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서리에서의 사유 - 청년 문화연구가 최태섭의 삐딱하게 세상 보기
최태섭 지음 / 알마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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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이 넘치는 세상이다. 원하는 대로 손바닥 안에서 세상을 만날 수 있고 또 원하는 대로 손바닥 안으로 세상을 만들 수 있다. 과학과 기술의 발전이 전 인류가 보유한 지식의 총량과 비례한다면 이미 그것은 포화 상태일 것이다. 자고 일어나면 새로운 것이 탄생하고 소멸하고 있다. 적어도 스마트폰이 대중화되기 이전에는 궁금하거나 모르는 것이 있으면 방에 있는 컴퓨터 전원을 켜고 익스플로러 아이콘을 더블 클릭해야 했다. 이제는 기다릴 필요가 없어 졌다. 4G, LTE, LTE-A 무슨 새로운 별을 찾아 이름을 붙이는 것처럼 코드화 된 발명품들이 쏟아진다. 하염없이 그것들의 세례를 받다보면 나도 지식인 너도 지식인이 된다. 적어도 나보다 더 많은 지식과 정보를 가지고 있는 사람 혹은 사람들에 대한 존중이 희박해져 간다. 당연한 이치다. 거추장스러운 예절과 격식을 차려 면을 대하는 부담스러움을 감수하면서 그 지식인의 입을 쳐다볼 필요가 없다. 동일한 주제에 대해 초등학생이든 대학생이든 비슷한 답을 찾게 되었다.

이런 세상에서 기존의 지식인들이 설 자리는 점차 줄어들고 있다. 오죽하면 학위논문의 표절여부만 파헤쳐대고 있는 인간들도 있으니 말이다. 방송을 보거나 강의를 듣거나 하는 등의 외부의 모든 자극과 정보에 대해서 나와 너는, 우리는 손바닥 안에서 확인해 볼 수 있다. 저 자식이 사실을 말하고 있는지, 대충 비슷하게 얼버무리고 있는지, 아예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 학교에서는 핸드폰에 중독된 아이들을 구제하기 위해서 아침 일찍 핸드폰을 수거 했다가 아이들이 집에 갈 때 쯤 다시 나눠준다고 하지만 그것보다는 아이들의 손바닥 안에서 자신들의 오래된 지식들이 모래성처럼 와르르 무너질 것을 두려워한 탓으로 보인다. 뭐, 그것조차 교권신장의 일환으로 핏대를 세운다면 들어줄 용의는 있다. 물론, 동의는 하지 않지만.

 

다이내믹 코리아에는 매일 사건 사고가 넘쳐난다. 50여일 후에는 지난 대선 1주년이 되는 시점임에도 여전히 국가기관의 대선개입에 대한 규명의 구멍조차 찾지 못한 실정이다. ‘음모는 음모론으로 두고 살기는 하자.’라는 태평한 아저씨들 놀음인지, ‘국가를 뒤흔들 중차대한 일이지만 내 밥줄하고는 상관없다.’라는 죽을 둥 살 둥 오늘도 턱까지 숨이 차오른 아저씨들 놀음은지 모르겠지만 일은 일대로 벌어지고 있고 쇼는 쇼대로 벌어지고 있다.

 

 

“프랑스의 사회학자인 장 보드리야르는 실재가 사라진 곳을 대체하는 ‘원본도 사실성도 없는’ 이미지들을 일컬어 하이퍼리얼리티(Hyperreality)라고 일컬었다.” (p.20)

 

‘하이퍼리얼리티’가 다이내믹 코리아를 대체할 수 있는 유일한 표현일 듯 하다.

‘하이퍼리얼리티코리아’

 

 

이 책은 최태섭이라는 젊은 지식인이 썼다. 논객이라 해도 무방할 것 같고 책에서의 표현처럼 문화평론가라 해도 무방할 것 같다. 한윤형, 허지웅, 이택광, 박권일과 더불어 젊은 지식인들로 분류해도 무방할 것 같다. 자꾸만 ‘것 같다.’라고 하는 것은 저들을 통칭한 적절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고 어디에서도 저들을 한 데 묶어 명명하지 않아서이다. 개인적으로 판단하기에 진중권, 고종석, 강준만 세대와는 다른 이들이다. 386세대의 덤프에서 벗어난 이들이다. 좀 더 자유롭고(여기서의 자유롭다는 의미가 리버럴하다는 것은 아니다) 발랄하다고 해야 할까. 기존의 지식인이라 불리던 이들과 신체적 세대차이도 나거니와 정신적 세대차이도 난다.

그렇다고 딱히 이들을 좋아하거나 이들의 칼럼을 찾아 읽거나 이들의 트윗을 쫓아다니지는 않는다. 386과는 다른 이들의 신선함이 오히려 더 위선으로 느껴질 때가 많다. 진보 진영의 가장 큰 문제라고 생각하는 입진보의 모습이 이들에게서도 여지없이 보일 때가 있기 때문이다. 투사로서의 이미지,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온 몸으로 떠안은 순교자의 이미지에서는 벗어났지만 그것이 오히려 이들의 논리 구조에 치명적인 결여를 내포한다.

 

 

“지금 우리에게는 기준으로 삼고 있었던 낡은 것들이 사라지고 무너져가고, 새로운 것은 아직 만들어지지 않은 막막한 상황이 놓여 있다. 그리고 그 막막함 속에서 자신의 불만과 불안을 감당하지 못하는 이들은 폭주를 시작한다. 이들은 반MB를 외치며, 한미FTA를 반대하고, 불법체류자와 이주노동자의 범죄를 규탄하며 그들을 추방해야 한다고 말한다. 또 이들은 버스 무릎녀와 된장녀와 김여사를 욕하고, 나꼼수를 들으면서 그들의 발목을 잡는 진보 지식인과 언론들에게 야유를 보낸다. 이들은 스스로를 진보나 중도라고 대답하는 70퍼센트이고, 일관되지 않은 파편적 인식 속에서 눈앞의 정의를 요구하는 성마른 사람들이다.” (p.234)

 

진보라고 해서 무조건 비판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힘도 없는 진보끼리 허물을 덮어줘야 한다는 것은 이미 진보임을 포기하는 것이다. 양비론이 아닌 양날을 베이지 않고 타기 위해서는 나름의 가치판단이 중요하다. 한국 땅에서 자칭 진보를 가치 이념으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어느 쪽이든 100% 맞다는 확신을 하며 동의하는 실수를 범해서는 안 된다. NL계열 중에서도 꼴통들이 민노당에 이미 존재하고 있음을 참여당과 진보당 사람들은 몰랐을까? 그럴 리 없다. 어색한 동거를 하며 묻어 간 것이었다. 나꼼수가 선풍적인 인기를 얻으며 마음 둘 곳 없던 대중을 끌어당겼을 때, 진보진영 내부에서는 아예 듣지도 않고 나꼼수와 그 팬덤을 분석하고 있었을까? 그럴 리 없다. 걱정과 설렘을 동시에 가진 채 지켜봤을 것이다.

그런데 최태섭씨의 접근은 이러한 균형을 갖고 있지 않다. 이것은 지난 대선 전후 그리고 지금까지 이른 바 ‘내가 좀 아는데’하는 자들이 ‘빠’와 ‘까’로 표현하거나 ‘깨시민’으로 비아냥대는 구조와 동일하다. 반MB를 외치며 한미FTA를 반대하는 이들이 불법체류자와 이주노동자의 범죄를 규탄하며 그들을 추방해야 한다고 말한다는 논리구조는 어떻게 만들어낸 것인지 이해할 수 없다. 실제로 나는 반MB와 한미FTA를 반대했지만 불법체류자와 이주노동자의 범죄를 규탄하며 그들을 추방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또한 버스 무릎녀와 된장녀를 비난하면서 나꼼수를 까는 지식인들에게 야유를 보내지 않았다.

흔히 지식인입네 하는 자들이 저지르는 일반화의 오류다. 내지는 자신의 머릿속에서만 맴도는 상상의 나래다. 저자가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만나 그들의 의견을 수치화해 통계를 정리한 뒤 쓴 글인지 모르겠지만 저렇게 간단하게 말할 수 있는 것으로 봐서는 대단한 작업을 한 것은 틀림없는 듯 하다. 그렇지 않고 저렇게 말한다는 것은 그 자신조차 나꼼수 팬덤과 무지몽매한 대중을 비아냥대는 것에 불과하다. 그의 표현대로 일관되지 않은 파편적 인식 속에서 대중을 판단하는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그것은 진보도 아니고 지식인도 아니다.

나는 우르르 몰려다니며 팬덤을 과시하고 비슷한 옷을 입고 있음에도 의견이 다르거나 우리를 비판한다는 이유로 무지막지하게 덤벼드는 사람들을 싫어한다. 동시에 그러한 경향을 자신은 마치 오래전부터 인식해 왔고 전체 대중의 비중에서 소수에 불과한 경향을 가지고 일반화 해 톡 튀어나오려는 입진보들의 발뺌도 싫어한다.

이제는 더 이상 지식인에게 의지하지 않는 세상이기 때문에 오히려 대중의 전체적인 흐름이 가장 선명한 가치 판단의 기준이 될 수도 있다. 반대로 가장 위험한 가치 판단의 기준이 될 수도 있다. 적어도 나는 어느 쪽이든 100% 확신을 하지 않는다. 이제까지 살아 온 삶의 지혜이기도 하다. 그런데 넘쳐나는 정보와 책과 인터넷에서는 100% 확신을 가진 자들이 많다. 보수진영에도 진보진영에도 심지어 어떠한 진영에도 기울어지지 않은 진영에서도 말이다.

 

 

물론, 이 책을 읽으며 최태섭씨의 의견 중 동의하는 부분이 많았다. 「잉여사회」를 쓴 사람답게 ‘잉여’라 지칭되는 존재가 한국의 자본주의에서 어떻게 태동하게 되었는지 구조적으로 접근한 안목은 신선했다.

 

이들은 무엇으로부터 남았는가? 그것은 우리 시대의 가장 강력하고 중요한 조건과 결부되어 있다. 즉 자본주의라는 조건 말이다. 다시 말해 그들은 자본이 필요로 하는 만큼의 노동력을 웃도는 존재들이다. 그러므로 자본은 그들을 내버려둔다. 물론 완전히 자유롭게 내버려두는 것은 아니다.”

“잉여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애쓰는 이들이 오늘날 청년들의 상당수를 차지한다. 그러나 이들이 얼마나 피나는 노력을 하는지와는 상관없이 착취 받을 수 있는 영광은 매우 적은 수에게만 허락되어 있다. 결국 이들이 쏟아 붓는 노력들은 마찬가지로 하나의 과잉을 형성한다.” (p.97)

 

 

그리고 IMF 이후 희한하고 천박한 자본주의 사회로 진화한 한국을 분석한 안목도 신선했다.

 

“IMF의 장학생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구조조정과 경제 회복에 성공한 한국 사회는 달라져 있었다.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가고, 정부는 삼성 장학생들이 장학했으며, 잘 먹고 잘사는 것에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되어 있는 가운데, 새로운 시대정신의 부지에는 속속들이 아파트가 들어섰다. 재테크의 광기는 계급과 계층을 막론하고 유행처럼 번져나갔고, 왕년의 혁명적 이론가였던 386들은 사교육 시장에서 열심히 돈을 쓸어 담았다.” (p.257)

 

이 책이 하나의 주제와 흐름을 가지고 쓴 장편소설과 같은 구조였다면 좀 더 좋은 책이 되지 않았을까 싶은데, 이 책은 최태섭씨의 여러 글을 엮은 것이다. 시기도 각각 다르고 그 글을 쓸 때마다 다른 상황에 놓였을 것이다. 그래서 이 책 한권을 읽고 최태섭씨가 어떤 사람인지 그의 글이 어떤 글인지 파악할 수는 없다. 좀 더 균형 있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의 다른 책들도 읽어봐야 한다.

 

 

나는 좋은 의미에서든 좋지 않은 의미에서든 지식인들이 많이 등장했으면 좋겠다. 책을 통해서 블로그나 SNS를 통해서 그들의 의견을 자유롭게 피력했으면 싶다. 아무리 과학과 기술이 발전하고 내 손바닥 안에서 세상이 만들어진다 할지라도 떠도는 먼지처럼 부유하는 정보와 지식을 한데 모아 설득력 있게 전달하는 창구는 반드시 필요하다. 그런 여과가 점차 사라지는 세상이 된다면 지독하게 살아 있는 지역감정 따위의 망령이 내 자식에게도 그 자식의 자식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세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분명히 잘못된 것이고 다분히 정치적인 것이며 전체 사회를 좀 먹는 것이라는 사실을 계속해서 외쳐 줄 지식인들이 필요하다. 혼자 방구석에서 지하철에서 버스에서 핸드폰만 들여다보고 있을 우리와 우리의 후손들에게도 파수꾼은 필요한 것이다.

다만 이들이 기존 지식인들처럼 너무 투사적이지도 비장하지도 않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오로지 까고 비아냥대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듣보잡들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이들이 처음 사회에 등장하며 보여줬던 발랄함과 신선함이 그대로 유지되었으면 한다.

하루살이들은 트윗 몇 줄 읽고 포털의 뉴스 헤드라인 몇 줄 읽으며 아등바등 하루를 산다. 무지몽매하고 한순간에 ‘빠’와 ‘까’로 비아냥을 듣는 하루살이들에게도 균형은 필요하다. 하루살이들의 요구과 욕망이 없다면 지식인들 나부랭이도 존재할 수 없다. 그것을 명심해야 한다.

여전히 제 잘난 맛들에만 산다면 그저 모서리 언저리에서 마스터베이션하는 꼴에 지나지 않으니 말이다.

대중은 어리석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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