제대로 인사청문회를 통과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지난 이명박 정부 시절 그런 꼴을 수도 없이 봐왔지만 정부 출범 초기부터 그런 자들을 추천한 새정부도 문제가 있었고 반대로 고위 공직을 맡고 있는 자들 거의 모두 그런 불법과 탈법을 당연시 하고 있는 것을 보며 대단하구나 싶었다.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이었으니까. 그런데 여기에서도 코미디가 벌어진다. 위장전입 뭐 그것쯤 뭐가 문제가 되냐는 것이다. 부동산투기 그거 뭐 큰 문제가 되냐는 것이다. 다들 그렇게 살고 돈 좀 있고 힘 좀 있는 사람들 다 그렇게 사는데 뭘 그런 걸 가지고 문제를 삼고 그러냐는 것이다. 그것도 없는 사람들이. 불평등을 감수하면서 오히려 그들을 불평등의 구조로 내몬 장본인들일지도 모르는 자들을 감싸고 있다. 참 웃기고 자빠진 것이다.

그러니 저들은 염치조차 가질 필요가 없어졌다. 아무리 해쳐먹고 꾹꾹 눌러도 찍 소리 한 번 내지 않는 것이 우리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의 불평등의 구조는 콘크리트가 될 수밖에 없다.

이제는 중산층이 없어졌다. 아주 잘 사는 자들과 못 사는 자들이 드넓은 중간층을 사이에 두고 있다. 모든 면에서 그렇다.

 

 

“사방에 탐욕, 부패, 경쟁, 이기심이 편재하는 현실, 그렇기 때문에 상호 의심과 끊임없는 경계를 조언하고 찬양하는 현실. 사람들은 혼자서 이러한 현실을 바꿀 수 없고, 이러한 현실이 없어지기를 바랄 수도 없으며, 그러한 현실을 얼버무리거나 무시할 수도 없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 모두는 흔히 현실을 인간의 힘으로는 맞서거나 개혁할 수 없는 ‘당연한 세상 이치’로 오해한다.” (p.47)

 

어린 시절 어머니는 특별한 일이 있으면 꼭 떡을 하셨다. 동네 시장에 있는 방앗간에서 손수 찾아오셔서 따끈따끈하게 감칠맛이 도는 떡을 잘 포장해 옆집 초인종을 누르셨다. 어머니의 주방에서도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쟁반과 보자기가 어김없이 옆집으로 갔다. 그러면 며칠 뒤 반드시 그 쟁반 위에 답례의 물품이 얹어져 돌아왔다. 과일이 될 때도 있었고 다른 음식이 될 때도 있었다. 아파트에 살았지만 옆집, 앞집, 윗집, 밑집 모두 알고 지냈다. 아직도 그때 살았던 분들과 모임을 하고 계신다.

지금은 전혀 그런 상황이 아니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과 경쟁이 심화될 대로 심화된 상황이다. 앞서도 언급했던바 경쟁과 우위는 당연한 수순이 되었다. 친구와의 우정과 공평·평등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너는 잘해라, 성공해라.’고 가르친다. 사람과 사람사이의 관계, 사람과 자연사이의 관계, 사람과 사회사이의 관계는 돈과 경쟁, 권력과 힘의 저울질에서 모든 것이 판단된다. 이렇게 슬픈 현실을 그저 감내하는 것뿐이다. 바꿀 수 있을까? 바뀔까?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구조의 문제를 경시한다. 왜 이렇게 몸부림치고 열심히 살아도 내 삶은 티끌만큼도 변화가 없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위로한답시고 베스트셀러가 된 저질의 책들 속에는 ‘니가 잘 하세요. 니가 문제니까요. 더 열심히 하세요. 더 아프세요.’ 라며 포근한 마조히즘을 불러일으킨다. 구조가 바뀌지 않으면 절대로 상황과 현실을 바뀌지 않는 다는 사실을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내 포기해 버린다. ‘어쩔 수 없나 봐. 그냥 이렇게 사는 거지 뭐.’하는 순간 구조는 더 공고화된다. 튼튼해진다. 그리고 더 이상의 접근은 허락하지 않는다. 설국열차에서는 엔진칸에 이르지만 현실에서는 그저 맨 끝 칸과 그 앞 칸 정도일 뿐이다.

 

 

“구체적인 사회적 상황에서 정의의 기준은 항상 당시에 가장 불쾌하고 고통스럽고 분노를 유발한다고 생각되는 형태의 부정의에 의해 환기되거나 암시되며 때로는 결정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p.90)

 

당하고 나서야 비로소 알게 되는 것이다. 매일 매 순간 들이 마시는 산소의 소중함을 전혀 모르고 살듯이 사회를 지탱하는 진리와 정의를 누릴 수 있는 자유가 충분할 때는 자각하지 못한다. 중요한 것인지조차 모른다. 하지만 한 순간에 진공 상태가 되듯이 진리와 정의를 누릴 수 있는 자유가 사라졌을 때는 돌이킬 수 없다. ‘이 정도였어? 완전 엉망진창이구만!’라고 깨달을 때에야 반성하게 된다. ‘그게 그렇게 중요한 것이었구나~’ 라고 말이다. 뒤늦게 깨달아 봐야 구조는 더 튼튼해져 바꿀 수도 변화시킬 수도 없다. 또 그렇게 역사의 한 페이지는 넘어갈 뿐이다.

 

 

“오늘날 사회적 불평등은 역사상 최초로 영구기관이 되어 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지그문트 바우만이 강조하며 말한 것이 결론으로 보인다.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불평등의 구조가 이미 내재화 되었고 영구화되었다. 그런데 그것을 감수한다. 아니,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감수하는지조차 모르고 산다. 오히려 ‘나는 불평등을 겪고 있지 않아~’라며 자기 위안을 하고 싶은 건지도 모르겠다.

 

 

“어떤 식으로건 문제를 회피하지 말 것, 손쉽게 타협하지 말고 철저하게 사유할 것”

 

바우만은 몇가지 행동양식을 권유한다. 문제를 회피하지 말 것, 손쉽게 타협하지 말고 철저하게 사유할 것. 그의 권유만 제대로 실행하면 굳이 불평등을 감수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워낙 저쪽은 힘이 있고 거의 모든 것을 차지하고 있어서 해보나 마나 100전 100패인 게임이 될 것만 같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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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기 없는 에세이 - 지적 쓰레기들의 간략한 계보
버트런드 러셀 지음, 장성주 옮김 / 함께읽는책 / 2013년 8월
평점 :
절판


아직도 메모하는 습관을 몸에 새기지 못했다. 대학 때 한창 책을 읽으면서 나만의 독서기록노트를 만들었다. 간략하게 책에 대한 정보와 가장 인상 깊었던 구절이나 문장 하나를 추가해서 리스트로 만들었다. 강의에 들어가든지 열람실에서 시험공부를 하든지 고향 집에 내려가는 열차 안에서든지 늘 나와 함께 했다. 고이 모시는 수준에 이르렀을 때 그만 그 노트를 잃어버렸다. 정확한 숫자는 기억이 나지 않는데 적어도 100권 이상의 책에 대한 기록이 담긴 나만의 기록이었는데 허망하게 잃어버리고 나니 다른 일들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것이 지금껏 트라우마로 작용해서인지 정성들여 기록하거나 그 기록을 따로 보관하는 것에 지레 겁을 먹는 것 같다. 특히 손으로 직접 작성해서 만든 것에는 더욱 그런 애착과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 듯 하다. 그러나 책을 읽고 서평을 작성하기 위해서는 무시로 메모를 해야 하는데 이게 생각처럼 쉽게 되지 않는다. 휴대폰에 메모 기능이 아주 편리하게 탑재되어 있어 원하는 만큼 메모 하고 저장 하고 관리 하고(적어도 나만의 독서기록 노트를 허망하게 잃어버렸던 경험은 하지 않아도 되는) 사용 할 수 있게 되었는데도 메모를 잘 하지 못한다. ‘아~ 왜 책이 잘 읽히지 않을까? 왜 글이 잘 안 써지는 걸까? 왜 그 문장이, 단어가 생각나지 않는 걸까?’ 답답해하기만 했는데 메모하지 못하는 나의 특징이 이에 한몫 하는 것만은 분명하다.

 

 

“이 책은 15년이라는 세월 동안 주제도 길이도 제각각으로 쓴 글을 모은 책이다.”

 

버트란드 러셀의 책을 제대로 읽어본 적이 없다. 유명한「서양철학사」를 띄엄띄엄 읽어봤을 뿐이다. 시대를 풍미한 사상가이자 철학자, 수학, 과학, 종교, 예술에 이르는 박학다식의 대표주자라 할 수 있는 사람이다.

이 책은 러셀의 메모를 모아 놓은 책이다. 자신의 박학다식의 범위만큼이나 수많은 책을 출간해낸 러셀의 또 다른 면모를 들여다 볼 수 있다. 메모와 기록이라는 것이 꼭 어떤 특별한 동기나 목적을 위해서만 행해지는 것이 아니다. 거리를 걷다가 문득 드는 생각, 식사를 하다가 갑자기 솟구치는 의문 같은 것들을 자신만의 언어와 방법으로 쏟아낸 것이다.

일단, 이 책에서는 영국인 특유의 건조한 유머가 마음에 든다. 제레미 클락슨 특유의 유머를 연상시킨다. 제레미 클락슨은 시대를 풍미했고 지금도 풍미하고 있는 BBC의 ‘탑기어’의 메인 호스트다.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어색한 큰 키에 구부정한 자세, 큰 얼굴, 어색하기 짝이 없는 곱슬머리. 자동차를 주재료로 삼는 TV쇼의 메인 호스트이면서 입고 나오는 옷도 말투도 촌스럽기 짝이 없다. 수억 원대를 호가하는 슈퍼카를 운전하면서 온갖 비판과 지적질을 하는 제레미를 보면 ‘저 사람 정말 제 정신인가’싶다. 그런데 나는 제레미가 좋다. 썰렁한 유머는 물론이고 함께 쇼를 진행하는 리처드와 제임스를 시종일관, 주구장창 놀리고 비꼰다. 나이로만 따지자면 제레미가 가장 형이지만 오히려 형답지 못하다. 그래서 더 재미있다. 영국산 차를 타면서 대놓고 영국과 여왕을 조롱하고 미국산 차를 타면서, 독일산 차를 타면서 신나게 그들을 씹어 돌린다.

러셀의 메모를 읽으며 제레미가 떠올랐다.

 

 

“인간은 이성적인 동물이다. 적어도 나는 지금껏 그렇게 배웠다. 긴 생애 동안 나는 그 명제를 뒷받침할 증거를 부단히 찾아보았지만, 세 개 대륙에 걸쳐 수많은 나라들을 샅샅이 뒤졌는데도 운이 없어서 그랬는지 여태 발견하지를 못했다.” (p.159), <지적 쓰레기들의 간략한 계보>

 

모르는 게 없을 정로로 박학다식한 학자이자 영국 내에서 가장 고결한 혈통을 이어 받은 귀족 출신인 러셀이 제레미식 유머를 하고 있으니 오히려 재미있었다. 그의 다른 책이라면 이런 표현은 없었을 것이다. 이것도 메모의 장점이다.

 

 

“빅토리아 여왕은 내가 두 살이었을 적에 딱 한 번 알현한 적이 있다. 안타깝게도 나는 전혀 기억이 안 나지만 집안 어른들 말씀에 따르면 당시 내 행동거지가 꽤 공손했다고 한다.” (p.335), <내가 만난 유명인들>

 

그의 유머는 끊이지 않는다. 제레미식 영국 유머.

 

 

“모든 인간, 어쩌면 지구에 사는 모든 생명체가 종말을 맞는다. 인구가 파국적으로 감소하여 야만 상태로 돌아간다. 주요 전쟁 무기를 모두 독점한 단일 정부가 전 세계를 통일한다.” (p.89), <인류의 미래>

 

사실 이 책에서도 그렇고 러셀을 평가하는 데 있어 가장 중점이 되는 부분은 세계정부 구상에 대한 그의 태도였다. 전 세계의 경제력과 군사력이 한 나라, 한 정부로 독점되어 그 힘이 적절하게 조절되는 단일 정부를 한동안 주장했었다. 그것은 바로 미국이었다. 이해되는 것이 암흑과 같았던 중세를 벗어나 산업혁명과 시민혁명을 가까이서 경험하게 된 유럽인들에게 두 번의 참혹한 세계전쟁은 그동안의 모든 것은 한 번에 앗아간 비극이었다. 인간이 얼마나 악해질 수 있는지 뼈저리게 경험한 것이다. 특히, 2차 대전 중 나치에 의해 일어난 유대인 학살은 전 유럽을 이후에도 그 후유증으로 고생하게 만들었다. 두 번의 참극을 경험한 러셀에게는 어떻게 하든지 전쟁만은 없어야 한다는 생각이 앞섰을 것이다. 전쟁이 일어나지 않기 위해서는 분쟁이 없어야 하고 분쟁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기 위해서는 힘의 균형이 한쪽으로 완전히 쏠려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저 자식하고 싸우면 이길 것 같다.’라고 생각하면 싸움이 나지만 ‘신나게 얻어맞을 것이 뻔하다.’라고 생각하면 아예 덤비지도 않는다. 그래서 실제로 그의 다른 책에서도 이런 단일정부 구상을 여러 번 밝힌 바 있는데 그의 말년에는 이 구상에 대해 부끄러워했었다고 한다.

뭐, 결과론적으로 미국은 수십 년 동안 전 세계를 자신들의 입맛대로 주물러 왔고 지금은 중국이라는 강력한 카운터파트너가 등장함에 따라 잠시 주춤거리고는 있지만 언제든지 자신들의 최고의 자리를 다시 선점하기 위해 애쓸 것은 분명하다.

나도 차라리 단일정부 같은 것이 있었으면 좋겠다 싶다. 세계정부가 아니라 단일정부.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만국의 만국에 대한 투쟁도 이젠 좀 지겹다.

 

 

“사람은 철학을 통해 자신이 사회와 맺는 관계, 현재를 사는 사람이 과거에 살았던 사람, 또 미래에 살 사람과 맺는 관계, 인류 전체의 역사가 광대한 우주와 맺는 관계 등을 정확히 파악할 수 있다.” (p.85), <초보자를 위한 철학>

 

철학이 사라진 시대를 살고 있다. 인문학이 멸종한 시대를 살고 있다. 요즘 대학에 철학과가 있는지 모르겠다. 수년 동안 경쟁력이 없는 학과는 없어지기도 했다는 소식을 들은 적이 있는데 철학과야 말로 시장과 자본의 논리에서는 당장에 없어져야 할 학문이니 말이다. 일베가 어떻고 요즘 아이들이 어떻고 하는 문제들은 결국 어른과 부모의 문제다. 제대로 된 인성교육과 철학교육, 인문교육을 시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먹고 살면서 아이들 학원 하나 보내려면 부부가 맞벌이해야 하는 상황이 태반이다. 부모가 맞벌이를 하면 집에서 아이들에게 인성·철학·인문교육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 결국 구조의 문제라고 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안타깝다. 헤겔의 철학, 공리주의, 스토아학파. 이런 종류의 철학은 사실 몰라도 된다. 철학이라는 것은 상식이다. 삶의 자세다. 나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는 세상이라면 함께 살아야함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만 따로 모아서 살 수 없다. 내가 싫어하거나 나를 싫어하거나 맞지 않는 사람들과도 함께 살아야 한다. 그때 내 행동을 결정하는 중요한 기준이 되는 것이 철학이다. 가치관이라 할 수도 있겠다. 유년기를 거치며 수년 동안 잔소리의 형태로 들어온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런데 학교에서는 전혀 이런 교육이 시행되지 않고 있기 때문에 더 심각하다. 부모는 학교에 떠맡기고 학교는 부모에게 책임을 전가한다.

고등학교 1학년인 아이의 입에서 벌써부터 안정된 직장, 공무원, 토플, 성공 이라는 단어가 나온다는 것 자체가 비극인 시대다.

단순히 인기 없는 에세이를 제레미식 유머로 채우고 있지 않다. 이 책의 다른 챕터들에서는 꽤 진지하고 심각한 문제를 다루고 있기도 하다.

 

 

“러셀은 한평생을 천방지축으로 살았지만 그 삶은 시대에 뒤떨어진 방식으로 일관성이 있었고, 그의 신념은 기묘했으나 그의 행동은 늘 신념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사생활에서 그는 자신의 글에 가시처럼 돋은 신랄함을 전혀 보여 주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진솔한 대화 상대이자 인간적 공감 또한 넘치는 사람이었다.” (p.352), <스스로 쓴 부고>

 

끝까지 재미있는 사람이다. 그는 스스로 부고를 쓰기도 했다. 언제 닥칠지 모르는 죽음 앞에 심각하게 유서를 쓰는 경우는 많지만 부고를 쓰는 경우는 흔하지 않다. 그의 부고에서 겸손함이 엿보인다. 자신의 삶은 문득 돌아보며 ‘천방지축’이라는 단어를 생각해 낼 수 있는 사람이라면 분명 신나는 인생을 살았음이 틀림없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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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자의 연애사
한창훈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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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난히 뜨거웠던 지난여름, 뻥 뚫린 고속도로가 산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차 안 에어컨 온도를 24,23,22도로 차례로 낮추어도 도무지 차 안은 시원해지지 않았다. 고속도로 양 옆으로 한 여름 산이 보였다. 녹색이라고는 차마 할 수 없는 진녹색 숲이 우거져 있었다. 나는 그대로 숨이 탁 막혔다. 먹잇감을 유혹하려 촉수를 아름답게 뻗친 어느 심해의 괴생명체 마냥 있는 대로 가지를 뻗쳐 마치 풍덩 뛰어들면 초록빛 바다 같았다. 하지만 관능적인 촉수에 이끌려 들어갔다가는 괴상망측한 입구멍으로 빨려 들어간다. 초록빛 바다 같은 여름 숲속으로 공중으로 뛰어 들어갔다가는 온몸의 뼈가 바스러지는 경험을 해야 할 것이다. 한참을 후텁지근한 차창 밖 숲을 쳐다보고 있으니 취한 듯 몽롱해졌다. 녹색은 사람의 눈을 편안하게 해준다고 하는 말은 모두 거짓말이다. 한 여름 숲을 한참 쳐다보고 있으면 머리는 핑핑 돌고 쓸데없는 생각에 사로잡힌다.

 

 

“오래전 나는 지리산 속으로 들어가는 완행버스를 타고 있었다. 여차하면 미끄러지는 탓에 버스는 심하게 흔들렸고 거듭 시동을 꺼뜨리기도 했다. 사람들의 상차도 멋대로 춤을 췄다. 길이 좁고 험한 탓이기도 했지만 곳곳에 쌓여 있는 눈 때문에 더 그랬다. 비탈을 스쳐왔던 봉우리들이 저만치서 아득했고 다가오는 것들은 더 넓고 우뚝했다. 산과 산의 연속이었다. 그래서 골짜기도 깊었다. 골짜기마다 나무도 빼곡했는데, 한 그루도 빠짐없이 눈 더미를 화관처럼 이고 있었고 길은 진창이었다.” (p.121) <내사랑 개시>

 

한창훈의 글이 좋다. 이 책에 담긴 단편 작품 중 <내사랑 개시>의 도입부다. 나는 그의 글과 함께 오래전 탄 것 같기도 한 완행버스 속에서 매캐하고 비릿한 냄새에 취한다. 분명 한 여름 고속도로 변에 보이던 여름 숲을 회상했는데 지리산 속 어느 아찔한 겨울 계곡을 지나고 있다. 심하게 흔들리는 시골 완행버스의 서스펜션은 지면의 충격을 고스란히 내 위장에 전해 준다. 생전 한 적도 없는 멀미를 겨울 산 완행버스 안에서 하고 앉아 있다. 골짜기에 빼곡한 나무만큼 잡생각이 많아진다. 화관처럼 눈을 이고 있는 나무들이 애처롭다. 여전히 글은 진창이다.

그의 이전 작품 「홍합」을 읽고 한창훈의 팬이 되었다. 무심한 듯 펼쳐내는 비릿하고 반가운 밑바닥 사람들의 삶을 특유의 전라도 사투리로 버무려 내었다. 이 책 「그 남자의 연애사」에 등장하는 인물들 또한 크게 다르지 않다. 걸쭉한 전라도 사투리가 나오지 않는 것이 아쉽기는 했지만 책에 실린 단편들 모두 내 주변 사람들 이야기 혹은 내 이야기 같았다.

<내사랑 개시>의 도입부는 별 생각 없이 마주하게 되는 잡념을 무던하게 풀어내는 그의 글 특유의 방식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는 부분이다. 종종 그럴 때가 있다. 한참 일을 하다가 갑자기, 잠자리에 누워 잠을 청하다가 갑자기, 신나게 운전을 하다가 갑자기. 인생에 대해서, 가족에 대해서, 나에 대해서, 세상에 대해서 갑자기 생각이 생각의 꼬리를 물고 늘어지며 뒤틀리고 얽히며 태풍경보가 내린 바다 한 가운데 떠 있는 배 안에 겪는 멀미처럼 지독한 고통을 겪을 때. 그럴 때가 있다. 나는 난리가 났는데 다른 건 아무렇지 않다. 나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여전히 자신의 일에 몰두하고 있고, 아내는 잘 자고 있고, 다른 차들은 쌩쌩 제 갈 길을 가고 있다. 나만 슬로비디오다.

 

 

“생사를 다투는 응급실 시계와 바둑 시합장 시계가 똑같이 돌아가듯이 그의 시계도 그랬다. 하루하루는 죽겠는데 한 달은 금방 지나갔다. 돌아보면 나이가 한 살씩 들어 있기도 했다. 그는 전국의 일터를 떠돌았다.” (p.22) <그 남자의 연애사>

 

작가는 인생을 어렵게 그려내지 않는다. 특별한 사건을 만들지도 않는다. 물론 그의 작품을 다 읽지는 못해서 단정하지는 못하지만 내가 읽은 작품들은 모두 그랬다. 애써 극적으로 묘사하거나 전개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의 글이 더 좋다. 생사를 다투는 응급실 시계도 바둑 시합장 시계도, 내가 가지고 있는 핸드폰 액정에 뜨는 시계도 똑같은 각도로 시침과 분침이 벌어져 있다. 인생이란 그런 것이다. 1분만 더 빨리 옮겨 왔으면 살릴 수 있는 생명이었음을 깨닫는 응급실 안의 통곡 소리도, 아무리 복기를 해도 1수조차 물릴 수 없는 바둑 시합장의 탄성 소리도 똑같은 절대적 시간 앞에서는 똑같다. 그래서 ‘그 남자의 연애사’를 들어보는 것이 때론 ‘나의 연애사’를 돌아보는 것만큼 아슬아슬하고 짜릿하다.

 

 

“하나가 가면 또 하나가 오고. 고통스럽지. 죽을 맛이었어. 그런데 정말 못 견디겠는 것은 이 햇살인 거야. 아, 그 여름 햇살. 뜨거운 한낮의 태양이 저 높은 곳에서 나를 내려다보는 거야. 내 눈만 찔러대는 거야.” (p.169) <판녀>

 

물론, 나의 고통이 가장 크다. 내 군생활이 가장 힘든 것처럼 내 고통을 다 표현할 수도 그럴 필요도 없다. 3명 중 1명이 암에 걸린다는 세상이지만 암에 걸리지 않는 나머지 2명의 가족은 암에 걸린 가족의 고통을 전혀 알지 못한다. ‘판녀’는 꽃다운 중학생 나이에 동네오빠 3명에게 성폭행을 당한다. 그 중에는 사촌오빠도 끼어 있다. ‘판녀’가 그림을 그리는 창녀가 될 수밖에 없었던 구조적 문제는 차치하고, 고통의 한 가운데에 있는 사람은 오롯이 그것이 세상의 전부가 된다. 그 한 가운데에서 자신이 믿는 신을 절대적으로 의지하거나 절대로 흔들리지 않는 자신의 신념을 지켜내는 것을 나는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세상이라는 고약함과 나. 이렇게 단 둘만이 존재하는 것이다. 처절하고 차가운 세계다. 한참동안 성폭행을 당하는데도 여전히 내 눈만 찔러대는 뜨거운 한낮의 태양은 어쩌면 ‘판녀’가 살아갈 인생의 격랑을 미리 파노라마로 보여주는 세상의 비열한 동정심이었는지도 모른다.

 

 

“아까 사실, 당신을 한참 쳐다보고 있었어. 내가 보고 있다는 거 몰랐지? 꼭 사막이나 바다를 마주하고 선 사람 같더라. 그런 경우 있잖아? 길이 너무 멀어 출발을 못 하는.” (p.163) <판녀>

 

고통에 마주한 사람만이 고통에 마주한 사람을 알아낼 수 있다. 인사치레로 툭툭 던지는 동정은 구역질을 동반한다. ‘판녀’는 세상 끝에 홀로 선 사내를 발견한다. 유일하게 발견할 수 있었다. 길이 너무 멀고 참담해 차마 발을 떼지 못하는 서성임. 작가의 이전 작품에서 자주 등장하는 소재는 ‘섬’이다. 세상의 끝, 인식의 끝을 ‘섬’으로 상정한 작가의 끈질김이 소설 속에 고스란히 녹아있다. 아름답고 고즈넉하고 손때가 묻지 않은 아담하고 따뜻한 ‘섬’의 이미지가 아니라 아득하고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참담함의 이미지다.

하지만 모두가 그런 아득함과 참담함에 절망할 필요는 없다. 모두가 ‘섬’에 닿아야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작가는 보통의 이야기, 나와 너의 이야기를 ‘섬’의 이미지에 투영해 낼 뿐이다.

 

 

“결혼을 했어도 외로움은 없어지지 않았다. 끊임없이 누군가를 좋아하는 이유에 대해 애생이 물었을 때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이어서 나도 어떻게 할 수가 없어.” (p.108) <인생은 이렇게>

 

리사무소에 있는 주민현황표에 나온 여자주민들 중 스무 살 이하와 늙은이를 제외한 모든 여자들을 좋아한 남편과 함께 사는 여자 ‘애생’의 인생은 그야말로 외딴 ‘섬’이다. 만약 가능한 일이었다면 마을 여자 전부에게 장가를 들려고 하는 남편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는 것이 더 가관이다.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이어서 나도 어떻게 할 수가 없어.’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없다.

 

 

솔직하게 말해봐. 그놈이랑 뭔 짓을 한 거야?” (p.206) <그 여자의 연애사>

 

<그 남자의 연애사>가 있었다면 당연히 <그 여자의 연애사>도 있어야 한다. ‘애생’의 남편이 마누라는 복창 터지는 줄 모르고 세상 편한 이야기를 지껄이는 것처럼 그렇게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은 복잡하고 다단하다. 이 사람이 있으면 저 사람도 있는 법이다.

어김없이 섬을 찾아와 아니, 자신을 찾아오는 박선장과 몸을 섞은 그 여자는 그 여자의 남편이 부리는 주사 섞인 추궁이 기가 막히다. 자신과 결혼하기 전에 만났던 남자들의 시시콜콜한 과거사까지 감자 캐듯 캐내고 볶아대는 그 여자의 남편이 역겹다. 그저 빌어 붙어사는 주제에 남편이라고 욕지거리를 쏟아 낸다. 하지만 그 여자의 우악스러움으로 자식 놈들 키워 내고 이날 이때껏 살아냈다. 능력 없는 남편이라는 작자의 욕지거리는 먼지일 뿐이다. 그마저 술기운으로 악을 쓰는 모습이 애처롭기는커녕 더 화가 난다.

그 여자는 일격에 상황은 역전시킨다.

 

솔직히 말해. 이 시간까지 그 관광객 여자들이랑 뭐했어?” (p.221) <그 여자의 연애사>

 

 

그렇다. 살아가는 꼴이, 모습이.

만화경으로 세상을 보는 것처럼 복잡하다. 누구 하나 ‘틀렸다.’고 할 수 없다. 모두가 모두에게 ‘다를 뿐’이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다.

아니, 살아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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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털 같은 나날
류전윈 지음, 김영철 옮김 / 밀리언하우스 / 2011년 5월
평점 :
절판


이제는 미국과 당당히 어깨를 나란히 하는 중국은 동양문화의 중심이다. 주변국이 인정하든 하지 않든 바꿀 수 없는 사실이다. 오랜 기간 고유한 문화와 문명을 지켜왔다. 중세에서 미처 벗어나지 못한 채 아찔하고 고통스러운 근대를 겪기도 했다. 학창시절에 배운 중국의 역사는 기껏해야 고대사에서부터 근대까지에 국한된다. 정치적 이유도 있었겠지만 중국에 대해 더 알려고 하지 않은 이유가 더 클 것이다. 당장 내 나라 현대사에 대해서도 제대로 가르치지 않는 국가에 살고 있는데 언제 중국의 현대사까지 참견할 수 있나.

그래서 중국의 현대사를 배경으로 하는 중국 작가들의 책을 읽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처음 읽은 책은 다이 호우잉의 「사람아 아, 사람아!」라는 책이었다. 신영복 선생님의 책을 읽다가 선생님이 번역한 책 이름을 발견하고 읽게 되었다. 한국의 현대사만큼 격랑을 직접 겪은 중국의 지식인, 작가들의 투쟁의 삶과 그들의 성공과 실패를 읽는 것이 신선했다. 그전까지 전혀 알 수 없는 것들이었다. 그 다음에는 위화의 「허삼관 매혈기」를 읽었다. 다이 호우잉과는 다르게 현실을 풍자하는 위화의 글이 더 마음에 와 닿고 재미도 있었다. 가족을 위해 어쩔 수 없이 피를 팔아야 하는 허삼관의 삶이 지켜보기 민망할 정도로 곤궁하고 비참했지만 피식 피식 튀어 나오는 실소를 참을 수 없었다.

중국은 구소련이 허망하게 무너지고 나서도 정치적으로 사회주의 이념을 고수했다. 지금도 그렇다. 구소련의 실패를 거울삼아 경제적으로 개혁·개방 정책을 조심스럽지만 과감하게 펼쳤다. 지금의 중국에 내포된 여러 가지 문제들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다. 엄청난 빈부격차, 부정부패, 정치적 민주주의의 결여, 언론통제, 소수민족에 대한 탄압 등 수많은 문제가 있지만 실제로 중국의 근·현대사를 지나며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하고 헌신한 청춘들의 삶에 대해서는 모르는 바가 많았다. 지금도 몇몇 작가들은 그런 소재로 책을 출간했다는 이유로 추방당해 있기도 하다.

 

이 책 <닭털 같은 나날>의 작가 류전윈도 위화와 함께 중국의 신사실주의를 대표하는 작가다. 다른 국가의 국민들은 물론 중국 국민들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는 중국이라는 거대한 조직이 가지는 생태적 특성을 특유의 블랙 유머와 자조 어린 필치로 그려 낸다. 정치적인 이념이나 국제관계 등이 배경으로 등장하거나 형이상학적인 거대 담론이나 이데올로기가 소설의 주된 전개 요소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류전윈은 현실의 자질구레한 일상을 통해 개인과 조직, 역사의 문제를 풍자한다. 풍자라고는 하지만 실제 소설 속 등장인물처럼 살고 있는 사람이 꼭 있을 것만 같다.

이 책은 총 3개의 작품이 실려 있다. <닭털 같은 나날>, <기관>, <1942년을 돌아보다>

먼저 <닭털 같은 나날>은 중국의 현대를 사는 소시민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마치 한 가족의 모습을 장시간 따라다니며 그와 그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상을 그대로 카메라에 담은 것 같다. 어떤 개입이나 꾸밈이 없다.

 

 

“모두 가만있는데 당신만 정의를 부르짖겠다면, 내일이라도 다시 시내버스를 타면 돼. 아무도 당신한테 통근버스를 타라고 강요하지 않아. 당신도 직장을 옮기려고 다른 사람에게 부탁하고 아첨했잖아. 뇌물을 주려다 복도에서 쫓겨나기도 했고.” (p.54)

“원래는 저도 별 도리가 없었는데, 직장 동료의 아버지가 바로 그 회사의 국장이라, 그를 통해 겨우 자리를 얻은 겁니다. 요즘 우리 사회가 좀 그렇지 않습니까?” (p.62)

 

자본주의 경제가 깊숙이 침투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중국의 전체 경제는 정부에서 주관하고 있다. 부패와 뇌물의 온상이기도 한 국영기업이 여전히 득세하고 있다. 이 작품의 주인공도 국영기업이나 국가의 하위기관에 근무하고 있는 말단 사원이다. 국가 기관이라고 해봤자 특별한 것은 없다. 워낙 그런 국가 기관에서 일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특별히 차별되지도 않는다. 다만 그의 고향 시골에서는 그래도 국가 기관에 취업해서 베이징에 살고 있다는 것만으로 잔치가 벌어질 정도이지 아침 일찍 일어나 배급을 받으러 가야하고 직장에서는 그저 말단 사원일 뿐이다. 중국 사회에 만연한 뇌물 문화에 대해서도 작품에서는 당연하게 등장한다. 국가에서 운영하고 관리하는 조직이기는 하지만 전혀 법률이나 규정에 의해 인사절차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복도에서 뇌물을 주고받을 정도라면 사무실에서는 어떻고 보는 사람이 없는 은밀한 공간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아무리 말단 직책이라도 국가 기관이나 국영 기업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있는 줄 없는 줄 모두 동원해서 아는 사람을 찾아내고 그 사람을 통해 뇌물을 전달해야 한다. 마치 기부금을 내고 입학을 하는 것처럼 그렇게 꽂아진다.

 

책에 실린 또 다른 단편 작품 <기관>의 주인공 린도 국가기관의 말단 직원이다. 어차피 오르지 못할 나무 쳐다보지도 말라고 했다는 한국의 속담을 어떻게 알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큰 욕심 없이 자리만 보전하는 것이 목표였다. 그래서 한국의 공무원들이 그러는 것처럼 출근해서 퇴근하기 까지 별다른 일을 하지 않는다. 시키지 않는 일은 당연히 하지 않고 시키는 일이라도 꾸역꾸역 대충대충 시늉만 낼 뿐이었다. 하지만 그의 상사들인 쑨,러,장,차오,펑의 모습을 보며 린도 부패와 뇌물과 비리의 축제에 발을 들여 놓는다. 무슨 수를 쓰든 한 자리라도 기어오르지 않는다면 그의 생활은 결코 단 한 발자국도 나아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온갖 방법을 동원하고 꾀를 부려 승진하고 더 많은 돈을 받고 더 큰 집으로 이사하고 더 큰 차를 전용차로 몰고 다니는 그의 상사들의 모습이 비로소 눈에 들어 왔다. 그래서 린은 시키지 않은 일도 한다. 시키는 일은 기가 막히게 해 낸다. 그래도 여전히 그는 입당조차 할 수 없다. 단지 일을 잘 하는 것만으로는 승진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내가 열심히 하면 승진도 하고 입당도 할 수 있어.’라고 생각하며 혼자 설레발을 치면 또 자연히 그것이 어떤 상사에게는 밉보일 구실이 될 수 있다. 재수가 없으려니 하필 린의 입당 문제를 손아귀에 쥐고 있는 사람이 바로 그 상사였다. 이런 저런 수를 쓰고 온갖 줄을 대어 그의 상사들이 그렇게 했던 것처럼 그렇게 ‘우리 사회가 좀 그런’ 그것을 시도한다.

 

직장에서 전투를 치르고 집에 돌아와서도 산발적인 국지전은 도무지 끝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수도 검침을 하는 영감에게 밉보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자칫 영감의 기분을 상하게 했다가 수돗물이 끊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p.13)

 

수도를 검침하는 영감의 눈치도 살펴야 한다. 애지중지 하는 침대에 턱하니 걸터앉아 뻐끔뻐끔 담배를 피우고 가래를 뇌까려도 그저 마음속으로 분을 낼 뿐이다.

 

 

“배추더미가 산처럼 쌓여 있는 모습을 보며 겨울 내내 먹어치울 생각을 하니 벌써 비위가 상했다. 하지만 아내의 기분이 좋으니 그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집 안의 분위기는 오히려 전보다 더 부드러워졌다.” (p.66)

“린은 집에 돌아와서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하수도가 또 막혔고, 같이 사는 상대 집 여자가 방에서 성질을 부리고 있었으며, 그의 방에서는 딸아이가 앙앙 울고 있었다. 게다가 어머니는 감기에 걸렸고, 아내는 침대 옆에 앉아 눈물을 뚝뚝 떨구고 있었다. 어머니, 언제쯤 이런 생활이 끝날까요?” (p.136)

 

<닭털 같은 나날>의 남편도 <기관>의 린도 지긋지긋한 직장 생활을 내팽개치고 싶다. 시원하게 욕이나 퍼붓고 싶다. 받아 먹을 때는 모두 다 들어줄 것처럼 하다가 받아먹고 나서는 나 몰라라 하는 저들의 탐욕을 견딜 수 없다.

하지만, 하지만 아내와 가족 앞에서 다시 한 번 마음을 추스른다. ‘올해는 절대 배급받지 말아야지’다짐하면서 동시에 배추 배급 줄에 서 있는 자신을 경멸한다. 두 손 가득 배추 단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며 아내에게 강하게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리라 다짐하지만 그러지 못한다. 집안 가득 쌓인 배추더미를 보며 벌서부터 비위가 상하지만 아내의 기분이 좋으니 만사 오케이다. 애처롭고 귀엽다. 메스껍게 쌓인 배추더미를 직장 상사들이라 생각하며 발길질을 하고 싶지만 그런 배추더미를 보며 만족해하는 아내의 기분이 상할까 근처에 가지도 못한다. 어쨌든 아내의 기분이 좋으면 나도 좋은 것이다.

아무리 열심히 일을 하고 온몸이 부서져라 아부하고 갖다 바쳐도 승진은커녕 입당도 되지 않는 린은 그래도 기관을 그만둘 수 없다. 내 집하나 없어서 다른 부부와 함께 집을 쓰며 매일 여자들 싸움에 지쳐 있지만 그래도 기관에 붙어 있어야 입당을 타진해 보든 승진을 노려보든 할 수 있다. 오늘도 아내는 옆 방 여자와 다퉜고 그 화를 받아줘야 한다. 아픈 어머니가 마음에 걸리고 딸아이는 앙앙 울어 댄다. 그래서 이 생활을 끝낼 수 없다.

 

닭털 같이 흐드러지게 휘날리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나날이다. 그들에게 현실은 수용 범위를 넘어선 닭장에 가득 들어찬 닭들의 털이다. 푸드득 날갯짓에 후드득 떨어지는 털이지만 가볍게 떨쳐 내거나 쉽게 밟을 수 없다. 몸으로 기록한 하루하루다.

누군가에게는 지금, 당장의 현실일 수 있다.

누구도 닭털처럼 가볍다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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