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상의 추락]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우상의 추락 - 프로이트, 비판적 평전
미셸 옹프레 지음, 전혜영 옮김 / 글항아리 / 2013년 9월
평점 :
절판


IDOL은 우상이다. 우상은 찬양과 숭배의 대상이 되는 존재다. 태고의 조상들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우상은 가득하다. 90년대 중반부터 한국이라는 사회에서는 IDOL이 10대 중후반부터 20대 중반 정도 까지 소속사에 속한 남·여 댄스그룹을 가리키게 되었다. 유별난 현상이다. 처음에는 ‘길어봐야 10년 가겠어?’ 싶었다. 그런데 HOT가 없어지고 G.O.D가 없어져도 계속해서 IDOL이라는 댄스그룹들이 탄생하고 그만큼 빠르게 사라졌다. 그리고 언제 어떤 그룹이 사라졌는지 알아차리기도 전에 새로운 그룹들이 탄생하는 순환을 20년 가까이 지속하고 있다. 게임시장이 K-POP시장보다 몇 배나 많은 돈을 벌어다 주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게임을 규제하려는 유아적인 발상을 하는 국회의원들이 있는 나라가 한국이다. 적어도 10대의 여자 아이들이 핫팬츠와 탱크탑을 입고 성행위를 연상시키는 요상한 춤을 추는 것이 PC방에 틀어박혀 밤새도록 게임을 하는 것보다 더 유해하다고 생각하는 나로서는 이런 상황들이 코미디다.

요즘 가장 핫한 IDOL그룹은 SM소속의 엑소라고 한다. 으르렁이라는 곡은 무한도전에도 나올 만큼 대단한 인기를 끈 것 같다. 나는 엑소가 몇 명인지 그 아이들의 노래가 어떤지 전혀 관심이 없다. 엑소도 몇 년 후에는 그들 소속사의 대선배인 슈퍼주니어나 동방신기 형들처럼 외국을 다니며 콘서트를 하고 TV 예능 프로그램이나 드라마에 나오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다만 나는 내가 낳은 딸내미가 이런 댄스그룹 IDEL(아이들)에게 빠지지 않았으면 싶다. 발에 채일 정도로 넘쳐나는 IDOL이라는 댄스그룹 IDEL은 뮤지션이나 아티스트가 결코 될 수 없다. 그들은 철저하게 계획적으로 만들어진 회사의 제품에 불과하다. 그런 제품이 부르는 노래와 춤에 내 딸아이가 결코 현혹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아니 태교 때부터 줄곧 다른 장르의 음악을 들려줘야겠다.

한국의 IDOL은 반드시 없어진다. 한류다 어쩌다 해서 드라마나 영화와 끼워 팔기 식으로 우르르 몰려가 공연을 하고 아무리 그래도 트렌드는 변하기 마련이다. 앞으로도 수도 없이 많은 IDOL이라 자칭하는 댄스그룹 IDEL이 만들어지겠지만 어떤 비관적인 비평가들의 비관적인 전망처럼 한국의 전체 음악시장이 이들로 인해 파멸의 길로 가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우상은 무너지지만 이성은 쓰러지지 않기 때문이다(내가 스스로 좋은 표현을 만들어 냈다고 생각했는데 쳇! 고 리영희 선생님의 아주 아주 유명한 책 제목의 차용에 불과하다)

 

 

우상은 추락하게 마련이다.

 

“전기 작가들은 프로이트가 출간한 책에 쓰인 텍스트를 있는 그대로 믿는다. 프로이트의 자택에서 오랜 세월 하녀로 일했던 목격자의 증언에 따르면 집주인 프로이트는 돌푸스 수상이 추진한 오스트리아의 파시스트 정권에 동정을 표했다.” (p.640)

 

이 책을 쓴 미셸 옹프레는 하나의 우상이 된 프로이트를 추락시킨다. 물론 그는 책의 초반부에서 자신은 결코 프로이트의 생각을 무효화시킬 생각이 없다고 말하지만 이 두꺼운 책을 힘들게 다 읽고 나면 꼬장꼬장하게 생긴 덥수룩한 수염의 학자가 이미 거대한 성채와 같이 인류의 보고가 된 인물 하나를 끌어 내리기 위해 갖은 애를 쓰고 있는 이미지가 떠오른다. 어쩔 수 없다. 나는 저자가 왜 책에서 줄곧 이 책에 대한 변명을 하는지 모르겠다. 겁이 나는 것이라면 애초에 이런 책을 쓸 이유가 없을 테고, 자신의 논리가 자신이 없다면 그것도 앞의 이유와 동일할 텐데 말이다. 우상은 어쨌든 무너진다. 추락한다. 프로이트라는 인물을 놓고 전기 작가들과 저자인 미셸 옹프레, 책을 읽는 독자인 나는 다른 생각을 가질 수밖에 없다. 전기 작가들은 돈을 받고 프로이트의 삶을 기록하는 것이 일이다. 옹프레는 프로이트를 연구하고 그 연구에 대한 또 다른 발전을 위해 그를 추락시키려 하는 것이고 나는 별로 관심이 없었던 인류의 우상, 프로이트에 대한 비판적 평전을 읽게 된 것 자체에 의미를 둔다. 만약 돈을 받고 프로이트의 전기를 쓰는 작가가 의뢰인인 프로이트의 구술과 여러 저작을 참고로 하지 않고 자신의 주관적으로 프로이트를 만나고 대화하며 느낀 것으로 전기를 쓴다면 그 책은 출간되지 못할뿐더러 의뢰인이 이 사실을 알게 된 즉시 해고될 것이다. 프로이트에 대한 비판적 평전인 이 책을 쓴 옹프레 교수 또한 만약 자신의 전기를 쓸 기회가 온 다면 스스로 이런 전기를 쓸 수 있을까? ‘나는 평생 동안 이런 이런 잘못을 저질렀고 여러분들이 우상으로 떠받드는 내 연구와 저작은 형편없는 쓰레기요~!’ 라고 절대로 말할 수 없다. 그런 말을 하기 위해서 전기를 집필하는 바보는 세상 천지에 없다. 나는 엑소에 관심이 없듯이 프로이트에 관심이 없다. 아무리 유명하고 새로운 학문을 개척한 위대한 IDOL이라 할지라도 내가 흥미를 가질 만한 분야가 아니었기에 찾아 읽지 않았다. 좋은 기회를 통해 이 책을 읽게 되었지만 사실 프로이트의 다른 저작을 읽고 싶은 마음은 이 책을 읽고도 전혀 생기지 않았다.

그러니까 프로이트에게 돈을 받고 그의 전기를 쓴 수많은 직업 전기 작가들이나 전적으로 프로이트와 그의 학문에 대한 경탄과 찬사로 그의 위인전을 쓴 제자나 작가들이나 이 책의 저자처럼 많은 이들에게 이미 우상이 된 프로이트에 대한 비판적 평전을 쓰는 사람들이나 내겐 별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이런 사람이 있으면 저런 사람이 있는 것이 당연한 이치다.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다. 나와 같은 독자도 섣불리 한쪽의 편을 들어서는 안 된다. 뭐 물론 그것도 독자들 마음이다. ‘아~ 이런 책이 있구나.’ 이 정도에 그쳐야 한다. 내게는 그것이 이 책에 대한 가장 솔직한 느낌이다.

 

 

“프로이트의 주장에 따르면 인간의 무의식은 이러한 것들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다고 한다. 숨겨진 것들을 속으로 억제하는 것이 무의식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은 진실을 은폐한다. 정신분석학에 대한 거부는 곧 자기 자신에 대한 앎을 거부하는 행위와 같다.” (p.551)

 

나는 옹프레가 프로이트에 대한 숨길 수 없는 질투와 열등감을 가진 게 아닐까 싶었다. 프로이트는 무의식의 세계와 억눌린 성에 대한 정신분석학적 현상을 사회병리 현상으로 풀어낸 사람이다. 당시의 철학 사조와 사상 안에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들이었다. 프로이트와 나는 살아간 연대도 엄청나게 차이가 있고 사는 세상도 그만큼 차이가 있으며 생각하는 수준과 학문에 이른 수준 또한 그만큼 차이가 있다. 하지만 무의식의 세계, 꿈의 세계, 근친상간이나 사회·종교적으로 억눌리고 배제된 성의 문제에 대한 접근에 있어서는 비슷한 성향을 가진다. 특히 꿈과 무의식의 세계가 더욱 그렇다. 최면이나 수면요법 등은 프로이트 보다는 이후 학자들에 대해 더욱 발전된 개념이지만 출발은 어김없이 프로이트다. TV에서 많이 방송되는 프로그램 중 가족 간, 특히 부부 간 갈등과 갈등의 해소를 가감 없이 보여주는 것들이 있다. 많은 경우 갈등의 소지는 과거의 경험에 기인한다. 그래서 자신의 과거 특정 시점으로 돌아가 그때의 자신과 마주해 갈등과 상처의 기억을 치유하는 과정을 그려내고는 하는데 이때 많이 사용되는 것이 최면이나 무의식 세계로의 경험이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의 요지는 프로이트의 접근과 창조적인 학문의 발견과 발전이 지금에까지 유용하게, 아주 유용하게 전 세계적으로 쓰이고 있다는 것이다. 비록 프로이트의 책을 읽지 않았다 할지라도 말이다. 일정 부분 현재의 인류는 프로이트에게 신세를 지며 살아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물론, 저자가 프로이트의 학문적 열정과 실험의 집요함 전부를 지적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그렇게 책의 여러 곳에서 변명인 듯 보이는 언급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이 프로이트에 대한 열등감의 발로라면 좀 더 솔직히 속마음을 드러냈으면 좋을 뻔 했다.

 

 

“철학자들은 무의식에 대해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꿈이라든가 최면술, 실질적인 의학 치료에 대한 노력이 부족했다. 프로이트와 달리 철학자들은 문자화된 책들의 세상에 머무는 이론가들에 불과했던 것이다.” (p.99)

 

고대와 중세시대 내내 연금술이나 마술, 신비주의 종교와 철학은 횡행했다. 오죽하면 중세에는 멀쩡한 여성을 마녀로 몰아 태워 죽이고 찢어 죽이고 돌로 쳐 죽이는 일도 일어났다. 르네상스를 거쳐 유사 이래로 가장 이성적인 사회를 만들었다는 중세에 마녀 놀음이 전염병처럼 광풍이 되었다는 것이 아이러니다. 그래서 중세의 끄트머리와 근대의 입구에서는 병적으로 이성과 합리에 천착했을 것이다. 음료수는 종류와 브랜드대로 일렬종대로 세워 놓고 보도블록의 테두리는 절대로 밟지 않는 것 같은 것에 버금가는 편집증이다. 수백 년 동안의 암흑시대를 막 벗어난 인류는 발전과 진보의 방향으로 뱃머리 전체를 돌렸다. 산업 기술은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각종 이념과 철학과 사상이 창궐했다. 그런 시대에 프로이트의 이야기는 오히려 다시 암흑의 중세시대로 돌아가자는 것으로 들렸을 것이다. ‘아니 지금 말이야 시대가 어느 시대인데 꿈 타령, 무의식 타령이야~!!’라고 했을지도 모른다. 이성의 시대를 펼쳤지만 아직 선뜻 그 위에 올라타 뒹굴 용기를 가진 사람들이 없었다. 언뜻 저자는 프로이트를 칭찬하고 있는 듯 보이기도 한다.

 

 

“상한 빵을 먹었거나 지나치게 많이 먹어서 배탈이 났을 수도 있는데 그런 평범한 원인은 프로이트에게 별로 설득력을 얻지 못했다.” (p.188)

 

그런데 이런 내 의도는 여지없이 깨진다. 저자는 복잡하고 자세하게 프로이트가 이룬 업적과 알려진 성공에 대한 오해를 설명한다. 사실 나는 읽어도 잘 이해가 안 되는 내용이 많았다. 프로이트에 전혀 관심이 없고 이쪽 분야에 전혀 소질이 없는 순수하고(?) 수준 낮은(?) 독자의 눈에서 해석하자면 프로이트는 평생 근친상간의 판타지 속에서 살았고 그것을 해소하거나 해소하지 못하는 욕망 사이에서 갈등했으며 1개를 발견하면 100개를 발견했다고 부풀리고 과장하는 측면이 많았으며 일부 실험과 연구에 있어서는 그의 도덕성과 인간성을 심각하게 점검할 필요가 있을 정도로 위험한 측면이 많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세상에 존재하는 이론과 학문 중에 완전한 것이 있나? 나는 모르겠다. 나는 학사 학위를 가진 것이 전부이고 그 학사 학위도 먹고 사는 데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 인생을 살고 있다. 학문이라 해봐야 학부 시절 4년 동안 전공 공부 한 것이 전부라는 이야기다. 그래서 박사학위를 가지고 일정 분야에서 일정 정도 이상 학문적 성취를 이룬 저자와 같은 사람들의 생각을 미루어 짐작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지만 그래서, 뭐! 어쩌라는 말인가?! 나와 같은 일반인들에게 프로이트나 저자나 니체나 베버나 촘스키는 그저 대단한 사람들이다. 감히 그들의 학문과 논리를 부정은커녕 의심조차 한 번 해본 적 없이 겸손하고 겸허한 마음으로 그들의 책을 고이 읽는다.

저자가 생각하기에 프로이트가 가진 한계와 빈약함이 많았을지 모르지만 그런 것은 내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잘 알고 전문적이며 탁월한 저자와 같은 학자님들께나 유효한 문제이지 이런 두꺼운 책을 읽는 것 자체로 나 자신에게 상을 주고 싶을 만큼 만족하는 나와 같은 독자들에게는 저 위에 진하게 표시된 문장의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빈 출신인 의사 프로이트가 자신의 전설적 이야기와 경험담을 전기 작가들에게 쓰라고 직접 요구한 것이다. 그는 문학적인 담론과 신화나 주술에 가까운 이야기들을 늘어놓았다.” (p.51)

 

사람은 누구나 IDOL이 되고 싶은 욕망이 있을 것이다. ‘아이고~ 저런 저런 어린 애들이 TV에 나와서 다리 다 내놓고 위에도 다 내놓고 뭐 하는 거야~’ 라고 하면서도 만약 내 아이가 IDOL 댄스 그룹의 일원이 되고자 한다면 모든 것을 내어 놓으며 뒷바라지를 한다. 아역 배우들의 드라마나 영화 출연과 CF출연은 전적으로 부모들의 욕심이다.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고 살다보면 징그럽게 현실과 마주한다. 까마득히 높아 보이는 이상과 괴리된 채 하루하루 지쳐 잠드는 ‘나’를 문득 발견했을 때의 절망이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절대로 모른다. 그래서 적어도 내 자식만큼은 나보다 더 IDOL에 가까운 삶을 살기를 바라는 것일지도 모른다. 적어도 한국이라는 사회에서는 10대와 20대 초·중반에 IDOL이라 칭해지는 댄스그룹 IDEL(아이들)만큼 돈을 많이 벌고 인정받고 인기 있는 직업이 없기 때문이다. 춤추고 노래하다가 운이 좋으면 드라마나 영화에도 나올 수 있고 CF를 찍을 수도 있다. 김준수라는 젊은 친구는 120여억 원을 들여 제주도에 호텔을 건설한다고 한다. 그 젊은 나이에 말이다. 그러니 IDOL, 아이돌 하는 것이다.

어쩌면 프로이트도 IDOL이 되고 싶은 욕망에 충실한 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 그저 인류와 미래를 위해 자신의 모든 역량을 쏟아 부어 연구하고 실험하는 것에 만족하는 일개 영웅이 아니라 더 미화되고 칭송받고 대대로 인세를 받아먹고 살 수 있는 IDOL, 우상이 되고 싶었을 것이다. 이 책에서도 여러 번 언급되고 프로이트에 대해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알고 있을 그의 가정환경과 평탄하지 못했던 결혼 생활로 인한 내적 혼란은 그런 인정과 과시와 욕심으로 투사되었을지도 모른다. 그것에 대해 옳다 그르다 판단할 수 없다. 이 책의 저자와 같이 생각할 수도 있고 나와 같이 단순하게 생각할 수도 있는 문제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서울대 인권수업
정광욱 외 지음, 안경환 감수 / 미래의창 / 2013년 8월
평점 :
절판


한국에서는 서울대를 나오면 출셋길이 열린다. 지방 고등학교에서는 입시 이후 현수막을 건다. “서울대 몇 명 합격. 누구누구 서울대 무슨 과 합격.” 학원에서도 현수막을 자랑스레 걸어 놓는다. 작은 마을에서는 “누구누구 장녀, 차남 서울대 합격.” 이라고 현수막을 건다. 예전만큼은 아니겠지만 여전히 서울대는 한국을 쥐락펴락하는 존재다. 한국을 움직이는 거의 모든 분야에 서울대 출신이 있다. 이미 서울대에 입학하는 순간 그(그녀)의 운명은 한국 사회를 이끌어 갈 엘리트로 결정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죽을 동 살 동 서울대에 들어가기 위해서 갖은 애를 쓴다. 그렇게 평소에 삼성을 욕하고 비판하면서도 내 자식이 삼성에 들어가면 동네잔치를 열고 만나는 사람마다 자랑하는 것처럼 서울대가 한국의 비정상적인 교육현실을 만든 장본인이라며 서울대 철폐나 대학서열 철폐를 외치거나 그것에 동의하다가도 내 자식이 서울대에 들어가기를 바라는 사회가 한국이다. 서울대 철폐는 한국에서 공산당이 집권하는 것보다 더 불가능한 일이다. 지금 한국 사회를 손아귀에 쥐고 있는 사람들이 서울대 출신들인데 그들이 서울대 철폐를 두고 보고 있을 리 만무하다.

그렇다면 이미 운명의 반쯤이 결정지어진 서울대에서 학생들을 조금 더 바르고 건강하게 교육하기를 바라는 편이 더 현실적이지 않을 까 싶다. 그것도 거의 불가능한 것 같기는 하지만 말이다.

 

 

이 책 「서울대 인권수업」은 서울대 법학과 강의 중 벌어진 토론 내용을 책으로 묶은 것이다. 대단하다. 전국의 수많은 대학교 강의실에서 온갖 토론과 강의가 존재할 텐데 말이다. 역시 서울대가 최고다. 서울대 법학과 정도 되어야 학부에서 벌어진 토론 내용을 가지고 책을 낼 수 있다. 이미 멍석을 깔아주고 시작하는 것이다.

책에는 <인권>, <신상털기>, <양심적 병역거부>, <장애인등급제>, <다문화>, <범죄자 인권>, <성소수자>, <동물의 권리>, <안락사>, <인권위원회> 등의 주제를 놓고 벌인 토론 내용이 실려 있다. <신상털기>를 제외하고는 크게 중요하게 부각되지 않은 주제다.

평소 좋아하던 출판사인 ‘시대의 창’에서 제목부터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서울대 인권수업」을 출간한 것이 생선가시에 목에 걸린 듯 불편했다.

하지만 이 책을 읽는 중에 터진 기사를 보면서 서울대 전체 학생들에게 이런 토론이 이루어져야 하는 것을 아닐까 싶었다. 그 기사는 ‘막말판사’에 대한 것이었다. 지금은 사퇴한 ‘막말판사’는 이미 유명한 사람이다. 막말을 쏟아낸 것도 이미 여러 번 이었다. 사회적으로 이슈화 되고 비판이 봇물치자 단순한 말실수였다며 핑계를 댔지만 시간이 가도 그의 인성 자체는 변하지 않는 법니다. 그 판사가 서울대를 졸업했는지 어떤지는 모르겠다. 여성을 비하하고 노인을 비하하는 발언을 사적인 자리도 아니고 공판장에서 했다는 것 자체가 어이없지만 판사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 중 그런 사람이 또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저 고시 공부를 위해 수년을 노력하고 판사가 된 사람에게 그 어떤 인성과 사회성을 요구할 수 있을까. 어쩌면 그런 ‘막말판사’는 많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공판장에서 그런 막말을 내뱉느냐 속으로만 생각하느냐의 차이일 것이다.

그런 뉴스를 접하고 나니 이런 책, 이런 책의 내용이 서울대에서 많이 시행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아무래도 서울대를 졸업한 사람들이 한국 사회의 더 중추적인 자리에 앉게 될 가능성이 많으니까.

적어도 인권이나 정의, 첨예하게 대립하는 갈등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접근하느냐를 학부 때부터 공부하고 훈련한다는 것은 큰 자산이 될 것이다. 굳이 서울대를 다니지 않아도 이것은 동일하다. 요즘 아이들에게는 인성교육이나 인문교육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중고등학교 심지어 초등학교때부터 경쟁에 내몰린다. 그렇게 진학을 하고 대학에 들어가면 이제 취업을 하기 위한 경쟁의 바다에 뛰어 든다. 인권, 정의, 평등 이런 개념에 대해서도 취업을 위한 공부나 면접을 준비하면서 보게 되는 것이 전부일 것이다.

 

 

“인권 존중의 출발점은 ‘서로 다른 입장을 바꾸어 생각해보기’잖아요. 토론의 본질도 ‘다름’에서 시작해 다양한 이야기들을 존중하는 것이고” (p.10)

“인권은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입니다. 우리가 사람답게 살고자 하는 것은 사람답게 사는 그 자체가 목적이지 사람답게 삶으로써 무언가를 더 이루려는 것이 아닙니다.” (p.29)

 

사회에 진출하기 전 인권에 대해서 깊은 토론을 나누고 공부하는 것은 분명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학생들 각자에게도 그렇고 우리 사회에도 그렇다. 우리 사회는 토론문화가 없는 사회다. TV의 토론 프로그램에서는 수백 회를 진행하면서 단 한 번도 결론에 이르는 꼴을 보지 못했다. 이쪽 편과 저쪽 편으로 나뉘어 싸움질만 하고 자신들의 이야기만 뇌까릴 뿐 상대편의 이야기를 들으려 하지 않는다. 토론이라는 것에는 입보다 귀가 더 필요하다. 이 책에 실린 학생들의 토론 내용이 얼마나 편집이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책에서는 하나의 주제를 두고 첨예하게 의견이 대립되는 것도 있고 거의 접점을 찾는 주제도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는 다양하고 복잡하고 예민하기 때문에 하나로 단정 지을 수 없다. 각자 다른 사람들이 각자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내 의견이 존중되는 것을 바라는 것만큼이나 다른 사람들의 의견도 존중해야 한다. 그런 마음과 자세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는 사람에게 토론은 무의미하다. 특히, 인권이라는 주제는 더 많은 토론이 이루어져야 한다. 시의성이 있는 정치적 쟁점과 사회적 문제에 대한 토론만 넘쳐나고 있다. 양쪽의 의견이 너무 첨예하게 나뉘고 이해 당사자 간 거리가 너무 멀기 때문에 그런 토론은 늘 피가 튄다. 당장 시급한 것 같지만 결론이 나지 않는다. 한참 토론을 해도 결론이 나기는커녕 속만 더 뒤집어 진다. 그러나 인권 같은 주제는 시급해 보이지 않는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이런 것이 더 중요하다. 있으면 당연히 있겠거니 살지만 없으면 크게 불편을 겪게 된다. 지금은 그쪽의 인권을 걱정해야 하는 인권위원회지만 당장 어디 하소연 할 데도 없고 인간다운 처우를 받지 못해 억울해 하고 있을 때 전화 한통 하거나 게시판에 글 하나 올릴 수 있는 인권위원회조차 없는 사회라면 답답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오늘날 양심적 병역거부자는 ‘병역기피자이며 범죄자이고 국민의 의무를 저버리는 사람’으로 받아들여질 때가 많습니다. 취업이나 사회생활을 할 때에도 차별을 겪고요. 실제로 2012년 어떤 양심적 병역거부자는 교통안전공단에 합격했지만 ‘병역거부자를 평생 채용금지’하는 내부 규정으로 입사하지 못했습니다.” (p.93)

“우리나라에서는 어떨까요? ‘장애인은 신체적·정신적 장애로 오랫동안 일상생활이나 사회생활에서 상당한 제약을 받는 자이다’라고 밝히는 것처럼 의학적인 결함에 따라 장애인인지를 결정합니다. 세계적으로 의학적인 면과 함께 사회적인 면까지 고려하는 추세를 생각한다면 우리나라 현행법상 장애의 개념은 상당히 단편적인 수준에 머무는 것으로 보입니다.” (p.107)

 

양심적 병역거부자와 장애인은 사회적 약자에 속한다. 양심적 거부를 하면 이후 사회생활을 하는데 막대한 패널티가 주어진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들은 자신의 신념에 방점을 찍는다. 장애인은 선천적이든 후천적이든 비장애인보다 불편한 사람들임은 분명하다. 최대한 차별을 받지 않도록 해야 하지만 그들을 우선적으로 챙기고 배려하는 것이 사회가 가진 의무다. 그런데 현재 한국 사회에서 양심적 병역거부자와 장애인은 누려야 할 권리, 최소한의 인권조차 담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특히 양심적 병역거부자의 경우 이것은 더욱 심각하다. 병역거부에 대한 개념 자체부터 너무 낯설고 단지 특정 종교인들의 종교적 행동으로 치부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특정 종교인이 아니라도 양심적 병역거부를 한 사람들도 많은데 이래서 사회가 무서운 것이다. 한번 편견을 가지면 좀처럼 벗지 않기 때문이다.

 

인권은 사회적 약자에게는 가장 필요한 권리다. 사회적 강자에게는 굳이 인권을 들이밀지 않더라도 많은 권리를 누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서울대 학생들이 자신들이 수업 시간에 나눈 토론이 책으로 출간된 것에 그치지 않고 그 토론의 내용을 숙고해 주기를 기대해 본다. 덧없는 기대가 될 것으로 생각되지만 최소한 인권에 대해서 사회 정의에 대해서 깊게 공부하고 나와 의견이 다른 이들과 충분한 토론을 나눴다는 자체만으로 의미 있다고 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모서리에서의 사유 - 청년 문화연구가 최태섭의 삐딱하게 세상 보기
최태섭 지음 / 알마 / 2013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지식인이 넘치는 세상이다. 원하는 대로 손바닥 안에서 세상을 만날 수 있고 또 원하는 대로 손바닥 안으로 세상을 만들 수 있다. 과학과 기술의 발전이 전 인류가 보유한 지식의 총량과 비례한다면 이미 그것은 포화 상태일 것이다. 자고 일어나면 새로운 것이 탄생하고 소멸하고 있다. 적어도 스마트폰이 대중화되기 이전에는 궁금하거나 모르는 것이 있으면 방에 있는 컴퓨터 전원을 켜고 익스플로러 아이콘을 더블 클릭해야 했다. 이제는 기다릴 필요가 없어 졌다. 4G, LTE, LTE-A 무슨 새로운 별을 찾아 이름을 붙이는 것처럼 코드화 된 발명품들이 쏟아진다. 하염없이 그것들의 세례를 받다보면 나도 지식인 너도 지식인이 된다. 적어도 나보다 더 많은 지식과 정보를 가지고 있는 사람 혹은 사람들에 대한 존중이 희박해져 간다. 당연한 이치다. 거추장스러운 예절과 격식을 차려 면을 대하는 부담스러움을 감수하면서 그 지식인의 입을 쳐다볼 필요가 없다. 동일한 주제에 대해 초등학생이든 대학생이든 비슷한 답을 찾게 되었다.

이런 세상에서 기존의 지식인들이 설 자리는 점차 줄어들고 있다. 오죽하면 학위논문의 표절여부만 파헤쳐대고 있는 인간들도 있으니 말이다. 방송을 보거나 강의를 듣거나 하는 등의 외부의 모든 자극과 정보에 대해서 나와 너는, 우리는 손바닥 안에서 확인해 볼 수 있다. 저 자식이 사실을 말하고 있는지, 대충 비슷하게 얼버무리고 있는지, 아예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 학교에서는 핸드폰에 중독된 아이들을 구제하기 위해서 아침 일찍 핸드폰을 수거 했다가 아이들이 집에 갈 때 쯤 다시 나눠준다고 하지만 그것보다는 아이들의 손바닥 안에서 자신들의 오래된 지식들이 모래성처럼 와르르 무너질 것을 두려워한 탓으로 보인다. 뭐, 그것조차 교권신장의 일환으로 핏대를 세운다면 들어줄 용의는 있다. 물론, 동의는 하지 않지만.

 

다이내믹 코리아에는 매일 사건 사고가 넘쳐난다. 50여일 후에는 지난 대선 1주년이 되는 시점임에도 여전히 국가기관의 대선개입에 대한 규명의 구멍조차 찾지 못한 실정이다. ‘음모는 음모론으로 두고 살기는 하자.’라는 태평한 아저씨들 놀음인지, ‘국가를 뒤흔들 중차대한 일이지만 내 밥줄하고는 상관없다.’라는 죽을 둥 살 둥 오늘도 턱까지 숨이 차오른 아저씨들 놀음은지 모르겠지만 일은 일대로 벌어지고 있고 쇼는 쇼대로 벌어지고 있다.

 

 

“프랑스의 사회학자인 장 보드리야르는 실재가 사라진 곳을 대체하는 ‘원본도 사실성도 없는’ 이미지들을 일컬어 하이퍼리얼리티(Hyperreality)라고 일컬었다.” (p.20)

 

‘하이퍼리얼리티’가 다이내믹 코리아를 대체할 수 있는 유일한 표현일 듯 하다.

‘하이퍼리얼리티코리아’

 

 

이 책은 최태섭이라는 젊은 지식인이 썼다. 논객이라 해도 무방할 것 같고 책에서의 표현처럼 문화평론가라 해도 무방할 것 같다. 한윤형, 허지웅, 이택광, 박권일과 더불어 젊은 지식인들로 분류해도 무방할 것 같다. 자꾸만 ‘것 같다.’라고 하는 것은 저들을 통칭한 적절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고 어디에서도 저들을 한 데 묶어 명명하지 않아서이다. 개인적으로 판단하기에 진중권, 고종석, 강준만 세대와는 다른 이들이다. 386세대의 덤프에서 벗어난 이들이다. 좀 더 자유롭고(여기서의 자유롭다는 의미가 리버럴하다는 것은 아니다) 발랄하다고 해야 할까. 기존의 지식인이라 불리던 이들과 신체적 세대차이도 나거니와 정신적 세대차이도 난다.

그렇다고 딱히 이들을 좋아하거나 이들의 칼럼을 찾아 읽거나 이들의 트윗을 쫓아다니지는 않는다. 386과는 다른 이들의 신선함이 오히려 더 위선으로 느껴질 때가 많다. 진보 진영의 가장 큰 문제라고 생각하는 입진보의 모습이 이들에게서도 여지없이 보일 때가 있기 때문이다. 투사로서의 이미지,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온 몸으로 떠안은 순교자의 이미지에서는 벗어났지만 그것이 오히려 이들의 논리 구조에 치명적인 결여를 내포한다.

 

 

“지금 우리에게는 기준으로 삼고 있었던 낡은 것들이 사라지고 무너져가고, 새로운 것은 아직 만들어지지 않은 막막한 상황이 놓여 있다. 그리고 그 막막함 속에서 자신의 불만과 불안을 감당하지 못하는 이들은 폭주를 시작한다. 이들은 반MB를 외치며, 한미FTA를 반대하고, 불법체류자와 이주노동자의 범죄를 규탄하며 그들을 추방해야 한다고 말한다. 또 이들은 버스 무릎녀와 된장녀와 김여사를 욕하고, 나꼼수를 들으면서 그들의 발목을 잡는 진보 지식인과 언론들에게 야유를 보낸다. 이들은 스스로를 진보나 중도라고 대답하는 70퍼센트이고, 일관되지 않은 파편적 인식 속에서 눈앞의 정의를 요구하는 성마른 사람들이다.” (p.234)

 

진보라고 해서 무조건 비판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힘도 없는 진보끼리 허물을 덮어줘야 한다는 것은 이미 진보임을 포기하는 것이다. 양비론이 아닌 양날을 베이지 않고 타기 위해서는 나름의 가치판단이 중요하다. 한국 땅에서 자칭 진보를 가치 이념으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어느 쪽이든 100% 맞다는 확신을 하며 동의하는 실수를 범해서는 안 된다. NL계열 중에서도 꼴통들이 민노당에 이미 존재하고 있음을 참여당과 진보당 사람들은 몰랐을까? 그럴 리 없다. 어색한 동거를 하며 묻어 간 것이었다. 나꼼수가 선풍적인 인기를 얻으며 마음 둘 곳 없던 대중을 끌어당겼을 때, 진보진영 내부에서는 아예 듣지도 않고 나꼼수와 그 팬덤을 분석하고 있었을까? 그럴 리 없다. 걱정과 설렘을 동시에 가진 채 지켜봤을 것이다.

그런데 최태섭씨의 접근은 이러한 균형을 갖고 있지 않다. 이것은 지난 대선 전후 그리고 지금까지 이른 바 ‘내가 좀 아는데’하는 자들이 ‘빠’와 ‘까’로 표현하거나 ‘깨시민’으로 비아냥대는 구조와 동일하다. 반MB를 외치며 한미FTA를 반대하는 이들이 불법체류자와 이주노동자의 범죄를 규탄하며 그들을 추방해야 한다고 말한다는 논리구조는 어떻게 만들어낸 것인지 이해할 수 없다. 실제로 나는 반MB와 한미FTA를 반대했지만 불법체류자와 이주노동자의 범죄를 규탄하며 그들을 추방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또한 버스 무릎녀와 된장녀를 비난하면서 나꼼수를 까는 지식인들에게 야유를 보내지 않았다.

흔히 지식인입네 하는 자들이 저지르는 일반화의 오류다. 내지는 자신의 머릿속에서만 맴도는 상상의 나래다. 저자가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만나 그들의 의견을 수치화해 통계를 정리한 뒤 쓴 글인지 모르겠지만 저렇게 간단하게 말할 수 있는 것으로 봐서는 대단한 작업을 한 것은 틀림없는 듯 하다. 그렇지 않고 저렇게 말한다는 것은 그 자신조차 나꼼수 팬덤과 무지몽매한 대중을 비아냥대는 것에 불과하다. 그의 표현대로 일관되지 않은 파편적 인식 속에서 대중을 판단하는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그것은 진보도 아니고 지식인도 아니다.

나는 우르르 몰려다니며 팬덤을 과시하고 비슷한 옷을 입고 있음에도 의견이 다르거나 우리를 비판한다는 이유로 무지막지하게 덤벼드는 사람들을 싫어한다. 동시에 그러한 경향을 자신은 마치 오래전부터 인식해 왔고 전체 대중의 비중에서 소수에 불과한 경향을 가지고 일반화 해 톡 튀어나오려는 입진보들의 발뺌도 싫어한다.

이제는 더 이상 지식인에게 의지하지 않는 세상이기 때문에 오히려 대중의 전체적인 흐름이 가장 선명한 가치 판단의 기준이 될 수도 있다. 반대로 가장 위험한 가치 판단의 기준이 될 수도 있다. 적어도 나는 어느 쪽이든 100% 확신을 하지 않는다. 이제까지 살아 온 삶의 지혜이기도 하다. 그런데 넘쳐나는 정보와 책과 인터넷에서는 100% 확신을 가진 자들이 많다. 보수진영에도 진보진영에도 심지어 어떠한 진영에도 기울어지지 않은 진영에서도 말이다.

 

 

물론, 이 책을 읽으며 최태섭씨의 의견 중 동의하는 부분이 많았다. 「잉여사회」를 쓴 사람답게 ‘잉여’라 지칭되는 존재가 한국의 자본주의에서 어떻게 태동하게 되었는지 구조적으로 접근한 안목은 신선했다.

 

이들은 무엇으로부터 남았는가? 그것은 우리 시대의 가장 강력하고 중요한 조건과 결부되어 있다. 즉 자본주의라는 조건 말이다. 다시 말해 그들은 자본이 필요로 하는 만큼의 노동력을 웃도는 존재들이다. 그러므로 자본은 그들을 내버려둔다. 물론 완전히 자유롭게 내버려두는 것은 아니다.”

“잉여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애쓰는 이들이 오늘날 청년들의 상당수를 차지한다. 그러나 이들이 얼마나 피나는 노력을 하는지와는 상관없이 착취 받을 수 있는 영광은 매우 적은 수에게만 허락되어 있다. 결국 이들이 쏟아 붓는 노력들은 마찬가지로 하나의 과잉을 형성한다.” (p.97)

 

 

그리고 IMF 이후 희한하고 천박한 자본주의 사회로 진화한 한국을 분석한 안목도 신선했다.

 

“IMF의 장학생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구조조정과 경제 회복에 성공한 한국 사회는 달라져 있었다.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가고, 정부는 삼성 장학생들이 장학했으며, 잘 먹고 잘사는 것에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되어 있는 가운데, 새로운 시대정신의 부지에는 속속들이 아파트가 들어섰다. 재테크의 광기는 계급과 계층을 막론하고 유행처럼 번져나갔고, 왕년의 혁명적 이론가였던 386들은 사교육 시장에서 열심히 돈을 쓸어 담았다.” (p.257)

 

이 책이 하나의 주제와 흐름을 가지고 쓴 장편소설과 같은 구조였다면 좀 더 좋은 책이 되지 않았을까 싶은데, 이 책은 최태섭씨의 여러 글을 엮은 것이다. 시기도 각각 다르고 그 글을 쓸 때마다 다른 상황에 놓였을 것이다. 그래서 이 책 한권을 읽고 최태섭씨가 어떤 사람인지 그의 글이 어떤 글인지 파악할 수는 없다. 좀 더 균형 있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의 다른 책들도 읽어봐야 한다.

 

 

나는 좋은 의미에서든 좋지 않은 의미에서든 지식인들이 많이 등장했으면 좋겠다. 책을 통해서 블로그나 SNS를 통해서 그들의 의견을 자유롭게 피력했으면 싶다. 아무리 과학과 기술이 발전하고 내 손바닥 안에서 세상이 만들어진다 할지라도 떠도는 먼지처럼 부유하는 정보와 지식을 한데 모아 설득력 있게 전달하는 창구는 반드시 필요하다. 그런 여과가 점차 사라지는 세상이 된다면 지독하게 살아 있는 지역감정 따위의 망령이 내 자식에게도 그 자식의 자식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세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분명히 잘못된 것이고 다분히 정치적인 것이며 전체 사회를 좀 먹는 것이라는 사실을 계속해서 외쳐 줄 지식인들이 필요하다. 혼자 방구석에서 지하철에서 버스에서 핸드폰만 들여다보고 있을 우리와 우리의 후손들에게도 파수꾼은 필요한 것이다.

다만 이들이 기존 지식인들처럼 너무 투사적이지도 비장하지도 않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오로지 까고 비아냥대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듣보잡들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이들이 처음 사회에 등장하며 보여줬던 발랄함과 신선함이 그대로 유지되었으면 한다.

하루살이들은 트윗 몇 줄 읽고 포털의 뉴스 헤드라인 몇 줄 읽으며 아등바등 하루를 산다. 무지몽매하고 한순간에 ‘빠’와 ‘까’로 비아냥을 듣는 하루살이들에게도 균형은 필요하다. 하루살이들의 요구과 욕망이 없다면 지식인들 나부랭이도 존재할 수 없다. 그것을 명심해야 한다.

여전히 제 잘난 맛들에만 산다면 그저 모서리 언저리에서 마스터베이션하는 꼴에 지나지 않으니 말이다.

대중은 어리석지 않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여왕의 시대 - 역사를 움직인 12명의 여왕들
바이하이진 엮음, 김문주 옮김 / 미래의창 / 2013년 9월
평점 :
절판


박근혜 대통령은 한국이라는 나라가 만들어진 이후 첫 여성 대통령이다. 물론, 고대 신라시대에는 3명의 여왕이 있었지만 이후에는 없었다. 민주공화국 수립 이후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다. 대통령 중심제인 한국에서 대통령의 힘은 절대적이다. 6공화국 헌법을 그대로 이어 가고 있는 한국 내에서도 대통령 중심제에 대한 이런저런 논의가 많았고 헌법 개정 및 4년 중임제에 대한 말도 많았다. 어쨌거나 6공화국 헌법을 그대로 이어 가고 있고 대통령은 한국에서 절대적인 힘을 가지고 있으며 지난 대선에서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 탄생했다. 대통령이 여성이라고 해서 국가 전체의 여권이 신장되는 것을 바라는 것은 오바마가 최초로 흑인 대통령이 되었다고 해서 미국 내 인권 문제가 모조리 해결되는 것을 바라는 것만큼이나 불가능한 일이다. 대통령에 최임하고 8개월 정도가 지났는데 여전히 지난 대통령 선거와 관련된 문제들로 시끄럽고 사회는 극도로 갈등이 표출되고 있으며 앞으로 남은 4년 몇 개월의 임기도 그다지 평온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쯤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나는 지난 대선에서 박근혜 후보를 지지하지 않았지만 어쨌든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5년의 기간 동안 한국이라는 배를 끌고 나가야 할 선장이 되었기 때문에 잘하셨으면 좋겠다. 아직 5년 중 1년도 지나지 않았고 남은 4년이 쉽지는 않겠지만 잘하셨으면 좋겠다. 박 대통령을 지지하지 않은 절반의 국민들에게도 지지를 받고 퇴임하는 첫 여성 대통령이 되었으면 좋겠다. 이것은 진심이다.

 

동서와 고금을 막론하고 수많은 제왕과 황제와 지도자가 탄생하고 사라졌다. 전체 통계를 내보면 압도적으로 남성이 많았겠지만 특출한 역사의 방점을 찍은 여성 제왕, 황제, 지도자도 많았다고 한다. 이 책 「여왕의 시대」는 그런 여성 지도자에 대한 이야기다.

 

 

<엘리자베스 2세>

“당시 사람들은 엘리자베스 여왕을 ‘고귀한 꽃병’처럼 대접했다. 하지만 오늘날의 민중들은 더 이상 고리타분한 왕실의 격식 따위에는 관심이 없을뿐더러 오히려 왕실 스캔들에 열광하고 있다.” (p.551)

 

책에서는 순서 상 가장 마지막에 소개되었는데 그나마 얼굴을 TV를 통해 직접 본 엘리자베스 2세 현 영연방 여왕 부분이 가장 관심이 갔다. 책은 역사적 흐름 순서로 여왕 들을 소개하고 있다.

케이블 방송에서 즐겨 보는 오리지널 탑기어 프로그램에서는 진행자들(특히 제이미 클락슨)이 자주 영국의 왕실과 여왕을 조롱한다. 그래도 BBC라는 공영방송의 프로그램인데 여왕과 왕실에 대해서 저렇게 비아냥거려도 되나 싶을 정도다. 아마 이 프로그램을 애청하는 사람들은 동의할 것이다. 유명한 섹스 피스톨즈라는 펑키록그룹은 아예 자신들의 노래에서 여왕을 신랄하게 비난하고 여왕과 왕실을 한 번에 우스개로 만들어 버리기도 했다. 영국의 왕실이 전 세계적으로 폭발적으로 알려지게 된 것은 아무래도 고 다이애나 왕세자비의 죽음일 것이다. 파격적이고 신선한 행보로 인해 왕실(과 엘리자베스 여왕에게는)에서는 골칫덩어리였지만 다양한 구호활동과 대외활동으로 많은 세계인들의 사랑과 관심을 받은 다이애나 이었다. 그녀의 파란만장 했던 삶만큼이나 죽음 또한 극적이고 충격적이었다. 지금도 음모론을 펴는 일각에서는 영국 왕실의 교묘한 살인이라고 표현하기도 하는데 뭐 그런 건 관심 없고 다이애나비로 인해 영국 왕실의 이미지는 영국 내는 물론 전 세계적으로도 실추된 것은 분명한 것 같다. 엘리자베스 여왕의 손자인 윌리엄 왕자가 2011년 결혼을 했는데 그것이 전 세계로 방영이 되었다. 대단한 결혼식이 거행되었는데 한쪽에서는 영국 왕실을 규탄하는 시위도 벌어지기도 했다. 그리고 애초에 영국의 방송과 왕실이 기대했던 것보다 결혼식 방송의 시청률이 나오지 않았다는 후문도 들렸었다.

아무튼 엘리자베스 여왕은 아직도 건재하다. 몇 년 전에는 한국을 방문해 배우 류시원을 만나고 가기도 했고 여전히 영연방 여러 나라에서는 그녀를 향한 기도와 응원이 끊이지 않고 있다. 왕조가 100여 년 전에 이미 무너진 한국 사람인 나로서는 왕실, 여왕 뭐 이런 단어들 자체가 구리고 지루하지만 그들을 싫어하고 비판하는 사람만큼 그들을 응원하고 지지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여전히 영국 왕실이 유지되고 있는 것은 사실인 듯하다.

 

“엘리자베스는 반세기가 넘는 집정기간 동안 열한 명의 수상을 경험했고 그들 모두를 절친한 친구로 만들었다.” (p.550)

 

이 책의 저자는 중국인인데 역사를 주제로 한 책을 쓰는 사람이 다소 자신의 의견을 단정하는 듯한 느낌을 책을 읽으면서 여러 번 받게 되는데 위의 부분도 그렇다. 엘리자베스 여왕이 반세기가 넘는 오랜 집정 동안 열한 명의 수상과 모두 절친했다는 사실은 도대체 어떤 근거로 판단했는지 궁금했다. 아무리 왕이라고 해도 11명의 수상모두가 그 왕을 지지하거나 나아가서 절친한 친구가 되었을 리 만무한데 말이다. 이런 좀 의아한 서술은 다른 여왕에 대한 파트에서도 몇 차례 보인다. 그냥 역사를 소재로 한 픽션이라면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수 있겠지만 이 책은 그 어디에서도 ‘이 책은 픽션입니다.’라고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사소한 부분이라도 짚고 넘어가고 쉽게 단정하지 않아야 하는데 이런 부분은 조금 아쉽다. 아니, 영국의 왕실에서 각 분야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친 사람에게 기사 작위를 주는 오랜 전통이 있는데 그것을 거부하는 사람도 많은 세상에 무슨 열한 명 수상 모두가 여왕과 절친이 된다는 말인지... 웃음이 나온다.

 

 

책에서는 총 12명의 여왕에 대해 소개한다. 앞서도 말했지만 얼굴도 알고 가장 친숙한 여왕은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이었고 가장 흥미로웠던 여왕은 로마제국의 아그리파나 여왕이었다. 그녀는 그녀보다 더 유명한 네로 황제의 어머니다. 여러 번 책이나 다른 매체를 통해 이름을 들어봤는데 네로를 더 기억하는 특성 상 그녀의 정확한 정체를 기억하고 있지 못했는데 이 책을 통해 흥미롭게 더 알게 되었다.

 

<아그리파나>

“윤리적으로 보아 남매지간인 옥타비아와 네로는 결혼할 수 없었다. 하지만 어머니 세대에서 이미 그 윤리는 헌신짝처럼 버려졌다. 도덕이란 신민의 발목을 죄는 수단일 뿐, 황족들에게 있어서는 권력이 첫 번째 생존수단이었다.” (p.83)

 

책에서의 소개만 놓고 보자면 아그리파나는 악독한 여왕이자 무시무시한 여자였던 것으로 보인다. 역사적 팩트가 얼마만큼 확인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적어도 이 책에서의 서술만 보면 정말 이런 못된 사람이 없을 정도이다. 비천한 신분과 불안하게 붙어 있는 촛불만큼이나 희미한 존재로 연명하던 그녀가 권력을 갖기 위해 얼마나 비열하고 악독하며 고약한 짓을 저질렀는지 책에서는 자세하게 그려진다. 더욱이 한국 정치사의 가장 큰 해악인 기회주의자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조금이라도 힘이 세고 아그리파나 그녀 자신을 지켜줄 수 있다고 판단되면 배신과 반목을 반복했다. 악전고투 끝에 권력을 쟁취한 후에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조차 정치적으로 이용한다. 그녀의 유일한 아들이자 미래에 제국의 권력을 거머쥘지도 모를 네로를 방치하다가 필요할 때 이용한 것이다. 저자의 표현처럼 권력이라면 아들이고 뭐고 없이 모조리 자신을 위해 이용한 사람이었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오히려 네로가 불쌍하게 여겨질 정도였다. 역사에 존재하는 무수한 왕 중에서 가장 악독한 최악의 왕이 네로인데도 말이다. 얼마나 어린 시절부터 제대로 엄마 사랑 받지 못하고 유년시절 가장 큰 영향을 받을 엄마가 저 지경이니 어린 네로가 제대로 성장하는 것을 기대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 되었다.

네로는 그 엄마를 닮아 악독의 악독을 저지르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악독한 짓은 자신의 어머니를 살해한 것이었다. 아그리파나는 아들에 의해 죽게 된다.

 

“네로는 세 차례나 독약으로 살해를 기도했으나 아그리파나는 번번이 해독약을 먹고 깨어났다. 그녀 역시 모든 공격에 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p.100)

 

어머니를 죽이기 위해 독약을 사용했다. 더 황당한 것은 아그리파나도 ‘아~ 아들놈이 나를 죽이겠구나.’ 생각을 하고 있어서 아들의 모든 공격에 대비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무슨 게임하는 것도 아니고 뭐하자는 것인지. 독약으로 살해를 시도하는 것은 물론 건물을 일부러 무너뜨리기도 했다고 한다. 하루빨리 어머니를 죽여야겠다는 생각으로 가득찬 네로였다. 결국 자객을 통해 어머니를 죽인다. 이후 아그리파나의 섭정에서 벗어난 네로는 예의 어머니가 그랬던 것보다 더 악독하고 악랄하게 로마를 다스린다. 그리고 후대에 가장 최악의 왕으로 불리게 된다.

애초에 처음부터 악하게 태어난 사람이 있을까? 나는 없다고 생각한다. 순수 그자체로 가득찬 아주 어린 아이의 눈동자를 보고 있으면 더욱 그렇다. 아그리파나도 그녀의 인생 처음부터 악한 사람은 분명히 아니었을 것이다. 책에서는 그녀의 유년시절이나 집안 배경에 대해서는 소개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자세한 내막을 모르지만 분명히 어떤 계기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책에서는 그녀의 결혼 생활이 불행했고 그 불행을 통해 내면의 고통을 분노와 권력욕으로 분출시킨 것으로 묘사하는데 그 고통이 얼마나 그녀 개인에게 절대였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어떤 개인도 처음부터 악하지는 않다고 믿고 싶다. 그녀가 행복한 결혼 생활을 영위하고 네로에게 어머니의 사랑을 가득 심어줬다면 역사는 달라졌을 지도 모를 일이다. 아! 그러면 아그리파나에게 권력욕이 없었을 것이고 그렇다면 네로도 황제가 될 수 없었을지도 모를 일이구나~ 그래서 역사에는 'IF'가 없다고 하는 것이다^^;;

 

 

엘리자베스 여왕과 아그리파나를 제외한 10명의 여왕에 대한 부분은 그다지 인상 깊지 않았다. <클레오파트라>, <측천무후>, <이사벨 1세>, <엘리자베스 1세>, <효장문황후>, <크리스티나 여왕>, <마리아 테제리아>, <예카테리나 2세>, <빅토리아 여왕>, <서태후>

 

측천무후가 중국 역사 속에 등장하는 총 564명의 황제 중 유일한 여황제였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그리고 청나라의 여황제였던 효장문황후를 소개하는 부분에서 또 하나 저자의 실수를 지적하고 싶은데, 몽골을 몽고로 표현한 것이다. 몽고는 중국이 몽골을 복속하면서 몽골과 몽골인들을 비하하는 표현으로 쓴 것이다. 그것이 다른 나라에도 그래도 전해져서 아직도 TV나 예능 프로그램에서 몽골을 ‘몽고’라고 표현하는 실수를 범한다. 저자의 실수인지 중국 사람이라 몽고로 표현하는 것이 당연해서 아무렇지 않게 표현한 것인지 의도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만약 원 저작에 몽고라고 표현되어 있었다면 출판사에서 번역을 하고 편집을 할 때 수정했더라면 더 좋지 않았을까 싶다. 참고로 몽골 사람들은 자신들을 몽고인이라 지칭하고 자신들의 국가를 몽고라고 표현하는 것을 아주 싫어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자크 아탈리, 등대 - 공자에서 아리스토텔레스까지 우리에게 빛이 된 23인
자크 아탈리 지음, 이효숙 옮김 / 청림출판 / 2013년 10월
평점 :
절판


이미 세계적인 석학의 반열에 오른 자크 아탈리는 잘난 척을 해도 충분한 사람이다. 그가 연구하고 공부하는 학문 분야에서는 일류 사상가로 평가 받고 있다. 잘난 척 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직장 동료나 친구를 만나 이야기 나누는 것의 상당수는 내자랑인 경우가 많다. 사람에 따라 허풍이 첨가되기도 하고 과장이 추가되기도 한다. 징병제를 채택하고 있는 한국의 군대를 다녀 온 남자들의 내자랑질은 피라미를 잡아도 월척 참붕어를 잡았다고 하는 낚시꾼들의 내자랑질 만큼이나 대단들 하다. 프랑스 사람인 자크 아탈리의 책이 번역되어 이역만리 한국에서 내가 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는 자랑질과 잘난 척을 하기에 충분하다. 그런데 이 책 「자크 아탈리, 등대」는 그가 인생 항해의 등대로 삼은 23인의 지혜를 담은 책이다. 등대는 쉽게 쓸 수 없는 표현이다. 군 생활을 해안소초에서 했다. 나는 소초장이었기 때문에 매일 같이 해안절벽을 따라 이어진 순찰로를 걸었다. 일정한 간격으로 등이 설치되어 있기는 하지만 산길이라 캄캄한 곳이 더 많았다. 순찰로를 따라 병사들이 해안경계를 하는 초소가 있고 혹시나 나타날지도 모를 잠수함이나 잠수정을 감시하기 위해 탐조등이 설치되어 있는 초소가 있었다. 매일 밤 근무마다 탐조등을 일정 시간 동안 켜게 되는데 전원을 켜고 시동을 걸면 잠시 후 암흑천지의 바다를 향해 밝은 빛이 순식간에 발사된다. 조도가 어느 정도인지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옆에서 그 탐조등을 운용하면서도 눈이 부실 정도다. 암흑천지인 밤바다에 한줄기 빛이 비춰지면 그 탐조등 빛 아래로 환하게 새 세상이 펼쳐진다. 암흑 속에서는 전혀 볼 수 없었던 것들 말이다. 등대도 동일하다. 평상시나 비상시에 항구를 찾아 접안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 등대다. 평상시도 그렇지만 비상시에 저 멀리 육지 근처에서 보이는 등대 불빛은 반가움 이상이다. 비록 한 번도 배를 타고 등대불빛을 따라 항구에 접안해 본 적은 없지만 군 시절 경험을 돌이켜 보며 비슷한 감흥을 담아 본다.

일단 저자 자신이 책에 소개된 23명을 등대, 빛이라고 표현한다. 자신의 분야에서 어느 정도 성취를 이루고 많은 사람들이 그의 사상에 동의하고 그 사상을 따르고 있다. 자기 것으로 챙겨 버린다 해도 왈가왈부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런 의미에서 자크 아탈리는 겸손한 사람이다.

 

 

“대단한 지식을 가진 농민들, 힘들게 노력하는 노동자들, 청렴한 공무원들, 천재적인 장인들, 열정적인 초등학교 교사들, 우리의 자유와 안녕을 위해 자신의 삶을 희생한 잊힌 영웅들” (p.7)

 

더 나아가서 그는 대단한 사람들을 찾는 여정이 아님을 전제한다. 물론, 책에 실린 23명 중 이미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람들이 많다. 반대로 한 번도 이름을 들어보지 못한 사람도 많다. 위인전에서도 역사서에서도 발견하지 못한 사람들이다. TV에서 종종 기적과 같은 선행이나 공공의 행복을 위해 사적인 욕망을 누르고 헌신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게 된다. 그런 사람들을 볼 때마다 우리는 어김없이 존경과 찬탄을 아끼지 않는다. 자크 아탈리는 그런 일상에서 일탈된 이상의 인물들에게만 현혹되지 않을 것을 주문한다. 바로 우리네 삶 지근거리에서 함께 살고 있는 이웃과 노동자들, 공무원들, 교사들, 그리고 이름도 없이 유명세도 전혀 없이 헌신하며 살아가는 많은 영웅들을 기억할 것을 이야기 한다. 그가 비록 이 책에서 소개한 사람들은 비범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지만 자신의 책보다 바로 주위의 영웅들을 지켜내고 발견할 것을 강조 한다.

 

 

이 책은 <공자>에서부터 아프리카의 현자 <함파테 바>에 이르는 23명의 등대들의 삶을 간략하게 소개하고 있다. 가장 흥미로웠던 인물은 독일의 <발터 라테나우>였다.

 

“그 인물이 끼친 마력이 그가 죽고 난 뒤에도 며칠 지속되었으며, 그 며칠 동안 내가 결코 겪어본 적이 없는 것이 만연했는데, 그것은 진정으로 혁명적인 분위기였다. 수십만 명의 사람들이 아무런 강요나 위협을 받지 않은 채 장례식에 참석했다. 그 후 그들은 흩어지지 않고 몇 시간 동안 거리거리를 돌아다녔다. 끝도 없는 행렬들이 침울하게 묵묵히 뭔가 요구를 하는 것 같은 모습으로…….” (p.574)

 

<발터 라테나우> 는 전후 독일의 재건·외무장관을 지낸 정치인이자 경제학자, 기업가였다. 그는 1차 세계대전 후 독일을 정비한 인물이다. 당시 강대했던 연합국들 속에서 뛰어난 외교적 수완을 발휘했다. 더불어 전후 독일의 체제를 일신하고 국민들의 마음을 한 데 모으는데 성공했다. 그가 유대인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독일의 실제 정치에 뛰어 들어 성공적으로 국정을 운영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고 한다. 더군다나 나치가 스멀스멀 힘을 집중하고 있던 때라 국수주의자들과 우익의 위협이 대단했었다. 그는 유대인이라는 민족적 정체성보다 조국 독일의 근대화와 독일 국민의 삶을 위해 노력한 인물이다. 결국 그는 집무실로 향하던 중 우익 광신자에게 암살되고 마는데, 그가 힘든 민족적, 정치적 경계에서도 조국과 독일 국민을 위해 노력해 준 것을 국민들은 잊지 않았다. 더 많은 일을 해야 할 사람이고 할 수 있는 사람이 허망하게 죽어버린 것에 대한 슬픔과 분노, 그가 생전에 행한 일들에 대한 칭송과 존경을 담은 행동을 보여 준다.

나는 이 부분에서 고(故)노무현 전 대통령의 노제가 오버랩 되었다. 노대통령이 서거한 후 500백만 명의 사람들이 조문했고 그를 추모했다. 그의 마지막 가는 길에는 수십만의 인파가 모여 노제를 지냈다. 어떤 형태로든 노란색을 상징하는 것을 가지고 그를 떠나보냈다. 비록 실제 현장에는 가지 못했고 TV를 통해서 노제를 지켜봤는데, <발터 라테나우>를 떠나보내던 독일 국민들의 그 모습과 유사했었다고 생각된다. 

이후 독일은 나치가 집권하고 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으며 홀로코스트를 저질렀다. 씻을 수 없는 역사의 죄인이 된 것이다.

노대통령 서거 후 이명박씨와 박근혜씨가 대통령이 되었다. 역사의 시계가 어디로 가고 있는 지 모르겠다. 독일과 같은 역사의 죄인이 되지는 않았으면 싶다.

 

 

또 흥미로웠던 인물은 <이븐 루슈드>이다.

“신이 자신의 고유한 본질을 파악하면서 겪는 즐거움이, 우리의 지성이 신의 고유한 본질을 파악하는 순간에, 즉 지성이 자신의 힘을 포기하는 순간에, 우리 자신이 발견케 되는 즐거움과 같다면, 우리를 위해서는 짧은 순간 존재하는 것이 신을 위해서는 영원히 존재한다.” (p.189)

 

<이븐 루슈드>는 13세기 이슬람의 철학자이자 의사였다. 이슬람 철학사를 통틀어 가장 뛰어난 철학자로 평가 되는 사람이다. 의학과 철학, 신학에 탁월한 능력을 보였다고 한다. 그는 이슬람교인이고 나는 기독교인이다. 그가 그의 신을 찾는 과정에서 나온 고민의 흔적이 고스란히 내게도 전해져 놀라웠다. 알 듯 모를 듯한 저 문장에서 괜한 위안을 얻는다. 정확하게 어떤 느낌인지, 어떤 위안인지 설명하기는 다소 어렵지만 반복해 읽을수록 쉽게 다가갈 수 없는 깨달음임은 분명한 것 같다. 나도 종교인이기 때문에 고민이 많다. 기독교인 중에서는 큰 고민 없이 그저 교단에서 주입하는 도그마에 빠져 애면글면 복과 은혜만 구걸하고 강요하는 신자가 많다. 나도 아주 어릴 때부터 교회를 다녔으면 그런 신자가 되었을 수도 있겠지만 다행히 어른이 되어 제대로 된 기독교 신자가 되었던 터라 늘 고민을 안고 산다. ‘내가 믿는 신은 무엇인가? 나는 무엇을 위해 사는가? 나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하나? 이 세상은 왜 이런 것일까? 천국은 있는 것일까? 구원은 무엇인가?’ 등등. 수도 없는 고민과 마주한다. 때로는 불일 듯 끓어오르는 깨달음에 환희를 경험하기도 하고 때로는 주체할 수 없는 비관과 절망에 지쳐 잠도 들지 못할 때도 많았다. 이제 조금, 아주 조금 내 신앙에 대한 나름의 정립을 할 수 있게 되었지만 아직 멀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븐 루슈드>의 깨달음은 신을 마주한 단독자로서의 ‘나’가 무엇인지, 신을 믿는 나를 마주한 절대자로서의 ‘신’이 무엇인지 아주 조금은 깨달을 수 있는 혹은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었다. 그래서 뜬금없이 700년 전 사람의 글에서 위안을 얻은 것인지 모른다.

 

 

다음은 아프리카의 현자 <함파테 바> 이다.

“함파테는 독립을 위해 시작되는 전투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 그는 평생토록 이야기꾼들의 이야기들을 수집하면서 아프리카의 정체성의 보물을 보호하려 애를 쓴다.” (p.724)

 

그는 아프리카를 사랑한 사람이다. 아프리카에 사는 흑인들과 그 흑인들과 함께 살아가는 동물과 식물, 바람과 흙, 물과 공기 모두를 사랑한 사람이다.

아프리카의 근대는 상처와 아픔의 역사다. 평화롭게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가던 사람들이 제국주의자들의 총과 칼 아래 나뉘어 졌다. 종족과 종교는 화합이 아닌 갈등의 씨가 되었다. 자로 그은 듯 일직선으로 국경이 갈라져 제국주의 국가의 밥이 되었다. 수백, 수천 년을 아름답고 긴 두 다리와 두 팔로 자유롭게 뛰어 다닌 아프리카 흑인들은 갑자기 노예가 되었다. 얼굴이 하얀 사람들이 주인이 되었다.

<함파테 바>는 아프리카와 아프리카의 흑인, 그 흑인들과 함께 사는 모든 생명체를 노래한 사람이다. 그 이야기를 전하기 위해 그의 평생을 헌신한 사람이다. 아프리카 흑인의 특성 상 구술문화가 발달했기 때문에 기록하고 남기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그는 평생에 걸쳐 찾아다니고 쫓아다니며 아프리카의 이야기를 세상으로 알렸다. 가까이 있을 때는 소중함을 모르는 것이 문화와 역사다. 당연한 듯 소홀히 하면 있는 줄도 모르게 된다. 하지만 막상 없어져 버리면 쉽게 돌이킬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어떻게 망가져 버린 역사와 문화를 손쉽게 재생할 수 있나.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함파테 바>는 종족간의 분쟁과 종교 간의 전쟁도 강대국들의 수탈도 그의 신념보다 중요하지 않았다.

 

“아프리카에서는 한 노인이 죽으면, 그것은 도서관 하나가 불타버린 것이다.” (p.709)

 

그래서 이런 명언을 남길 수 있었을 것이다. 아프리카의 한 노인이 도서관 하나의 지혜와 이야기를 담고 있다는 생각을 쉽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가볍게 여기면 한 없이 가벼운 한 존재의 소멸일 뿐이다. 하지만 그에게는 생살을 잘라내는 고통이었던 것 같다.

갑자기 사투리 생각이 난다. 나는 경북 포항이 고향인데 대구 사투리와 포항 사투리와 다르다는 것을 대학에 와서 처음 알았다. 더 놀라웠던 것은 대학에서 만난 안동, 문경, 영주, 울진 사람들 사투리가 모두 다르다는 것이었다. 같은 경상북도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라고 믿기 힘들 정도로 억양이 달랐다. 점점 사투리가 사라지는 추세라고 한다. 후손에 후손이 이어지면 언젠가 사투리가 사라질지도 모른다고 한다. 워낙 교통과 통신이 발달하고 지역 간 세대 간 소통이 마음만 먹으면 불가능할 것이 없는 세상이다 보니 전통 사투리가 많이 사라지고 있다. 포항만 해도 정말 해안가 포항 토박이들이 하는 사투리가 많이 사라졌다. 다른 지역 사람들의 유입이 수십 년에 걸쳐 일어나다 보니 진짜 포항 사투리를 듣기가 어렵다.

<함파테 바>가 아프리카 노인의 죽음을 안타까워했던 것처럼 언젠가 정통 사투리를 구사하는 노인들을 찾아다니며 녹음을 해야 하는 순간이 올지도 모른다.

 

 

다음은 유명한 <토머스 에디슨> 이다.

“에디슨은 1931년 10월 18일 자신의 작업장에서 여든 세 살의 나이로 죽음을 맞는다. 그는 그때 고무 제조를 목적으로 1만 7,000여종의 식물을 테스트하고 있는 중이었다. 사흘 후인 10월 21일, 미국에서 놀라운 창의성을 구현한 에디슨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미국 전체가 1분 동안 완전한 암흑이 된다.” (p.610)

 

에디슨은 위인전으로나 다른 많은 기회를 통해서 익히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단지 자크 아탈리에게 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도 그의 위인전을 읽고 과학자, 발명가의 꿈을 꾼 사람들이 엄청날 것이다. 1%의 영감과 99%의 노력으로 이루어 낸 그의 일생은 상업 광고의 카피문구로 사용되기도 할 만큼 우리는 에디슨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고 있다. 그런데 참 놓치기 쉬운 부분이 이런 사람들의 죽음과 그 이후다. 에디슨이 어떤 유년 시절을 보냈고(이것이 비싼 위인전 세트를 사는 가장 큰 이유다. ‘OO야 너도 에디슨처럼 말이야~’라고 말하기 위해서) 어떤 것을 발명하기 위해 어떤 실패를 했고 결국 엄청난 것들을 발견했는지에 대해서만 주목하기 마련이다. 막상 에디슨의 죽음에 대해서는 거의 기억을 하지 못한다. 위인전에서 다루는 비중도 적고 엄마들이 중요하게 여기지 않으니까.

나도 이 책을 읽고 에디슨의 죽음과 뒤의 감동적인 에피소드를 알게 되었다. 그는 세계적인 위인인 만큼 죽기 직전에도 연구를 하고 있었다고 한다. 대단하다. 자기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을 찾는 사람도 드물고 그 일을 돈을 벌면서 하는 사람들은 더 드문 세상에 에디슨의 말년은 정말 이상적이다. 물론, 그가 겪은 수많은 실패와 주변의 비웃음까지 이상적이지는 않지만 어쨌든 인생의 마지막이 멋지다. 그리고 에디슨에 대한 경의의 표시로 미국 전체가 1분 동안 완전한 암흑이 되었다고 한다. 비록 에디슨은 그런 극적인 이벤트를 직접 볼 수는 없었지만 그 이벤트에 참석한 미국인들의 가슴 속에는 분명하게 각인되었을 것이다. 한 사람의 죽음을 기리고 그 사람에 대한 존경과 사랑의 의미로 완전히 암흑을 만든 경험 말이다. 자신의 자식들에게, 그 자식의 자식들에게 자랑하고 또 자랑했을 것으로 추측해 본다.

모두가 에디슨처럼 극적이고 감동적으로 인생을 마감할 수는 없다. 당장 내일, 다음 달 생활에 대한 공포로 하루를 살고 있는 세상이다. 에디슨의 100분의 1은 고사하고 평안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을지도 미지수다. 암환자가 급속도로 증가하고 각종 사고와 재난이 난무하는 세상이다. 그래도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이름이 남겨지기를 원한다. 누군가는 사회적 성공을 이뤄내 애쓰지 않아도 이름이 알려지기도 하겠지만 대부분은 아니다. 그래도 욕심은 부리라고 있는 것이다. 이 책에서 자크 아탈리의 등대가 된 23명의 인물들처럼 우리도 어떤 단 한 사람의 등대가 될 수 있다. 거창한 것이 아닐지라도 말이다. 다른 것 다 제쳐두고 내 아이에게 그런 존재가 될 수 있다면 자크 아탈리의 23개의 등대들 보다 더 값지고 빛난 인생이 될 수 있을 거라 생각 한다. 말처럼 쉽지 않고, 아니 엄청나게 힘든 일임이 분명하지만 욕심을 부리고 노력해야 한다. 나도 내년 봄에 태어날 아이의 든든한 등대가 될 수 있도록 매일의 일상에서 최선을 다해야 한다.

 

책에는 내가 소개한 인물들 말고도 <공자>, <아리스토텔레스>, <아소카>, <바이티우스>, <힐데가르트 폰 빙엔>, <마이모니데스>, <토마스 아퀴나스>, <조르다노 브루노>, <카라바조>, <토머스 홉스>, <스탈 부인>, <시몬 볼리바르>, <찰스 다윈>, <압델카데르>, <월트 휘트먼>, <슈리마드 라즈찬드라>, <마리타 츠베타예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호치민>과 같은 시대의 등대가 되고 자크 아탈리 개인에게도 등대가 된 사람들이 소개 된다. 읽는 이에 따라 기억에 남고 다른 이들에게 소개하고 싶은 등대는 다를 것이다. 누가 더하고 덜하다고 판단할 수 없다. 다만, 나도. 당신도. 누군가에게. 그 누군가에게 등대가 되는 사람들이기를 바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